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유니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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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KBO 리그에 소속이었던 프로 야구단. 삼청태현의 역사를 마무리한 구단으로 네 곳 중에 가장 긴 역사를 기록했던 구단이자[13]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14] 구단이었다. 연고지는 인천광역시, 경기도, 강원도 → 무연고[15] / (비공식)경기도 수원시.[16] 1996년 취임해 팀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 한 김용휘 단장[17] 이하 구단 프런트가 개념이 넘친 현장 지원으로 명성을 떨쳤고, 역대 감독은 김재박-김시진이었다. 팀의 상징동물은 유니콘, 상징색은 녹색과 노란색.[18][19] 해체 이후 인적 자원과 지명권은 우리 히어로즈가 승계하였다.
역사는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부터 시작됐으며 현대 유니콘스로서의 역사만 따지면 1996년 창단, 2008년 1월 해체된 팀이다. 연고지는 인천광역시-경기도-강원도로 숭의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썼으나 1999년 시즌 종료 후 서울특별시로 연고지 이전을 선언했지만 서울에 정착하는 데에는 실패했고 결국 제2 홈구장으로 쓰던 수원 야구장을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임시 홈구장으로 썼다.
별명은 투수 왕국. 태평양 돌핀스 후기 시절부터 좋은 투수진을 여럿 배출하던[20] 이 팀의 팀컬러는 현대 유니콘스로 팀명이 변경된 이후에도 꾸준히 이어져 내로라하는 투수들이 정말 많았다. 정민태, 정명원, 위재영, 김수경, 임선동, 조용준, 장원삼 등이 현대 유니콘스에서 활약한 투수들이며 무려 4명의 투수신인왕을 배출했다. 1998년 김수경, 2002년 조용준, 2003년 이동학, 2004년 오재영.[21]
삼성 라이온즈와 더불어 쌍방울 레이더스와 포스트시즌에서 대결해본 두 팀 중 한 팀이다.[22]
2. 역사[편집]
자세한 내용은 현대 유니콘스/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역대 엠블럼[편집]
4. 유니폼[편집]
자세한 내용은 현대 유니콘스/유니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역대 등번호[편집]
자세한 내용은 현대 유니콘스/등번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해체 당시 선수단[편집]
자세한 내용은 현대 유니콘스/선수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역대 구단주[편집]
8. 역대 감독[편집]
1996년 현대 유니콘스로 팀이 개편되기 전까지는 대대로 팀 전력이 최약체를 벗어나지 못한 탓에 역대 정식 감독 중 재임 중 승률이 5할을 넘긴 감독은 김성근과 김재박 뿐이다. 팀의 간판이 네 번이나 바뀌었고 현대 시절을 빼고는 하위권을 전전했지만 구단 역사 전체를 통틀어 본다면 감독 교체는 생각보다 빈번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 LG 트윈스 등은 10명 이상의 감독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지만 삼미부터 현대까지 정식 감독의 숫자는 삼미 초대 감독인 박현식부터 유니콘스 최후의 감독 김시진까지 9명이었다. 이는 구단의 26년간의 구단 역사 중 절반에 육박하는 11년간 김재박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던 영향이 크다. 물론 현대 시절을 빼고 삼미부터 태평양까지만 친다면 성적 부진으로 인한 감독 교체가 꽤 잦았다고 볼 수 있다.
9. 역대 선수[편집]
현역 선수 및 기타 야구인으로 활동 중인 경우에는 비고란에 표기하였다.
2024-05-01 16:11:48 기준 현재 남아있는 현대 출신 현역 선수들은 총 4명이다.[33]
9.1. 투수[편집]
9.2. 포수[편집]
9.3. 내야수[편집]
9.4. 외야수[편집]
9.5. 역대 외국인 선수[편집]
- USA: 미국
- DOM: 도미니카 공화국
- VEN: 베네수엘라
10. 역대 성적(삼미, 청보, 태평양 시절 포함)[편집]
10.1. 역대 개인 성적[편집]
개인 커리어 전체가 아닌 삼청태현 소속이었을 때의 성적이므로 1982년부터 2007년까지의 기록만 서술한다.
10.1.1. 통산 성적[편집]
10.1.1.1. 투수[편집]
10.1.1.2. 타자[편집]
10.1.2. 단일 시즌[편집]
굵은 글씨는 역대 최고 기록.
10.1.2.1. 투수[편집]
10.1.2.2. 타자[편집]
10.2. 역대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편집]
11. 응원가[편집]
11.1. 공식 응원가[편집]
1996년 창단 때부터 마지막 시즌인 2007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응원가를 부른 사람은 디지몬 어드벤처 OP를 불렀던 홍종명이라고 한다. 출처
한 때 디시인사이드 야구 갤러리에서 응원가 관련 게시물의 댓글에 누군가가 '홍서범-조갑경이 부른 것 같다'라고 개인적인 의견을 적은 것이 갤러리 내에서 와전된 후 꽤 널리 퍼져 사실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다. 게다가 익히 알려져 있는 것처럼 홍서범은 LG 트윈스가 지면 다음날 집안 분위기가 개판이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LG 트윈스의 광팬이다. 때문에 1996년 창단 당시 현대 구단에서 거액을 제시하며 응원가 녹음 제안을 했다고 하더라도 LG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한 홍서범이 수긍을 했겠느냐는 의견이 있다.
서울 히어로즈 창단 초기에는 이 응원가의 현대! 유니콘스! 부분을 최강! 히어로즈!로 바꿔서 부르기도 했으나 원곡의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고 여러 논란들이 겹치며 폐기처분돼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
11.2. 비공식 응원가[편집]
자세한 내용은 연안부두(노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79년 혼성그룹 김트리오가 발매한 대중가요.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부터 사용돼 인천 프로야구 연고팀을 상징하는 응원가인 만큼 현대 유니콘스도 이 응원가를 사용했었다. 전신 태평양 돌핀스 인수 후에도 전통을 이어받아 연안부두를 비공식 응원가를 사용했었고 2000년 연고지 이전 후로는 당연하게도 쓰이지 않았다. 여담으로 전신 팀 중 하나인 삼미 슈퍼스타즈 매각 당시와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지 이전 당시 성난 인천 야구팬들은 야구장 앞에서 연안부두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었다.
12. 역대 캐치프레이즈[편집]
- 1996년 ~ 1997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60]
- 1998년: 도전! '98!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1999년: 도전! 2연패!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0년: 정상 새천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1년: 정상 2001!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2년: 도전 2002!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3년: 새로운 도전! 승리의 이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4년: 불패신화! 끝없는 도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5년: 멋진 승리, 끝없는 도전!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6년: 도전! 열정! 투혼!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 2007년: 새로운 각오! 새로운 신화! 막강 현대! 최강 유니콘스!
13. 사건 사고[편집]
자세한 내용은 현대 유니콘스/사건사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 마스코트[편집]
유니콘을 마스코트로 했으며 유니와 코니 둘이서 등장했었다.
또한 말 인형탈을 쓴 사람과 대결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2007년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등장하지 않는 줄 알았으나...
2022년 올스타전에 오랜만에 등장했다.
15. 인기[편집]
단기간에 4번의 우승을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비인기 구단이었다.
사실 현대도 1995년 말 태평양을 인수해서 인천에 터를 잡고 있던 1999년까지는 인천에서 인기가 꽤 높았던 팀이었다. 인천에 계속 살았다면 달랐겠지만 2000년 1월 명목상의 연고지 서울을 가기 위해서 인천 연고권을 신생 창단팀인 SK 와이번스에 넘겼고 경기도 수원시를 임시 연고지로 삼아서 경기를 했다. 그러니 수원 주민들은 현대 유니콘스를 그저 우리 동네에 잠깐 있다가 서울로 갈 팀으로 생각 할 수 밖에 없었기에 당시 수원 야구장은 늘 비어 있었다.[61]
16. 팬[편집]
2000년대 이후부터는 인기 구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팀으로 전락했지만 그 전까지는 이 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꽤 있었고 유명인 중에서도 현대 팬을 자처하던 이들이 있었다.
2000년 연고지 이전 이후에도 줄곧 이 팀을 응원했던 유명인으로는 가수 겸 펀드매니저로 활동했던 김광진이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인천광역시 출신의 배우 윤철형도 이 팀의 열성팬이었고 인천 출신인 류현진[62] 또한 과거 이 팀의 어린이회원이었다. 기사에 나오는 두 번째 사진을 보면 친형 류현수씨와 함께 유니콘스 어린이회원 모자 착용 및 유니폼을 입고 있다. 류현진과 동기생인 이재원도 이 팀의 어린이회원이었는데 인천 연고팀 소속의 프로 선수가 되고 나서 현대 구단이 해체되니 만감이 교차했다고 자신의 미니홈피 다이어리에 쓰기도 했다.
반면 삼미 시절부터 이 팀의 열혈 팬을 자처했던 개그맨 지상렬, 염경환, 이혁재 등은 2000년 연고지 이전 이후 신생팀인 SK 와이번스로 응원팀을 옮기게 된다.
17.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지 않았다면?[편집]
야구계에서 2007년은 그야말로 눈물의 한 해라고 할 만하다. 현대 유니콘스의 해체와 동대문야구장의 철거라는 한국 야구의 양대 비극이 모두 2007년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적인데, 바로 다음해인 2008년, 한국 야구는 베이징 올림픽 우승이라는 희대의 빅이벤트 속에 엄청난 팬덤 증가와 중흥을 맞이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니콘스 매각을 진행했다면 프로야구단 인수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과 여론의 추이는 2007년보다 높았을 거라는 푸념이 있다.[63]
하지만 이미 이 시기에는 KBO가 오랫동안 모아왔던 야구기금을 유니콘스를 대신 운영하는데 다 털어먹었기에 여력이 소진된 상황이었고[65] , 여기에 발전기금으로 끌어다 쓰던 유니콘스 구단측은 끝끝내 플로리다 전지훈련을 가는 등 말년의 쌍방울 레이더스나 해태 타이거즈처럼 뼈를 깎는 인건비 절감 노력을 하긴커녕 기존에 쓰던 예산을 절감하려는 노력도 아예 하지도 않고, 야구계 전체의 돈을 탕진해서 자기들 성적을 내려 한다는 인식이 박힌 다른 구단들로부터 시선이 싸늘해진 상황이었다. 2007년 시즌 말의 상황은 그야말로 급박했으며, 더이상 시간을 끄는 건 그냥 불가능했다. 게다가 결국 유니콘스가 해체되어 7개 구단 체제가 되면 '이참에 우리도 해체할까?'라며 추가로 해체를 검토하고 있다는 구단들이 있다는 루머는 파다하게 퍼져 있었고 그렇다면 리그는 순식간에 쪼그라들 상황이었다. KBO가 센테니얼의 창단 의사를 거부할 수 없었던 건 이런 이유가 크게 작용했을 수 있다.
사실 2008년의 프로야구 인기의 부활[66] 에는 오랫동안 야구계에 그림자를 드리웠던 유니콘스 문제가 해결된 것도 영향이 있었고, 만약은 모르는 것이지만 이 문제가 계속 되었다면 2008년 이후의 인기부활이 가능했을지는 불명확하다.[68] 이후 히어로즈 구단이 한 동안 메인스폰서를 구하는데 애를 먹은 것에서 볼 수있듯, 리그의 인기증가를 통한 경제적 효과가 기업에 얼마나 이득이 될 것이며, 기업이 이를 체감하고 투자를 결정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당시 KBO는 지나치게 일찍 협상사실을 공개하거나 기존 구단과의 물밑협상을 거치지 않는 등 매각 협상에서 많은 잘못을 저질렀으나, 이미 야구계의 여력은 소진된 상태에서 언제 또 다시 온풍이 불지 알 수없는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다른 대기업들마저 듣도보도 못한 센테니얼에게 유니콘스를 넘기는 선택에 동의할 정도였던걸 생각한다면, KBO의 선택을 그저 매도하는 것은 부당할 것이다.
18. 여담[편집]
- 최훈이 GM에서 수원 램스의 기본 컨셉을 이 팀에서 가져왔고, 램스라는 이름은 세인트루이스 램스에서 따왔다. 다만 후속작인 클로저 이상용에서는 넥센 히어로즈 쪽을 참고한걸로 보인다.
- 2020년 시즌 종료 기준으로, 삼청태현의 구단역사에서 현대 유니콘스 시절만 따로 계산하면 KBO 리그에 존재했던 모든 구단 가운데 라이벌 삼성 라이온즈에게 역대 상대 전적에서 앞서고 있는 유일한 구단이 된다. 현대 시절의 삼성 상대전적은 121승 6무 94패.[69] 특히 조용준과 미키 캘러웨이는 해체된 지 시간이 좀 흐른 지금에도 삼성 팬들 사이에서 회자될 정도로 삼성 상대로 무시무시한 포스를 자랑했다.2004년 어린이날에 진행된 경기는 삼성에 9회까지 8-4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연장까지 끌고가서 끝내 14-10으로 승리를 가져갔는데 그 충격의 여파로 '창단 후 10연패'라는 흑역사를 열게 한 시발점으로 삼성팬들에게 회자되고 있고, 같은해 한국시리즈에서는 배영수가 10이닝을 노히트 노런으로 끌고 갔어도 결국 경기를 가져가지 못하게 한 것도 있는데다, 이 시리즈에서 배영수의 글러브 패대기 장면을 만들었던 당시 무명선수급 인지도였던 백업 전근표의 한 방까지 나왔다. 그러다보니 현대가 삼성을 상대로 루징시리즈를 기록했던 시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성팬들의 각인으로는 항상 안풀리거나 발목을 잡는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를 꼽아서 회자하곤 한다. 삼성팬 중에서는 이러한 임팩트가 워낙 강해서 현대 선수단은 유명선수 무명선수 신인 베테랑 할 것 없이 전부 삼나쌩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팬도 있었을 정도다. 정규 시즌 이외에도 2000년 플레이오프 현대 4전 전승, 2004년 한국시리즈 현대 4승 3무 2패 등 삼성은 현대만 만나면 힘을 쓰지 못했다. 여기에는 당시 유니콘스의 프론트가 동종업계 라이벌이었던 삼성과의 승부결과에 굉장히 민감했고, 이에 따른 추가적인 인센티브까지 부여해서 따로 격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70]
- 반대로 LG 트윈스에게는 삼청태 시절이나 현대 시절이나 꾸준히 약했다. LG가 비밀번호를 찍던 때에도 밀렸으며, 1994년 한국시리즈와 2002년 준플레이오프에서는 스윕을 당했으며, 199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우승했지만 상대전적에서 밀렸다.(7승 11패)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했던 2000년에도 가장 고전한 팀이 LG였다.[71]
- 특이하게 해체될 때까지 같은 범현대가인 KIA 타이거즈와 포스트 시즌에서 붙어본 적이 없었다. 2002~2004년, 2006년에 가을야구에 동반 진출을 한 적은 있었으나 모두 교묘하게 대진이 빗겨나갔다.[72][73]
- SK그룹이 2012년에 이 구단의 모기업이자 대주주인 하이닉스를 인수했는데, 만약 이 구단이 그때까지 해체되고 않고 유지되었다면 SK그룹은 하이닉스 인수를 망설였거나[74] 과거 프로농구처럼 두 개의 프로야구단을 운영하게 되는 난처한 상황을 맞이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참고.
- 2022 시즌 후 전유수, 이현승이 은퇴하며 현역으로 뛰고있는 현대 출신 선수는 오재일, 정훈[75] , 황재균, 장시환 4명만 남았다. 현대의 지명을 받은 선수까지 포함하면 임창민[76] 도 있다.
- 유독 한국시리즈를 쉽게 우승한 적이 없었다. 1998년 4승 2패로 6차전까지 치르고 나서야 우승했는데 이게 네 번의 우승 중 가장 적은 경기로 우승한 것이다. 2000년에는 3승을 먼저 거둬 손쉽게 시리즈를 가져가는 듯 했으나 두산에게 4~6차전을 내주면서 리버스 스윕 직전까지 갔으나 7차전을 이겨 4승3패로 우승하였다. 2003년 역시 SK와 승패를 주고받으며 7차전까지 치른 후에 우승하였고, 현대의 마지막 우승이었던 2004년에는 무려 9차전까지 치르고 난 뒤에야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 2023년 현재 구단을 승계하지 못하고 해체된 팀은 현대와 쌍방울 레이더스 두 개인데 묘하게 서로 접점이 있다. 현대는 1993년 쌍방울 레이더스 인수를 시도하기도 했고, 1996년 쌍방울의 첫 가을야구 상대는 현대였다. IMF로 선수들을 팔던 쌍방울로부터 박경완, 조규제 등 선수들을 뽑아오며 쌍방울의 몰락과 해체에 일조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돈이 없어진 현대가 결국 해체된 날은 쌍방울과 동일한 1월 7일이었다.
19. 관련 문서[편집]
- 삼청태현
- 키움 히어로즈 - 현대 유니콘즈 해체 이후 인적 자원을 이용하여 새롭게 창단하였다.
- SSG 랜더스 - 현대 유니콘즈의 연고 이전 이후 인천 야구의 계승자가 되었다.
- kt wiz - 현대 유니콘즈의 임시 홈구장인 수원 야구장의 새 주인이 되었다.
20.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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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랜차이즈 개시일(삼미 슈퍼스타즈 창단).[2] KBO가 인정하는 창단일. KBO는 구단이 인수될 경우 인수 이전 기록(우승 등)의 계승은 인정하되 창단일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다.[3] 전신 태평양 돌핀스의 법인 설립일로 추정. 당시 태평양화학은 1987년 10월 6일 풍한방직 측과 청보 핀토스 구단 인수 계약을 체결했다.[4] 삼청태현으로 일컬어지는 네 구단 중 유일하게 서울에서 창단식을 치렀다. 정확한 창단식 장소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여담으로 삼미 슈퍼스타즈는 신포동 인천상공회의소 건물에서 창단식을 했고 시즌 도중에 창단된 청보 핀토스는 숭의야구장에서 후기리그 개막경기 직전에 창단식을 치렀으며 태평양 돌핀스는 주안 옛 시민회관에서 창단식을 진행했다. 훗날 인천의 새 주인이 된 SK 와이번스는 SK그룹 소유 호텔인 서울 광장동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창단식을 치렀다.[5] 2001년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해 KIA 타이거즈를 운영하고 있었음에도 현대자동차 명의로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었다. 사실 2000년 현대그룹 계열분리 이전까지만 해도 현대자동차가 가진 지분율은 무려 45%였는데 당시 구단 대주주였던 현대전자의 영향력을 강화시키겠다고 현대그룹 측에서 개입하여 지분을 매각한 것이다. 만약 현대가 해체되지 않고 지금까지 존속했다면 야구계 현대가 더비, 야구식으로는 현대가 시리즈가 확고하게 자리잡았을 것이다.[6] 공식 연고지는 분명 서울이었으나, 기존 서울 연고 구단인 LG와 두산에 권리금을 지불하지 못해 연고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쉽게 말해서 돈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돈 없는 구단 이미지는 후신격 팀인 히어로즈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7] 홈경기를 치른 지역이기에 지역 내 마케팅은 이루어졌으나, 연고권은 없었다. 당시 경기지역 연고권은 SK 와이번스에게 있었다.[8] 이 당시, 목동 야구장은 아마 구장으로 인식됐던 시절에다, 고교야구 경기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이 홈구장은 사실상 후신격인 히어로즈가 받아내게 된다.[9] 연고 이전 후 수원 야구장에서 홈경기를 개최했고 1999년까지는 제2 홈구장이었다. 공식적으로는 현대가 서울로 가기 위해 연고지 이전으로 떠난 후 SK 와이번스가 창단되면서 이 야구장도 SK 와이번스의 제2 홈구장이 되었으나 서울 이전에 실패한 현대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고 SK 측의 배려로 결국 이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게 되었다.[10] 흔히 '원당 야구장'이라 불리긴 했는데, 정확히는 당시 현대전자 연수원 내에 있었던 야구장이었고 이름과 달리 소재지는 일산동구 설문동에 있다. 원당이라는 지명 자체가 일산이기도 해서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유니콘스 해체 이후에도 2008년부터 2009년까지 후신격인 히어로즈 야구단이 강진으로 2군을 보내기 전까지 잠시 이 곳을 빌렸고, 연수원 자체는 하이닉스를 거쳐 현재는 NH투자증권 산하 NH인재원 소속이 되었다.[11] 정몽헌 회장 사망 이후 공석.[12] 인천 연고 구단 역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13] 현대라는 이름으로 12시즌을 보냈는데 3시즌 반을 치른 삼미, 2시즌 반을 치른 청보, 8시즌을 치른 태평양보다는 확실히 구단 역사가 길다. 다만 인천 연고팀으로 있었던 시간으로 한정하면 4시즌 뿐으로 태평양보다 짧다.[14] 전신들은 하위권을 면치 못하는 약체였지만 현대는 막강한 전력을 앞세워 프랜차이즈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팀으로 기록됐다.[15] 공식적으로는 서울특별시가 연고지이지만 모기업이 재정난을 겪게 되면서 기존 서울 연고 구단인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에게 권리금을 내지 못했고 연고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16] 사실 당시 SK 와이번스가 현대로부터 인천 연고권을 양수하면서 경기도에 대한 연고지 권리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SK는 서울 입성 전까지 현대의 홈구장이 여의치 않은 만큼 서울 입성 전까지 쓰는 임시 연고지라는 명목으로 잠시 빌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현대 유니콘스가 재정난에 빠지게 되면서 서울 입성에 사실상 실패하게 됐고, 유니콘스측은 구단이 해체된 2008년까지 SK 측에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무단으로 수원시에 눌러 앉아서 수원 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했다. 현대 해체 이후에도 경기도 연고지 권리는 SK 와이번스가 가지고 있다가 2013년 수원을 연고지로 한 kt wiz가 창단되면서 자연스럽게 넘겨주게 되었다.[17] 2000년 5월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2003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전무에서 사장으로 승진했다. 사장이 되어서도 구단의 맡은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18] 공교롭게도 전신 구단 태평양 돌핀스가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썼던 상징색과 같다. 응원 깃발의 색깔은 창단 당시부터 줄곧 녹색이었으나 막대풍선 색깔은 창단 초기에 다소 바뀌었다. 원래는 노란색 막대풍선을 썼으나 하필이면 이 당시 LG 트윈스와 해태 타이거즈도 노란색 막대풍선을 사용했다. 게다가 199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노란색 막대풍선을 쓰는 팀끼리 맞붙다보니 색깔의 차별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한국시리즈 4차전에 붉은색 막대풍선을 사용하기도 했다. 결국 현대가 먼저 노란색을 버리고 1997년부터 해체될 때까지 하얀색 막대풍선을 사용했다. 하얀색 막대풍선에는 범현대가 계열 기업의 로고나 제품의 명칭이 광고 형식으로 삽입됐다. 구단 초창기에는 현대전자의 PC였던 멀티캡이나 현대오일뱅크의 로고가 새겨졌고 이후에는 현대증권이나 현대해상 로고가 써져있었다. 초록색을 상징색으로 삼던 팀이었지만 초록색 막대풍선은 창단 초창기 잠시 연두색 막대풍선을 쓴 이후로 한 번도 쓰지 않았다.[19] 하얀색 막대풍선 외에도 수원야구장 시대 초기 노란색 봉투에 초록색 글씨로 "막강현대"를 삽입한 비닐봉투를 응원도구로 쓰기도 했다. 비닐봉투 응원도구는 2008년 주황색 봉다리 열풍을 일으킨 롯데 자이언츠가 원조라고 다들 아는데 사실과 다르다. 비닐봉투 응원을 먼저 발명한 건 현대였다. 다만 현대의 해체 이후 히어로즈가 들어서지만 당시 응원단이고 팬이고 아예 현대를 부정하다시피 조용한 탓에 현대의 비닐봉지 응원은 사장됐다. 이후 베이징 올림픽 시절 기준으로 야빠들의 전성기가 들어설때 롯데가 이를 활용한 것이었다. 롯데가 사용한 비닐봉투는 흔히 편의점에서 주는 소형 비닐봉투 크기였고 현대의 비닐봉투는 크기가 조금 커서 어린이의 경우 봉지에 구멍을 뚫어서 옷처럼 입을 수 있는 정도였다.[20] 사실 인천/경기팜은 전통적인 투수 강세 지역이다. 현대의 전신인 삼미 시절에는 임호균이라는 국가대표 투수가 있었고 청보 시절에는 최계훈이 에이스 역할을 했다. 투수왕국의 이미지는 태평양 시절에 들어서면서 극대화된다. 강력한 투수들이 대를 이어 배출됨에도 팀 전력이 하위권을 면치 못했던 이유는 강력한 투수력에 비해 야수들의 타력과 수비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투수진이 기를 쓰고 1실점만 해도 타자들이 점수를 아예 못 내서 1-0으로 경기를 지는 경우가 부지기수. 쉽게 말하자면 투타의 불균형이 매우 극심했던 팀이 현대 이전까지 있었던 팀들의 전통적 팀컬러였다.[21] 이동학의 사례에서 보듯 2003년은 두각을 나타낸 신인 자체가 보이지 않은 신인 흉년의 해였다. 또 다른 신인왕 후보라 해봐야 이택근이 있었는데 이택근도 신인왕을 받을 성적은 전혀 아니었다. 조용준이 전성기는 짧았지만 한국시리즈 MVP를 받기도 했었고, 오재영은 싸융짱문오에 포함될 정도가 되긴 했어도 불펜에서 잘 활약해주고 있다.[22] 1996년 플레이오프에서 2패 이후 3승을 거두는 리버스 스윕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 삼성은 1997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쌍방울과 대결했다.[23] 1988~1993[24] 1994~1995[25] 강명구 현대엘리베이터 회장이 해체시까지 구단주 대행 역임.[26] 김진영 감독이 1983년 6월 1일 잠실 MBC전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 후 구속되고 자숙의 의미로 잔여 시즌을 감독대행 체제로 가게 되자 별안간에 팀 지휘봉을 잡았다. 그런데 14경기를 치르고 돌연 이선덕 코치에게 지휘봉이 가게 됐는데 이재환과 경동고 동문인 백인천이 급작스럽게 삼미에 선수 겸 코치로 이적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재환과 백인천의 사이는 매우 험악했고 이를 고려해 이재환을 한직인 2군 감독으로 내려보냈다.[27] 초대 감독을 맡았던 그 박현식 선생이 맞다. 구단 고문으로 위촉됐던 박 선생이 다시 지휘봉을 잡은 것 역시 백인천 때문이었다. 선수 겸 타격코치로 일하던 도중 간통죄로 인해 구속되면서 사실상 구단에서 퇴단 조치됐다. 그러면서 선수단 개편 차원에서 이선덕 코치에게 투수코치 임무만 맡기고 박현식 고문을 감독으로 다시 복귀시켰다. 그러나 자숙하던 김진영 감독이 복귀하면서 박현식 감독도 물러나게 된다.[28] 2020년 한화 이글스에 의해 깨질 뻔 했던 초유의 18연패 당시 감독대행. 1985년 3월 30일 구덕 개막전 승리 이후 내리 16경기를 패배하자 김진영 감독이 4월 29일 '조건부 휴가'라 쓰고 사실상의 퇴진이라 하는 절차를 밟으며 물러났다. 투수코치였던 신용균이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이름으로 치른 마지막 경기까지 팀을 지휘했다.[29] 삼미 슈퍼스타즈가 간판을 내리고 1985년 후기리그부터 청보 핀토스라는 이름으로 시즌을 치렀지만 후기리그까지만 팀을 지휘하고 퇴진하게 된다.[30]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뿌라와 으린 슨슈를 사랑하시는 그 분 맞다. 본인은 청보 감독 시절을 잊고 싶은 과거로 생각하는 듯 하다.[31] 1군 참여 2년차 빙그레 이글스에도 털릴 정도로 꼴찌를 기록한 감독이었지만 한 시즌을 풀로 채웠다. 리그 참가 6시즌 만에 처음으로 감독 교체 없이 한 시즌을 보낸 것은 이때가 처음. 물론 이미 구단의 모기업인 청보식품이 1987년 중반부터 상당한 경영난을 겪었기 때문에 감독을 바꾸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32] 태평양화학이 핀토스 구단을 인수해서 재편한 것이 1988년 시즌 개막 직전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도 감독을 바꾸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이름만 태평양으로 바뀌었을 뿐 청보 핀토스와 크게 차이가 없었고 결국 시즌 초반에 경질된다.[33] 오재일, 장시환, 정훈, 황재균 [34] KBO 신인 드래프트의 2000년 강원 지역 최초의 1차지명 선수[35] 前 야구선수의 좌완투수였던 최영완의 친형이다.[36] 본인이 영원한 삼성맨이라는 자부심이 강했기에 현대로 오자마자 은퇴를 선언해버렸다.[37] 2022년 키움으로 복귀하려고 하였으나 불발.[38] 2000년 투수 전업[39] 등록명은 스코트 쿨바였다. 다들 성만 등록명으로 쓰는걸 생각하면 특이 케이스.[40] 2007년 당시 75번을 달고 수비코치를 맡았으며 후신격 팀인 넥센 히어로즈의 제 3대 감독으로 부임하여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다시 올려놨다. 2016년 자진사퇴 후 2017년 SK 와이번스 단장으로 취임되었고, 2019년부터 2020년까지 sk의 감독직을 맡았다. [41] 2014 시즌에 외야수로 전향했다.[42] 히어로즈에서 은퇴. 정민태와 함께 팀의 프랜차이저 스타였던 인물이다.[43] 키움 히어로즈 소속기간은 2008~2009년, 2012~2020년[44] 前 야구선수 정수근의 친동생[45] 전기 6위, 후기 6위[46] 전기 2위, 후기 2위[47] 전기 6위, 후기 6위[48] 전기리그에서는 삼미 슈퍼스타즈로 활동.[49] 전기 6위, 후기 6위[50] 전기 6위, 후기 7위[51] 전기 7위, 후기 6위[52] 전기 6위, 후기 7위[53] 전체 5위[54] 2016년 두산 베어스가 93승을 기록하기 전까지 KBO 리그 단일시즌 최다승 기록이었다.[55] KBO 리그 단일시즌 승률 3위. 1위는 1985년 삼성 라이온즈의 70.6%, 2위는 1982년 OB 베어스의 70.0%. 다만 1985년과 1982년은 전후기리그로 시즌을 나눠 치르던 체제였기 때문에 1989년부터 제정된 단일시즌 체제로 한정하면 이 기록이 최고 승률 기록이다.[56] 페넌트레이스 2위였지만, 3위 팀 두산의 우승으로 최종 3위.[57] 페넌트레이스 3위였지만, 4위 팀 LG의 한국 시리즈 진출로 최종 4위.[58] 페넌트레이스 2위였지만, 3위 팀 한화의 한국시리즈 진출로 최종 3위.[59] 몬더그린 현상으로 인해 이 대목이 '최강희 눈이 커'라고 들리기도 했다. 불암콩콩코믹스에도 이 몬더그린을 사용했다.[계승] 태평양 돌핀스의 응원가를 계승했다[60] 창단 첫 해부터 해체될 때까지 이 캐치프레이즈는 변하지 않았다. 일종의 구단 기본 슬로건이 된 셈. 기본형 문구 앞에 뭔가의 낱말이 붙는 형태로 캐치프레이즈가 정해졌다.[61] 더군다나 당시 수원은 축구를 좋아하는 도시였다. 수원시민들은 1996 시즌부터 수원 삼성 블루윙즈 축구단이 많은 스타를 보유하며 우승도 많이 하고 축구계에서 힘을 썼기에 뜨내기에 불과했던 현대에 마음을 줄 수 없었다. 먼 훗날 수원에서 창단된 kt wiz는 현대 유니콘스의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서 수원을 확실한 연고지로 삼았고 2020년부터 강팀으로 자리잡게 되었지만, 이미 기존 구단들이 많은 팬들을 분산해서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KBO 리그 자체가 신규팬들이 거의 없는 리그로 고착화되고 있어서 kt wiz가 비인기 구단에서 벗어나기에는 갈길이 먼 상황이다.[62] 그 한화 출신의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선수 맞다.[63] 다만 많은 유니콘스 팬들이 바라는 구단 역사의 공식적 승계는 해당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대기업이 인수했다 해도 어려웠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난 7년간 구단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한 명목상의 모기업 하이닉스가 뜬금없이 나타나 인수대금을 내놓으라고 하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지기 때문이다.[64] 정몽헌 구단주의 아내[65] 야구계 인사 일부는 기존 구단들에게서 운영비를 추렴해서 현대가 1년만이라도 더 버틸 수 있게 하자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말 그대로 시간벌기밖에는 안 되는 미봉책일 뿐이지만, 어쨌든 그렇게라도 하고 봐야 했을 정도로 상황이 절박했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KT의 인수시도가 사외이사들과 주주들에 의해서 엎어졌듯이 이미 적자투성이인 프로야구판에서 자신의 기업도 아닌 남의 회사인 현정은[64] 의 '그룹'을 홍보하는데 당연히, 그 어느 기업도 자기 회사의 돈을 선뜻 내놓겠다고 나서는 이 하나 없었다.[66]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2008시즌 초부터 이미 프로야구의 인기는 관중수에서 입증되듯이 부활하고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은 그런 추세에서 부스터 역할을 했지 유일한 촉매 역할을 한게 아니다.[67] 대회 종료 후 축구장에 가고 싶은데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으로 서울팀이 없고, 대구 인천 광주에도 없다.[68] 당장 이웃종목의 K리그만 봐도 2002년 FIFA 월드컵으로 조성된 리그 붐을 받아먹을 준비[67] 가 되어있지 않았고, 기회가 왔을때 허무하게 날려먹어서 여전히 흥행에 큰 어려움을 호소하는 실정이다. 국제대회의 호성적은 리그 붐에 기여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리그의 앞날을 하루 아침에 밝게 비춰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69] 물론 삼청태현은 공식적으로 한 팀이기 때문에 이 상대전적은 현대 한정. 통상적이며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삼청태현의 통합 전적은 당연히 삼성한테 일방적으로 뒤진다. 공식적으로 현재 삼성 상대 승률이 가장 높은 팀은 47승 2무 47패로 승률이 5할인 kt wiz다. 두 번째는 178승 8무 182패로 승패마진이 -4인 SK 와이번스.[70] 투수조 조장인 정명원이나 정민태 같은 선수들.[71] 상대전적 8승9패까지 갔다가 마지막 2경기를 잡아 10승9패가 됐다. 2000시즌 현대를 상대로 가장 높은 승률을 올린 팀이었다.[72] 현대는 2002년에 LG 트윈스에게 준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고, 기아는 2003년에 SK 와이번스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패배, 2004년과 2006년에는 각각 두산 베어스, 한화 이글스에게 준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해서 두 팀이 포스트 시즌에서 붙을 일은 없었다.[73] 전신까지 포함하면 1989년과 1996년에 붙은 적은 있었다.[74] 단, 인수조건을 걸면서 야구단을 제외하고 하이닉스를 인수했을 수는 있다.[75] 현대 시절 1군 출장 기록은 없다.[76] 2008년 2차 2라운드 전체 11번으로 지명. 현대가 해체되며 선수단을 인수한 우리 히어로즈에 입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