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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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조선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정실이며 2대 황제 순종의 친모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사망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각각 하위 문서들 참고.
2. 이름과 휘호(시호 & 존호 & 후호)[편집]
본명을 두고 여러 설이 있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보통 아명만 있고 이름이 없는 경우가 흔했으며, 사대부가 여인들은 간혹 이름이 있었으나 출가외인으로 족보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는 것이 보통이어서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엄격한 남녀 구분으로 사대부의 여식 이름이 바깥 남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매우 꺼렸기 때문에 실제 이름이 있었는지 여부도 확인이 어렵다.
알려진 이름은 민자영이다. '자영'은 소설이 출처라는데 줄리에트 모리오의 《운현궁》, 정비석이 쓴 《소설 민비》 등에서 나온 작명이라는 것이다. 다만 정비석은 창작이 아니고 어느 연구자의 이야기를 들은 후 적었다고 했다.
다른 이름으로 유력한 것은 아영이다. 학술 자료의 기본으로 쓰이는 《열성왕비세보 열성황후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列聖皇后王妃世譜)에는 '아영'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여흥 민씨 집안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보니 바뀌었다"며 '아영' 대신 '자영'을 밀고 있다. 그 외에 아명은 항렬을 따른 '정호'(貞鎬)였다는 말도 있으나 여자의 경우는 남자와 다른 항렬자를 사용한 예도 있어서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아영"이란 이름이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물론, 지금 태어나는 여자아이들에게도 널리 사용되는 것을 봤을 때 이 설이 사실이라면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세련된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1]
본명이 '자영'이라고 사전에 등록된 경우가 많지만 정식 사료가 '아영'인 것으로 봐서는 별도의 학술적 근거보다는 《여흥 민씨 족보》에 따른 것으로 추정 중인데 왕비가 되고 나서 사후에 이름을 만들어 족보에 만들어서 올린 경우라고 볼 수도 있다.
휘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며,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2] 은 존호(尊號)이다. '명성'은 시호(諡號)이고 '태'는 황제의 정실 황후[3] 인 정후(正后)만이 받을 수 있는 황제/황후 신분임을 나타내며, 황제와 황후는 같은 글자를 받는 후호(后號)이다.
3.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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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호칭 및 추존과 책봉에 관한 주장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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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치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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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초상화와 사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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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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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계[편집]
8.1. 친가(여흥 민씨)[편집]
- 6대 조부 : 증 의정부 영의정 여양부원군 문정공(贈 議政府 領議政 驪陽府院君 文貞公) 민유중(閔維重)[4]
- 5대 조부 : 숭록대부 의정부 좌참찬 충문공(崇祿大夫 議政府 左參贊 忠文公) 민진후(閔鎭厚)
- 고조부 : 민익수(閔翼洙)
- 증조부 : 민백분(閔百奮)
- 조부 : 예조참판(禮曹參判) 민기현(閔耆顯)
8.2. 외가(한산 이씨)[편집]
- 외조부 : 이규년(李圭年)
- 외조모 : 증 정경부인 김씨(贈 貞敬夫人 金氏)
8.3. 시가(전주 이씨)[편집]
8.3.1. 배우자 / 자녀[편집]
- 남편 : 고종 광무 태황제(高宗 光武 太皇帝) 이재황/이형/이희(李載晃/李㷗/李熙)
9.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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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타[편집]
- 비숍 여사의 기록에 의하면 미국식 담배를 피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흡연에 남녀는 물론 미성년자 구분도 두지 않았고 궁녀들이 애연가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예 이상할 건 없다.
- 남편인 고종과 초반에만 데면데면 했을 뿐 금슬이 좋았으나 정작 후손은 순종 말고 없었다. 실제로는 4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릴 때 죽고 순종만 장성해서 살아남았다.[8] 이 때문인지 후궁들에 대한 질투가 엄청 심했다고 한다. 사실 어떤 왕비든 그럴 수 있기는 하나[9] 그것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이 조선시대의 왕실 법도였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남편 고종보다 더한 권력을 가진 여인으로서 남편 고종의 다른 아들들인 완친왕, 의친왕, 영친왕의 생모들을 궁궐에서 내쫓았다.[10] 본래 왕이 죽기 전에 후궁이 그것도 왕의 자녀를 생산한 후궁이 궐 밖에 나가 사는 일은 조선시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명성황후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11]
- 2018년 9월 구한말 왕실 의사이자 외교관이었던 호러스 뉴턴 알렌(1858~1932)에게 하사됐던 명성황후의 부채가 134년 만에 알렌 후손의 무상 기증으로 한국에 돌아왔다고 한다. [단독] 명성황후 부채 134년 만에 귀환…알렌 후손 기증
- 사진을 찍는 것을 극도로 꺼렸기에 사진이 아예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명성황후는 자신의 특집 기사를 쓰러 외국 특파원이 방문했을 때 사진이 찍히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이유는 1번째로 암살 위협이다. 당시 명성황후는 암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벽 5시까지 잠들지 않았으며[12] 침실이 여러 개 있었고 침실에도 비밀문이 있어 비상시 빨리 피신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외모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꺼린 것. 하지만 세자가 사진을 찍자 해맑게 기뻐했다는 기록, 이사벨라 비숍 여사에 따르면 사진찍기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사진 자체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13]
- 일본 측의 훼손설도 있는데 고종은 명성황후 사후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사진을 찾기도 했으며 끝내 찾지 못하였다. 고종이 없는 사진을 찾으려고 거액을 현상금을 걸리도 없으니 을미사변 직후 일본제국 측에서 을미사변의 흔적과 증거를 없애기 위해 사진을 고의로 없앴을 수도 있다. 일본제국의 사후 대응은 뻔뻔스러운 발뺌과 시치미이었고 흥선대원군이 사주한 국내 권력 다툼으로 인한 정변으로 꾸미려 하였으나 실제로는 미우라 공사를 주축으로 한 낭인들과 일본군 장교에게 시해되었다. 자기들은 아니라고 주장하려는데 한밤 중에 목격자도 없는 후미진 곳에서 조용히 암살한 것도 아니고 일본식 복장을 입은 인원 다수가 전투를 벌이며 일국의 궁전에 쳐들어가 낭인들에게 둘러싸인 왕비를 공개적으로 살해했고 그 때는 해가 솟아오른 여명의 아침이었다. 수많은 궁인들과 군인들, 심지어 서양인까지도 목격하는데서 일을 크게 벌였으니 일본제국은 최대한 은폐를 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하며 그 중 한 방법으로 그날 일본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명성황후의 얼굴이 나온 사진을 없애거나 훼손시키고 궁녀로 둔갑시키는 한편 일본인은 조선의 왕비를 죽인 적이 없다고 시치미 뚝 오리발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증거 인멸을 목적으로 살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에 주한 일본공사의 명령으로 궁궐 안에서 시체에 기름을 끼얹고 불태워버리기까지 했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고종도 못 찾을 정도였으니 확실하고 명확한 사진이 없는건 그렿다쳐도 명성황후를 직접 모셔서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상궁 등 궁인들이 광복 이후에도 살아있었다는데 위 3개 사진이 명성황후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근거도 없다는건 이상하기는 하다. 명성황후 사진 논란 관련 내용은 다음의 기사들을 참조하면 좋다.기사1 기사2기사3기사4기사5
11. 참고 문서[편집]
- 갑신정변
- 갑오개혁
- 경복궁 건청궁
- 고종
- 고종실록
- 김보현
- 김옥균
- 김좌근
- 김홍집
- 니콜라이 2세
- 대한제국
- 대한제국/황사
- 동학농민운동
- 매천야록
- 미우라 고로
- 민겸호
- 민승호
- 민승호 암살사건
- 민영익
- 민영환
- 민치록
- 박영효
- 별기군
- 서재필
- 손탁호텔
- 순명효황후
- 순정효황후
- 순종
- 순종실록
- 아관파천
- 여흥부대부인 민씨
- 운현궁
- 유길준
- 육영공원
- 윤치호
- 이사벨라 비숍 여사
- 임오군란
- 순헌황귀비
- 신정왕후
- 영친왕
- 을미사변
- 의친왕
- 이완용
- 조선/왕사
- 조선군 훈련대
- 조선왕조실록
- 조선책략
- 철인왕후
- 청일전쟁
- 최익현
- 통리기무아문
- 카를 베베르
- 호러스 뉴턴 알렌
- 홍유릉
- 황현
- 효정왕후
- 흥선대원군
- 흥친왕
12. 둘러보기[편집]
[1] 비슷한 예로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있다.[2] 두 글자씩 떼어내듯이 읽는다[3] 황제는 《예기》(禮記)에 따라 2명의 황후를 둘 수 있었으나, 정후와 차비(此妃)인 측후의 위계와 구분을 엄격히 했는데, 후호(后號)는 정후(正后)만이 받을 수 있다.[4] 그의 딸이 바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이다.[5] 혈연상 시조부는 남연군이다.[6] 혈연상 시아버지는 그 유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7] 항문이 막힌 기형아로 태어났다. 쇄항증(항문폐쇄증)으로 의심되는데 얼마 안가서 죽었다.[8] 이에 살아 생전 순종을 위한 제사 등에 아낌 없이 재물을 써서 사치했다는 말이 있다.[9] 조선시대에는 여자의 질투를 칠거지악 중 하나로 여길 만큼 금기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질투를 거의 혹은 아예 안 해도 문제삼는 것도 있다. 혜경궁 홍씨나 효정옹주도 남편들의 후궁이나 첩 문제 때문에 시아버지나 아버지에게 질투를 안 하냐고 질책받기도 했다.[10] 고종이 후궁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승은을 입은 궁녀가 있으면 그 다음날 소리소문도 없이 사라졌다는 야사도 있다. 순헌황귀비는 쫓겨났다가 을미사변 이후에야 다시 들어왔다.[11] 근데 사실 자녀를 생산한 후궁이 궐 밖에서 사는 경우가 아예 없지도 않았다.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나 철종의 후궁 숙의 범씨나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가 단적으로 그 예시를 보여준다.[12] 조선 궁궐의 아침 일과가 보통 새벽 5~6시쯤 시작되는 것을 감안하면 거의 밤을 샜다는 이야기가 된다.[13] 비슷한 예로 이토 히로부미도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암살을 두려워하여 조선에서는 자신의 사진이 나돌지 못하도록 조치해서, 원태우 의사나 안중근 의사도 목표를 특정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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