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r1판)
편집일시 :
1. 개요[편집]
예수 그리스도의 12사도 중 첫 번째 사도이자, 초대 교황으로 전해지는 인물. 또 다른 사도로 전해지는 사도 안드레아스의 형이다. 신약 성경과 복음서에서 비중이 큰 인물로, 특히 복음서에서 계속하여 이름이 명시되어 언급되는 극소수의 인물 중 한 명이다. 나오는 횟수도 사도들 중 가장 많은데, 사도행전만 해도 사도 바오로를 제외하면 베드로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비유된 당사자이다.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4]
-요한복음서 21장 15절(공동번역)
신약에 반영된 서로 다른 계통의 전승들이 공통적으로 베드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바울로가 전해준 전승에 의하면 부활한 예수는 베드로, 열두 제자, 500명의 교우, 야고보, 기타 사도 순으로 발현하였다.(1고린 15장)
- 바울로가 창설한 이방계 교회를 위해 저술한 루가 복음서-사도행전의 저자는 (넓은 뉘앙스의 단어인) '사도'를 12제자에게로 한정하고 이들의 대표로 베드로를 묘사한다. 또한 사도행전에서 바울로를 베드로와 평행 인물로 그리는데, 이 두 책이 바울로가 창설한 교회들을 독자로 염두에 뒀음을 감안하면 강조점은 "베드로만큼이나 엄청난 바울로"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 로마 지역의 이방계 교회에서 저술된 마르코 복음서는 (제자들의 부족함을 강조하긴 하지만) 베드로를 제자들의 대표인물로 그린다.
- 시리아-팔레스티나 지역의 유대계 교회에서 저술된 마태오복음서는 베드로를 교회를 떠받치는 바위로 그린다.(마태오 16장)
- 유대계 교회에 속하지만 독특한 성격이 강한 요한계 전승에선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를 제자단의 가장 중요한 두 인물로 묘사한다. 여기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요한계 전승 집단과 관련됨을 고려하면 서술 의도는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만큼이나 엄청나다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유대인들, 정확히는 '할례 받은 사람들'의 사도로 '이방인의 사도'인 사도 바울로와 대비된다. 기독교, 특히 가톨릭에서 가장 중요한 성인 중에 하나다. 가톨릭에서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간주하며, 정교회 역시 역대 로마 교황들을 베드로의 후계자로 인정한다.[5] 축일은 사도 바울로와 같이 6월 29일이다. 반드시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대체적인 일반인들의 인지도도 이스카리옷 유다 다음으로 높은 편이다.
상징물은 열쇠. 이유는 후술할 마태오 복음서의 내용 때문인데, 물론 다른 상징물도 많지만 열쇠는 성 베드로만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회화나 조각 등에서 열쇠를 들고 있는 성인이 있다면 100이면 100 성 베드로이다. 그래서 성 베드로 성당의 광장 역시 열쇠구멍 모양으로 디자인되었다. 가톨릭 입장에서는 초대 교황이기 때문에 삼중관과도 연관이 있기는 한데, 삼중관은 교황 출신 성인들의 공통된 상징이기 때문에 알아보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격이나 행적, 그리고 전승에서의 최후를 보면 공자의 제자인 자로와 닮은 구석이 있다. 둘 다 스승이 으뜸으로 꼽은 제자였으며[6]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모두 거칠고 성급하고 솔직했다. 둘 다 섬기던 스승을 위해 싸웠던 적이 있으며, 둘 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르기 위해 생을 바쳤다.
2. 이름[편집]
본명은 아람어로 시몬 바르요나(ܫܡܥܘܢ ܒܪܗ ܕܝܘܢܐ، שמעון בר יונה)이며, 요나의 아들[7] (ܒܪܗ ܕܝܘܢܐ، בר יונה) 시몬(ܫܡܥܘܢ، שמעון)이라는 뜻이다. 요한의 복음서 21장에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는 표현이 쓰였다.
예수는 그에게 "바위"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케파(ܟܐܦܐ، כיפא)'를 호칭으로 주었다. 이 호칭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페트로스(Πέτρος)가 되며 라틴어로 옮기면 페트루스(Petrus)가 된다. 그래서 언어 고증을 살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는 시종일관 베드로를 '케파'로 부른다. 서구권에서도 드물지만 이 단어가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스페인의 전 축구선수인 케파 블랑코(Kepa Blanco González)와 첼시 FC에서 활동하고있는 골키퍼인 케파 아리사발라가(Kepa Arrizabalaga Revuelta)가 있다.
눈여겨볼 점은, '케파'(베드로)라는 이 호칭을 받은 것이 단순한 개명(改名)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케파"도 "베드로"도 당시엔 인명으로 쓰인 바가 없으며, 여기엔 메시아(그리스도)처럼 일종의 직무적 함의가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나자렛 예수의 세속적 풀네임이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은 이(메시아) 예수'라는 의미이듯이, '시몬 베드로' 역시도 시몬의 풀네임이 아니라 '바위(케파)'라는 직무를 시몬이 받았음을 의미한다.시몬이 베드로라고 불렸으며 이 이름은 그의 본래 이름이 아니라 예수께서 주신 호칭이었다 ... 나아가 '케파스(Kefas)'라는 이름이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점은 그것이 단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고유한 이름은 번역되지 않기 때문이다.
-호세 안토니오 사예스. 《교회론》(윤주현 번역) 690쪽
베드로의 이름은 다양하게 쓰이는데 영어의 피터(Peter),독일어의 페터(Peter), 프랑스어의 피에르(Pierre), 스페인어의 페드로(Pedro), 이탈리아어의 피에트로(Pietro)나 피에로(Piero), 러시아어의 표트르(Пётр), 체코의 페트르(Petr), 아랍어[8] 부트루스(بطرس) 등. 언어에 따라서는 원형에 가까운 페트로[9] 도 쓰인다. 한편 여성형 이름은 페트라인데, 베드로와 달리 큰 변화 없이 전래되었다.
덧붙이자면 로망스어에서는 아직도 고대 그리스어 → 라틴어로 물려받은 원래의 돌이란 뜻의 단어와 형태적으로 유사하다. 스페인어의 piedra(돌)-Pedro(페드로)가 대표적. 영어에도 이는 남아있는데, 암석을 뜻하는 접두 petro-로 사용된다. 석화(petrification), 암석학(petrology), 석유(petroleum) 등이 그 예[10] 이다.
콘클라베에서 선출된 역대 교황들이 교황명을 선택할 때, 요한이나 바오로 같은 사도들의 이름은 자주 고르면서도 유독 베드로만은 고르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졌다. 베드로를 고르면 안 된다는 금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도와는 달리 예수가 직접 지어준 이름인 데다가 초대 교황이라는 상징성도 있어서 감히 고를 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예수로부터 이름을 받기 전에 가지고 있던 시몬 역시 지금도 서양권에서 인명으로 많이 사용된다. 영어의 사이먼의 유래가 바로 시몬이다. 프랑스어로 시몽이라고 하며, 프랑스권에서는 아예 풀네임이 인명으로 사용되고, 대표적인 예시가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다.
3. 성경에 묘사된 생애[편집]
예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어부였다. 그래서 기존에는 하층민이었을 것이라 설이 지배적이었다가, 시대가 흘러 당시 갈릴레아 호수의 어업이 장사가 잘되는 고부가 산업이라 중산층이며 교육받은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베드로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 상당히 넓었다는 것을 토대로 베드로가 부유했다는 말도 나오고 있긴 하지만 근거가 미약해 학자들의 비주류 의견 정도. 또한 그 집터라는 것도 진짜 베드로의 집터라는 근거가 빈약하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자기 소유의 배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주 가난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예수 문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유대교의 랍비도 나름의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다른 사람들이 베드로를 무식한 사람으로 생각했다가 연설을 듣고 놀라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베드로의 인상이 무식해 보여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대체로 고대로 갈수록 외적인 아름다움 = 내적인 아름다움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별것 없어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좋은 연설을 하는 바람에 놀랐던 것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에게 천국의 열쇠를 건네받았다고 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11] 를 처음으로 한 사람이다.
천국의 열쇠와 관한 내용은 가톨릭 교황의 권위와, 종교 개혁 시대의 사도 전승 논쟁에 있어 굉장히 중요하므로 한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3장에서 19장의 내용이며, 공동번역성서를 차용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묻기를,
그러자 제자들은 아래와 같이 답했다."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가 또 제자들에게 묻기를,"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에 답하기를,"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였다. 그러자 예수가 아래와 같이 말했다."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12] 이다. 내가 이 반석[13]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가톨릭은 이 내용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이 구절을 근거로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천국 문의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여겨지며, 여러 전승에서 천국 문의 열쇠를 가진 문지기로 등장한다. 가톨릭에서는 예수의 부활과 승천 후 기독교의 종교적 지도자 중 한 명이 된 그를 초대 교황으로 추대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후 교황들의 갖는 권리는 여기서 근거한다.
정교회 역시 이 구절을 근거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 총대주교가 사도 전승을 잇는 모든 주교들 중 으뜸임은 인정하나, 어디까지나 동등한 가운데 첫째일 뿐, ‘교황’이라고 불릴 만한 통치권은 없다고 본다.
개신교에서는 이 구절을 교황권의 근거로 보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반석'이 여기서 베드로를 의미하고 베드로 개인의 중요성을 부각하는 구절이라고 해석하는 걸 교리적으로 부정하는 건 아니다:
앞에 제시된 '페트로스'가 남성형 고유 명사인데 비해 여기의 '반석'(페트라)은 여성형 일반명사로서 '바위 덩어리'를 의미한다. 이러한 언어적 차이 때문에 베드로와,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반석을 동일시하려는 것을 전면 부정하는 주장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본문의 '반석'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살펴보면 (1) 베드로는 단순히 '돌'이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고 베드로 자신이 중언한 바처럼 예수께서 친히 '반석'이 되신다는(벧전 2:5-8)견해이다(Augustine, Gander, Lenski, Luther). 이는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는 자도 되는 동시에 교회의 기초도 된다는 논리적 모순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2) 로마 천주교회의 주장처럼 이 말이 교황의 수장권(收藏權)의 기초를 마련한다는 견해이다(H.M. Riggle, J. Gibbons). 즉 볘드로는 예수로부터 직접 천국 열쇠를 부여받은 교회의 기초석으로서 베드로의 후계자가 곧 모든 교회와 천국의 전권을 위임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유한하고 유흠(有欠)한(23절) 자가 영원한 교회의 기초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와(고전 3:11) 모든 신앙 고백자의 기초 위에 세워진다(갈 2:9;엡 2:29;벧전 2:5). (3) 계시된 진리, 곧 베드로가 증거하는 신앙 고백을 뜻한다(Allen, Calvin, Jerome, Clarke, Robinson). (4) 로마 카톨릭의 극단적인 해석에 반대하는 개신교의 반발이 아니라면 베드로 그 자체로 보는 것도 좋다는 견해이다(Bruce, Plummer).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초기 헬라어에서 '페트로스'와 '페라'가 각각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주로 시어(詩語)에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 헬라어의 기초가 되는 아람어는 두 경우 모두 '게바'로 사용되고 있다. 즉 '너는 게바라, 내가 이 게바 위에...'로 표현된다. 그 이유는 이 단어가 이름으로도,또한 반석이라는 의미로도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아람어와 같은 어원인 시리아어로 기록된 '페쉬타 사본'(Peshhitta)에는 이 두 단어가 두 구절 속에서 구분없이 사용되고 있다. 본 주석은 (3), (4)의 견해를 절충한 것을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호크마 주석》
우월한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도들보다는 왠지 신비성이 떨어지고 세속적이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는 베드로가 이례적으로 사도들 중에서 복음서의 서술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사도인데, 위에 등장한 신앙 고백같이 좋은 이야기는 딱히 등장하지 않고 대체로 부족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세세한 에피소드들이 등장하는 유일한 사도라는 것 자체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베드로가 가졌던 위상과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기독교의 대표적인 기적 중 하나인 물 위 걷기를 예수가 실천하자, 베드로도 따라서 내려와서는 물 위를 걷다가 금방 실패해서 물에 빠졌다. 처음에 물에 발을 딛을 때는 예수만 바라보아 물 위에 서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막상 걸으려 할 때 거친 비바람을 보고 겁이 나서 실패한다. 물에 빠진 베드로가 어푸어푸거리면서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라고 하자 예수가 직접 (물 위를 걸어서) 구해주고, 이 모습을 보고서 믿음이 부족하다며 질책하였다.[14]
- 예수가 자신의 예언대로 죽으러 출두하는 것을 막다 사탄이란 소리를 들었다.
- 예수에게 "세상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한 뒤 배신을 때린 일. 이후엔 회개하여 이것은 용서받은 것으로 친다고 하지만, 하여튼 4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매우 중요하며 굉장히 유명한 대목이다.
요한 복음서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는 다시 베드로에게 나타나 고기 잡는 것을 도와주고 아침 식사를 함께 한다. 식사가 끝난 뒤 기뻐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이렇게 묻는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0] 베드로는 물론 "사랑합니다!"를 외쳤지만, 예수는 그 질문을 일부러 3번이나 반복해서 물었다. 이에 베드로는 예수의 행동의 의도를 깨닫고는 슬퍼져서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고,[21] 흡족해한 예수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22] 라고 대답하며 사도들의 수장으로 재신임했다. 사실 예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에 쓰인 "사랑"은 그리스어 원서에서는 단어가 다르기 때문에 여기엔 단순한 용서 이상의 의미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요한 복음서 문서 참고.
이처럼 고집이 세서 말도 안 듣고, 열 받으면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고, 치기심에 한 말도 잘 지키지 못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렇듯 딱히 잘나거나 우월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 베드로가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토대로 하여 제자들 중의 으뜸이 되었다는 사실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실 베드로의 성격은 엄밀히 따지면 성격이 급하고 감정에 솔직한 것에 더 가깝다. 그렇기에 예수가 스스로의 죽음을 예언하자 순간적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만류를 하였으며, 또한 예수가 체포되었을 때는 두려운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도주를 하였다가 죄책감 때문에 오열을 한 것이다. 요한 복음서 21장에서, 예수가 사랑하냐고 반복해서 묻자 슬퍼하였다는 대목과, 예수의 바로 옆에서 계속 사랑과 용서에 관한 말을 계속 들었음에도 예수가 잡혀가게 되자 스스로의 감정을 못 이기고 칼부터 꺼내서 병사의 귀를 싹둑 잘라버린 것도 이와 같은 맥락. 여러모로 이스카리옷 유다와는 대비되는 인물이다.
여러모로 소시민적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제1사도로서 그가 일으킨 기적은 수없이 많다. 성경에 기록된 대표적인 것이, 성전 앞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 거지를 일어나게 한 것과 재산을 판 돈의 일부만 바치고선 전부를 바쳤다는 거짓말을 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부부를 즉결 처분한 것. 사실 기적 쪽으로 가지 않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당시 제자들의 행동대장 노릇을 하였고, 예수의 사후에도 전체 교회의 리더 일을 하였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업적은 바오로와는 다른 의미에서 매우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베드로와 교황직의 관련에 대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논쟁은 민감한 사안이지만, '베드로가 1세대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지도자였다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다. 특히 이방인 신자와 율법에 관한 당대의 논쟁에서, 베드로는 양쪽 입장(예루살렘 교회 vs 바울로)의 중간에 끼어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욕먹기 쉬운 중도파 역할을 수행했다. 신약 성경 속 베드로의 모습을 관찰해 보면 예루살렘 교회, 요한, 바울로, 안티오키아 교회와 각각 모두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렇게 본다면 베드로가 왜 초기 교회에서 중요시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갈라티아서 2장의 안티오키아 사건도, 베드로 입장에서 생각하면 중도파의 고충을 잘 보여준다.
게파는 유대인답지 않고 이방인다운 자신의 생활 방식을 통해 모세 율법은 구원에 본질적인 의의를 더 이상 보유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 확신을 이제 버렸던가? 그렇지 않았음은 거의 확실하다. 다만 그는 이 충돌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에게 부추겨져, 율법을 이스라엘 역사를 틀짓고 유대인의 고유성을 꼴 지어 온, 유대인들이 언제까지나 보존해야 할 제도와 문화적 생활 공간으로 인정하려 했을 수 있다. 게파는 유대인 선교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에선 (게파를 인격적으로 모욕하기까지 한) 바울로와의 충돌을 결연히 감수하고자 했을 것이다. 게파는 바울로와는 달리, 기꺼이 타협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필경 그는 훗날을 위해 그런 타협을 바랐을 것이다.
이 충돌이 어찌 끝났는지 바울로는 말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결말이 낫다면, 그에 관해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입 다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게파는 자신의 입장을 견지했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PAULUS VON TARSUS: Apostel und Zuege), 분도출판사, 2008. 160쪽
할례 문제로 이민족 기독교 입교자들과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 간에 교리적 논쟁이 일어났을 때, 이민족은 할례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여 기독교 전파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당시 많은 비유대인들이 유대교에 호감을 느꼈으나, 할례가 부담스러워서 개종은 하지 않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외국인'으로 지냈다. 이는 할례가 단순한 수술이 아니라, 유대교의 복잡한 의식과 율법을 모두 지킨다는 서약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베드로 또한 원래 할례 문제에서는 유대인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성령의 인도로 코르넬리오의 집에서 먹고 마시고,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한 것을 목격하고, 세례를 베푼 경험을 생각하며, 율법의 규레를 부과하지 않고, 우상 숭배와 음행, 목 메인 것이나 짐승의 생피 등 최소한의 율법만을 지키게 하자고 한것이다.
그런데 할례 문제로 바오로에게 대놓고 공개 디스를 먹기도 했다. 바오로에게 공개 디스를 먹은 이 사건이 단순히 베드로의 외식이라기보다 이때 접한 자들이 야고보서를 집필했다고 알려진('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 유명한 그) 야고보에게서 온 자들이었기 때문이다.(갈 2:12) 율법에 엄격한 야고보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였기 이방인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며 이를 책망받을까 봐 두려워한 듯하다. 이것은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보다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있어서는 거침이 없었던 바울로와, 대조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와 비유대인들로 이루어진 교회와의 화합 문제를 고민해야 했던 신중한 중도파 베드로의 성향 차이가 드러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교황 수위권에 대한 논쟁 때문에, 가톨릭이 베드로를 밀어주는 경향이 있고 개신교가 바오로를 밀어주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큰 의미가 없다. 기록마다 사도들에 관한 내용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베드로와 바오로는 그냥 우열을 가리는 것이 무의미한 초특급 대우이다. 이 점은 천주교에서 두 사람의 축일을 같은 날짜(6월 29일)로 공동 지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신약 성경에서 '보편 서간'으로 분류되는 베드로 1서, 베드로 2서의 필자가 사도 베드로를 자칭하고 있다. 전통적인 견해로는 사도 베드로가 저자가 맞다고 인정하지만 초대 교회부터 저자에 대한 논란은 쭉 지속되었다. 현대 성서비평학에서는 두 책 모두 베드로가 아닌 후대의 다른 저자가 쓴 것으로 본다. 특히 베드로 2서는 내용이 유다서에 의존적인 등의 이유로 신약 성경 중 가장 늦은 2세기 초중반에나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4. 말년에 대한 전승[편집]
가톨릭 교회의 전승과 베드로 행전에 따르면, 베드로는 64년 또는 67년에 사형을 받아 로마에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아 순교하게 된다. 이 때 "나는 그 분과 똑같이 죽을 자격이 없다"면서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청하여 실제로 그렇게 순교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거꾸로 된 십자가는 초대 교황을 상징하는 또 다른 십자가로도 쓰이는데, 근대부터는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창작자들에 의해 이것이 오히려 안티크리스트의 상징으로 쓰이는 경우가 잦다.[23] 그 때문에 교황이 역십자와 함께 찍힌 사진이 떡밥용으로 나돌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역십자, 쿠오 바디스 문서 참고.
쿠오 바디스라는 경구로 유명한 말년의 베드로에 관한 또 다른 일화가 있는데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자 베드로는 신자들의 권유로 탄압을 피해 로마에서 빠져나와 도망가려 했었다. 로마를 벗어나던 중 베드로는 자기와 정반대 방향, 즉 로마로 가는 예수의 환영을 보게 되고 깜짝 놀란 베드로는 예수에게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라고 묻는다. 이에 예수가,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Venio Romam iterum crucifigi.)"라고 대답하자[24] 베드로는 큰 깨달음을 얻고 부끄러움에 통곡하며 목숨에 연연했던 자신의 허물을 뉘우쳤다 하며 결국 스스로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자수를 하고 역십자에 매달려서 순교하면서 죽음을 맞게 된다.
위 일화는 폴란드의 소설가인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Adam Aleksander Pius Sienkiewicz, 1846년 5월 5일 ~ 1916년 11월 15일)가 쓴 소설 《쿠오 바디스(Quo vadis. Powieść z czasów Nerona, 1895)》를 통해 유명해진 것으로, 실제로 성경 본문[25] 에는 등장하지 않고, 외경인 '베드로 행전'의 일화로서 베드로의 로마 선교는 전승으로 인정받고 있다.
사도행전이나 신약 정경 내의 여러 편지들에서 로마 체류 증거가 발견되는 바오로와는 달리 베드로의 로마 순교에 대해서는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 종파에서 부정하기도 한다. 일단 신약 정경 내에는 베드로의 후기 행적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사도행전 후반부는 거의 바오로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기도 하고, 바오로 서간이나 베드로 서간에서도 '바빌론'이라는 간접적인 비유로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베드로 사후 수십 년 이후의 고대 교부들은 베드로의 로마 전도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5. '베드로가 여기 있다'[편집]
순교한 후 베드로의 유해는 바티카누스 언덕에 묻혔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예수의 말은, 베드로의 무덤 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무덤이 위치한 언덕이 가톨릭의 총본산이 되면서 현실이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과 내부에 각각 대리석과 청동으로 제작된 베드로의 성상이 서 있다. 특히 캄비오의 베드로 청동상은 오랜 세월 순례자들이 성상의 발을 만지고 입을 맞추면서 발가락이 모두 닳아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초대 교황으로 여기기 때문에 축일인 6월 29일에는 교황관과 만툼을 입히는 의식을 거행한다.
베드로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곳은 1939년 교황 비오 11세가 선종하면서 그의 시신을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할 때 중앙 제대 밑 갈라진 벽 틈에서 발견됐다. 그 무덤에는 150년경에 만든 천개가 세워져 있었고, 그 옆 벽에는 그리스어로 'Petros eni', 즉 '베드로가 여기 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교황 비오 12세는 1949년 8월 이 무덤을 본격적으로 발굴했다. 발굴된 유골은 금실로 수놓은 자주색 천에 정성스레 싸여 있었다. 조사 결과 유골은 1세기경 골격이 큰 60대 중반 남자의 뼈로 밝혀졌다. 참고로 베드로는 60대 후반의 나이로 순교했다고 한다. 1950년 12월 23일 비오 12세는 발다키노(천개) 아래의 지하실 공간에서 베드로의 무덤을 확인했다고 공표했고, 1968년 6월 26일 교황 바오로 6세는 여기서 발견된 유골이 베드로의 유해로 거의 확실해 보인다고 발표한 후 그 다음날 처음 발견된 자리에 다시 매장했다. 2013년 11월 24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2013년 신앙의 해 폐막 미사에서 베드로의 유골을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2019년 6월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유해가 담겨진 유골함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인 바르톨로메오스 1세에게 선물하였다. 기사 베드로 사도의 유해가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황의 수위권을 상징하고, 로마 총대주교인 교황과 동방의 총대주교들 간의 불화 역시 이 수위권 문제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기에, 이 기증에 대해서 교회 일치를 위한 상징적이고 상당한 의미를 지닌 진전이라는 평이 있다. [26]
5.1. 정말 그의 무덤인가?[편집]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는 베드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순교한 직후 로마의 공동묘지였던 네크로폴리스에 묻혔고, 베드로 대성당은 그 네크로폴리스 위에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어딘가에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베드로의 무덤으로 발표된 '그 무덤'이 정말 베드로의 무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베드로가 순교했을 당시에는 그의 추종자였던 그리스도인들 역시 가혹한 박해를 피해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숨기며 지내는 형편이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베드로의 무덤에 당당하게 베드로 이름의 비석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무덤의 주인이 베드로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베드로의 무덤을 비석조차 세우지 않은 무명묘로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권위는 막강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비밀리에 베드로의 무덤을 찾아가서 추모했다. 이 시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직접 베드로를 매장했던 장본인들이었으므로, 그들은 네크로폴리스의 수많은 무명의 무덤 중에서 베드로의 무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의 박해 시기 동안 세대를 걸쳐 베드로의 무덤의 위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전승되어 왔다.
로마의 박해 시기가 지나고, 그리스도인임을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자, 베드로의 무덤의 위치에 대한 논란이 생겼다. 그동안 베드로의 무덤의 위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은밀하게 전해 내려온 비밀이었기 때문에, 막상 공식적으로 베드로의 무덤을 인정하려니, 너무 많은 '베드로의 무덤'이 생겨난 것이다. 베드로의 무덤에 대한 논쟁은 가이우라는 로마의 사제가 네크로폴리스의 한 무덤 옆에 이곳이 베드로의 무덤이라는 내용의 푯말을 세우면서 종식이 되었으며, 그 무덤이 현재 교황이 인정한 베드로의 무덤이다.
과연 '그 무덤'이 베드로의 무덤인지에 대해서는 고고학자들은 대체로 회의적인 입장이다.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심스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교황이 '그 무덤'을 베드로의 무덤으로 인정한 것은 엄밀한 검증이 부족했던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회의론이 반가톨릭파의 적대적인 음모론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 회의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바티칸 내부의 명망 높은 사제들이며, 바티칸의 신학 대학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공식적인 커리큘럼으로 하여 전 세계에서 유학 온 사제들에게 가르치기도 한다. 이러한 수업은 '베드로의 무덤이라는 것에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서 존중하여야 한다'로 결론을 낸다고 한다. [27]
따라서 가톨릭 역시 공식적으로는 베드로의 무덤을 공표하였지만, 이것은 엄밀한 고고학적 발표가 아닌 믿음의 천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베드로의 유해일 수도 있지만 아니다고 볼 개연성 또한 타당하다. 그럼에도 그렇게 결정된 무덤의 유골의 성별이나 나이가 베드로의 순교한 시점의 나이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5.2. 무덤에 대한 기타 사항[편집]
잘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원래 베드로가 매장되어 있던 곳을 볼 수 있는 투어도 존재한다. 바티칸 발굴 사무소로 신청서를 작성하면 투어를 할 수 있는데 현재도 발굴 중인 바티칸 네크로폴리스를 관람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발굴 현장이기 때문에 사진 촬영도 금지되어 있고 대단히 습한 환경이다. 그러나 투어가 끝날 때는 교황들의 지하 무덤 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나와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로 바로 들어가기 때문에 보안 검색대의 긴 줄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투어를 보다 보면 베드로의 무덤은 작은 틈새로만 보이는데 이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으로 발굴 시 위쪽에서 팠기 때문에 옆쪽에서 추가적으로 구멍을 내면 붕괴 위험이 있어 발굴을 중지했다는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사실 이는 지하 네크로폴리스 발굴의 흑역사와 관련이 있다. 처음 비오 12세가 임명한 발굴 총책임자였던 루트비히 카스 신부는 고고학에는 문외한이었고 고고학 박사학위를 딴 지 2년 된 안토니오 페루아 신부가 발굴을 지휘했다. 그러나 페루아 신부는 무작정 발굴에 착수해 베드로의 무덤이 있으리라 추정한 곳까지 파내려갔으나 베드로의 무덤은 없었다. 그리고 페루아 신부는 결국 베드로의 유해를 찾을 수 없음을 선언하고 판 내용물들을 폐기하기로 했다.
카스 신부는 페루아 신부가 판 흙더미에 유물이 있을 수 있음을 직감하고 보관해두었다. 마르게리타 과르두치 같은 고고학자들은 추가 연구를 통해 버린 흙더미에서 가이우스의 벽과 베드로의 유해를 찾았고, 바오로 6세는 이것이 베드로의 유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페루아 신부는 꾸준히 이것이 동물 뼈일 가능성이 있음을 주장해 공식적 인가는 받지 못했다. 이 유해가 진실된 사도 베드로의 유해로 선포된 것은 이후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의 제대 밑 무덤의 유골이 1세기경의 유골임이 밝혀져 사도 바오로의 유해의 진실성이 입증된 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서이다.
현재까지도 파 버린 무덤을 원상 복구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6. 기타[편집]
간과하기 쉽지만 베드로가 기혼자였다는 서술이 성경에 분명히 등장한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내용이 있고,[28] 바오로는 고린토 1서에서 "우리라고 해서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단 말입니까?(9:5.공동번역)"라고 말한 적이 있다. 다만 예수를 만나기 전에 결혼한 것이고, 오히려 그 당시에는 성인이 되고서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으니 문제 삼는 사람은 없다. 가끔 일부 개신교인들이 '가톨릭 초대 교황이 유부남이서야 되냐'고 하긴 한다. 그러나 성직자의 독신제는 가톨릭 교리가 아니므로 별문제는 없다.[29][30]
이스라엘에서는 틸라피아를 베드로 물고기(St.Peter's fish)라고 부른다.
북한을 세운 김일성의 부모는 개신교의 일파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였는데 김일성의 어머니 이름은 베드로에서 따온 강반석이다. 하지만 김일성은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기독교와 연을 끊었고 북한을 세운 뒤 주체사상을 만들어 다른 종교, 사상을 박해했는데 박해 대상에 기독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체사상 문서에도 나오듯이, 주체사상 내용에는 기독교 교리를 왜곡해서 차용했다는 흔적이 나타나는데, 탈북 후에 기독교 신자가 된 탈북민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굉장히 친숙하다고 하는 발언이 자주 나온다. 가짜 아버지(김일성/김정일)에게 속았다가 진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 기독교의 하느님을 믿게 되어서 너무 좋다는 발언도 보인다. 주체사상의 북한이나 기독교 양쪽 모두에게 당황스러운 발언.
베드로의 직업이 어부였다는 점 때문에 베드로는 또한 어부의 수호성인이다. 장 콕토가 빌프랑슈에서 어부들을 위해 예배당 건물을 재정비했을 때 베드로의 벽화를 그려넣었던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또한 독일에서는 낚시 중 월척을 낚았을 때 Petri Heil!이라고 하는데, Petri는 Petrus의 소유격이다. 즉 직역하면 '베드로 만세'라는 뜻.
예수를 3번씩이나 부인하고 경멸하기까지 한 일 때문에 가롯 유다 만큼은 아니지만 배신의 아이콘으로 통한다. 다만 베드로가 성질이 급하다는 것 때문에 다른 제자와는 달리 예수의 제자인 게 눈에 잘 뜨인 데다가 다시 예수를 만나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다시금 예수 앞에 세워진 것과 달리 가롯 유다는 배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때문인지 국내에서는 줏대 없이 오락가락하는 사람, 자기 주관 없는 사람을 빗대어 표현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바른정당 탈당사태때 황영철 의원[31] 이 하루에 3번씩이나 잔류 및 복당 여부를 번복하자 황베드로[32] 라며 까였다. 그래서 진지하게 경멸조로 배신자를 묘사할 때 쓰이는 유다[33] 와는 달리 베드로의 배신은 인간의 원초적인 나약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최후에 순교한 것까지 묶어 생각해 보면 그 나약하던 베드로가 신앙의 힘으로 결국 예수님을 따라 순교한 순교자가 되는 기적을 일으켰다는 긍정적인 예시로 여겨진다.
이 일화는 국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예수'혹은 '기독교'관련 유머 코드로도 자주 활용된다. 주로 예수와 관련된 글이 올라오면 "베드로야 내가 XX해야 믿겠느냐" 같은 레퍼토리로 댓글을 다는 식.
영-미어권의 피터, 불어권의 피에르[34] , 스페인어권의 페드로, 독일-스칸디나비아어권의 페터, 슬라브어권의 표트르 등의 이름은 모두 성 베드로로부터 유래된 이름이다.
한국 가톨릭 사제들의 세례명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35] 다만 베드로라는 세례명 자체가 약간 유행이 지난 느낌이라 최근에는 잘 사용하지 않아서 젊은 신부들 중에는 베드로가 생각보다는 적은 편이다.[36]
7. 대중매체에서[편집]
보통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의 매체에서는 이상하게도 약간 살집 있는 체형에 중년 이상의 나이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예수가 꽃미남으로 나오는 것에 비하면 참 안습. 원래 기독교 예술의 전통에서 12사도를 묘사할 때는 그리스의 철학자들을 모델로 한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현대에 와서는 중년 뚱보로 변형된 듯.[37]
매체에서는 예수에게 천국의 열쇠를 하사받았기 때문에 주로 천국의 문지기 이미지로 나오는 경우도 흔하다. 사도들 중에서도 매우 유명하고, 한 성깔 하는 데다 인간적인 면모도 겸비한 탓인 듯. 사후 세계에 관한 종교 유머에서는 단골 등장인물인데 특히 천국의 문을 지키고 있다가 악인이 얼쩡거리면 "너 같은 답이 없는 죄인이 어딜 감히 천국에 기어 들어와!!" 식으로 불호령을 내리는 건 거의 클리셰급.
Coldplay의 노래 Viva la Vida 중에선 'St.Peter won't call my name'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성 베드로가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즉 나는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 유리 지바고를 맡았던 오마 샤리프가 베드로 역을 맡은 2005년작《성 베드로(San Pietro)》가 베드로를 중심으로 다룬 대표적인 영화다. 오마 샤리프는 그리스도인이었다가 이슬람교로 개종했는데,
퇴마록에서는 직접 등장하지 않고 작중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만 언급된다. 세계관의 특성상 가톨릭계 성인들은 죄다 영능력자인데 베드로는 예수의 대제자 보정을 받아서 그 중에서도 엄청난 능력자였다고 묘사된다. 무려 시몬 마구스를 발라버렸다! 시몬 마구스가 퇴마록 세계관에 끼친 엄청난 직접적 영향(...)을 생각하면 과연 대단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물론 시몬 마구스의 엄청난 능력에 베드로 역시 항상 성령이 함께함에도 불구하고 몹시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세인트 영멘에서는 훤칠한 키에 수염난 곱슬머리 청년으로 나름 미화되어 나온다. 성격은 세월이 지나서 많이 부드러워진 모양인지 예수(세인트☆영멘)와 동생인 안드레아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하고 농담도 잘 하지만, 성경의 내용을 반영한 듯 한 성깔 할 때도 있다.[39] 그래도 기본적으로 유들유들하고 능청맞게 나온다.[40] 수능 에피소드에서는 분명 순교도 했는데 성인 시성이 되지 못해 우울해하는 잔 다르크를 위로하기 위해 초대 교황인 본인이 후배(...)들을 까면서 자작 성인상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는 대접이 상당히 안습하다. 배신자인 이스카리옷 유다는 해당 작품의 진주인공이고, 열심당원 시몬은 본인의 이름을 딴 단독 넘버가 있는데 베드로는 체포된 예수를 구하려 하는 장면과 예수를 세 번 부정하는 장면, 마리아와 부르는 듀엣곡 정도가 전부라서. 그래도 나머지 아홉 사도들에 비하면 그럭저럭 눈에 띄는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