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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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金榮希 | Kim Yeong-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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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60년 6월 16일 (63세)
부산광역시
별명
쌀집 아저씨
학력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 / 학사)
직업
PD, 기업인
경력
MBC 콘텐츠총괄부사장
더불어민주당 대한민국대전환 선거대책위원회 홍보소통본부장 (김영희C센터 센터장)
1. 개요
2. 활동
2.2. MBC 퇴사
2.3. 복귀
2.4.1. 평가 및 문제점
3. 제작 프로그램
4. 기타



1. 개요[편집]


대한민국방송프로듀서 출신 기업인.

별명은 '쌀집아저씨' 로 유명한데, 김영희의 첫 연출 데뷔작이자 히트 코너였던 '이경실의 도루묵여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검은 뿔테안경에 수염 정리 안 된 꾀죄죄한 김영희의 모습을 보고 이경실이 "명색이 PD면서[1] 행색이 꼭 쌀집아저씨 같다"며 놀려대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1960년에 부산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출신이며, 1986년 MBC 예능국에 입사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느낌표를 위시한 MBC 공익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만들어 온 것으로 유명하고, 나는 가수다를 히트시키면서 명실상부 MBC의 간판 예능 PD로 떠올랐다. MBC 예능 PD 실세였던 여운혁 CP도 김영희의 조연출을 하기도 했다.

공익예능 제작으로 유명하지만, 다른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바로 인물 소개나 정보 소개를 했을때 썼던 자막을 예능요소로 삽입했다는 점이다. 일본에 연수를 갔을때 일본 예능프로그램에서 자막을 예능요소로 쓰던걸 보면서 자막을 넣으면 생동감도 살리지 않을까 해서 자막을 집어넣기 시작했다고 한다.[2]

하지만 처음 시도했을때는 상황을 풀어놓는 식이나 PD가 코멘트를 내놓는 방식이 아니라 말 그대로 출연진의 말을 다 받아서 자막으로 만드는 식[3]이었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청각장애인이냐?"라는 식의 항의를 받는 등 반응이 썩 좋지 않았고 이 때문에 시말서를 쓰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 맡았던 TV파크도 SBS의 기쁜 우리 토요일에 밀려 4개월만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시말서를 써가면서도 자막을 꾸준히 집어넣는 시도를 한것이 타 방송사에서도 흥미롭다며 따라했고, 결국 자신이 맡았던 프로그램의 종적과는 별개로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자막을 넣는것이 유행이 되며 자막이 한국 예능 필수요소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2. 활동[편집]



2.1. PD[편집]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일밤 몰래카메라를 시작으로 칭찬합시다, 양심냉장고, 느낌표와 같이 웃음도 있으면서 감동을 주는 소위 공익예능의 개척자로 많은 찬사를 받으면서 대한민국 방송의 트렌드를 이끌었다. 이때가 김영희PD의 최전성기.

1996년에는 일밤의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서 전격적으로 김대중 총재-이희호 여사 부부의 인터뷰를 내보내서 장안의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특히 정장 입고 형식 갖춰서 하는 그런 딱딱한 인터뷰가 아니라 제작진이 새벽에 일산의 김대중 자택을 무작정 찾아가서 편한 차림으로 아침 산책을 하러 나오는 김대중을 잡고서 무작정 인터뷰를 딴 것이라서 더 큰 화제를 모았다. 김대중은 여기에서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발휘하면서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고, 이게 대중들에게 인간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면서 김대중은 이미지 개선에 성공하게 됐다.[4]

1998년 <21세기위원회>의 한 코너로 출발한 '칭찬합시다'는 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를 맞아 많은 국민이 실의에 빠졌을 때 남모르게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릴레이 형식으로 소개하면서 서민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한 MBC 간판프로그램.

1999년 1월별도 프로그램으로 독립하여 문화관광부장관상, 제26회 방송대상 수상, 한국방송진흥원 1999년 상반기 좋은 프로, 프로듀서 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각종 여론 조사에서 좋은 프로그램으로 선정됐다. 이 때부터 회사, 관공서,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사이버 공간 등으로 칭찬 신드롬이 번졌으며 칭찬에 인색한 우리 사회 분위기를 바꾸는 등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프로그램이다.

이어서 2004년 1기 느낌표가 공익과 감동, 웃음의 히트를 쳤고 CP겸 PD로 중간에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에 초청되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이경규 보고서 제작 때, 양재천 너구리 포획에 가까스로 성공했지만 그 과정을 촬영하지 못해 포획한 너구리를 다시 풀어주고 재포획한 장면을 촬영해 방영한 사실이 들통나 제작에서 물러났고 노창곡 PD가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후 MBC 최연소 예능국장을 맡았고, 당시 시청률이 안나왔던 무한도전 폐지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자기가 봤을때는 재밌는데 시청습관때문에 아직까지는 안봤다는 판단을 했다고, 다른거는 바꿔도 무한도전은 유지한다고 하며 유재석에게 무한도전이 괜찮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이후 무한도전은 아시다시피 MBC 간판 예능이 되었다.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회장을 맡으면서 한동안 현장 활동을 떠나 있다가 시청률 부진에 빠져있던 일밤에 구원투수로 복귀했지만 결국 좋지 않은 결말을 맞았다. 예전에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꼼꼼하게 짜여졌던, 감동코드가 복귀한 후에는 전과 같은 열화와 같은 호응을 받지 못했던 것. 그중에는 억지감동이 되어 버렸다는 아쉬움을 토로한 시청자들도 있었다. 시청자들에게 교훈적인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양질의 작품을 만들고자 한 의도와 다르게, 인위적이고 교조적인 편집, 기획이라는 비판을 받고, 결정적으로 "시청률"이 좋지 않았다. 시청률만 좋았다면, 인위적이고 교조적철저하게 짜인 교훈과 감동의 드라마로 평이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세상의 인심이니..

결국 뜨거운 형제들로 100% 웃음에 전념해보기도 하고, 2011년 우리들의 일밤으로의 개편 및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를 직접 연출하면서 다시 빛을 발할 기회를 맞이했지만, 방송회차 3회만에 터진 김건모 재도전 사태당초 설정한 원칙을 저버린 것이란 비판을 받으며 파장이 커졌기 때문에 이후 방송 3일만에 경질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의 자리는 신정수 PD가 이어받았으며, 제작 일선에서 물러나 남미로 연수를 다녀왔다. 11/5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손교수와 토크를 나눴다. 회사에서 오가다가 맨날 얼굴 보는데 각잡고 토크하려니 서로 쑥쓰쑥쓰.(...) 남미를 다녀와서 소금사막(우유니 사막)이라는 책 한 권을 내고 또 아프리카 세네갈로 떠날 거라고 한다. 방송에서 나온 얘기로는 내년 초에 뭔가 하나 해보려고 기획 중인 듯. 그리고 나가수 김건모 재도전 사태에 대해 술회하길 만약 또 그때 같은 상황이 되면 재도전 기회를 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가수다를 재정비하기 위해 나가수에 다시 합류한다고 한다. 정확한 일정은 알 수 없지만 일밤이 한달 정도 휴식기를 가진 후 재출발을 할 때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2012년 4월 22일 나는 가수다 2의 2012년 4월 29일 오프닝쇼 방송을 위한 녹화로 재출발을 시작하였다. 라인업은 역시 첫 시즌때만큼 화려하여 역시 김영희 PD답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심지어 헤비메탈 록그룹 백두산까지 섭외했다. 나가수에서 YB자우림이 등장하면서 그와 비슷한 연대의 록밴드인 체리필터, NELL, 크라잉넛 등의 섭외가 이뤄질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지라 백두산의 섭외는 더욱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광탈을 해서 그랬지만... 그렇게 나가수를 부정적으로 보던 이은미를 돌아서게 한데다가 나가수로 인해 상처를 많이 받아 다시 출연하지 않을 것으로 보였던 김건모까지 콘서트 장을 습격하여 팬들과 함께 나가수 출연을 외치는 등 가수 섭외를 위해 몸을 던지면서 삼고초려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사실 나는 가수다를 처음 시작할때도 못하겠다고 도망다니는 윤도현을 찾아 서울 도심을 숨바꼭질하고 다녔고, 새벽에 귤을 싸들고 찾아갈 정도로 열정이 깊었고 맨 처음으로 점찍었던 이소라를 섭외하기 위해 몇번이고 찾아갔던데다 시즌2에서 정엽을 다시 섭외하기 위해 새벽 2시까지 5시간 동안 라디오 방송을 하는 곳 앞에서 죽치고 기다리는 등 가수 섭외만 할 수 있으면 정말 죽자살자 뛰어다닌 것으로 유명했다. 새벽까지 기다렸다고 해서 나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얼이 새벽 3시에 하는 라디오는 녹방이다. 상식적으로 새벽 그 오밤중에 나얼이 출근해서 생방을 할리가 없지(...) 그렇다고 녹방을 새벽에 하는 건 더 말이 안되고, 정엽의 푸른밤이 일부 요일에 12시~2시 생방송을 하기 때문에 이 시기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찌보면 정엽은 시즌1에서 험한꼴을 당한데다가 시즌1 가면 갈수록 자기 스타일과 안맞는 것이 드러났음에도 설득에 성공했으니 대단한 건 대단한 거지만...

하지만, 저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가수 2는 5%대의 저조한 시청률로 마감되었다. 나가수 폐지론이 두번이나 불거져서 차기 시즌을 기획중이라고 반박하기도 한 걸로 미루어 김영희 PD의 MBC내 입지가 약해진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지만 아직은 모를 일이다. 나가수 2의 종영 이후 중국 후난위성방송에서 방영을 시작한 중국판 나가수를 위해서 1주일간 중국을 방문해서 제작 자문을 해주었다고 한다.

결국 MBC에서 나가수의 차기 시즌은 없다고 선언하면서 김영희 PD의 입지가 좁아진 것이 확정되었다.(...)


2.2. MBC 퇴사[편집]


나가수 폐지 이후 나가수 출연 가수들의 주례를 봐주는 것으로 전해졌다. 백지영-정석원 커플의 결혼식에도 주례로 나섰으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보다 앞서 국카스텐의 기타리스트 전규호의 결혼식에도 주례를 섰다고 한다. 이러다 나가수 미혼 가수들 주례 러쉬.

2014년 2월, MBC의 차기 사장 공모에 응한 것으로 드러나 충공깽에 빠뜨렸다. 일단 여론은 쌀집아저씨의 사장 도전에 긍정적인 기류이긴 하지만 과연 현재의 MBC 상황에서 그가 사장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설마 사장 되시면 나가수 부활하는 거유? 하지만 김종국(기자) 전 MBC 사장과 함께 최종후보에서 탈락, 2014년 4월 10일 MBC에 사표를 제출했다. 관련기사.

이후 중국 방송시장에 진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중국 현지에 외주 제작사 비앤아르(B&R)를 설립하여 제영재, 이병혁, 김남호PD인 후배PD와 함께 <폭풍효자>를 시작으로 총수익 800억원, 순수익 200억원을 벌어들이며 큰 성공을 거뒀다. 관찰 예능이 흐름을 타며 중국 예능의 판을 바꾸기도 했다. 또한 미가미디어라는 회사를 중국에 설립하기도 했는데, '미가'의 뜻은 다름아닌 쌀집.(米家) 하지만, 2016년 11월 갑작스레 불어닥친 ‘한한령’(한류제한령)을 피해갈 순 없었다. 그는 이제 3년여 동안의 중국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한중합작시스템을 모색 중이다.


2.3. 복귀[편집]


3년만에 중국 생활을 정리하고 2018년 11월 9일 MBC 신임이사로 내정되었다. 아직은 승인받기전이지만 예정된 조직 개편에서 신설될 콘텐츠 제작 부문 총괄(부사장급)을 맡게 된다. 예능본부로는 돌아오지 않을 방침.[5]

MBC는 콘텐츠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프로그램 제작과 편성, 광고, 홍보, 사업부서가 기획 단계부터 협력하는 방향으로 조직개편을 준비하고 있는데, 신임 이사 선임이 제작 경쟁력 확보를 위한 다양한 조치 가운데 하나임을 분명히 했다.

취임 후 김영희 부사장은 보도 자료를 통해 “신임 이사 선임과 더불어 조직 개편 이후에도 콘텐츠에 대한 투자 확대를 지속할 계획”이라며 “이를 위해 강도 높은 구조 개혁을 병행할 예정”이라고 밝혔으며, “명예퇴직 실시, 임금제 개편 추진, 조직 슬림화 등 혁신적인 내부 개혁을 실행할 예정”이라며 “콘텐츠 중심의 글로벌 미디어 그룹으로 재도약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겠다”라고 부연했다. 관련기사


2.4. 이재명 캠프 합류[편집]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2021년 12월 2일 김영희 전 MBC 콘텐츠총괄부사장을 민주당 대선 선거대책위원회로 영입했다.[6] 민주당은 김 전 부사장에게 홍보소통본부장이라는 직함을 부여했다.

이후, 2021년 12월 3일 홍보소통본부의 별칭 김영희C센터가 출범하고 센터장으로 임명되었다.

앞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도 김 전 부사장 영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김 전 부사장이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택한 셈. #[7]

2022년 4월 14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오하근 순천시장 후보의 후원회장으로 맡았다.#

2.4.1. 평가 및 문제점[편집]


그러나 이재명 캠프로 간 이후, 기대에 못미치는 홍보능력과 특히 파격을 넘어 충격(...)적인 종이 공보물 미간행, 나도가수다 개최 등 요즘 트렌드에 부합하지 못하는 바람에 국민의힘 지지층에서는 '우리 쪽으로 안와서 다행이다'라는 식으로 안도하고 있다. 반면에 이재명 지지세가 높은 클리앙이나 DC 이재명 마이너 갤러리에서는 혹평을 듣고 있다. 이 중 종이 공보물 미간행에 대해서는 이재명 후보의 범죄 전력을 굳이 알리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종이 공보물 제출 여부는 후보자의 재량이긴 한데, 이 경우에는 공보물의 2면에 해당되는 범죄내역, 재산 내역, 세금 납부 내역 등을 별도로 제출하여야 한다. 즉 어찌 되었든 범죄 내역을 담아야 한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탄소중립'을 위해 종이인쇄물 발행을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미 2018년 11월 부사장이 됐음에도 MBC는 2019년 965억 적자라는 저조한 실적을 냈고, 정치권 참여에 대해 MBC 제3노조도 비판한 바 있다(#) 덕분에 '어둠의 국민의힘 선대위원장' 내지는 '이준석의 트로이의 목마' 라는 조롱만 듣게 되었다.

이재명 후보의 대선 포스터와 유세차 디자인도 '롯데 사랑방선물'을 방불케하는 ㅇ ㅈ ㅁ 풍선디자인과 괴랄한 센스로 인해 또 욕을 들어먹었다. 그리고 마치 간첩신고를 연상케 하는 111 포스터에 무려 '중국인'의 사진을 차용[8]하는 간 큰 행적을 선보여서 지지자들을 다시금 난감하게 만들었다.

전반적으로 홍보 능력에서 큰 한계를 보이면서 과거의 명성은 그저 이름일 뿐 시대에 뒤쳐진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크리스마스 캐럴 영상은 진부하고 유치하며[9], 글로벌 해돋이는 무의미하고, '나도가수다'는 자신의 과거 인기 프로그램 울궈먹기, JM투데이는 그간 아무 기여도 없다가 선거 막판에 올라탄 언론인들 자리 만들어주기, 첫 TV 광고인 셀프디스 광고[10]를 비롯해 자신보다 경력이 훨씬 적은 국민의힘의 젊은 홍보팀이 만든 광고들보다 질적으로 수준 차이가 나는 광고의 퀄리티 등으로 인해 이재명의 낙선에 혁혁히 기여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11]

2.4.2. 김영희C센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영희C센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제작 프로그램[편집]



4. 기타[편집]



[1] 당시에는 방송국 PD는 대학물 먹은 엘리트로 취급되었다.[2] 1960년대-90년대 당시에 활동했던 당대 예능PD들이 그렇듯이 김영희도 일본방송의 영향에서 그리 자유로운 인물은 아니다.[3] 사실 일본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도 출연진의 대사 비중이 높기 때문에 벤치마킹을 한 이상 당연한 수순일지도.[4] 유력 정치인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사실상의 첫 사례이자 성공사례다. 당시만 해도 김대중의 이미지는 너무 딱딱하고 저항적인 야당 총재의 모습이었는데 예능 프로그램 출연으로 이것이 불식된 셈이다. 김대중의 성공 이후 일부러라도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본인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하려는 이미지 메이킹 사례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5] 예능본부의 경우 나 혼자 산다, 전지적 참견 시점 등이 시청률을 하드캐리 중이며, 제작진의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는 중이라 김영희 PD가 돌아와도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미미하다.[6]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해 민주당계 정당에는 정동영, 최문순, 박영선, 신경민, 박광온, 노웅래, 한준호 등 MBC 출신 인사들이 전통적으로 꽤 많았다. 보수정당에는 KBS 출신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물론 KBS 말고 MBC, SBS 출신도 많이 있다.[7] 다만, 이후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홍보미디어본부장에 선임된 것을 보고 "만약에 갔으면 내 자리가 저기였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8] 저작권은 없는 중국인 사진이어서 무단도용은 아니다.[9] 게다가 영상 말미에 자신이 마이크를 잡고서 다들 수고했다고 외치는 장면을 굳이 삽입했다. 후보가 주인공이 되고 돋보여야 하는데 굳이 자신이 제작했다고 시그니처를 남긴 장면.[10] 반면 윤석열 후보의 첫 TV 광고는 밝고 긍정적이며 화사한 분위기에 일반적인 TV 광고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높은 퀄리티를 보여줬다. 셀프디스 광고가 처음 나왔을 때 지지층들의 의견은 반으로 갈렸지만 일단 캠프에서 잘 만들었다고 밀고 나가니 반신반의하면서도 마지못해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후 광고들을 보면 전반적으로 어둡고 칙칙한 톤앤매너로 만들어 이재명의 부정적 이미지를 오히려 배가시키고 말았다.[11] 지지층에서는 대선 패배 이후 어떻게든 손혜원을 홍보본부장으로 데려왔어야 했다고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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