로저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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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영국의 밴드인 듀란 듀란의 멤버에 대한 내용은 로저 테일러(듀란 듀란) 문서 참고하십시오.
영국의 록밴드 퀸의 드러머. 각종 타악기[9] , 백킹보컬 그리고 비주얼[10][11] 담당이다.
더싱엄에서 태어나 3살 때 콘월 주의 트루로로 이주하였으며, 7세에 친구들과 'the Bubblingover Boys'라는 작은 밴드를 만들기도 하는 등[12] 어릴 적부터 로큰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기타를 배우다가[13] 갑자기 드럼이 끌리게 되어 드럼을 쳤다고 한다. 1963년 로저는 제트 해리스와 토니 미함의 '다이아몬드'라는, 그가 굉장히 좋아했던 인기 음악의 악보를 샀는데 그 악보에는 베이스와 드럼의 코드가 적혀져 있었다. 아마 이것이 그가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다가 드럼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 결정적 계기라고 추측된다.(그는 1961년 그의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다 준 Ajax 사의 드럼 베이직 키트로 이미 꽤 드럼에 능숙한 편이었다.)
1960년 5월, 그는 여러 기독교 단체의 후원을 받는 400년 전통의 학교인 트루로 부속 성당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는데, 오직 200여명의 학생들 중 16명의 학생들만이 합창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로저 테일러는 그 합창단에 소속되어 일요일 세 번의 미사에 참여하여 노래를 부르고, 결혼식이나 크리스마스의 자정 미사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노래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로저는 훗날 퀸에서 백보컬을 맡게 된다.
로저는 어릴 적부터 진지하게(?) 뮤지션의 꿈을 키웠다고 전해진다. 학교에서 꽤 무기력하긴 했지만 그는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으로 유명한 학생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악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드럼이 그저 로저의 취미로 끝나기를 바랬다고 한다. 로저의 명석함을 낭비하는 것 같았다고.
런던 빈민가 출신이라는 설이 있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아버지인 마이클 테일러는 영국 식품 의학품 안정청(The Ministry of Food)에 소속된 공무원이었고, 킹슬린에서 태어난 로저가 트루로로 이사한 이유도 아버지의 발령 때문이었다. 그의 집은 시내 중심가에서 1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개인 테니스 코트가 달린 커다란 집이었고, 부모가 이혼한 후 옮긴 어머니의 집에도 배드민턴 코트가 있을 정도여서,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는 모든 면에서 고향 친구들과 비슷했지만, 콘월 사투리를 쓰지 않고 포쉬 악센트를 사용했다.
고향에서 Johnny Quale and The Reactions라는 밴드의 드러머로 본격적인 음악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이때 밴드의 보컬리스트 조니 퀘일(Johnny Quale)이 탈퇴하는 바람에 로저가 보컬 역을 떠맡게 되었다. 드러머인데도 불구하고 보컬 실력이 좋아서 이때부터 The Reactions에서 보컬과 드럼을 동시에 맡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프론트맨도 로저가 되었다. The Reactions 때의 사진을 보면 보통 밴드와는 다르게 드럼이 무대 맨 앞으로 나와있는걸 볼 수 있다. 나중에 퀸에서 보여주는 우월한 보컬&코러스 실력은 이때부터 형성되었다고 보면 될듯.
또래보다 한 뼘 더 작고 마르고 창백하고 말이 별로 없는 편이었지만, 유년기 시절부터 잘생긴 외모 덕분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The Reactions의 멤버들 사이에서 압도적 인기를 자랑했다고. 그렇게 The Reactions는 고향 지방에서 공연을 하며 명성과 실력을 쌓아나갔는데, 이때 푼돈 수준이기는 해도 입장료를 받고 공연을 했는데도 관객이 2~300명씩 들어오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67년 2월의 어느 날,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만다. 도브스 빌리지 홀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 The Reactions의 멤버들은 안개가 자욱하고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이동을 했어야 했는데, 로저는 갓 운전면허를 딴 상태였고 친구 대신 자신이 운전을 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운전 도중 로저는 전조등을 켜지 않고 운전을 해 길가에 반쯤 세워져있던 생선을 실은 차를 미처 보지 못해 그대로 박고 만다.
로저는 앞유리를 관통하고 날아갔지만 기적적으로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로저를 제외한 동승했던 멤버들의 상태는 심각했는데, 손과 코가 부러졌고,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고, 복부 내부의 부상을 입는 등 콘월의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단연코 가장 심한 부상을 당한 동승자는 피터 길-그레이라는 로저의 친구였는데, 사고가 났을 당시 차의 손잡이가 그를 관통하여 왼쪽 겨드랑이의 살이 크게 찢어져있었다. 폐에 구멍이 날 정도로 심각하게 부상을 입었고, 사고 후 오른손이 마비가 되어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약 1년간 병원에 입원한 동안 왼쪽으로 글씨 쓰는 법을 배우기도 했고 재차 수술을 받아 오른쪽 손의 엄지를 세울 정도까지는 되기는 했지만, 의사를 꿈꾸던 그가 결국 회계사로 꿈을 바꿔야 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로저는 다행히 몸에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에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피터의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는 잘못이 없었다고 말했지만, 로저는 주변인들의 위로와는 별개로 한동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 했다고 한다.
밴을 운전하다가 전조등을 키지 않아서 다른 차량과 충돌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로저가 아무 잘못이 없지는 않았고, 보드민 치안 법정의 소환장을 받고 경찰에 기소되었다. 생선 트럭 운전자였던 제라드 브로드가 비가 오고 어두운 날 후미등을 켜두지도 않은 채 부주의하게 자리를 떠난 일은 민사상의 문제로 이어졌고, 보험과 관련된 법정공방이 끝을 보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 특히 그 운전자는 고작 열 일곱살 밖에 안된 애가 공연 장비들을 실은 낡은 밴을 끌고 갔다는 사실을 이용해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고 했지만 결국 트럭 운전사가 책임을 지게 되었고 몇년에 걸친 로저의 고통은 끝이 났다. 데뷔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로저는 그 사고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기억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고 이후에는 The Reactions의 드럼을 맡은 로저와 기타리스트인 마이클 더들리가 각자 런던과 옥스퍼드로 진학하자, 밴드는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말았다.
언뜻 보기엔 놀기만 하는 얼굴천재 드러머로 보이지만 로저는 치의대 출신이다. 앞에서 언급한 고등학교때 난 차사고로 인한 심적 고통은 로저의 수험공부에 영향을 끼쳤는데, 줄곧 A를 받았던 생물학, 화학, 물리학 점수가 예전보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저의 성적은 여전히 런던 치의대에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14]
그러나 로저는 그다지 자신의 전공에 대해 관심이 없었는데, 이를 못마땅해 한 교수 중 한 명이 수업시간에 수업을 멈추고 로저에게 눈과 귀 사이에 있는 뼈가 무엇인지 급작스럽게 질문을 하자 로저는 관골(zygoma)이라는 정확한 대답을 한다. 그러자 교수는 그에게 관골이 그리스어로 뭐냐고 물어봤고 로저는 교수의 말도 안되는 꼬투리성 질문에 화가 났는지 "이게 치과 의사 시험이에요, 아니면 망할 그리스어 시험이에요?(Is this a dentist exam or a fucking Greek exam?)"라고 반문했다. 그 사건 이후에는 완전히 교수들의 눈 밖에 났다고. 하지만 과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는 멋쟁이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런던의 대학에서 수학중,[15] 드러머를 구하고 있던 브라이언 메이의 밴드 "Smile"의 오디션을 보게 된다. 이때 드러머를 구한다는 포스터[16] 를 보고 로저가 먼저 연락을 했는데, 브라이언은 자신이 원하는 드럼 스타일을 편지에 아주 장황하게 적어서 로저에게 부쳤다고 한다. 로저는 자신의 플랫에서 브라이언 메이와 팀 스타펠 앞에서 오디션을 봤고 둘 다 단박에 로저의 실력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17] 팀 스타펠이 "험피봉"이라는 그룹으로 옮겨가고 보컬이 비자 브라이언과 로저는 보컬을 구한다는 공고를 냈다. 이 때 프레디 머큐리가 이 그룹의 보컬로 활동을 하게 되고 약 1년 후 존 디콘도 합류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파격적인 이미지를 위해 팀 이름을 "Queen"으로 정했다.
사실 퀸에서 가장 먼저 솔로앨범을 낸 건 프레디가 아니라 로저다.[18] 1987년 프레디 머큐리의 건강 이상으로 순회공연을 할 수 없게 되자 퀸 멤버들의 동의를 얻어, 드러머가 아닌 리드 보컬로서 밴드 '더 크로스'를 조직한다. 프레디 머큐리 사망 이후 존 디콘이 은퇴하고 브라이언 메이와 함께 두 명이서 활동하고 있으며 지금도 투어를 돌고 있다.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 출연해 We will rock you의 그 유명한 드럼 박자 비트를 연주했다.
2020년 신년 서훈 명단(New Year Honours)에 올라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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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영국의 록밴드 퀸의 드러머. 각종 타악기[9] , 백킹보컬 그리고 비주얼[10][11] 담당이다.
2. 생애[편집]
더싱엄에서 태어나 3살 때 콘월 주의 트루로로 이주하였으며, 7세에 친구들과 'the Bubblingover Boys'라는 작은 밴드를 만들기도 하는 등[12] 어릴 적부터 로큰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 기타를 배우다가[13] 갑자기 드럼이 끌리게 되어 드럼을 쳤다고 한다. 1963년 로저는 제트 해리스와 토니 미함의 '다이아몬드'라는, 그가 굉장히 좋아했던 인기 음악의 악보를 샀는데 그 악보에는 베이스와 드럼의 코드가 적혀져 있었다. 아마 이것이 그가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다가 드럼으로 노선을 바꾸게 된 결정적 계기라고 추측된다.(그는 1961년 그의 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다 준 Ajax 사의 드럼 베이직 키트로 이미 꽤 드럼에 능숙한 편이었다.)
1960년 5월, 그는 여러 기독교 단체의 후원을 받는 400년 전통의 학교인 트루로 부속 성당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는데, 오직 200여명의 학생들 중 16명의 학생들만이 합창단에 들어갈 수 있었다. 로저 테일러는 그 합창단에 소속되어 일요일 세 번의 미사에 참여하여 노래를 부르고, 결혼식이나 크리스마스의 자정 미사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이렇게 노래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로저는 훗날 퀸에서 백보컬을 맡게 된다.
로저는 어릴 적부터 진지하게(?) 뮤지션의 꿈을 키웠다고 전해진다. 학교에서 꽤 무기력하긴 했지만 그는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으로 유명한 학생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음악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드럼이 그저 로저의 취미로 끝나기를 바랬다고 한다. 로저의 명석함을 낭비하는 것 같았다고.
런던 빈민가 출신이라는 설이 있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아버지인 마이클 테일러는 영국 식품 의학품 안정청(The Ministry of Food)에 소속된 공무원이었고, 킹슬린에서 태어난 로저가 트루로로 이사한 이유도 아버지의 발령 때문이었다. 그의 집은 시내 중심가에서 1마일도 떨어지지 않은 개인 테니스 코트가 달린 커다란 집이었고, 부모가 이혼한 후 옮긴 어머니의 집에도 배드민턴 코트가 있을 정도여서,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는 모든 면에서 고향 친구들과 비슷했지만, 콘월 사투리를 쓰지 않고 포쉬 악센트를 사용했다.
고향에서 Johnny Quale and The Reactions라는 밴드의 드러머로 본격적인 음악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이때 밴드의 보컬리스트 조니 퀘일(Johnny Quale)이 탈퇴하는 바람에 로저가 보컬 역을 떠맡게 되었다. 드러머인데도 불구하고 보컬 실력이 좋아서 이때부터 The Reactions에서 보컬과 드럼을 동시에 맡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프론트맨도 로저가 되었다. The Reactions 때의 사진을 보면 보통 밴드와는 다르게 드럼이 무대 맨 앞으로 나와있는걸 볼 수 있다. 나중에 퀸에서 보여주는 우월한 보컬&코러스 실력은 이때부터 형성되었다고 보면 될듯.
또래보다 한 뼘 더 작고 마르고 창백하고 말이 별로 없는 편이었지만, 유년기 시절부터 잘생긴 외모 덕분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The Reactions의 멤버들 사이에서 압도적 인기를 자랑했다고. 그렇게 The Reactions는 고향 지방에서 공연을 하며 명성과 실력을 쌓아나갔는데, 이때 푼돈 수준이기는 해도 입장료를 받고 공연을 했는데도 관객이 2~300명씩 들어오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67년 2월의 어느 날,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만다. 도브스 빌리지 홀에서 공연을 하기 위해 The Reactions의 멤버들은 안개가 자욱하고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이동을 했어야 했는데, 로저는 갓 운전면허를 딴 상태였고 친구 대신 자신이 운전을 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운전 도중 로저는 전조등을 켜지 않고 운전을 해 길가에 반쯤 세워져있던 생선을 실은 차를 미처 보지 못해 그대로 박고 만다.
로저는 앞유리를 관통하고 날아갔지만 기적적으로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로저를 제외한 동승했던 멤버들의 상태는 심각했는데, 손과 코가 부러졌고,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고, 복부 내부의 부상을 입는 등 콘월의 신문에 실릴 정도였다. 단연코 가장 심한 부상을 당한 동승자는 피터 길-그레이라는 로저의 친구였는데, 사고가 났을 당시 차의 손잡이가 그를 관통하여 왼쪽 겨드랑이의 살이 크게 찢어져있었다. 폐에 구멍이 날 정도로 심각하게 부상을 입었고, 사고 후 오른손이 마비가 되어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약 1년간 병원에 입원한 동안 왼쪽으로 글씨 쓰는 법을 배우기도 했고 재차 수술을 받아 오른쪽 손의 엄지를 세울 정도까지는 되기는 했지만, 의사를 꿈꾸던 그가 결국 회계사로 꿈을 바꿔야 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로저는 다행히 몸에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에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피터의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는 잘못이 없었다고 말했지만, 로저는 주변인들의 위로와는 별개로 한동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 했다고 한다.
밴을 운전하다가 전조등을 키지 않아서 다른 차량과 충돌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로저가 아무 잘못이 없지는 않았고, 보드민 치안 법정의 소환장을 받고 경찰에 기소되었다. 생선 트럭 운전자였던 제라드 브로드가 비가 오고 어두운 날 후미등을 켜두지도 않은 채 부주의하게 자리를 떠난 일은 민사상의 문제로 이어졌고, 보험과 관련된 법정공방이 끝을 보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 특히 그 운전자는 고작 열 일곱살 밖에 안된 애가 공연 장비들을 실은 낡은 밴을 끌고 갔다는 사실을 이용해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고 했지만 결국 트럭 운전사가 책임을 지게 되었고 몇년에 걸친 로저의 고통은 끝이 났다. 데뷔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로저는 그 사고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했던 기억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고 이후에는 The Reactions의 드럼을 맡은 로저와 기타리스트인 마이클 더들리가 각자 런던과 옥스퍼드로 진학하자, 밴드는 자연스럽게 해체되고 말았다.
언뜻 보기엔 놀기만 하는 얼굴천재 드러머로 보이지만 로저는 치의대 출신이다. 앞에서 언급한 고등학교때 난 차사고로 인한 심적 고통은 로저의 수험공부에 영향을 끼쳤는데, 줄곧 A를 받았던 생물학, 화학, 물리학 점수가 예전보다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저의 성적은 여전히 런던 치의대에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14]
그러나 로저는 그다지 자신의 전공에 대해 관심이 없었는데, 이를 못마땅해 한 교수 중 한 명이 수업시간에 수업을 멈추고 로저에게 눈과 귀 사이에 있는 뼈가 무엇인지 급작스럽게 질문을 하자 로저는 관골(zygoma)이라는 정확한 대답을 한다. 그러자 교수는 그에게 관골이 그리스어로 뭐냐고 물어봤고 로저는 교수의 말도 안되는 꼬투리성 질문에 화가 났는지 "이게 치과 의사 시험이에요, 아니면 망할 그리스어 시험이에요?(Is this a dentist exam or a fucking Greek exam?)"라고 반문했다. 그 사건 이후에는 완전히 교수들의 눈 밖에 났다고. 하지만 과에서 가장 예쁜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는 멋쟁이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런던의 대학에서 수학중,[15] 드러머를 구하고 있던 브라이언 메이의 밴드 "Smile"의 오디션을 보게 된다. 이때 드러머를 구한다는 포스터[16] 를 보고 로저가 먼저 연락을 했는데, 브라이언은 자신이 원하는 드럼 스타일을 편지에 아주 장황하게 적어서 로저에게 부쳤다고 한다. 로저는 자신의 플랫에서 브라이언 메이와 팀 스타펠 앞에서 오디션을 봤고 둘 다 단박에 로저의 실력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17] 팀 스타펠이 "험피봉"이라는 그룹으로 옮겨가고 보컬이 비자 브라이언과 로저는 보컬을 구한다는 공고를 냈다. 이 때 프레디 머큐리가 이 그룹의 보컬로 활동을 하게 되고 약 1년 후 존 디콘도 합류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파격적인 이미지를 위해 팀 이름을 "Queen"으로 정했다.
사실 퀸에서 가장 먼저 솔로앨범을 낸 건 프레디가 아니라 로저다.[18] 1987년 프레디 머큐리의 건강 이상으로 순회공연을 할 수 없게 되자 퀸 멤버들의 동의를 얻어, 드러머가 아닌 리드 보컬로서 밴드 '더 크로스'를 조직한다. 프레디 머큐리 사망 이후 존 디콘이 은퇴하고 브라이언 메이와 함께 두 명이서 활동하고 있으며 지금도 투어를 돌고 있다.
2012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 출연해 We will rock you의 그 유명한 드럼 박자 비트를 연주했다.
2020년 신년 서훈 명단(New Year Honours)에 올라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았다.
3. 여담[편집]
- 퀸의 멤버 중 가장 미형에 속한 인물로 뭇 여성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19] 그래서인지 총 3번의 결혼을 거쳤는데, 첫 번째 부인은 '도미니크'라는 프랑스인으로 슬하에 두 아이를 두었으나 이혼하였다.[20] 두 번째 부인은 '데비 랭(Debbie Leng)'이라는 여성으로[21] 뮤비 찍다가 눈이 맞아 동거했으나 로저 테일러가 바람 핀 게 대대적으로 보도 되면서 차였다. 세 번째 부인은 세리나 포트가이너라는 여자로 로저보다 22살 연하라고 한다.[22]
- 예쁜 외모 덕에 사람들이 여자로 오해해서 대학 생활때 수염을 길렀다고 한다. 젊은 시절 사진 보면 충분히 납득 가는 외모.
- 여장도 했었다. I Want to Break Free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컷이고, 보다시피 여고생 역할이다. 당시 35세로 발랄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구글에 Rogerina(로저리나)라고 검색하면 사진이 많다.[23]
- 레드 제플린, 특히 존 본햄의 엄청난 팬이라고 한다.[24] 실제로 로저는 인터뷰에서 레드 제플린에 대한 존경심을 꽤나 드러냈었는데, 프레디와 같이 레드 제플린의 공연을 처음 보러갔을 때 존 본햄의 드럼 솔로를 듣고 사운드의 압박 때문에 엎어 자빠질 뻔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 대외적으로는 까칠한 이미지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쾌활하고 장난끼 많은 성격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일화로 바로 상단에도 나오는 "I Want To Break Free" 뮤직비디오에서 여장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다름아닌 로저였다.[25] 대학 시절, 프레디 머큐리와 동거하며 함께 옷가게를 차렸을 때, 팔려고 내놓은 옷이 아닌 프레디의 개인 옷을 싼 값에 팔아치워 프레디가 그 손님을 쫓아가 파는 옷이 아니라고 했다고 한다. 첫번째 앨범을 발매할 당시에도 프레디와 같이 짜고 존 디콘의 이름을 '디콘 존'으로 바꿔 적어놓는 장난을 친 적도 있다.[26] 또, 팬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로 멤버들이 자신의 솔로곡 "I'm in love with my car"를 앨범(A Night In At The Opera)에 넣는 것을 반대하자, 옷장 속에 들어가 시위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비슷하게 놀기를 좋아하는 프레디와는 사적으로도 아주 친했었고 관련 동영상과 사진도 찾아보기 쉽다. 프레디와 함께 옷가게를 열기도 했었으며, 프레디의 솔로 곡인 'The Great Pretender'의 뮤직 비디오에서 여장한 채로 등장하기도 했다.
- 진위 여부가 확실시 되지는 않지만, 1969년 혹은 70년경에 공연 무대 뒷편에 서 있던 로저가 갱단 멤버들과 마주쳤다고 한다. 로저는 위험을 직감하고 즉시 자신의 학생증을 꺼내 "나는 유도 검은띠이고, 이건 내 유도 단증이다. 그 말인즉슨 나는 자기방어를 위해 당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뜻이고, 그에 따라 당신들이 입는 부상은 모두 당신들 책임이다."라고 나름의 위협을 가했고, 이에 갱단 멤버들이 후퇴했다는 일화이다. 진위 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의외로 조금씩 얘기가 있기는 한 듯하다.내용찾기(F3) 키를 누른 뒤 유도(Judo) 검색 후 확인 12
- 나이가 나이인지라, 몇몇 공연에서 핸드싱크를 하고 있어서 추해지기 전에 은퇴해라는 말까지 듣고 있다.[27] 그래서 그런지 드럼을 아들인 루퍼스 타이거 테일러에게 맡기고 마이크를 잡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 음역대가 굉장히 넓어서(A#1~E6) 음역대만 놓고보면 프레디 머큐리보다 넓은 음역대를 지니고 있다. https://youtu.be/OgEb6OnC75c
- 1982년까지는 프레디 못지않게 공연에서 웃통을 까기도 했다.
- 최근에는 수염을 기르고 있는데 그래도 잘생겼다. 젊을때의 부리부리한 눈매는 여전하다.
- 우표와 관련된 일이 하나 있었다. 영국의 로열 메일 그룹(Royal Mail Group)[28] 에서 1999년과 2000년에 새천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하였는데, 1999년의 테마는 "위대한 영국인들(Great Britons)"이었다. 그 중 하나에 밴드메이트인 프레디 머큐리가 인쇄된 우표가 있었다.[29] 헌데 프레디가 무대를 뛰어다니던 중 찍은 사진 중 잘 나온 것을 고르느라 그런 것이었는지, 뒷배경에 로저가 같이 찍힌 사진을 고르게 되었다.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영국의 우편법에 따르면 우표에 실릴 수 있는 생존인물은 영국 왕실의 일원들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즉, 주인공인 프레디가 사망한 상태였지만, 얼떨결에 같이 나온 로저는 2020년 기준으로 생존한 상태이니 우편법을 위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었던 상황. 다행히 우편국 측에서도 이를 인지하였는지, "여왕 폐하께 모든 우표를 검증받았다."는 해명을 하면서도, "확실히 드문 경우이긴 하다."라고 인정하였다. 문제의 우표 사진
- 1992년 12월 21일과 22일, 로저의 밴드 더 크로스(The Cross)가 영국 런던 마키 클럽(Marquee Club)에서 크리스마스 기념 공연을 하였다. 이 때 게스트들을 초청했는데, 무려 스마일 시절의 동료 팀 스타펠(Tim Staffell)이 2일 연속으로 출연했다.[30] 또한, 첫날 추가 게스트로는 더 후의 로저 달트리가, 둘째날 추가 게스트는 퀸의 브라이언 메이가 출연하여 둘째 날 공연은 완전체 스마일이 해체를 하고 나서 20년만에 다시 공연하는 진귀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둘째날 공연, 팀과 브라이언이 무대로 등장하여
와 를 부르는 공연 촬영 영상.
- 또한 존 디콘과 함께 처음으로 방한한 퀸 멤버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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