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생애

덤프버전 : r20200302

1. 잠저(하성군) 시절
2. 재위 기간
2.1. 즉위와 목릉성세(穆陵盛世)
2.2. 권력 강화와 기축옥사
2.4. 후계 문제
2.5. 여진 정책



1. 잠저(하성군) 시절[편집]


선조 이균은 1552년 11월 11일 서울 인달방(지금의 종로구 서촌지역)에서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1]3남으로 태어났다. 덕흥군은 중종창빈 안씨의 아들로 선조는 중종의 손자가 된다. 선조의 원래 이름은 이균으로 하성군[2]에 봉해졌다. 그가 태어난 사직동 집은 덕흥군이 어릴 때 아버지 중종으로부터 받은 저택으로, 터가 어떻다는 말을 들었는지 공사가 거의 다될 쯤 우물물이 안나온다는 핑계를 대고 바꿔달라 했다고. 중종은 '멀쩡히 우물이 나오는구만 별 말을 다한다'며 계속 집을 짓게 했다. 터가 나쁜 줄 알았더니 떠억하니 왕(선조)이 태어난 셈. 그러나 덕흥군은 선조가 8살이 채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하성군 이균의 숙부였던 명종(조선)은 죽은 이복형을 대신해 조카들에게 잔정을 주었다. 외아들 순회세자가 요절한 이유도 있었다. 3형제를 곧잘 궁으로 불렀는데 특히 막내 하성군을 이뻐했다고.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어느 날 명종은 덕흥군의 세 아들인 하원군 이정, 하릉군 이린, 하성군 이균을 궁으로 불렀다. 명종은 대뜸 익선관(왕관)을 벗어 한 번씩 써보라고 시켰다. 두 형은 시키는대로 했는데 하성군만 사양했다. 명종이 하성군에게 임금과 아버지 중 누가 중요하냐고 묻자 하성군은 둘은 다르게 보이지만 본디 충과 효는 하나라고 대답했다. 감동한 명종이 하성군에게 이 관은 니것이다라 했다고 쓰여있다. 비록 신빙성에 의심이 가나 소경 대왕 행장을 근거로 광해군일기에 기재된 엄연한 실록이다. 사실 명종이 자주 하던 놀이를 특별한 것처럼 부풀린거라고 카더라

1565년(명종 20년) 9월에 명종이 잠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신하들은 잠저 지정(후계자 지정)을 서둘렀다. 명종은 9월 15일 인사불성인데도 신하들이 명종 곁에 모였다. 영의정 이준경이 말을 꺼냈다. 명종은 인사불성이라 대답이 없었는데, 이틀뒤인 9월 17일에도 깨어나지 않자 신하들은 인순왕후 심씨에게 후계자 문제를 물었다. 인순왕후는 명종이 평소 이뻐했던 하성군에게 병 간호를 시킨다. 조선에서 왕의 병간호는 세자의 업무였고 이 병간호는 하성군을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명종이 다시 의식을 회복하고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때문에 하성군을 명종의 후계자로 지정하는 문제는 다시 들어갔다. 다만 명종도 자식이 없는 지금 상황에서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는 것도 괜찮다 생각했는지, 군왕인 자신을 두고 하성군을 후계를 논한 신하들을 트집잡지 않았다. 선조 시절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내세우다가 죽을뻔 한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신하가 왕의 후계자를 논하는 것은 택군이라고해서 역모처럼 취급되는 중범죄였다. 영의정 이준경의 건의도 별 책망없이 넘어간 점(명종실록 1565년 윤10월 15일)이나 양자를 들여라는 상소를 올린 선비 김택에게 벼슬을 준 점(명종실록 1565년 11월 16일) 등을 볼 때 명종은 하성군을 자신의 후계자로 묵시적 동의를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이게 명종 또한 내심 하성군을 후계자로 완전히 인정했고 단지 미처 공개적으로 확정하지 못한 것일 뿐인지, 아니면 하성군 계승도 인정하긴 했으나 '내 나이도 많지 않으니 좀 더 기다려서 중전으로부터 세자를 새로 얻으면 그게 최선이고 정 안되면 하성군에게 계승하자'는, 일종의 차선책 정도였는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조실록과 그 행장에는 1565년 이 해에 병환이 깊어진 명종이 직접 하성군을 지정했다고 기록돼 있다.

2년 후 1567년 6월 28일 명종이 다시 위독해지자 인순왕후 심씨는 하성군을 후계자로 점찍었다. 실록에 따르면 인순왕후는 '을축년의 일에 따라 하성군으로 한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을축년의 일'이란 앞서 말한 하성군의 병 간호를 말한다. 즉 인순왕후 역시 당시 일을 계기로 하성군이 후계자로 인정을 받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준경 외의 신하들도 이를 순순히 수용하였던 것을 보면 이미 신하들 사이에서도 하성군이 적합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마침 하성군의 친부인 덕흥대원군은 일찍 사망했고 친모인 하동부대부인 정씨 역시 하성군이 공식 즉위하기 1달 전에 이미 사망했다. 게다가 정씨의 친정, 즉 하성군의 외가 역시 권세가 큰 편이 아니었으며 아직 혼인하지 않았으므로 처가의 문제도 없었다. 따라서 척신들이 딱히 발호할 여지도 적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반감도 크지 않았다.

당시 하성군 형제들은 모친 상을 당해 복상 중이었지만 명종이 승하하자 하성군이 왕위를 잇는다. 혹시나 요행을 바라고 하성군 즉위에 공이 있음을 주장하는 투서가 밀려들었는데, 영의정 이준경이 '이미 전하께서 직접 정하신 일인데 공은 무슨 공?'하면서 모두 모아 불태웠다고. 참고로 명종실록의 편찬 총책임을 이준경이 맡았다.

야사에는 영의정 이준경이 숨을 거둔 명종에게 귀를 대고 "신이 귀가 잘 들리지 않사온데 하성군으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오리까?" 라고 속삭이고는 좀 뜸을 들인 후 '양위를 허락하셨다'고 외쳤다고. 이때 "덕흥군의 제삼자"라고 조서를 쓰는데 한림 윤탁연이 '三(3)'을 어음 등 중요문서에서 변조를 막기위해 쓰는 參(3) 자로 적어 이준경이 매우 칭찬했다고 한다.[3]

선조는 조선의 첫번째 방계 임금으로 대군이 아니다. 그동안 적장자까지는 아니라도 모두 왕비나 세자빈이 낳은 적자들이 왕위를 이었다. 성종은 삼촌 예종(조선)의 양자로 입적돼 왕위에 올랐지만, 원래부터 의경세자(덕종 추존)와 세자빈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세조의 적손이었다. 당시 예종의 친아들 제안대군도 엄연히 있었다. 3살이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적통 문제를 따져들어가면 성종에게 위협이 될 소지는 있었다. 그래서 의경세자를 추존하고 인수대비를 예종비보다 높이는 약간의 억지를 쓰긴 했다. 반정으로 즉위한 세조, 중종 역시 '대군'들이었다.[4] 참고로 적장자 왕은 7명(문종, 단종, 연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뿐이고 그 중 연산군, 현종, 숙종을 제외하면 재위기간이 모두 10년 미만이다.

조선 역사상 마지막으로 경복궁에서 즉위한 왕이다.

2. 재위 기간[편집]



2.1. 즉위와 목릉성세(穆陵盛世)[편집]


처음부터 선조는 왕이 되기 어려운 위치였다. 선조의 부친인 덕흥대원군은 중종의 9남, 그것도 서자이며 선조 자신은 3남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조선에는 방계승통의 사례가 없었다. 성종의 경우 전대왕 예종의 조카이기는 하지만 성종은 요절한 의경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방계승통이라기보다는 응당 되었어야 할 자리를 뒤늦게 돌려받은 것뿐이다.[5]

익선관 건은 명종이 잘하던 놀이였고 으레 체면치레하는 걸 선조가 왕이 된 이후 확대해석한 걸로 보이며 위의 기록도 애초에 기록 자체가 신빙성이 없는 행장이다. 물론 선조는 명종 승하 2년 전에 명종이 크게 앓았을 때 왕위 계승의 물망에 오른 왕족 중 하나였지만 물망에 올랐던 왕족 중에는 선조보다 항렬이 높은 왕족들도 많아봤자 왕의 아랫항렬에서 양자를 뽑기 때문에 원칙상 제외 되며 명종은 한 항렬 아래의 조카들에서 후계자를 뽑아야만 했다. 명종이 말년에 자리에서 일어난 후 이준경이 만일의 경우 후사를 묻자 명종이 그런 사람 없다고 대답한 일이 실록에 실려있다. 덕흥대원군 항목을 참조하면 덕흥군 부부는 일찍 죽은데다가 덕흥군의 외가도 한미한 집안이었기 때문에 문정왕후에게 20년간 시달린 조선 신료들에게 정치적 목적으로 선택된 사람으로 봐도 무방하다. 조선시대에 적서 차별이 있긴 했지만 왕실에선 사대부들과 달리 그렇게 심한 차별이 있진 않았다. 적자가 있으면 당연히 승계할 수 없지만 적자가 없거나 양자로 들이는건 허용되기 때문이다.

즉위 후 나이가 어려서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인순왕후는 수렴을 단 1년만에 그쳤다. 이를 보아 총명하다고 할만 했다. 즉위 초기에는 낭비를 줄이고 쇠락한 훈구파 대신 사림파를 끌어들여 부족한 정통성을 세우고 또한 명종 치세 때 외척의 전횡이 심했던 내정을 장악하고 조종조의 관례가 된 그간의 폐정을 회복시키려는 제스처를 취했다. 기묘사화조광조가 밀려난 후 무시되었던 방납의 폐단을 비롯한 각종 사회모순 해결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사림 정치 세력들을 상호 견제시켜 정계를 장악했다.

즉위 2년 만인 1569년 송영종의 예를 들어 아버지 덕흥군을 덕흥대원군으로, 어머니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했다. (하동부대부인은 선조의 즉위 1달 전에 사거했다.) 그러나 바로 그 송영종의 예 때문에 아버지를 왕으로 승격시키지 못했다. 선조는 자신의 덕흥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자신의 맏형 하원군과 그 후손들을 정1품으로 세습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그런 예가 없다하여 무산되었다.[6] 조선 예법상 덕흥군은 선조에게 종친 숙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명종의 후사로 이었으므로 법적이나 종법상 아버지는 명종이었기 때문에 친부모인 덕흥군이나 하동부대부인의 제사상에 절을 할 수도 없었다.[7] 실록에서 즉위 40년차에 다시 추숭 떡밥이 나왔지만 별 논의 없이 무산되기도 한다.

다만 총명하였다고 할지라도 즉위 당시 16세라는 어린 나이로, 그것도 세자로서 제대로 된 수업도 없이 즉위하여 아직 제왕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운 면이 강했다. 오랜 기간 왕조가 이어지면서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인식하였으나 제대로 이를 고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명종의 후사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척신 집안의 일원인 인순왕후 심씨의 지명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에 적어도 인순왕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적극적으로 나설수가 없었다. 즉위 직후 이이를 통해 즉위를 반대하던 부패한 척신 심통원[8]을 파직시키는 등 단호한 면모는 보였지만, 붕당이 대두되면서 파당 갈등 문제도 새롭게 부각되었다.

즉위 초반에 어쩐 일인지 중종 임금 시절 역적으로 몰려 숙청된 윤임을 사면 복권 시켰다. 그 이후 윤임의 다섯째 아들 윤흥신이 무과에 급제해 다대포 첨사가 되었고 그 윤흥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2.2. 권력 강화와 기축옥사[편집]


정치 분야에서는 선조의 치세 때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어 격렬한 정치투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처음엔 다소 덜 다듬어진 면이 있던 선조도 왕으로써 감각을 기른 중기 이후 상당한 정치적 수완으로 신하들을 편가르고 이용했다.

이러한 선조의 정치적 수완을 볼 수 있는 사건이라면 정철과 합작하여 몰아간 정여립의 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과 여파로 여러 인사들을 줄줄이 엮어 천여 명 이상이나 죽이고 쫓아내고 하면서도 이 일의 실질적 배후인 선조는 까이기는 커녕 오히려 방관하거나 필요에 따라 편을 바꿔 붙는 등의 제스처로 피해자처럼 행세하는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사화라는 딱지가 붙진 않았으나 피해자들은 대부분 유림이었고 피해 규모는 4대 사화를 합친 것보다 크다. 사실상 선조가 옥사를 주도한 것이라는 견해도 많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억울하게 무고를 뒤집어 쓴 경우가 많았고 결과적으로 선조에게 '복종' 하는 신하들은 많았으나 '충성' 하는 신하들은 드물었으며 이 점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에 대한 하극상이 일어난 점을 볼 때 선조가 정권 장악에 능했음은 사실이나 그 방식이 결코 건강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선조의 입장에서 본다면 즉위 후 11년에 걸처 원상제와 비슷한 형태로 신하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과정에서 취약해진 왕권을 강화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술수였고 실제 선조의 입김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정치적으로 이러한 방식은 올바른 정치 기술이 아닌 정치 술수 및 공작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2.3. 임진왜란[편집]


많은 유림들이 피를 흘린 기축옥사로 더 치열해진 당쟁이 3년째 멈추지 않고 진행되는 와중에 임진왜란이 발발(1592년)한다.

전쟁 발발 전 신립에 의해 왜군이 수전에 강하다며 육상전에 주력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고[9] 축성을 비롯한 실제 전쟁 대비도 이에 역점을 두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당초 조정의 예상을 벗어난 대규모 외침에 전면 패주 상황이 연출되었다. 왜군의 북진 소식에도 선조는 이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고 신임하는 신립에게 육군 주력을 넘겨 왜군을 잘 격퇴해주리라 기대하고 수정실록에 따르면 본래 신립이 끌고 갈 수 없는 경군 8천여까지 지휘권을 주어서 전장으로 보냈지만 신립의 무모한 지휘로 참패. 한양을 사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조는 즉시 몽진을 결정하고 세자인 광해군에게 권한을 위임하여 분조를 넘겨준다.

그리고 선조는 부랴부랴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로 몽진길에 오른다. 파천 자체는 고려-거란 전쟁이나 고려-몽골 전쟁 때 고려 왕실처럼 전쟁 수행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선조의 파천이 욕을 먹는 이유는 전쟁 수행 목적으로 파천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로 튀려고 했다는 것 때문이다. 한양을 떠난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도주할 계획을 잡았는데(이른바 요동 귀부), 파천 직후인 개성에서부터 윤두수가 요동으로 튀니마니하는 소리(선조실록 1592년 5월 4일)가 나왔고, 평양에서 나온 후 영변에서는 선조 본인이 대놓고 요동으로 튀겠다고 징징대기 시작하고 명나라에 망명하겠고 공식 요청을 한다(선조실록 1592년 6월 13일). 명나라는 조선군을 통제해야 할 왕이 딴 나라로 튀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과 너무나 빠른 선조의 도망 속도때문에 혹시 조선이 일본과 내통해서 명을 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겹쳐서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하고[10] 압록강의 배를 요동 쪽으로 철수시켜서 거부 의사를 표했고 결국 의주까지 피난한 선조의 명나라 망명은 무산되었다. 특히 왕실과 종묘 사직과 신주에 대한 모든 권한을 광해군에게 넘기고 본인은 명나라로 도주하려고 하였기에 종묘 사직과 왕실을 지키기위해 도주하였다는 명분도 사라지면서 사실상 한 나라 왕이자 아버지가 자신의 안전만을 지키기 위하여 백성과 나라, 자식들마저 버린 것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특히 평양성의 함락은 두고두고 왜군에게 전략적 거점을 내어준 실책이 되었고 명군을 동원하고도 수개월 이상을 소비해야 했다.

거기에 파천 이후 분노한 백성들이 한성에 쳐들어가 발생한 혼란으로 인해 궁궐이 손실되었다.[11] 그 외에 백성들이 관청을 습격하고 궁성의 창고가 약탈당했다는 실록 기사가 존재하고. 징비록에 따르면 '남대문 안 창고' 가 약탈, 방화당했다고 한다. 이와중에도 왕자인 임해군순화군은 각지에서 온갖 민폐를 끼치고 다닌다. 결국 함경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그들을 들어다 바쳤을 정도.[12] 이쯤 되면 당시 왕실의 평판이 얼마나 실추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선조 본인도 그 후폭풍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군사력을 가진 군벌이 지방 정치세력과 결합, 반란군을 일으켜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을 우려했고[13] 임란 말기에 우려한대로 1596년엔 종실 출신이 벌인 이몽학의 난이 터졌을때 굶주림으로 지치고 불만이 많던 백성들이 순식간에 규합해 수천명으로 세를 불리기까지 하였다. 물론 난민이 속출하고 민심이 불안한 전시라서 가능했던거고, 흩어지는 속도는 더 빨랐지만 선조를 불안하게 만들기엔 충분했고 의심이 매우 심해졌다. 이는 곧 이순신의 백의종군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한창 전쟁중인데도 이런 숙청을 벌였다는 점과[14] 그 대용으로 뽑은 원균의 부대해체능력을 온전히 파악 못했다는 것. 이순신의 대체자로 지정한 원균이 형편없는 지휘로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초전박살나고 하삼도 백성들이 몽땅 왜구한테 고기육포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 부분에선 자신도 양심상 찔렸는지 이순신에게 보낸 교서에서 "자기도 사람인지라 실수를 했고 뭐라 할 말이 없다"고 말할 정도.

따지고 보면 칠천량 해전의 원인 자체가 선조다. 안나가려 핑계대는 원균에게 "안 나가면 사사로이 자신도 절대 용서 못한다"고 협박까지 했기 때문이다.[15] 그러나 사건이 터지고나서는 하늘이 한 일이라고 둘러댔다. 이에 대한 책임회피는 전후 논공행상에 이어져 조선 수군을 녹여버린 일본국가유공자 원균 따위를 억지로 선무일등공신으로 추증시켰으며 이것이 1980년대 원균 옹호론의 시발점이 된다. 원균정론으로 원균옹호론을 처음 부각시켰을 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선조 옹호였으며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추증할 때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한 공이 있다" 라고 했으며 이것은 "도움을 청한 것도 공"→"나는 명나라에 도움을 청했음"→"나도 공 있다능!" 이러한 식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2.4. 후계 문제[편집]


임진왜란-발발 후 의주까지 몽진하면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그에게 분조를 맡겨 황폐해진 민심을 달래고 만약을 대비하도록 했다. 사실 장남 임해군이 차남 광해군보다 우선 순위이긴 하지만, 임해군이 취미삼아 백성들을 살해할 정도로 워낙 광패한 악한이라 사회적 인식이 나빴고 그로 인해 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그런데 세자에게 분조를 맡겨놓고서도 항전 활동 중인 그 세자 때문에 자신이 왕 자리에서 밀려날까 불안감을 가진다. 그래서 임진왜란 중에도 잦은 양위 소동을 벌였으나 당연히 양위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잦은 양위 소동은 세자의 정치적인 위상을 떨어뜨리고자 하는 쇼로 보는 입장이 많다. 다만, 너무 잦은 양위 소동으로 실록을 편집하던 사관조차 빡쳤는지 실록에서 디스하는 것을 볼 수 있다.[16]

사신은 논한다. 상이 200년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당저(當宁)에 이르러서 남김없이 다 멸망시켜 놓고 겸퇴(謙退)하면서 다시는 백성의 윗자리에 군림하지 않고자 하여 하루아침에 병을 이유로 총명하고 인효(仁孝)한 후사(後嗣)에게 대위(大位)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 심정은 진실로 서글프나 그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대신(大臣)으로서는 눈물을 흘리며 봉행하더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백관을 인솔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극력 간쟁하여 반드시 승락을 받고서야 그만두려 하는가.

(중략)

끊임없이 간쟁하여 상의 훌륭했던 생각을 중지시켰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선조실록 1593년 9월 7일

한 마디로 그냥 말리지 말고 양위하라고 내버려 뒀어야 했다는 이야기인데다가, 그것도 모자라 마치 선조의 결단을 칭찬하는 듯한 단어를 써서 무척이나 비아냥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잦은 양위 소동에서 드러난 변덕과 견제, 이후 선조와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의 탄생까지 겹치면서 광해군으로선 아버지와의 사이가 껄끄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광해군의 세자 자리가 위협받진 않았다. 조정 당파 중에서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건 소북 그 중에서도 유영경의 탁소북에 국한된다. 나머지 대북, 청소북, 서인, 남인은 모두 광해군을 지지했다. 전란 기간 중 신하들에게 전위 권유를 받았을 정도로 선조의 권위가 취약했던지라 전란을 통해 능력이 검증된 세자를 교체할 힘이 없었고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할 명분도 없었다. 선조 승하 당시 영창대군 나이는 겨우 2살이다. 게다가 광해군이 서자라는 것도 당시 종법 해석으론 별 문제가 안되었다. 살제에서 폐모로 이어지는 일련의 비극은 어디까지나 광해군이 지고 가야할 책임이다.

결국 이런 양위 소동에 제대로 열받은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은 선조에게 양위 소동을 두고 유영경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양위 소동의 주범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선조의 까는 상소다. 이 상소를 읽은 선조는 빡쳐서 정인홍을 귀양보낸다. 결국 선조는 양위 소동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 세자의 지위까지 흔들어가면서 벌인 쇼라는 것을 선조가 직접 인증해버렸다.

음모론 중에는 위험을 느낀 광해군이 그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이른바 "찹쌀밥 독살설". 간신히 몸을 회복하던 선조가 찹쌀밥을 먹고 그날 바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선조가 때때로 영창대군을 세자로 바꿔볼까 방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왕조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왕과 왕세자의 갈등 구도의 연장선이었고 나이 차이때문에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실제로 선조는 죽기 며칠 전에 광해군을 정식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교지까지 완성해 영의정 유영경에게 건넸으나 유영경은 이를 자신의 집에 몰래 빼돌린 채 선조가 입장을 번복해주길 빌며 시간을 끌다가 끝내 적발당했다. 이런 음모론 때문에 허준까지도 졸지에 국왕 살해범으로 왜곡되기도 했지만 이런 모함에 낚이지는 말자. 당대에 이미 헛소리 취급받고 있었다. 당장 광해군을 쫓아낸 인조반정 세력도 이 주장은 믿지 않았다.


2.5. 여진 정책[편집]


가장 무시되는 선조의 치적

"선조 대왕께오선 북로(北虜, 여진)에 대처함은 명석하고 뛰어났으나, 남왜(南倭, 일본)를 대처함은 명석하지 못했다."


임진년 10년 전에 니탕개가 2만 ~ 3만여 명의 여진족 기병으로 조선을 침공하자, 신립을 보내 효과적으로 막아냈다(니탕개의 난). 방어에 성공한 선조는 북병사 이제신과 장수들을 보내 금득탄 등 여진족 소굴 700여 굴을 초토화시켰다. 이어 여진족들이 녹둔도를 습격하여 조선인 10여 명을 살해하자, 선조는 2천 5백여 명의 경장사와 토병 군대 등을 보내 여진족 머리 350여 급을 베고, 여진족 산채 200여 채를 불태웠던 적이 있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 있다면 바로 왜란 뒤의 여진족 정벌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혼란스러운 조선의 상황을 틈타 노략질을 감행했던 여진족은[17], 임진왜란이 끝나자 본젹적으로 그 세가 강성해지기 시작하더니 임란 후의 혼란한 조선의 국내정세와 맞물려 본격적으로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그 중에서도 무산(茂山) 부근에 있던 노토(老土)의 부락은 1598년경부터 조선의 변경을 위협하기 시작하였고, 분노한 선조와 조정은 이들을 토벌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그 즈음에 1599년 함경감사 윤승훈(尹承勳)이 노토 정벌의 의견을 15개항으로 정리해 올리자, 선조는 이에 대해 크게 칭찬하며 전폭적인 지지를 천명하게 된다. 사헌부가 2차례에 걸쳐 반대 의견을 개진했으나, 선조는 듣지 않고 자신을 지지하는 신하들과 함께 노토 토벌에 대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1600년 4월 14일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18]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했다. 여기서 조선군은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여진족이 철저하게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잘 타지 않은 가옥들은 도끼로 때려부쉈다. 산위로 도망간 여진족은 위에서 바라만 보고 울부짖었고, 여진족이 파묻은 곡식까지 다 파내어 불태웠으며, 밭에 심은 곡식은 모조리 짓밟고 곳곳에 방화를 저질렀다. 이수일은 후에 올린 장계에서 '매우 장쾌했다'라고 평했다. 이를 통해 아주 오랜만에 대규모 여진족 집단에 큰 타격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 지역의 여진족들이 다시금 조선에 복속하도록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1603년 누르하치의 만주 통일전쟁에 의한 여파로 누르하치와 그의 적대세력은 조선에 복속되어 있던 여진 부족들(번주)을 자기 세력으로 편입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와중에 훌라온이 조선을 공격, 1605년엔 동광진을 함락시키기도 했다. 결국 이들을 징벌하기 위해 북병사 김종득(金宗得)은 현지의 병력을 징집하여 4월에 1차로 이항(伊項)과 우허(牛虛) 부락을 공격하여 80여 명을 죽였고, 5월에 2차로 함경도포수·사수(射手) 3천 명과 번호 탁두(卓斗)가 거느린 여진족 기병 3백 기를 이끌고 건가퇴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하였다. 그러나 여진족 기병과의 접전에서 위기에 몰렸고, 우후 성우길(成佑吉)의 활약으로 적 50여 명을 죽이고 간신히 후퇴에 성공하였으나 정군(正軍)으로서 전사한 자만 213명이라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함경감사 서성(徐渻)이 파직되고 김종득은 유배되는 등 처벌을 받았다.

선조는 이후 대규모의 병력을 다시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 뒤로는 움직임이 없었고, 조선의 울타리가 되어주던 복속 여진족인 번주는 누르하치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이후 여진족을 정벌하는 것이 아닌 방어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1] 하동 정씨라는 뜻. 집현전 학사,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의 증손녀다.[2] 군호는 경남 하동군(河東郡)에서 유래했다[3] 이런 방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결제 수단에 쓰인다. 석 삼(三. 3)을 쓰면 다섯 오(五, 5)나 심지어 만(萬, 10000), 억(億 : 초기에는 10만의 표현이었으나 현재는 1,000,000,000!)으로 바꿔버리기 쉬우니까. 이것은 한 일(一, 1 -> 壹)과 두 이(二, 2 -> 貳)에도 적용된다.[4] 다만 정현왕후는 처음에 후궁으로 입궁했다가 폐비 윤씨가 쫓겨나자 왕비가 되었고 뒤이어 아들을 낳았다.[5] 사실 위로 형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 실세였던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6] 그러나 결국 후대에 덕흥대원군 봉사손들은 한일합방 전까지 정3품 대우를 받으며 종친부 군 작위를 대대로 세습한다. 조선 말 효종의 자손이 희소해진 상황에서 이들은 선조 가문의 적통 계파로서 우대받았으며 철종 시절 봉사손이었던 이하전의 경우 안동 김씨의 경계를 사 사사되기도 했다.[7] 대원군은 왕의 생부라서 인정상 예우하는 것이지 그 지위가 신하에 불과하기 때문에 임금이 신하에게 절 할 수 없기 때문.[8] 심의겸과 인순왕후작은 아버지[9] 이순신의 반대로 수군 전폐론은 없어졌지만 부산진, 다대포의 경상 좌수군이 바다가 아니라 각 성에서 항전한 점, 경상 좌수사 박홍이 이천 병력으로 동래 산성으로 간 점 등을 보면 경상 좌수영에 한해서는 이루어진 듯 하다.[10] 100명이라 함은 작은 고을의 수령 쯤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이다.[11] 노비들을 혹독하게 추쇄한 것으로 유명한 장례원에 난민들이 방화했고 이것이 경복궁으로 번져 궁궐이 소실되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왜군의 한양 입성 후 경복궁을 묘사한듯한 기록도 존재하기 때문에 이때 경복궁이 불타지 않았다는 설도 존재한다.[12] 물론 이들은 정문부가 이끄는 함경도 의병에게 제거된다.[13] 일단 조선부터가 대홍건적, 대왜구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성계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나라다.[14] 숙청으로 유명한 한고제와 스탈린도 적어도 강력한 적을 앞두고 전쟁을 할때는 숙청을 하지 않았고, 한신, 주코프 등 마음에 안들어도 유능한 인재들은 중용했다[15] 하지만 이건 원균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기도하다. 왜냐하면 원균이 통제사의 자리에 오른 이유는 선조의 총애도 있었지만 원균 스스로가 자신이 통제사가 되면 부산을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장계를 올렸기때문이다.[16] 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은 양위 파동을 일으킨 왕이다, 그것도 전란 도중에 이런 쇼를 계속 벌이니 사관이 화내는 것도 이해는 간다.[17] 당시 정현룡(鄭見龍)이 군사 1325명, 항왜(降倭) 25명을 동원하여 반격을 가해 역수의 부락을 공격, 266명의 수급을 베었고, 투정내(投丁乃) 등이 추장으로 있는 두만강변의 부락도 공격하여 60명의 수급을 베었다.[18] 곤양군수로 이순신 아래서 종군했다.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