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삼/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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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홍상삼

1. 개요
2. 아마추어 경력
2.1. 봉황대기 사건
3.1. 입단 후 ~ 2011 시즌
3.5. 2015~16 시즌
3.6. 2017 시즌
3.7. 2018 시즌
3.8. 2019 시즌
5. 은퇴
6.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편집]


홍상삼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아마추어 경력[편집]


2학년이었던 2006년 청룡기 16강전 마산용마고와의 맞대결에서 완봉승을 따냈다. 같은 해 미추홀기에서는 4경기에 출전해 평균 자책점 0.41을 기록하며 3승을 따내는 활약으로 팀을 정상으로 이끌고 대회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3학년 당시에는 같은 학년인 서울고등학교 이형종, 장충고등학교 최원제, 신일고등학교 이대은과 함께 서울 4대 투수로 꼽히기도 했으며, 두산 베어스에서도 1차 지명까지 고려했었던 명실상부 당시 충암고의 에이스였다.


2.1. 봉황대기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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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영상[1]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마지막 고교야구 경기인 2007년 덕수고등학교와의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이다. KBS N SPORTS에서 이 경기를 중계하였고, 캐스터는 유수호[2]의, 해설자는 이용철. 그리고 하일성 당시 KBO 사무총장이 게스트로 와 있었다.

야구계의 어른들까지 왔던 이 경기에서 9회초 2아웃 아웃카운트 하나만을 남겨놓고 있던 9회초, 우익수 박민기가 실책[3]하여 2루 주자를 잡지 못하고 동점을 내주게 되어 승리를 놓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마운드에서 무릎을 꿇으며 식빵을 부르짖어 해설자에게 신나게 욕을 먹었다. 분노의 홍상삼. 결국 교체되어 승리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4] 그러나 충암고등학교의 만루 찬스가 오자 덕아웃에서 짱구춤을 추는 기행을 벌였다. 그리고 이런 행동들이 모두 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충암고등학교가 결국 봉황대기에서 우승했고, 선수 본인은 대회 내내 큰 활약을 펼쳐 MVP로 뽑혔으나 위의 만행들로 인하여 경기 후 인터뷰도 전파를 타지 못했다. 그래도 MVP인 만큼 뉴스 인터뷰는 했다. 기사 당시 홍상삼은 봉황대기 대회에서 그냥 잘한 정도가 아니었다. 야탑고등학교와의 16강전에서는 6이닝 2실점으로 승리투수[5], 중앙고등학교와의 8강전에서는 9이닝 10K 2실점으로 완투승, 경기고등학교와의 4강전에는 8회 초 마운드에 올라 1⅔이닝 2피안타 무실점으로 막았다. 결승전 성적 역시 묻혀버려서 망정이지 완봉승도 할 뻔 했다. 우승에 엄청난 공헌을 했던 활약이 결승전의 경솔한 행동으로 다 묻혀버린 것이다. 후일 자신의 후배 문성현이 아시아 대회 MVP를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홍상삼 때문에 이미지 말아먹은 충암고등학교 선수들의 시선을 곱지 않게 보았었다. 괜한 놈 하나 때문에 죄 없는 선수가 문성현이 피해를 본 케이스인 격.

배지헌의 칼럼에서 지적되었듯이, 대한민국 고교야구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중요시 여긴다. 그런데 경기장에서 대놓고 욕을 하고, 춤을 추는 행위를 기자들과 야구관계자들이 좋게 봐줄 리가 없다.

다만 봉황대기 결승전 당시의 사건들로 인해 지명 순위가 밀렸다는 얘기가 있는데, 2008년 1차 지명은 봉황대기 대회 한참 전에 이루어졌고 2차 지명은 대회 직전에 열렸다. 즉, 이 사건과 지명순위는 관련이 없다.


3. 두산 베어스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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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입단 후 ~ 2011 시즌[편집]


입단 직전인 2007년 10월,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고는 2008시즌 통째로 재활에 매진하면서 1년 넘게 기다린 끝에, 2009년 5월 2일, 롯데전 원정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5이닝 2피안타 7탈삼진 1실점이라는 호투한 끝에 데뷔전부터 승리 투수가 되었다.

이후 5~6월 두 달만에 7승을 따내면서 ERA도 3점대 중반으로 굉장히 솔리드하게 잘 던져주면서 한 때 신인왕으로도 거론되었으나 이 해 팀 내에 이용찬고창성 또한 6월 말까지 굉장한 퍼포먼스들을 보이며[6] 신인왕을 놓고 집안싸움이 심화될 정도로 신인급 투수들이 볼만했었던 시기였다.# #

그러나 7~8월 지속적으로 불안하던 제구가 기어코 발목을 슬슬 잡기 시작하면서 7월 월간 ERA 4.76을 시작으로 8월에는 8월 4일 롯데전 6이닝 9K 무실점 대호투하면서 시즌 9승 째를 올린 경기 이외에는 선발 등판 때 5, 6실점씩 하는 경기까지 생기자 승수를 더는 못쌓고 패전과 자책점그리고 적지 않은 볼넷과 피홈런까지이 더 쌓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9월 2일 한화전에서는 선발 등판 했음에도 1이닝 동안 3피안타(2피홈런) 3실점으로 더 이상 선발로써는 버티기 힘들어 보이는 지경에 이르자 감독 및 코칭스태프들은 그래도 강력한 구위를 가지고 있는 홍상삼을 불펜으로 전환시켰다가 시즌 막판 다시 선발로 두 차례 등판했으나 시즌 초의 호투하던 모습을 보기는 힘들었다.

결국 2009시즌 최종 성적은 30경기 등판하는 동안 117이닝을 소화하면서 9승 6패 ERA 5.23을 기록했다. 그래도 신인치고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 중에서도 2009년 롯데전 전적 6전 4승 무패, 평균자책점 2.70이라는 성적, 그리고 롯데 자이언츠와의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6⅓이닝 1실점의 호투로 롯데를 떡실신시키는 등 새로운 로나쌩 클럽 멤버 소리를 들었다. 이날 구위며 제구며 너무 좋아서 해설자들이 "완투도 할것 같다"란 소리도 했지만, 7회말 1사 상황에서 조성환의 타구에 팔꿈치를 맞아 그대로 강판된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2010시즌 들어 150km/h까지 나오던 직구 구속이 기껏해야 140km/h 초반 정도까지 뚝 떨어졌으며, 떨어진 구위와 함께 자신감까지 상실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 2009년 중후반부터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진 것이 2010년까지 이어지면서 그대로 소포모어 징크스를 맞이하였다. 더불어 롯데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며 로나쌩 클럽 회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심지어 2010년 5월 25일 롯데전에 1회초 6점이나 지원받고도 아웃카운트 하나만 잡고 7점이나 내주는 최악의 피칭을 기록했다. 그것도 1회 말에 벌어진 일이다. 1회만 6:7 당시 상대팀 선발은 1회초에 6실점을 하고도 무려 선발승을 챙겨갔는데 그 당사자가 장원준이었다(!). 그 다음날인 5월 26일에는 불펜으로 등판했으나 3이닝 3실점으로 얻어맞았다. 다만 9월 12일 롯데를 상대로 6이닝 무실점을 기록하면서 다시 복귀하는 거 아니냐는 소리도 있었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1경기 4이닝 7피안타 1볼넷 1피홈런 5탈삼진 5실점 4자책점 평균자책점 9.00을 기록했고 팀은 2연패 뒤 3연승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2경기 5⅔이닝 8피안타 4볼넷 1사구(死球) 4탈삼진 6실점 6자책점 평균자책점 9.53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탈락했다.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3경기 9⅔이닝 15피안타 5볼넷 1피홈런 1사구(死球) 9탈삼진 11실점 10자책점 평균자책점 9.31을 기록했다.

김선우니퍼트를 제외하고는 특출난 선발이 없는 상황에서 페이스가 올라가기만 한다면 두산의 선발로 가장 기대되는 재목이었다.[7]

사실, 2010년 이후로 헬게이트 급의 부진은 윤석환 투수코치의 책임이 크다. 2008년 입단 이후 재활을 하면서 서서히 자신에게 적응될 투구폼으로 후반기 털리긴 했어도 5점대 초반에 9승이면 그럭저럭 괜찮은 투수 유망주였다.

그런데 수술하고 자기 투구폼을 맞춘지 1년이 안 되어서, 후반기 부진을 이유로 좀 더 강한 직구를 위한다며 투구폼을 또 고쳤다. 어린 나이에 부상에 여러번 투구폼 교정으로 멘탈 붕괴도 일어나고, 그러면서 잊혀져 가는 모습을 보면 두산 팬들의 입장에선 그저 씁쓸할 뿐이었다.

3.2. 2012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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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홍상삼/선수 경력/2012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커리어 하이 시즌.


3.3. 2013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홍상삼/선수 경력/2013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 시즌을 치르는 동안 완전히 무너졌다.

3.4. 2014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홍상삼/선수 경력/2014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커리어 로우 시즌

3.5. 2015~16 시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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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4일 잠실 복귀전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세이브를 기록 한 후 양의지와 함께

경찰청 야구단에 입대했고, 2015년 4월에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2016년 당시 두산의 확실한 불펜이 없어서 이용찬과 함께 빨리 전역해주기를 바라는 의견이 많았다.

2016년 9월 3일 경찰청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했다. 곧바로 1군에 등록될 것으로 보이며 등번호는 27번을 받았다.

9월 4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드디어 홍상삼이 8회에 올라왔고, 제구는 여전히 안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되는 정도는 아니었고, 최고 구속은 150km/h을 찍었다. 9회에 2아웃을 잡고, 볼넷/안타를 맞는 불안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다행히 경기는 1⅔이닝 3K 무실점으로 막았다.

9월 5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올라와 7회 2아웃 상황에서 4구로 깔끔하게 아웃을 잡아 7회를 종료시켰고, 8회는 삼자범퇴로! 끝냈다. 그러나, 김태형 감독이 9회에 마무리, 이현승을 등판시켜서 9회에 실점을 하면서 블론.

9월 8일, 홍상삼이 9회에 올라와 1이닝 동안 던졌다. 병살로 잡았을 공을 오재원의 실책성 플레이로 잡지 못했으나 38구의 투혼 끝에 1탈삼진 1피안타 1실점으로 세이브에 성공했다.

9월 11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8회 2사 1, 3루 위기에 올라와서 채태인을 직구만 8개를 던져 구위로 찍어누르며 삼진, 위기를 탈출했다. 그리고 9회에도 선두타자 2루타를 맞긴 했으나 삼진 2개를 곁들여 3아웃을 잘 잡아내며 무실점 세이브를 챙겼다. 점점 두산 불펜이 정재훈의 부상과 이현승의 부진 등으로 황폐화되던 차에 큰 도움이 되는 활약.

9월 15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1점 차로 앞선 9회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올라와 첫 타자에게 볼넷을 허용했지만 뒤 두 타자를 삼진과 주루사로 잡아내면서 시즌 4세이브를 올렸다.

9월 16일 NC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2점 차로 앞선 9회에 올라와 첫 타자 조영훈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뒤 세 타자를 삼자범퇴로 처리하면서 시즌 5세이브를 올렸다.

17일 기준 전역 후 6경기 출전 1홀드 5세이브를 기록 중이다.

9월 27일 대전 한화전에서 9회말 2아웃 주자없이 8:5로 앞선 상황에서 0이닝 1피안타 4볼넷 4자책이라는 어메이징한 기록을 내면서 팀의 역대 최다승 타이 91승, 니퍼트의 외국인 최다 타이 22승을 날려 버렸다. 아웃 카운트 하나 못잡아서. 3년 만에 재개봉…충격의 '홍상삼 극장'

결국 한국시리즈에서는 잘해야 셋업맨으로 등판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위 경기의 임팩트가 엄청났단 소리.

그래도 그 이후 등판한 경기에서는 실점이 없었다.

한국시리즈에서는 두산의 판타스틱 4와 더블 스토퍼인 이용찬과 이현승이 잘 막아준 덕택에 경기에 나오지 않았다.

시즌이 끝난 후 12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3.6. 2017 시즌[편집]


4월 25일 넥센전 더스틴 니퍼트 대신 선발로 등판한 김명신이 1회 2사 1, 2루 상황에서 김민성의 타구에 안면 좌측을 맞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자 급하게 올라왔으나 1⅔이닝을 소화하는 동안 4피안타 4볼넷 4실점으로 간신히 김명신의 패전을 면하는 정도에 그쳤고, 교체된 김성배가 시원하게 털린 뒤 리드를 잡지 못해 결국 패전투수가 되었다.

5월 4일 마이클 보우덴이 어깨 충돌로 인한 여파로 1군에서 이탈하면서 대구 삼성전 임시 선발을 맡게 되었다. 두산 팬들은 전날 다린 러프에 끝내기를 맞은 데 이어 2배의 충격을 겪게 될 것을 예상하고 미리 체념하는 중...이었는데 8점의 득점지원 속에 5이닝 4실점으로 밥값 이상을 해냈다. 뒤에 나온 불펜들의 무실점 행진과 김재호의 추가 2타점에 힘입어 2,425일만에 선발승 달성. 기사

5월 9일 선발등판 예정이었으나 우쳔취소로 12일로 기회가 넘어갔고 다시 취소되어 13일에 선발등판했으나 한결같은 랜덤제구를 또 보여주며 2회도 못 채우고 함덕주와 교체되었다. 함덕주의 분식회계로 이 날의 기록은 1⅓이닝 4실점. 다행히 두산이 2회까지 4점을 따두었고 함덕주가 역전은 막은 뒤 브룩스 레일리를 또다시 난타한 덕에 패전투수가 되는 것은 면했다.

결국 5월 15일 제구 난조로 인해 1군 엔트리에 말소되었다.

2군에 내려간 뒤 5월 21일 화성 히어로즈 전에서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했으나 5월 28일 고양 다이노스와의 경기에서 5이닝 15실점, 6월 3일 LG전에서 3⅓이닝 10실점이라는 어메이징한 기록을 남겼다. 1군에 올라오려면 꽤 오래 기다려야 할 듯.

시즌 후 마무리캠프에 참여했다.


3.7. 2018 시즌[편집]


1군 스프링캠프에 들지 못했다. 그리고 자동 고의사구 적용이 확정되어 갑자기 의문의 1패를 당했다(자동 고의사구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짤이 이혜천하고 홍상삼 짤).

2월 25일 추가로 1군 캠프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범경기에서 ⅓이닝 4실점 이후 1이닝 무실점을 하여 방어율이 108.00에서 9.00까지 떨어졌다.

4월 3일 잠실 홈경기 LG전 8회초 1사 1, 2루 상황에서 오지환을 상대로 구원등판하였으나 초구부터 등 뒤로 날아가는 폭투를 시전하여 주자를 모조리 진루시키고 결국 자동 고의사구로 만루를 만든 다음 강판됐다. 공 한 개, 그것도 폭투를 던지고 화려하게 퇴장하자 인터넷 중계 댓글창에서는 시구 드립이 흥했다. 아예 자동 고의사구를 홍상삼 특별법으로 부르는 팬들도 있을 정도.

5월 23일 경기까지 방어율 0.00을 유지중이다! 이어 6월 2일 광주 KIA전에서도 1이닝 1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하며 방어율 0.00을 이어가고 있다.

이후 6월 5일 고척 넥센전에서 실점하며 안타깝게도 0.00의 행진은 깨지게 되었다. 이후 등판하지 못하다가 6월 13일 1군에서 말소되었고, 이후 퓨쳐스리그에서 꾸준히 등판하며 7월 8일 현재 25⅔이닝을 던지면서 삼진을 34개를 잡는 동안 볼넷은 단 5개만 내주며 1.7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다. 1군 투수진에 구멍이 생기면 가장 먼저 콜업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콜업 후 원래대로 돌아가며 다시 평자가 폭등하는 중이다.

7월 21일 경기에서 1아웃만 잡고, 의문의 1승을 기록하게 되었다.

아직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13⅓이닝 3실점으로 2점대 초반 ERA를 유지하고있다. 제구가 불안해서 필승조로 쓰기에는 불안하나, 추격조로는 좋은 옵션. 7월 중반들어 김강률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홍상삼에게는 필승조로 재진입할 기회가 될 듯 하다.

다만 퓨처스리그에서도 제구력이 전혀 받아주지 않은게 단점이다.


3.8. 2019 시즌[편집]


이번 시즌이 끝나면 FA 자격을 얻게 되지만, 뚜렷한 실적 없이는 올해가 야구 인생의 끝이 될 수도 있었다.

김태형 감독은 최대성과 함께 개선되고 있다고 인터뷰하긴 했으나, 시즌 개막 전 선수들의 분발을 바라는 립서비스성 발언이라 큰 의미는 없고, 시범경기부터 팬들은 여전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4월 17일 첫 1군에 등록될 전망이다. 그동안 선발투수 경력도 있다보니 이용찬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잠실야구장 두산 베어스 홈경기 임시 선발로 확정되었다.[8]

그동안 퓨처스리그에서 8경기 8이닝 1피안타 2볼넷 4홀드 0.00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였다.

4월 17일 잠실 SK 와이번스전에 704일만에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상대 선발투수는 산체스. 1회 첫타자인 김강민을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출루시켰지만[9] 한동민최정을 삼진[10]으로 처리하고 정의윤을 1구만에 3루수 플라이로 아웃시키며 1회를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1회 타선이 5점을 지원했으나 2회 첫타자 이재원에게 1-1 직구로 솔로 홈런을 허용하며 곧바로 따라가는 점수를 허용하고 말았다. 홈런을 맞긴 했으나 제이미 로맥, 고종욱, 박승욱을 각각 플라이 아웃, 삼진[11], 2루수 땅볼 아웃으로 처리하며 2회를 끝마쳤다. 2회말까지 두산 타선이 7안타 3볼넷으로 7득점하며 엄청난 득점 지원을 받고있다. 3회 선두타자 김성현에게 안타를 허용했으나 김성현이 2루까지 뛰는 것을 좌익수 김재환의 깔끔한 송구로 아웃시켰다.[12] 다음 타자인 김강민에게는 1회에 이어 또다시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줬으나 한동민은 땅볼로 아웃시켰다. 김강민과는 다르게 최정은 1회 삼진에 이어서 3회 내야 땅볼로 처리하며 매우 강한모습을 보여주었다. 4회 선두타자(정의윤)는 앞선 이닝과는 다르게 3구만에 플라이 아웃으로 처리했다. 그 이후 이재원과 로맥[13]을 모두 헛스윙 삼진아웃으로 처리하며 매우 깔끔하게 4회를 끝냈다. 그러나 이후 5회 고종욱김강민에게 안타,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기고 연속 폭투로 실점하고 단 1아웃을 남기고 윤명준과 교체되었다.

4⅔이닝 72투구수 (S:46, B:26) 5피안타 1피홈런 4사구2, 5삼진 3실점 3자책 게임 스코어 45점[14]

선발승을 거두는 데에는 실패했고, 실제로 홍상삼을 내린 김원형 투수코치가 격려를 하며 미안하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 선발이 아니고, 그동안 보여준 기행(?)을 생각하면 충분히 의미 있는 결과이다.

그리고 KBS N SPORTS의 수훈 경기 후 오효주 아나운서와 인터뷰에서 교체하면서 1군 첫 선발등판한 느낌에 대한 질문에 "많이 떨리고 오래간만에 선발이라 긴장 많이 했는데 그래도 팀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저도 많이 힘이 나고 너무 고마웠다" 라고 4회 첫 무실점에 대한 질문에선 "승부를 강하게 한 편이라 지고 싶지 않은 승부욕이 있었다" 5회 2아웃에 교체된 것에 대한 아쉬움 질문에선 "욕심이 많이 나다 보니 힘이 많이 들어가다 보니 편안하게 승부를 했어야 되는데 자기 자신과 싸움을 해서 아쉬웠다" 중계 화면에 김태형 감독과 잠깐 마주치는 모습에 "방송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라며 중계석을 빵 터뜨렸다.

코칭 스태프의 조언에 대한 질문엔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의 응원이 큰 힘이 된것 같다"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치명적인 매력을 통해 나의 장단점에 대한 질문엔 "이런 기회가 있었으면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공황장애[15]가 좀 있다보니 팬들에게 계속된 부진에 욕을 엄청 먹었다. 또한 마음에 응어리가 쌓다보니 많이 힘들었고 내색 안하고 2군에서 고마운 분들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고마운분들에게 이야기를 전해드리라는 질문엔 "현재 강석천 감독님이 많이 포기하라 했을땐 신경 많이 써주시고 현재 1군 불펜 정재훈 코치님이 2군에 지난 시즌 계실 때 많이 멘탈이 흔들렸을때 포기하지 않고 조언을 해주셔서 감사할 다름이다. 비록 일찍 마운드에 내려와 아쉽긴 했어도 팀이 승리를 한 것만으로 만족하고 좋은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기회가 생겨 좋은 것 같다"라며 울먹거리면서 마무리를 지었다.

4월 18일 경기전 김태형 감독은 "이미 볼 자체가 좋았고 마지막 한동민의 고비를 넘기지 못해 다음은 분위기가 넘어갈것 같아 바꾸었다. 솔직히 잘 던졌다. 원래는 5회까지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3회에 40개 정도되면 구속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제(17일)는 볼 자체가 좋았다"라며 한번은 기회를 더 줄 생각이라며 이미 공황장애가 있다는걸 알고 있던 김태형 감독은 "그런 건 안 밝혔으면 좋겠다. (결과가 안 좋을 때를 대비해) 연막을 치는 것 같다. 자신있게 던지면서 실력으로 보여주길 바란다"고 한마디를 툭 던지며 미소를 지었다.

이후 4월 23일 고척 스카이돔 키움 히어로즈 원정경기에 선발등판이 예정돼있었으나 4월 21일 오른손 중지가 갈라지는 부상을 당해 4월 22일 말소되었다. 그자리를 또 다른 임시선발 이현호가 잘 채워준 셈..

6월 9일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키움 히어로즈전에서 9회초 4번째 투수로 나와 4점차로 경기가 기울어지자 장영석에게 5구 볼넷, 두타자 초구 플라이로 잡아냈고 서건창에게 6구 볼넷을 허용했지만 무실점.. 1이닝 19투구수 (S:8, B:11) 4사구 2볼넷을 기록하였다.

6월 21일 인천 SK행복드림구장 SK 와이번스전에서는 제이미 로맥에게 2구 몸에 맞는볼을 허용하면서 마운드에 내려왔다. 그리고 다음날 1군 엔트리 탈락을 면치 못했다.

8월 25일 SBS 스페셜에서 그의 공황장애 극복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2019 시즌이 끝나고 11월 22일, 방출통보를 받았다.관련기사 사실 그간 보여준 것도 있고 무엇보다 구속 및 구위가 베어스 불펜 내에서 역대급으로 손꼽힐 정도로 좋았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말이 많다. 문제는 제구도 불펜 내에서 이혜천과 동급 그 이상으로 역대급이었다는 게 함정... 두끝홈부터 13준플레이오프 연속 폭투까지 정말 많은 일도 있었고 두산 팬들에게 애증 그 자체였던 선수지만 방출된다고 하니 아쉬워하는 반응도 있었다.


4. KIA 타이거즈 시절[편집]


이후 KIA 타이거즈행 썰이 돌고 있으며, 나주환 무상 트레이드 기사에서 구체적인 언급이 나오면서 KIA로 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조계현 단장이 아직 빠른 공을 던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메디컬 테스트 이후에 영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11월 25일 나주환과 함께 오피셜 영입 기사가 나오면서 KIA에 자유계약으로 입단하게 되었다. # 정확히는 입단 합의 자체는 25일이나 26일에 한 것으로 보이며, 소식이 알려지자 언론에서 먼저 기사를 써 버린 것으로 보인다. KIA 타이거즈 구단 공식적으로는 12월 1일자로 공식 영입한 것으로 발표했다.


4.1. 2020 시즌[편집]



파일:20홍상삼.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홍상삼/선수 경력/2020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2. 2021 시즌[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홍상삼/선수 경력/2021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3. 2022 시즌[편집]



파일:홍상삼 22시즌.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홍상삼/선수 경력/2022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월 20일 1군에서 말소된 이후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본인 요청으로 7월 8일 웨이버 공시되었다.


5. 은퇴[편집]


KIA에서 웨이버 공시될 때만 해도 당초 현역 연장을 생각하고 있단 이야기도 있었지만, 선수 등록 기한이 지난 후에도 그를 데려가려는 팀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이후 서울에 고깃집을 창업하면서 사실상 은퇴했다.

은퇴 이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오히려 KIA에서 방출당했을 때부터 야구와 인연을 끊고 현역 생활을 이어갈 마음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본인의 요청으로 인해 방출된 것이기도 하고. 사실 2019년 두산에서 방출됐을 때도 그대로 은퇴하려고 했지만 두산 시절 팀 선배였던 이원석이 그래도 한 번만 더 해보고 그만두라고 그의 은퇴를 말렸고, 때마침 KIA에서 입단 제의가 와서 덕분에 3년 더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6.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8
두산
1군 기록 없음
2009
30
117
9
6
0
3
0.600
5.23
114
21
75
96
75
68
1.58
2010
30
96⅔
4
3
0
1
0.571
6.42
102
17
54
86
74
69
1.56
2011
6
21⅓
0
1
0
0
0.000
6.33
26
6
12
5
16
15
1.69
2012
53
65⅓
5
2
1
22
(3위)
0.714
1.93
35
2
31
69
18
14
0.98
2013
55
72
5
4
5
9
0.556
2.50
51
8
47
77
22
20
1.33
2014
12
21
0
3
0
1
0.000
8.57
26
4
22
17
21
20
2.19
2015
군 복무(경찰 야구단)
2016
11
12
0
1
5
1
0.000
5.25
12
0
9
17
7
7
1.75
2017
11
17
1
1
0
0
0.500
7.94
20
2
13
7
17
15
1.82
2018
17
14⅔
1
0
0
0
1.000
4.30
13
1
14
13
7
7
1.71
2019
3
5⅔
0
0
0
0
0.000
4.76
5
1
5
5
3
3
1.59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20
KIA
57
48
4
5
0
17
0.444
5.06
32
5
57
61
27
27
1.79
2021
49
36
4
1
0
12
0.800
4.75
33
6
22
33
19
19
1.44
2022
24
21⅔
2
1
0
1
0.667
5.82
19
3
16
19
16
14
1.57
KBO 통산
(13시즌)

358
548⅓
35
28
11
67
0.556
4.89
488
76
377
505
322
298
1.53
[1] 영상 1분쯤부터 그렇게 식빵을 부르짖으며 질타했던 동료 선수들을 칭찬하는 홍상삼의 인터뷰와 코치(?)의 품에 안겨 펑펑 우는 양성우의 모습을 볼 수 있다.[2] 여담으로 덕수고등학교의 전신인 덕수상고를 졸업했으며 덕수고 야구부 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3] 사실 이때 홍상삼이 전진수비를 요청했으나 응하지 않았고, 그 결과는...[4] 그의 뒤를 이어 등판해 승리를 따낸 투수가 2013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KIA에 지명된 이효상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이 대회의 4강전 선발이자 승리투수기도 했다.[5] 12-2로 6회 콜드게임 승.[6] 이용찬은 6월 말 경 이미 17세이브에 ERA가 1.71이나 될 정도로 신인왕 경쟁에 있어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을 때였고, 고창성 역시 6월 말 경 2승 2패 8홀드 ERA 1.74로 KILL 라인의 K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던 시기였다.[7] 사실 모 매체에서 뿌린 클럽 사진 중에 본인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있어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8] 이에 두산 팬들과 SK 팬들의 역레발 대잔치가 벌어졌는데 두산팬들은 홍상삼으로 인해 SK 타선이 불붙을 것이라고 전망했으며 SK 팬들은 SK 타선이 홍상삼도 치료하는 투수전문 X솩병원 역할을 할 것이라고 역레발중이다(...).[9] 아래 김진욱 전 감독의 설명을 보면 왜 그런지 이해가 갈 것인데, 이 이후 한동민삼구삼진으로 잡아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여 양팀 팬들이 의아해하기도 했다.[10] 최정은 낫아웃.[11] 포수 스트라이크 낫아웃, 땅에 맞은 볼을 고종욱이 헛스윙했다.[12] 1회 선두타자 볼넷, 2회 선두타자 홈런, 3회 선두타자 안타(기록상은 안타) 매이닝 선두타자에게 안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13] 직구도 아닌 변화구 3개를 연속으로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넣었다![14] 상대 선발투수인 산체스는 23점이다.[15] 공황장애는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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