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국공합작 (r20210301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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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2. 배경[편집]
2.1. 신해혁명에서 호국전쟁까지[편집]
쑨원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였고 황싱은 구사연구회를 조직하였다. 1915년, 초급총통제로도 만족하지 못한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하자 그동안 위안스카이를 옹호하던 입장이었던 진보당의 영수 량치차오도 반원으로 돌아서 차이어, 탕지야오 등과 연합하여 호국전쟁을 일으켰다. 남방의 여러 군벌과 실력자들, 해외의 중화혁명당도 이에 동조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립 선포, 토원봉기를 일으켰고 남방에 군무원이라는 대립정부가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위안스카이의 무리수에 열강이 지지를 철회하고 위안스카이의 측근과 심복들까지도 대거 이탈하여 호국군에 합류하면서 궁지에 몰린 위안스카이는 제제를 취소하고 급병으로 사망했다. 후임 총통 리위안훙은 구국회와 약법 복구를 약속하였고 호국전쟁은 종식되어 중화민국의 민주주의가 회복된 듯 하였다.
2.2. 호법운동의 좌절[편집]
복벽을 제압한 돤치루이는 국회 회복을 거부하고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 량치차오의 연구계를 규합하여 독재를 하였다. 이에 쑨원은 구 국민당으로 구성된 헌정 상각회 국회의원들을 거느려 광저우로 남하, 서남군벌 탕지야오, 루룽팅과 연계하여 광저우에 호법정부, 즉 1차 광동 군정부를 설치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돤치루이가 무력토벌을 감행하면서 이는 호법전쟁으로 번졌으나 북양정부의 분열과 북방과 협상을 원한 천춘쉬안 등 정학회 정객들의 음모, 호법이 아니라 세력확장이 목적이었던 전계군벌, 계계군벌들의 배반으로 인해 쑨원은 사실상 군정부에서 축츨되어 광저우를 떠나야 했다. 쑨원은 5.4운동 이후 대중노선에 주목하여 1919년 중화혁명당을 중국 국민당으로 개조하여 다시 혁명을 도모했다.
1920년 광동군벌 천중밍이 루룽팅을 축출하고 광동을 장악한 후 쑨원을 초빙하면서 2차 호법운동이 벌어졌으나 1922년 1차 직봉전쟁에 개입하여 북벌을 시도한 쑨원에 반발한 천중밍이 6월 16일 영풍함 사건을 일으켜 쑨원을 다시 축출했다. 1922년 8월, 1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한 직예군벌이 수령 차오쿤을 대총통에 옹립하기 위해 구국회를 회복함에 따라 쑨원의 맹우들 대다수도 북상하여 쑨원을 버렸고 1923년 10월 회선 사건이라 불리는 차오쿤의 뇌물선거가 벌어지면서 호법운동은 완전히 단념되었다. 1923년 운남과 광서 군벌 류전환, 양시민과 연합하여 천중밍을 축출하고 3차 광동정부를 수립한 쑨원은 호법운동과 영미를 비롯한 구미 열강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자체적인 무장을 확보하여 혁명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2.3. 중소우호관계 조성[편집]
- 1. 소련 정부는 제정 러시아가 일본, 중국 및 제정시대의 동맹국과 체결한 일체의 비밀조약을 폐기한다.
- 2. 소련정부는 중동철로와 그 일체의 부속권익을 무상으로 중국에 반환한다.[2]
- 3. 소련정부는 중국이 지불하기로 되어 있던 의화단 배상금을 포기한다.
- 4. 소련정부는 조차지, 영사재판권 등 러시아인이 중국 영토 안에서 소유하던 일체의 특권, 특수구역을 폐지한다.
이 선언은 8월 26일 이즈베스티야 지에 게재 되었으나 중소 교통의 단절와 돤치루이 정부의 대소 봉쇄 정책으로 인해 6개월이 지난 후에야 중국에 알려졌다. 1920년 3월 3일 극동대외사무 전권대표 야코프 얀손이 소련 외사인민위원회의 위탁을 받아 중국의 주 이르쿠츠크 영사관에 제1차 대중국 선언을 전달했고 중국정부 외교부가 3월 26일에 이를 수용하면서 중국 각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 카라한 선언은 결과적으로 하나도 시행되지 않은 기만적 선언이었지만 소련이 표방한 피압박 계급의 해방, 비압박 민족의 해방의 구호는 중국의 혁명가들을 고무시켰다. 중국 각지의 316개 단체가 소련정부에게 카라한 선언은 세계에서 제일 큰 빛을 가져다주는 것이 된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으며 소련에 대한 우호감정도 대단히 높아졌다. 중국정부는 1920년 7월 1일 경자배상금 지불을 중단했고 지금껏 러시아 제국을 승인하던 방침을 포기하고 1920년 9월 23일 러시아 제국이 파견한 러시아 공사, 영사들에 대한 외교관 대우를 중지하고 중국의 러시아 조계와 재산을 중국이 관리하겠다고 선포했다.
1920년 8월부터 1921년 10월까지 명목상 극동공화국 대표이고 실질적으로는 소련 친설사절단의 임무를 띤 이그나티우스 유린이 4차례에 걸쳐 베이징을 방문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했다.[3] 1920년 9월 27일 카라한이 제2차 대중국 선언을 발표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1. 러시아 제국 정부와 러시아인이 약탈하였던 것을 무조건 중국에 반환한다.
- 2. 양국 정부는 신속히 상무와 경제 관계를 성립시키며 서로 최대의 이익이 되는 상무 조약을 체결한다.
- 3. 양 국민은 영사 재판권의 특권을 향유하지 못한다.
- 4. 양국은 중동로 철도에 관하여 협약을 체결한다.
이에 중국 정부는 1920년 11월 30일 외교부 아사위원회 회장 유경인에게 유린과 비공식적으로 담판할 것을 지시했으며 1921년 4월 정식으로 접대했다. 5월 8일 일시 귀국했던 유린은 7월에 다시 방중하여 중소 상무조약, 중동로 철도, 외몽골 문제를 협상했으나 진전은 없었다. 유린이 10월에 귀국한 이후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의 주도로 1921년 12월 파이케스가 소련 주중국 전권대표로 임명되어 12월 12일 중국에 도착, 중국과의 협상을 담당했다. 파이케스는 기존의 대중국 선언을 확인하면서도 기존의 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권익의 전면 철폐가 아니라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즉 중동로 철도 문제와 외몽골 문제에 관해 소련의 이익을 사수하려는 것이 목표였는데 중국 정부는 주권 회수를 목표로 삼고 이미 실질적으로 이를 어느 정도 진행시켰기 때문에 협상에 응하지 않아 진전이 없었다.
2.4. 중국 공산당의 등장[편집]
1921년 6월 3일, 코민테른 주중국대표 마링이 상하이에 도착하여 원동서기처 니콜스키와 만나 이한준과 이달에게 중국 공산당의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이해 상하이 서기 대리 이달이 6월 20일을 대회 일자로 잡고 100원의 여비를 보내며 각지의 공산주의 소조에서 대표 2명 씩을 상하이에 파견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7월 23일[4] 에야 각지의 대표가 모이게 되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망지로 106호의 이한준의 집에서[5] 제1차 전국대표대회, 약칭 1전 대회가 비밀리에 소집되었다.
대회를 지도한 것은 코민테른 대표와 마링과 니콜스키였고 참가자들은 7개 조직, 50여명의 당원을 대표한 13명이었다.[6] 이중에는 후일 탈당한 광동대표 천궁보, 일본대표 저우포하이, 베이징 대표 장궈타오를 포함하여 상하이 대표 이달, 호남대표 마오쩌둥, 우한대표 진담추, 우한대표 둥비우, 산동대표 등은명, 상하이 대표 이한준, 유인정, 왕진미, 하숙형, 천두슈의 대리인 포혜증 등이 참여하였다. 회의 도중인 7월 30일, 프랑스 조계지 경찰이 회의장을 수색하는 통에 대표들은 8월 1일, 마지막 회의 장소를 절강성 가흥현 남호위의 유람선으로 정하여 그곳에서 폐회했다. 이들은 정식으로 중국 공산당이라는 당명을 정하고 무산계급의 혁명군으로 부르주아 계급을 무너뜨리고 무산계급 전정과 사유재산 폐지, 계급차별 소멸을 천명했다. 중앙국이 설치되고 천두슈가 총서기, 장궈타오가 조직주임, 이달이 선전주임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세력이 미약하였고 크렘린의 평가도 좋지 않았다.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서 카를 라데크(Karl Berngardovich Radek)는 중국 공산당에 대해 신랄한 평가를 내렸다.
"동지들, 장밋빛 꿈속에 빠지지 마시오. 당신들의 힘을 과대평가하지 마시오. '우리 중국인 동지가 이 자리에서 뿌리를 강하게 내리고 있다'라고 말할 대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친애하는 동지여, 일을 시작할 때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있는 그대로 보아야만 합니다.' 광동이나 상하이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의 동지들은 노동자 계급과 연합하는데 실패했습니다. (...) 그외의 많은 동지들은 그들의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어 마치 한때 공자를 연구했듯이 마르크스와 레닌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동지들, 사회주의나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의문은 이제 일상적인 행사가 아님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 우리의 당면과제는 첫째, 젊은 노동자 계급을 조직하는 것, 둘째, 유럽과 아시아의 제국주의에 투쟁하기 위하여 혁명적 부르주아 요소와의 관계를 규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혁명적 부르주아 요소'와의 동맹이 소련이 추구하는 바였다. 1921년 6~7월, 코민테른의 제3차 당대회는 후퇴기 전술을 제시하여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통일전선 방침을 채택했다. 소련은 직예군벌의 실질적인 수령 우페이푸나 광동군벌 천중밍 등의 '혁명적' 군벌과 접촉했고[7] 쑨원의 중국 국민당에게도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2차 대표대회 이후 코민테른에 가입한 중국 공산당은 부르주아들과의 동맹을 요구하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국공합작의 시작이었다.
3. 전개[편집]
3.1. 쑨원과 소련의 접촉[편집]
소련과 쑨원의 첫 접촉은 1920년 11월, 천두슈의 소개로 중국 공산당 창건을 위해 방중 중이던 보이틴스키가 상하이에서 쑨원을 만나 볼셰비키 혁명에 관해 설명해준 것이었다. 이때 쑨원은 광동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소련과 접촉이 어려우니 만주나 블라디보스토크에 전파기지국에서 소련과 광저우 사이의 통신을 할 수 있겠냐고 물었고 보이틴스키는 중국 남부에서의 군사적 승리가 중국 중북부 지역의 혁명운동으로 발전되기를 희망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920년 10월 소련외교인민위원 치체린이 쑨원에게 편지를 보냈고 쑨원은 1921년 8월 28일 소련과 연계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1920년 12월 제정 러시아 장군 출신의 포타포프가 쑨원을 만난 후 치체린에게 "광열한 반영주의자인 쑨원은 중국 각지에 자신의 추종자들을 갖고 있으며 (...) 많은 자본가들이 그에게 물질적인 지지를 제공하고 있다. (...)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하려고 하고 있으며, 통일 후에는 선거를 통해 의회를 조직하려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극동부 서기 소콜로프는 쑨원의 기본목표가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소개하며 상하이의 노동자와 수공업자들이 쑨원의 초상화를 걸고 있음을 지적했고 소련의 극동정책의 가장 긴박한 임무는 광저우 정부와 관계를 맺는 것이라 지적했다. 1921년 11월 최초의 공식 사절단 파이케스가 중국에 파견되기 직전에 치체린은 쑨원보다는 북양정부와 협상하는 것에 기대를 걸고 레닌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허나 레닌은 쑨원과 협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에 치체린은 파이케스에게 광저우 정부와 비밀리에 접촉할 것을 지시하며 쑨원에게 보내는 편지를 급히 전달하고 절대로 북양정부와의 관계 정상황에 영향을 주지 말 것을 당부했다.
3.2. 쑨원-마링 회담[편집]
- 1. 국민당을 개조하여 사회의 각계, 특히 농민, 노동대중과 연합한다.
- 2. 군관학교를 창설해서 혁명군의 기초를 만든다.
- 3.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합작을 도모한다.
마링은 1921년 3월 제10회 당대회에서 정식으로 확인된 소련의 신경제정책을 예시로 들며 소련 정책의 유연성에 대해 강조했고 쑨원은 신경제정책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쑨원은 중국에서는 공산혁명이 불가능하다는 분명한 뜻을 밝히며 2번째 회담의 말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련은 혁명 후 아직 4년도 되지 않았고 나는 소련의 실정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도 혁명당원이다. 그런데 어찌 혁명에 대해 동정을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혁명의 주의라는 것은 나라에 따라서 다르다. 갑의 나라에서 가능한 일이 반드시 을의 나라에서도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공산혁명에 소련에서는 가능했지만 중국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앞으로 북벌을 위해서 영국의 세력범위인 장강 유역으로 들어간다. 만약에 우리가 소련과 제휴하고 있다는 것을 영국이 알게 된다면 영국은 반드시 우리를 타도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북벌계획은 마지막이 된다.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지금은 다만 소련과 의례적인 연락만을 취하겠다. 우리가 북양군을 타도한 후에 다시 구체적으로 검토해서 합작을 도모한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에 마링이 질문했다.
"선생이 가지신 혁명사상의 기초는 무엇인가?"
쑨원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중국에는 하나의 도덕적 전통이 있다. 그것이 요, 순, 탕, 문, 무, 공자로 이어져 내려왔다. 내 사상의 기초는 이러한 전통에 있다. 나의 혁명은 중국의 전통사상을 계승하고, 나아가서는 더욱 그것을 발양, 확대하자는 것이다."
당연히 마링은 중국의 전통사상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적잖게 당황했다. 마링은 쑨원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지만 쑨원이 여전히 중국 고대 사상에 대해 설명하자 포기하고 무엇 때문에 혁명을 하는지 물었다. 쑨원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혁명을 하는 것이다."
이 대답 역시 마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10] 마링은 쑨원과 대담을 마치고 국민당 간부 장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류애를 위해 혁명을 하는 것이라면 혁명은 영원히 성공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고 원망하며 미워하기 때문에 혁명을 하는 것이다."
결국 마링은 소련과 국민당의 구체적인 합작안에 대한 합의를 보지 못하고 분명한 의견차를 확인한 다음에 계림을 떠나게 되었으나 국민당이 코민테른의 계획에 적합하다는 인상을 받고 우페이푸나 천중밍보다는 쑨원과 합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마링은 다시 광저우로 이동, 천중밍, 랴오중카이 등과 회견한 후 베이징으로 돌아와 쑨원이 사회주의 성향이 짙다고 고평가하며 주중국대표 파이크스에게 코민테른 집행국과 소련 외교인민위원회에 보내는 두 통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코민테른 집행국에 보내는 보고서에는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에 대한 사정이 설명되어 있으며 국공합작의 필요성이 역설되어 있었고 소련 외교인민위원회에 보내는 보고서에는 중국 나방에 사절단을 파견해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쑨원 역시 공산혁명에는 반대했으나 신경제정책 등에 듣고 소련과의 합작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어 더욱 강성한 반제 성향을 보이며 랴오중카이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3.3. 쑨원-달린 회담[편집]
다만 1922년 6월까지 쑨원은 바이마르 공화국이나 일본, 영국, 미국과의 합작에 대해서도 완전히 포기한 상태가 아니라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쑨원은 1922년 4월 라팔로 조약을 체결해 소련과 우호관계를 맺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큰 기대를 걸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미 1921년 5월, 유럽 국가 중에서는 최초로 중국을 평등과 호혜의 원리에 따라 대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국제법이 통상적으로 규정하는 외의 어떠한 치외법권이나 특수권익도 포기했다. 독일 측에서도 치머만 전보 사건을 주도한 바가 있는 전 외무장관 파울 폰 힌체(Paul von Hintze)가 소련과 국민당을 연결하는 3각동맹을 구상하며 쑨원과 접촉하고 있었다.
1922년 5월 파이케스는 코민테른 대표 세르게이 달린을 보내 쑨원과 협의하게 했다. 달린은 통일전선의 이점에 대해 설명했지만 쑨원은 광저우에 소련 공산당 간부를 파견하고 광저우와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도로 건설 지원을 요청할 뿐, 한커우를 점령한 후에야 소련을 승인하겠다고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몽골이 중국의 불가분의 일부로 몽골에 대해서도 타협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소련과 합작하려는 조속한 움직임은 영국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달린과의 회담 직후 영풍함 사건이 터졌고 영풍함 사건에서 영미에게 실망한 쑨원은 바이마르 공화국과 소련에게 더욱 기대를 걸게 되었다. 허나 1922년 9월, 쑨원이 광저우에 두고 간 외교문서들이 천중밍에게 노획되어 홍콩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소련-국민당 3각 동맹이 폭로되었다. 쑨원은 자신이 공산주의를 옹호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면서 영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고 밝혔지만 원래도 쑨원의 지위를 의심하고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이 쑨원과의 모든 공식적 관계를 부인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과의 합작도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고 남은 것은 소련 밖에 없었다.
3.4. 중국 공산당의 통일전선 방침[편집]
확실히 일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 필요성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없었기에 중국 공산당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로 규정된 천중밍, 우페이푸 등과 접촉하였다. 천중밍은 중국 공산당과 연계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공산당과의 합작을 먼저 제의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왔는데 이에 따라 1920년 천두슈가 교육위원회 위원장으로 초빙되는가 하면 1921년 8월 공산당원 펑파이가 해풍현 근학소장에 임명되었고[11] 공산당은 천중밍과 함께 감조운동을 전개하고 광동에서 선전활동을 벌였다. 이 때문에 공산당 내부에서는 임조함, 담평산, 천궁보 등이 쑨원을 환상주의자로 비판하며 천중밍과 합작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우페이푸 역시 철도산업을 독점하고 있는 교통계 탄압을 위해 공산당을 이용하고자 했는데 공산당 역시 철도노동자조합 건설을 위해 우페이푸와 연계하였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당내합작이라는 형태의 국공합작에 대해서는 반대를 분명히 표했다. 1922년 4월 6일 천두슈는 보이틴스키에게 국공합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 1.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의 혁명 목표와 지지 기층이 다르다.
- 3. 중국 국민당은 당강을 발표한 일이 없어 광동 이외의 사람들은 이권을 쟁탈하는 정당으로 간주하여 중국 공산당이 가입하면 발전할 기회가 없어진다.
- 4. 광동의 실력파 천중밍이 쑨원을 반대하여, 공산당원이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면 천중밍이 중국 공산당을 적대시하여 광저우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될 것이다.
- 5. 이미 각지의 중국 공산당 당원들이 회의를 열어 중국 국민당에 가입을 찬성하지 않아 사실상 가입할 가능성이 없다.
한편 천중밍은 중국혁명이 아니라 지역적인 정권의 공고화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평가가 하락했고 1922년 6월 16일, 영풍함 사건이 일어나자 중국 공산당은 쑨원 지지 선언을 발표하면서 천중밍과 결렬했고 담평산 등 천중밍을 지지한 공산당원들을 징계했다. 코민테른이 천중밍에 대한 관심을 끊으면서 천중밍은 공산당의 합작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922년 7월 16일부터 7월 23일까지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어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에 가입, 코민테른의 중국 지부가 되겠다고 결의한 바가 있었다. 천두슈가 국공합작에 대해 반대를 분명히 하자 마링은 코민테른을 움직이기로 했다. 1922년 7월 모스크바에 돌아간 마링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중국 국민당을 단순한 부르주아 정당이 아니라 여러 계급의 연맹이며 민족 혁명 운동에 힘이 있는 진보적 정당임을 강조하며 국공합작이 필요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코민테른은 마링의 건의를 받아들여 7월 18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게 통지를 접수하는 대로 즉시 당의 주소를 광저우로 옮기고 모든 활동에 대해 마링과 긴밀히 연락하라고 지시했다.
이러한 지시를 받은 중국 공산당은 1922년 8월 하순, 항저우 서호에서 이틀 동안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천두슈, 리다자오, 차이허썬, 장궈타오, 고군우, 마링, 장타이레이 7인이 참석했다. 마링은 중국 공산당에게 코민테른의 7월 지시와 8월 지시에 따른 중국 국민당에 대한 태도를 밝히고 당내 합작 방식으로 국공 통일전선을 달성할 것을 지시했다. 리다자오는 국공합작에 찬성하는 의견을 보였으나 장궈타오는 당내 합작은 당 정책을 견제받는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천두슈는 코민테른의 결정이라면 복종할 수 있으나 반드시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면서 쑨원 앞에서 서약해야 하는 입당 방법을 취소하고 중국 국민당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회의 결과, 중국 공산당은 대다수가 당내 합작에 찬성하여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자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당연히 중국 공산당의 입장으로서는 자신들이 코민테른의 하부조직으로 코민테른의 대표 의견을 추종해야 한다는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중국 공산당이 사용하는 경비의 94%가[12] 코민테른에게서 지원되고 있었으므로 코민테른에 절대 복종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후로도 우페이푸와 공산당의 동맹 추진 역시 진행되었다. 1922년 7월 소련 외교인민위원부 극동사무전권대표 빌렌스키는 우페이푸를 중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소개하며 군대, 재정, 교통, 내정부를 장악하고 남방의 다수 성의 지지를 받으며 그 위세로 쑨원을 무너뜨리기 직전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우페이푸와의 회담 역시 유익하고 의의있다고 보고했다. 우페이푸가 소련과의 접촉에 적극적으로 나온 것은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우페이푸가 교통계 탄압을 위해 공산당의 힘을 빌리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1922년 9월~10월, 중국 공산당은 우페이푸와 협상하여 교통부에 공산당원들을 파견한다는 합의를 보았다. 이로 인하여 경한철도를 중심으로 노동자 조직이 형성되어 강력한 노동운동을 전개, 교통계를 타도했고 1922년 11월에 개최된 코민테른 제4차 대표대회에서 카를 라데크는 우페이푸와 연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노동운동이 급격히 성장한 것을 우려한 우페이푸는 1923년 2.7 사건을 일으켜 50여명의 노동자를 살해하고 300명에게 부상을 입혀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이 때문에 분노한 공산당은 우페이푸와도 결렬했고 공산당과 합작할 수 있는 세력은 국민당만 남게 되었다.
3.5. 쑨원-요페 공동선언[편집]
1922년 7월 26일 소련 정부는 파이케스를 대신하여 유대계 독일인 아돌프 요페를 주중국전권대표로 임명하여 중국에 파견했다. 8월 12일 중국에 도착한 요페는 베이징에서 장궈타오를 만나 중국 국내 사정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요페는 기본적으로 우페이푸, 쑨원과의 합작을, 그리고 '일본의 주구'로 소련의 악평을 받던 장쭤린을 제거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았다. 요페는 소몽우호조약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며 중동로를 무상으로 반환하는 것은 어렵다는 입장을 보이며 중국과의 외교관계 체결, 상무 협정 체결에 대해 북양정부와 논의했으나 우페이푸의 입장이 단호하여 진전이 없었다. 허나 또 다른 과제인 국공합작에 관해서는 매우 신속하게 진전이 이루어졌다.
요페는 쑨원에게 대표를 파견하여 극동의 정세와 해결 방안을 의논했다. 요페는 우페이푸-쑨원의 동맹을 구상했기 때문에 쑨원이 자신을 초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우페이푸의 눈치를 살피느라 그를 찾아가진 못했다. 쑨원은 9월에 랴오중카이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에서의 회담을 추진하였으나 이는 무산되었다. 요페는 8월부터 12월까지 쑨원에게 4통의 편지를 보냈다. 요페는 쑨원에게 소련은 몽골에 침투할 생각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현재처럼 혼란한 시각에 군대를 철수한다면 일본 제국주의가 기회를 타서 들어갈 것이므로, 우리가 지금 몽골을 떠나는 것은 중국에 불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나의 의견에 동의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요페는 우페이푸에게도 비슷한 뜻을 타진했는데 우페이푸에게는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라 장쭤린이 몽골을 점령할 것임을 강조했다. 우페이푸는 전적인 동의를 표하면서도 1923년에 군대를 조직하여 몽골을 점령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이는 소련의 몽골 주둔의 개연성은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주둔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쑨원은 요페가 북양정부과 관계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직예군벌을 비난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여기에 쑨원은 묻지도 않은 중동로 철도 문제까지 제기했다.
쑨원의 이러한 태도는 쑨원이 영풍함 사건으로 영미에게 실망하고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도 지원을 거절하자 소련의 지원이 더욱 절실해졌기 때문이었다. 중동로 문제가 중국 주권 문제와 관련된 민감한 것이라 묻지도 않았던 찰나에 쑨원이 중동로 문제에 관해서 소련의 입장을 마치 소련의 소극적인 모습을 비판하듯이 열렬히 지지하자 요페는 '쑨원은 걸려들었다'라는 급전을 보내며 쾌재를 올렸다.[13] 1922년 8월부터 12월까지 요페는 쑨원에게 4통의 편지를 보냈고 쑨원은 요페에게 3통의 편지를 보내 소통했다. 쑨원은 자신이 몽골 독립을 반대하는 것에 대해 몽골은 중국의 일부라는 기존의 강경한 주장에서 지금 몽골 독립을 지지하면 자치주의자들의 세력이 확대되기 때문이라고 입장을 후퇴했고 "몽골 자치와 중동철도 주둔이 중국과 협상한 결과라면 쑨원 본인은 물론 국민당도 모두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까지 전달했다. 요페는 우페이푸를 배제하고 쑨원과 합작하는 것이 소련의 이익에 부합하다는 확신을 내리게 되었고 마링에게 우페이푸를 사리사욕에 정신이 팔린 군벌이라고 혹평했다. 따라서 쑨원과 요페의 접촉은 갈수록 급진전을 보였다.
11월 국민당 간부 장계가 요페에게 쑨원의 친서를 전달했고 12월에 장계는 요페와 두번 만나 요페와 쑨원이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요페는 북양정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장춘회의에 참가하였다가 쑨원의 초청을 받고 1923년 1월 병을 핑계로 남하하여 1월 17일 상하이에 도착하여 1월 22일 쑨원을 방문했다. 리다자오, 쑹칭링이 배석한 상태에서 쑨원-요페 회담이 열렸고 국민당 개조 문제, 코민테른의 중국 혁명 원조 문제가 논의되었다.
4. 참고문헌[편집]
4.1. 단행본[편집]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북스.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중국국민혁명운동의 구조분석, 민두기, 지식산업사.
- 중국국민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 민두기, 지식산업사.
-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중국 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코민테른과 중국혁명 관계사, 향청, 고려원.
- 중국공산주의운동사, 벤자민 슈워츠, 형성사.
- 중국공산주의운동사 1919~1978년, 신상초, 집문당.
- 중국 공산당 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4.2. 논문[편집]
- 국공합작과 孫文·요페공동선언 : 몽골문제와 중동철도문제를 중심으로, 이승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29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제1차 국·공합작 : 성립배경과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김영숙, 호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 제1차 국·공합작의 과정과 실패원인에 관한 연구, 오수열, 채명희, 한국동북아논총 19권 1호, 한국동북아학회.
- 중국국민당 좌파의 기수 랴오충까이(寥仲愷)와 국민당 개조작업, 장공자, 글로벌정치연구 2권 2호,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정치연구소.
- 제1차 國共合作의 形成과 그 影響에 관한 硏究, 이준태, 아태연구 7권, 경희대학교아태지역연구원.
- 政治勢力 간 통일전선 측면에서 본 제1차 國共合作의 고찰, 이준태, 아태연구 15권 1호, 경희대학교아태지역연구원.
- 제1차 국공합작기 왕정위의 (汪精衛) 정치적 역할과 혁명전략의 변화 - 무한국민정부 시기를 중심으로, 이재령, 사학지 25권, 단국대학교사학회.
5. 관련문서[편집]
5.1. 인물[편집]
5.2. 단체[편집]
5.3. 사건[편집]
- 홍헌제제(1915.12.12)
- 호국전쟁(1915.12.25~1916.7.14)
- 부원지쟁(1916~1917)
- 장훈복벽(1917.7.1~1917.7.12)
- 1차 호법운동(1917.7.17~1918.5.21)
- 호법전쟁(1917.9.19~1918.11.22)
- 안직전쟁(1920.7.14~1920.7.23)
- 2차 호법운동(1920.11.28~1922.8.9)
- 1922년 홍콩 선원 파업(1922.1.13~1922.3.8)
- 영풍함 사건(1922.6.16)
- 회선 사건(1923.10.5)
- 광저우 상단 사건(1924.8 ~ 1924.10)
- 강절전쟁(1924)
- 2차 직봉전쟁(1924.9 ~1924.11)
- 북경정변(1924.10.23)
- 선후회의(1925)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1925)
- 손봉전쟁(1925)
- 서산회의(1925)
- 반봉사건(1925)
- 직봉풍전쟁(1926)
- 중산함 사건(1926)
- 국민당의 1차 북벌(1926~1927)
- 난징사건(1927)
- 4.12 상하이 쿠데타(1927)
- 마일사변(1927)
- 국공결렬(1927)
- 난창 폭동(1927)
- 8.7 긴급회의(1927)
- 추수폭동(1927)
- 정강산 투쟁(1927~1929)
- 영한합작(1927)
- 광저우 폭동(1927)
- 국민당의 2차 북벌(1928)
- 황고둔 사건(1928)
- 동북역치(1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