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서울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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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88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개최된 제24회 하계올림픽이자[16] 아시아에서 개최된 두 번째 하계올림픽이다.[17] 대회의 정식 명칭은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Games of the XXIV Olympiad Seoul 1988)이다.
1988 서울 올림픽 공식 선전 구호[15]
대회 운영방식 면에서 대륙별 종합 스포츠 제전 이후 곧장 2년 만에 치러졌던 전무후무 유일한 올림픽이며, 그간 역사에서 아테네, 로마, 런던, LA 등과 같이 여러 모종의 사정을 비롯하여 오랜 기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개최를 거두었던 도시들과도 그 의미가 엄연히 다를 정도로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회로도 기록된다.[18]
대한민국의 부흥을 상징하는 대회로서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던 대한민국이 불과 30여 년 만에 한강의 기적으로 일궈낸 눈부신 발전상을 과시한 올림픽이다. 또한 올림픽의 단순한 취지와 보통의 범주를 벗어나 냉전 종식의 밑거름이 되어 세계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몇 안 되는 올림픽이며[19] 대한민국이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음을 알린 대회이다.
2. 대회 상징[편집]
2.1. 마스코트[편집]
자세한 내용은 호돌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회 마스코트의 이름은 호돌이. 로마자로 Hodori로 표기되었다. 동물 모티브는 한국을 상징하는 호랑이로서 당시 디자이너였던 김현의 작품이다. 호돌이는 오로지 1988년에 열릴 서울 올림픽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기에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의 마스코트 표기를 포기하고 아시안 게임 폐회식에서도 올림픽의 대표 마스코트가 될 호돌이를 보다 강조했을 정도로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캐릭터다.
2.2. 주제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손에 손 잡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3. 메달 디자인[편집]
3. 유치 과정[편집]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유치 과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공산권 국가에 대한 참여 설득[편집]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은 남아공의 흑인 인종차별 문제로 아프리카 국가 26개국이 보이콧하였다.[20] 그 다음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문제 삼아서 자본주의 진영의 서방권이 대거 불참하였다. 그리고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에 대한 보복으로 이번에는 공산주의 진영의 동구권 대부분이 참여를 거부하였다. 이렇듯 국가간의 갈등으로 올림픽이 연달아 파행되는 와중에 다음번 개최지가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서울로 정해지자, 이번에도 공산권의 불참으로 또다시 반쪽 대회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일단 중국이 1984년 7월에 가장 먼저 참가를 선언했지만, 애당초 이 당시 덩샤오핑 정권은 소련과 대립하면서 독자 노선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권 전체에 별다른 영향은 없었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1990년 아시안게임의 베이징 유치 및 이를 토대로 2000년 올림픽 유치를 노리고 있었기에 괜히 서울 올림픽에 불참해서 일을 그르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의 경우 중국은 참가했으나 그 외의 소련과 관계가 돈독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몽골 등의 아시아 공산주의 국가들이 죄다 불참했던 전례가 있었고, 비록 아시아 스포츠계에서 중국 한 나라의 위상이 워낙 크다 보니 딱히 다른 큰 문제가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올림픽의 경우는 아시아만 국한된 대회가 아닌 그 이상의 국가와 의미를 포괄하는 대회이기 때문에 중국의 참가만으로는 공산권 전체의 참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다가 1985년 3월 동유럽의 대표적인 공산주의 소련의 대표적인 위성국가였던 동독이 참가를 확언하면서 실마리가 풀릴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는 사실 동독 내에서 과거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보이콧했던 것을 두고 논란이 거셌던 것을 그저 무마하려는 목적으로[21] 소련과의 협의도 없이 발표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이에 결국 공산권의 참가 여부에 대한 최종 칼자루를 쥐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대표격이었던 소련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번에도 소련이 보이콧하게 될 경우 베트남이나 폴란드 등의 소련과 연관이 깊은 다른 공산 국가들 모두가 보이콧할 우려가 컸기 때문에 1987년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에 취임했던 김운용이 그것도 러시아어까지 배워가며[22] 당시 소련의 IOC 위원을 만나 집중적으로 그에게 올림픽에 참여해줄 것을 간곡하게 설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부응하듯이 비록 본래 이념이 첨예하게 반대되는 적성 국가였지만 소련 자국의 언어까지 배워가며 설득에 나선 김운용의 모습은 도리어 소련 위원들에게는 좋은 인상으로 다가왔고, 때마침 1985년 당시 소련은 개혁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상황이었던지라 1985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소련과 공산권의 올림픽 참여를 설득하기 위해 대소 유화정책으로 전환하면서 한소관계는 급격하게 개선되었다.
1985년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유도[23] , 양궁 세계선수권대회와 복싱 월드컵에 소련이 참여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소련 비난을 중단했다. 소련도 1986년 4월에 소련 국가스포츠위원장 마라트 그라모프를 서울에서 열린 세계올림픽연합회 총회에 참석시켰으며 사할린 한인의 대한민국 귀환 문제도 검토해 보겠다고 유화적 태도를 취했다. 마침내 1988년 1월 12일에는 소련의 참가가 확정되었고 이에 여러 공산 국가들도 올림픽 참여 의사에 동참할 것을 밝히면서 서울 올림픽은 총 160개 국가가 참가하는 역대 최대 규모임과 동시에 8년 만에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 함께 참가한 대회로 기록된다.[24]
허나 소련을 포함한 여러 유럽의 동구권 공산권 국가의 참가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계속 올림픽 보이콧 의사를 굽히지 않자, 급기야 우리 정부는 인공기 게양과 북한 국가 연주 허용이라는 엄청난 제시를 내세우며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종용했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결국 참가하지 않았다.[26] 또한 2018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김영남이 이를 주도하여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서울 올림픽에 대한 보이콧을 촉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와 반대로 북한은 같은 공산&사회주의 국가들에게 그저 냉담한 반응만을 전달받았다고 전해진다.#[27][28]
5. 성화 봉송[편집]
1988년 8월 23일 오전 그리스 올림피아 헤라 신전 마당에서 채화돼 그리스 지역 봉송을 마친 후 8월 24일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에서[29] 성화 인도식을 치르면서 성화가 조직위원회 측에 인계됐다. 8월 25일 아테네에서 성화를 싣고 출발한 대한항공의 전세편[30] 은 8월 26일 중간 기착지인 태국 방콕에 잠시 머무른 뒤[31] 8월 27일 오전 11시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하면서 대한민국 국내 봉송을 시작했다.
제주도 일주 봉송을 마친 성화는 대형 크루즈선인 올림피아호를 통해 부산항까지 해상 봉송됐고 8월 28일부터 올림픽 개막 전날인 9월 16일까지 전국 각지를 돌며 올림픽 개막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당시 올림픽 성화봉송이 이뤄진 코스는 아래와 같다. 굵게 표시된 지역은 성화가 하룻밤을 묵으며 문화축제를 치렀던 곳이다.
- 파일:1988 서울 올림픽 성화봉송 픽토그램 컬러.svg 제주국제공항 → 북제주 → 남제주 → 서귀포 → 제주[32] → 부산 → 김해 → 진해 → 창원 → 마산[33] → 진주 → 사천 → 고성 → 통영 → 충무[34] → 여수 → 순천 → 목포 → 광주 → 담양 → 대구 → 영천 → 경주 → 울산 → 포항 → 영덕 → 안동 → 영주 → 점촌[35] → 상주 → 구미 → 김천 → 대전 → 순창 → 정주[36] → 전주 → 이리[37] → 군산 → 논산 → 공주 → 대천[38] → 온양[39] → 천안 → 청주 → 충주 → 제천 → 태백 → 삼척 → 동해 → 강릉 → 속초 → 고성 → 인제 → 춘천 → 원주 → 평택 → 송탄[40] → 수원[41] → 성남 → 과천 → 안양 → 안산 → 광명 → 인천 → 부천 → 임진각 → 동두천 → 의정부[42] → 서울시청 → 서울올림픽주경기장
6. 개회식[편집]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개회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폐회식[편집]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폐회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참가국[편집]
자세한 내용은 1988 서울 올림픽/참가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 경비 활동[편집]
서울특별시 경찰국은 1988년 5월 17일부터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경비경찰조직 '88경비단'을 '88올림픽경비단'으로 개편했다. 이들은 요인경호대, 참가단 신변보호대, 제1~6지역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경비대원은 근무복, 신변보호대원은 정장형 제복 및 목걸이형 신분증을 착용하였고, 공통적으로 가슴에 훈장형 기장을 달았다. 주 업무는 경기장 주변 경비, 선수단 신변보호, 대테러 작전수행 등으로 서울 및 지방 경기장 35개소, 선수촌 및 보도시설, 지정호텔, 주요 철도역 등 관련 시설 67곳, 연습장 73곳에 대한 시설경비와 각종 문화행사와 국제회의 경비 등을 담당했다. 대회 당시 투입된 경력은 전체 경찰관 중 총 47,194명이었으며 예산은 국고에서 353억 원, 조직위에서 47억 원을 각각 보조받아 약 4백억 원으로 전담부대 창설 및 운영, 장비보강 등에 투입했다.
치안본부는 치안 대책기구로 치안대책위원회, 실무대책위원회, 간사위원회 등을 운영하며 자문기관으로 자문위원회를 운영했으며, 대회치안대책의 집행 주관은 제2차장 산하에 6개 실무대책부 및 7개 지원단으로 각각 짰다. 특히 서울시경은 종합치안대책위원회, 실무대책위원회, 간사위원회 등을 두고 집행기구로서 특별대책위원회(대책본부)를 두되 핵심시설 전담 경비는 88경비단장이 맡으며, 관할서의 3선 경비는 제2부장, 각 기능별 지원은 각기 다른 부서장이 맡도록 했다. 대회를 전후해 올림픽상황실을 운영하며 모든 진행상황을 올림픽상황실에만 보고토록 했고, 대책본부는 소관기관별 문제발생 시 해결책을 강구토록 했다. 상황실은 상황처리반 및 일보생산반으로 나누어 2교대 격일근무제로 하고 1988년 7~10월까지 운영토록 했다.
올림픽 개·폐회식 동안 철저한 안전을 위해 개최 12시간 전부터 경찰, 소방, 통신, 대테러 등 합동검측반을 동원해 안전검측을 실시했고, 경기장 주변 도로 등지에는 교통정리를 위해 순찰차 52대, 싸이카 74대를 각각 배치해 단계별 교통통제, 입·퇴장 승하차선 지정, 입·퇴장 시차제, 지정주차장제 등을 실시했다. 각종 우발적 사고에 대비해 대테러 특공대, 폭발물처리팀, 한전차, 구급차, 진압부대 등을 근접 배치해 출입문과 관람석에 관중 안전감시요원을 투입했다. 지방 선수분촌 경비는 선수, 임원 등 관계자 신변보호를 위해 시설주와 긴밀히 협조하며 안전활동을 수행하되 군·경 전담지역 책임한계를 구분해 경비를 맡았다. 공항·항만 경비도 군 주관 하에 군경합동으로 진행해 공항 내 청사, 화물청사, 자유지역 등은 경찰이, 기타 2~3선 지역은 군이 각각 맡았다. 그 외에 11개 기능 분야 경력의 집중 운용체계로 확립해내 전문성과 적응력을 고려해 핵심 경비 대상별로 배속·배분시켜 잔여 경력으로 중요도에 따라 증감·지원했다. 각 경비 대상별로 운용되는 경력은 해당 부대 지휘관이 맡았다.
올림픽 기간 중 북한의 방해공작이나 국제테러단체, 국내 반정부·반체제세력 등의 테러행위, 무장공비 침투 등에 대비키 위해 안전본부 산하에 군경합동 대테러 대응팀을 만들었으며, 시·도 대테러 대응팀은 시·도 국장이 맡아 운용했다.
- 출처: 유용원의 군사세계 게시글, 당시 복제, <국립경찰 오십년사(1995)> p425~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