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밴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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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퀸(밴드) 심볼.svg

프레디 머큐리†
브라이언 메이
존 디콘
로저 테일러
[ Studio Album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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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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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1991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1e2023; font-size: .8em"
Made in Heaven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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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문서 ]




1. 개요
2. 스마일 시절
3. 초기
4. 전성기
5. 과도기
6. 후기
7. 말기


1. 개요[편집]


영국의 록밴드 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2. 스마일 시절[편집]


1968년,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Imperial College London)의 학생이였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와 베이시스트[1] 팀 스태플(Tim Staffel)[2]이 밴드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드러머가 필요했던 그들은 학교 공지 게시판에 광고를 실었고, 그를 본 치과대학(London Hospital Medical College) 학생인 드러머 로저 테일러가 밴드에 들어오게 된다. 그들은 밴드 이름을 스마일(Smile)이라 지었고, 지미 헨드릭스, 핑크 플로이드, 예스와 같은 밴드들의 콘서트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3] 그러던 중 머큐리 레코드(Mercury Records) 관계자에게서 온 레코딩 계약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그들은 머큐리 레코드사가 제공해준 트라이던트 스튜디오(Trident Studio)에서 음반작업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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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 시절의 그들. 왼쪽부터 로저 테일러, 브라이언 메이, 팀 스태플

1969년, 팀 스태플은 일링 칼리지(Ealing College)에서 미술을 전공하던 파로크 불사라(Farrokh Bulsara)를 밴드에 소개하는데, 그가 훗날의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이다. 다른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던 파로크(프레디)는 곧 스마일 밴드의 열성 팬이 되었고, 멤버들은 그를 '제 4의 멤버'격으로 대해줬다. 그러던 동년 8월, 머큐리 레코드는 스마일의 팀 스태플 작곡의 'Earth'와 브라이언 메이 작곡의 'Step On Me' 두 곡을 싱글 발매하기로 결정하는데, 문제는 머큐리 레코드가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어 영국 쪽 유통망은 매우 허술했다는 것. 결국 싱글은 미국에서만 발매되었고 이마저도 판매량이 시원찮았다. 그럼에도 앨범 발매를 준비하던 그들이었으나, 스마일에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팀 스태플이 스마일을 탈퇴하고 험피 봉(Humpy Bong)이라는 밴드로 자리를 옮기는 일이 일어난다. 팀이 탈퇴하자 머큐리 레코드도 그들을 버렸다. 애초에 싱글 1장 계약이라 항의조차 못했다고 한다.

난항에 빠진 밴드는 새로운 보컬을 뽑기 위해 오디션을 실시했다. 당시 프레디 머큐리는 로저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스마일이 보컬 오디션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 처음부터 스마일과 가까운 관계였던 자신에게 먼저 얘기해 주지 않은 것을 매우 섭섭해 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프레디가 새 멤버로 들어왔고, 밴드 이름을 스마일에서 퀸으로 바꾸게 된다.

밴드 이름을 지을 때, 프레디는 '퀸(Queen, 여왕, 게이)'[4] 를, 브라이언은 '그랜드 댄스(Grand Dance, 위대한 춤)'를, 로저는 '리치 키즈(The Rich Kids, 부유한 아이들)'를 제안했다. 사실 프레디가 제안한 '퀸'이라는 이름은 여왕이라는 뜻 이외에도 앞서 서술했듯 동성애자라는 뜻이 있어 당시 기준으론 매우 파격적인 밴드명이라 브라이언과 로저는 처음에 프레디의 제안이 개그인줄 알고 웃었다고 한다. [5] 하지만 결국 밴드의 이름은 퀸으로 결정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다. 로저 테일러의 1970년 5월 27일 일기. 프레디가 인터뷰에서 밝히기로는 퀸이라고 이름 지은것은 굉장히 위엄있고 화려하며 시각적으로 잠재력이 커서 어떤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했고 그 외에도 아주 많은 뜻을 품을 수 있어서 일찌감치 생각해 둔 것이라고 했다.


베이시스트 팀 스태플의 탈퇴로 베이스 자리가 비게 된 그들은 이후 3명의 베이시스트[6]를 거치는데, 모두 얼마 못 가 탈퇴하고, 1971년이나 되어서야 한 디스코 파티에서 브라이언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로 우연히 알게 된 존 디콘이 들어오며[7][8]의 퀸의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그래서 퀸 측에서는 존 디콘이 들어와 라인업이 완성된 이 때
(1971년)를 공식적인 결성연도로 치고, 10주년, 20주년 기념반인 Greatest Hits, Greatest Hits II도 각각 1981년, 1991년에 발매되었다.

팀 스태플은 이후 험피 봉 활동은 성공하지 못했고 음악을 그만두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근데 그게 또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음악 말고도 모형 제작에 관심이 많았던 취미를 살려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어린이 애니메이션 증기기관차 토마스의 모형 애니메이션 첫 시즌에 모형 기관차 및 각종 디오라마의 설계와 제작을 담당했다.

이 결성 멤버들의 출신 배경이 좀 재미있는데, 모두 현대 기준으로도 상당한 고학력자 출신이라는 것이다.[9] 게다가 디자인 계열 출신인 프레디 머큐리를 제외하면 모두 이공계 분야이다.(로저 테일러-치과대학, 브라이언 메이-천체물리학, 존 디콘-전자공학) 프레디 머큐리히스로 공항에서 일한 경력 때문에 좀 학력이 낮아보이는 면이 있지만, 프레디의 모교인 일링 미술 대학교는 당대 기준으로 꽤나 잘나가던 미술 대학교였다.[10] 로저 테일러는 얼굴도 락스타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유복했던 가정 환경, 뛰어난 공부 실력[11] 등으로 도저히 락스타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엄친아였다. 브라이언 메이는 영국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대학교중 하나인 임페리얼 칼리지의 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던 초고학력자였다.[12] 존 디콘의 경우 첼시 과학기술 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생이었는데, 현재 해당 대학은 킹스 칼리지 런던에 합병되어 동문이 되었다. 그렇다고 그냥 학교를 다닌 것은 아니고, 우수성적에 해당하는 학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여러 음악 평론가들에 의해 "잘난 명문 대학교 출신들이 배운 거 티내면서 잘난척한다"라면서 까였다.[13]


3. 초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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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Top of the Pops 출연 당시[14]

4인조로 클럽과 대학 공연을 다니다가 위에서도 언급했던 트라이던트와 계약을 맺은 퀸은 한참 뒤 1973년 1집 Queen을 발매하게 되었다. 앨범은 상업적으론 시원찮았지만 평론가들로부터는 꽤나 괜찮은 평가를 받았고, 빌보드 차트 83위에 오르는 소소한 이변을 거두기도 한다. 이후 밴드는 'Mott the Hoople'이라는 밴드의 투어 오프닝 밴드를 맡게 되는데, 덕분에 팬클럽이 생기거나 앨범 판매량이 오르는 등의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지만 이때부터 이후 고질적인 문제가 되는 언론과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15]

이듬해 1974년, 밴드는 2집 Queen II를 발매하게 되는데, 이미 꽤나 이름을 알린 그들은 이 앨범에서 첫 히트곡 'Seven Seas of Rhye'를 배출하게 되었고, 앨범 차트에서도 작은 성과를 내는 등 상업적으로는 분전했지만,[16] 음악적으로는 "글램 록의 찌꺼기(...)다", "여기서 퀸이 더 발전한다면 내 모자를 먹어보이겠다"는 등 혹평 일색이었다. 그러나 호평을 던진 평론가들도 많았으며, 이후 퀸의 이름이 알려지며 재평가되었다. 퀸 마니아들에게 그 유명한 A Night at the Opera보다 더 훌륭한 작품이라는 지지를 얻기도 하는 앨범. 이후 브라이언의 건강 악화로 잠시 난항을 겪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동년 하반기 싱글 Killer Queen이 발매되어 UK 차트 2위라는 성공을 거두었고, 이어서 발매한 3집 Sheer Heart Attack까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3집 투어가 성황리에 끝난 뒤, 소속사 트라이던트와의 갈등이 심각해지는데, 그들과 맺은 계약은 애초에 문제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퀸의 음반 판권에 관한 일체의 권리를 트라이던트에 넘긴다는 내용. 이 때문에 밴드는 음반 판매량과는 관계없이 정해진 보수만을 받게 되었다. 문제는 그 정해진 보수가 20 파운드, 원화로 대략 4만원. 결국 협상 끝에 60 파운드로 인상받았으나, 문제가 많은 건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3집 앨범과 그 싱글이 히트했음에도 멤버들은 계속 거지 신세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법적 분쟁 끝에 퀸은 트라이던트를 나오게 되었고[17], 엘튼 존의 매니저였던 존 리드(John Reid)와 만나 EMI와 직속 계약에 성공한다.


4. 전성기[편집]


그리고 이듬해 1975년, 퀸은 4집 A Night at the Opera를 발매했고[18], 앨범의 리드싱글로 6분에 달하는 대곡 Bohemian Rhapsody가 우여곡절 끝에[19] 발매되어 영국 1위[20], 미국 빌보드 9위를 기록하며 퀸은 세계적인 밴드로 도약하게 된다.

이듬해 1976년, 퀸은 5집 A Day at the Races를 발매하는데, 프레디 머큐리 작곡의 Somebody to Love가 히트하며 전작의 성공이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게 된다.[21] 하지만 평론가들로부터는 너무 정형화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른 앨범의 평가에는 공감하는 사람이 적은 반면, 이 평가에는 공감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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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0월 28일, 패트릭 리치필드가 참여한 화보 중에서.[22]

1977년, 6집 News of the World를 발매하고 We Will Rock YouWe Are the Champions[23] 를 히트시킨 퀸은 펑크 록의 영향으로 여타 선두주자 밴드들이 주춤하는 사이 이 앨범의 히트에 힘입어 음악계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굳혀 갔다. 그리고 이때 매니저인 존 리드와 양자 합의하에 계약을 파기하고 그들만의 기획사를 만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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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의 퀸, 전체적으로 머리가 짧아진 것이 눈에 띈다.

이후 1978년의 7집 앨범 Jazz는 이전의 앨범들에 비해서는 직선적이면서도 대중적인 곡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이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여전히 냉정했으며, 앨범 판매량이 1/3로 감소하는 등 상업적인 성과도 이전에 비해 시원찮았다. 하지만 밴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남미, 일본 등에서 여전히 많은 인기를 누렸으며, 이 앨범에서 프레디 작곡의 Don't Stop Me Now[24] 사후 재평가를 받으며 지금까지도 인기를 얻는 곡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979년, 밴드는 그 해 이루어졌던 투어 'Jazz'의 유럽 투어 라이브를 추합해 밴드의 첫 라이브 앨범인 'Live Killers'를 발매한다.


5. 과도기[편집]


1980년, 밴드는 8번째 정규 앨범 The Game을 발매하는데, 처음으로 신디사이저를 도입하고 팝-펑크(funk) 지향적인 사운드로 변화를 꾀한 앨범이었다. 그 결과 앨범이 빌보드 차트 1위에 등극하고, 최초로 남미에서 투어를 한 메이저 밴드가 되는 등 인기의 정점을 맞이한다. 싱글 Another One Bites the Dust[25]와 엘비스 풍의 컨트리 곡인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두 곡도 빌보드 1위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프레디 머큐리의 가창력과 무대 매너는 이때 절정에 올랐다.[26] 이 두 곡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해서 보여주던 퀸에게도 이질적이고 특히나 컨트리, 디스코의 영향을 받은 미국색이 강한 곡이었는데, 그런 이질적인 곡조차 미국인이 듣고 미국의 밴드인 줄 알고 열심히 틀어대 빌보드 Hot 100 1위까지 만들었다는 점에서 퀸의 장르 흡인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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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당시의 모습. 이때부터 프레디가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27]

그 후 같은 1980년 9번째 정규 앨범으로서 SF 영화 <플래시 고든>의 OST 앨범 Flash Gordon을 발매한 이후 퀸은 펑키한 'Another One Bites the Dust'가 가져온 성공에 고무되어 82년 10번째 정규 앨범으로 디스코풍이 매우 강한 앨범 Hot Space를 발매하는데, 너무나도 급작스런 변화와 퀸 특유의 사운드의 부재는 팬들마저 이 앨범을 외면하게 만들었고(당시 디스코란 장르가 끝물이기도 했다), 결국 퀸 역사에 흑역사로 취급을 받는 비운의 앨범이 되고 만다.[28][29] 다들 알 법한 노래 'Under Pressure'가 이 앨범 수록곡[30][31]이기는 하나, 타가수와의 콜라보레이션 싱글로 앨범 발표 한참 전에 인기를 끌었기에 Hop Space의 실패는 치명적이었다. 너무나도 달라진 음악 색깔 때문에 팬들마저 외면한 건 사실이었고, 퀸의 인기는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위에 언급했듯이 프레디의 가창력은 이 시기(80년대 초반)가 전성기였다. 밴드는 내리막길인데 프런트맨의 가창력은 전성기였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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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The Works

10번째 정규 앨범인 Hot Space 이후 2년간 활동을 쉰 밴드는 1984년, 11번째 정규 앨범 The Works 를 발매했다. 전작의 처절한 실패와는 달리 앨범은 UK 앨범 차트 2위에 올랐고, 싱글 Radio Ga Ga[32]가 19개국에서 1위를 차지하며 퀸의 80년대 곡들 중 최다 히트곡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I Want to Break Free(UK 3위), It’s a Hard Life(UK 7위)까지 무려 3곡이나 UK차트 10위 안으로 진입하며 최소한 유럽과 남미에서는 예전의 인기를 완벽하게 화복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대중성을 의식하여 락이 아닌 팝 성향이 강하다는 이유로 평론가뿐만 아니라 고정팬들조차 실망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고, I Want To Break Free 뮤직비디오 논란으로 미국 시장에서 인기가 폭락하면서 상업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이 시기 멤버들의 솔로활동이 잦았던 탓에 해체설이 파다했다.[33]


6. 후기[편집]


1985년 7월 13일 펼쳐진 라이브 에이드[34]에서 퀸, 특히 프레디 머큐리는 할당된 20여분간 무대를 휘어잡으며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줬고[35] 이때 받은 대중들의 환대, 그리고 이어진 레코드 매출 상승에 힘입어 퀸은 '제2의 전성기' 를 맞이하게 된다.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2014년 영국문화원이 선정한 <지난 80년간 세상을 형성한 가장 중요한 사건 80가지> 중 대중음악 분야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영향력>과 함께 뽑혔을 정도로 파급력이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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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7월 5일. 매직 투어 중 아일랜드 슬레인 캐슬에서의 공연[36]

이는 86년 12번째 정규 앨범인 A Kind of Magic의 발매와 함께 전 유럽에 걸쳐 열린 매직 투어로 이어졌다. 이 투어에서만 라이브 앨범이 세 장 나왔고[37] 7월 11일, 12일의 웸블리 공연 2회를 포함해 전 공연이 매진을 기록했다. 20만 명의 관객[38]이 운집한 영국 네브워스 공원에서 끝을 맺게 된다.[39][40] 하지만 이 네브워스 공연은 퀸의 마지막 공연이 되어버렸는데, 그 즈음 프레디가 에이즈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넵워스 공연 이후로는 일체의 라이브 활동도 할 수 없게 된다.[41]


7. 말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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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I'm Going Slightly Mad 뮤비 촬영 현장에서.

3년 뒤인 1989년, 밴드는 13번째 정규 앨범 The Miracle을 발매하게 된다. 이 시기는 퀸의 멤버들에게 있어 굉장히 힘든 시기였는데, 프레디는 위에서 언급한 에이즈에 걸렸다는 소문으로, 브라이언은 스캔들 관련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앨범은 매우 성공했고, 그들의 80년대 앨범 중 음악성에서는 가장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42] 이 앨범부터는 작곡가 명의를 일부 공동명의로(Queen) 바꾸게 되었고,[43] 프레디의 창법은 70년대의 그 창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 프레디는 1980년부터 길렀던 콧수염을 다시 밀었다.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그때부터 음악 활동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89년의 'The Miracle'이 그러했다. 하지만 2년 뒤 91년에 발매된 14집 앨범 Innuendo는 그렇게 프레디가 음악에만 전념하고도 일부분 미완성스럽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앨범은 Innuendo, The Show Must Go On 등의 명곡들이 포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퀸 전체 커리어에서도 손꼽히는 명반으로 뽑히기도 한다. 게다가 차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프레디의 건강 문제로 투어는 불가능했으며[44] 흑백으로 찍힌 'I'm Going Slightly Mad'의 뮤직비디오에 훤히 드러난 프레디의 초췌한 모습이 팬들을 불안하게 했다. 그렇게 투어는 커녕 공식 석상에도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좋은 떡밥을 낚아챈 언론이 가만 있지 않았고, 눈에 띄게 초췌해진 프레디 머큐리와 관련해 온갖 루머가 나돌게 된다.

그러던 1991년 11월 23일, 그 루머가 사실이 되었다. 결국 프레디 머큐리는 성명을 통해 에이즈 환자임을 인정했고, 24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망하게 된다. (24일) [45]


8. 프레디 머큐리 사후[편집]


다른 퀸 멤버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인정받는 실력자들임에도 아무래도 프레디의 존재감이 너무 크다보니 과소평가 받는 경향이 있지만,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는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92년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가 성황리에 열렸다. 공연장은 당연히 런던 웸블리.제2의 라이브 에이드 당시 전 세계 음악계에서 가장 잘 나가던 사람들이 총출동하여 퀸의 대표곡을 연주하였다. 몇 명만 나열해 보아도 <보헤미안 랩소디>를 부른 엘튼 존[46][47]Under Pressure을 부른 데이비드 보위애니 레녹스[48], 액슬 로즈[49], <Stone Cold Crazy>를 부른 메탈리카제임스 햇필드, <I Want It All>을 부른 더 후로저 달트리,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와 <Innuendo>를 부른 레드 제플린로버트 플랜트 등등. 블랙 사바스토니 아이오미가 몇몇 곡에서 백업 및 리듬기타로 참여하였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조지 마이클[50][51]Somebody to Love와 씰(Seal)이 부른 Who Wants To Live Forever. 그리고 퀸을 가장 잘 이해하고 존경했다고 평가받았던 익스트림의 퀸 메들리[52]. 하지만 대부분의 게스트들은 아무래도 원곡자인 프레디를 따라올 수 없다며 좋지 못한 평을 들었다. 이후 존 디콘이 "프레디가 없으면 퀸이 아니다."라며 퀸과 관계된 활동을 일체 접었는데, 어쩌면 이게 그 마음을 확고하게 했을지도..

이후 퀸의 나머지 멤버들이 프레디의 마지막 순간의 녹음들을 완성시키기 위해 작업한 앨범 Made in Heaven이 95년 발매되어 영국차트 1위에 오른 9번째 퀸 앨범이 되었으며, 후에 'Queen Rocks'라는 컴플릿 앨범에서 머큐리를 제외한 브라이언과 로저가 부른 "No One But you"라는 곡을 발매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곡을 끝으로 존 디콘이 97년 은퇴를 선언한다. 이후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는 음악계에 남아 여러 게스트들과 협력하여 계속해서 퀸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뮤지컬 'We Will Rock You'를 제작하기도 했고, 프리, 배드 컴퍼니의 보컬로 활약 했던 폴 로저스와 함께 퀸+폴 로저스란 이름으로 투어를 하기도 했다. 이후 2011년에는 오랜 소속사였던 EMI가 유니버설 뮤직 그룹에 인수 합병 되면서 소속을 유니버설로 바꿨으며, 퀸 결성 40주년을 맞이하여 퀸의 전곡을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앨범과 새로운 베스트 앨범 등을 내놓았다. 2011년 거의 1년 내내 기념 행사가 진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2년 브라이언과 로저는 아메리칸 아이돌이 낳은 초고음역대의 슈퍼스타 아담 램버트와 투어를 시작했고, 2012년 런던 올림픽 폐막식에서 제시 J와 협연하였다.

2014년 슈퍼소닉 페스티벌에 내한하여 8월 14일에 공연을 펼쳤다. 2014년 5월에 브라이언 메이가 또다른 베스트 앨범 의 발매를 예고했다. 2014년 9월에 새 라이브 앨범 <Live at the Rainbow '74>를 발매했다. 앨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74년 라이브에서 부른 곡들이 담겨있는 앨범인데 이 앨범에선 그때까진 라이브에서 부른 적 없었다고 알려진 Queen, Queen II의 일부 곡들이 수록되어 있어 꽤나 화제를 모았다.

2015년 9월 말경 퀸의 스튜디오 앨범 전질을 LP 디스크로 집대성한 박스셋 "The Studio Collection"이 발매되었는데, 이는 오리지널 슬리브 구성 등을 완벽하게 구성한 것으로 광고가 자자했다. 그 명성에 힘입어 국내에서는 몇 달 지나지않아 유명 사이트 대부분 품절이라는 대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2018년 1월 9일, 퀸은 그래미 평생공로상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2018년에 전기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했다. 그들의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어져 오는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 특히 프레디는 사실 생전에 밴드를 다룬 전기영화가 나중에 나오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덤으로 프레디는 자신의 전기영화를 만든다면 너무 문란해서 X등급을 3개나 받을거라고(...)(XXX를 빠르게 말해보자.)[53][54][55] 말하기도. 실제로도 메리와 알몸으로 누워있거나, 퀸의 매니저인 폴과 키스하는 장면 등 선정적인 장면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관람등급이 12세 였다고 한다...

퀸의 전기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영화 1차 예고편이 나온 뒤 유튜브에 있는 보헤미안 랩소디 뮤비의 조회수가 갑자기 확 늘어나더니 구독자가 300만명까지 갔다가 2차,3차 예고편이 나올수록 구독자가 늘더니 영화가 나온후 2019년 7월, 1000만명을 달성했다! 영화가 한국에서도, 세계에서도 흥행하며 퀸이 다시 주목받았고 아카데미 시상식도 참가해 공연했다.

2019년 아담 램버트와 '2019 북미 투어-랩소디' 날짜를 발표했다. 2019년 7월 10일 벤쿠버에서 시작해 LA, 달라스, 토론토, 워싱턴DC, 보스톤, 뉴욕, 아틀란타, 샬럿을 8월 23일까지 도는 일정이다. 공연에는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가 함께 한다. 브라이언 메이는 투어 소식을 발표하며 "이건 정말 대단한 기회다. 우리의 지난 투어는 엄청난 야망으로 제작됐고 우리에게 최고의 깨달음을 줬다. 그래서 우리는 더 야심찬 투어를 만들기로 했다. 기다려라 미국"이라고 말했다.

마침내 한국 내한 공연이 확정 되었다.#

2022년 10월에 Face It alone이라는 새 곡이 발표될 예정이다! Face It Alone은 The Miracle에서 발견된 미발표곡이라고 한다. 원래는 떡밥만 돌았으나, 현재는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2022년 10월 8월 기준 공식 유튜브 채널의 채널 아트도 Face It Alone 홍보 문구이다. 기존에는 9월에 발표 예정이었으나 한 달 미뤄진 것이기는 하지만, 1995년 이후로 새 곡을 내지 않던 퀸의 재등장이라는 것은 신선하고 긍정적인 사실이다.

10월 7일, Face It Alone 홍보 광고가 런던 곳곳에 실린 것을 보여주었다. 이에 힘입어 다음 날에는 토론토, 마드리드, 멕시코 시티에서의 사진도 보여주었다.

2022년 10월 9일,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Face It alone의 티저가 등장했다. 인스타그램 계정이 없다면 공식 사이트의 뉴스에도 인스타그램 영상이 첨부되어 있으니 공식 사이트로 가서 보자.

이에 힘입어 퀸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도 Face it alone의 트레일러를 접근성이 좋은 YouTube Shorts 영상으로 공개했다. 댓글들의 반응은 대부분 긍적적이다. 근데 기존 영상들이 쇼츠 영상들보다 조회수가 잘 나오는걸로 봐선 16:9 영상도 하나 더 만들어야 할 것 같다.[56]

Face It Alone은 BST 시간 기준으로 10월 13일 오전 11시 15분에 공개될 예정이다.


마침내 예고만 돌던 Face It Alone이 완성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댓글은 간만에 공개된 데모여서 그런지 긍정적이다.
조회수도 다른 영상들에 비해 매우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며, 이 화력이 지속된다면 1000만회를 내다봐도 문제 없을 것이다.

퀸 공식 상점에서 The Miracle 한정판 상품들을 팔고 있다. Side A, B등 기본 수록곡과 수록곡들의 오리지널 테이크, Face It Alone 이외에 다른 데모들이 포함되어 있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The Miracle Collector's Edition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가사 영상에 이어, 뮤직 비디오도 공개되었다. 물론 Face it alone 자체가 데모라서 당시에 찍었던 건 없는 모양이고, 프레디 머큐리 사후에야 공개되었으니 프레디의 모습도 전부 짜집기다.[57] 하지만 오랜만에 발매된 곡인데다가 이런 공식 영상들도 생긴 것에 대해 댓글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다.

여담으로, Face It Alone의 콘텐츠 ID 소유주인 UMG 측에서 "이 곡의 메타베이스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 세계에서 퀸 공식 영상을 제외한 음원이 사용된 동영상을 볼 수 없게 설정해 두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팬메이드 가사 영상이나 타 언어로 번역된 영상들, 일부 리액션 영상들, Face It Alone이 배경음악으로 쓰인 영상들이 잠시 막혔었는데, 며칠 뒤 러시아와 벨라루스를 제외한 나라들에서 재생 제한이 해제되었다.

2022년 10월 26일 기준, Face It Alone의 공식 가사 영상이 YouTube 내에서 '전 세계 뮤직비디오 인기' 33위를 기록했다.

[1] 사실 그는 그냥 보컬이었으나 드러머와 기타리스트, 보컬밖에 없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베이스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후에는 베이스를 잡지 않고, 보컬과 기타를 겸업한다.[2] 1948년생. 음악가로서는 이후 묻혀졌다. 결국, 1973년 25살에 음악을 그만두고 애니메이터, 컴퓨터 디자이너 등등 여러 직업으로 살아갔다.2001년에 거의 30년만에 음악가로서 돌아와 앨범 활동을 하며 현역이다.[3] 보조 일을 했다니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여러 증언이나 평전에 나온 것에 따르면 쟁쟁한 뮤지션들의 보조를 맡을 만큼 실력이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아마 이 때는 오프닝 밴드로 활약했을지도?[4] 당시 여왕을 뜻하는 Queen이 게이를 뜻하는 속된 은어로 쓰이기도 했다. 때문에 멤버들이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한다.[5]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퀸'은 단순히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정도가 아니라 남자 역할을 하는 게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성 역할로 매력있는) 게이라는 뜻이다. 이성애자들의 세계에서 여러 남자들의 사랑을 받고 그 남자들을 거느리는 매력있는 여성을 빗대어 ‘여왕벌’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여왕벌의 게이 버전을 영어로 '퀸'이라고 하는 것이다. 퀸이 데뷔 초에 ‘멤버 전체가 동성애자들’이라는 오해를 받았던 것도 다 이유가 있다.[6] 마이크 그로스( ~1970/7/25), 베리 미첼(1970/8/23 ~ 1971/1/9), 더그 보기(1971/2/19 ~ 1971/2/20)[7] 안정적인 베이스 실력, 얌전한 성격, 그리고 전자 기계를 다룰 줄 알아 가난한 밴드 살림에 보탬이 된다는 점 등이 장점이었다.[8] 참고로 존 디콘은 우연히 퀸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1970년 10월 16일 런던에서의 공연이었으며 당시 그는 19세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 공연에 아무런 감흥을 얻지 못했다고. 사실 공연(특히 프레디의 퍼포먼스) 자체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9]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던 더 후, 블랙 사바스 등 그 시절 록 뮤지션들은 대부분 대학교는 구경도 못해본건 물론이고 음악 교육도 받지 못해 기타도 독학으로 배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레드 제플린지미 페이지는 중졸이고 (물론 노년때 받은 명예박사학위들은 제외하고) 링고 스타는 아예 초졸이다. 그들뿐 아니라 다른 록밴드의 멤버들 역시 불우한 가정 환경 또는 음악적인 열정 때문에 대학교 진학을 포기해서 고학력자인 경우가 드문데, 그런만큼 퀸의 멤버들이 독특하게 보이는것.[10] 참고로 피트 타운젠드, 로니 우드와 동문이다.[11] 교통사고 때문에 성적이 상당히 떨어지긴 했음에도 의대에 붙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유년기 그와 같이 밴드를 했던 친구들도 전부 옥스퍼드와 런던 대학교에 붙었다.[12] 임페리얼 대학교는 과장 좀 보태면 MIT 뺨치는 엄청나게 빡센 공대로 유명하다. 거기다가 학비 역시 캘리포니아 대학교와 함께 억 소리 나올정도로 비싸다.[13] 반면 동시대에 활동했던 캐나다의 프로그레시브 록밴드 러시는 "고졸 출신들이 못배웠는데도 잘난척한다"라며 비난을 받은 바 있다(...)대체 어쩌라는거지[14] 부르는 시늉을 하고 있는 곡은 'Killer Queen'(킬러 퀸). 참고로 퀸 멤버들은 Top of the Pops에 대해 '앨범 판매에 도움이 많이 되었기 때문에 꾸준히 출연하기는 했지만, 누구도 실제로 연주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Smells Like Teen Spirit 항목의 일명 커트 코베인 마이크 먹방 퍼포먼스가 1991년 Top of the Pops에서 핸드싱크를 강요하자 빡쳐서 한 퍼포먼스니, 1974년의 Killer Queen은 당연히 라이브일 수가 없는 것. Killer Queen 음원의 목소리는 라이브에서 기계 없이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목소리이다.[15] 이후 Mott the Hoople은 퀸의 곡 Now I'm Here에서 짤막하게 언급된다.[16] 사실 멤버들은 실패했다고 생각했었다고.[17] 이후에 퀸은 4집에서 'Death On Two Legs'라는 곡으로 트라이던트를 신나게 깠다.선 채로 뒈져버려[18] 이 앨범은 2018년 영국의 여론조사 업체 원폴(Onepoll)이 영국인 대상 무작위 2,000명에게 실시한 '자기 인생에 가장 영향을 준 앨범' 설문조사에서 7위에 뽑히기도 했다. 참고로 1위는 마이클 잭슨Thriller.[19] 매니저인 존 리드는 6분짜리 곡을 틀어줄 라디오 방송국은 없을 거라며 편집을 요구했고 실제로 디콘이 오페라 파트가 없는 편집본까지 만들었었지만 멤버들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다가 퀸이 방송에 출연했을 때 친해졌던 라디오 DJ 중 하나가 이 곡을 들어보고는 매료되어 꾸준히 틀었던 것이 이 곡이 히트하는 데 크게 주효했다고 한다.[20] 당시 무려 9주 연속 1위, 16년 뒤인 프레디 머큐리 사후 재발매되어 또다시 5주간 1위.[21] 이외에도 브라이언 메이 작곡의 Tie Your Mother Down, 프레디 머큐리 작곡의 Good Old-Fashioned Lover Boy를 싱글로 발표했다.[22] Tie Your Mother Down 스페인용 표지로도 쓰였다.[23] 사실 이 두 곡은 당시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지는 못했지만 현재는 퀸이라는 밴드를 아예 모르는 일반인들까지 아~ 이 노래~ 하면서 아는 곡이다. 특히 We Are the Champions은 대부분 제목까지 다 알고 있다. 들려주면 아~ 이게 퀸 노래였어? 하는 정도..[24] 평론가들에게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25] 해당 문서에도 기재돼있지만, 마이클 잭슨이 이걸 썩히는 건 미친짓이라는 말까지 하며 싱글로 발매할 것을 강하게 권유했다고. 멤버들, 특히 로저 테일러가 이 곡을 싫어했던데다 퀸의 색깔과 많이 다른 곡이라 싱글로 발매할 생각을 못 했다고 한다. 원래 앨범에도 못 낄 수준의 노래였다고. 이 곡이 베이시스트 존 디콘이 작곡한 최고의 히트곡이며, 최고의 베이스 기타 명곡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트랙중 하나다.[26] 아이러니하게도, 딱 이 시기(80~82)가 퀸의 과도기라고 칭해진다. 과도기란 게 보통 좋은 뜻으로 쓰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재미있는 사실이다.[27] 훗날 프레디 머큐리의 트레이드마크로 굳어진 콧수염이 이때 처음 등장했다. 하지만 처음 이 콧수염을 기르고 등장했을 때 팬들로부터 수염 자르라는 의미로 면도칼을 받았다고...[28] 심지어 멤버들조차(로저, 존) 이 앨범을 싫어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니... 후일 프레디는 "내가 나머지 셋을 밀어붙였다. 앨범이 안 팔려서 나를 싫어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29] 프레디가 밀어 붙였던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가 가장 크다. 이 시기 때 폴 프렌터라는 제작자와 친해지면서 게이바에 들락날락하게 되었는데 이 때 게이바의 디스코 뮤직에 취해서 밀어붙였던 것이다.[30] 다만 앨범이 발매되기 7개월 전 이미 데이비드 보위와 함께한 프로젝트 싱글로 발매되어 UK차트 1위를 하면서 퀸의 80년대 곡들 중 처음이자 마지막 UK차트 정상에 밟았다.[31] 퀸 다큐멘터리인 <Days Of Our Lives>에 따르면, 그 유명한 메인 베이스 리프를 만든건 존 디콘이었는데, 다들 피자를 사러 나갔다 돌아오고 나서 존 디콘이 그 리프를 까먹었고, 로저 테일러가 다시 그 리프를 기억하여 녹음을 시작했다고 한다.[32] 여담으로, 레이디 가가(Lady Gaga)가 이 곡에서 자신의 예명을 따왔다.[33] 나중에 매직 투어 웸블리 공연에서 Who Wants to Live Forever를 부르기 전 프레디는 해체설이 사실이 아님을 직접 밝혔다. 프레디는 "많은사람들이 저희 밴드가 해체될 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엉덩이를 가리키며) 그들은 여기로 말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며 불화설을 종식시켰다. 관객들의 웃음과 환호는 덤.[34] 1985년 아프리카 난민을 위한 모금 운동의 일환으로 런던필라델피아에서 하루에 걸쳐 동시에 벌어진 콘서트.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많은 밴드와 가수들이 등장해서 각각 10~20분씩을 배정받아 연주하였고 전세계로 실황 중계 되었다.[35] 라이브 에이드의 주최자였던 밥 겔도프와 엘튼 존이 "그들이 쇼를 훔쳤다(They stole the show)"고 표현할 정도. 이들의 이날 공연은 BBC에서 락 역사상 최고의 퍼포먼스 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We Are the Champions의 코러스 파트를 프레디가 전부 원음으로 부른 유이한 공연이다. 77년 NOTW 투어 디트로이트 공연이 첫 번째.[36] 이 사진은 네브워스 공원에서의 사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슬레인 캐슬 공연의 사진이다. 참고로 슬레인 캐슬의 관객은 9만 5천명이라 한다. [37] Live Magic, Live At Wembley '86, Hungarian Rhapsody[38] 비공식적으로 20만 명이라고도 한다. 그로 인해 당시 영국에서는 최악의 교통체증이 일었다고 하며 멤버들은 헬기로 이동했다.[39] 이 기념비적인 마지막 공연은 웸블리 공연과 마찬가지로 비디오로 촬영하려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필름조차 넣지 않고 카메라를 돌리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때문에 아쉽게도 본 공연은 어떤 팬이 공연장의 대형스크린을 촬영한 부틀렉만 남아있다.[40] 이 공연에서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는데, 한 스코틀랜드 청년이 퀸을 더 잘 보기 위해 전기탑 위에 올라가려다 떨어졌는데 떨어지면서 밑에 있던 사람을 깔아뭉개서 깔아뭉게진 사람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칼로 찔러 살해해버렸다. 후에 라이브가 끝난 후 네브워스 공원이 있는 스테버니지 경찰이 범인을 체포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프레디는 공연 중에 우리 팬이 우리의 라이브를 보려다가 죽는다면 우리는 다시는 라이브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건당시의 기사. 또 한편으로 공연장에서 아이가 태어나기도 했다고...[41] 다만 프레디는 솔로 공연은 했다. 1988년까지, 프레디는 자신과 몽셰라 카바예의 듀엣곡 <Barcelona>의 라이브 공연을 진행했다. 구체적으로 1988년 10월의 스페인에서의 공연이 프레디의 마지막 공연이었다. 그러나 이를 프레디 머큐리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으로 볼 지는 의견이 분분한데, 분명히 무대에 나온 것은 맞으나 건강 상태로 인해 립싱크를 했기 때문. 때문에 클리프 리처드가 출연했던 뮤지컬 타임(Time)의 1988년 도미니언 극장 공연에 게스트 출연해서 It's in everyone of us를 리처드와 함께 직접 부른 것을 프레디 머큐리의 진짜 마지막 라이브로 여기는 의견도 있는 편.[42] 하지만 한국 한정으로 인지도가 유난히 약한 듯 하다.[43] 이로 인해 멤버들의 사이가 굉장히 좋아졌고, 앨범 제작 속도도 빨라졌다고. 자기 곡을 싣자며 싸우는 일이 없어졌기 때문. 이후 다음 앨범에서는 전부 공동명의로 바꾼다.[44] 물론 당시 프레디는 투어를 더 이상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건강문제임을 숨기고 다른 말로 둘러댔다.[45] 참고로 이 날은 Queen의 유명한 공연 중 하나인 몬트리올 공연을 한지 정확히 10년이 되던 날이였다.[46] 빨간색 재킷 & 가죽바지를 입고 나왔다. 누가 보면 사오정인 줄.[47] The Show Must Go On도 불렀다.[48] 신스팝 듀오 유리드믹스의 멤버이다.[49] We Will Rock You도 불렀다.[50] 리사 스탠스필드와 함께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도 듀엣으로 불렀다.[51] 역시나 빨간색 재킷을 입고 나왔다. 참고로 2016년 크리스마스에 타계함.[52] 메들리된 노래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MustaphaBohemian RhapsodyKeep Yourself AliveI Want to Break FreeFat Bottomed GirlsBicycle RaceAnother One Bites the DustWe Will Rock You → Stone Cold Crazy → Radio Ga GaBohemian Rhapsody.[53] 미국에서는 포르노 영화가 XXX-rating 이다![54] X등급을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제한상영가인데, 실제로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되자 일부 국가에서는 동성애 관련 묘사로 인해 정말로 청불 등급을 받았다.[55] X를 굳이 3번으로 말한 이유는 XXX가 서양에서 섹스의 속어 이기 때문(...).[56] 농담이 아니라, 쇼츠 영상들은 많아야 십 몇만 회에서 그친다. 물론 일반 영상들도 조회수가 썩 잘 나오진 않고, 쇼츠보다 부진할 때도 있지만, 투어를 중심으로 올리는 영상 특성 상 랩소디 오버 런던 투어는 21만회를 기록하는 가 하면, 프레디가 살아있었을 때 라이브 영상들은 조회수가 더 많이 나온다. 최근 공개된 것 중 매직 투어 Love My Life 부다페스트 공연 영상은 49만회, Works 투어 It's A Hard Life 리우 공연은 70만회를 내다보는 등, 확실히 쇼츠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청한다. 심지어는 프레디의 76번째 생일 영상도 31만회를 찍었으나 쇼츠 영상으로는 10만회가 다였다.[57] 짜집기라고 해서 Made In Heaven 수록곡들처럼 라이브 공연이나 뮤직비디오 속 모습들로만 짜집기를 하진 않았다. 크로마키 처리처럼 뒷배경에 뜨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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