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슨 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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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무대와 스크린을 위해 태어난 동물.[2]
내가 평생 해도 해내지 못한 걸 그는 25살에 해냈다.
미국의 영화 감독, 영화 프로듀서, 각본가, 배우.
영화사 최고의 영화 감독을 꼽을 때마다 빠지지 않는 거장 감독이자, 당대 최고의 명배우 중 하나이다.[3] 반면 생전에 유일하게 〈이방인〉 단 한 편만 흥행에 성공[4] 하여 대중과의 소통은 실패한 비운의 대중예술가이기도 하다.
연극에 기반한 재능으로 영화계 다방면에서 활약하였으며, 데뷔작 〈시민 케인〉을 포함해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만들어내었다.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뛰어났지만, 되려 그 재능으로 인해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게 된[5] , 어찌보면 아이러니한 삶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1915년 5월 6일 미국 위스콘신 주 케노샤에서 태어났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시를 쓰고 만화를 그리며 연극까지 하는 천재적인 재능을 선보였지만, 인성에는 좀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재능을 너무 믿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남들을 깔보고 무시했던 것. 사실 웰스의 인성에 문제가 있게된 건 집안 어른들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증에 이상한 발명이나 하는 사람이었고, 할머니는 히스테릭한 성격에 오컬트와 마술에 심취해 있었다. 웰스는 이런 할머니를 경멸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오슨 웰스 본인 역시 평생 마술과 오컬트에 심취했었다.
아버지는 웰스를 일리노이 주 우드스톡에 있던 비교적 당시로선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인 토드 고등학교에 보냈다. 이곳에서 웰스는 처음으로 연극을 만들고 자기가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웰즈는 같은 학생들로부터 집단괴롭힘을 당했는데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괴롭히면 화장실로 도망쳐서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채 나타나서 되레 자신을 괴롭히던 학생들을 식겁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웰스는 학교에서 온갖 기행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아침에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들 앞에서 마술이나 무서운 이야기를 해서 식겁하게 만드는가 하면 핼러윈에는 흉물스런 분장으로 온 학교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어 버렸다. 크리스마스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된 연극이나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직접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고. 그래도 교장이던 로저 힐은 웰스를 아들처럼 가르치고 지도했다고 한다.
1931년, 웰스는 16살의 나이에 아일랜드로 건너가 당나귀 마차를 끌고 그림을 그리며 여행을 했다. 그러던 중 더블린의 유명한 게이트 극장에서 공식적으로 연극배우로 데뷔했다. 데뷔전 그는 그 극장에서 공연을 하던 극단의 단장에게 자신이 실제 브로드웨이 극단공연 경력이 많은 것처럼 속이고 나이까지 20대 초반으로 속였다고 한다. 단장이 눈치를 챘으나 그의 재치와 자신감, 그리고 오디션에서 보인 뛰어난 연기력에 매력을 느껴 배우로 고용했다고 한다. 이후 영국 런던 연극계에 진출하고자 했으나 외국인으로서 노동허가를 얻지 못해 1934년에 미국으로 돌아왔다. 학교 연극무대에서 좀 더 활동하다 라디오 방송국에서 라디오 드라마의 배우 겸 감독을 맡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설립한 머큐리 극장에서 연극배우로서의 활동도 계속 해나갔다. 이때 사교계의 여왕이자 여배우이던 버지니아 니컬슨과 결혼하고 단편영화 〈시대의 기억〉(The Hearts of Age)의 공동 감독을 맡아 니컬슨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세계 대공황으로 미국 경제가 타격을 받고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은 가운데, 미국 정부는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경제불황으로 타격을 입은 연극인들을 구제하고 대중들에게 문화생활을 보급하기 위한 차원에서 연방극장계획(FTP)를 추진했다. 이때 미국 정부는 웰스를 주목하고 그에게 FTP의 책임을 맡겼다. 웰스는 이에 불과 21살의 나이에 뉴욕 할렘가로 가서 흑인 배우와 제작진들과 함께 연극을 제작하였다. 한편 부인 니컬슨의 제안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19세기 악명높은 아이티의 황제 앙리 크리스토프의 궁전으로 배경을 옮겨서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평론가들은 이런 시도에 불쾌해 했지만, 오히려 대중들은 열광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37년, 웰스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린 뮤지컬 〈흔들리는 요람〉을 제작해 공연하려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내용을 문제삼은 FTP가 예산 부족을 핑계로 제작을 무산시키려했고 배우 조합에서도 출연 배우들을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방해했다. 결국 드레스 리허설 첫날에 배우 조합의 방해로 무대가 폐쇄되자 웰스는 이 뮤지컬의 공동 제작자인 존 하우스먼과 함께 역사에 길이남을 전설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공연 당일, 웰스는 미리 표를 예매하여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에게 "다른 극장에서 공연하게 되었으니 보실 분들은 저희를 따라오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웰스와 배우들, 관객들이 20블록이나 떨어진 다른 극장으로 가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FTP와 배우 조합의 방해 때문에 무대 세트도 배경음악을 연주할 오케스트라도 준비하지 못했고 각본과 작곡을 맡은 마크 브릿스테인만이 피아노 한 대 앞에 앉아있었다. 배우 조합은 웰스에게 "당신들은 절대 무대에서 연기할 수 없다."라고 한 터라 웰스는 이를 역으로 이용해 "무대에서 공연 못한다고? 그럼 객석에서 하지 뭐."라는 놀라운 발상을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배우와 연주자들이 객석에서 앉아있다가 일어나서 공연했고 기발한 이 행동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에피소드는 팀 로빈스가 Cradle Will Rock으로 영화화하기도 했다.
이 성공 이후에도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를 당시의 시대상을 담아 현대식으로 참신하게 각색/해석해 연출했다. 관객들이 가장 놀랐던 장면은 시인 시나가 원작과 달리 폭도들이 아닌 파시스트 비밀 경찰대에 손에 죽는 장면이었다고. 웰스는 당시 연출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역을 맡아 연기까지 하기도 했다. 이 연극을 올리면서 웰스와 머큐리 극단은 승승장구해 나가게 된다. 한편 머큐리 극단의 인기로 웰스는 CBS의 라디오 방송에서 소설이나 연극들을 참신하게 재해석한 생방송 머큐리 극단을 방송하게 되었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이러자 장난기가 발동한 웰스는 대대적으로 사람들을 낚을 궁리를 한 끝에 1938년 10월 30일, H. G. 웰스의 SF소설 《우주전쟁》을 각색한 〈화성인의 침공〉을 방송할 때 무대를 현대로 바꾸고 힌덴부르크호 사건 때를 연상시키는 뉴스 속보로 극을 시작해 이어 웰스 자신이 마치 실제로 화성인을 목격한 사람인 것처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박진감 넘치는 연기를 펼쳤다. 웰스의 연기가 너무 실감난 나머지 라디오를 듣던 사람들은 진짜 화성인들이 쳐들어 온 것으로 착각해서 거리로 뛰쳐나가거나 공포에 떠는 등 패닉 사태가 벌어졌다.[6] 그리고 방송이 끝난 뒤 고소했다. 결국 대국민 사과까지 하게 됐지만, 그 덕분에 미국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그 전까지 스폰서도 없던 방송에 캠벨 수프 사가 광고를 내보낼 정도로 인기 방송이 되었다.[7] 웰스의 방송은 1940년까지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명성을 날렸다.
한편으로 이 일로 할리우드도 웰스를 주목했다. 이에 RKO 라디오 픽처스에서 웰스를 채용해 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웰스는 RKO사와의 만남에서 "할리우드는 아이가 가지고 싶은 최고의 장난감"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에 RKO사는 웰스에게 영화 제작을 맡겼다. 웰스의 재능을 시기하던 할리우드 사람들은 웰즈가 35살이나 되어야 감독이 될 거라며 비웃었지만, 오히려 웰스는 RKO사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약관 20대 중반의 나이에 수십 년 경력의 최고 베테랑 감독이나 행사할 수 있다는 최종편집권까지 받을 정도였다.[8]
웰즈는 당초 조셉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9] 을 영화화하려 했으나 예산이 많이 들어 포기하고[10] 대신 제작에 나선 게 영화 역사상 길이 남을 걸작으로 오늘날까지 인정받는 〈시민 케인〉이다.
〈시민 케인〉은 당대의 유명한 신문왕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11] 를 모델로 그를 풍자하는 영화였다. 감독 겸 주연이던 오손 웰스가 신문재벌 역할을 맡은 건데 스토리는 그런 신문재벌이 사치와 허영, 불륜 등에 빠졌다 정치인까지 도전하는데 결국 선거도 망하고 회사일도 망하고 다 망해서 비참하게 죽는 내용이었다. 그 과정 중에 허스트가 실제로 했다고 소문났던 안 좋은 일들도 하는 장면이 있었고, 결국 비참하게 죽는다는 내용 때문에[12] 분노한 허스트는 어떻게든 이 영화의 제작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웰스가 이 영화를 완성하자 온갖 로비로 다수의 지역에서 이 영화의 개봉을 막아버렸다. 이 때문에 〈시민 케인〉은 참신한 시도의 수작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실패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아카데미 시상식은 〈시민 케인〉을 9개 부분에 후보로 지명했지만, 정작 각본상 하나만 달랑 주고 말아서 이를 두고 아카데미 역대 최악의 실수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다.[13]
어쨌든 걸작을 만들었음에도 흥행에는 실패해 웰스의 발언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RKO사에서 만들게 된 두 번째 영화인 〈위대한 엠버슨 가〉에서도 웰스는 자신의 방식대로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를 지켜보던 RKO사 사장이 그대로 개봉했다간 쪽박찰 것을 우려한 나머지 웰스가 다른 영화를 찍으러 간 사이에 서둘러 다른 감독[14] 을 불러다 편집을 시키고 몇 부분은 재촬영하거나 새로 촬영하는 등으로 해서 웰스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영화로 재탄생시켜 버렸다. 이렇게 해서 개봉된 영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큰 흥행 성공을 거두었지만 영화 역사상에서는 가장 어처구니 없는 해피 엔딩의 영화로 전설로 남게 되었다.
이후 웰스는 자신의 영화 기획들이 번번히 퇴짜를 맞는 등 역경을 맞자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텔레비전에서 활로를 뚫으려 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믹을 존재감 있는 괴상한 배우로 잡았다.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처럼 세기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할리우드에서는 수십년간 바닥을 긴 감독의 길을 가게 된것이다.
영화 제작비를 벌기 위해서 다른 영화에 배우로 출연하거나 각본을 쓰는 등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출연작 중에는 〈제3의 사나이〉 같은 영화사에 길이 남는 걸작도 있지만[15] 대다수는 B급 영화들이었다. 심지어는 일본에서 발매된 영어교재 '잉글리시 어드벤처'의 내레이션을 맡기까지 할정도였다.
B급은 아니지만 존재감 있는 영화로 나온 게 프랑스 영화 〈아우스터리츠〉에서 미국의 매드 사이언티스트 로버트 풀턴[16] 으로 나와서 초반에 나폴레옹에게 욕먹는 공돌이 역을 맡았고, 러시아-이탈리아 합작영화 〈워털루〉 초반에서는 간지 있는 루이 18세 연기를 하기도 한다. 좀 많이 허술한 시대물 〈The Tartars〉에서는 몽골 칸으로 나와서 바이킹인 빅터 머추어랑 연기 대결도 펼치기도 하고[17] 〈보물섬〉에서 당연히(!) 외다리 실버 역도 했다.[18]
이런 식으로 겨우 제작비를 만들어서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영화화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실천에 옮겼다. 1948년 〈멕베스〉, 1952년 〈오셀로〉[19] 가 영화로 나왔지만 흥행은 하지 못 했다. 여기서도 웰스 자신이 직접 감독을 맡고 배우로 출연까지 해 가면서 1인 다역을 소화하는 괴물같은 실력을 보여 줬다. 그나마 〈오셀로〉는 칸 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으로 인정받긴 했다. 웰스의 이런 영화적 역정은 고전 할리우드 스튜디오 체계가 어떻게 해체되고 변해갔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로 꼽힌다. 나머지 리어왕과 햄릿은 결국 만들어지지 않았고 대신 헨리 4세를 비롯한 셰익스피어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 팔스타프를 가지고 만든 한밤의 차임벨로 셰익스피어 영화화를 마무리한다. 이 한밤의 종소리는 후기 웰스 역작으로 불리기도 한다.
말년의 웰스는 체중 관리 실패로 매우 살이 찐 상태였고[21] , 거의 은둔 상태였다. 듄의 영화화를 기획하고 있었던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는 그가 블라디미르 하코넨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를 캐스팅했지만,[22] 영화 계획이 엎어져 무산되었다.
결국 B급 영화에 출연하며 제작비를 모으고 영화를 만들어 흥행에 실패하고, 다시 영화 제작비를 벌기 위해 B급 영화와 각종 광고들에 배우로 뛰기를 반복하다 트랜스포머 더 무비에 목소리 출연한 것을 마지막으로 1985년에 70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오죽하면 오슨 웰스가 영화 분야가 아닌 다른 예술에 그 천재성을 발휘했더라면 파블로 피카소는 쌈싸먹을 천재 예술가로 남았을 것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3. 작품[편집]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웰스이지만 흥행하고는 인연이 멀었다. 그럼에도 B급 영화에까지 출연해가면서 어떻게든 제작비를 모으고 영화를 만드는 등 영화에 대한 열정은 그의 평생을 지배했다.
그의 최고 걸작은 역시 〈시민 케인〉으로 당시로서는 할리우드에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딥 포커스[24][25] , 로키 조명, 역광 조명, 참신한 구도, 극단적 클로즈업 등 영상면에서 대단히 파격적이고 이채로운 방식들을 구사해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웰스가 〈시민 케인〉에서 구사한 이런 파격적인 시도들은 오늘날에 와서는 일반적인 영화의 제작기법으로 통용되고 있다.
연극 배우를 했었던 탓에 다른 영화에 배우로도 출연하기도 했었고, 자신이 맡은 배역의 대사를 직접 쓰기도 했다. 자신이 직접 출연하기도 했던 〈제3의 사나이〉에서 맡은 해리 림의 대사들을 직접 쓰기도 했는데[26] , "이탈리아는 30년간 보르자 가문의 압제를 겪었지. 그들은 전쟁, 테러, 살인, 피바람을 겪었지만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르네상스를 만들어냈어. 스위스는 형제애가 있었지. 민주주의와 평화를 누리며 500년을 보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게 뭐가 있나? 뻐꾸기 시계뿐이지."[27] 란 대사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명대사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문장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타나토노트》에서 인용된다.
또한 찰리 채플린의 〈살인광시대〉에서 나온 유명한 대사인 "한 사람을 죽이면 범죄자이지만, 전쟁에서 100만 명을 죽이면 정복자가 된다. 다수가 살인을 신성시한다."라는 것도 웰스가 쓴 것이라는 설이 있다. (장 로스탕- 프랑스 생물학자, 철학자) 물론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웰스는 푸른 수염 백작을 영화화하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냈을 뿐, 각본은 온전히 내가 다 쓴 거다."라고 반박하고 있지만, 묘하게 살인광 시대의 엔딩 크레딧에는 오슨 웰스의 이름이 'based on an idea by' 명목으로 올라와 있다.
"화성인의 침공"에서 보여줬듯이 상당히 장난기 있는 성격이기도 했기 때문에, B급 영화에 출연해 영화 제작비를 모아야 하는 비참한 인생임에도 본인 스스로는 이것을 즐긴 듯하다. 1967년에 나온 정신나간 영화 〈007 카지노 로얄〉에도 출연했을 정도. TV 시리즈 문라이팅(블루문 특급)의 한 에피에서 내레이션을 맡았고 1986년에 개봉한 해즈브로의 애니메이션 영화 〈트랜스포머 더 무비〉에서는 유니크론의 목소리를 맡았다. 참고로 웰스는 유니크론을 더빙한 후 5일 후 사망하여 유니크론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이 때 웰스가 더빙한 유니크론의 대사들을 보면 굉장히 힘겹게 녹음했다는 느낌을 대번에 느낄 수 있다. 특히 마지막에 유니크론이 죽으면서 내뱉는 유언은 삑사리가 심해서 그의 건강 상태가 매우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오컬트와 마술에 빠진 할머니를 경멸했으면서도 마술 솜씨가 상당히 좋아서 직접 마술을 하기도 했다. 1974년의 〈F for Fake〉는 웰스의 마지막 감독 작품으로 웰스 자신이 직접 늙은 마술사를 연기하는 열의를 보였다.[28] 〈제3의 사나이〉 촬영 당시에, 웰스가 호텔방에 틀어박혀 꼼짝달싹을 안 하자 감독이 웰스에게 "유명한 마술사가 공연한다는데 안 갈 거야?"라고 낚아서 나가게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때문에 후기로 갈수록 마술의 영향력이 강해져 서사가 급진적으로 변해가는 경향이 있다. 메타픽션적 요소라던가 배배꼬인 서브플롯의 활용, 자기반영적인 전개가 대표적이다. 상술한 거짓의 F도 그렇고 아카딘 씨, 마지막 영화인 불멸의 이야기 역시 시민 케인이나 상하이에서 온 여인에서 만든 미스터리 플롯을 유용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자아내 누벨바그 세대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바 있다.
팀 버튼 감독의 〈에드 우드〉에서도 오슨 웰스의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에드 우드가 영화 제작비를 구하지 못해 영화 제작을 포기할까 하며 바에 갔는데 거기서 〈멕베스〉의 제작비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 웰스가 등장한다. 영화사상 최고의 걸작을 만든 웰스와 최악의 감독으로 유명한 우드를 만나게 한 것(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우드는 "웰스 같은 사람도 제작비 때문에 골치구나!"라면서 용기를 얻어 다시 영화 제작에 매진하기로 결심한다.
워낙 힘들게 영화를 만들어서 그런지, 한 영화에도 판본이 많기로 악명 높다. 화면비율과 편집, 러닝타임부터 웰즈 사후 재편집까지 겹쳐져 한 영화에도 판본이 세 개나 있는 경우도 있다. 가장 심한 예로는 '악의 손길'과 '오델로', '아카딘 씨'가 있다.[29] 심지어 복원판도 여러 개 있는지라 웰즈 영화를 볼때는 판본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보는 걸 추천한다.
사후 오슨 웰스 재단이 설립되고 판권이 정부었던 오야 코다르와 마지막 처에서 얻은 딸 베아트리스 웰스에게 나눠졌는데, 베아트리스랑 오야 사이가 좋지 않아서[30] 트러블이 많았다. 특히 베아트릭스는 권리를 주장하다가 지나치게 갑질을 부리는 경우가 많아 상당히 까였던 편이다. 특히 미완성작인 바람의 저편 완성 시도를 방해했던 거나, 본인이 손 댄 1992년 오셀로 복원판[31] , '오셀로 만들기' 공개 방해 건[32] 은 많이 까였던 사건이다.
물론 베아트리스는 기본적으로 아버지 작품의 소개와 재평가에 열성적인 사람인데다 터너엔터테인먼트와 RKO픽처스를 상대로 그동안 지급하지 않은 시민 케인과 위대한 앰버슨가의 흥행수입 배당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는 정당한 권리 행사도 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이전의 행보를 반성하고 전향적으로 변했는지 아버지 유품을 주립 도서관에 기증하고, 그토록 반대했던 <바람의 저편> 공개에 동의한다던가[33] 2017년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의 '오셀로' 구판과 '오셀로 만들기' 공개 허가 요청도 허락해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베아트리스 본인이 어린 시절 아역으로 아버지 후기작에 참여한 경험이 있고, 아버지의 고생담을 직접 지켜봤기에 권리 행사에 적극적이고 까칠하게 구는 경향이 있는듯. 실제로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미완성작이자 37년 만에 공개된 돈 키호테가 편집실에서 처참하게 잘려나가는 걸 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3.1. 연출 작품[편집]
- 시민 케인(1941)
- 위대한 앰버슨가(1942)
- 공포 속의 여행 (1943)[34]
- 이방인(1946)
- 상하이에서 온 여인(1947)
- 멕베스(1948)
- 오셀로(1952)
- 아카딘 씨 (1955)
- 악의 손길(검은 함정)(1958) - 전설적인 오프닝 롱테이크로 유명한 작품. 역대 최초이자 최고의 오프닝 롱테이크로 꼽힌다(물론 편집없이 롱테이크만 있었던 최초의 영화들은 제외하고). 영화가 시작된 직후 의문의 인물이 한 자동차에 폭탄을 설치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자동차에 한 커플이 타고, 그 자동차가 지나가는 거리에 또다른 커플을 비춘다. 관객들이 폭탄에 대해 긴장감을 가지는 동안, 차가 막히고 하면서 자동차의 커플과 거리의 커플은 동일한 속도로 동일한 길을 가게 되다가, 거리의 커플이 키스를 하는 순간 자동차는 그 커플을 앞질러 가고 이내 폭발한다. 그리고 롱테이크가 깨지며, 키스를 하던 거리의 커플을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당시나 지금이나 충격적인 오프닝 시퀀스.
- 소송(1963)
- 심야의 종소리 (팔스타프)(1966)
- 불멸의 이야기 (1968)
- F for Fake (거짓의 F) (1972) - 오슨 웰스의 예술에 관한 다큐멘터리....라고 하기엔 상당히 내용이 복잡하다. 명화를 위조하는 화가 엘미르 드 호리가 있고, 드 호리의 전기를 쓰는 전기 작가 클리포드 어빙이 있는데, 어빙은 알고 보니 과거 영화제작자이자 항공업자였던 하워드 휴즈의 전기를 날조한 적이 있었고, 이런 드 호리와 어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감독 프랑수아 라이헨바흐가 자신이 찍어둔 촬영분을 넘겨 오손 웰즈가 편집을 하고 거기다가 웰스의 애인이었던 배우 오야 코다르의 초상화를 그리는 파블로 피카소의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여기에 피카소가 그린 코다르의 그림 대신 가짜 피카소 그림을 파는 이야기와, 미술품 위조가인 듯한 코다르의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와 함께 마술사이자 사기꾼이었던 웰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후기 웰즈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허구와 현실 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는 웰즈의 영향을 받은 자크 리베트 영화와 연계해 분석하는 평자들도 있다. Every Frame a Painting해설#
- 바람의 저편(2018)
오슨 웰스의 유작으로 넷플릭스의 후원 하에 피터 보그다노비치 등 제작에 참여했던 제작진들 그리고 유가족 및 여러 단체와 인물의 도움으로 완성되었다.
3.2. 출연 작품[편집]
- 제인 에어 (1943)
- 제3의 사나이 (1949)
- 바이킹 (1958)[35]
- 강박충동 (1959)[36]
- 예기치 못한 일 (1963)
-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1966)
- 사계절의 사나이 (1966)
- 카지노 로얄 (1967)
- 워털루 (1970)
- 열흘 간의 불가사의 (1971)
- 벅스 버니: 슈퍼스타 (1975)[37]
- 세계사 (1981)
- 트랜스포머 더 무비 (1986)[38]
3.3. 미완성 작품[편집]
미완성 작품이 아주 많다. 여러가지 사유로 중간에 엎어진 영화들로,[39] 상업영화, 다큐멘터리, 웰스 본인의 개인적인 영화 등 다양하다. 다만 하나같이 현재는 구해서 관람하기가 영 쉽지 않은 상황이다.
- 모두가 진실이다(It's All True) - 1943년에 만들다가 엎어진 다큐멘터리로, 남아메리카를 취재하며 여러 풍경들을 담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제작사인 RKO에서 오슨 웰스가 만든 '위대한 앰버슨가'가 흥행에서 참패했고, 웰스에게 호의적이던 RKO 이사진이 사퇴했으며, 브라질 현지 당국도 웰스가 이 다큐에서 보여주려한 것들이 상영되는 걸 원치 않았던데다가, 결정적으로 영화 촬영 중 장면 연출을 위해 섭외된 현지인 어부들 4명이 배 전복 사고로 인해 떼죽음을 당하는 비극이 발생하자 RKO에서 아예 여기서 손을 떼버리면서 미완성으로 남게 됐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화가 질산염 필름으로 촬영됐는데[40] 보관되오던 네가티브 필름 상당수가 심하게 훼손된 바람에 이미 1960년대에 많은 분량이 폐기됐다.
- 생각 없는 바닷가재(The Unthinking Lobster) - 1950년에 만들던 영화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제작이 엎어진 뒤 남아있던 촬영분이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 보물섬#영화(Treasure Island) - 1964년에 시작했다가 1965년에 엎어진 프로젝트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원작을 영화화하려던 시도였으며 오슨 웰스는 감독 겸 롱 존 실버 역을 직접 맡았다. 하지만 '심야의 종소리' 제작과 이 영화 제작이 겹치면서, 안그래도 지독하게 빡빡한 재정 및 제작 여건인 상황에서 어쩔수 없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고 오슨 웰스는 '심야의 종소리' 제작을 택하고 이 영화 제작을 포기했다. 이후 1972년에 만들어진 영화 보물섬에 웰스는 롱 존 실버 역으로 다시 출연하게 됐다.
- 히로인(The Heroine) - 1967년에 시작했다가 바로 엎어진 프로젝트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원작자로 유명한 카렌 블릭센의 단편을 영화화하려고 했다. 헝가리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만들려고 했으나, 헝가리에서 촬영을 시작한 첫날(1967년 4월 14일) 헝가리 현지 영화팀의 형편없는 실력에 실망한데다 과다 청구된 인건비에 질려서 오슨 웰스는 도망가버렸다. 이 하루치 촬영분은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 - 1969년 CBS에서 동명의 소설을 모티브로 하여 TV 스페셜에 포함된 단편 영화의 제작 요청을 받아들여 작업을 진행했다. 웰스는 여기서 감독 겸 샤일록 역을 직접 맡았다. 제작이 거의 완료되던 와중에 웰스 본인의 세금 관련 문제로 인한 미 정부 당국과의 마찰을 이유로 CBS가 자금 지원을 철회하여 웰스는 어쩔수 없이 작품을 독립영화로 완성하게 된다. 이듬해 로마에서 본인의 지인에게 첫 시사회를 열어서 완성된 영화를 상영했으나[41] 상영 이후 워크프린트 필름의 3분의 2가 로마에 있던 웰스의 사무실에서 불분명한 이유로 도난당하여 1970년대 초에 부득이하게 추가 분량을 촬영한 일이 있었다. 이후 웰스는 베니스의 상인에 대해 보유한 자신의 모든 자료를 파트너 오자 코다르에게 넘겨주었고, 오자는 이 자료들을 뮌헨 필름 아카이브에 기증하게 된다.[42] 2015년에 개최된 제72회 베니스 영화제의 개막식에서 관련된 자료를 복원한 영화가 웰스의 또다른 작품 오셀로와 함께 상영되었다.
- 돈 키호테 - 1950년대 중반에 CBS의 TV 영화 작업을 바탕으로 제작을 시작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영화를 단일 영화로 변경하고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현대에서 활약하는 전개를 다룬 각본으로 촬영을 진행했으나 1969년에 돈 키호테 역할을 맡은 영화 배우가 제작 중에 앓던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 주요 촬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촬영 과정은 1972년에 종료했지만 웰스는 이 작품에 대한 추가 촬영 계획을 구상하면서 이를 위해 추가로 천 페이지가 넘는 대본을 제작하였는데, 프로젝트가 줄곧 지연되면서 영화 제작자가 웰스에게 언제 끝낼 것인지 난색을 표하며 질문한 일도 있었다. 이후로도 본인(웰스)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작품에 대한 작업들을 진행했었으며, 그의 사후 헤수스 프랑코가 감독을 맡아 웰스가 촬영한 작업 분량들을 편집하여 1992년에 개봉되었지만 작품(1992년 개봉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부정적이다.
- 디프(The Deep) - 1966년에 시작해서 1969년에 중단된 프로젝트로, 찰스 윌리엄스(Charles Williams)의 'Dead Calm'을 원작으로 한다. 계속 개고생하면서 만들다가 결국 엎어져오던 개인적인 예술 영화는 집어치우고 오슨 웰스가 아예 작정하여 상업 영화로 의도해서 만들던 영화로, 자신의 흥행력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항상 그래왔듯이 빠듯한 제작비로 인해 영화 촬영은 지지부진 했고 어찌저찌 영화는 거의 완성됐으나 극후반부 촬영을 남겨 놓고 결국 제작비가 다 떨어지는 바람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웰스는 제작비를 마련하여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고 계속 제작중단 상태로 방치되다가,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 된 로렌스 하비가 1973년 위암으로 인해 4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완성할 기회는 영영 날아가버리고 끝내 완전히 엎어지고 말았다.[43] 하지만 디프의 제작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이 영화를 높게 평가했는데, 역시 주연으로 캐스팅 됐던 잔느 모로는 디프의 촬영을 '환상적인 경험'이었다고 하면서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은 미완성작이라는 것이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원작 'Dead Calm'은 이후 1989년에 필립 노이스 감독에 의해 다시 영화화됐다. 한국 출시제는 '죽음의 항해'이며, 이 영화는 니콜 키드먼의 출세작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 런던(London) - 1971년에 엎어진 코메디 영화로, 5가지의 짧은 코메디 스케치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제작이 엎어졌는데, 아마도 지독하게 재미가 없어서 웰스가 만들다가 집어치운게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 몽상가들(The Dreamers) - 1967년에 엎어졌던 '히로인'처럼 카렌 블릭센의 단편을 영화화하려고 했다. 1980년부터 1982년까지 제작하다가 엎어졌으며, 그의 완성작과 미완성작을 통틀어서 고려했을 때 웰스의 마지막 감독 연출 작품이다. 평생 웰스를 괴롭혀오던 제작비 부족으로 인해 일부분만 촬영하고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남아 있는 필름에는 웰스와 그의 연인이던 오자 코다르의 출연 분량만 있다고 전한다.
4. 여담[편집]
- 그는 〈대부〉의 돈 비토 콜레오네 역을 간절히 원했다. "그 역만 맡을 수 있다면, 내 영혼이라도 팔겠다."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시민 케인〉으로 영화 연출론의 정전(正典)을 다시 쓴 영화 감독으로서 오슨 웰스의 업적만큼이나 메소드 연기로 기존의 할리우드에는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전해준 또 다른 선구자, 말론 브란도에게 이 역을 넘겼다. 그리고 웰스는 〈지옥의 묵시록〉의 월터 E. 커츠 대령 역도 원했으나 이번에도 브란도에게 넘어갔다.[44][45] 그러나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의 다스 베이더 역을 그에게 맡기려 했을 땐, 이번엔 웰스가 거절했다.[46]
- 빈센트 도노프리오가 오슨 웰스와 닮은 꼴로 꼽힌다.# 에드 우드(영화)(1994), Five Minutes, Mr. Welles(2005) 두 편에서 오슨 웰스를 연기하기도 했다.
- 의외로 업계 동료들을 전혀 존경하지 않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모두를 신랄하게 비하했다. 앨프리드 히치콕을 이기적이고 게으르다고 깠고, 찰리 채플린은 재능 없는 인간이라고 비난했고,[47] 우디 앨런은 이런 찰리 채플린 따라 하는 “Chaplin disease(채플린 병)” 환자라고 깠다.# 로런스 올리비에는 멍청하다고 욕했고, 험프리 보가트는 겁쟁이에 싸움도 못 하는 주제에 싸움을 건다고 비웃었으며, 그레이스 켈리, 캐서린 헵번은 헤프다고 깠고, 베티 데이비스는 차마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의 외모라 출연작을 감상 못하겠다고 불평했다. 조안 폰테인은 할 줄 아는 감정 표현이 딱 두 개 밖에 없다고 정의 내렸고, 제임스 스튜어트의 연기가 과장돼있으며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목이 짧아서 나중에 나이를 먹으면 머리가 배꼽에 닿아있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더스틴 호프먼은 키가 작다는 이유로("No dwarfs."),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는 이탈리아계라("they’re ethnic...") "특이하게 생겼고 피부가 검다" 는 인종적 선입견만으로[48][49][50] 캐스팅을 기피했다.
모두까기에도 천재안 맞아죽은 게 용타(...)다만, 알 파치노의 경우에는, 1981년 팬들과의 대담인 'filming the trial'에서 1962년 작 The trial을 재촬영해야 한다면, 알 파치노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싶다[51] 고 밝히며 오슨 웰스 본인이 뭘 하든[52] 가장 먼저 떠올리는 배우라고 팬임을 자처한 적이 있어, 배우로서의 알은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 알 파치노 이외에도 좋아했던 배우로는 존 웨인이며, 조셉 코튼도 명민하다고 칭찬했다.# 이래놓고 정작 존 웨인, 알 파치노하고 함께 한 작품은 단 1편도 없다. 캐롤 롬바드에 대해서도 미인인데도 성격이 겸손하다는 좋은 평가를 남겼다. 오슨 웰스가 캐롤 롬바드를 짝사랑했다고 한다.#
- 1937년 브로드웨이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를 무대에 올렸고, 성황리에 공연한다. 이 연극의 제작자 존 하우스먼은 이후 영화화도 하려고 했지만 제작 기간이 너무 길어져 흐지부지됐다가 결국 1953년에야 비로소 이 연극을 영화화했다. 오슨 웰스가 연극 무대에서 맡은 배역은 제임스 메이슨이 맡았다. 참고로 이 영화에도 말론 브란도가 나온다(...).# 자신의 배역을 상의도 없이 제임스 메이슨한테 넘긴 것에 대해 오슨 웰스는 존 하우스먼에게 분노에 찬 항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무렵 존 하우스먼은 오슨 웰스의 오만한 성격에 질릴 대로 질려버린 상태였다고(...).
- 오슨 웰스는 스스로를 "난 86% 정도 공산주의자다."라고 평했다.# 그래서인지 매카시즘 시절 공산당을 탈퇴하고 동료를 고발한 엘리아 카잔을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동시에 엘리아 카잔의 재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히며 인터뷰를 마쳤다.#
- 데이비드 핀처는 영화 〈맹크〉에서 오슨 웰스를 후드려까기도 했고, 오슨 웰스를 "교만한 망상가(Delusional Hubris)"라고 디스하기도 했다.# 더구나 〈맹크〉의 각본은 데이비드 핀처의 아버지 잭 핀처가 담당했다. 핀처 부자는 오슨 웰스가 허먼 J. 맨키위즈의 공을 가로챘고, 〈시민 케인〉은 허먼 J. 맨키위즈의 작품이라 주장한다. 오슨 웰스의 오랜 동업자였던 존 하우스먼 역시 생전 이런 의견들에 일부 동의했었다!# 위의 링크의 인터뷰에서 나오듯 정확히는 하우스먼은 웰스는 스스로는 각본과 연출 모두 자기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연출은 전적으로 웰스의 것이지만 각본은 맨키위즈가 쓴 것이라고 발언하였다. 참고로 존 하우스먼도 〈맹크〉에 등장한다. Sam Troughton이 연기했다. 일단 허먼 J. 맨키위즈는 이후 오슨 웰스와 다시는 같이 일하지 않았고, 오슨 웰스의 아카데미상 후보 및 수상작은 〈시민 케인〉 단 한 편이 유일하다. 반면 허먼 J. 맨키위즈는 이후 〈야구왕 루 게릭 (The Pride of the Yankees)〉(1942)으로 한 번 더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오른다.
- 제작자 에런 스펠링이 인기 텔레비전 시리즈인 〈판타지 아일랜드〉의 미스터 로크 역을 맡기려고 했지만 리카르도 몬탈반에게 돌아갔다.
- 마릴린 먼로가 신인일 때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를 스타로 만드는데 자신이 큰 기여를 했다고 오슨 웰스 본인은 주장하지만, 별 도움 안 됐다는 게 후대의 평가다.
- 영화사 최고의 걸작이라고 자주 꼽히는 자신의 대표작 <시민 케인>을 "지금까지 만들어진 최고의 영화라는 사실에 동의하십니까?"란 Dick Cavett의 질문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No, certainly not.(아니요, 확실히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다만 “My next one is though.(내 다음 작품은 그렇지만.)”란 답변도 덧붙였다.
- 오슨 웰스는 존 포드 감독에게 여러 차례 경의를 표했으나, 함께 일한 적은 없다.
- 오슨 웰스가 태어난 날은 베이브 루스가 생에 처음으로 홈런을 친 날이기도 하다.
- 네레트바 전투(Bitka na Neretvi)(1969)에서 공동 주연을 맡은 율 브리너와 한날한시에 함께 영면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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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이먼 캘로의 <오슨 웰스: 제나두로 가는 길>이라는 전기문에서 신체검사에 72인치 (182.8cm)로 소개되었다. 182.9cm라고도 한다.[2] 오슨 웰스를 칭찬함과 동시에 그를 동물이라 부르며 깎아내리고 있는데, 실제로 장 르누아르는 오슨 웰스의 재능은 높이 샀지만, 그의 작품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3] 종종 간과되곤 하는데, 여러 감독들에게 수많은 러브콜을 받았을 정도로 배우로서의 재능도 뛰어났다. 일례로 대표작 〈시민 케인〉에선 고작 25세의 나이로 주인공 찰스 포스터 케인의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 모두 오슨 웰스 본인이 연기하여 훌륭한 연기력을 보여주었으며, 〈제3의 사나이〉에선 해리 라임 역으로 출연하여 10분 남짓한 카메오 수준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발휘하였다.[4] 이것도 $1,034,000의 제작비로 만들어져 $3,220,000을 벌여들였다. 흥행에 성공한 것은 맞지만 '대박'까진 아니다.[5] 후술 된 오슨 웰스의 인성을 보면 이건 스스로 자초한 부분이 더 크다는 걸 알 수 있다.[6] 다만 이 사건은 단순한 낚시 해프닝에 머물지 않는다. 평단에서는 이 사건이 훗날 웰스 후기작에서 보이는 메타픽션적 요소와 자기반영적 요소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7] 훗날 "그렇게 될 줄 알았나요?"라는 질문을 받자 미소를 띈 채 대답을 피했다고 한다.[8] 당시 할리우드에선 감독은 말 그대로 영화사의 고용인에 불과했고 감독이 영화에 개입할 수 있는 측면은 적은 편이었다. 영화사 사장이 영화를 마음껏 주무르는 게 일반적이었다.[9] Heart of Darkness. 바로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이다.[10] 마이클 셰이본의 대체역사소설 유대인 경찰연합의 세계에서는 웰스가 이 영화 제작에 성공했다고 언급된다.[11] 엄청난 부자이자 아주 골때리는 일도 많이 저지른 인물. 온갖 예술품을 사 모으는 게 취미였는데, 하루는 무척이나 갖고 싶어하는 조각품을 사진으로 보았다. 그런데 도무지 이게 어디 있는지 정보를 찾지 못 해 탐정을 고용했다. 그리고 1년 뒤, 탐정이 돌아와 드디어 조각의 행방을 알게 됐다. 바로 허스트가 사 모은 예술품을 전시한 곳에 있었단다. 즉 지가 예전에 사 두고도 잊어 버리고 헛돈 쓴 셈.[12] 역시 언론계의 거물 헨리 루스도 모델로 삼았다. 단, 이 사람은 영화에 대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13] 딥 포커스 기법을 처음으로 완벽한 완성도를 보이며 사용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 전에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이라는 영화에서 사용되었던 딥 포커스 기법도 예술적으로 훌륭하여 후세에 찬사를 받긴 하지만, 시민 케인은 그보다는 자본이 더 들어간 영화인만큼 확실히 퀄리티 있는 촬영기술과 그것이 잘 활용되는 연출을 통해 그야말로 예술적 + 기술적 완성도를 모두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14] 여담이지만 웰스의 영화를 재편집한 이 감독은 바로 후에 〈사운드 오브 뮤직〉,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의 유명한 영화들을 감독한 로버트 와이즈였다.[15] 웰스의 등장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등장 장면으로도 꼽힌다. 참고로 그는 이 영화에서 10분 정도 나온다. 단, 스토리와 결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배역이다.출처[16] 증기선의 개발자, 바로 그 사람 맞다.[17] 칸인데 대단히 비대하게 칼싸움을 한다.[18] 체중 과다라 도저히 다리를 묶어 놓을 수 없고, 그렇다고 다리를 절단할 수도 없어서 설정만 외다리고 다리는 클로즈업하지 않았다.[19] 이 영화는 제작비 부족으로 촬영기간이 3년이 넘게 걸렸고, 그래서 대부분의 배우들은 거의 서로 만나지 못하고 따로 자기 배역을 촬영했다. 완성된 영화를 보면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20] 대사도 제대로 못 외우고 프로의 태도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보고 있노라면 정말 이 사람이 시민 케인을 만든 그 대배우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이후 2021년 해당 광고의 조감독 피터 실링포드가 비화를 밝혔는데, 일단 웰스 본인은 수면제 약효가 너무 늦게 찾아와서 말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21] 과식은 기본이고 군것질을 엄청 많이 하였는데 소위 쭈쭈바라고 불리는 아이스 캔디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22] 식사를 하던 그에게 고급 와인을 사서 관심을 끌었고, 먹는 걸 좋아하는 그를 위해 캐스팅 조건으로 그의 단골 식당의 식사를 매일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https://youtu.be/baQ09GmUjUY[23] 이 인터뷰가 끝나고 7일 뒤에 사망하였다. 사실 사망 12시간 전에 머브 그리핀 쇼에 나와서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는 등의 모습도 보여주었으나, 그 영상은 현재 유튜브에서 삭제된 상태이다.[24] 카메라와 피사체, 즉 찍는 대상의 거리에 관계없이 멀고 가까운 광경을 모두 선명하게 찍는 방식이다. 주로 영화에선 롱테이크 촬영에서 쓰이며 기존의 영화가 감독이 의도한 대로 관객의 시선을 이끌던 것과는 다르게 관객 자신이 스스로 자신이 이끌리는 대로 시선을 옮기게 되는 특징이 있다.[25] 최초로 딥 포커스를 사용한 영화는 아니다. 촬영감독 그레그 톨런드가 1년 전 존 포드의 〈머나먼 항해〉에서 딥 포커스를 사용했다.[26] 이는 웰스의 구라라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뻐꾸기 시계 대사만은 웰스가 만들었다고 인정하는 분위기.[27] 실제 역사에서 스위스는 많은 전쟁, 특히 내전을 겪었으므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28] 비단 이 영화 뿐만 아니라 A Safe Place에서도 마술사로 출연했다.[29] 악의 손길은 화면비율까지 포함하면 판본이 여섯개나 되고 (편집본은 세 개), 오델로는 판본이 세 개다. 정점은 아카딘 씨인데 편집본만 해도 2006년 재편집 판본까지 포함해 다섯 개나 된다.[30] 오슨은 베아트리스의 어머니인 파올라 모리랑 결혼생활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면서 오야 코다르랑 바람을 피웠다. 좋을리가 만무한 상황. 실제로 <바람의 저편> 소송 당시 둘 사이에 험악한 말들이 오갔던 걸로도 유명하다. 다만 2010년대부터는 어찌되었든 서로 청산된 듯 하다.[31] 음향 싱크를 재조정하고 음향 효과를 새로 입히고 음악도 완전히 다시 녹음했는데, 품질에 문제가 많은데다 이전 판본 공개를 막아버려서 씨네필들과 비평가들에게 먼지나게 까였다.[32] 제작 다큐멘터리 특성상 본편 '오셀로' 발췌 장면이 많은데, '오셀로 만들기' 판권은 오야에게 있고 '오셀로' 본편 판권은 베아트리스에게 있었다. 때문에 오야와 베아트리스의 동의가 있어야 공개가 가능했는데 오야를 싫어했던 베아트리스의 딴죽에 2017년까지 거의 로스트 미디어 취급을 받았다.[33] 본인이 프로듀서로 참여해 무려 48년만에 2018년 넷플릭스에서 공개했다.[34] 크레딧에 오르지는 못했다. 노먼 포스터와 공동 감독.[35] 나레이터.[36]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37] 나레이터를 담당. 루니 툰 제작에 참여한 주요 애니메이션 감독들과 인터뷰한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텍스 에이버리 & 프리즈 프레렝 & 밥 크렘펫이 출연하였다.(제작 과정에서 원래 로버트 매킴슨, 멜 블랭크, 척 존스도 인터뷰 촬영을 고려하였지만, 여러 사정상으로 끝내 참여하지 못했다.)[38] 유니크론 역의 성우로 출연. 배우로서 오슨 웰스의 마지막 작품이다. 녹음을 마친 후 불과 5일 뒤에 사망했다고 한다.[39] 기본적으론 제작비 부족이 주된 이유며, 미완성으로 흘러가는 패턴은 대체로 다음과 같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야심차게 크랭크 인 했다가 부족한 예산으로 인해 제작이 늘어지게 되며 예산이 다 떨어지면 그대로 촬영이 중단되고 웰스가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부업 등을 하다가 제작에의 흥미를 상실하면서 결국 방치되는 식이다.[40] 질산염 필름은 잘 부식되는데다가 인화성도 높아서 보관 및 보존이 아주 어렵기로 악명이 높다.[41] 일설에 따르면 오자 코다르(Ojar Kodar)와 코다르의 어머니에게 보여줬다고 전한다.[42] 다만 웰스가 70년대 초에 촬영한 분량과 일부 촬영 분량은 시네마테크 프랑셰즈와 개인 수집가들이 소유하고 있다.[43] 반면 넷플릭스에서 바람의 저편을 공개하면서 함께 공개한 제작 다큐멘터리 '오슨 웰스의 마지막 로즈버드'에서는 이와는 다르게 언급을 한다. 디프의 촬영에 참가한 한 제작진은 '여배우를 다시 부르면 완성이 됐을텐데, 오슨 웰스는 끝내 그녀를 부르질 않았다.'고 회상한다.[44] 이렇게만 보면 말론 브란도와 오슨 웰스가 무슨 대단히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연히 〈대부〉, 〈지옥의 묵시록〉 두 작품 배역으로 경쟁했었지, 오슨 웰스는 클리프트-브란도-딘 이 3명으로 대표되는 50년대 청년 문화와 별 접점이 없는 사람이다. 오슨 웰스는 60년대 메소드 연기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는 폴 뉴먼과 〈길고 긴 여름날〉(1958)에서 함께 공연하는데, 남주인공(폴 뉴먼)과 사랑에 빠지는 여주인공(조앤 우드워드)의 아버지 역이었다. 여담으로 이 만남을 인연으로 폴 뉴먼과 조앤 우드워드는 실제로 결혼한다. 시작은 불륜이었지만(...) 〈대부〉는 당시 오슨 웰스의 실제 나이가 비토 콜레오네 배역의 나이대와 비슷했고, 〈지옥의 묵시록〉은 오슨 웰스가 원작 소설 어둠의 심연을 영화화하려다 못했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애착을 가진 것뿐이다.[45] 말론 브란도는 50년대 박스오피스 금광이라 불린 흥행 배우였고, 이후 자체 커리어 하이 갱신에도 성공했지만, 오슨 웰스는 데뷔작 <시민 케인>부터 허먼 J. 맨키위즈의 업적인가? 오슨 웰스의 업적인가? 논란이 있을 정도로 단독, 최초 등등 소위 선구자라 불릴만한 업적이 없다.[46] 재미있는 점은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 프리퀄 시리즈을 만들 때 젊은 시절의 베이더로 캐스팅하려 했던 배우가 오슨 웰스와 닮았다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것이다.# 콜린 퍼스가 오슨 웰스 더 닮았다는 의견도 있다.#[47] 정작 오슨 웰스는 찰리 채플린의 대표작 시티 라이트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 Top 10 안에 꼽은 적이 있다.# 또 다른 대표작 모던 타임즈는 과대평가된 영화라고 비판한 적이 있긴 하다.#[48] 남부 이탈리아 출신들에 대한 전형적 편견이다. 실제로 둘 다 남부 이탈리아 계통이긴 하다.[49] 그러나 알 파치노와 로버트 드 니로 둘 다 젊은 시절 새하얀 피부를 지녀 드 니로는 아일랜드 유전자가 더 발휘된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고, 파치노는 시칠리아 출신들이 다 검다는 건 편견이라고 반박할 때 거론됐을 정도다. 드 니로는 아일랜드계 혼혈이지만, 알 파치노는 아일랜드계는 아니라고 한다. 어쨌든 그래서 로버트 드 니로의 별명이 '바비 밀크(Bobby Milk)'였고, 알 파치노는 아이리시맨에서 아일랜드계 미국인 지미 호파를 연기하기도 했다.[50] 또 더스틴 호프먼 키 작다고 뭐라 그랬다는데, 더 작은 미키 루니와 Vienna(1968)에서 잘만같이 일했다.걍 오슨 웰스 지가 싫었던 거(...)[51] 원래 해당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안소니 퍼킨스이다.[52] 아마, 시나리오를 쓸 때를 상정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