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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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전라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가장 큰 섬이자 군.[5][6]
대표적인 특산종으로 진돗개가, 특산품으로는 홍주가 유명하다.
2. 역사[편집]
2.1. 선사시대[편집]
신석기 시대 이전의 유물, 유적은 발견된 것이 없으나, 고인돌, 석부, 선돌 등 청동기~철기시대의 것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사람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2.2. 삼국시대[편집]
삼국시대 처음에는 마한의 신미국을 중심으로 한 소국 연맹체였던 침미다례의 영역이었다. 침미다례는 독자적으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강력했으나 백제에게 정복돼 현 진도 일대에는 인진도군(因珍島郡), 도산현(徒山縣), 매구리현(買仇里縣)이 설치된다. 당시 인진도군의 치소는 지금의 고군면 고성리에 있었다.
이후 백제 말기 의자왕 20년(660년) 7월,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항복하게 되어 도산현은 당나라가 현 나주 일대에 설치했던 웅진도독부 대방주에 속하게 된다.
남북국시대엔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 지명 한화정책에 따라 인진도군은 진도현으로 강등되어 무안군의 영현이 되고, 도산현이 뇌산군(牢山郡)으로 승격하고, 메구리현은 첨탐현(瞻耽縣, 임회면)으로 개칭되어 뇌산군의 영현이 됐다. 이때 이미 무안군 영현이 되었다는 고려사 지리지 기록이 있다.
그리고 후삼국시대에는 진도 김씨의 시조 김국빈의 23세손 김경호(金敬浩)가 왕건의 나주 공방전에 협조하였으며, 후삼국 통일 이후 그 공을 인정받아 옥주후(沃州候)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2.3. 고려시대[편집]
고려시대 태조 23년(940년) 3월 전국에 행정구획과 주, 군명을 고칠때에 뇌산군(牢山郡)을 폐지하고 뇌산군은 가흥현, 첨탐현은 임회현, 진도현을 두되 나주에 소속시켰다. (물론 이 시기를 현종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사찬기록인 '옥주지'에는 진도의 치소를 용장으로 옮기고 옛진도현을 외이현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중기 원종 11년(1270년) 6월에 삼별초가 상륙하여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개경과는 별도로 정부를 수립하였다. 그 해 8월 용장사를 도읍으로 정하고 몽골 제국군에 저항하였다. 하지만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의 난은 1271년 5월에 토벌당하며 실패로 끝났고 진도 주민들은 몽골로 잡혀가는 등 전란을 거치며 진도가 초토화되고 그 후 설상가상으로 충정왕 2년(1350년) 7월부터 이듬해인 1351년 11월까지 왜구의 침입으로 모든 주민이 내륙으로 피난을 하여 월악(현 영암군 시종면 월악리), 명산(현 영암군 시종면 구산리)과 금산(현 해남군 삼산면)으로 가 진도로 돌아오지 않으면서 금산에 관부를 두어 87년동안 진도에 행정기관을 설치하지 않으면서 거의 빈 섬이 됐다.
2.4. 조선시대[편집]
조선시대 초기인 태종 9년(1409년)에 주민들을 해남현으로 이주시켰고, 해남과 진도를 통합하여 해진군이 되었다. 이 해에 전라도의 모든 속현과 향·소·부곡이 폐지되면서 진도의 가흥현·임회현·의신향이 폐지되었다. 이후 태종 14년(1414년) 진도 거주가 허용되고, 진도를 다시 개척하고 목장을 만들기 위해 진도에 들어간 주민에게 10년간 세금을 면제해주는 조치를 취했다. 세종 19년(1437년)에 해진군이 해남현과 진도군으로 분리되었다. 그 해 6월 29일에 초대 군수로 양경이 부임하여 고성 부근에 성을 수축 치소를 삼고자 하였으나 지리적 여건이 현 군청 소재지만 못하여 이곳에 관부설립공사를 추진 완공, 경신년(1440년)에 지금의 진도읍으로 관부를 옮겼다. 이로써 87년만에 진도에 관청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세종 22년(1440년) 진도의 치소를 지금의 진도읍으로 이전하였다. 그 후 여러 번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본군에 예속된 육지부의 삼촌면(현 해남군 삼산면), 명산면(현 영암군 시종면)과 본도 내 군내면(古 도산현), 고군면(古 외이현), 의신면(古 의신향), 임회면(古 임회현), 읍내면(읍 성내외리), 목장면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명량해전의 무대인 울돌목이 진도-우수영 사이의 해협이다. 이후 현종 3년(1666년)에 향교의 전패를 잃어버린 일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0년만에 복구되었다.
조선시대 말기인 고종 3년(1866년) 진도군은 진도부로 승격, 4군 9진을 거느리고 해남 화원면을 복속시켰으며 읍내면은 부내면이 되었으나 고종 10년(1873년)에 다시 군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고종 32년(1895년) 6월 23일에 나주부 진도군으로 개편하였다가 고종 33년(1896년) 8월 4일에 전라남도 진도군으로 개편됐다. 부내면, 고일면, 고이면(이상 2면은 옛 진도), 군일면, 군이면(이상 2면은 옛 가흥현), 임일면, 임이면(이상 2면은 옛 임회현), 의신면, 명금면(이상 2면은 옛 의신향), 지산면, 제도면, 명산면, 삼촌면 1899년, 제도면을 조도면과 가사면으로 분면하였다. 또한 조선 말기엔 무려 본토에 월경지도 갖고 있었다.[7] 각각 영암군과 해남군에 둘러싸인 명산면[8] 과 삼촌면이었는데, 1906년 월경지 정리로 인해 면산면은 영암군에, 삼촌면은 해남군에 편입되었다. 이런 면들을 전부 합치면 총 17개면이나 됐다. 이는 조선 후기 제작된 전국지도인 대동여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후 대한제국 시대인 광무 10년(1906년)에 육지부의 명산면과 삼촌면이 영암, 해남군에 각각 이속되었다.
2.5. 일제강점기[편집]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을 단행하여 도초를 무안군에 이속 본군을 진도면(前 부내면), 군내면(前 군일, 군이면), 고군면(前 고일, 고이면), 의신면(前 명금, 의신면), 임회면(前 임일, 임이면), 조도면(前 가사도면, 조도면), 지산면(前 목장면)으로 존치시켜 7면 101리로 개편됐다.(안창, 기좌의 환원 기록이 명확치 않다.)
2.6. 대한민국[편집]
8.15 광복으로 해방 이후 1960년대인 1963년 1월 1일, 조도면 마진도리가 신안군 장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69년에 무안군의 섬 지역들이 신안군으로 분리되어 현재 도초면은 신안군 땅이 됐다.
1970년대 이후 진도군은 계속해서 소소한 개편이 이루어진다. 1973년 7월 1일 군내면의 수역, 수유, 해창, 산월 리가 진도면으로 편입되었다. 1975년 1월 1일에는 군내면 녹진리에서 대야리를 분리 226개리가 227개리로 소폭 늘었다가 1979년 5월 1일, 진도면이 진도읍으로 승격되어 1읍 6면 227개리로 개편됐다.
1980년대 진도군의 마을 개편이 절정이었는데, 1980년 2월 2일엔 진도읍 산월리에서 내산리, 고군면 가계리에서 용호리, 의신면 접도리에서 수품리가, 지산면 봉암리에서 상봉암리가 각각 분리되어 227개리에서 231개리로 구분되었다. 1982년 1월 1일 의신면 구자도리(狗子島里)를 구자도리(九子島里)로, 침계리의 수용소리를 진설리로 개칭하였으며, 1983년 2월 15일 조도면 만재도리와 가사도리 중 고사도와 평사도 및 부속도서를 신안군에 편입시키고 231개리를 229개리로 감소하며 개편됐다. 1984년에 완공된 진도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었으며, 1986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도읍 사정리를 사정1리, 사정2리로, 전두리를 전두1리, 전두2리, 청용리로, 임회면 석교리에서 고방리, 구분실리로, 지산면 수마리를 수양리, 마사리로, 조도면 창리에서 어류포리가 각각 분리되어 229개리에서 236개리로 증가하여 개편됐다. 1987년 1월 1일엔 임회면 염장리가 진도읍으로 편입되었다.
1990년대에 접어든 1990년 8월 1일, 신안군에서 저도 외 5개 섬이 진도군으로 편입됐다. 이후 1992년 5월 9일 의신면 도목리가 도목리, 도항리로 접도리에서 원다리, 임회면 죽림리에서 동헌리, 지산면 소앵무에서 백연동리, 심동리를 상심동리, 하심동리로 분리되어 236개리가 241개리로 다시 늘어서 개편됐다.
2000년대인 2005년 제2진도대교가 바로 옆에 만들어지고 같은 해에 군내면 월가리에서 정거리가 분리되어 241개리가 242개리가 되면서 현재의 진도군이 완성됐다.
3. 지리[편집]
몽땅 섬이다. 북쪽으로 진도대교로 통해 해남군과 접하며 서쪽으로 신안군, 동쪽으로 완도군, 남쪽으로는 남해바다 경계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와 접한다.
육지인 해남군 문내면과 연륙교인 진도대교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다리는 현재 진도군의 공식로고에도 사용한다. 강화도처럼 사실상 육지에 준하는 느낌을 준다.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에서 제주도를 제외하고 육로로 이동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이다. 국토의 대척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직선거리로만 500km를 넘는다! 서울 - 부산간 직선거리가 330km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정말 끝과 끝이라 할 수 있다.
진도의 대척점은 우루과이 동남부에 해당한다. 진도군 서쪽 끝[9] 에 해당하는 팽목항에서 땅을 파고 들어가 중심부를 지나 올라오면 우루과이의 동남부에 위치한 로차(Rocha) 주의 소도시(사실상 해안마을) 카보 폴로니오에 도착한다.[10] 이곳 또한 해안가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육지 대 육지로 대척점이 형성되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상술했듯이 조선시대에는 육지에다가 월경지로 영암군과 해남군에 둘러싸인 명산면과 삼촌면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후 월경지 정리로 인해 1906년에 인접군으로 편입되고 이후 1914년 도초면이 무안군에 편입됐다.
3.1. 인구[편집]
4. 교통[편집]
철도와 고속도로는 없다.
자세한 내용은 진도군/교통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관광[편집]
진도대교의 야경.
삼별초의 도읍이던 용장성, 임진왜란 당시의 명량해전 격전지와 신비의 바닷길[11] 등 괜찮은 관광사업자원을 갖고 있는 군이지만, 상술되어 있듯 차가 없으면 관광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군청이 대중교통 관리에 무심하다. 게다가 그 세월호 사고의 여파 때문에 아직 분위기가 상당히 무거운 편이고 이 때문에 진도군의 이미지가 크게 나빠져 버려서 관광 수요도 많이 줄었다. 물론 진도 지역 자체를 무슨 '위험하고 불길한 장소'로 여기는 건 아니고 '세월호 사고가 생각나서 차마 진도로 놀러가지 못하겠다'라는 게 주류 여론이다. 진도 주민들도 이를 잘 알고 있어서 적극적으로 관광 홍보를 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래도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때에도 그랬지만 오히려 이런 지역에 관광을 와 주는 게 도와주는 것이기도 하고, 관광을 죄악시하는 것도 아니니 그것 때문에 위축되지는 말자. 그리고 세월호 침몰로 인해 외부에 알려진 진도항(팽목항)도 추모하는 마음으로 둘러봐도 좋다.
그러나 2019년에 트로트 가수 송가인이 유명해진 뒤로는 '송가인마을'이 진도의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되어 관광객 수가 4배로 뛰었다고 한다. 기사
2019년 리조트인 쏠비치 진도가 영업을 시작하였다.
5.1. 특산물[편집]
이 지역의 대표적인 상징이자 특산종으로 진돗개를 꼽을 수 있다. 현재 진도군청에서는 보호종 및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진돗개의 수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진돗개를 군외로 반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도군수의 승인 또는 진도군청에서 발행한 허가증을 받아야만 합법적으로 반출할 수 있다. 때문에 이 지역을 드나드는 차량들은 진도대교 입구 검문소에서 진돗개 반출 여부를 검문받게 되며 진돗개의 무단반출이 적발될 경우 진돗개를 전량 압수하여 진도 본토로 돌려보낸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살아있는 진돗개는 모두 회수된다. 오직 진도군 관내에만 한정하고 있는데 전라남도도 예외는 없다.
진도군민 및 진도군 거주자 또는 영주자는 누구나 진돗개를 키울 수 있으며 외지인이 키울 경우에는 반드시 진도군청의 허가 및 승인절차를 거쳐야한다.[12]
이 지역 특산품으로는 양파, 마늘, 대파, 봄동, 구기자, 울금[13] 정도가 있다. 양파와 마늘은 진도만의 아이덴티티는 떨어지는 편이며, 대파 이하 품목이 진도의 특산이라 할 만 한 것들. 대파는 전국 물량의 40%를 진도에서 생산한다고 할 정도인데, 겨울에 차를 몰고 진도에 가보면 여기저기 대파밭인 것밖에 기억에 안 남는다. 지리적 표시제/대한민국는 진도 홍주, 검정쌀이 등록되어 있다.
6. 생활문화[편집]
6.1. 지역 특징[편집]
과거에는 옥도(玉島)로 불리기도 했는데, 진도는 섬 치고는 상당히 토질이 비옥한 편이라서 예로부터 농업만으로도 자급자족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겨울에도 웬만해서는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지지 않아 사실상 1년 내내 농사가 가능한 곳이다. 그래서 다른 섬지역과는 또 다른 진도만의 독특한 문화가 등장한 배경이 되기도 하다. 제주도를 제외하면 섬 자체의 문화가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곳.
1년 내내 먹고 살기에 걱정이 없고, 조선시대 귀양 온 선비들이 머물다 간 곳이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예향(藝鄕)이기도 하다. 진도가 섬이긴 해도 환경이 좋다 보니 귀양지로서는 그나마 편한 곳이었기 때문에 귀양오는 선비들이 대개는 정계, 학계의 거물이기가 십상이고 그들에게 중앙의 학문과 예술을 배워 꽃피운 것이 진도의 문화였다고 한다. 남도 판소리와 진도아리랑으로도 유명하다. 국립남도국악원이 진도에 소재하고 있으며 국악고등학교(과거 석교고등학교(인문계), 현 진도국악고등학교(특목고))도 소재. 미술로는 조선말 남종화의 거두였던 소치 허련이 진도 출신이며 그가 말년에 기거한 운림산방과 소치미술관이 진도에 소재하고 있다.
어업과 농업이 발달한 곳이다보니 음식문화도 발달하였다. 전반적으로는 해산물을 풍부하게 사용하는 남도밥상이라는 것 외에는 해남 등의 인근 전라도 지역의 식문화와 크게 다른 점은 없으나 몇몇 독특한 식문화가 있는데, 선명한 붉은 색이 인상적인 진도홍주가 유명하며 해초와 쇠고기를 넣고 끓인 '뜸북국'도 독특하고 맛이 좋다. 또 꽃게라고 하면 보통 연평도를 연상하기 쉽지만 진도 꽃게도 만만치 않게 유명하고 품질이 좋다. 게철에 방문해보면 싼값에 배터지게 신선한 게를 맛볼 수 있다. 먹부림을 겸한 관광차 가도 좋을 곳이다.
진도의 토착 문화가 잘 보존된 것에는 진도 특유의 역사도 기인한다. 진도는 삼별초 항쟁 때 삼별초의 주요 거점 중 하나로 고려 정부군과 몽골군에게는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이 때문에 몽골은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를 제외한 서남해안 섬들의 주민들을 모두 본토로 강제 이주시키는 공도령(空島令. 섬을 비움)을 내렸다. 몽골이 물러난 뒤에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서남해안이 쑥대밭이 되자 고려 정부에서는 공도령을 계속 유지시켜야 했다. 이 때문에 각 섬 주민들이 지켜오던 토착 문화는 거의 사라져 버렸다. 진도는 정작 삼별초가 진압된 뒤 공도령이 곧 해제되었고, 왜구의 침입 때도 가까운 영암 지역에 이주했다가 곧 진도로 돌아와서 그나마 섬 문화를 지켜나갈 수 있었다.
6.2. 교육[편집]
6.3. 금융기관[편집]
7. 정치[편집]
자세한 내용은 진도군/정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하위 행정구역[편집]
자세한 내용은 진도군/행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기타[편집]
해남군과 전국 최대 규모의 김 양식 어장인 마로해역의 어업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다. 2020년 9월 10일에는 양측 어민들이 어선을 이끌고 해상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 이후 법원의 판결에 따르기로 합의했고, # 1심에서는 진도군이 승소했다. # 그리고 2심에서도 진도군이 승소했다. # 대법원에서도 승소했다. 2021다297086_판결문_검수완료.pdf
퍼시픽 림: 업라이징에서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고 카이주 트리오가 브리치로 나온 후반부에 '진도와 사할린에서 상륙한 카이주들을 막으려다 실패했다'는 식으로 아주 짧게 언급되었다. 언급된 사항으로 보건대 예거 프로그램이 재시동하고 국제적 방위 시스템으로 발전하면서 섀터돔이 없던 한국에도 섀터돔 배치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결국 진도에 섀터돔과 예거들이 배치된 모양.
전국에서 박씨 비율이 이씨보다 높은 유일한 동네이다.
크래프톤의 배틀로얄 게임 배틀그라운드에서 등장 하는 8km*8km 크기의 대형 맵 태이고는 1980년대의 진도군을 배경으로 한다.
Apple의 iPhone 14 Pro 시리즈에 적용된 신기능 Dynamic Island의 개발 코드네임이 여기서 유래했다.
2026년경 서남해안 영공 방어를 위하여 공군 방공관제사령부 예하 레이더 기지가 진도 지력산에 배치될 예정이다.
일본의 엔카 가수 텐도 요시미는 진도군을 배경으로 가사를 쓴 '진도 이야기' 를 노래해서 히트곡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텐도 요시미는 조용필과 같이 공연을 하기도 했다.#
10. 출신 유명인[편집]
- 김경부
- 김경표
- 김민배: TV CHOSUN 고문.[14] 前 TV CHOSUN 대표이사[15]
- 김명완: 한국기원 바둑기사
- 김병회
- 김인정(정치인)
- 김정웅
- 김제리: 전 서울특별시의원
- 김행윤: 기업인(HSB 홈수방 대표)
- 김현(문학가)
- 김흥래
- 김희수(1955)
- 문영민(정치인)
- 박귀수
- 박문수
- 박양수
- 박연수
- 박웅두
-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
- 박진도: 가수
- 박홍률: 현 목포시장
- 설영범: 성우. 토미 리 존스, 제러미 아이언스 전담 성우
- 손재형: 1902~1981. 호는 소전(素筌). 해방 이후의 한국 서예계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현대 한국 서예에서 손꼽는 거장이다. 추사 김정희의 명작 '세한도'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반환받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진도군청 인근에 소전미술관이 소재하고 있다. 제4대, 제8대 국회의원도 역임했다.
- 송가인: 트로트 가수
- 신영희(판소리)
- 양승호
- 양인섭
- 오하근
- 이권재
- 이남준
- 이동진(1945): 전 진도군수
- 이백만
- 이영봉(1968)
- 이영윤
- 이재식(1955)
- 이향희
- 이홍일(1944)
- 장일(1956)
- 장전형
- 정경옥
- 정시채
- 조병문
- 조하나: 탤런트. 전원일기에서 금동이 부인으로 출연했다.
- 조향현
- 최기영(1963)
- 최진철
- 최창주
- 하동만
- 허경렬: 전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
- 허련: 1809 ~ 1892. 조선말의 서예가, 화가. 호는 소치(小痴) 원나라 때의 화가 대치 황공망을 존경하여 딴 호라고 한다.
왠지 패왕과 소패왕이 생각난다.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추사의 평에 의하 면 '압록강 이남에 이만한 그림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극찬을 받은 인물이자 남도화단의 정점에 위치하는 인물이다. 진도군 의신면 소재의 운림산방이 그가 만년에 기거했던 곳이며 그의 후손들도 모두 저명한 화가로 활동하였다. - 허백련
- 허숭
- 허정무: 의신면 초사리 출신. 그의 별명이 진돗개인 것도 그 때문.
11.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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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3년 6월 기준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통계.[2] 진도군가선거구 이현명, 김춘화, 이문교, 장영우 의원, 진도군나선거구 박금례 의원, 진도군비례대표 김옥정 의원.[3] 진도군나선거구 주만종 의원.[4] 진도군선거구.[5] 대한민국에서는 제주특별자치도, 거제도에 이어 3번째로 큰 섬이다. 진도의 자체 면적은 367.8km². 거제도가 379.5km²니 아슬아슬한 차이다. 하지만 인구수는 아슬아슬한 차이가 아니다. 거제가 훨씬 많다. 진도군 인구수: 29,507명(2022.12. KOSIS), 거제시 인구수: 236,662명(2022.12. KOSIS)이다.[6] 게다가 본섬 면적 90.1㎢에 전체 면적 396.76㎢ 정도의 완도군에게도 47,597명(2022.12. KOSIS)으로 인구수는 밀린다.[7] 1903년에 지도군 도초면, 안창면, 기좌면을 편입한 것이다.[8] 명산면은 고려시대 진도현이 육지로 피난했을 때, 삼촌면은 해진군 시기에 진도 주민들이 모여 살던 지역인데, 진도군이 다시 설치될 때 진도군에 편입되어 월경지가 되었다. 1906년에 각각 영암과 해남에 돌려주었다.[9] 부속도서를 제외한 본 섬 서쪽 끝을 말한다.[10] 인구가 2011년 기준 100명도 안되는 작은 해안마을이다.#[11] 1975년 진도에 여행을 왔던 프랑스 대사 피에르 랑디가 우연히 바다가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면서 크게 감격하며 프랑스 신문 등에 알려 외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12] 중국의 특산종인 판다 역시 이와 비슷한 이유로 외국으로의 반출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13] 강황 항목으로 링크하고 있으나 항목에서 설명하듯이 똑같은 종은 아니다. 가까운 친척 정도.[괄호] A B 안의 숫자는 지점수를 뜻함.[14] 조선일보 정치부장, 사회부장, TV CHOSUN 보도본부장 역임[15] 2017년 5월~2023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