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키르포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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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16대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미하일 페트로비치 키르포노스
Михаи́л Петро́вич Кирпоно́с
Mikhail Petrovich Kirponos

파일:미하일 키르포노스 상장.jpg
출생
1892년 1월 12일
러시아 제국 체르니고프주
(現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주)
사망
1941년 9월 20일 (향년 49세)
소련 우크라이나 SSR
재임 기간
제16대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40년 6월 7일 ~ 1941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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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올림피아다 폴리아코바 (이혼)
소피아 표트롭스카야
복무
러시아 제국 육군
1915년 ~ 1917년
소비에트 지상군
1918년 ~ 1941년
최종 계급
상장 (소비에트 지상군)[1]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겨울전쟁
독소전쟁
주요 서훈
대조국공로훈장 1등급
레닌훈장
소비에트 연방 영웅





1. 개요[편집]


소련의 군인.


2. 생애[편집]


가난한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4년 간 초등 교육을 받았으나 형편이 어려워 자퇴를 결정했다. 이후 삼림 지역에서 파수꾼, 관리인으로 일했다.


2.1. 제1차 세계 대전 · 러시아 내전[편집]


1915년 9월 러시아 제국 육군에 징집돼 제216예비보병연대에서 복무했다.


2.2. 제2차 세계 대전[편집]



2.2.1. 겨울전쟁[편집]


1939년 12월 제7군 제70보병사단장을 역임했다. 1940년 3월 초, 6일 간 비보르크 만 북쪽 해안의 핀란드 공화국 요새를 함락시켜 헬싱키까지 이어진 도로를 봉쇄했다. 덕분에 키르포노스의 부대는 기타 소련군 부대보다 빨리 요충지에 도달하게 됐다. 1940년 3월, 소련 최고회의 법령에 따라 레닌훈장,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훈장을 수여받았다.


2.2.2. 독소전쟁[편집]


우만 전투에서 나름 선방할 뻔했으나 뒤늦게 드네프르 강 쪽으로 후퇴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키르포노스에게 후퇴를 명령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키예프를 지켜낼 것이라고 전했다. 결국 키르포노스의 부대는 하인츠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단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결국 9월 14일까지 제5, 21, 26, 37군이 전력을 상실해버렸다. 키르포노스 역시 반격했지만 수만 명의 병사와 지휘관을 잃고 말았다.

1941년 9월 20일, 남서부 전선사령부와 제5군이 로흐비챠의 한 마을에 접근하다 나치 독일 육군 제3기갑군단의 매복에 당했다. 근처 숲으로 피신하면서 키르포노스 휘하의 병력은 1000여 명밖에 남지 못했다.[1] 계곡을 건너다 사방에서 2차 매복을 당해 경골에 골절상을 입었다. 전장에서 빠져나오다 전차 포탄 파편이 머리에 박혀 즉사했다. 이후 근처 숲에 매장됐다.


2.3. 전후[편집]


1943년 12월, 키르포노스 상장의 시신은 키예프 알렉산드르 포민 식물원에 재매장됐다.


3. 진급 이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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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휘관 제외 800여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