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현/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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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교 및 대학 시절
2. 실업 야구단 경력
3. 프로 경력
3.1. 해태 타이거즈
3.2. 삼성 라이온즈
3.3. 두산 베어스
4. 스타일
5. 연도별 성적


1. 고교 및 대학 시절[편집]


파일:YvRmuza.jpg
군산상고 시절. 사진 맨 오른쪽이 조계현.

야구 명문인 군산상고 출신이다. 고교시절인 1981년 1학년 때 이미 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알렸으며, 팀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시켰다. 1982년 천안북일고와 맞붙은 청룡기에서는 당시 또다른 초 에이스급 선수였던 안성수[1]와 결승전에서 1:1로 12회 완투 + 다음날 다시 연장전을 계속하는 강행군을 하는 무지막지한 혹사를 당하면서도 결국 팀을 우승시켰다.

청룡기 준결승도 치열했다. 당시 광주일고 문희수는 2학년이었는데도 둘은 치열한 투수전을 벌였다. 둘 다 강속구 투수들이었고, 타자들은 그들 앞에서 추풍낙엽이었다. 이 게임도 연장전 승부가 아니었을지.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명승부였다. 1981년 선린상고 박노준, 김건우, 1985년 부산고 박동희, 1991년 신일고 조성민와 더불어 군산상고 조계현은 고교야구에서도 가장 화려한 별이었다. 그 시절 고교야구의 인기가 워낙 높았던데다 TV로 생중계되었던 한일 고교야구 정기전[2] 등의 영향 때문에, 조계현은 연예인들에 맞먹는 하이틴 스타의 인기를 누렸다. 여학생 대상 잡지들이 했던 가장 좋아하는 스타 설문조사에서 연예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고교야구 대회와 국제대회에서의 무지막지한 혹사 때문에 안성수는 완전히 야구 인생이 맛이 가서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가 소리없이 사라졌고, 조계현도 어깨를 다쳐서 파이어볼러에서 평범한 구속의 투수로 전락했다. 그가 2학년 때인 1982년 일본에서 벌어진 한일고교야구 정기 교류전에서 조계현은 3차전 내내 혼자 마운드를 책임지다 시피하여 2승 1패를 거뒀다. 당시 감독이었던 경북고 구수갑 감독이 라이벌 팀 에이스를 일부러 굴렸다는 얘기가 있었을 정도. 그때의 무리 때문에 부상을 입어서 1983년 한일고교야구 정기전에는 부상 때문에 참가하지 못했다.

1981년에는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선동열, 김건우[3] 등과 차출되어 1981년 제1회 IBAF 청소년야구대회의 초대 우승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혹사로 인해 연세대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타자로 전향도 고려했다고. 그러나 재학 후반부에 조계현은 팔색조 변화구라고 불리는 다양한 구질을 연마하여 변화구+컨트롤 위주의 기교파 투수가 되었고, 이것 덕분에 그는 전성기 못지 않은 투수 시절을 보내게 된다.

조계현 하면 승부사처럼 조금은 경직되고 무서운 인상으로 기억하는 팬들이 많은데, 대학 시절 그는 귀여운 곰돌이처럼 푸근한 인상의 매력남이기도 했다. 연세대 에이스는 박철순, 최동원, 윤학길, 김정수, 조계현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윤학길만 순둥이다. 김정수가 가을 까치요 이순철, 김성래, 조계현이 큰 경기 명승부를 펼친 이유는 광적인 응원을 펼치는 정기연고전의 살 떨리는 큰 승부를 체감한 덕분이리라. 조계현은 초등시절 학교의 요청으로 1년 유급했고, 프로 진출도 올림픽 때문에 1년을 유예했다. 고졸 선수보다 6년 늦게 프로에 진출한 것은 팬으로서 아쉬운 점이다.


2. 실업 야구단 경력[편집]


파일:attachment/nonghyupjogye.jpg 
1988년 농협 입단 사진

19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실업야구 농협 야구단에 1년간 몸을 담았다.


3. 프로 경력[편집]



3.1. 해태 타이거즈[편집]


이듬 해인 1989년에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당시 프로선수는 대륙간컵 등 국제경기에 참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아마추어 선수 신분이어야 했다. 당시 이로 인해 발이 묶였던 선수는 송진우, 강기웅, 노찬엽 등이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덕분에 1989년은 국가대표급 신인들이 다수 쏟아져나온 해로 기록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 신인왕은 아마 시절 그들에 비해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고졸 출신에 19승이라는 어마무시한 성적을 거둔 박정현에게 돌아갔다.

파일:/img/img_link7/147/146369_2.jpg

파일:external/appdata.hungryapp.co.kr/SuAxd47yS7P65ZCdJqQiUYMPo33vCibc.jpg

선동열, 이강철과 더불어 투수진의 삼대장이었던 영광의 해태 타이거즈 리즈 시절.

선동열, 이강철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 마운드의 3인방 중 한 축[4]이었으며, 통산 320경기에 등판해, 126승 92패 17세이브에 평균자책점 3.17을 기록했다. 전성기에는 유난히 LG 트윈스에 강해서, 1993년 ~ 1995년[5][6] LG를 상대로 12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1993년 LG 김태원[7]과의 맞대결은 1980년대 선동열최동원 못지 않은 명승부였고, LG 해태의 3연전 모두 잠실 야구장이 매진되기도 했다. 조계현의 LG전 연승은 1995년 이상훈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이상훈의 1-0 완봉승으로 간신히 마감됐다.

선동열을 워낙 압도적이라 따로 이야기 하지 않고 같은 해 데뷔한 이강철과 해태 시절을 비교하면 이강철은 2점대 2번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3점대의 안정적인 선발로 해태에 공헌했고, 조계현은 1점대 한번 2점대 5번의 임팩트 강한 시즌을 선보였다. 둘이 같이 뛰던 1989~1997년까지를 봐도 출전횟수, 선발횟수, 승수 이닝 등의 누적은 이강철이 조금 앞서나 비율성적은 조계현이 더 좋았다. 동시간 스탯티즈 기준 war은 41의 조계현이 37의 이강철을 능가한다. 즉 둘 다 뛰어난 투수였지만 살짝 조계현이 우위였다는 것.

조계현은 투수왕국 해태에서 93~96에서 최고의 1선발, 즉 대한민국의 에이스였다, 고로 열혈 팬들도 거느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팬들에게 투혼의 승부사처럼 비췄다. 대단한 구속도 아닌데도 강심장의 자신있는 투구 모습은 정말 짜릿한 희열을 선물했다. 특히 삼성, LG 등 라이벌 팀과의 대전엔 더 짜릿했다.

해태는 창단 당시 군산상고 주축(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종윤, 김성한)에 광주일고(강만식, 차영화, 이상윤, 방수원)가 보조하는 식으로 출범했고 해태의 전성기 마지막엔 군산상고 출신 조계현이 있었다. 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후로 해태의 우승도 끊기고 결국 부도가 난 건 묘한 느낌을 준다. 그후로 해태나 기아에서 전북 군산, 전주 출신은 줄어드는데 쌍방울의 출범도 이유가 됐겠다.[8]

해태에서 빛나는 선수들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조계현은 성적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선수로 기억된다. 그가 던질 때는 야구 승부 정신의 처절함과 치열함이 있었기에 그만의 팬덤과 아우라를 남길 수 있었다. 당시 명 투수들이 그렇지만 문희수[9]처럼 대학을 안 가고 프로에 진출했다면 더 막강한 해태와 좋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지.

1992년까지는 셋업+마무리도 겸업했던 관계로 입단동기 이강철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약이 돋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1992년 롯데와의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1실점 완투승을 거두면서 건재를 확인했고,[10] 이듬해인 1993년에 완전히 만개했다. 선동열이 건초염에 걸리면서 긴 이닝을 소화해야 하는 선발투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마무리투수로 내려가면서, 조계현은 자연스레 선발투수로 보직이 고정된 것이다.

1993년 4월 11일 본인의 시즌 첫경기 LG전에서, 9회 2아웃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인상적인 투구를 펼쳤다.[11] 그 기세를 몰아 그해 17승 6패 방어율 2.15로 다승 1위, 평균자책점 4위를 차지한다. 그리고 1993 한국시리즈에서는 2승으로 해태의 V7를 견인했다. 특히 1승 1무 2패로 팀이 열세에 몰린 잠실 5차전에서 거둔 완투승은 압권 그 자체.[12]

조계현은 고교 1학년시절 강속구 투수로 등장했다. 그후 어깨에 무리가 있었는지 속구가 무뎌졌지만, 프로에 나타날 때 그는 강속구도 자주 구사했다. 한데 1992년 200이닝에 가까운 투구를 한 후 무지 힘들었다고 한다. 이 대로는 야구를 오래 못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 그후 본격적으로 변화구와 제구력 투수로 변신한다. 그리고 큰 성과를 얻었다. 그는 겨울전지훈련에 자주 동행치 않았다. 주로 따스한 남쪽 완도의 섬에서 보내곤 했다. 아마도 체력적 부담도 있었겠고 자율훈련에 자신도 있었겠지만 구질 개발이 중요하다고 보고 개인훈련을 택했을지도.

1994년은 그의 커리어하이 시즌이었다. 그 해 해태는 LG의 맞대결에서 7승 11패를 당했지만 그 중 6승이 조계현이었다. 81승을 올리며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신바람 야구 LG에게 유일한 저승사자가 있었으니, 그건 조계현이었는데 2년 연속 다승 1위를 하였다. 라이벌 팀 LG의 이상훈과 함께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 하지만 그해 투수 골든글러브는 최초로 40세이브 고지를 찍은 태평양의 마무리 정명원[13]이 받았다.[14] 그 해 8월 14일에 쌍방울을 상대로 1안타 완봉승을 거둔 적이 있는데, 그의 노히트노런을 저지한 주인공은 당시 쌍방울 부동의 4번타자이자, 감독이 된 후에는 드러눕기를 취미삼는 분.[15][16]

1995시즌은 부상으로 인해 2달 가량 출장을 못 하며 9승에 그쳤으나,[17] 이상훈의 트리플 크라운을 저지하면서 1.71로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다. 규정이닝인 126이닝을 정확히 채운 덕택.[18] 그리고 시즌 후인 11월에 열린 한일 슈퍼게임에 한국대표팀으로 참가하게 되고, 2차전과 6차전에 선발등판한다. 특히 2차전에서는 이치로가 포함된 일본타선을 상대로, 6이닝 2실점의 호투로 승리투수가 되었다.[19]

1996시즌은, 2월 스프링캠프 과정에서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으로 어수선하게 출발한다.[20] 우려 속에 출발했고, 1993시즌이나 1994시즌랑 비교되었지만, 그 두 해에 못지않게 압도적인 투구를 보이며 1점대를 늘 유지하다가, 마지막에 2점대를 찍고 그걸 만회하려던 최종전에서 부친상을 당하고 만다. 결국 ERA 2.07에 16승을 찍고 끝난다. 대신 한국시리즈 우승에 공헌하는데, 특히 2승 2패로 맞선 잠실 5차전 정민태와의 맞대결 승리는,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결정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3.2. 삼성 라이온즈[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40109184459299.jpg
(출처 : 포토로)
순탄치 못했던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6년의 활약을 마지막으로 이대진, 김상진 등 신예 에이스들이 나타나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김응용 감독의 눈 밖에 나서[21] 1997 시즌이 끝나고 삼성 라이온즈4억원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다.[22][23] 사실 타이거즈의 재정난도 있었지만 1996년 시즌 후 해태 구단은 조계현과 이강철을 묶어서 LG의 이상훈과 트레이드하려는 시도를 했으나[24] 실패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조계현은 자존심이 상해서 구단에 트레이드 요청을 하게 된다. 당시 조계현은 트레이드 희망 구단으로 삼성을 골랐고 결국 모기업이 부도난 1년 후에 맞춰서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

여기서 1998시즌과 1999시즌을 보냈지만 1998시즌은 2년전의 그 선수는 어디 갔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방어율을 5점대까지 수직 상승했고, 1999시즌은 말 그대로 몇 경기 못 올라오면서 퇴물이나 다름없던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1999시즌을 마치고 삼성에서 방출되었다.[25] 그리고 그 해 겨울, 해태 시절 투수코치로 인연이 있었던 재활의 신이라 불리는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두산 베어스로 이적했다.


3.3. 두산 베어스[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10414165949560B2.jpg
(출처 : 포토로)
현역 마지막을 보낸 두산 베어스 현역 선수 시절.

두산 베어스에서는 예전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해태시절 후배였던 이광우와 함께 원투펀치로 이끌어 팀의 최고참으로 활동했다.LG와의 2000년 플레이오프에서 1,4차전 선발등판해 1승2패로 뒤쳐진 4차전 승리투수가 되며 한국시리즈로 이끈 뒤 2000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선발 투수로 나와 승리를 거두며 만 36세 6개월로 역대 한국시리즈 최고령 승리투수 라는 신기록을 세우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26] 그래서 조계현은 FA까지 선언할 수 있었는데 1년에 1억 8백만원에 계약을 하게 되었다.[27] 해태 시절 한 팀에 있던 김정수, 송유석이 FA를 선언했으나 헐값에 울며 겨자먹기로 계약한 후 트레이드 매물[28]로 오른 것을 생각하면 대조적인 부분.[29]

조계현은 두산에서 어느정도 반등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로 삼성에 있을 때는 운동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지나치게 웨이트를 하다 오버페이스로 시즌을 망쳤고 삼성 시절의 실패를 타산지석삼아 운동량을 조절한 게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2001년에도 38살의 나이에 전천후 현역 선수로 뛰며 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하기도 했다. 당시 김인식 감독에게 재활신 별명을 붙여주게 한 사례 중 하나였을 정도. 그렇게, 현역 마지막 우승인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았지만 나이가 많은데다가 성적 하락이 뚜렷했기에 결국 2001년 11월 24일부로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고 만다.[30] 그리고 이듬해 KBS의 해설위원 제의를 수락하면서 선수 생활을 마치게 된다.


4. 스타일[편집]


파일:JQAOktA.gif

이름 가운데 글자가 을 떠올리게 하는 '계'인데다 '변화구의 마술사', '팔색조', '싸움닭' 등의 별명을 얻은 탓에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팬들 사이에서는 조닭이라고 부르며 대차게 깐다.[31]

LG에 무척 강해서 엘나쌩 클럽의 대표 멤버였다. 1993년 개막시리즈부터 1995년 8월 18일 이상훈이 완봉한 LG에 1실점 완투패하기 전까지 LG전 12연승을 기록했다. 특히 이 시기의 LG는 21세기의 약팀 이미지가 아닌 리그에서 굉장히 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고 프로야구의 흥행을 주도했기 때문에 조계현의 LG전 호투는 언론으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렇게 LG에 강했던 조계현이 훗날 김기태 감독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인해 LG 감독 대행이 된 게 아이러니(...). 다만 노쇠화와 함께 이병규가 입단한 1997년 이후엔 거꾸로 엘상바였다.

선수 시절 전체 커리어를 보면 이강철이 근소하게 우위지만 이강철은 에이스로서 압도하는 모습보다 꾸준한 활약을 한 선수로 평가되기에 90년대 해태 전성기의 에이스는 조계현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93~96의 모습은 마무리로 변신한 선동열의 뒤를 잇는 에이스 그 자체였다. 60승 24패를 거두며 리그 최강의 에이스로서의 위상을 4년동안 유지하였다.[32]


5.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9
해태
31
174
7
9
4
-
0.438
2.84
153
3
73
97
64
55
1.27
1990
30
178⅓
14
(4위)
13
0
-
0.519
3.28
144
8
81
130
(5위)
73
65
1.25
1991
21
130⅓
9
9
0
-
0.500
3.25
100
6
52
75
50
47
1.12
1992
37
156
10
6
12
(4위)
-
0.625
2.94
(5위)
123
13
59
98
64
51
1.14
(4위)
1993
28
196⅓
(3위)
17
(1위)
6
1
-
0.739
(4위)
2.15
(4위)
141
8
58
118
54
47
0.98
(2위)
1994
27
210
(2위)
18
(1위)
5
0
-
0.783
(2위)
2.61
171
12
68
135
69
61
1.11
1995
19
126
9
6
0
-
0.600
1.71
(1위)
97
2
43
59
28
24
1.06
1996
27
191⅔
(5위)
16
(3위)
7
0
-
0.696
(3위)
2.07
(2위)
145
12
52
116
51
44
0.99
(3위)
1997
25
114
8
9
0
-
0.471
3.71
111
11
36
71
64
47
1.2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8
삼성
29
150⅓
8
11
0
-
0.421
5.21
171
19
76
94
99
87
1.56
1999
12
20⅓
0
3
0
-
0.000
11.51
36
5
15
16
27
26
2.36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두산
16
89
7
3
0
0
0.700
3.74
81
7
31
53
40
37
1.20
2001
18
87
3
5
0
0
0.375
5.28
99
7
38
38
53
51
1.52
KBO 통산
(13시즌)
320
1823⅓
126
92
17
0
0.578
3.17
1572
113
684
1100
736
642
1.19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9
7완투
0완봉
1990
10완투
(1위)
5완봉
(2위)
1991
1완투
0완봉
1992
3완투
1완봉
1993
10완투
(공동 4위)
4완봉
(1위)
1994
14완투
(1위)
5완봉
(1위)
1995
4완투
0완봉
1996
11완투
(1위)
3완봉
(공동 2위)
1997
2완투
1완봉
(공동 4위)
1998
2완투
0완봉
1999
0완투
0완봉
2000
0완투
0완봉
2001
0완투
0완봉
KBO 통산
64완투
19완봉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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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7 00:16:49에 나무위키 조계현/선수 경력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1965년생으로 북일고의 에이스 투수였으며 조계현과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혹사로 한양대 진학 후에는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이제 막 창단한 연고팀 빙그레 이글스에 1987년 입단했으나 통산 성적 0승 1패, 평균자책점 13.50의 부진한 실적만 남긴채 프로야구계를 떠났다. 2008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1#2 [2] 서울에서 열린 1981년 한·일 고교야구 정기전에서 한국은 3전 전승을 거둔다. 군산상고 1학년 조계현은 1승 2세이브를 따냈다. 이때 방한한 일본 선수 중에 구도 기미야스도 있었다.[3] 이때 선린상고 동기였던 박노준은 차출되지 않았는데 이유는 1963년생인 선동열, 김건우와 달리 박노준은 1962년 생으로 1살이 많아서 나이제한에 걸렸기 때문.[4] 일례로 이대진도 넣긴 하나 이대진은 93년도에 입단으로 오히려 선배들에게 밀린다. 그래도 저 위에 3인방과 함께 100승 투수 반열에 오른 한 명은 틀림없다.[5] 결정적으로 이 기간은 LG 트윈스가 신바람 야구를 하면서 리그에서 잘 나가던 전성기였다. 이때의 엄청난 활약상으로 인해 LG의 올드팬들은 선동열보다 조계현이 더 무서운 투수였다고 회고한다.[6] 1993년 4월 11일 LG와의 광주 홈경기에서 9회 2사까지 노히트 노런을 이어가다 송구홍에게 통한의 중전안타를 맞고 노히트 노런이 깨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조계현은 2008년 삼성 투수코치로서 이범석박석민에 의해 자신처럼 9회 2사에서 노히트 노런이 깨지는 순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다.[7] 1993년에 조계현과 김태원의 맞대결은 세 차례 있었는데 각각 0-0 무승부(더블헤더 1차전), 조계현의 1-0과 2-1의 두 차례 1점차 승리였다. 당시 김태원은 141.1이닝 방어율 2.42라는 엄청난 호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조계현과의 맞대결에서 전혀 승리를 챙기지 못하는 등 불운이 겹쳐 시즌 8승에 그치고 말았다. 결정적 요인은 조계현과의 맞대결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8]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군산상고 후배 최해식이 술회하기를 쌍방울은 창단 당시 각 구단으로부터 선수들을 양도받아 오히려 이방인들이 모인 팀이었고 쌍방울에서 해태로 이적해오니 군산상고 선배들이 죄다 해태에 있었다고 했다. 조계현은 최해식이 고등학생 시절의 별명인 '풀빵'으로 불렀다고 하며 해태에서도 결국 풀빵이 별명으로 굳어졌다고 한다.[9] 역대 최초의 고졸 지명선수[10] 팀은 2승 3패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한다.[11] 9회 2아웃에서 송구홍에게 안타를 허용한다. 이후 강판당하면서 완봉승도 놓치고 승리투수에 만족하게 된다.[12] 9회 2아웃까지 무실점 투구를 이어가다가 이만수에게 투런홈런을 허용한다. 이후 후속타자를 범타 처리하고 완투승.[13] 조계현의 군산상고 후배이기도 하다.[14] 전년도 선동열의 31세이브에서 9개 더 갱신을 했다. 선동열 역시 전년도에 골든글러브를 수상[15] 후에 김기태가 LG와 KIA에서 감독을 맡을 때 조계현이 수석코치가 되어 옆에서 그를 보좌한 걸 보면 참 인연이다.[16] 그리고 공교롭게도 1993년에 조계현의 노히트 노런을 9회 2사에서 저지한 송구홍은 조계현이 1997 시즌 후 삼성으로 트레이드되고 얼마 후 해태로 트레이드되었다.[17] 이건 당시 방위복무 중이었던 이종범이 원정경기에서는 없는 타선의 무기력함도 있었다.[18] 팀은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다.[19] 6차전에서는 부진했다.[20] 특히 항명사건의 주동자 중 한 명이었다.[21] 하와이 전지훈련 중 이순철, 송유석, 김정수, 이건열, 정회열 등과 같이 항명사건을 터뜨린 게 원인이었다. 결국 이 선수들은 1996 한국 시리즈 후 ~ 1997 정규시즌 종료 사이에 대거 정리된다. 단 김정수 만큼은 예외, 어느 정도 사건 수습을 했기 때문에 비교적 오래 살아남았는데 이 덕인지 2000년 김응용 감독의 추천을 통해 SK로 이적했다.[22] 이 시기 삼성은 우승의 한을 풀기 위해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타 팀에서 여러 선수들을 데려오는 등 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례들을 살펴보면 삼성의 막대한 자금력에 감탄할 정도인데, 먼저 김영진(야구)양용모(...)가 주전을 하던 포수진을 보강하기 위해서 1998년에는 해태에서 방출된 정회열을 자유계약으로, OB로 입단해야 했던 신인포수 김지훈을 지명권 양도로 데려왔고, 1999년에는 우완투수 이상훈과 4억원을 주고 두산에서 진갑용을 사온다. 그리고 1999시즌이 끝나자마자 LG에서 주전포수인 김동수를 3년 8억의 조건 + FA 보상금 + 김상엽을 주고서 사왔다. 또한 투수진 보강을 위해 1997 시즌이 끝나고 해태에서 4억원을 주고 조계현을 영입했으며, 1999년 시즌을 앞두고 OB의 에이스 투수 김상진6억 5,000만원을 내주고 데려왔다. 그리고 동시기에 해태의 젊은 마무리투수 임창용을 무려 간판타자 양준혁곽채진, 황두성을 얹고 거기에 현금 30억까지 줘가면서 데려왔다. 그리고 쌍방울의 주축 선수들이었던 불펜투수 김현욱과 좌타자 김기태를 무려 20억을 주고 데려왔다. 여기서 끝이 아닌데, 사이드암/언더핸드 투수를 보강하기 위해서 1999년 말 FA 제도가 도입되자마자 해태에서 이강철을 3년 8억 + FA 보상금 + 박충식을 주고서 영입했다. 그리고 당시 최고대우로 9회 우승신화를 일군 해태 타이거즈 감독 김응용과 코치진들까지 모셔오는 투자를 단행했다. 1997~2000년 4시즌 동안에 삼성이 선수영입에 쓴 돈은 자그마치 100억 이상이다. 그리고 이 당시 삼성과 현대가 서로간의 전력 상승을 위해 야구판에 돈X랄을 한 탓에 강한 팀들과 약한 팀들의 전력 양극화가 심해졌고 결론적으로 리그 흥행 저하의 큰 이유가 되었다.[23] 모기업의 위기 문제도 있었다. 당시 해태그룹은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타이거즈가 우승한 바로 1주일 후 부도가 나는 바람에 돈이 매우 필요한 상황이었으며, 리그 탑급이던 주축 선수들은 여기에 있어 더없는 현금화 자원이었다. 시의적절하게 현대와 삼성 간 재계 라이벌리가 야구계를 불태우고 있었고, 해태는 이에 조계현과 임창용, 이강철을 삼성에 팔고 이종범을 주니치에 임대를 보내면서 현금을 마련한다. 해태 뿐만이 아니라, 쌍방울 또한 97년 중순 부도가 나는 바람에 박경완, 김기태, 김현욱, 조규제, 김광림, 김실 등 주축 선수들을 삼성과 현대에 팔아 자금을 확보해야 했다.[24] 일단 이상훈이 LG에서 많이 굴려진 편이었지만 30대 중반에 접어든 조계현이나 언더핸드 투수여서 제법 많이 맞아나가는 이강철에 비해서는 더 매력적인 카드였다. 더군다나 해태는 좌투수, 좌타자 없는 팀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이상훈의 가치는 더 커보였을 정도.[25] 같은 시기에 이적한 정회열도 방출되었고, 류중일은 99시즌이 끝나자 은퇴하고 코치가 되었다.[26] 두산이 3연패 후 3연승으로 7차전까지 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27] 여기에 샤이닝 보너스 1억이 더 붙어있었지만 이를 이행하지는 못 했다.[28] 김정수는 연봉 5천, 송유석은 연봉 6천2백에 계약하고 각각 SK와 한화로 트레이드 되었다.[29] 이강철도 FA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조계현이 부활투를 던지고 있을 때 삼성에서 크게 부진했고 결국 2001시즌 중에 해태에서 KIA로 바뀌자마자 트레이드되었다.[30] 이 때 충격이 컸는지 외부와의 연락을 전부 끊고 한동안 칩거했다.[31] 투구 동작시 다리를 반대쪽 다리 위로 꼬아서 내려오는 게 닭싸움하는 듯한 모습이라 싸움닭이라 하기도 했었다.[32] 그 기간 유일하게 견줄 수 있는 투수는 역대 최고의 투수 선동열정민철 뿐이었고, 김상진이상훈이 그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