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기(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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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23_민영기.jpg

부천 FC 1995 수석 코치
민영기
閔榮基 | Min Young Ki
생년월일
1976년 3월 28일 (48세)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83cm, 77kg
포지션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
학력
경신중학교 (1989~1991)
경희고등학교 (1992~1994)
경상대학교 (1995~1998)
소속 구단
울산 현대 (1999~2000)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2001~2003)
대구 FC (2004~2005)
대전 시티즌 (2006~2008)
부산 아이파크 (2009)
용인시청 축구단 (2010~2012)
지도자 경력
용인시청 축구단 (2012 /플레잉 코치)
용인시청 축구단 (2013 /코치)
강릉시청 축구단 (2015~2017 /코치)
부산 아이파크 (2018 /코치)
제주 유나이티드 FC (2019 /2군 코치)
부천 FC 1995 (2021~ /수석 코치)




1. 개요[편집]


대한민국 국적의 전 축구선수로, 현재 부천 FC 1995의 수석코치를 맡고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울산 현대[편집]


경상대 졸업 이후, 1999년 울산 현대에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하였다.
본인 말로는 실력은 떨어졌지만, 당시 경상대 감독이었던 고봉우 감독이 말을 잘 해줬는지는 몰라도 당시 울산 감독이었던 고재욱 감독이 본인을 좋게 봐주었다고 한다.

타이밍도 좋았는데, 그 당시 2군 리그를 시행하라고 해서 구단에서 젊은 신인 선수들을 많이 뽑았다고 하였다.
프로에서 바로 짤릴 수도 생각하여 그 당시에 열심히 운동을 했고, 감독이 좋게 보았는지는 몰라도 1군 엔트리에 포함되었고 간간히 경기도 출장하였다고 한다.

또한, 1999년 당시 포항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화재컵에서 1대1로 비기고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 끝에 팀은 3대1로 졌지만, 혼자 승부차기에서 골을 넣었다고 한다.

연습생 시절 활약에 힘입어, 1999시즌이 끝난 직후, 정식 계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고재욱 감독이 성적부진 및 건강악화를 이유로 사임하면서 많은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였고 2군으로 내려가고 말았다.

2군에서 같은 모기업인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와 연습 경기를 많이 진행하였는데, 당시 미포조선 감독인 조동현 감독의 눈에 띄어 이적 제의를 받았고, 시즌 종료 후 울산 현대미포조선으로 이적하였다.


2.2.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편집]


미포조동현 감독은 민영기 선수에게 멀티롤 수비 포지션을 맡겼고, 미포에서 민선수는 핵심 수비멤버로 활약하며 2003년 초대 K2리그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2.3. 대구 FC[편집]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의 활약에 힘입어, 대구 FC에서 이적 제의가 왔다.

대구의 수비라인 중심이었던 임중용, 김학철인천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함에 따라 수비 라인이 비어버렸고, 민영기 선수에게 영입 제의가 온 것이다.

대구에서는 시즌 시작 전 주전 수비수 2명이 이적해버린 상황이라 수비가 급하다보니 협상하자고 몸만 오라고 하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의가 아니라고 안간다는 의사를 전했다고한다.

거절했지만, 대구 FC 구단에서는 터키 전지훈련을 떠나기 전 다시 한번 이적을 제의했고, 미포조동현 감독에게 말씀을 드렸다고 한다.

허락을 받고 희망 연봉과 2년 계약기간을 요청했고, 공항에서 그날 바로 도장찍고 계약했고, 구단에 인사한 후 일주일 뒤 터키로 넘어갔다고 한다.

2년간 53경기를 출전하는 등 핵심 멤버로 활약하였다.


2.4. 대전 시티즌[편집]


2005 시즌 종료 후, 대구 FC박종환 감독은 송정현을 제외한 노장 선수들을 모두 내보냈고, 당시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감독을 하고 있던 최순호 감독은 영입 제의를 하였다.

하지만 프로에 더 있고싶었고, 에이전트도 없었던 그는 3주간 무소속 상태로 있었다고 한다.

마침 대전 시티즌이영익 코치가 이적 제의를 하였다고 한다. 대구 FC에서 뛸 때보다 연봉이 50% 깎인 금액이었지만 무조건 가겠다고 했고, 대전에 입단할 수 있었다.

대전에서 뛰면서 부주장을 맡고 주전 선수로 활약하며, 만년 하위구단이었던 대전이 2006 시즌 전반기 8실점에 3위까지 올라가는 등 정말 알토란 같은 활약을 보여주었다.

2007 시즌이 되며 김호 감독으로 바뀐 후, 대구 FC 시절과는 반대로, 노장 선수들은 다 나가고 주승진 선수와 본인만 남았다고 한다.

2008 시즌까지 주전으로 활약하며 3년간 92경기 출전 1득점이라는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2.5. 부산 아이파크[편집]


파일:민영기_부산아이파크.jpg
2008 시즌 종료 후, 김호 감독은 유소년 코치를 제의했다고 한다. 구단 측과도 이야기가 잘 되었고, 은퇴해야겠다 마음먹고 운동을 쉬고 있었는데 막판에 조건이 맞지 않아 틀어졌다고 한다.

그 때 마침 에이전트를 통해 부산 아이파크에서 선수를 구하고 있다는 내용을 들었다. 하지만 입단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나이도 있고 경력도 있던 그는 자존심이 상할 것 같으면 안가도 된다는 에이전트의 말을 들었지만,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그는 대학팀과의 테스트 경기를 운동을 쉬었음에도 너무 잘 뛰었고 부산 아이파크와 계약할 수 있었다.

부산에서 1년간 뛰었고, 조건은 대전 연봉의 절반정도였지만 황선홍 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소중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부산에서는 교체로 14경기 출전하며 18경기 출전 1골이라는 활약을 보여주였다.


2.6. 용인시청 축구단[편집]


파일:민영기_용인시청축구단.jpg
은퇴할 시점이 가까울 나이였지만, 그는 좀 더 뛰고싶었고, 마침 용인시청 축구단이 2010년 창단한다고 하여 선수 수급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윤희준 선수가 민영기 선수를 용인시청 축구단정광석 감독에게 추천해주었고, 입단할 수 있었다고 한다.

2011년 주장도 맡았고, 용인에서 2013년까지 뛰고 은퇴하였다.

용인에서 4시즌 통산 37경기 출전.
출처


3. 지도자 경력[편집]


용인시청 축구단에서 플레잉 코치를 거쳐, 강릉시청 축구단, 부산 아이파크에서 코치, 제주 유나이티드 FC에서 2군 코치를 거쳤다.
마침내 부천 FC 1995 구단에서 수석 코치까지 올라왔다.
파일:0004669779_001_20220801215804589.jpg
2022년 8월 1일, 이영민 감독의 코로나19 확진으로 인하여, 일일 감독을 한 적이 있었다. 김호남, 닐손주니어, 송홍민의 득점으로 경남 FC에 3대1 승리를 거두었고, 팀은 2위까지 올라갔다.기사


4. 여담[편집]


경기력도 꾸준하지만, 팀내의 인화를 담당할 정도로 성격이 좋아 젊은 선수들도 잘 따랐다고 한다. 이 때문에 2009시즌 종료 후, 대전에서도 부산에서도 코치를 맡길테니 은퇴하라고 권유했을 정도. 하지만 좀 더 선수생활을 하고싶었기에 윤희준 선수의 추천으로 용인시청으로 이적해 활동하였다. 이후 2013년부터 용인에서 플레잉코치로 지도자 연수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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