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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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05년 이전까지는 구세학당, 언더우드학당, 예수학당 등 교명을 사용하였음.
  • ** 단, 제중원의 경우 서울대학교병원과 정통성과 관련된 논란이 있음.


1. 개요
2. 역사
3.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 간의 정통성 논란
4. 여담



1. 개요[편집]


파일:광혜원복원연세.png
연세 역사의 뜰 광혜원(복원)

고종의 명에 의하여 1885년 4월 10일 개원한 최초의 서양식 황립 병원으로[1] 설립 당시에는 광혜원(廣惠院)이었다. 개원 13일만인 4월 23일 고종은 '대중(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중원(濟衆院)이란 이름을 하사하여, '광혜원'의 이름이 '제중원'으로 바뀌게 된다. 역사 교과 상에서는 광혜원이란 이름으로 알려져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후 국가에 압류된 홍영식의 집을 수리하여 부지로 사용했고, 당시 선교사 겸 의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을 고용하여 병원을 운영하였다. 이후 알렌 말고도 다른 의사들(주로 미국 출신)을 고용하게 된다. 연세의료원 측에서는 알렌이 고종에게 건의하여 광혜원을 설립했다고 주장하며, 서울대학교병원에서는 고종이 능동적으로 설립한 기관이라는 입장을 펼친다.


2. 역사[편집]


파일:external/www.kyosu.net/27220_13619_445.jpg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 홍영식의 집 건물(現 헌법재판소 일대)에 들어선 제중원. 설립 당시의 명칭은 광혜원이었다.

파일:external/pressian.wcms.newscloud.or.kr/60100517004935(9).jpg
1886년 구리개(現 서울특별시 을지로입구역 일대)로 이전한 제중원.

1884년 갑신정변고종명성황후의 인척이자 측근이었던 민영익은 개화파 자객에게 피습당해 13번이나 칼에 찔려 중태에 빠졌다. 이때 묄렌도르프가 미국인 선교사 의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을 고종에게 추천했고, 알렌으로부터 서양 의술로 치료받은 민영익은 목숨을 구하고 소생했다. 이에 감복한 고종은 알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비단 옷과 부채, 도자기 등을 선물하였는데, 이 때 알렌은 고종에게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의했다.

당시 근대적 의료기관은 1877년 부산의 제생의원을 시작으로 1883년 원산 생생의원, 인천 일본영 사관부속병원, 서울 일본관의원 등 여러 곳이 세워지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인 환자도 받았지만[2] 명목상으론 조선 땅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기타 외국인을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었다.

그리하여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조선 정부가 세운 서양식 병원 '광혜원'이 설립되었다. 설립 12일 뒤 고종은 이 병원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제중원은 '중생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제중원은 조선 정부가 건물, 운영비, 병원 업무를 보조하는 주사 등의 하드웨어를,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의사, 간호사, 일부 운영비 등의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일종의 합작 병원의 형태로 운영됐다. 1886년 3월 29일에는 16명의 학생으로 '제중원의학당'이 문을 열어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이 시작됐다.

알렌 이후 존 윌리엄 헤론(John William Heron, 1856 ~ 1890), 애니.J. 엘러스(Annie J. Ellers, 1860 ~ 1938), 찰스 캐드월러더 빈턴(Charles Cadwallader Vinton, 1856 ~ 1936)이 뒤를 이어 제중원을 운영했다.

1891년 이후 제중원 운영진과 조선 정부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893년 7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제중원 원장으로 한국으로 파견된 올리버 R. 에이비슨(Oliver R. Avison, 1860 ~ 1956)은 북장로회 선교부 서울지부를 이끌고 있던 언더우드와 함께 제중원의 운영권을 정부로부터 가져오려고 시도한다. 반년 가까운 교섭과 협상 끝에 1894년 9월 제중원의 운영권이 조선 정부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이로써 제중원은 왕립(국립) 의료기관에서 사립 선교 의료기관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국내 영향력이 세졌던 정세에서 고종이 왕립 의료기관을 일본에 빼앗기기보다는 미국으로 넘기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고종은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어했고, 이를 위해 가장 기댔던 것은 미국이었고, 일본도 청나라와의 전쟁을 승리하고 조선을 순조롭게 장악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원만한 관계가 필요했고, 이 때문에 운영권 이관을 묵인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후 제중원을 운영하게 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서울지부는 늘어나는 환자들을 감당할 수 없어 병원 확장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러던 차에 1899년 언더우드를 비롯한 미 북장로회 서울지부 선교사들은 미국 클리블랜드의 부호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에게 한국의 의료 및 선교 상황을 전달하고 그를 설득하여 거액의 기부금을 받아왔다. 같은 해에 제중원 의학교가 설립되었고 에비슨이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세브란스의 기부금으로 숭례문 앞에 병원을 신축하여 1904년 완공된 건물로 확장 이전하며 병원 이름을 제중원에서 기부자의 이름을 딴 세브란스병원으로 바꾸었다. 제중원 의학교 역시 세브란스 의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1905년에 고종이 선교회로부터 제중원의 운영권을 회수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제중원의 운영권만 선교회에 넘겼지 소유권 자체는 정부에 있었다는 것. 그러나 제중원 건물은 이후 병원으로 쓰여지지도 않았고 의료인도 모두 없어진 상태이며 현재처럼 제중원 같은 병원 이름의 브랜드에 대한 로열티 같은 것이 있었을 리가 없던 시절에 운영권 회수와 관련된 주장은 최근에 급조된 개념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3]

이후 1907년에는 국립 의료기관 '대한의원'이 설립된다. 세브란스 병원은 우리가 아는 연세대 의료원의 모체이고, 대한의원[4]은 서울대학교병원의 과거 시설 중의 하나이며 1970년대 이후 제중원이 국립이므로 서울대학교병원 측이 본인이 제중원을 계승했다고 새롭게 주장함으로 인하여, 아래 문단에서 보는 것과 같은 논란이 생기게 된다.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과는 한자까지 똑같지만 전혀 관계가 없으며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 이 '광혜원'의 유래는 고려/조선시대에 공무를 보던 관리가 머무는 공공 숙박시설이었다.


3.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 간의 정통성 논란[편집]


서울대학교병원연세의료원 사이에서 현재 제중원의 정통성에 관한 논란이 있다. 제중원이 한국 현대 의학의 발상지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인 점도 논란에 한몫하는 것으로 보인다.[5] 결과만 보면 2011~2012년 세브란스에서 서울대 쪽에서 내민 증거를 모두 반박하고 추가자료가 발견되면서, 제중원은 세브란스의 전신이라는 결론을 지으며 논란이 마무리되었다.[6] 연세대 측에서는 제중원의 설립년도인 1885년을 대학 설립년도로 기념하고 있는 만큼, 정통성 논란은 예민한 문제이기에 적극적으로 서울대의 주장에 반박하는 모습을 보인다.

서울대학교병원측에서는 홈페이지에서 밝힌 연혁에 따르면 제중원이 설립된 1885년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제중원과 현 서울대학교와의 연관성에 관한 게시물을 제작해 홍보하고 있다.
#.제1편 제중원은 과연 누가 설립했는가?
#.제2편 제중원 운영권은 왜 미국 북장로회에 이관되었나?
#.제3편 제중원은 왜 지금도 중요한가?

일단 서울대학교에 의하면 제중원은 왕립기관이었고 당시 선교회는 위탁 운영만 했지 소유권은 가지지 않았으며, 이후 고종령으로 제중원 운영권은 선교회로부터 회수되었기 때문에 연세의료원의 주장은 억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Q. 알렌이 제중원을 설립했다는 주장은 사실인가요?

A.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은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발발 당시 일본인을 제외하면 조선에 거주하던 유일한 양의(洋醫)였습니다. 그는 갑신정변 때 큰 부상을 입은 정계의 실력자 민영익을 치료했습니다. 그로 인해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서양식 국립병원의 설립을 편지로 건의했습니다. 이렇듯이 알렌이 제중원 개원에 기여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이미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양의료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 알렌의 건의가 도움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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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문답식으로 풀어보는 제중원의 진실


Q. 제중원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맞는지요?

A. 자의적인 역사인식입니다. 제중원 의료진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동함으로써 제중원 운영이라는 경험적 자산이 세브란스병원에 전수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세브란스병원이 직접적으로 제중원을 계승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국립병원 제중원을 수탁 운영하던 사람들이 자금을 마련하여 1904년에 자기네 병원을 완공하고 독립한 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병원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듬해에는 대한제국의 요청으로 제중원을 반환했습니다. 그러고는 ‘세브란스병원’이라는 새 공식 명칭과 ‘제중원’이라는 종전 근무지의 명칭을 병용(倂用)한 경우입니다. “제중원”의 브랜드 가치를 이용하여 세브란스병원과 선교사업을 활성화하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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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문답식으로 풀어보는 제중원의 진실


그러나 연세대학교 측은 서울대학교가 1946년 개교 당시 일제가 설립한 학교들의 연속이 아닌 새로 출발하는 대학으로 시작하였고, 그래서 1954년에는 세브란스의대 70주년 축하 광고까지 보내주다가 1978년부터 갑자기 국가 중앙 병원으로써 가치를 되찾기 위해 과거를 거슬러 대한제국의 의료기관인 제중원과 일제가 설립한 대한의원을 자대의 역사에 편입하며 기원으로 삼고 있다고 반박한다. 결국 최초 타이틀을 가지고 싶은 서울대학교

하지만 이에 대해 서울대학교 측은 제국대학의 정체성을 계승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분명 종합대학교로서 서울대는 1946년 개교를 연혁의 시작으로 삼고 있지만, 단과대 별로는 그 시작점을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가령 법과대학 측은 1895년 세워진 법관양성소를 기원으로 잡고 있고, 사범대학은 1895년 한성사범학교를 기원으로 별도로 자리잡고 있다가 국립 서울대학교로 모여졌다고 설명하고 있는 식이다.# 의과대학 측도 대한의원 교육부-경성제대 의학부를 거쳐서 1946년 서울대학교로 편입되었다는 것이 공식 입장인 만큼, 서울대가 경성제대의 정체성을 계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의 정통성이 이어지지 않았다는 연세의료원 측의 반박도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다음은 연세의료원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Q. 서울대병원은 어떤 근거로 제중원이 자신들의 뿌리라고 주장하는가?

A. 서울대병원과 제중원의 연속성을 말해주는 사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서울대병원은 제중원의 시작이 조선의 정부기관이므로 '국립'병원의 맥을 잇고 있다는 논리만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는 서울대병원과 제중원 간의 연속성을 보장해주지 않는 논리이다. 국립기관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제중원과의 연관성을 주장한다면, 동일한 국립인 경북대학교, 부산대학교 등 국립대에 속한 의과대학 모두가 제중원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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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란스 역사관


Q. 제중원과 세브란스의 연속성을 말해주는 자료는 무엇인가?

A. 서울대병원 측은 제중원 운영권이 선교부로 넘어온 1894년 이후 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전하는 1904년까지도 제중원이 조선정부 소유라고 주장하며 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은 무관한 기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의 연속성을 말해주는 자료는 무수히 많다. 세브란스병원, 조선정부, 민간, 일본정부 등의 자료들이 모두 그렇다. 먼저 1902년 세브란스 병원 정초식 초청장에는 “새로 짓는 제중원(세브란스 씨 기념병원)”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또 1906년 6월 4일자 관보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세브란스 병원을 제중원이라 부르며 제중원 찬성금 3000원을 지급한다는 기사가 나온다. 당시 정부가 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의 연속성을 인정한 것이다. 또 1922년 12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세브란스 병원을 제중원으로 부르고 있다. 일본 후생성이 발행하는 「일본의적록」(1925년) 역시 세브란스병원이 제중원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외에도 세브란스의 내부 자료에서는 예외 없이 제중원을 세브란스의 기원으로 표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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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바로알기

위의 자료들은 세브란스 병원의 여인석 교수가 <제중원 뿌리 논쟁>이라는 책으로 2015. 04. 06.에 정리하여 발간하였다. 제중원 뿌리논쟁.


4. 여담[편집]


서울대학교 측의 논리에 근거하면 당시 제중원은 임금이 직접 설립했고 교습도 한 것이므로 당시 조선 최고 고등교육기관인 성균관과 뿌리가 닿은 것이므로 현재 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관련 병원인 삼성서울병원이 계승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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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은 아니다. 1877년에 설립된 부산 제생의원을 비롯해 서울에도 1883년 일본관의원 등 근대적 병원은 이미 설립되어 있었고 광혜원은 조선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적 병원이다.[2] 원산 생생의원 개원 첫해에 1,100여 명의 한국인 환자가 방문했다. 반면 일본인 환자는 300여 명이었다.[3]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근대적 자본주의가 도입되기 전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병원의 명칭이 바뀌고, 위치가 바뀌고, 운영자금의 출저가 바뀌었었도, 진료하는 의사가 그대로라면 과거와 같은 병원으로 보는 것이 무방한가? 물론 세브란스병원-제중원간의 연관성에 의문이 제기된다고 해서, 대한의원과 제중원이 연속성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4] 이토 히로부미의 식민지 의료체계 확립 계획에 따라 일본 육군 군의총감을 비롯한 일본군의관 관계자들로 구성된 대한의원창립위원회를 통해 광제원과 적십자병원을 통합하여 설립하였다.[5] 근대화와 민족주의의 문제도 있는데, 서울대설 지지측은 제중원이 순전히 북장로회가 운영한 것이라면 한국의 현대의학 도입은 외국인에 의해 타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된다며, 조선 조정의 능동성 주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측면에서 제중원이 국영기관이었음을 강조한다.[6] 진정한 의미에서의 조선시대 서양의학의 발상지는 수신사로 왔던 해군 군의관 야노(矢野義澈)에 의해 설립된 1877년 부산제생의원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부산제생의원은 부산부립병원을 거쳐서 부산대학교병원의 전신이 된다. 이곳에서 지석영은 종두법을 배우고 전국에 전파했다.[7] 단, 부산대학교병원은 제생의원과의 연관성을 주장한다. 이건 주장 수준이 아닌 팩트기도 하고. 단, 다른 점은 제중원은 대한제국 자본으로 세워졌지만 제생의원은 도시가 도시이고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일본 자본으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