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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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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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교회 초대 담임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제40회 총회장
한경직
韓景職 | Kyung-Chik Han


파일:한경직 목사.png

출생
1903년 1월 27일[1]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 자작마을#
사망
2000년 4월 19일 (향년 97세)
서울특별시 중구 저동1가
가족
배우자 김찬빈 슬하 1남 1녀
소속교회
영락교회
학력
진광소학교 (졸업)
오산학교 (졸업)
숭실대학 (이과 / 졸업)
프린스턴 신학교 (신학 / 학사)
엠포리아대학 (신학 / 명예박사)
연세대학교 (신학 / 명예박사)
숭실대학교 (철학 / 명예박사)
경력
영성소학교 교사
평양숭인상업학교 교목
신의주제2교회 담임목사
영락교회 담임목사
숭실대학 학장
기독공보사 사장
학교법인 영락학원 이사장
학교법인 대광학원 이사장
학교법인 정의학원 이사장
학교법인 숭실재단 이사장
학교법인 보성학원 이사장
학교법인 장로회신학대학 이사장
학교법인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이사장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수훈
국민훈장 무궁화장(1970년)
대통령 건국공로장(1998년)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비판점
5. 저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목사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2. 생애[편집]



1983년 12월 23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1903년 1월 27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한도풍과 청주 이씨 슬하에서 태어났다.

사무엘 모펫(한국명: 마포삼열) 선교사가 설립한 진광소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시기인 1916년 배우자 김찬빈 권찰[2]과 결혼했으며 이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숭실대학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하였으며 이 때 이승훈조만식의 가르침도 받았다고 한다. 그 인연이 이어져 훗날 고당조만식기념사업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숭실대학 졸업과 더불어 도미하여 엠포리아 대학교에서 인문과학을,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프린스턴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폐결핵이 발병하여 2년 6개월 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조만식으로 부터 평양숭인상업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어 영어 및 성경과목을 가르쳤고 이와 동시에 숭실대학 강사로 출강했다.

1933년 신의주제2교회 담임교역자로 청빙되어 1934년 의산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나, 1942년 일제가 당회장직에서 강제사임시켰다.

1945년 월남하여 현재의 영락교회 부지에 있던 일본천리교 경성분소 신전을 개조하여 '벧아니 전도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하였고, 1946년 11월 교회의 명칭을 '영락교회'로 개명하였고 1949년 담임목사로 위임되었다. 1950년부터는 보성여자중학교보성여자고등학교 초대 이사장도 맡았다.

자신의 모교인 숭실대학교신사참배 반대로 자진 폐교된 후 서울에서 재개교하는 것에 기여하였으며, 1954년 영락교회 가건물에서 재개교할 당시 숭실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3. 여담[편집]


  • 소천 당시 양복 1벌과 구두 1켤레가 전 재산이었을 만큼 검소하고 청렴했다.
  • 숭실대학교에 이름을 딴 건물이 있으며 채플, 입학식 등을 진행하기 위한 강당으로 자주 쓰인다.
  • 장로회신학대학교에도 이름을 딴 건물이 있으며, 여기의 경우는 아예 특강이나 과정별 예배가 아닌 한, 채플을 비롯한 모든 주요 행사의 중심지가 된다. 애초에 학교 자체가 작고 건물 수도 적어서 여기 말고는 딱히 큰 행사를 치를 만한 공간도 없지만. 그리고 대광중학교와 대광고등학교 사이에 입학식, 채플 등을 진행하는 강당이 있는데 흔히 '추양 기념관'이라고 부르며 이 곳의 정식 명칭은 '추양 한경직 기념관'이다. 여담으로 이곳에서 위러브의 대부분 예배가 이루어진다.
  • 1950년 밥 피어스 목사와 함께 '월드비전'을 설립하였다.
  • 1970년 12월 23일 조계종 종정 청담스님과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 김수환 추기경, 조덕송 조선일보 논설위원과 함께 시국을 논의하며 민주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3대 종교의 지도자들이 모여 시국을 논했다는 것은 종교를 초월하고 시국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 월남 전 소련군의 약탈, 강간, 학살과 기독교인 탄압 등의 만행을 미군에 알린 적이 있다.
  • 한국 개신교 흑역사 중 하나인 군사정권 시기 국가조찬기도회의 중심 인물 중 한 명이다.
  • 1954년 동아의료원 인수 경쟁에서 숭실대가 1순위였는데 한경직 목사가 다른 곳에 더 집중해야한다고 판단해 인수하지 않았다. 경희대가 인수하여 경희의료원이 되었다.


4. 비판점[편집]



4.1. 서북청년단 옹호[편집]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규장문화사, 1982.)


한경직 목사는 지금도 존경하는 목사를 조사하는 설문조사에서 항상 상위권에 있을 정도로 청빈하고 모범이 되는 생활을 했다. 이런 한경직 목사에게도 비판 받을 요소가 있는데, 이승만 정권기 대표적인 우익 폭력 단체 서북청년단을 옹호한 것이다.

1945년 9월 한경직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직했으나 소련군의 진주로 그 해 10월 월남했다. 12월 김재준의 도움을 받아 일본천리교 건물을 사들여 오늘날 영락교회의 시초인 '베다니 교회'를 열었다.

1946년 11월 교회에 속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서북청년회가 만들어졌다. 이 단체가 발전한 것이 서북청년단이다.

주로 이북에서 월남한 이들로 이루어진 서북청년단은 잔혹하리만큼 철저한 반공정신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1947년에 3월 1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소요사태로 경찰 66명이 해임되자, 그 후임으로 서북청년단이 투입되었다. 경찰 대신 폭력배를 투입한 것 자체가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예상케 한다. 곧 4.3 사건이 벌어진다. 제주도의 남로당5.10 총선거에 반대해 무장단을 결사해 경찰서를 습격하였고 60여명이 사망한다. 제주도 한라산 일대에 계엄령이 내려지고 그 주변부의 민간인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남로당 무장대로 규정해 학살, 약탈, 강간을 자행하였다. 이때 서북청년단의 만행이 가장 심각하였다.

이후 서북청년단은 한국 내 남로당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향한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한 '보도연맹'이 6.25 전쟁 중에 북한군에 부역행위할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 이유로 북한군 미점령지역의 보도연맹 인원들을 예비검속 차원에서 대량학살한 보도연맹 학살사건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학살에 나섰다. 보도연맹 학살사건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공산주의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아예 그냥 공무원들 각자 인원 할당량을 만들어서 을 지급하는 등으로 유인해 허위로 가입된 무고한 민간인들도 수없이 무차별로 희생당했기에 이는 단지 이념만의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대량 학살 범죄였다. 거기다 학살당한 숫자가 무려 수십만이다.

서북청년단은 5.16 군사정변 시기에 해체되었다. 서북청년단이었던 청년 중 후에 목사가 된 사람이 많았다. 대한민국 개신교가 보수적인 성향을 띄는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


4.2. 신사참배 사실 고백[편집]


1992년 템플턴상 시상식 감상예배에서 일제강점기 말기에 신사참배를 한 적 있다고 고백하였다. "일제 때 신사참배를 했는데 그 죄를 제대로 참회하지 않았다. 일생의 짐이었는데 우상숭배의 죄를 이제야 참회한다."라고 이야기하였다.#


4.3. 박정희 정권 활동[편집]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는 미국이 자신의 남로당 활동을 이유로 군사정변 자체를 의심하자, 한경직을 미국으로 보내 미국의 지지를 얻도록 하였다[3]. 한경직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박정희의 혁명공약에 공감해 김활란 이화여대 총장, 최두선 동아일보 사장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고 조야(朝野)[4]를 통틀어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한경직과 밥 피어스 목사가 창시한 월드비전을 통해 재탄생한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이 군사혁명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한 일환으로 보내져 미국 순회공연을 하고 있었는데[5] 그 불순한 취지와는 달리 가난한 나라에서 온 순수한 아이들이 노래하는 공연이었던지라 미국인들에게 상당히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어린이 합창단의 인기와 한경직의 물밑 작업으로 한국에 대한 평가가 소폭 상승하자 박정희는 1961년 11월에 친히 백악관을 방문해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고 그의 집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한경직은 영락교회에서 은퇴했으나 1973년에 박정희가 신년인사 편지를 통해 아래와 같은 요청을 했다.

지난해 귀하가 베푸신 협조와 성원에 깊이 감사하는 바입니다. 민주 제도의 건전한 발전과 조국 통일의 영광된 그날이 올 때까지 유신의 과업 수행에 더욱 헌신할 것을 다짐하오니 아낌없는 지원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한경직은 미국의 남침례회 목사인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을 초청하고 5월 30일부터 닷새 간 어마어마한 인원이 모인 대규모부흥집회[6]를 개최하였다.


5. 저서[편집]


  • 건국과 기독교
  • 신자의 사회적 사명
  • 팔복
  • 민주국가의 정신기초
  • 한경직 목사 설교전집
  • 병상에서의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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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902년 12월 29일.[2] 1899년 ~ 1974년 12월 31일, 보통 목회자의 배우자는 '사모'라는 호칭이 보편적이지만, 김찬빈 사모의 공식 호칭은 '권찰'이었다. 권찰은 교회에 적을 둔 성도들의 가정 형편을 파악하고 심방하는 직책을 말하며, 사모의 역할과 동일하기도 하다. 한경직 목사는 "평생의 잘한 일이 김찬빈 권찰과 결혼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부부애가 각별했고, 한경직 목사의 미국 유학 시 한국에 남아 가사와 학업을 병행하며 내조하였다. 김찬빈 권찰의 노환으로 투병 생활 중 한경직 목사가 직접 외부 출입을 자제하면서 까지 돌볼 정도였다고 한다.[3] 당시 한국은 국가예산의 50%, 국방예산의 74%를 미국에서 지원받을 정도로 국가의 재정 상태가 안 좋았다.[4] 정부와 민간[5] 기수제로 따지면 2기에 해당한다. 1기는 고아였던 여자 21명, 남자 4명으로 이뤄진 합창단이었고 이화여대의 음악 교사이던 권길상이 지휘를 맡았지만 너무나도 형편이 열약해 1년 정도 활동을 하고는 해체되었다.[6] 마지막 날인 6월 3일에는 그 하루에만 무려 110만명이 참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