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버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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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나드 버틀러
Bernard Butler


본명
버나드 요셉 버틀러
Bernard Joseph Butler
출생
1970년 5월 1일 (53세)
영국 런던 스탬퍼드 힐
국적
[[영국|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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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프로듀서
배우자
엘리사 버틀러 (1994년-)
소속
스웨이드 (1989~1994)
맥알몬트 앤 버틀러 (1994 ~ 1995, 2002 ~ 2004, 2006 )
더 티어스 (2004~2006)[1]
제시 버클리 앤 버나드 버틀러 (2022 ~)
활동 기간
1989년 - 현재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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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디스코그래피
4. 여담


1. 개요[편집]


영국의 음악가. 스웨이드의 전 기타리스트로 잘 알려져있다.


2. 생애[편집]


1970년 5월 1일 영국 런던 스탬퍼드 힐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8살 때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처음으로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1984년, 더 스미스의 노래를 접한 후 스미스에 심취하여 일렉트릭 기타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이후 버나드 버틀러는 형들과 함께 슬로우다이브[2] 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지인들이 여는 파티 등 소규모 무대에서 공연했다.

1989년 11월, 버나드 버틀러는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웨이드의 기타리스트로 가입하여 프로 뮤지션으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1년, 스웨이드의 양대 축이자 연인사이였던 브렛 앤더슨과 저스틴 프리쉬먼이 결별하고 브렛이 코카인에 빠지기 시작하며 밴드가 해체될 조짐이 보이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난생 처음 프로 뮤지션으로서 가입한 밴드이자 상승세로 향하고있던 스웨이드가 이대로 해체해버리면 절대 안된다고 생각한 버나드 버틀러는 집에 틀여박혀 코카인에 빠져있는 브렛을 매일같이 찾아가 격려하면서 많은 곡을 새로 작곡하기 시작한다.[3] 밴드 멤버들은 이런 버나드의 열정으로 마음을 고쳐먹은 후 절치부심하여 리허설에 돌입했고 그 결과 스웨이드는 1992년 2월 인디 레이블 Nude 레코드사와 계약에 성공하여 같은 해 5월 11일, 첫 싱글 The Drowners로 메이저에 데뷔한다.

이후 밴드는 1993년 3월 29일, 데뷔 앨범 Suede를 발표하였고 "남자 경험이 없는 양성애자"라는 커밍아웃을 한 브렛 앤더슨의 도발적인 발언과 노골적인 동성에 컨셉을 선보이며 리치 제임스의 4 Real 자해 사건 등으로 주목을 받은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와 함께 영국 대중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1집 Suede는 영국에서 발매 이틀 만에 10만 장인 골드 레코드 인증을 받아 당시에 '영국에서 가장 빨리 많은 수의 음반을 판매한 데뷔 앨범'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밴드는 제 2회 머큐리 시상식에서 대상까지 받았다.

그렇게 영국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스웨이드가 북미 투어를 돌기 시작한 1993년 가을, 버나드 버틀러의 아버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일이 일어나 밴드 멤버들이 급히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때 스웨이드의 나머지 멤버들은 미국 진출이 생각했던 것보다 부진한 와중에 갑자기 영국으로 돌아온 것도 불만스러운데, 대신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던 크랜베리스가 미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공연 준비를 위해 버나드보다 먼저 미국으로 돌아갔고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자 충격에 빠져 있던 버나드는 밴드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배신감을 느낀다. 버나드는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밴드에 복귀했으나 밴드 멤버들과 어울리는 것을 싫어해서 공연 대기시간에 크랜베리스의 투어 버스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심지어는 혼자 택시를 타고 다음 공연장으로 간적도 있다고 한다.

북미 투어를 마치고 스웨이드는 1994년 2월 14일 논 앨범 싱글 <Stay Together>를 발표한다. 버나드는 7분 짜리 대곡인 이 곡을 당시 자신의 감정이 그대로 녹아있는 곡이라며 스웨이드의 곡 중 특히 좋아하는 곡이라고 호평했다. 다만, 버나드와는 달리 브렛 앤더슨은 이 곡을 상당히 싫어한다고 한다.[4]

버나드 버틀러는 스웨이드의 2집 Dog Man Star 녹음을 마무리한 후인 1994년 7월 8일, 리더이자 보컬 브렛 앤더슨과의 불화로 스웨이드를 탈퇴하였다. 밴드를 탈퇴할 당시 버나드와 브렛의 사이는 굉장히 나빠서 서로 매니저를 통해서 의사소통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에 회상에 의하면 당시 버나드는 브렛이 작사한 가사들의 내용을 퇴폐적이라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2집 작업 당시 버나드는 Vox Magazine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브렛 앤더슨은 락스타의 쾌락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영위하는 게으른 정키(마약중독자)일 뿐 뮤지션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놈이다."라며 브렛 앤더슨을 비난하기도 했다.[5]

나중에 발매된 Dog Man Star 디럭스 에디션에 나온 둘의 인터뷰를 보면 앨범 전곡의 데모 버전은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가 여러가지 비트를 녹음해서 버나드의 집에 보내면 [6] 버나드는 그것을 토대로 여러 곡을 작곡해서 브렛의 집에 보내고 브렛이 그 중 마음에 드는 곡을 선곡해서 가사와 보컬 멜로디를 오버더빙하여 다시 버나드에게 보내는 과정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버나드는 앨범 프로듀서인 에드 불러(Ed Buller)가 자기가 작곡한 작업물들을 망쳐 놓는다고 생각했고, 에드 불러에게 앨범 프로듀싱을 맡길 바에야 차라리 자기가 직접 프로듀싱 하겠다고 주장했지만 나머지 멤버들의 반대로 인해 성사되지 못했다.

스웨이드를 탈퇴한 직후인 1994년 말, 버나드 버틀러는 흑인 소울 음악 뮤지션 데이빗 맥알몬트와 듀오 맥알몬트 앤 버틀러를 결성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듀오는 1995년 5월 15일 첫 싱글 <Yes>를 발매하였으며 해당 싱글은 영국 차트 8위에 오르는 등 성공했다. 그러나 1995년 11월 27일, 데뷔 앨범 <The Sound of... McAlmont & Butler>를 마지막으로 듀오를 결성한지 1년 만에 데이빗과 버나드 사이의 불화로 듀오가 해체되었다. 커밍아웃게이인 데이빗 맥알몬트가 버나드 버틀러를 호모포비아라며 고소했기 때문이다.

맥알몬트와의 듀오 활동이 마무리 된 이후 버나드 버틀러는 버브의 3집 Urban Hymns 녹음에 잠시 참여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다가 다른 사람과의 협업 및 불화에 이골이 났는지 1998년 솔로 1집 앨범 <People Move On>을 발매하면서 솔로 아티스트로 데뷔한다. 이후 1999년애 솔로 2집 <Friends and Lovers>를 발매했으며 솔로 2집 활동이 마무리 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프로듀서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버나드 버틀러는 한국에서 솔로로 깜짝 내한 공연을 펼친적이 있었다. 후지 록 페스티벌 행차로 일본에 가다가 비자 문제로 서울에서 하루 묵다가 스팽글이라는 클럽에 들르게 되었다. 거기서 스팽글 죽돌이 죽순이들과 카드게임 "shit head"를 했었는데, 버나드 버틀러가 카드게임에서 지면 다음날 공연하는 것으로 내기가 되었었다. 버나드 버틀러는 졌고, 그날 밤 하이텔과 나우누리 등지에 버나드 버틀러 공연 긴급 공지가 올라왔고, 그 다음날 스팽글에서 깜짝 공연을 하였다. PC 통신망을 타고 소문이 퍼져 약 200명이 모여 관람. 100명은 공연을 못보고 돌아가야만했다. 공연 전날 사람들 앞에서 닉 드레이크의 Nothern Sky를 연주했다고 한다. 공연 멤버 중 키보디스트는 전 Denim 의 멤버였다. 출처는 크르르르 위키

2002년 맥알몬트와 다시 협업하여 2집 Bring It Back을 발표했으며 두 사람은 2004년까지 같이 활동하였다.

2003년 스웨이드가 해체를 발표한 후 브렛 앤더슨이 버나드 버틀러에게 연락하여 같이 음악을 하자는 제안을 했고 버나드가 이를 승낙하여 2004년 듀오 The Tears가 결성되었다. 듀오 결성을 계기로 두 사람은 완전히 화해했다고 하며 버나드 버틀러의 회고에 의하면 스웨이드가 해체를 발표하자마자 브렛 앤더슨이 자신에게 연락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고 스탭에게 브렛 앤더슨의 전화번호를 물어봤다고 한다. 자신의 예상대로 곧 브렛 앤더슨은 자신에게 연락을 해왔다고.

The Tears는 2006년 브렛 앤더슨의 솔로 활동과 버나드 버틀러의 프로듀서로의 완전한 전업을 이유로 해체된다. 이 밖에 활동이 중지된 이유로 거론되는 것은 투어 중 갑자기 브렛 앤더슨의 아버지가 사망하여 브렛이 더 이상 투어를 돌기 싫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의 공연들에서 브렛 앤더슨은 선글라스를 끼고 공연했다. 브렛이 유일하게 잠시 선글라스를 벗었던 공연이 바로 대한민국에서의 공연이었다.[7][8]

The Tears의 활동이 종료된 직후인 2006년, 버나드 버틀러는 맥알몬트와 이벤트 성 싱글 Speed를 발매했고 2008년 프로듀서로의 완전 전업을 선언했다. 2000년대 부터 버나드 버틀러는 기타리스트로서의 활동보다 프로듀서로서의 활동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으며 2002, 2003년 동안 리버틴즈의 싱글에 프로듀서로 참여하기도 했다.[9] 2008년에 발매돤 Duffy의 대박 데뷔 앨범 Rockferry역시 버나드 버틀러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품이다.

2022년 아일랜드의 배우이자 가수 제시 버클리와 함께 듀오 제시 버클리 앤 버나드 버틀러를 결성했으며 2022년 6월 17일 1집 <For All Our Days That Tear the Heart>를 발매했다.


3. 디스코그래피[편집]


  • People Move On (1998)
  • Friends and Lovers (1999)
  • In Memory of My Feelings[10] (2020)
  • For All Our Days That Tear the Heart[11] (2022)


4. 여담[편집]


  • 전 밴드메이트였던 브렛 앤더슨과 마찬가지로 채식주의자이다.
  • 스웨이드에서 활동 할 때도 상당히 꽃미남이였고 50대가 넘은 지금은 미중년이 되었다.
  • 1994년, 스웨이드를 탈퇴한 직후 밴드에 가입하기 전부터 사귄 여자친구 Elisa와 결혼했고 2023년 현재까지 잉꼬부부로 잘 지내고 있다. 자녀는 총 3명이다.
  • 인터뷰에서 더 스미스조니 마를 굉장히 존경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조니 마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아티스트다.[12] 또한, 모리세이의 작사 실력이 밥 딜런보다 한수 위라고 주장할 정도로 더 스미스의 열성팬으로도 유명하다. 난생 처음 구매한 음반도 더 스미스의 데뷔 싱글 Hand in Glove였다고 한다.
  • 조니 마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메인 기타로 1961년산 Gibson ES-355TDV 체리컬러 모델을 메인으로 사용하고있으며[13], 그가 운영하는 스튜디오 이름도 355 스튜디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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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렛 앤더슨과의 듀오[2] 동명의 슈게이징 밴드와는 별개의 밴드이다.[3] <Pantomime Horse>와 <Moving>은 같은날에 완성한 곡이라고 한다! (Love and Poison, Carlton Publishing Group, November 3, 2003 )[4] 그가 곡을 싫어하는 이유는 곡 자체보다는 곡을 녹음할 즈음부터 시작된 버나드와의 대립과 당시 사귀고 있던 17살의 여자친구 Anick과의 결별로 인해 엉망으로 치닫고 있던 당시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드러머 사이먼 길버트와 베이시스트 멧 오스먼은 이 곡을 녹음할 당시 밴드의 살벌한 분위기에 진절머리가 나서 녹음 중 여러번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5] 이후 브렛이 녹음실에서 이 인터뷰를 보고 화를 내자 버나드는 자신의 말이 심했다며 브렛에게 사과했다고 한다.[6] 버나드는 원래 그냥 편하게 드럼 머신을 사용하려 했으나 자신이 너무 독단적인 것 같아서 일부러 사이먼에게 비트를 녹음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7] The Tears 내한 공연은 비록 규모가 작았지만 분위기는 열광 그 자체였고 공연 후 시작된 브렛과 버나드의 팬미팅에서도 브렛의 팬들 중 한명이 그 당시 브렛이 자주입고 다녔던 스타일과 비슷한 양복 한 벌을 맞춰서 선물하고 버나드의 팬들 중 한명은 버나드의 솔로 앨범에 싸인을 받으러 앨범을 갖고 왔지만 주최측에 의해 압수되었다가 (The Tears는 스웨이드의 재결성이 아닌 새로운 밴드임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팬미팅때 기존 스웨이드의 물품을 반입금지 시켰다.) 버나드가 그 앨범이 자신의 솔로 앨범임을 알아차려서 무사히 사인을 받는 등 많은 해프닝이 있었다.[8] 브렛은 대한민국 관객들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솔로 활동 시기 다시 한번 내한하여 공연을 가졌고 2010년 스웨이드를 재결성 한 후에는 2011년 지산 락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2016년 8월에는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의 첫번째 날 헤드라이너로 공연하기도 하였다.[9] 그러나 그 당시 피트 도허티헤로인 중독으로 영 상태가 안 좋던 때라 버나드 버틀러와 팀워크가 맞지 않아 도로 그만둔다. 이 때를 두고 버나드 버틀러는 후에 말하길, "스웨이드 시절, 자신과 브렛 앤더슨 사이의 불화는 리버틴즈 내의 불화와 그 막장의 역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하였다. 애초에 완벽주의자 버나드와 즉흥 연주파 피트 도허티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10] 캐서린 앤 데이비스와의 합작 앨범[11] 제시 버클리와의 합작 앨범[12] 전 오아시스 멤버인 노엘 갤러거도 조니 마를 존경하는 아티스트라고 말한다.[13] 1994년도에 구매했다고 하며 지금까지 메인기타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