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고르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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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23대 볼가 군관구 사령관
바실리 니콜라예비치 고르도프
Васи́лий Никола́евич Го́рдов
Vasily Nikolaevich Gordov

출생
1896년 11월 30일[1]
러시아 제국 우파 주 마트베예브카
(現 타타르스탄 공화국 스타라야 마트베예브카)
사망
1950년 8월 24일 (향년 53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묘소
돈스코이 묘지
재임기간
제23대 볼가 군관구 사령관
1945년 7월 ~ 194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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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러시아 제국 육군
1915년 ~ 1917년
노농적군
1918년 ~ 1946년
소비에트 지상군
1946년
최종 계급
상급 부사관 (러시아 제국 육군)
상장 (소비에트 지상군)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겨울전쟁
독소전쟁
주요 서훈
노농적군 20주년 기념 메달
레닌훈장 (2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수보로프 훈장 1등급 (3회)
적기훈장 (3회)
적성훈장
쿠투조프 훈장 1등급





1. 개요[편집]


소련군인.


2. 생애[편집]



2.1. 제1차 세계 대전[편집]


1915년 입대 후 1917년까지 북부전선 제12군 본부에서 복무했다.


2.2. 러시아 내전[편집]


동부, 서부전선에서 부사령관을 역임하다 네스토르 마흐노의 무장 봉기 진압에 투입됐다.


2.3. 제2차 세계 대전[편집]



2.3.1. 겨울전쟁[편집]



2.3.2. 독소전쟁[편집]


1941년 8월 7일부터 브랸스크 전선 제21군 사령관으로서 1941년 12월부터 1942년 1월까지 쿠르스크-오보얀 공세에 참전했다. 1942년 7월부터 8월까지 스탈린그라드 근처 독일 국방군을 방어했다. 상부에선 세묜 티모셴코를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했지만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이를 반대하고 고르도프를 임명한 탓에 소련군은 다수의 방어선을 돌파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19일 만에 직위에서 해임된 뒤 예비군 사령관으로 좌천됐다.

1943년 3월, 르제프 전투, 오르샤-비텝스크 공세를 지휘했으나 5개월 만에 서부전선 병력의 50% 이상을 잃었다. 1944년 4월 11일 소련 국방위원회 M-715호 보고서에 따라 '지휘 실수가 반복될 시 계급과 지위를 강등시킬 것'이라고 경고받았다. 1944년 4월 2일,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제3근위군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실레시안 공세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고 최전방에서 독일 국방군의 방어선을 뚫고 키엘체를 점령했다. 이후 베를린 공방전, 프라하 전투에서 실수를 만회한 뒤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법령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 영웅으로 등극했다. 전후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로감사문에서 고르도프의 이름은 15회 정도 언급됐다.


2.4. 처형[편집]


1946년 11월 지병으로 은퇴, 1947년 1월 12일 스탈린에 의해 NKVD에 체포됐다. 그리고리 쿨리크와 만나 스탈린의 정책을 비난한 대화가 도청됐기 때문이다. 1950년 8월 24일 소련 대법원은 반공 조직 창설, 반공 혐의 가담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스탈린 사망 이후 1956년 4월 11일 재심으로 사후복위됐다.


3. 평가[편집]


노련하고 경험이 풍부한 사령관이었다. 그의 행적은 존경받아 마땅한데, 특히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펼친 활약으로 모두가 어려운 시기에 용기를 보였다. 신규 군사 기술에 부정적이고 변덕스러운 성격만 빼면 말이다.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이반 코네프


4. 진급 이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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