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회의 (r20220720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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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山會議
Western Hills Con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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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1월 23일, 서산회의의 소집
1. 개요
2. 배경
2.1. 돤치루이의 독재
2.2.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과 우파 숙청
3. 전개
3.1. 회의의 소집
3.2. 주요 결의 내용
3.2.1. 공산당원 추방
3.2.2. 왕징웨이 징계
4. 외부의 대응
4.1. 2전대회
4.2. 다른 인물들의 반응
4.3. 공산당의 반응과 대응
5. 결과
6. 평가
7. 참고문헌
8. 관련문서


1. 개요[편집]


1925년 11월 23일, 중화민국 중국 국민당 제1기 집행, 감찰위원회의 일부 위원들이 쑨원의 시신이 안치된 베이징 서산 벽운사에 모여 국공합작 폐기와 공산당원 추방을 요구하며 개최한 회의. 이들이 부른 공식 명칭은 제1기 중앙집행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로, 줄여서 사중전회 혹은 서산회의라고 부른다. 1926년 1월 4일 폐막되기까지 22차례의 회의가 개최되어 이후 1927년 9월까지 소위 상하이 중앙이라 하는, 국민당 우파의 독자적 당부가 수립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중국어로는 시산회의라 읽는다. 이로인해 국민당 전통 우익들로 구성된 서산회의파가 조직되었다.


2. 배경[편집]



2.1. 돤치루이의 독재[편집]


1924년 제2차 직봉전쟁의 결과로 펑위샹, 장쭤린, 돤치루이 3인이 우페이푸차오쿤의 정권을 몰아내고 권좌에 오르게 되었다. 남방에서 북벌을 준비하던 쑨원은 북상선언을 발표, 사실상 군벌 세력으로 조각나있던 중국의 통일과 건설을 위해 국민회의 소집을 제안하는 한편 제국주의 세력을 중국에서 축출할 것을 결의했다. 당시 베이징에선 돤치루이가 중화민국 임시집정에 올라 쑨원이 주장한 불평등조약 철폐를 무시하고 선후회의조례 13조를 발표하여 외국과의 조약을 존중할 것을 천명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쑨원은 입경선언을 하고 돤치루이와 협상하려 했으나 돤치루이는 쑨원을 철저히 무시하며 선후회의에 참여하겠단 쑨원의 제안도 묵살했다. 이에 국민당 중집위가 독자적 국민회의조직안을 제안함으로 북방 군벌들과 국민당의 합작은 결렬되었다. 여기에 돤치루이는 임시참의원을 설치, 자신의 임시집정 자리를 계속 유지하려고 함으로 독재를 꾀했고 국내외적인 반발에 부딪혔다. 서산회의파를 결성하게 되는 린썬과 쩌우루 등은 1925년 11월 11일 베이징의 대학 교수들과 연석회의를 가지고 돤치루이를 비판했다. 또한 돤치루이의 임시집정정부에 대항하는 반정부시위와 돤치루이 하야를 기도했다.


2.2.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과 우파 숙청[편집]


1925년 8월 20일, 국민당 좌파의 거물이었던 재정부장 랴오중카이가 광저우의 중국 국민당 중앙당부 건물 앞에서 괴한의 총격에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의 수습을 맡았던 왕징웨이미하일 보로딘은 이를 이유로 국민당 우파를 숙청하였다. 자세한 것은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을 참조. 결과적으로 당군 정치부 주임 저우언라이의 지원사격, 보로딘의 지휘 등으로 인해 국민당 우파의 거물 후한민이 숙청되어 외국과의 협의를 구실로 소련 외유를 떠나게 되었고 린썬쩌우루도 국민혁명의 취지를 화북에 통보한다는 핑계로 화북으로 사실상 추방당했다. 그들이 쫓겨난 자리엔 담평산과 임조함을 비롯한 공산당원이 차지했다. 이로 인해 국민당 수뇌부의 우파는 가히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좌파 및 공산당이 국민당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국민당 우파가 분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3. 전개[편집]



3.1. 회의의 소집[편집]


9월 18일 광저우를 출발한 린썬, 쩌우루 등은 9월 24일 상하이에 도착, 그곳의 중집위원들과 논의를 통해 베이징에서 사중전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린썬과 쩌우루는 난징, 즈장, 우한 등을 돌며 세력을 규합한 후 경한철로를 따라 북상했다. 베이징에 도착한 린썬과 쩌우루는 베이징집행부와 접촉하여 베이징집행부 명의로 사중전회 소집을 통고하고자 했으나 베이징의 공산당원들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에 린썬과 쩌우루는 분개하여 베이징집행부를 비판하는 한편 펑위샹의 힘을 빌리기 위해 장가구에서 사중전회를 소집하고자 했으나 펑위샹도 친소용공으로 돌아선 상황이라 소득이 없었다. 펑위샹의 지원을 얻기는커녕, 장가구에서의 안전 보장도 어렵게 되자 결국 베이징 서산에서 회의를 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설마 쑨원의 시신이 안치된 곳까지 누가 찾아와서 방해를 하겠냐는 것이었다. 이에 베이징집행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1월 15일 1차 회의가 소집되었고 11월 16일 서산에 모인 중집위원들은 연명으로 11월 23일 서산 벽운사에서 사중전회를 열겠다고 통전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11월 18일 예비회의에선 온건파와 강경파가 크게 충돌했다. 온건파는 공산당 지도부와의 협상을 주장했지만 강경파는 이를 거부함은 물론 왕징웨이 탄핵 등을 내세우며 강하게 나섰다. 일단은 서산회의에 참여한 중집위원들은 광저우에 연락을 취하여 보로딘의 개조 이전 국민당에 여러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쑨원의 연아용공 정책이 국민당에 큰 도움이 되었음은 인정하나 공산당원들의 부정적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면서 국민당이 공산당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공산당이 국민당을 장악했다고 보는것이 맞다고 비판하면서 광저우 동지들의 서산회의 참여를 호소했다. 하지만 광저우 측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오히려 서산회의가 연아용공 정책에 줄 영향을 우려하여 이들을 무시했다.


3.2. 주요 결의 내용[편집]



3.2.1. 공산당원 추방[편집]


본당총리가 중국 공산당원의 입당을 허가한 것은, 그들이 개인의 자격으로 본당의 주의를 신앙하고, 국민혁명을 추진함에 있어 본당의 주의, 선전, 임무에 노력케 하기 위해서이며, 공산당이 당으로서 가입하여, 본당 내에서 별개의 공작을 하지 않을 것임을 성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2년간 공산당원으로서 본당에 가입한 자의 언론, 공작의 모든 것은 공산당 기관의 결의와 지휘에 의거하고 있고, 완전히 공산당의 활동이 되어 있다. 생각건대 공산당원이 본당에 가입한 의도는 본당을 이용하여 공산당 세력의 발전을 꾀하고, 소련의 앞잡이가 되는 데에 있다. 중소의 역사는 다르고, 사회정세도 역시 다르다. 국민혁명과 계급혁명은 병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공산당원을 본당 내에 오래도록 그대로 둔다면, 혁명단체의 당원은 내부문제로 인해 분쟁이 격렬해지고, 나아가서는 국민혁명의 진전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서산회의의 11월 23일자 선언


회의 첫날, 서산회의에 참석한 위원들은 14가지 의안을 토의했는데, 2번째 안이 바로 국민당에 가입한 공산당원의 당적 취소였다. 12월 2일 서산회의는 만장일치로 공산당원들을 추방하기로 결정, 9인의 공산당원을 추방했다. 이때 추방하기로 결의한 인물로 담평산, 리다지오, 구추백, 마오쩌둥, 장궈타오 등도 있다.[1] 하지만 흔히 단순 반공파로 인식되는 서산회의파지만 서산회의 참가자들은 자신의 결정이 선의에 기반한 것이며 결코 공산당을 청산하려는 의도는 없고 공산당과의 합작도 가능하다는 여지를 남기는 등 의외로 공산당을 배려하는 태도를 보였다. 서산회의파는 자신들의 공산당원 추방에 대해서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한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의 생존과 발전을 저해하여 어쩔 수 없이 현실적 이유로 이들을 추방하였다고 밝히면서 자신들은 여전히 공산당을 우당으로 간주하겠다고 하였다.

"제국주의 타도를 주장하는 공산당의 노력하고자 하는 방향은 삼민주의의 그것과 대체로 부합하는 것이다. 이점 때문에 본당은 공산당을 연합의 대상이자 우당으로 여기는 것이다."

1925년 12월 14일자 민국일보[2]



3.2.2. 왕징웨이 징계[편집]


또한 서산회의는 12월 4일 왕징웨이 주석의 당직을 6개월 간 정지하고 중앙집행위원에서 해임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왕징웨이가 쑨원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국민당의 대권을 노리고 보로딘과 결탁하여 국민당 우파 숙청에 적극 앞장섰기 때문이었다. 왕징웨이의 여러 행동은 단순히 국민당 우파에 대한 배척 뿐만 아니라 쑨원의 유지인 연아용공의 유지 훼손, 조직 혼란, 중집위의 위신 실추를 야기하였다. 이러한 왕징웨이의 행동도 서산회의 소집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왕징웨이의 처분에 대해서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충돌하고 있었고 충돌이 심해서 강경파 위원들이 온건파 위원을 폭행하는(...) 사건까지 있었고 이 때문에 회의가 소집된지 무려 열흘이나 지나서야 결론이 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9가지 죄상을 지목하며 6개월 당직 정지와 중집위원 해임, 국민당이 집정하는 지방정부에서의 근무 금지를 결정했다. 9가지 죄는 다음과 같다.
  1. 총리 사후 총리의 이름 앞에 선 혹은 고를 붙이지 못하도록 규정하였음에도 왕징웨이는 대내외적으로 선총리라는 표현을 고집하였다.
  2. 중정위를 통해 당 중앙과 국민정부를 조종하였다.
  3. 중집위 결의를 무시하고 보로딘의 사주를 받아 후한민 등 동지들을 배척하였다.
  4. 돤치루이 등 군벌들과 타협을 모색하였다.
  5. 공산당원으로 국민당에 입당하여 후보중앙집행위원이 된 마오쩌둥이 맡은 바 임무를 소홀히 하였음에도 그를 선전부장에 임명하였다.
  6. 국민당을 분화시키려는 공산당의 선전에 호응하여 좌경적인 언론을 퍼트렸다.
  7. 종종의 모략을 이용하여 국민당에 충성하는 군대에 해를 입혔다.
  8. 당원들에게 구추백 등이 발간하는 잡지의 구독은 장려하면서 삼민주의를 찬양하는 저작은 유포와 독서를 금하였다.
  9. 광동대학의 공산화가 여의치 않자 마음대로 교장을 바꾸었다.

문제는 이러한 결의들 중 몇개는 사실관계가 맞지 않거나 너무 모호하게 써서 대중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7번은 왕징웨이가 쉬충즈를 숙청한 일을 말하는데 쉬충즈의 무능과 전횡에 대해서는 장제스도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쉬충즈 숙청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선 바 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장제스 역시 공산당과 결탁하는 좌빨로 보였다는 것(...). 그리고 광동대학 교장 교체에 대해서는 쑨원이 임명한 교장인 쩌우루를 공산당과 보로딘이 축출한 것을 의미한다.

12월 14일 상해당부를 접수한 서산회의파는 정식으로 상해중앙을 출범해 당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4. 외부의 대응[편집]


처음 광저우는 일부 불만을 가진 위원들의 우발적 행동이란 정도의 인식만 가지고 이들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았다. 맨 처음 린썬이 장가구에서 사중전회를 소집하겠다고 알려오자 광저우 중앙은 중전회는 국민정부가 소재한 광저우에서만 소집할 수 있다는 결의사항을 재확인하는 수준의 대응만 했으며 린썬과 쩌우루에게 경비를 지급하란 명령을 재정부에 내리기까지 했다. 또한 2차 대회에서도 린썬은 위원으로 지명되었다. 하지만 쑨원의 영전에서 사중전회를 소집한다는 통전을 받고 나서 사태가 심상치않음을 안 광저우 중앙은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대응을 논의했다. 광저우 중앙은 중전회를 광저우에서만 열 수 있다는 결의를 다시금 확인하고 이를 베이징집행부에 전달하여 서산회의 소집을 막으려 했으나 11월 23일 예정대로 서산회의는 소집되었다. 이에 왕징웨이는 중앙집행위원과 중앙감찰위원들을 모아 연석회의를 연 다음에 서산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15명의 중집위원의 이름을 빌려 서산회의 소집을 비난하는 한편, 이것이 불법회의임을 강조했다. 마오쩌둥이 이 통전의 초안을 작성했다. 마오쩌둥은 연아용공이 쑨원이 혁명의 성공을 위해 직접 채택한 정책이자 일전대회의 공개절차를 거친 당의 기본입장이라면서 서산회의의 반공주의를 비판했고 사중전회의 베이징 소집의 불법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왕징웨이나 마오쩌둥의 논리를 보면 삼중전회가 광저우에서 개최되었으니까 사중전회도 당연히 광저우에서 개최해야한다는 논리라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왕징웨이는 12월 8일 민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산회의에 참석한 중집위원이 정족수미달이므로 서산회의가 불법이란 논리를 전개했다. 그리고 정치보고에서 서산회의를 다시금 비난했다. 다만 미묘한 논조 변화가 있었는데 기존에는 서산회의 참석자 전원에 대해서 반혁명분자, 배신자로 비판하던 논조가 '주동자'로 지목된 쩌우루 한사람만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나머지는 그에게 속았을 뿐이며 당의 원로라고 일부 고평가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국민당 조직부장 담평산이 서산회의는 처음엔 심각한 문제였으나 이젠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쩌우루 한사람만 문제고 나머지는 그저 속아서 이름을 빌려준 사람들일 뿐이라고 서산회의의 의의를 폄하했다. 중앙집행위원회는 쩌우루 한사람만을 추궁하고 다른 사람들에겐 '참가하게 된 경위가 다르다'는 이유로 '억울한 처분'을 당해선 안된다고 주장하고 나섰고 이것이 이전대회에 그대로 보고되기로 결정되면서 광저우 중앙의 공식입장이 되었다. 이는 서산회의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여 그들을 각개격파하려는 전략이었다. 그외에 광저우 중앙과 공산당은 서산회의의 주장에 대해 핵심은 피하면서 회의가 불법이라는 둥의 지엽적인 문제를 물고 늘어졌고 서산회의는 이를 반박했다. 한편 광저우 중앙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1926년 1월 1일 이전대회 소집을 하기로 결정했다.[3]


4.1. 2전대회[편집]


이렇게 개최된 국민당의 제2차 전국대표대회였는데 2전대회의 대회참가자를 심사하는 대표자격 심사위원회는 린썬이 서산회의로 가버리고 등택여가 사직해버리면서 임조함, 마오쩌둥, 담평산 등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다. 여기에 천옌녠, 저우언라이 등이 서산회의파를 엄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중간파 비중을 줄이고 좌파를 중심으로 대표를 선출하며 공산당원이 삼분의 일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섬에 따라 256명의 대표 중 공산당이 90명을 차지하는 등 규모에 맞지 않는 비중을 차지하며 2전대회를 장악하였다. 다만 보이틴스키가 다이지타오, 쑨커, 예추장 등의 중간파를 인정하자고 주장하면서 중공 중앙을 말렸고 이에 천두슈는 쑨커, 예추장, 사오위안충과 담판하여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을 장악할 생각도,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공산당원을 늘릴 생각도 없으니 2전 대회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했다. 장제스는 쑨커와 협의해 서산회의에 관한 의제를 3전대회까지 보류하고 다른 기회에 다시 결정하자고 하는 등 온건론을 주장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 제2차 건국대회를 열고 있지만, 우리들 중국 국민당은 총리가 남겨준 것이다. 우리는 총리의 마음을 우리 당의 마음으로 삼고, 총리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삼아야 한다. 제2차 전국대표대회의 결과가 천상의 총리를 나날이 탄식케 하는 것과 같은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장제스의 발언.


이는 서산회의에 관한 의제가 공식적으로 상정될 시에 당의 분열이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를 것을 우려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대회비서장 오옥장과 조직부장 담평산 등의 주도로 서산회의탄핵안이 공식 상정되었고 1월 13일 오후회의에서 논의되었다. 장제스로부터 온건론을 주문받은 왕징웨이는 자신의 의견이 황포군관학교와 제1군의 지지를 받는 의견임을 내세우며 서산회의파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요청했다. 하지만 공산당원들은 엄중한 처벌을 강하게 요구하며 격론이 벌어졌다. 표결에 따라 온건론이 채택, 기존의 탄핵안에서 언급된 강경론에서 크게 후퇴한 서산회의 탄핵결의안이 1월 16일 정식으로 통과되었다. 이 결의안은 쩌우루, 셰츠 두사람을 국민당에서 영원히 제적하고 린썬, 장쥐, 쥐정, 샤오위안충 등에겐 사면으로 반성을 촉구하고 2개월 내에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적한다는 강경한 것이었다. 이후 열린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집위원, 감찰위원 및 후보위원에서 공산당원들이 대거 약진, 9명의 중집위원과 6명의 후보위원, 2인의 감찰위원, 1인의 후보감찰위원을 배출했다. 이후 조직부장 겸 비서처 비서에 담평산, 농민부장 겸 비서처 비서에 임조함, 선전부장에 마오쩌둥이 앉았다.그리고 공인부장은 후한민이었으나 숙청당한 상태라 공인부 비서 풍국파가 장악했고 부녀부장 쑹칭링이 사퇴하여 부녀비서 덩잉차오가 장악했다. 서산회의는 이러한 이전대회의 대응을 예견하여 반응을 보이진 않았으나 쩌우루, 셰츠 등에게만 국한된 강경한 처벌이 서산회의파의 분열을 야기할까봐 우려하였다.


4.2. 다른 인물들의 반응[편집]


  • 후한민의 경우, 우리나라엔 장제스나 왕징웨이에 묻혀 거의 아는 사람이 없으나 국민당 우파의 상징적 인물로 일찍이 사중전회 소집으로 공산당을 억제하자고 주장했던 인물이며 왕징웨이와 더불어 쑨원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오랜 혁명동지였다. 만약 그가 서산회의에 찬동한다면 광저우 중앙의 입장에선 타격이 컸고 이에 베이징집행부 집행위원 이대조가 모스크바의 후한민에게 전보를 보내 린썬 등의 반공활동을 포기하게 해달라고 종용했다. 후한민은 이대조에게 직접적인 화답을 하진 않았으나 11월 25일 왕징웨이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이 서산회의에 찬성하지 않음을 밝혔다. 그리고 12월 중순에 모든 중전회가 광저우에 개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는 후한민이 반공적인 입장은 여전했으나 서산회의의 분파주의적 행보에는 찬동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 쉬충즈는 당시 상하이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서산회의에 참석하진 않았으나 서산회의 참가자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줌으로 서산회의에 대한 옹호를 간접적으로 표명했다. 이때문에 상하이 당중앙의 독자적 이전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비록 쉬충즈는 참여는 거부했으나 반공을 위해 계속 서산회의파와 회동을 같이 함으로 일반적으로 서산회의파로 분류된다.

  • 쑨커의 경우, 중집위원은 아니었으나 쑨원의 아들이란 점에서 영향력이 강했고 태자파로 불리는 계파까지 이끌 정도의 인물이어서 서산회의파는 그를 포섭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쑨커도 국민정부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서산회의파와 제휴, 홍콩에서 1만원을 마련하여 경비로 지원해주었다. 이에 광저우 중앙도 쑨커를 회유하려 했고 쑨커는 광저우로 돌아가게 된다. 광저우 중앙은 쑨커를 이전대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했고 쑨커는 서산회의파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이는 서산회의파가 반왕징웨이의 대안으로 자신이 아니라 장제스에 기대를 거는 것에 쑨커가 불만을 가졌기 때문으로 보이며 쑨커와 서산회의파의 단절은 서산회의파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 장제스는 명확한 입장을 표명할 기회가 없었으나 황푸군관학교 특별당부는 12월 18일 서산회의 소집에 공식적으로 반대했다. 장제스도 12월 25일 서산회의가 국민정부의 대의를 방해한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왕징웨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더라도 장제스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던 서산회의파는 군권을 가진 장제스가 광저우 내부에서 서산회의에 내응해주길 기대했으나 장제스가 공개적으로 자신들을 비판하고 나서자 배신감에 장제스의 주장에 조목조목 맞섰으나 이후에도 장제스를 회유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를 묵살했다. 허나 장제스는 이후 이전대회에서 공산당의 지나친 성장을 우려하여 서산회의파에 대한 온건론을 주장했다.

  • 허샹닝은 서산회의의 소집을 크게 비판했다. 해당 문서 참조.


4.3. 공산당의 반응과 대응[편집]


중국 공산당 역시 서산회의의 소집에 큰 충격을 받았다. 중국 공산당 중앙은 65호 통고를 통해 국민당 우파와 친우파의 회합, 즉 서산회의가 불법이라 규정하며 전국에 서산회의가 무효임을 알리는 통전을 보낼 것을 지시했다.이에 따라 전국 각지의 공산당원들은 서산회의를 매우 강력하게 규탄했고 당시 국민당 선전부장 대행이었던 마오쩌둥은 <정치주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사실상 혁명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하는 투쟁이며, 서산회의파는 사실상 제국주의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서산회의파에 반공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받아치는 것은 서산회의파의 주장에 오히려 힘을 실어줄 가능성을 우려하여 서산회의 소집의 근본적 '불법성'을 강조하는 한편, 이를 국민당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폄하하는데 집중했다. 즉 민감한 사안은 언급을 피한 것이다. 공산당은 서산회의파의 등장으로 인해 국민당이 전면적으로 분열되어 국민당 좌파와의 동맹이 조성한, 공산당에 유리한 국면이 사라질까봐 크게 염려하였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공산당은 국민당 좌파를 엄호하며 국민당 우파의 확산을 막기 위해 삼민주의확회를 설립하여 서산회의파에 대응하는 한편 서산회의에 우호적인 당원들을 처벌하였다. 이후 공산당은 자신과 제휴를 거부하면 죄다 서산회의파라고 공격하게 된다.

한편으론 공산당은 국민당의 완전 분열을 염려하였고 이 때문에 서산회의파의 중도적 인물을 포섭하려는 시도도 하였다. 쑨커, 채원배 등이 공산당과 협의하여 국공합작을 위한 7가지 합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자신들이 너무도 국민당 당무에 깊이 관여하여 국민당 내부의 반발을 이끌었다고 인정하며 공산당의 독자적 발전을 꾀하게 되었다. 이는 중공당원들의 환영을 받았으나 미하일 보로딘과 코민테른 요원들은 이러한 결정에 반발, 당중앙의 결정을 국민당 우파에 대한 양보, 타협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이전대회에서 왕징웨이의 온건론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된다.


5. 결과[편집]


결국 국민당 상하이 중앙과 광저우 중앙으로 분열되어 두개의 국민당이 각자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는 분열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반공주의자들의 반동 행위로 폄하되어 주목받진 못했으나 서산회의파의 상하이 중앙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2년간 조직을 유지시켰으며 지역적 기반도 있었고 해외활동도 활발했으며 국민당 광저우 중앙에도 꾸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후 광저우 중앙이 국민당의 1차 북벌 와중에 폭발한 국공 갈등으로 인해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로 갈라지면서 중국에는 무려 3개의 국민당이 난립하는 상황이 벌어졌으나 1927년 장제스의 하야와 더불어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가 구성되자 서산회의파의 상하이 중앙은 1927년 9월 해산하고 난징 국민정부로 합류했다. 이후 서산회의파는 공식적으로 소멸했다고 주장하였으나 서산회의파는 반공, 반장의 움직임을 보이면서 1931년까지 꾸준히 활동한 흔적을 보이고 있다. 장제스와는 초기에는 장제스 포섭을 위해 노력했으나 장제스가 광저우 중앙을 따르면서 이들을 불법조직으로 비판하자 관계가 악화되어 그를 '믿을 수 없는 인물'로 디스했고 이후 상하이 쿠데타 이후 좀 관계가 진전되었으나 영한합작 과정에서 장제스와 악연이 깊었기 때문에 이후로 같은 반공 우파적인 입장을 취했음에도 반장의 입장을 취했다.


6. 평가[편집]


처음에는 공산당과 국민당 양당에 의해 반혁명, 반동분자들의 불법행위라고 낙인 찍혔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졌다. 서산회의파에 대해서도 처음엔 그저, 좌파에 반발한 우파들의 권력투쟁 행위 정도로만 인식했고 처음의 대만에서의 재평가 물결도 이들의 반공 기질에만 집중했으나 현재는 서산회의파 역시 나름의 반제국주의 현실 인식과 돤치루이의 독재에 대한 반대 투쟁 등의 현실 개혁 움직임을 분명히 보였다는 점이 재평가받고 있다.


7. 참고문헌[편집]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공산당역사 제1권 상, 중국공산당중앙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西山會議 召集에 대한 各界의 反應, 김영신, 동국사학 31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 국민혁명 초기 국민당 우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김영신, 단국대학교 동약학연구원.
  • 北伐 前後 中國國民黨의 內紛 : '上海中央'의 활동과 廣州中央의 대응을 중심으로, 김영신, 중국근현대사연구 4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黨務에 관한 결의를 통해 본 西山會議의 본질, 유지원, 김영신, 중국학연구 58권, 중국학연구회.
  • 中國國民革命期 西山會議派의 性格 再檢討, 백영서, 역사학보 121권, 역사학회.


8. 관련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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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당시 마오쩌둥은 후보집행위원에 불과했고 주로 칼날은 중앙집해위원인 담평산, 리다지오 등을 겨냥했다.[2] 상해중앙 기관지.[3] 이전대회는 그동안 세번이나 날짜가 바뀌는 등 준비가 매우 지지부진하였는데 서산회의에 대응하기 위해 모든 준비작업이 1개월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