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종(고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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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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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자 시절
2. 즉위 후
2.1. 가족 견제
2.2. 문신 견제 시도
2.3. 과도한 향락과 사치
3. 무신의 난
3.1. 무신정변과 폐위
3.3. 비참한 최후



1. 태자 시절[편집]


의종이 태자로 있을 때 부왕 인종은 태자가 장차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왕후 임씨도 둘째 아들 왕경(王暻, 대령후 작위로 더 유명)을 사랑해 그를 왕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태자의 스승 정습명(鄭襲明)이 충성으로 태자를 가르치고 보호해 폐위되지 않았다.

- 《고려사》 권96 <정습명 열전>


어린 시절부터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했던 탓에 부모의 속을 꽤나 썩였다. 의종의 모후 공예태후 임씨는 차남 대령후 왕경을 총애하여 인종에게 태자로 삼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인종은 겉으로는 반대했지만 내심 태자를 바꾸려고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인종 역시 혼란을 야기시킬까봐 반대한 것으로 보이며 의종의 난봉을 좌시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대에 강직한 신하로 이름이 높았던 정습명(정몽주의 조상)의 만류로 그대로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임금이 된 후에도 정습명은 의종이 풍류를 즐기는 것을 간언하다가 의종의 미움을 사서 쫓겨났다. 정습명이 병을 얻게 되니까 이를 핑계삼아서 내쫓았다는 말도 있다. 결국 정습명은 1151년에 향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원인으로는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는 말도 있고, 홧병으로 죽었다는 말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의종의 미움을 사 버림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과는 다르지 않은 부분이다.

하여튼 위의 서술처럼 젊은 시절부터 놀자판의 기질이 있었다고 《고려사》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의종은 사람 자체만 놓고 보면 대단한 엄친아암군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백하팔인 급의 인물은 또 아니었다. 특히 의종은 힘이 세서 각궁을 잘 다뤘고, 방 안에 촛불을 켜 놓고 활 시위를 당겨 촛불을 꺼버리는 엄청난 묘기를 선보일 정도였다.

또한 기마술과 격구에도 두루 능했던 무인형 군주였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보면 알겠지만 의종은 거의 격구에 중독이 되었다시피한 사람이었다. 특히 격구는 뛰어난 승마술이 받쳐줘야 진행할 수 있는 스포츠였다.

또한 수박희라는 일종의 격투기를 좋아하여 무인들의 수박희 경기를 자주 즐겨 이를 관람하고는 했다. 그리고 풍류를 즐긴 군주답게 음악과 시문 등 예술에도 나름 조예가 깊었다. 비슷한 예술가 타입 군주였던 공민왕(제31대)이 무예에 그다지 소질을 보이지 못해서 노국대장공주로부터 말 타는 법을 배우기 이전에는 말을 탈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다는 것과 매우 대비되는 부분이다.


2. 즉위 후[편집]



2.1. 가족 견제[편집]


철저한 유교식 종법으로 왕위 계승자 자격을 확 줄여버렸던 조선과는 달리 고려는 국왕과 왕후 소생의 적자라면 누구든지 임금 자리에 도전할 수 있었다.[1] 특히 옛 삼국시대 초기처럼 형제 간의 상속이 꾸준히 이뤄졌던 고려에서는 도전자를 더욱 증가시켰다.

일례로 제15대 숙종은 형제 상속이 마땅함을 들어 사실상 조카인 헌종을 임금 자리에서 끌어내리기도 했다. 숙종의 장남이자 의종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예종(제16대) 역시 숙부 및 기타 왕자들과 임금 자리를 둘러싼 신경전을 벌였고, 부왕 인종은 외조부인 이자겸의 도움으로 숙부들을 제치고 겨우 국왕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인종이 즉위 후 이자겸에게 휘둘리는 원인이 된다.

앞서 태자 시절 항목에 언급했듯이 의종은 태자 교체까지 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물론 처신을 잘못한 자신의 탓이 컸다고 할 수 있지만 언제든지 형제가 왕위에 도전할 수 있다는 이러한 풍토는 의종으로 하여금 권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의종은 자신의 모후 공예태후 임씨와 첫째 동생이었던 왕경을 극도로 의심하면서 경계했다. 비록 어머니를 왕태후로 올리고 동생에게 후작위를 내렸지만 그들에 대한 의심의 끈은 놓지 않고 있었다.

《고려사》 <공예태후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의종은 늘 어머니를 견제했고, 어느 날 태후의 면전에서 이런저런 말을 뱉었다. 분노한 태후는 맨발로 전각을 뛰쳐나와 하늘을 향해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했는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크게 쳤다. 기겁한 의종은 어머니 앞에 와 엎드렸는데 잠시후 번개가 전각을 때렸다고 한다. 이 일 이후 의종과 공예태후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모자 관계가 한 때 지독히 나빴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부분이다.

의종의 가족 견제에 태자 시절부터 총애했던 김존중, 환관 정함 등이 적극 기용된다. 짧은 시간이지만 즉위 후 10년 동안은 김존중 등이 권신이 되어 반대파를 찍어눌렀다. 한편 의종은 즉위 후 2년차인 1148년 11월에 경쟁자였던 동생 왕경을 대령후(大寧侯)로 봉하고, 대령부(大寧府)를 설치해주었다.(출처 《고려사》 <대령후 왕경 열전>). 정함의 무고로 제거 명분을 얻은 의종은 대령후의 가신을 고문했지만 증거가 없어 별 소득이 없었다.

낙랑군 개국후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실수로 화살을 의종 앞에 떨어지게 만들자 반란을 두려워하던 의종은 격노하여 화살의 주인을 찾았다. 의종을 비판하던 신하들은 대부분 대령후와 친했는데 이는 의종의 의심과 두려움을 극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때 정함과 김존중이 다시금 대령후를 무고했고, 이번에는 최윤의 같은 중신들까지 이야기를 꺼내서 공론화시키자 이 때를 틈타 의종은 자신의 어머니를 보제사로 보냈다. 어머니가 만월대에 있으면 분명히 대령후를 옹호할테니 먼저 옮겨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못 이기는 척 대령부를 해체시키고, 대령후를 천안으로 유배보내면서 완전히 세력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2.2. 문신 견제 시도[편집]


의종은 인종 시대까지 잦은 대규모 전쟁들과 내전들로 인해 땅까지 추락했던 왕권을 다시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나 재위 첫 해에는 승보시를 도입하는 한편 민중 친화적인 정치 발언을 하는 등 초기에는 꽤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최윤의를 시켜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를 제작해 고려의 제도를 모두 기록하는 모습도 보였다. 《고려사》 <예지>는 《고금상정례》를 인용한 부분이 많다.

특히 국왕의 권력에까지 해를 끼치면서 권력을 휘두르는 문벌귀족들을 적극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 몇몇 환관과 내시들을 왕권을 보좌해줄 측근 세력으로 삼았으며, 동시에 무신들을 전격 중용하여 이때 무신정변 주역들로 유명한 이의방, 이의민 같은 이들을 무관으로 발탁하였다. 무신들을 우대하여 조정 내 문신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자 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종의 개혁 시도는 권력을 잡고 있던 김부식 일파를 중심으로 한 당대의 세력가였던 문벌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종전대로 문신 우대 정책을 펼치면서 자연스레 무신들의 불만을 살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돌아가고 만다. 또한 이들과 문신들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아버지 인종 시대에 벌어진 연회 중 용춤을 추던 정중부의 수염을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태웠다는 일화도 매우 유명한데 이미 인종 대부터 조금씩 문신과 무신의 대립이 드러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의종 대에 와서 무신들이 제법 크게 세력이 강력해져 문신들보다 더 세력이 강해지나 싶더니 어쨌든 의종의 문신 견제가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최소한 국왕에 의한 무신들의 힘 실어주기는 무산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2.3. 과도한 향락과 사치[편집]


'포정(布政)하여 인은(仁恩)이 흡족하니, 삼한(三韓)은 대평(大平)에 이르렀구나!'

- 《고려사》 <의종 세가> 중 발췌. 이 시를 짓고 2년 뒤 무신정변이 터진다.


결국 이러한 무기력한 흐름 속에서 좌절했는지 말년에는 정사를 멀리 한 채 후궁을 지나치게 곁에 둔다거나 문신환관들과 어울려 향락과 사치를 벌이고, 무리한 건축 사업으로 백성들의 곤란을 가중시켰다. 1154년에 개건한 서경중흥사,[2] 1158년 백주에 창건한 중흥궐은 고려 왕실을 중흥하겠다는 의종의 의지가 드러난다는 평가도 있지만 중흥사는 태조가 지은 사찰[3] 단순히 유지 및 관리를 해준 것에 지나지 않고, 중흥궐은 지을 때 백주의 백성들이 죽어나갔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볼 때 무리한 토목 공사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서 공사판에서 땀 흘려 일하는 남편과 동료들의 점심을 마련했다는 여인 이야기의 배경 역시 바로 의종 시대다. 어느 공사판 현장에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가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는데 어느 집에서는 너무 가난하여 그마저도 쌀 여유가 없었다. 그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자신들의 을 조금씩 나누어주었고, 그는 이를 미안하게 여겼다. 남편의 이 사정을 알게 된 아내가 점심 도시락을 만들어서 직접 가져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나눠먹을 수 있을 정도로 양이 많았다. 남편이 이 많은 음식이 어디서 왔나 궁금해하니 아내는 두건을 벗어서 자신의 잘린 머리카락을 보여주었고 놀란 남편이 "차라리 물어보지 말걸 그랬소..."라며 아내와 함께 통곡하고 주변 사람들도 그 여인의 짧은 머리카락을 보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슬피 울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 또한 의종 시기 고단했던 고려 백성들의 힘겨운 삶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정사인 《고려사》에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의종 21년 3월조에 나와 있는 이야기중미정이라는 정자를 지을 때 실린 이야기다. 잦은 연회로 국고가 탕진되어 인종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유지되었던 고려의 태평성대가 무너지고 본격적인 쇠락을 맞기에 이른다.

초하루 임자일. 왕이 대관전(大觀殿)[4]

에서 신년 하례를 받고는 친히 신료가 올리는 하례의 표문을 지어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해 정월이 돌아오니 만물이 새로우며 옥전(玉殿)에 봄이 돌아오니 용안(龍顔)에는 기쁨이 가득하나이다. 우주의 이치를 체득하시어 은혜를 널리 펴시고 모든 복록을 한 몸에 모으사 조화를 크게 만드시니 이야말로 성인의 도가 길이 이어나갈 시초이자 만물을 생장하게 하는 기운이 퍼지는 처음이로소이다.

공손히 생각건대 폐하(陛下)께서는 요(堯) 임금의 성스러운 밝음과 순(舜) 임금의 지혜로운 총명을 한 몸에 지니셨으니, 온갖 복록이 모여들어 쉼 없이 나날이 새로워지며, 다달이 끊임없이 무궁한 천령(天齡)을 누리시리이다. 어진 덕이 가득하시니 만물이 제 자리를 찾고, 전쟁을 끝내고 문교(文敎)를 펴시니 이야말로 무궁한 경사로소이다. 이제 태평성대를 맞이하여 닥쳐올 경사가 더욱 융성하리니, 님 계신 북궐(北闕)에서 신령스런 상서를 옹위하고 남산(南山)에서 창성한 국운을 보위하리이다.

만방(萬邦)이 분주히 달려와 옥과 비단을 다투어 바치옵고, 사방의 신민들이 뒤질세라 산넘고 물건너 모여드옵니다. 이 좋은 날에 하례를 받으시니 복을 더욱 크게 받으시리이다. 하물며 요즘 바쁜 정무의 여가에 부지런히 신하들을 접견하시고 글하는 신하들과 더불어 즐겨 문장과 사육변려문을 훌륭히 지어내시며, 천림(天臨)하시어 시(詩)·서(書)·경(經)·사(史)의 오묘한 글들을 강론하시나이다. 북사(北使)[5]

는 술잔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일역(日域)[6]은 보물을 바치며 황제라 부르나이다.

하늘 신령께서 늘 몰래 도우시니 복록과 경사가 강물처럼 불어나고, 세상에 다시없는 새로운 상서가 열리니 군왕께서 통일을 이루심을 보겠나이다. 신하들은 찬미를 바치옵고 그 위업은 청사에 빛나리니, 인민이 생겨난 이래로 오늘 같이 성대한 날은 다시 없으리이다. 저희들은 이 성대를 만나 밝은 임금의 은택을 흠뻑 받으니 만승(萬乘)[7]

과 같은 위엄을 우러러 보며 대궐로 달려 왔사옵니다. 여섯 왕조의 음악[六樂]과 아홉 곡의 연주[九奏]는 모두 간자(簡子)가 들었던 천상의 음악에 견줄만 하나, 또한 만세를 세 번 불러 한나라 무제가 들었던 것과 같은 축수를 아니 바칠 수 있겠나이까?”

이 글을 두고 백관이 하례하는 표문을 올렸다.

- 《고려사》 <의종 세가> 의종 24년 1월 1일.



3. 무신의 난[편집]



3.1. 무신정변과 폐위[편집]


"장하도다! 이 곳에서 병법(兵法)을 연습하고 익힐 수 있겠도다."

- 《고려사》 <의종 세가> 중. 보현원에 들어서기 전 한 말.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가기 위해 오문(五門) 앞에 도착했다.… 왕은 무신들이 실망하지 않게 위로하기 위해 수박희(手搏戱)를 하게 했다. 내시 한뢰(韓賴)는 (왕을 호위하는) 무신들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다. 마침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희를 하다 힘이 부쳐 달아나자, 그의 뺨을 치고 비웃었다. 내시 임종식·이복기 등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정중부 등은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이렇게 욕을 보이는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왕이 정중부를 달랬다.

- 《고려사》 권128 <정중부 열전>


밤이 되어 왕의 수레가 보현원에 도착했다. 이고, 이의방은 왕의 명령을 가짜로 만들어 순검군[8]

을 집합시켰다. 왕이 숙소에 들어가자, 이들은 임종식, 이복기, 한뢰 등을 죽였다. 왕을 호위한 관료들과 환관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정중부는 왕을 개경으로 돌려보냈다.

- 《고려사》 권19 의종 24년(1170년) 8월


1170년 음력 8월 30일 무신정변 당일에는 종5품의 젊은 문신이었던 기거주 한뢰가 종3품이 되는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9] 의종도 한뢰를 질책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문신이라 해서 분노한 정중부에게 "그냥 니가 참아줘라"라는 문신 쪽의 편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였으니 무신들의 분노 게이지는 더더욱 치솟을 수 밖에 없던 것이었다. 흔히 이 사건이 무신정변의 원인이라고들 하는데 이 사건과 정변은 같은 날에 일어났으므로 원인이 될 수 없다. 특히 정변 자체는 이 일과는 상관없이 사전에 왕이 보현원에 가면 결행하기로 모의된 것이므로 이 일이 없었더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다만 정변 후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던 한뢰가 시초격으로 무참히 목숨을 잃게 된 것은 이 일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인다. 어가 행렬이 도착하기 직전 정중부 등은 순검군(巡檢軍)을 소환해 미리 숨겨두었다. 어가가 보현원의 대문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무신들과 병사들이 앞서서 호종하던 문신을 모두 쓸어버렸다. 이어 임종식, 이복기, 한뢰와 의종의 측근인 환관들마저 무자비하게 몰살당했다. 의종은 크게 당황해 환관 왕광취를 통해 무마시키려 했지만 그는 의종과 같이 유폐되었고 보현원에 도착한 모든 문신들이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의종은 보현원에 유폐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어떻게든 무신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보검을 하사하지만 오히려 그 보검으로 무신들은 잔혹한 살육을 이어나갔다.

9월 1일, 의종은 무신들에 의해 강제로 개경 본궐로 돌아왔다. 본궐에 있던 문신과 환관은 무신들에게 발견되는 즉시 살해당하고 천동궁, 태자궁의 문신도 모두 떼죽음을 당했다. 의종은 곧장 이고, 이의방, 정중부, 두경승 등의 관직을 승진시키거나 문관직에 올려주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의종은 본궐의 편전 강안전에 있다가 수문전으로 옮겨 갔다. 이상하게 《고려사》 <의종 세가>는 의종이 수문전에서 아무 일도 없는 마냥 악사들에게 노래를 시키고 술을 마셨다고 한다. 같은 날, 갑자기 이고가 의종을 시해하려 했지만 의종을 죽이지는 않았는데 다른 무신들이 말렸기 때문. 이후 환관 왕광취가 무신정변을 일으킨 주동자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고려사》 <정중부 열전>에는 왕광취가 주도한 것으로 나오지만 의종의 의사가 크게 반영되었을 수도 있는데 정중부가 이를 알아차리고 의종을 본궐에서 내쫓아 군기감(軍器監)으로 유폐시켜 버리기 때문. 군기감은 군대의 장비를 보관하던 곳인데 당연히 무신정변의 지지자들인 하급 장교들과 무신들이 지키는 곳이었다. 의종의 태자 왕기는 영은관(迎恩館)에 갇혔는데 당시 영은관은 금나라 사신들이 고려에 오면 머무는 숙소였다. 이후 의종은 폐위당해 거제도에 유배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는데 지금의 경남 거제시 둔덕면 둔덕기성[10]이 의종의 거처였으며 이 곳에서 3년을 지냈다. 후궁 무비와 수많은 백관 및 가솔이 같이 따라갔다. 태자 왕기도 폐위되어 지금의 전남 진도군에 유배되었고 이후 사서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시호만 남아있어 그가 사후 추증만 되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물론 의종의 손자이자 태자 왕기의 아들인 태손은 얄짤없이 정중부에 의해 어린 나이에 죽었다. 의종과 태자, 태손이 모두 없어진 그 날 의종의 셋째 동생 익양공 왕호가 무신들에 의해 추대되어 본궐의 제2정전 대관전에서 즉위했다.


3.2. 복위 운동[편집]


당시 정4품 간의대부(諫議大夫) 직을 맡고 있었던 김보당(金甫當)은 문신이었지만 평소에 백성들을 안 돌보고 놀기만 하는 의종의 실정을 비판하던 입장이라서 무신정변 때는 무사했었다

이 김보당이 의종의 동생 명종 재위 3년차인 1173년 8월,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임명되어 지방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김보당은 명종 대의 문관 출신으로 하도 문신이 죽어 국정 운영이 힘들어지자 무신들이 적당히 봐주기 시작할 때 조정에 출사했다. 정4품이란 나름 높은 직위였지만 문관이라 사사건건 무관에게 밀렸다. 바로 3, 4년 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었다. 문신의 기세가 순식간에 추락한 것. 김보당은 병마사가 되어 동북면으로 가게 되자 기회를 틈타 의종 복위를 시도한 것이다.

<정중부 열전>에 따르면 김보당은 의지가 세고, 자기 줏대가 강한 인물이었던 탓에 정중부가 꺼렸다고 한다. 김보당은 환관인 진의광(陳義光), 배윤재(裵允材)와 의논하여 개경에서 계획을 세운 뒤, 배윤재를 거제로 내려보냈다. 한편 녹사(錄事) 이경직(李敬直)과 녹사 장순석(張純錫)이 함께 했으며 동북면지병마사(知兵馬事, 병마사의 바로 아래 직위) 한언국(韓彦國)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정중부 열전>엔 특이하게 김보당이 환관 배윤재, 녹사 장순석, 유인준(柳寅俊)을 다른 직위에 임명했다고 한다. 즉 신하인 김보당이 국왕과 조정의 재가없이 자기 맘대로 직위를 봉했다는 것인데 누군가 더 큰 존재가 개입했는지 의심되는 대목이다. 그냥 김보당이 복벽운동을 위해 잠시 사칭시킨 것일 가능성이 높긴 하다.

어쨋든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로 임명된 이경직과 장순석, 서해도병마사(西海都兵馬使)로 임명된 배윤재는 거제로 내려가 의종을 데리고 계림(鷄林), 즉 동경(東京)으로 갔다. 자세한 사건 진행은 김보당의 난김보당 문서 참조.

거제에 있던 의종이 김보당파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는 알 수 없다. 기록이 없으니까. 경주로 이동한 것도 의종이 원해서 간건지, 김보당파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억지로 가기 싫다는 의종을 끌고 간 건지 역시 알 수없다. 당시 상황이 어땠든 의종은 김보당파와 이동해 2개월 간 동경에서 버텼지만... 1173년 10월, 격노한 무신들의 도착과 같이 말려들고 싶지 않았던 동경 백성들의 비협조로 김보당 일당은 체포되었고, 의종은 동경 객사(客舍)에 갇혔다.

<이의민 열전>에 따르면 김보당파는 고작 수백여명 뿐이였다고 한다. 애초부터 수적으로 크게 밀린 것이다. 게다가 진압하러 온 이의민은 경주 출신으로 경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3.3. 비참한 최후[편집]


이후 곧바로 찾아온 이의민에 의해 동경 곤원사로 옮겨진 뒤, 그 절의 북쪽에 위치한 연못에서 글자 그대로 끔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향년 47세. 얼마나 처참하게 시해당했는지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이러하다.

"전왕(前王)을 끌어내서 곤원사(坤元寺)의 북쪽 연못에 이르러 술 두어 잔을 드리고, 의민이 등뼈를 부러뜨리니 손대는 대로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의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 박존위가 담요로 싸고 2개의 가마솥을 마주 합하여 그 속에 넣어 못 속에 던졌다.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 티끌과 모래가 날아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고 떠들며 흩어졌다. 절의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자가 있어서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렸다."

- 《고려사》 <이의민 열전>


아마 사서의 기록으로만 미뤄 보면 고려 역사, 아니 한국 역사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 고구려의 영류왕, 고려의 공민왕과 더불어 가장 참혹하게 시해당한 임금 중 한 명일 것이다. 중국에서도 뼈가 꺾여 죽은 군주가 있었는데, 바로 춘추시대 때의 노환공으로, 제양공의 지시로 팽생에 의해 뼈가 꺾여 끔살당했다. 문강 문서 참조.

의종은 이의민의 등뼈꺾기에 온몸의 가 부러져 사망했고, 그 시신을 담요로 감싼 후 가마솥 2개를 합쳐서 연못 속으로 던져졌으며, 이후 지나가던 스님이 발견하긴 하나 가마솥만 가져가고, 시체는 그냥 버려뒀다. 여기서 스님의 인간성이 못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의를 생각해 보면, '귀한 가마솥은 술꾼의 저승길 선물로도 아깝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이 스님도 어지간히 의종한테 불만이 쌓여있던 듯 하다. 이 장면이 만화 《맹꽁이 서당》에서는 순화하여 산 채로 가마솥에 갇힌 뒤 물에 던져져 죽는 것으로 바뀐다.[11]

반대로 말하자면 상당한 용력을 가지고 있었던 무장급 의종을 접어서 죽인 이의민이 어느 정도의 인간 흉기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천민 출신인 이의민을 무신으로 발탁하여 출세시킨 사람이 바로 의종 자신이었다. 물론 이의민도 이 의종 시해 건으로 평생 리스크를 달고 살아야 했으며, 그 역시 차후에 최충헌과 그 일파에 의해 참혹하게 목숨을 잃고 만다(병진정변).

한편 의종의 시신은 며칠 동안 곤원사 연못에 떠 있었지만, 아무도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전 부호장(副戶長) 필인(弼仁)이라는 사람이 몇 명을 데리고 의종의 시신을 수습해 관을 짜서 물가에 묻어 주긴 했다.

무신난 이후 두 번이나(왕광취 사건, 김보당 사건) 무신을 놀라게 한 의종은 무신들의 철저한 무관심을 받았고, 시해당한 지 2년 뒤 조위총의 난이 일어나서야 묘호와 시호를 받고는 그의 왕릉이 조성될 수 있었다. <조위총 열전>의 기록으론 서경유수 조위총이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전까지 의종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발표조차 안했다.

고려사 명종세에는 무신정변 일어나기 전에 금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 의종에게 관상을 봐 준 적이 있었는데, 사신은 의종의 관상에 대해 "주상의 수명은 길고 길어서 셀 수도 없습니다. 조정의 노소 신료들이 모두 죽은 뒤에야 강 옆에서 골칫거리를 맞게 될 겁니다."라고 했고 한다. 그리고 이때 의종에 대한 금나라 사신의 관상은 훗날 무신정변으로 문신들이 모두 피살되고 곤원사 연못에서 죽음을 맞음으로써 실현되었다.[12]

3.4. 또 다시 근왕운동[편집]


의종은 사후에도 무신들을 귀찮게 했다. 동경(東京)에서 한번 복벽운동이 터지더니 이번엔 서경(西京)에서 의종 시해 사건을 빌미로 반란이 터진 것이다. 바로 조위총의 난이었다.

서경유수(西京留守)인 조위총(趙位寵)은 계급이 낮은 무신들이 정권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서경의 시민들과 함께 같이 일어나 개경과 같은 대우를 받고자 했다. 태조 이래 15대 숙종, 16대 예종 대까지 엄청나게 우대받은 서경이었지만 17대 인종 대에 일어난 묘청의 난을 전후로, 개경 귀족들의 서경에 대한 견제가 심했다. 대표적으로 개경의 김부식과 서경의 정지상, 친 서경파인 윤언이 등이 그들이다. 이 견제로 서경은 분사(分司)도 폐지되고 지위가 크게 하락했는데 이 때 다시 한번 옛 지위를 회복하려고 한 것이다. 자세한 사건 진행은 조위총의 난, 조위총 문서 참조.

조위총은 의종을 죽인 큰 죄를 저지른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박존위 등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면서 그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이 중 박존위는 늘 자신이 의종의 시체를 가마솥에 넣었다며 자랑하다가 처형당했다.

이에 1175년 5월 명종은 형 의종의 상을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조정의 모든 신하는 사흘 동안 검은 관을 쓰고, 흰 소복을 입었다. 아울러 묘호 '의종'(懿宗)을 올려 종묘에 신위를 올려 해동천자(海東天子)로서의 제사를 지내게해주고, 시호로 '장효대왕'(莊孝大王)을 올렸다. 의종의 시신을 개경으로 가져와 국왕의 예로 장사지내니 능호는 '희릉'(禧陵)이었다.

또한 의종의 원찰도 세워 초상화를 그렸다. 하지만 무신들은 끝까지 의종을 괴롭혔는데 의종의 원찰이 개경 서쪽에 위치하자, 무신이 서는 자리가 서쪽이고 무신을 상징하는 방위가 서쪽이니 무신을 싫어한 의종의 원찰이 서쪽에 있으면 안된다고 해 동쪽에 있는 사찰로 옮겼고, 서쪽의 사찰은 중방의 원찰로 바꾸었다. 결국 사후까지도 무신에게 능욕당한 셈이었다.[13]

[1]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왕가도 이런저런 이유로 왕위 계승에 공백이 생겨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왕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이렇게 올랐을 시엔 강력한 정통성을 통해 상당한 왕권을 자랑했다. 그 예가 조선의 숙종이다. 물론 양자 등재 등을 통해 적어도 형식은 맞추려고 노력했다.[2] 장락궁 근처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황룡사 9층탑을 본딴 9층 목탑이 있었다.[3] 더 오래 전에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이 지은 절을 태조 왕건이 재건한 것이란 설이 있다. 명칭에서 옛 고구려의 영광을 부흥시키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중흥궐이 중흥사에서 따온 이름이라면 겸사겸사로 의미를 이었을 가능성이 있다.[4] 만월대 본궐에 있던 전각. 고려 초기엔 제 1정전이었으나 중기부터 제 2정전으로 밀려 났다.[5] 금나라 사신.[6] 일본.[7] 천자를 뜻하는 말로 대부의 나라는 '백승지국'(百乘之國), 제후국은 '천승지국'(千乘之國), 천자국은 '만승지국'(萬乘之國)이라 부른 데서 연원한다.[8] 국왕의 친위대 중 하나이다.[9] 종3품이면 고려시대 무관이 오를 수 있는 직위 중 2번째로 높은 직위이다. 이는 당시 무신들이 문신들에 비해 얼마나 홀대받고 있었는지를 나타낸다.[10] 별칭이 '폐왕성'. 폐왕은 당연히 의종이다.[11] 과거 능인에서 학습만화로 발매되었던 《고려왕조 500년》에서도 산 채로 가마솥에 갇힌 뒤 물에 던져져 죽는다는 이야기를 차용했다.[12] 또한 이 사신은 당시 옆에서 좌승선으로 참석해 있던 김돈중을 보고 "저기 얼굴이 희고 체격이 큰 사람은 귀인이고 글을 잘하는데,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는데, 집례로부터 이름은 돈중이며, 상국(相國)인 김부식(金富軾)의 아들입니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입니다 라는 설명을 듣고 "그런가요."하고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훗날 이 사람으로 인해서 무신정변이 불이 붙을 것을 그 금나라 사신은 어쩌면 예상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13] 해가 서쪽으로 지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동쪽이 높은 자리지만 망자에게는 서쪽이 높은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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