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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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문관 관료. 영조 말년부터 순조 초기까지 청명당, 벽파의 일원으로써 국정을 이끌어갔다.
2. 생애[편집]
김한록의 아들로, 1743년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영조 41년인 1765년 문과 급제했다.
여러 벼슬 중 요직인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교리도 지냈다. 노론의 중진으로써 1772년 홍문관 수찬 재직 중 친시파 성향을 가진 홍봉한을 탄핵하였으나, 이미 영조는 김귀주 등이 추천한 인사와 측근들은 갈아엎는 등, 홍봉한의 반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상소의 세가지 포인트는 질 낮은 삼을 왕에게 쓴 것, 왕의 다리 병 투병 중 송다 사용 거부, 당시 동궁으로 불린 정조를 겁박했다는 것이였다. 하지만 대세를 뒤엎지 못하고 역으로 갑산에 유배되었다.
정조 17년인 1793년 현 예천군인 용궁(龍宮)[1] 현감으로 복직했다. 지방을 돌고 중앙에서도 한직을 전전하다 순조 즉위 후 벽파의 득세가 시작되며 중추부 첨지사를 거쳐 예조판서로 승진했다. 시파 김조순의 딸과 순조의 혼인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조판서, 양주 목사에서 1802년 우의정에 임명됐다. 1803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려고 하자, 좌의정 이시수와 반대하다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
복권은 되었지만, 1804년 정순왕후가 다시 수렴청정을 하려 할 때 이시수가 간곡히 반대해 찬성할 수 없었다. 정순왕후의 사후 1805년 시파가 집권하면서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와 순조의 국혼 방해를 이유로 또 대사간 신헌조 등으로부터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후 경흥으로 유배가고 있었으나, 귀양 도중에 이원군에서 병사하였다. 사후에는 복권되었다.
3. 가족[편집]
- 조부 : 김운경(金運慶)
- 부 : 김한록(金漢祿)
- 부인 : 기계 유씨(杞溪 兪氏)
- 장남 : 김노정(金魯鼎)[2]
- 며느리 : 이규진(李奎鎭)의 딸
김운경의 손자, 김한록의 아들로 김한구는 그의 5촌 숙부이고, 정순왕후와 김귀주는 그의 6촌 사이다.
4. 여담[편집]
- 함경도와 인연이 상당하다. 함경도로 첫 유배를 갔고, 또 다시 함경도로 유배가다 함경도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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