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 슈나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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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 슈나이더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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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세자르 영화제
파일:cesarawards.png
여우주연상


제1회
(1976년)


제2회
(1977년)

-

로미 슈나이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야)


아니 지라르도
(Docteur Françoise Gailland)

제3회
(1978년)


제4회
(1979년)


제5회
(1980년)

시몬 시뇨레
(마담 로자)

로미 슈나이더
(어떤 이혼녀)


미우 미우
(밤이여 안녕)






로미 슈나이더
Romy Schneider


파일:로미 슈나이더 전시회 프로필.jpg

본명
로스마리 막달레나 알바흐
Rosemarie Magdalena Albach
출생
1938년 9월 23일
독일국 [1]
사망
1982년 5월 29일 (향년 43세)
프랑스 파리
국적
[[독일|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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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프랑스|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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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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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62cm
직업
배우
활동
1953년1982년
부모
아버지 볼프 알바흐-레티
어머니 마그다 슈나이더
형제
남동생 볼프 디트리히 알바흐(1941년생)
배우자
/파트너

알랭 들롱(1958년 – 1963년)
하리 마이엔(1966년 결혼 – 1975년 이혼)
다니엘 비아시니(1975년 결혼 – 1981년 이혼)
롤랑 페탕(1981년 – 1982년)
자녀
다비트 크리스토퍼 마이엔(1966년생)[2]
사라 막달레나 비아시니(1977년생)

1. 개요
2. 생애
2.1. 데뷔 전
2.2. 데뷔 후
2.3. 사망
2.4. 사후
3. 출연작
4. 여담



1. 개요[편집]


독일, 프랑스의 배우.

세자르상과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을 수상했다.

2. 생애[편집]



2.1. 데뷔 전[편집]


나치 독일 합병 하 에서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으며, 친할머니와 부모님 모두 배우였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계였으며 어머니는 독일인이었는데, 가족 모두가 나치당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로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족은 어머니 마그다 슈나이더의 고향인 바이에른 베르히테스가덴으로 이사하는데 이 곳은 아돌프 히틀러의 별장인 베르그호프가 보이며 켈슈타인하우스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할머니 로사 알바흐-레티는 히틀러의 공식 후원자이자 오스트리아 조국전선의 당원이었으며, 아버지 볼프 알바흐-레티는 독일노동전선의 일원이었고 나치 집권 체제 하에서 꾸려진 '신의 은총을 받은 이들의 목록(Gottbegnadeten-Liste)'이라는 친 나치 성향의 병역 면제 예술인들에 포함되었다. 어머니 마그다 역시 나치 선전부에 의해 세금 감면을 받았으며 마르틴 보르만과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로미는 평생 어머니가 히틀러와 성적인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3] # 훗날 로미는 자녀들에게 히브리식 이름을 지어줌으로서(다비트, 사라) 나치 최측근으로 자신이 누렸던 특권에 속죄의 뜻을 표했고, 이후 독일의 전쟁범죄를 비판하는 영화에 출연했다.

아버지 볼프의 외도로 로미 슈나이더의 부모님은 1945년 이혼했고 어머니가 로미와 남동생의 양육권을 가져갔다. 로미는 어머니의 재혼 이후인 1948년 기숙학교에 입학해 데뷔하기 직전인 1953년 7월까지 재학했다.

2.2. 데뷔 후[편집]


가족의 영향을 받아 늘 배우업을 동경하며 자랐던 소녀 로미 슈나이더는 1953년 9월 15세의 나이에 영화 《흰 라일락이 다시 필 때》를 통해 스크린 데뷔했고, 이후 1955년에서 1957년에 걸쳐 개봉한 《시씨》 3부작에서 여주인공이자 실존인물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를 사랑스럽게 연기해 독일오스트리아 양국의 국민 여동생이 되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시씨》의 성공 이후인 1958년에는 영화 《사랑은 오직 한 길》[4]에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슈나이더는 촬영 중 상대 역으로 출연한 알랭 들롱과 교제를 시작한다. 《시씨》 3부작을 촬영하며 어머니 마그다와 계부가 자신을 통제하려 드는 것을 못 견뎌했던 로미는 19세의 나이로 알랭 들롱과 함께 파리로 떠나 삶의 거취를 프랑스로 옮겼다.[5] 파리에서 루키노 비스콘티의 연극에 출연하는 등 새로운 커리어를 쌓아가던 둘은 1959년 스위스에서 약혼을 발표했다.

하지만 '유럽의 약혼자들'로 불렸던 둘의 순정만화 같은 사랑은 1962년 로미가 할리우드로 스카웃되어 원거리 연애가 되자 촬영 스케줄로 인해 관계가 소홀해졌고, 결국 들롱의 아이를 임신한 독일 가수 니코의 등장으로 1963년 약 5년 간의 열애 끝에 결별하게 된다. 다만 그 후로도 둘은 두 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하고 꾸준히 교류하며 로미가 사망할 때까지 가까운 친구 사이로 지냈다.[6]

한편 컬럼비아 픽처스와 계약을 맺고 할리우드에 진출했던 로미는 기계적인 작업 방식이 자기에게 맞지 않다고 여겨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결국 로미 슈나이더는 1965년 유럽으로 돌아왔고, 홀로코스트를 겪었던 독일 출신 유대인 배우 하리 마이엔과 사랑에 빠졌다. 유부남이었던 마이엔은 부인과 1966년 5월 이혼했고 슈나이더와 마이엔은 그 해 7월 결혼식을 올렸다.

1966년 12월 3일 로미는 첫째인 아들 다비트 크리스토퍼 마이엔을 출산하고 서베를린에서 아이를 키우며 휴식기를 가졌다. 하지만 하리는 자신에 비해 스타인 아내를 상대로 질투심을 갖고 있었다. 끊임없이 상대를 깎아내리는 행동으로 로미에 대한 열등감을 풀며 그녀를 가정에 묶으려 하는 하리에 지친 그녀는 1969년 프랑스 영화 《수영장》에 출연하며 다시 영화계로 돌아왔다. 로미를 여주인공에 추천한 사람은 알랭 들롱이었다.

또한 68혁명 이후인 1971년 봄, 고국 독일에서는 프랑스의 343 선언문에 자극을 받아 낙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운동이 벌어졌다. 6월에는 347명의 여성이 슈테른지에 우리는 과거에 낙태를 하였으며,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서명을 기고했고 슈나이더 역시 유명인 28인 중 한 명으로 서명에 동참했다. 비난이 주로 향한 곳은 유명인이자 외국에서 활동하는 슈나이더였고, 함부르크 법원에서는 그녀를 기소하기까지 했으나 수백 건의 서신이 날아들어 기소는 중단되었다. 후일 함께 낙태죄 반대 서명에 참여했던 언론인 알리스 슈바르처(Alice Schwarzer)[7]는 로미 슈나이더를 진정한 투사였다고 평하기도 했다.

1975년에는 안제이 주와프스키 감독작 《중요한 건 사랑한다는 거야》에서 주연을 맡아 제1회 세자르상에서 카트린 드뇌브, 이자벨 아자니 등의 후보를 제치고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같은 해 개봉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군이 프랑스에서 자행한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을 배경으로 한 영화 《낡은 권총》 역시 3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등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70년대 그녀가 프랑스 영화계에서 종횡무진 펼친 활약과는 다르게 영화계에 복귀하며 남편 하리 마이엔과의 관계는 심각해졌다. 이혼 소송 중 마이엔이 아들 다비트의 친권을 양도하는 대신 재산 절반을 요구하는 등 둘은 끊임없이 마찰했지만 결국 1975년 이혼을 하였다.

그 후 슈나이더는 자신의 비서인 다니엘 비아시니와 연애를 시작해 임신 6개월이던 1975년 12월 18일 서베를린에서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2주 후인 12월 31일 저녁 6시 경 심한 복통을 느끼고 유산을 겪는다. 사람들은 일주일 전 그녀가 사랑니를 뽑으며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1977년 7월 21일에는 38세의 나이에 둘째인 딸 사라 비아시니를 제왕절개로 조기출산했다. 약 1년간 휴식기를 가진 로미 슈나이더는 1978년 《어떤 이혼녀》를 통해 복귀했고 해당 작품에서 펼친 연기로 두 번째 세자르상을 수상했다.

1979년 봄 딸 사라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멕시코로 떠났던 로미 슈나이더는 전남편 하리 마이엔의 자살 소식을 전보로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아 급히 귀국한다. 한편 악화일로를 걷던 다니엘 비아시니와의 부부 관계 역시 1981년 2월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81년 4월 그녀는 영화 촬영 중 발이 부러지는 사고를 겪었고, 5월에는 왼쪽 신장에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수술 이후 요양을 위해 로미 슈나이더는 프랑스 파리 근교 지역 뇌이쉬르센으로 이송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11세 연하 프로듀서 롤랑 페탕을 소개받아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친부의 죽음과 아버지로 여겼던 다니엘 비아시니와의 연달은 이혼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들 다비트는 두 커플과 함께 사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다비트는 다니엘 비아시니와 이부동생 사라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다비트는 갈등을 빚으면서도 꾸준히 슈나이더를 병문안했고, 슈나이더도 다비트가 누그러지면 자신을 이해하고 갈등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극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친부의 사망에서 약 2년이 지난 1981년 7월 5일, 다비트가 집 담장을 오르다 금속 격자 끝에 다리가 찔려 겨우 14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 것. 간호사로 분장해 다비트의 시신 사진을 공개하고 장례식에까지 침범한 파파라치 무리에게 쫓긴 슈나이더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아 몇 주간 두문불출했다.

10월 16일, 슈나이더는 약 6개월 동안 촬영이 연기되었던 영화이자 유작이 되는 《최후의 증언》 촬영을 비로소 재개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들을 상기하게 되는 것이 괴로워 영화 속에서 양자를 연기한 아역 웬들린 베르너(Wendelin Werner)[8]를 냉담히 대했지만 크랭크업 무렵에는 집에 초대하는 등 가까이에서 교류를 나누기도 했다.

이듬해인 1982년 4월 영화가 개봉했고, 슈나이더는 홍보 인터뷰 중 하나에서 나이가 들면 시골에서 과일과 나무를 기르며 딸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5월 9일, 그녀는 취리히에 방문해 유언장을 작성했다.


2.3. 사망[편집]


1982년 5월 29일 아침 7시, 향년 43세의 나이에 파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전날 피곤하다며 먼저 잠자리로 간 로미 슈나이더가 책상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본 롤랑 페탕은 그녀가 자는 줄 생각해 침대로 옮기려 했으나 그녀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망 기사 발표 이후 실내에 마시고 있던 와인과 약으로 극단적 선택을 택한 게 아니냐는 루머가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당국은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이라고 발표했다.

슈나이더의 친구이자 롤랑 페탕의 친척이었던 클로드 페탕 역시 슈나이더는 사망으로 이어질 만큼의 음주는 하지 않았으며, 사망 원인은 사망 몇 개월 전 받았던 신장 수술로 인해 심장이 약해져 심장마비가 발생한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로미의 딸 사라 비아시니 역시 이 말에 동조했으며, 어머니는 약물 혹은 알코올에 중독된 적이 없었다고 강경히 주장했다.

생전 "살고, 사랑하고, 잠들고 옷을 입는 방식조차 완벽하게 프랑스인이 되고 싶다"는 말을 남겼던 로미 슈나이더는 아들과 함께 프랑스 이블린 Boissy-sans-Avoir에 묻혔다. 사망 4개월 전 롤랑 페탕과 함께 살기 위해 땅을 매입했던 곳이기도 했다.


2.4. 사후[편집]



  • 출신지 오스트리아에서도 1990년 '로미상'을 제정했다. 오스트리아 신문사 쿠히어에서 주최하는 텔레비전 작품 시상식.

  • 2008년 제33회 세자르상에서 탄생 70주년과 경력을 기념해 공로상을 수여했다. 수상은 연인이자 오랜 친구였던 알랭 들롱이 대신했다.


3. 출연작[편집]


  • 1962 카프카의 심판(Le Procès)[9]


4. 여담[편집]


  • 상당한 애연가였으며, 하루에 최대 말보로 3갑 정도를 피웠다고 한다.

  • 생전의 코코 샤넬과 친분이 있었던 사이로 샤넬 스타일 정립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한 명이다. 샤넬 측은 그녀를 '샤넬 하우스의 영원한 친구이자 샤넬 특유의 매력을 구현해 낸 인물'이라고 칭한다. 코코 샤넬은 슈나이더의 팬이자 멘토로 그녀를 무척 아꼈다고 한다.

  • 프랑스의 전설적인 여배우 시몬 시뇨레와 베스트 프렌드로 지냈으며, 로미 슈나이더의 아들이 사망한 후 슈나이더의 유작인 《최후의 증언》에 출연하도록 설득시킨 것도 시몬 시뇨레였다고 한다.


  • 독일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로미 슈나이더의 팬이었다고 한다. 파스빈더가 사망한 계기도 슈나이더가 사망해 낙담한 나머지 음주와 마약 습관이 심해진 것 때문이라고.

  • 다이앤 크루거가 영화배우의 꿈을 꾸게 된 계기가 로미 슈나이더의 존재였다고 한다.


  • 이원복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에서 독일의 성씨를 설명하는 장면에 잠시 출연한다. 이원복이 독일에서 유학하던 시절인 1970년대 중후반 로미 슈나이더는 이미 유럽권에서는 스타였기 때문에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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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오스트리아가 아닌지는 안슐루스 참고.[2] 1981년 사망[3] 못해도 나치 혜택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마그다가 어떻게 전후에도 배우로서 활동할 수 있었냐면, 사실 전후 독일-오스트리아의 과거사 청산은 전후 세대가 성장한 68 혁명바더 마인호프를 기점으로 인식이 많이 달라져서 그렇다. 그 이전까지는 서독은 전범이나 에밀 야닝스레니 리펜슈탈처럼 쉴드가 불가능할 정도로 치어리더했던 사람들 정도만 퇴출당했고, 마그다 같이 적당히 친분이 있었던 타입은 크게 퇴출당하지 않았다. 전쟁 직후 서독은 의무적으로 과거사 청산으로 하고 나머지는 쉬쉬하는 경향이 강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는 이런 서독보다도 과거사 청산에 등한시하는 극우적인 성향마저 있었다.[4] 1933년 개봉해 어머니 마그다 슈나이더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리벨라이의 리메이크이다.[5] 당시 독일오스트리아에서 알랭 들롱의 이미지는 '황후를 구워삶아 데려간 도둑놈'이었다고.[6] 결별 후 함께 출연한 영화: 1969년 개봉작 《수영장》, 1972년 개봉작 《트로츠키 암살》[7] 독일의 대표적인 여성운동가이자 무공 훈장 수훈자이다.[8] 1968년생. 현재는 수학자로 알려져 있다.[9] Il processo; Der Prozeß. 오슨 웰스 연출/대본. 앤서니 퍼킨스, 잔느 모로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