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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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 민간협동조합 창립자
전준한
錢俊漢 | Jeon Jun-han


파일:20220517410.jpg

출생
1898년 3월 6일
경상북도 함창군 현내면 오사리
(현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 오사리)
사망
1967년 12월 23일 (향년 70세)
충청남도 대전시 대흥동
(현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
묘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리
본관
문경 전씨[1]

목촌(牧村)
형제
동생 전진한

1. 개요
2. 생애
3. 함창협동조합
3.1. 시대적 배경
3.2. 한빛회와 협동조합운동사
3.3. 창시와 해산
3.4. 이후 행적
4. 협동조합의 의미
5. 전준한 사회적경제 대상
6. 선거 이력
7. 참고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최초 민간협동조합(함창협동조합) 창립자.

퍼스트펭귄

2. 생애[편집]


1898년 3월 6일 경상북도 함창군 현내면 오사리(현 상주시 함창읍 오사리)에서 아버지 전석기(錢晳起, 1879. 1. 28 ~ 1955. 7. 22)[2]와 어머니 상주 박씨(尙州 朴氏) 박성악(朴城岳, 1880. 11. 21 ~ ?)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전약우(錢若雨, 1827. 8. 21 ~ 1891. 7. 17)[3]는 1888년 4월 29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종2품)에 임명되었던 무관이었다.

1911년 상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상주공립간이농업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경상북도 도순사(道巡査)로 근무했다.[4]

1925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니혼대학(日本大學) 법학부 법률과에 입학했다. 이후 동생 우촌 전진한을 비롯한 도쿄 유학생들과 함께 협동조합운동사(協同組合運動社)를 창립하고 「협동조합운동의 실제」라는 팸플릿을 제작했다.

도쿄제국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6년 가정을 돌보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 상주군으로 돌아왔다. '협동조합운동의 실제'를 전국 각 군·읍·면에 무료로 배포했다.

1927년 1월 상주군 함창면에서 황이정(黃履正) 등과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협동조합인 함창협동조합(咸昌協同組合)을 설립하고, 전무이사에 취임했다. 설립 당시 함창협동조합의 자본금은 4,000원, 회원은 400명에 달했다. 그 뒤 4월 10일에는 상주군 상주면에서 김원준(金元俊)·김원택(金元澤) 등과 함께 자본금 1,500원, 회원 150명 규모의 상주협동조합(尙州協同組合)을 설립했다. 이후 전국 각 지방을 순회하며 협동조합 조직을 직접 지도했다.

1929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협동조합 중앙경리조합 상무이사에 취임했는데, 이 때문에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여러차례 구금(구속)되었다. 1930년 10월 31일 동아일보사 덕천지국 기자에 임명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12월 12일까지 「全朝鮮(전조선)에 模範的(규범적)인 平安協同組合訪問記(평안협동조합방문기) 六個郡(6개군)에 十四個(14개)의 營業所(영업소) 現在組合員(현재조합원)은 實(실)로 五千名(오천명)」이라는 기사를 총 4회에 걸쳐 연재하기도 했다. 1933년에는 경성부에서 "백세경창 가족규범"을 발행했다.

1943년부터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진한과 함께 강원도 금강산, 오대산 등지에서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상경하여 전진한과 구국운동에 참여했고, 서울특별시에서 협동조합운동사 재건 고문에 취임하는 한편, 사법서사로 일하기도 했다.

또한 대한노동총연맹에 입당하면서 우익 정치인으로 정계에 입문하기도 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대한노동총연맹 후보로 경상북도 상주군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백남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1년 대전시 금강주조 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1952년 임시수도였던 부산시에서 「협동조합운동의 신구상」을 저술했고, 1953년에는 구국자조운동(성미전축운동)을 전개했다.

1958년 서울특별시에서 「윤리도덕도」를 저술해 배포하였다. 이어 구국자조운동과 윤리도덕진흥운동에 종사했다. 1960년 6월 29일에는 제5대 국회의원 선거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상주군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김기영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했고, 1965년 대전시 도마동(현 대전광역시 서구 도마동) 363번지에 있던 '복지농도원' 상임고문에 취임했다. 상임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농도원장 한인수에게 구국자조운동 일체를 전수하는 등 농도원을 지도, 육성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여 1966년 복지농도원이 5.16 민족상을 수상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1967년 12월 23일 충청남도 대전시 대흥동(현 대전광역시 중구 대흥동)에서 별세했다.

3. 함창협동조합[편집]



3.1. 시대적 배경[편집]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 방법을 바꾸어 놓았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대체로 합방(경술국치)에서부터 3.1운동까지의 제1기, 3.1운동부터 만주사변이 일어나기까지의 제2기, 만주사변 이후부터 일본이 패전해서 해방까지의 제3기로 나눈다. 함창협동조합을 창시한 시점은 제2기다.

제2기는 문화정치 시기로 3.1운동에 놀란 일본이 무단통치만으로는 조선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문화통치를 명분으로 민족분열정책으로 바꾸어나간 시기이다. 헌병경찰제도보통경찰제도로 바꾸고 조선어 신문의 발간을 허가하고 집회결사를 어느 정도 허용했다.

그러나 농촌의 사정을 나날이 피폐해져만 갔다. 조선금융조합연합회의에 의하면 1926년에서 1931년 사이 물가의 총 평균지수는 232에서 140으로 떨어진 데 비해, 농산물평균지수는 262서 129로 훨씬 더 내려갔다. 이와 함께 총독부가 지지하는 지주 중심의 농업생산구조가 형성되어 지주들이 소득 보전을 목적으로 공황으로 인한 피해를 소작농들에게 전가했다. 이처럼 일제 식민농정세계대공황의 영향이 겹치면서 1920년대 후반 조선 경제 특히 농촌 경제에 거대한 위기가 일어났다.

민족주의자들은 이 시기를 조선 농촌의 파멸 상황으로 규정했다. 그 원인으로 산미증식계획, 농산물 가격정책, 농민 보호 정책, 금융조합의 역할 등을 꼽고, 그 책임은 일제의 잘못된 조선 경제 운영에 있다고 보았다.

한편 이 시기 조선인의 일본 유학은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1919년 600여 명이었던 유학생 수는 1926년 3,200명으로 늘어났다. 유학생 사회의 확대와 함께 자신들의 조직을 꾸리는 일도 점차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유학생이 많아질수록 자신의 색을 띈 단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3.1운동으로 민족운동이 분화되어 갔듯, 일본 유학생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나라를 위하는 방법과 실천에 고심하기 시작했다. '한빛'도 그 중 하나의 단체였다.


3.2. 한빛회와 협동조합운동사[편집]


한빛회는 전준한을 포함하여 전진한, 이선근, 이하윤사회주의 운동에 회의적인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만든 단체이다. 한빛은 '공명정대'란 뜻으로 1924년에 조직됐다. 한빛 회원들은 관동대지진 당시 관동대학살이 일어난 후, 학교마다 있는 유학생회 말고 별도의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조직체를 생각했다. 한빛의 주도자 중 한명인 전준한 선생의 동생 전진한은 "민족운동을 개척할 핵심조직체로서 이 조직을 설립했다"고 했다.

이 한빛 회원들은 네 개의 연구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협동조합 연구 모임, 외국문학연구회, 사이언스클럽, 농우연맹 등이다. 이 중 협동조합 연구 모임은 1926년 이름을 '협동조합운동사'라 지었으며, 와세다대학의 스콧트홀에서 조직됐다. 기존까지 실제운동과는 거리를 갖고 있던 유학생들이 협동조합을 그 방편으로 내건 경제운동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원활하지 못했다. 학업을 마치면 곧바로 귀국하는 학생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지속가능성에서 뒷심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전준한과 전신한은 의기투합해 협동조합운동을 지속했다.


3.3. 창시와 해산[편집]


1926년 전준한이 학업을 뒤로한 채 고향 상주로 돌아온 이유는 두 가지로 추려볼 수 있다.
첫번째는 가난한 집안 환경 즉, 가정을 돌보기 위해 돌아왔으며, 두번째는 국내 협동조합 선전 조직에 힘쓰기 위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집 한켠에서 함창협동조합을 차려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했다. 이 자그마한 협동조합운동이 요원의 들불처럼 번져 이 나라 전 농민이 함께 고루 잘 사는 세상을 꿈꾸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그의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는 함창군 일대를 순회 선전하는 동시에 각 동(洞)의 유력자 30여명의 발기인을 모집한 후 약 1개월간 준비했다. 마침내 그해 1월 14일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였지만 순탄하지 않았다. 발기인은 전원 불참하고, 노인 7~8명만이 출석했기 때문이다.

전준한이 발기인 몇 명을 직접 찾아가 참석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가난한 자들은 무능한데, 누가 그들을 믿고 거액을 투자하겠냐"는 매몰찬 말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준한은 농민 8명과 함께 발기인 총회를 치뤘다.

전준한이 이때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일본 유학 당시 뜻을 같이한 유학생들과 세계협동조합 모델들을 탐구했기 때문이다. 독일, 벨기에, 프랑스, 러시아, 스위스 등 모든 국가가 전시경제 속에서 어렵게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했고, 끝내 성공했다는 사실을 전준한은 알고있었다.

협동조합 발기인 총회 이튿날, 조합원 전원이 전력을 다해 조합원을 모집한 결과, 수일 만에 60여명을 모집했다. 석유 한 두레박, 성냥 약간, 소다 한 통을 사서 시작한 영업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 이상의 결과를 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함창시장(현 상주중앙시장)에 3원짜리 월세 사무실을 구했으며, 창립 4개월만에 422명의 조합원과 100여종에 달하는 품목을 취급하게 되었다.

그해 5월에는 여자야학을 열어 경비 일체를 부담하여 40여 명에게 교육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이후 '함창협동조합'을 모방한 협동조합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했으며 1930년대에 들어 그 수만 100여 개에 달했다.

하지만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던 일제가 1933년 해산명령을 내려 와해수준으로 접어든다.


3.4. 이후 행적[편집]


함창협동조합이 해산된 후, 때를 기다리며 신념을 버리지 않았던 전준한은 한국전쟁 중 협동조합법을 직접 마련했다.

1953년엔 협동조합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성미저축운동을 골자로 하는 구국자조운동을 전개했고, 1958년에는 '윤리도덕도'를 직접 창안해 윤리도덕진흥운동에 종사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대전 복지농도원 상임고문으로 있으면서 한국 농민운동의 선구자인 한흙 한인수 선생에게 자신이 평생 바쳐온 농민운동 일체를 전수하며 마지막까지 참 농부로 살았다. 전준한의 숨은 노력으로 복지농도원은 제1회 5.16 민족상을 수상하는 등 자신의 직분사명에 최선을 다해 살아갔다.


4. 협동조합의 의미[편집]


전준한은 협동조합의 의의를 다음 3가지에 찾았다.

- 협동조합운동은 자본주의 제도의 결함에서 산출된 각종 사회 운동의 하나의 형태이다.

- 경제적 약자가 상호부조의 협력에 의하여 그들의 경제적 향상을 기도하며, 자본주의의 결함을 배제하려는 사회 이상을 가지고 발생한 경제적 조직체이다.

- 협동조합은 그 내용에 있어서 여러 가지의 형태를 포장하고 있으나 즉 소비, 신용, 생산, 판매, 이용 등의 조합이 이것이다.

전준한은 동생 전진한의 이론서를 바탕으로
"전인구의 8할을 점유한 대다수의 농민생활은 나날이 파명의 심연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고 이를 타개할 방편으로 협동조합운동을 내세웠다.

전준한의 협동조합운동에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조직 운영에 있을 것이다.

1. 출지는 일인일구(一人一口)주의 (유산자전횡방지)

2. 배당은 이용액에 따라 (잉여금배분의 공평)

3. 매매는 시가현금주의 (소자본의 운전민활)

4. 빈인은 출자불입 유예 (사업의 대중화)

이 원칙들은 현대의 협동조합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협동조합운동의 실제' 5조에는 '협동조합실지경영에 관한 주의(7항)'가 있고, 6조에는 '협동조합의 지도자에 대한 주의(4항)'가 있다.
성실할 것, 절약할 것, 지도할 것, 조합원 간 원만한 관계 유지할 것, 욕심내지 말것, 출자금 관리를 철저히 할 것, 선전할 것, 무자각한 유산자를 조심할 것, 몸소 실천할 것, 사업을 위해 논쟁을 초월할 것, 동지를 신임하는 동시에 언제든 분란을 각오할 것. 이들 항목은 모두 전준한이 준수해야 할 것들이었다.


5. 전준한 사회적경제 대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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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사단법인 사회적기업연구원(RISE)
- 경상북도에서 지역사회에 대한 공헌과 사회적가치 실현을 선도함으로써 사회적 경제 활성화의 모범이 되는 공로자를 선발·시상하고 있다. "전준한 사회적경제 대상"은 대한민국 최초 협동조합인 함창 협동조합을 설립한 전준한의 이념을 재조명하기 위해 시상하고 있다.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선거구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상주군 을

[[대한노동총연맹|
대한노동총연맹
]]

802표 (1.95%)
낙선 (12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무소속|
무소속
]]

1,188표 (2.67%)
낙선 (8위)



7. 참고문서[편집]


  • '퍼스트 펭귄' 전준한 이야기 (한국콘텐츠연구원 /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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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1세 한(漢) 항렬.[2] 초명 전경준(錢京俊).[3] 아명은 전중종(錢仲宗).[4] 1922년 11월 8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1922년 9월 18일 당시 경상북도지사로부터 정근증서(精勤證書)가 몰수된 기록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