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8강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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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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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선 토너먼트
8강
4강
3·4위전
결승
대회 이후
팀별 리뷰


1. 8강
1.2. 2경기 서독 4 vs 0 우루과이
1.3. 3경기 소련 2 vs 1 헝가리
1.4. 4경기 포르투갈 5 vs 3 북한
2. 4강
2.1. 1경기 서독 2 vs 1 소련
2.2. 2경기 잉글랜드 2 vs 1 포르투갈
3. 3위 결정전 포르투갈 2 vs 1 소련
4. 결승전 잉글랜드 4 vs 2 서독



1. 8강[편집]



1.1. 1경기 잉글랜드 1 vs 0 아르헨티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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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8강 제1경기
1966년 7월 23일 15:00(UTC+0)

웸블리 스타디움 (영국, 런던)
주심: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서독)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 : 0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잉글랜드

아르헨티나

78' 제프 허스트
득점
-
-
퇴장
35′ 안토니오 라틴 파일:퇴장 카드 아이콘.svg
관중: 90,584명

후반 33분 마틴 피터스의 크로스를 제프 허스트가 헤더로 마무리하였는데, 이게 결승골이 되면서 잉글랜드가 승리했다. 1962년에 이어 아르헨티나에 2전 2승을 거두었고 4경기 연속 무실점과 함께 사상 첫 월드컵 준결승에 올라갔다. 그런데 이 경기는 다른 부분에서 주목을 받았다. 스페인어를 할 줄도 몰랐던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주심이 전반전 35분 아르헨티나 주장 안토니오 라틴을 '언어 폭력'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퇴장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라틴은 그저 항의를 했을 뿐이지만, 크라이틀라인은 단호하게 퇴장을 선언했다.

"나는 그 모든 끔찍한 기억들을 잊고 싶다. 그 경기는 내가 주관한 모든 경기 중 가장 거칠었다. 끔찍했다. 수치스러웠다. 나는 라틴이 나를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퇴장시켰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없었다. 그는 스스로 심판이 되려고 했다."[1]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잉글랜드전을 회고하는 안토니오 라틴

이건 불공정한 경기였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 경기가 열렸다면 우리가 이겼을 겁니다.

심판은 잉글랜드 유니폼을 입고 뛰었습니다.

안토니오 라틴

격분한 라틴은 스페인어를 통역할 사람을 불러달라면서 그라운드를 떠나지 않고 경기장에 7분 가까이 남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양 팀 선수들은 더욱 분노했다. 주심에게 빠른 경기 진행을 요구하던 잉글랜드의 주장 바비 무어는 경기가 재개된 후 매우 공격적인 자세로 경기를 펼치다가 아르헨티나의 로베르토 페레이로에게 몸통박치기를 시전하였는데, 곧장 일어난 페레이로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경기장에서 씁쓸하게 빠져나가던 라틴은 유니언 잭을 비틀어 쥐며 억울한 심정을 표출했다. 그리고 영국 여왕의 이동경로인 레드카펫 위에 주저앉아 영국인들에게 무언의 항의를 계속했다. 하지만 빨리 나가라는 말만 들려올 뿐이었고, 결국 라틴은 경찰들에게 붙들려 경기장 밖으로 끌려나갔다. 남미 기자들에 대한 잉글랜드 측의 차별적 대우 때문에 열 받아 있던 아르헨티나 기자들은 이때다 하고 언론에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승리를 도둑맞았다며 개최국의 승리를 맹비난했다. 혹자는 이 경기를 두고 히혼의 수치에 버금가는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경기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잉글랜드 측에서도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라틴의 퇴장 이후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잉글랜드 선수들을 감정적인 면에서 자극했는데, 정당한 태클이 들어와도 오버액션하며 넘어지는가 하면 파울을 범한 선수와 주심에게 단체로 달려들어 노골적으로 밀치는 등 자신들의 불쾌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이에 잉글랜드 선수들이 더욱 강력한 태클로 맞대응하고 아르헨티나 선수들 역시 파울로 맞불을 놓으며 파울 잔치가 열렸다. 경기 직후 양 팀 선수들이 유니폼을 교환하려 하자 알프 램지 감독이 직접 나서서 선수들의 유니폼 교환을 막기도 했는데, 이 행동을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일인데, 여기서 '제대로 된 상대'란 짐승처럼 플레이하지 않는 팀을 의미합니다.[2]

알프 램지

잉글랜드의 감독인 램지가 보기에는 아르헨티나의 플레이가 상당히 매너 없는 행동으로 보였을 수 있지만, 사실 양 팀 모두 파울로 얼룩진 경기를 했다. 크라이틀라인 주심이 칼같이 휘슬을 불어대는 통에 양 팀 합산 50개가 넘는 파울이 나왔다. 잉글랜드는 33회의 파울을 저질렀고 아르헨티나는 19회의 파울을 저질렀다.[3] 전반전에는 양 팀의 파울 개수가 비슷했으나, 라틴의 노골적인 농성과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시간 지연 및 폭력적 행동에 격분한 잉글랜드 선수들이 굉장히 거칠게 경기에 임했기에 잉글랜드가 압도적으로 많은 파울 수를 기록하게 되었다. 잉글랜드-아르헨티나의 악연은 포클랜드 전쟁 이전인 이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4]

경기 후 분노한 바비 무어도 알프 램지 감독과 비슷하게 이런 말을 남겼다.

"더러운 짓을 했습니다. 그들은 공이 멀리 떨어져 있고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우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침을 뱉고, 눈을 찌르고 발로 찼습니다. 놈들을 상대할 유일한 방법은 놈들을 이기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승리가 그들에게 상처가 될 테니까요."[5]

바비 무어


이 경기는 어느 면에서 봐도 논란이 정말 많은 경기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만 해도 미흡하고 자의적이었던 경고, 퇴장 관련 룰이 정비되었고, 잉글랜드의 심판 켄 애스턴의 아이디어인 옐로우 카드레드 카드 제도가 채택되어 1970년 월드컵부터 최초로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때 이후로 두 나라간의 사이는 더 나빠졌고 1982년 포클랜드 전쟁으로 두 나라간의 악감정에 정점을 찍었으며 4년 후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이 터지면서 더욱 악화된다.

1.2. 2경기 서독 4 vs 0 우루과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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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8강 제2경기
1966년 7월 23일 15:00(UTC+0)

힐스버러 스타디움 (영국, 셰필드)
주심: 짐 피니 (잉글랜드)
파일:독일 국기.svg
4 : 0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서독
우루과이
11′, 83' 헬무트 할러
70' 프란츠 베켄바워
75' 우베 젤러
득점
-
-
퇴장
49′ 오라시오 트로체 파일:퇴장 카드 아이콘.svg
54′ 엑토르 실바 파일:경고 퇴장 아이콘.svg
관중: 40,007명
경기 시작한 지 3분 만에 비매너 플레이가 나왔는데, 페드로 로차가 뒷걸음질치며 공을 끌어안고 있던 틸코프스키의 손을 고의적으로 밟는 장면이 나왔고 이에 빌리 슐츠를 비롯한 서독 수비진이 분개하였다. 그러나 짐 피니 주심은 로차에게 단순 구두주의를 주는 선에서 조치를 끝냈다.

물론 우루과이도 판정 피해를 입었다. 우루과이의 세트피스 상황에서 골문 안으로 들어가는 헤더를 서독의 수비수 카를하인츠 슈넬링어가 손으로 쳐냈다. 1978년 마리오 켐페스, 2010년 루이스 수아레스의 싱황과 비슷하다. 그러나 심판은 슈넬링어가 교묘하게 핸드볼 파울을 저지른 것을 보지 못했다. 슈넬링어 자체가 원체 이런 교묘한 눈속임에 능한 선수였고, 반칙을 쥐도새도 모르게 저지르는 데에 아주 도가 튼 선수였기 때문이다.[6] 우루과이 선수들이 슈넬링어의 핸드볼 파울에 대해 항의했으나 짐 피니는 쿨하게 씹어버렸다.

그 후 몇 분 안 되어 헬무트 할러가 선제골을 득점한다. 경기 15분경에는 우베 젤러가 페널티 박스 안에서 백태클에 걸려 넘어졌지만 PK 선언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젤러는 별 항의 없이 프로답게 경기에 임했다. 경기 29분에는 슈넬링어가 특유의 끈질긴 태클 모션으로 공을 빼앗다가 우루과이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노골적으로 걷어차였다. 그럼에도 슈넬링어가 맞은 티를 안 내서인지 주심은 서독에게 프리킥을 주지 않았다. 양 팀 모두 심판 판정에 강한 불만을 품기 시작했고, 경기 분위기가 계속 험악해지다가 전반전이 끝났다.

후반 1분에는 우루과이 좌측 진영에서 패스플레이를 이어가던 지기 헬트를 도밍고 페레스가 파울로 넘어뜨렸는데, 이후 페레스의 행동이 기가 막힌다. 헬트가 명백한 파울을 당해 쓰러져 있는 상황에서 헬트의 팔을 잡아끌고 강제로 일으키는 비매너 플레이를 한 것이 그것이다. 서독 선수들은 이게 무슨 짓이냐며 모두 달려들었고 경기장 분위기는 더 험악해졌다.

후반 4분에는 서독의 에머리히가 압박을 하다가 발을 높게 들어 우루과이 주장 오라시오 트로체의 정강이를 찍어버렸다. 이미 공이 트로체의 발에서 떠난 상태였던지라 짐 피니는 이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 벌어진 사태는 심각했다. 파울만 나왔다 하면 떼로 달려들어 주심에게 항의하는 서독 선수들의 행동에 진절머리가 났던 트로체가 에머리히의 배를 걷어차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에머리히는 이때다 하고 맞은 티를 심하게 냈다. 네스토르 곤살베스가 다가와 일으키려고 했지만 주심에게 어필하려고 드러누운 건데 일어날 리가 없었다. 트로체의 비매너 플레이를 지켜본 서독 선수들이 일제히 다가가 주심에게 항의했고, 결국 트로체는 퇴장당했다. 나가면서 한 행동이 그야말로 압권인데, 상대팀 주장 우베 젤러가 자신을 쳐다보자 그의 뺨을 때려버렸다. 베테랑 우베 젤러는 이와 같은 트로체의 야만적인 행동에 응수하지 않고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5분 후에는 우루과이의 엑토르 실바와 오마르 카에타노가 소림축구를 제대로 보여주었는데, 앞뒤에서 달려들어 헬무트 할러를 둘러싸고 카에타노는 할러의 정강이 뒷부분을 걷어찼으며 엑토르 실바는 허벅지 쪽을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7] 엑토르 실바는 이미 전반전에 저지른 파울 때문에 피니 주심의 수첩에 적힌 상태였고, 거기에 더해 이런 비매너 행위까지 저지르자 결국 퇴장을 당하고 말았다. 피니 주심은 단호했다.

후반 18분에는 우베 젤러가 페널티 박스에서 태클을 당해 넘어졌는데, 액션이 작아서 어필이 덜 되었는지는 몰라도 짐 피니 주심이 이를 파울로 받아들이지 않아 페널티킥이 선언되지 않았다. 젤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9명이 뛰게 된 우루과이는 중원이 텅텅 비게 되었고, 젤러의 간력한 슈팅과 베켄바우어의 통렬한 드리블에 완전히 유린당하며 0 : 3 으로 밀려났다.

후반 31분에는 젤러가 페널티 박스에서 공을 받다가 우루과이 수비수와 충돌했고, 이를 젤러의 파울로 간주한 주심이 휘슬을 부는데, 젤러는 이를 무시하고 몇 초 정도 더 공을 가지고 드리블하다가 수비수의 더블 백태클로 응징을 당한다. 펠레를 향했던 주앙 모라이스의 백태클과 다름없는 맹목적인 걷어차임을 당했음에도 젤러는 쿨하게 자신의 잘못(심판의 휘슬이 울렸음에도 드리블을 지속하며 시간을 끈 행위)을 인정하고 웃으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막판에는 스로인 상황에서 젤러와 할러가 원투패스를 시도했는데, 이 상황에서 뒷공간을 할러에게 완전히 내주며 순식간에 1:1 상황이 되었고 우루과이는 또 실점하였다. 결국 0 : 4 스코어로 자멸하여 8강에서 짐을 쌌다. 서독 선수들은 승리를 챙겼지만 너무 많은 반칙을 당했기에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모습이었다.

이후로도 우루과이는 1970년, 1986년, 2010년까지 3번이나 독일을 만나 약한 모습을 보였다.

1.3. 3경기 소련 2 vs 1 헝가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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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8강 제3경기
1966년 7월 23일 15:00(UTC+0)

로커 파크 (영국, 선덜랜드)
주심: 후안 가르데아자발 가라이 (스페인)
파일:소련 국기.svg
2 : 1
파일:헝가리 국기.svg
소련
헝가리
5′ 이고르 치슬렌코
46′ 발레리 포르쿠얀
득점
57′ 페렌츠 베네
관중: 26,844명

소련이 헝가리에 2:1 승리를 거두며 우승후보다운 면모를 보이며 월드컵 첫 준결승에 올랐다. 헝가리는 1954년 준우승 이후 1라운드-8강-8강에 머무르며 매직 마자르의 명성을 회복하는데 실패했다.


1.4. 4경기 포르투갈 5 vs 3 북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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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8강 제4경기
1966년 7월 23일 15:00(UTC+0)

구디슨 파크 (영국, 리버풀)
주심: 메나헴 아슈케나지 (이스라엘)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5 : 3
파일:북한 국기.svg
포르투갈
북한
27', 42'[8], 56', 59'[9] 에우제비우
78′ 주제 아우구스토
득점
1′[* 공식 기록은 23초이다.] 박승진
21′ 리동운
22′ 양성국
관중: 40,248명

자신의 손에 의해 짐을 싼 이탈리아가 쓰기로 예약된 호텔을 대신 쓰며 푹 쉰 북한은 초반부터 포르투갈을 강력히 몰아붙였고, 전반 1분만에 터진 박승진의 선제골을 시작으로 전반 22분 리동운의 추가골, 25분 양성국의 사실상의 쐐기골로 전 세계 축구계를 경악시키며 승부를 결정지었다고 다들 생각했으나… 한 선수가 포르투갈을 승리로 이끌었다.

북한은 경기 시작 1분도 채 되지 않아 박승진의 선취골로 1 : 0으로 앞서갔다. 기세가 오른 북한은 계속해서 속공으로 포르투갈을 몰아붙였고 전반 21분, 리동운의 추가골로 2 : 0으로 앞서갔다. 관중들은 일제히 "We want three!(우리는 3번째 골을 원한다.)"를 연호했고 북한은 그 기대에 부응해 바로 1분 뒤 양성국의 추가골로 스코어를 3 : 0으로 벌렸다. 이렇게 경기는 북한의 완승으로 끝나는 듯했으나..... 포르투갈에는 흑표범이라 불리는 에우제비오가 버티고 있었다. 전반 중반까지 0 : 3으로 뒤지는 상황이 되자 에우제비오는 그 때부터 힘을 내기 시작했다. 전반 27분에 북한 수비의 허점을 뚫고 만회골을 터뜨렸고 전반 42분에는 북한 수비수 신영규의 반칙으로 얻어낸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순식간에 2 : 3으로 점수를 따라붙었다. 후반전 동안은 잠그고 수비를 강화하기만 해도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국제 경기 경험이 부족했던 북한 선수들은 지능적으로 시간을 끄는 방법을 몰랐고 그저 최선을 다해 뛰는 것밖에 몰랐다. 결국 후반 11분, 에우제비오에게 동점골을 허용하고 말았고 불과 3분 뒤에 수비수 림중선의 반칙으로 또 페널티킥을 허용해 에우제비오에게만 4골을 허용하며 스코어가 3 : 4로 역전되고 말았다. 그리고 후반 33분, 상대의 세트피스 찬스에서 아우구스토에게 굿바이 쐐기골을 얻어맞으며 결국 3 : 5로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관중들은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준 북한 선수들을 극찬했고 북한 선수들도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과 찬사를 받으며 퇴장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2010년에 44년 만에 본선에 올라온 북한을 다시 만나 이번에는 아예 실점 없이 7골을 퍼부으며 무자비하게 학살해버린다.

이로써 1934년 월드컵 이후 32년만에 4강 진출팀이 전부 유럽 국가들로 채워졌다.


2. 4강[편집]



2.1. 1경기 서독 2 vs 1 소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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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4강 제1경기
1966년 7월 25일 19:30(UTC+0)

구디슨 파크 (영국, 리버풀)
주심: 콘세토 로벨로 (이탈리아)
파일:독일 국기.svg
2 : 1
파일:소련 국기.svg
서독
소련
43′ 헬무트 할러
67′ 프란츠 베켄바워
득점
88′ 발레리 포르쿠얀
-
퇴장
44′ 이고르 치슬렌코 파일:퇴장 카드 아이콘.svg
관중: 38,273명

서독은 소련의 야신에게 대회 첫 멀티실점을 안겼다. 야신은 예선 3경기 1실점, 8강 1실점으로 경기당 평균 0.5실점을 기록하는 저력을 보여주었으나 서독의 막강한 공격력 앞에서는 버티지 못했다.수비수도 웬만한 공격수 못지 않은 골 결정력을 지녔으니 아니, 오히려 야신이라서 2골로 막은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막판 분전으로 후반 43분 추격골이 터졌으나 너무 늦었다.[10] 서독은 1954년 우승 이후 12년 만에 결승전에 진출했다.


2.2. 2경기 잉글랜드 2 vs 1 포르투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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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4강 제2경기
1966년 7월 26일 19:30(UTC+0)

웸블리 스타디움 (영국, 런던)
주심: 피에르 슈빈테 (프랑스)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2 : 1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잉글랜드
포르투갈
30′, 80' 바비 찰튼
득점
82' 에우제비우 (PK)
관중: 95,000명

승리팀은 사상 첫 월드컵 결승전에 진출한다. 안방에서 우승하려는 잉글랜드와 첫 본선 무대지만 유일한 전승팀 포르투갈의 준결승은 바비 찰튼이 전반 30분과 후반 35분 결승골과 쐐기골을 터트리며 홈팀인 잉글랜드가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결승전에 올라갔다. 북한전 4골의 주인공 에우제비우는 잉글랜드 수비수들의 육탄방어에 내내 고전하다 후반 37분 겨우 페널티킥 골로 한골을 만회하여[11] 뒤늦게 시동을 걸었으나 이후 잉글랜드는 우주방어 모드로 돌입했고 결국 골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3. 3위 결정전 포르투갈 2 vs 1 소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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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3·4위전
1966년 7월 28일 19:30(UTC+0)

웸블리 스타디움 (영국, 런던)
주심: 켄 대그놀 (잉글랜드)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2 : 1
파일:소련 국기.svg
포르투갈
소련
82' 에우제비우 (PK)
89' 주제 토레스
득점
43' 에두아르트 말로페예프
관중: 88,000명



에우제비우는 페널티 킥으로 대회 9호골을 성공시키며 득점왕에 올랐고 포르투갈은 정규시간 종료 직전 토레스의 결승골로 사상 첫 본선에서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포르투갈의 3위와 소련의 4위 모두 자국 월드컵 역사에서 최고성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다음 월드컵에 오르기까지 20년이 걸렸고 그 다음 대회에 나가기까지 16년이 걸리며 1990년대 골든 제너레이션이 등장하기 전까지 길고 긴 암흑기를 시작했다. 에우제비우 원맨팀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그에 대한 의존도가 심했으니 예상되었던 결과였다.


4. 결승전 잉글랜드 4 vs 2 서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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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결승전
1966년 7월 30일 15:00(UTC+0)

웸블리 스타디움 (영국, 런던)
주심: 고트프리드 딘스트 (스위스)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4 : 2
(연장전)
파일:쥘리메 컵.svg
파일:독일 국기.svg
잉글랜드
서독
18′, 101', 120' 제프 허스트
78′ 마틴 피터스
득점
12′ 헬무트 할러
89′ 볼프강 베버
관중: 96,924명




대망의 결승전. 웸블리 스타디움에 98,000여 명의 관중이 결집하여 잉글랜드를 응원하는 가운데 잉글랜드 vs 서독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2~30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전쟁까지 벌여온 전통의 앙숙인데다, 서독은 대망의 월드컵 2회 우승을, 잉글랜드는 그동안 구겨져온 축구종가의 자존심을 위해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먼저 전반 12분, 헬무트 할러가 수비진이 떨궈놓은 공을 가로채 고든 뱅크스를 뚫어냈다. 그리고 6분이 지나서, 바비 무어가 멋진 간접 프리킥으로 제프 허스트의 머리를 겨냥했고 그것이 곧바로 골로 연결되며 동점이 되었다. 경기 78분에는 서독 수비수 회트게스의 클리어링 실수를 놓치지 않고 마틴 피터스가 골망을 갈랐다. 그리고 경기 89분에 찾아온 마지막 찬스를 볼프강 베버가 골로 연결했다.

그리고 연장전에서 제프 허스트가 논란 많은 골을 터뜨렸고, 연장전이 다 끝나가던 120분, 관중들이 난입하는 와중에 또다시 허스트가 무어의 패스를 받아 골을 넣었다. 최종 결과는 4-2. 잉글랜드의 승리였다.

이 경기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대부분 제프 허스트의 두 번째 골, 그러니까 잉글랜드가 3-2로 앞서가게 만든 골에 대한 내용이다. 여러 책이나 언론에서도 이 골을 다루며 '잉글랜드는 얼마나 더럽게 우승했는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먼저 전반전. 전반 16분경 볼프강 오베라트앨런 볼에게 '정신나간 백태클'을 시전했다. 그러나 주심은 별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베라트의 파울로부터 2분 후, 슈넬링어는 교묘한 눈속임 반칙을 시전했다. 앨런 볼의 다리를 고의적으로 걸어 넘어뜨렸다. 그러나 슈넬링어가 적반하장으로 화를 냈고, 공에 시선에 고정되어 있던 주심과 부심은 이 파울을 보지 못해 슈넬링어가 파울을 범한 사실을 몰랐다. VAR이 있었더라면, 아니 그냥 심판이 작정하고 잉글랜드에 편파판정을 할 생각이었으면 이런 상황에서는 백이면 백 퇴장이 선언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심판진은 그냥 넘어갔다.


가장 심각한 것은 후반전에서 나온 서독의 동점골 장면이다. 피터스의 역전골 이후 패색이 짙어진 서독은 경기 89분에 찾아온 프리킥 찬스를 꼭 살려야 했던 상황이었다. 로타어 에머리히가 날린 슈팅이 조지 코헨을 맞고 튀어 나왔고,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 이 상황에서, 지그프리트 헬트의 왼발 슈팅이 카를하인츠 슈넬링어왼팔에 확실하게 맞은 뒤 등에 튕겨 굴절되어 방향이 바뀌었다. 잉글랜드 주장 바비 무어는 이것을 정면에서 목격했고 바로 팔을 들어 핸들링 파울에 대해 항의했다. 그리고 튀어나온 볼은 베버의 차지였다. 베버는 잉글랜드 수비수 몇 명이 항의하고 있는 상태에서 말 그대로 공을 주워먹었다. 이 실점 전까지 대회 내내 2실점만을 기록했던 고든 뱅크스도 핸들링이 선언되지 않은 것에 대해 무척 화가 났다. 이런 상황은 무조건 핸들링 파울이 선언되어야 했을 장면이다. 그런데 서독의 골은 그렇지 않았고, 잉글랜드는 그냥 이길 수 있던 경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연장전 승부까지 가야 했다. 정규시간 종료 휘슬이 불린 후 카메라에 비친 잉글랜드 선수들의 허탈한 표정은 이 골이 얼마나 어이없었는지를 말해준다.

이후 심판은 또 어처구니없는 판정을 보여준다. 이번 피해자는 서독이었다. 연장 전반 6분, 제프 허스트의 슛이 서독 골포스트 상단을 맞고 지면에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심판은 이를 득점으로 인정했고, 서독은 격분하여 맹렬하게 항의를 했으나 심판은 항의를 묵살했다. 경기는 3:2 잉글랜드의 리드로 흘러갔다. 잉글랜드의 축구팬들과 서독의 축구팬들은, 당시 결승전의 득점이 "골이냐? 아니냐?"로 현재까지 싸우고 있다고 한다. 서독에서는, "그 위치에서는 어떻게 슛을 시도해도 튀어나온 공이 골라인을 넘어가지 않는다."라는 논문까지 나왔다. 또한 1995년 영국의 옥스포드대 정밀측정학과의 앤드루 지셔만, 이언 레이드 박사도 29년전의 잉글랜드와 서독의 결승전에서 터진 제프 허스트의 연장전 첫 골을 첨단계측 방식으로 정밀측정했다. 그 결과 공이 골라인을 완벽하게 넘어서지 않은 것으로 나와 "득점으로 인정 될 수 없는 오심이 분명"하다고 한다.

컬러 복원판인 화질 좋은 영상을 보면 확실히 알 수있다. 5분 51초 참고. 위 영상은 장면의 순서가 뒤죽박죽 섞여 있고 전개가 갑작스럽게 진행되어 하이라이트로 보기에는 상당히 부적절하니, 경기의 흐름을 보고 싶은 사람은 하이라이트를 따로 찾아보거나 풀 경기를 찾아보는 것이 좋다.

서독은 이후 열심히 동점골을 넣으려 했으나 바비 무어를 비롯한 잉글랜드 수비진의 완고한 수비에 번번이 가로막혔고, 119분 바비 무어의 마지막 인터셉트로 인해 사실상 경기가 끝난 상태였다. 아직 119분이었기 때문에 주심은 경기를 진행시켰고, 서독 선수들은 바비 무어가 공을 멀리 걷어낼 것으로 생각하고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무어는 서독 선수들의 예상대로 전방에 대기 중이던 제프 허스트를 향해 롱패스를 전달했고, 허스트는 40m가량 빈 공간을 질주해 골을 넣었다. 골키퍼 틸코프스키는 막을 생각도 안 했다. 허스트가 마지막 골을 득점하기 전 서독 진영 왼쪽 코너에서 관중들이 난입했다. 당시 BBC의 케네스 월스턴홀름 해설가의 해설도 압권인데 다음과 같다: " 그리고 허스트가 접근합니다.... 사람이 경기장에 난입하는데, 그들은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And here comes Hurst. He's got... some people are on the pitch, 'they think it's all over.') 라고 해설하다가 골이 터지자 '정말 끝났습니다! (It is now! ) 4번째 골입니다!" (It's four!) 허스트의 득점과 동시에 주심의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잉글랜드의 스트라이커 제프 허스트월드컵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12] 마지막 쐐기골에 대해 제프 허스트는 시간을 벌기 위해 일부러 관중석에다 슛을 한 것이 골이 되었다고 밝혔다. 덤으로 이 월드컵 결승전은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에게 있어서 정말 영원한 자랑거리로 남을 만한 경기인데, 왜냐하면 잉글랜드의 4개 득점 상황이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 18분 골

* 득점: 제프 허스트(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 도움: 바비 무어(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 78분 골

* 득점: 마틴 피터스(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 도움: X(서독 수비수 회트게스의 클리어링 실수)

* 102분 골

* 득점: 제프 허스트(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 도움: 앨런 볼(블랙풀 FC)

* 119분 골

* 득점: 제프 허스트(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 도움: 바비 무어(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소속의 선수들은 이 경기에서 무려 6개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

정상적인 판정이 있었다면 애초에 잉글랜드는 논란의 결승골이 터진 연장전까지 갈 필요도 없이 우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경기로부터 54년이 지난 현재, '슈넬링어의 핸드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허스트의 골라인'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분명한 오심이었음에도 슈넬링어의 명백한 핸드볼 파울이 조명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적어도 그것은 승리였고, 우리는 이겼다."
(At least it was victory and at least we won.)

바비 무어


잉글랜드가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미 이겼기 때문에, 잉글랜드 선수들이 판정에 불만을 품었더라도 경기 종료 후 판정에 토를 달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나중에 기사화되지도 않았고 인구에 회자될 일도 없었다. 그래서 패배한 팀인 서독 선수들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제프 허스트의 유령골'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만 이렇게 많은 논란이 존재하는 것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논란이 많은 월드컵이지만 잉글랜드는 우승할 만했다. 서독이 저지른 여러 차례의 비매너 플레이어와 그 정점에 서 있는 치졸한 동점골을 생각하면, 애초에 잉글랜드에만 유리하게 치졸한 판정들이 이루어진 경기도 아니었다. 잉글랜드는 상대한 모든 팀에 그럴만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당시 서독의 핵심 선수였던 프란츠 베켄바워 또한 이 월드컵의 결과에 대해 전혀 미련을 두고 있지 않다.

"허스트의 두 번째 골은 문제가 있었지만, 잉글랜드의 우승은 정당했다. 그들은 120분 동안 경기를 지배했다."#

프란츠 베켄바워


결국 수준 이하의 주심이 경기를 혼란에 빠뜨리게 한 대표적인 사례라 보는 것이 적절하다.

신기하게도 44년 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독일과 잉글랜드의 경기에서 잉글랜드의 미드필더 프랭크 램파드명백한 골이 주심의 오심으로 무효 처리됐다.
[1] 기사 원문: I just want to forget the whole dreadful experience, The match was the roughest I have ever refereed. It was terrible. A disgrace. I sent Rattín off because he was following me and shouting at me. I had no option. He was trying to be the referee. 기사 출처:https://www.google.com/amp/s/amp.theguardian.com/football/blog/2016/jul/24/1966-world-cup-final-conspiracy-refereeing-50-years[2] 즉,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짐승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3] 역으로 생각해 보면 잉글랜드의 파울을 그냥 지나치는 일 없이 매 번 확실하게 휘슬을 불어 통제를 해 주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라틴의 퇴장 장면은 당연히 문제가 있었지만, 그 외의 판정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풋볼리아 같은 사이트에서 풀경기를 찾아보면 알 수 있다.[4] 그리고 4년 후 멕시코 월드컵 8강전 잉글랜드 vs 서독 경기에서는 아르헨티나 국적의 앙헬 노르베르토 코에레사 주심이 경기를 주관했는데, 연장전 후반에 페널티 박스 안에서 베켄바워가 콜린 벨을 향해 고의성이 다분한 명백한 파울성 태클을 걸었지만 그냥 무시했다. 누가 봐도 파울인 장면을 그냥 넘어갔고, 동점골을 넣을 수 있는 페널티킥 기회를 이 판정으로 인해 날렸기 때문에 축구 역사에 관심이 많은 잉글랜드 사람들은 여전히 이 판정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곤 한다. 댓글창을 살펴보자.[5] 원문:did do nasty things. They did tug your hair, spit at you, poke you in the eyes and kick you when the ball was miles away and nobody was looking. I just said the only way to deal with them was to beat the bastards. That’s what would hurt them.[6] 이 대회 결승전에서도 슈넬링어는 침투하는 앨런 볼에게 슬그머니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놓고 뻔뻔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척을 했는데, 관중들은 이를 보자마자 야유를 퍼부었지만 주심을 비롯한 심판진은 이걸 보지도 못했다. [7] 고추를 붙잡고 늘어지는 반칙을 저질렀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악질적인 파울이었다.[8] 페널티킥[9] 페널티킥[10] 이 득점마저도 프리킥 상황에서 골키퍼를 뭉개버리고 넣은 거라 키퍼 차징 논란이 있다.[11] 이로 인해 고든 뱅크스의 442분 무실점 기록이 깨졌다. 1990년 이탈리아의 발테르 쳉가가 517분으로 경신하기 전까지 골키퍼 월드컵 최장시간 무실점 기록이었다.[12] 이 기록은 56년 뒤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결승전에서 킬리안 음바페가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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