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권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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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권 시대
Civil Rights 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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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셀마-몽고메리 행진.
중앙의 인물은 마틴 루터 킹이다.
시기
1954년 ~ 1968년[A]
1954년 ~ 1980년[A]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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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든 B. 존슨 (1963 ~ 1969)
리처드 닉슨 (1969 ~ 1974)
제럴드 포드 (1974 ~ 1977)
지미 카터 (1977 ~ 1981)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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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민권 운동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1963)
브리티시 인베이전 (1964 ~1967)
68운동 (1968)
스톤월 항쟁 (1969)
워터게이트 사건 (1972)
성해방 운동[1][B]
블랙 파워 운동[B]
2세대 페미니즘 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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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시대
다음
레이건 시대 / 베트남 전쟁 시대(Vietnam War Era)[1]

1. 개요
2. 역사
3. 문화
4. 같이 보기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미국사의 시대 구분. 1954년 ~ 1980년 사이의 시대를 가리킨다. 스톤월 항쟁, 미국 흑인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등 여러 시민 운동들이 있었다. 다만 베트남 전쟁 시기(1964–1975)를 따로 구별할 경우 1964년 ~ 1968년으로 구분짓기도 한다.


2. 역사[편집]


민주당 20년이 끝난 이후 미국 경제는 광란의 20년대가 끝나자 대공황이 일어나듯이 추락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계속 성장, 미국의 쇠퇴와 그에 따른 소련의 독주를 기대하고 있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예상을 가차없이 깨버린다. (이미 사망했지만) 동시에 미국은 마셜 플랜이라는 막대한 경제 원조로 서유럽 경제를 되살리고 아시아권 반공 국가들(대표적으로 한국, 필리핀, 대만, 일본 등)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엄청난 전후 호황기를 누리던 미국 시장은 그야말로 상품의 블랙홀이었고 전후 빈곤에 허덕이던 서방 국가들은 대미 수출길이 열리며 부흥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가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이다. 1950년대 미국 중산층의 삶의 질 수준은 대단히 높은 편으로 고등학생들도 자가용을 끌고 다닐 정도였다.[2]

하지만 이런 사정은 1960년대에 들어가면서 달라지게 되는데, 밖으로는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날리고, 니키타 흐루쇼프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니마니 하면서 맞먹으려고 들게 된다. 이에 존 F. 케네디린든 존슨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행정부는 아폴로 계획을 세우고,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등 공세적으로 나섰으나 도리어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내부적으로는 천민 자본주의적 소비문화 범람에 반발, 도덕주의가 득세하며 히피를 비롯한 뉴웨이브 운동이 득세했고, 미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 등의 소식이 본토에 알려지면서 반전주의가 확산되어 전쟁에 대한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3]

베트남 전쟁에 대해 얘기하자면, 미국의 베트남 개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부터였다. 프랑스의 시대역행적인 야욕에 의해 일어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전쟁 비용의 80%를 부담했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서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단했다. 제네바 회담 당시 미국은 2년 이내에 총선을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전제조건에 합의를 보았으나 궁극적으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베트남 민중의 80%가 호찌민과 북베트남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남베트남응오딘지엠을 앞세워 친미 독재정권을 세우다가, 내부 부정부패로 망할 기미가 보이자 1964년에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에 깊숙이 개입했다. 베트남 전쟁 초기 최신식 폭격기를 비롯한 우수한 화력으로 전쟁을 지속했지만, 베트남을 항복시키진 못했으며 1968년 구정 공세를 겪으면서 자국 내의 반전운동에 직면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969년부터 베트남 전쟁에서 철군하는 노선으로 변환했고, 1973년에 파리 평화 조약을 맺은 뒤 철수했으나, 1975년 베트남의 공산주의 세력이 통일을 이룩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패전으로 종결됐다.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것은 리처드 닉슨 때의 일로(아폴로 계획의 결실인 달 착륙도 이때 따 먹었다), 동시에 소련과 각을 세우던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가지는 데탕트를 앞세우고 재선에도 성공하지만 그 직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게 된다. 이후 승계한 포드 대통령을 거쳐 인권 외교를 표방한 지미 카터의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섰지만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해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게 정권을 내주게 되면서 레이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로도 개선되지 않던 흑인 차별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며 흑백갈등이 극에 달한 시기로, 마틴 루터 킹, 말콤 X 등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서며 유색인종 인권 운동을 펼쳤다.


2.1. 흑인 민권 운동[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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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를 비롯한 미국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바로 민권(Civil rights) 운동이다. 비록 50년대가 경제호황에 힘입어 미국인들, 특히나 백인 미국인들에게는 최전성기였다고는 하지만, 에릭 포너에 의하면 90년대 이전까지 중산층과 상위층 교외에는 90% 이상이 백인이었으며, 유색인종은 1%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여성 인권 또한 시궁창으로, 낙태는 당연히 합법화되지 않았으며 비록 사문화된 법이긴 했지만 1959년까지 미국에서는 여성이 바지를 입는 것이 불법이었다.[4] 성소수자의 인권은 뭐... 말할 필요도 없겠다. 때문에 이들 사이에서는 자유를 향한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즉 미국 흑인들의 민권운동은 지금의 미국 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현대적인 개념의 시민 불복종 운동의 형태, 즉 정의롭지 못한 법에 공개적으로 불응하며 법적인 처벌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마틴 루터 킹의 철학 아래의 흑인 민권 운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파일:Segregated-Drinking-Fountain.jpg
유색인종 전용 급수대에서 물을 마시는 남자
흑인민권운동이 시작된 배경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들이 해방된 19세기까지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노예들이 해방되고 수많은 흑인들이 자유의 몸이 되자 노예들에게 위탁되던 남부의 경제는 휘청이기 시작했는데, 수정헌법 13조는 노예들을 해방시키기도 했지만 동시에 '범죄자들의 노동은 예외로 한다'라는 예외사항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 흑인들을 체포해서 노예나 다름없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부량죄', '쓰레기 투기죄' 등의 사소한 것들로 트집을 잡혀 감옥에 갇힌 흑인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는 어린이들마저도 예외가 아니었다. 또한 KKK가 기승을 부려 범죄를 저질렀다고 의심되는 흑인들, 심지어는 그냥 길을 걷던 흑인 행인들까지도 백인 군중에게 구타당하고 목매달리고 화형당했으며, 이런 말도 안되는 학살이 '자경 행위'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곧 남부 외의 주들의 지탄과 세계적인 비난이 미국에 가해지자, 이러한 물리적인 흑인에 대한 폭력은 조금씩 사그러들었고, 대신 '합법적'인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흑백 분리(Segregation)의 시작이었다. 소위 짐 크로(Jim Crow)[5] 법안이라 불리는 말도 안되는 법안들이 상하원을 통과했으며, 이는 '흑인들은 영원히 백인들과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믿음 아래 생긴 것들이었다. 식당, 극장, 해수욕장, 학교, 심지어는 급수대까지도 백인 용과 유색인종 용으로 나눔과 동시에 흑인들의 민권(民權), 즉 민주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낼 권리들인 투표권, 집회권, 시위권 등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이를 어기거나 반발하는 흑인에게는 백인들의 손가락질, 발길질, 몽둥이질이 이어졌고, 그렇게 미국의 흑인들은 숨죽이며 억울한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955년, 로자 파크스라는 한 흑인 여성이 퇴근길에 버스에 탔다. 그녀가 살던 앨라배마주는 흑백 분리가 일상화된 지역이었고, 버스에서도 앞줄인 백인 전용 좌석과 맨 뒷칸인 흑인 전용 좌석이 분리되어 있었다. 로자가 탄 버스에 백인들이 많이 타면서 버스기사는 유색인 전용 표시를 로자가 탄 좌석 뒤편으로 밀어버린 후 로자를 비롯한 네 명의 흑인 승객들에게 뒤편으로 갈 것을 요구했다. 세 명의 흑인 승객은 뒤로 이동했지만 로자는 이를 거부했다. 버스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로자는 흑백 분리에 관한 몽고메리시 조례를 위반했다는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녀는 비록 같은 날 훈방 조치 되었지만, 이같은 차별에 분노한 그녀는 몽고메리 전역에 이 사실과 버스를 보이콧하자는 내용의 유인물을 돌렸고, 흑인 교회를 중심으로 몽고메리 전역의 흑인들은 이 소식을 알고 분노해 보이콧 운동에 동참했다. 앨라배마 주는 이런 사태에 당황했고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하는 인사들을 체포하고 참가자들을 탄압하며 강경하게 나섰다. 그러나 흑인들은 보이콧 운동을 이어나갔고, 버스의 주 이용객들이 가난한 흑인들인지라 몽고메리의 버스회사들은 무려 65%에 달하는 손실을 입기에 이르렀다. 결국 1956년, 연방대법원은 "버스에서의 흑백 분리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또한 엄청난 손실을 입은 몽고메리 버스회사들의 아우성에 결국 앨라배마주는 백기를 들기에 이르렀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흑인민권운동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이었고 이후 흑인민권운동은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시작으로 민권 운동가들은 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함께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시위했고, 백인 폭도들의 폭력과 협박에도 흑인 학생들을 백인 학교에 편입시키는데 앞장섰다. 또한 백인 전용 식당, 영화관 등에 앉아서 아무말 하지 않고 앉아있는 연좌농성인 '싯인(Sit-in)' 또한 시작되었다. 마틴 루터 킹의 평화적인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을 추구하던 운동가들과 말콤 X를 필두로한 과격 노선의 무장 투쟁 운동가들이 대립하였으나, 결과적으로 '평등'이라는 지향하는 목표는 같았기에 서로 연대하기도 했다. 흑인민권운동이 절정에 이르른 것은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행진으로, 워싱턴에서 총 집결한 흑인과 이 운동에 동조하는 백인들이 에이브러햄 링컨 동상에 도착해 모였고 그 수는 무려 25만 명이나 되었으며, 여기에서 킹 목사의 그 유명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이 미국 전역에 생중계 된다. 그 이후 1965년에도 최루가스에도 굴하지 않고 행진을 이었던 셀마 운동 또한 기폭제가 되었고, 결국 같은 해에 린든 B. 존슨은 그 어떤 이유로든 투표권을 제한하는 것을 금지하는 연방 투표권법에 사인한다. 이 법 서명식에는 킹 목사도 참여하였다.

미국의 연방정부는 폭력으로부터 흑인들을 보호해줄 것을 줄기차게 거절해왔다. 그러나 1960년대 민권과 관련된 소동들이 지속되고, 그에 대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미국의회는 민권에 관한 몇 개의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그 가운데는 1964년에 제정된 민권법(Civil Rights Act)도 포함되어 있었고, 1965년에 제정된 더 강력한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이 남부의 선거에서 큰 변화를 일으켰다. 1952년의 경우 투표권이 있는 흑인들 가운데 약 20%만이 투표한 것으로 집계되었지만, 1968년에는 이들 가운데 60%가 투표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도 인종갈등은 계속됐고, 이는 북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흑인들의 비폭력운동은 남부의 민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어느정도 미국의 여론을 남부의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쪽으로 돌려놓았지만, 흑인 인구 중 50% 정도가 북부 지역에 살고 있었고, 이들은 주로 빈민계급으로써 슬럼가를 형성했다.

1965년 여름 로스엔젤레스의 빈민가 와츠에서 폭동이 일어나 상점들을 약탈하거나 소이탄으로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34명이 사망했으며 사망자 대부분이 흑인이었다. 1966년에는 더 많은 폭동이 일어났다. 1967년에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도시폭동이 전국의 흑인 빈민가에서 일어났는데, 83명 이상이 총에 맞아 사살됐고, 그들 대다수는 뉴저지 주의 뉴어크와 미시간 주의 디트로이트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1968년 4월 흑인민권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마틴루터 킹이 암살당했다.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하자, 미국 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분노했으며, 미국에서 최소 100곳 이상의 마을과 도시로 나와 시위를 했다. 워싱턴 DC에선 백악관이 떨어진 두 곳이 불에 탔다. 미국 정부는 수만 명의 병력을 배치하며 시가지를 순찰하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46명의 미국인이 사망하고 2,600명이 다쳤으며, 나머지 20,000명이 체포됐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며 흑인민권운동은 더 광범위해지고, 운동의 급진화를 촉진하기도 했다. 흑인민권운동은 흑인들의 투표권을 보장하는 의의를 낳았으며 흑인에 대한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을 완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물론 완전히 인종 갈등이 가라앉지는 않아서 이후에도 LA 폭동을 비롯한 인종 갈등이 계속 생겼고, 현재까지도 미국 경찰의 흑인에 대한 과잉진압을 규탄하는 Black Lives Matter(흑인들의 목숨은 소중하다) 등의 인권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3. 문화[편집]


문화적으로는 비틀즈를 시작으로 영국 아티스트들의 대대적인 미국 대중음악계 침략으로 일컬어지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는 하나의 돌풍이 일어났다. 또한, 68운동이 대대적으로 유행하면서 기존의 보수성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고,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와 함께 히피 문화도 큰 인기를 얻었다.

4. 같이 보기[편집]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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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 B 학자에 따라 견해가 갈림[1] 민권 시대와 베트남 전쟁 시대는 구별된다. 후자의 경우 1964–1975[2] 물론 이때도 빈곤에 허덕이는 미국인들도 제법 많았다. 월북미군 제임스 조지프 드레스녹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구걸하는 노숙자들도 많았다. 그러니까 경제성장 과정에서 소위 중산층 계급이 생겼기에, 절대적 빈곤선에 있는 이들은 이 시기 주목받지 못했던 것.[3] 특히나 베트남 전쟁은 텔레비젼 전쟁으로도 불리는데, 당시 미국 텔레비젼에는 미군이 베트남 민가에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장면이나 불타는 민가마을 영상이 비추어졌다. 즉 민간인 희생 장면이 그렇게 생중계된 것.[4] 단, 운동이나 노동을 해야할 경우에는 바지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할리우드 여성 배우들이 1940년대부터 와이드팬츠를 자주 입기 시작하자 다른 여성들 사이에서도 유행이 될 조짐이 보였다. 그러나 관습상 밖에서 바지를 입는 것은 기성세대와 사회의 눈초리를 받기 십상이었기에 보편적으로는 치마를 애용하였다.[5] 한 백인 코미디언의 캐릭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짐 크로는 백인 코미디언이 얼굴에 검은칠을 한 '블랙페이스(Blackface)' 분장을 하고 우스꽝스럽게 흑인들을 비하하는 행동을 하는 캐릭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