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국왕 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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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왕 세조
1.1. 주요 치적
1.2. 철권통치
1.3. 공신 우대 정책
1.4. 호불(好佛) 군주
1.5. 한계와 비판
1.6. 사후 간접 디스



1. 국왕 세조[편집]



즉위했을 때 의외로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39세 때 왕으로 즉위했는데, 이는 건국을 해야 하는 사정이 있던 초대 태조 이성계(58세)와 2대 정종(42세)에 이어 역대 조선의 국왕 중에서 3번째로 고령이다. 4번째는 37세에 즉위한 형 문종(3살 터울)으로 이후 태종(34세), 광해군경종(33세)이 뒤따른다.


1.1. 주요 치적[편집]


조선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전 《경국대전》 편찬을 명하여 시작하였다. 경국대전은 이미 세조 치세에 호전과 형전은 이미 완성이 되었으나 그 외 법전에 대해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성종 즉위 후 15년이 지나서야 최종적으로 반포가 될 수 있었다. 전 왕조 고려가 6전식(六典式) 법전을 완비한 바가 한번도 없음을 고려해 보면, 한반도 왕조 최초의 국가 공인 성문법전인 경국대전 편찬은 세조 최고의 업적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1] 한편으로는 태종처럼 6조 직계제를 실시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여러가지 제도를 재정비해서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였다. 그 과정에서 시국과 정치를 토론하는 경연도 폐지하고, 집현전도 문을 닫아버렸는데, 이는 단종 복위운동의 후폭풍이었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존재하였던 집현전의 기능은 예조로 넘어갔다가, 다시 성종대에 그 기능을 부활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홍문관이다. 삼사 중 하나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쪽도 언론기관인 동시에 왕권의 견제기관이었다.

6조 직계제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으나 공신들에게 엄청난 특권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세조 사후 이 공신들이 훈구척신이 되어 왕권을 견제하였기 때문에 좋게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게다가 그 공신이란 것들이 엄청난 부정부패와 온갖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감싸고 도니... 이것은 어떻게 보자면 정조의 경우와 유사하다. 강력한 신권을 억눌러서 왕권을 강화해놨는데, 후대의 왕들이 이것을 유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안되니까 오히려 친위세력들이 권신이 되어버린 경우인데, 다만 정조는 저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자세한 것은 암군 항목을 참조하자.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깊었다. 세자 신분이 아닌 상황에서 왕이 된 경우,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왕이 된 후 백성들의 삶에 보다 주의를 기울인 경우가 많다. 세종대왕 때의 나름 악법인 "수령 고소 금지법"이 폐지가 된 것도 이 때였다. 다만 조선 초기 수령 고소 금지법을 시행한데에는 지방 토호들을 견제하고 중앙집권을 시행하려는 의도가 존재하였다. 심지어는 조선 초기에는 지방관들이 토호들에게 살해당한 경우도 존재했던 모양. 처녀귀신이 자신의 한을 풀어달라고 "으흑흑..." 하고 울자 새로 부임한 사또가 으악하고 죽었다는 신원설화는 이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허나 이때가 되면 호족들의 세력도 많이 약해졌으므로 유향소를 폐지하고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등, 직접적인 방법을 쓰려한 것으로 보인다. 행차 때 마다 백성들을 직접 만나서 의견을 들은 것도 이 때였다. 스스로 롤모델로 삼은 당태종처럼. 그러나 이 시기부터 세조가 임명한 공신들의 횡포가 매우 심각했던 것을 생각해보면(가령 홍윤성이라든가...)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의도는 좋았고 마음가짐은 훌륭했던 건 사실이지만, 정치는 그런 의도나 마음가짐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군사적으로도 업적을 남겨서, 문종의 5위 진법 사상을 계승하여 중앙군의 편제를 바꾸었으며 지방에 전국 55개의 진을 설치하여 진관체제를 마련했다. 물론 이는 세종대왕 때부터 정비된 군사제도의 결과인 면도 있다. 어쨌든 군사를 정비하여 1460년에 신숙주를 북방으로 파견하여 여진족의 본거지를 크게 들쑤시고 돌아왔고(경진북정庚辰北征)[2], 이시애의 난 직후에는 남이, 강순 등으로 하여금 세종대왕 때부터 조선 변경에서 골치를 썩인 이만주를 참살하는 개가를 올렸다.(정해서정丁亥西征) 이 과정이 골때리는데, 세조는 이만주는 지금쯤 숨었을 건데, 괜히 서둘렀다가 명나라 놈들에게 "니들이 실수해서 놓쳤으니 어쩔거임?"이라는 개소리를 들을 바에야 그냥 아예 처음부터 늦게 갈 것을 명했는데, 느릿느릿 이만주의 소굴로 들어가자, 이만주는 자기 병사들은 죄다 원정을 보내놓고 참모 이하 일족들과 '날 잡아 잡수!' 하고 있지 않은가? 이로써 조선의 군대는 태종 시절부터 조선 국경에서 분탕질을 했었던 이만주를 잡아죽이는 통쾌한 공을 매우 손쉽게 거두게 되었다.[3]

군주로서의 책임감과 자의식이 대단히 강해서, 재위 기간 중 매우 정열적으로 일을 했으며 몸가짐을 검소히 했다. 왕이 왕궁에서 무명옷을 입고 짚신을 신고 다녔으니 말 다했다. 또한 그는 을 아주 좋아했는데, 자신은 술은 좋아하나 여색을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신하들이 "전하, 이제는 후궁 좀 들이시는게 어떻겠사옵니까?" 하고 청하자 "난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점잖게 거절했다. 실제로 세조의 후궁은 반정 전에 맞이한 근빈 박씨와 소용 박씨 둘 뿐이다. 근빈(謹嬪) 박씨는 사육신 박팽년의 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 따르면 본관이 다르다고 하니 박팽년의 누이일 가능성은 없다. 후일 근빈 박씨는 오래 산 덕분에 춤에 능하다는 이유로 팔순의 나이에 연산군 앞에서 춤을 춰야만 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세조는 연산군의 증조부이니, 근빈 박씨는 증손자뻘인 연산군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춤을 췄던 것이다.

소용(昭容) 박씨는 덕중이라는 이름의 여인인데 아들도 일찍 죽었고 세조의 관심에서 멀어졌다.중이라서 덕이 없어서 그렇다더라 외로워진 그녀는 세조의 조카인 구성군에게 연달아 구애를 하다 사단을 낸다. 임금의 후궁이 보낸 구애편지[4]에 기겁한 구성군이 두번 다 바로 달려가서 세조한테 보고하였고, 분노한 세조에 의해 편지를 배달한 내시 둘과 소용 박씨 모두 죽임을 당한다.[5]기생관도 독특하여, 기생들을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으며 기생들이 술자리에 나올 때는 아예 얼굴에 분칠을 해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잠실(蠶室)이란 지명은 세조가 만들어 냈는데, 왕족에게 누에치기를 널리 하게 했다. 그때 누에를 키우는 곳이 지금의 잠실이 되었다고 한다.

교과서나 두산백과, 위키백과 등에 나오는 공식적인 주요 치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6조(六曹) 직계제(直啓制)를 부활시켜 왕권을 강화했다. 특히 실무적인 업무를 담당하던 6조의 권한이 세조 이후 크게 상승하였고, 귀신도 부릴 정도로 크게 성장했던 삼정승의 위세를 경계하여 도승지와 삼정승이 서로를 견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중국처럼 왕까지 유린할 수 있는 강력한 권신이 나타나는 것을 막으려 했다.
  • 이시애의 난(1467)을 계기로 유향소(留鄕所)를 폐지하고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는 등 조선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 국방력 신장에 힘써 호적(戶籍), 호패제(戶牌制)를 강화하고 최초의 조직적인 지방 군사지휘 체계인 진관 체제를 실시하여 전국을 처음으로 방위체제로 편성하였으며 중앙군을 5위(五衛) 제도로 개편하였다. 군제(軍制)를 확정하고 각 역로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신설,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했고, 각 도에 거진을 설치했다.
  • 북방개척에 힘써 1460년(세조 6) 북정(北征)을 단행, 신숙주로 하여금 두만강 건너 야인을 소탕하게 하고, 1467년(세조 13) 서정(西征)을 단행, 강순, 남이, 어유소 등으로 건주 야인을 소탕하는 등 서북면 개척에 힘쓰는 한편, 하삼도(下三道) 백성을 평안, 강원, 황해도에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단행하는 등 국토의 균형된 발전에 힘썼고 각도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
  • 세조 12년 경제정책에서 과전법(科田法)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하여 현전직 관료에게 모두 사전(私田)와 급료를 지급하는 과전제를 폐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여 국가수입을 늘렸다. 세조 이전까지는 은퇴, 퇴직한 사람에게도 현직관료와 똑같이 토지를 주고 심지어 그의 자식들이 음사로 이 혜택을 받아가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먹으며 국가재정을 축내는, 지금 보면 완전 미친 상황이었는데 이전까지의 왕들은 문제의식이 없거나 있더라도 지금 당장은 별 문제 없으니 뭐.. 하고 그냥 방치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수십년에 거쳐 조선 정부의 재정에 악화가 엄청나게 쌓여있었다. 세조 12년부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직전제를 밀어붙였으며, 자신이 아끼고 비호하던 공신들에게도 직전법만은 철저히 따르게 했다. 이때 전직관료를 토지지급 대상에서 제외하고, 관료의 과부나 자녀 등 유가족에게 지급하던 수신전(守信田), 휼양전(恤養田) 등의 명목도 폐지하였다. 그 지급액도 과전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성종대에 또다시 직전법의 문제점을 시정하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시행하였고 이 두번의 개혁과정을 거치며 조선의 재정이 크게 안정화되었다. 기타 수령 고소 금지 같은 여러 악법들도 이시기에 모두 사라진다.
  • 궁중에 잠실(蠶室)을 두어 비와 세자빈으로 하여금 친히 양잠을 권장하도록 하는 한편, 사시찬요(四時纂要), 잠서주해(蠶書註解), 양우법초(養牛法抄) 등의 농서를 간행하여 농업을 장려하였다.
  • 개인적으론 즉위 전에 역대병요(歷代兵要), 오위진법(五衛陣法), 의주상정(儀註詳定) 등을 편찬했으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토지제도를 개혁했다. 1465년(세조 11)에는 발영 ·등준시(拔英登俊試)를 시행해 인재를 널리 등용하였고,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훈사십장(訓辭十章), 병서대지(兵書大旨) 등 왕의 친서를 저술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사서(史書)를 편찬하도록 했다. 번역 활동에도 전념하여 여러 불경과 운회(韻會)를 직접 번역했다.
  • 국초 이래의 경제육전(經濟六典), 속육전(續六典), 원육전(元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 등의 법전과 교령(敎令)·전례(典例)를 종합 재편하여 법전을 제정하고자 최항, 노사신 등에게 명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하게 함으로써 성종 때 완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성문법인 경국대전은 기존 관습법을 주로 사용하던 전대와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조선이 중세국가를 넘어 근세국가로 평가받는 중요한 도약점이다.
  • 불교를 숭상하여 1461년(세조 7)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신미, 김수온 등에게 법화경, 금강경 등 불경을 간행하게 하는 한편, 대장경 50권을 필인(畢印)하기도 했다. 이후 훈구파 공신들과 사림파 신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각사신륵사, 수종사 등의 중건을 지원하였으며, 기타 강원도의 월정사, 상원사, 파주의 보광사, 남양주의 수종사와 양평의 용문사, 합천의 해인사, 금강산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등을 직접 방문하여 시주하고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이 시기 한국의 불교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 면리제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면리제는 한국의 땅과 마을들을 하나하나 세심히 연구하여 만든 지방 행정체계로 조선과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일제 시기를 거쳐 현재에도 우리나라의 주요 행정구역 제도로 사용되고 있다.
  • 규형(窺衡), 인지의(印地儀)라는 토지측량기구를 직접 발명, 제작하여 토지 측량을 용이하게 하였다.
  •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빛나는 종묘제례악의 개념이 이때 바로잡히고 사실상 완성되었다. 그 외에도 세조가 직접 기보법인 오음약보(五音略譜) 등을 창안하기도 했으며 대악후보와 같은 책을 통해 세조의 높은 음악적 치적을 살펴볼 수 있다.
  • 금속활자와 활판 인쇄술이 크게 발달했다. 대군시절 세종대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의 제조에 참여하였고, 이후 세조시기에 정축자(丁丑字), 을해자(乙亥字), 을유자(乙酉字) 등이 만들어졌는데 이중 갑인자와 을해자는 조선 초중기에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특히 을해자병용(乙亥字倂用)은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활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서적의 보급이 확산되었다. 특히 역사 관련 서적을 편찬, 재간행, 중수하고 이를 반포하여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에게도 필독을 권고하여 국가의식,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는데, 국조보감(國朝寶鑑)의 편수,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정비 등 일련의 편수,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고 이밖에도 오륜록(五倫錄), 역학계몽도해(易學啓蒙圖解), 주역구결(周易口訣),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동국지도(東國地圖),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 등의 편찬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 중에서도 훈민정음으로 번역된 불경, 불서들이 대량으로 전국에 유통되었고 세조가 직접 불경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1.2. 철권통치[편집]


하지만 왕권만은 확실하게 철권통치였다. 앞의 불교만 해도 그렇고, 황제들만 할 수 있는 원구단을 세워 하늘에 제사지내는 행위도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명나라 놈들 몰래하던 제사를 대놓고 했다. 도성 한복판에 큰 부지를 만들어서 원각사를 지었을 때도 신하들의 반대 의견은 커녕 좋은 기운이 감돌았다는 칭찬만 나왔다.

공신들도 예외가 없어서 대신의 수장 중 하나인 정인지도 세조에게 숱한 분노를 산 적이 있는데, 연회에서 풍수지리에 대해 논하다가 정인지가 평양과 개성이 어째서 한양만 못한 도읍인지를 풍수지리학적으로 설명하다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풍수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갔다간 전하께서 잘 모르시니 못 알아들으실겁니다."이라고 말했다가 "원로대신이라고 대접해 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혼내주고 싶지만 술취해서 그런거니 한 번 봐준다."라고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다. 게다가 세조는 세종, 소헌왕후, 문종, 의경세자의 장례에 깊이 관여하여 장지를 잡는데 일조하는 등 풍수지리에 매우 능통한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프라이드가 높은 수양에게 "너 이거 모르지? "라고 했으니 눈이 돌아가 버린 것.

정인지 외에도 병조판서를 지낸 이계전 역시 술자리의 피해자다. 이 사람의 조카가 사육신의 한 명인 이개. 그래서 사극 왕과 비에서 이개가 죽기 직전 절명시를 읊으면서 이계전을 쳐다보자 이계전이 시선을 피하는 장면이 나온다. 할아버지는 고려 말의 대유학자인 이색이다. 술자리에서 이계전이 세조에게 술이 과한 듯 하니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라고 권하자 격분하며 병조판서의 머리를 붙잡고 사정없이 곤장을 친뒤, 애정을 담은 행동이였다라는 식의 과격한 행동도 서슴치 않았다.

실록의 원 표현은 이렇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찌 나와 같겠느냐?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좌익 공신의 높은 등급에 올려 놓으려고 하는데, 너는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라며 다독이자, 이계전은 그저 통곡할 따름이었다고 한다. 야사에 나올 법할 스케일로 신하를 욕보인 이 이야기는 분명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세조실록> 세조 1년(1455) 8월 16일 기사 참고.

그의 철권통치의 또 다른 희생자로는, 강맹경과 권람이 있는데 갓 영의정에 임명된 강맹경과 우의정에 임명된 권람이 잔치를 벌이는 세조에게 "술을 마시고 놀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라고 간했다가 세조가 분노하면서 "야, 우리가 술먹고 논지가 하루 이틀도 아닌데, 지금껏 내가 못마땅했다고 그런거냐?" 식으로 말했다. 경악한 두 대신은 허겁지겁 하면서 해명을 했으나, 세조는 이들을 갈아치워서 좌의정 신숙주를 영의정에 앉히고, 이인손을 우의정에 앉히니 강맹경과 권람이 정승에 임명된지 고작 5일 만이었다. 역대 영의정 중 최단임 기록이었다.

그런데도 세조는 강맹경과 권람을 파직했음에도 녹봉만은 정승으로 일하던 때처럼 지급할 것을 명했고, 이에 강맹경과 권람이 궐밖에서 엎드려 사례했는데 이에 마음에 약해진 세조가 그들을 불러 "경들이 옳은 말을 했는데, 내가 너무 심했다."라면서 그들의 자리를 원상복구 시켜주니 영의정 신숙주는 4일 만에 좌의정으로 돌아가 신기록을 갱신하고, 이인손도 우의정 자리를 내놔야 했다.[6]

심지어, 야사 용재총화에는 예문관 문신들을 한여름에 뜰 가운데 앉혀 놓고, 하루 종일 뙤약볕을 쬐게 하며 근무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세조는 "능히 춥고 더운 것을 견뎌 본 후에야 큰 일을 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말하자면 일종의 극기훈련 같은 것을 신하들에게 시킨 셈이다. 사실 신하들만 시킨 건 아니고, 이 때 세조 자신은 창문을 닫고 솜옷을 입은 채 화로를 방 가운데 켜놓은 채로 정무를 봤다고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때는 한여름이었다.[7]

이 외에도 신하들을 구타하거나 욕보이는 일화는 꽤 많다. 신하들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사실, 어쩌면 이 사례들은 모두 신하들이 함부로 왕에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휘어잡기 위한 행동이였을 것이다.

문제는 당시 기준으로도 저런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영의정을 포함한 삼정승은 국가의 최고위직으로 신중을 기해야하는 자리인데 그냥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덜컥 날려버리고 며칠만에 다시 원상복귀시키는 등의 행위는 다시 말해서 세조가 국가통치체제를 스스로 무시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신하들을 막 대한다고 왕권이 강해지는게 아니다. 저 경우에는 왕권 강화가 아니라 그저 협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무제당태종을 유난히 좋아했으며, 한 고조 유방송태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세조의 아버지는 한무제를 좋게 보지 않았다.) 유방의 경우는 공신을 멋대로 토사구팽시킨 인물이라 배울 게 없는 인물이라고 말했고, 송태조 조광윤은 뭔가 우유부단하고 화끈한 맛이 떨어지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그래서 조광윤이 도끼자루로 신하의 옥수수를 털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그 양반 재위기간 동안 자기가 화끈하게 결단한 것은 그게 유일하구만.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언젠가 권람이 세조를 유방에 비유하여 칭송하는 시를 올리자 뭐? 유방? 공신을 파리 잡듯이 죽여버린 배울 게 없는 양반을 감히 나랑 비교해? 과인은 공신들이 반역을 저지르지만 않으면 절대로 해치지 않을 것이야!라고 크게 화를 내기도 했다. 이 발언만 보더라도 그의 체제를 분석하는 능력이 세종과 문종에게 크게 미치지 못함을 잘 알 수 있다. 세조는 이 말대로 토사구팽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게 결과적으로 세조 최대의 폐단으로 남은 것을 잘 생각해보자.[8]

아버지인 세종은 고려시대의 분할적 재정 운용의 폐해를 문제시하였다. 쉽게 말해 왕실에서 쓸 돈은 왕실에서 걷고 개경부에서 필요한 돈은 개경부에서 걷는 방식.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중앙에도 세원을 파악하는 호부와 회계 출납같은거 해주는 삼사가 따로 있고 또 세금 걷는건 일선에서 또 따로... 때문에 세종은 왕실재정을 따로 안챙기고 전부 중앙재정으로 편입시켜서 현대와 같은 이른바 '국용전제'를 완성시켰다.

반면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조 산하에 내수사를 설치하여 다시 왕실재정을 분리시켰다. 결국 쉽게 말해서 딴주머니를 찼다는 소리다. 아무튼 내수사는 고종황제 때까지 혁파됐다가 부활했다가 계속 반복되지만 중요한 것은, 세조 이후 왕실이 호조에 손 안벌리고 따로 돈을 쓰기 시작했으며 나중에는 관둔전이라는걸 설치해서 고려시대와 똑같이 관청이 따로 자기들 경비를 세금으로 걷기 시작해서 결론적으로 아버지인 세종대왕이 그토록 개고생을 해서 고쳐놨던 조선의 재정제도는 간단히 박살나버렸다. 이후 조선이 망할때까지, 이러한 분할재정의 문제는 두고두고 조선의 발목을 잡게 된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6년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도 재정 일원화는 중요하게 논의된 개혁안이었으니 뒤집어 보면 분할 재정이 조선시대 내내 큰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3. 공신 우대 정책[편집]


신하들을 죽이는 것만은 피하자는 생각이었던 듯 하다. 계유정난 때 살생부까지 작성해서 죽여댔으니, 더 이상 죽였다간 능력있는 정치할 인재들이 없어서였던 면도 있을 것이다. 당시 급제한 김종직이 잡학을 배우라는 세조의 의견에 반발했지만 살아남았고, 한명회와 신숙주도 이시애의 난 때 목숨을 건졌다. 세조앞에서 세조를 '너'나 '상왕'으로 부르는 말실수를 자주 했던 정인지도 살아 남았다. 이런 모드였던데다 한명회, 신숙주을 필두로 하는 많은 공신들에게 토지를 마구 퍼주는 바람에 예종, 성종 때 신권이 무척 강해지게 되는데, 이는 핵심 공신들을 몰아내고 공신세력들의 힘을 억눌러서 후대까지 강한 왕권을 확립한 태종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공신세력들을 1차로 싹쓸이해버린 인물은 바로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었다.

유일한 예외가 양정인데, 왜 죽었는지는 문서 참조.

워낙 술을 좋아하고 공신들과 잦은 술자리를 가졌던 터라, 아침에는 숙취 때문에 일찍 일어나기를 힘들어했다고 한다. 본래 늦어도 6시 정도에는 시작되어야 할 왕의 일과가 세조 때에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시작했다고 한다. 돌려 말했지만 결국에는 숙취.

기존 항목에서 빠진 것이 있는데 세조의 공신 우대 정책은 두고두고 조선의 발목을 붙잡게 된다. 바로 공신 우대 정책을 통해 힘을 가진 훈구파를 생성한것.

1.4. 호불(好佛) 군주[편집]


왕자 시절부터 불교를 숭상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문종 때는 "불교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배척하는 망령된 자이니 나는 절대로 그딴 놈 취하지 않겠다!"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그래서 이 일화는 그의 호불 성향 뿐만 아니라 야심을 드러내는 일화로도 소개된다. 사헌부에서 도첩이 없는 승려를 잡아가자 멋대로 풀어주는가 하면, 공자보다 석가모니가 훨씬 낫다고 했으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스스로 "나는 호불(好佛)의 군주다!"라고 선언했을 정도. 원각사를 세우는 등. 불교와 관련된 업적도 여럿 존재한다. 아예 정부에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경을 대량 간행하는 관청을 만들었으며, 세조가 친필로 써서 부처에게 봉안한 문서도 존재한다. 태조 이성계와 말년의 세종 이후로 불교에 우호적이었던 마지막 조선의 왕이다. 참고로, 이 때 간행된 월인석보 같은 불경들은 언문으로 간행을 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조선시대의 한글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상원사 등 세조와 관련된 설화를 가지고 있는 절들이 좀 있다. 다만, 이 모든 행동은 공식적으로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세조 개인의 행동으로 처리되었다.

이런 호불정책을 많은 인명을 살상한 세조의 속죄의식과 연관지어 해석하기도 하는데, 불교에 대해서는 왕자 시절부터 호감을 나타냈었고 왕자 시절에 어머니 소헌왕후가 병상에 있을 때 궁궐에 법당을 지어 심신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외톨이 조카에겐... 그런 거 없었다. 적어도 실록 속에 나타나는 '거침없는 행동주의자이자 야심가' 유형의 인물됨됨이를 생각하면 그가 과연 죄의식으로 고통받았을지는 의문이다. 그냥 개인적인 취향이 불교였고 속죄의식과 연결짓는 것은 세조를 비호하기 위한 주장일 가능성이 꽤 크다.

그의 불사에 관해 세종, 문종 때와 비교하면 매우 재밌는 차이가 있다. 세종, 문종 때는 작은 절 하나 세우는 것이나 작은 불사 하나 하는 것에도 온 조정이 거의 개지랄을 해댔으나, 세조 때에는 신하들이 굽실거리면서 '이번에 새로 짓는 절에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합니다!'라고 아첨을 떨었다. 다시 말하자면, 신료들의 간언에 귀를 기울였던 아버지, 형과는 달리 세조 본인은 신료들의 말을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실 세종이나 문종의 왕권 또한 상당히 강한 편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러한 태도 차이는 세종, 문종이 '신하들이 간언하면 들어주는' 왕이었던 반면 세조 치세에는 왕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쉽게 주장하기가 어려운 풍토가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유교정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간들의 힘을 바닥까지 추락시킨 왕도 세조였다. 세조 집권 이전에는 신하들이 직접 왕에게 의견을 제의하고 정사를 논하는 주장을 하는 이유와 그 근거를 왕이 함부로 묻지 않는다는 암묵의 룰이 있었을 정도였다. 또 세종이나 문종이나 훈민정음 창제와 같이 불사보다 더 큰 일을 벌일때도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신료들을 설득하면서까지 밀어붙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게다가 조선의 국교가 유교였던 것을 고려하면 이렇게까지 막나가는 호불정책은 국왕 스스로가 조선의 기초를 무시했다는 말이다.

1.5. 한계와 비판[편집]


명군인 척 하는 암군
재위 내 보인 다소 많은 큰 업적만 보면 나름대로 정치를 괜찮게 한 임금으로 보일 법도 하지만 그렇게 평가받을 수 없게 하는 결정적인 과오들이 존재한다. 사실 세조의 명성이 깎이는 이유는, 찬탈도 찬탈이지만 장기적인 전략이나 정치 계획을 세우는 데 대단히 부족했던 나머지 큰 부작용이 따르는 정책들을 시행하고 그것이 민생에 큰 피해를 준 데 있다. 게다가 세종이 힘써서 만들어놨던 정치문화와 제도, 정책 여러가지를 일거에 날려버린 게 결코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심각한 과오들 중 하나. 세종대왕문종은 시스템을 굉장히 중요시한 군주들이었다. 집현전 등을 통한 지속적인 학자 배출과 토론을 통해서 안정적인 국가 체계를 구축했고, 이를 통해 조선 특유의 관료제를 좋은 쪽으로 강화했다. 그러나 세조는 이러한 시스템을 철저히 망가뜨리고 독불장군 스타일로 밀어붙였다. 주변 권신들의 보조가 있긴 하지만, 이 권신들은 세종과 문종의 훈련을 통해 배출되는 관료가 아닌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전형적인 도구들이었다. 권신들을 철저히 관리 감독이라도 하면 좋았겠지만 그조차 하지 않았고 당연히 이들은 부정부패를 일삼기 시작했다. 세조가 그 부패하는 절대권력의 정점에 있는 폭군 유형들에 속했던 만큼, 공신 우대 정책이 너무 과해서 그러한 권신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할 정도를 낳은 것이다.

세조가 신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 열을 올렸던 아버지와 형의 모습을 보고 아마도 신권에 의해 농락만 당하기 급급한 아버지와 형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황보인과 김종서를 척살할 때 왕권을 유린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그러나 정작 세조의 지나친 공신 우대 정책 때문에 그 이후의 역대 군주들이 두고두고 신권에 의해 목숨마저 위태롭게 될 정도로 신권의 영향력이 왕권을 위협할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세종과 문종은 한 제도나 정책을 결정할 때 방법이나 과정, 미래의 파장을 생각하고 어떤 것을 감수하고 희생해야 하는지까지 죄다 토론하고 연구해 나가는 유형이었다. 이러한 유형은 경우에 따라서는 우유부단하여, 신속한 판단력과 발빠른 추진력을 이끌어내는 데에 있어 치명적으로 발목을 잡는 위험도 있었고, 난세에서는 일일이 토론하고 연구할 여유 없이 시시각각 급변해가는 현실에서는 혼란만 자초할 뿐이라는 심각한 한계가 있었다지만, 세종-문종 연간이 과연 난세였나 생각해보면 이는 근거가 부족하다.

그래서였는지 수양대군 일파는 단종 시대를 난세로 규정했고, 역사를 잘 모르는 일반 대중에겐 아직까지도 이런 인식이 지배적이지만 계유정난 당시의 시대 배경에 난세란 건 근거 없는 주장이다. 섭정인 김종서 등의 선대왕의 충신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단종에겐 명백한 정통성이 있었으며 김종서 등이 그의 왕권을 제약한 바는 없었다. 안평대군이 야심가란 주장은 수양대군 측의 날조에 가까우며, 안평대군의 권력이란 건 무력에 기초하지 않은, 김종서 등의 문종의 충신들과의 연합을 통해 성립하고 있었기에 어불성설이다. 단종 시절에 왕권이 미약하므로 난세였다는 건, 그냥 수양대군측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계유정난은 수양대군처럼 막가는 성향의 인간이 아니었다면 쉽사리 성공할 수가 없는, 생각보다는 성공하기 어려운 쿠데타였던 것이다. 물론 그 어려운 쿠데타를 성공시킨 원인이 수양대군의 탁월한 순간 판단력과 결단력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향후 국정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긍정적 평가를 받긴 힘들다.

이 부분에서 태종과 세조 사이의 평가가 갈린다. 앞서 한계점을 거론하는 단락에서 나오는 그 수많은 실정은 이 일방주의 성향에서 기인하는데, 태종의 경우 그러한 사례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 특히 명분도 없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하기 위해 핑계를 붙여 친족을 죽인 것은 큰 오점이다. 집현전을 없앤 것만 봐도 더욱 잘 알 수 있다. 물론 사육신 문제도 있었겠지만, 수양대군은 아버지의 지지부진해 보이는 장기적 정책 연구를 단순한 탁상공론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집현전을 고비용 저효율이라고 단정 지었다. 이것이 이어져 결국 피를 보고야 만 게 바로 치세 말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이다.

과거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한 제5공화국 시절에는 그를 국가의 백년대계를 염려한 나머지, 악역을 자처한 구국의 혁명가로서 해석하는 시각이 득세하기도 했다. 목적은 당연히 정권 찬탈의 정당화.[9] 이 영향으로 오늘날에도 강력한 군주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세조를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세조의 수많은 업적들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지나치게 냉혹하고 권력에 과잉 집착한 성격 탓에 행한 과오들이 그 업적을 덮고도 넘칠 정도로 심각함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나 정당성을 지금보다 몇 십 배로 따졌던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운 조선 왕조에서 그의 왕위 찬탈과 형제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살육 행위는 현대 관점으로는 물론이고 당시 관점으로도 공으로 덮기에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였다.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과의 정치적인 안목과 역량의 차이도 나타난다. 태종이 외척은 처남이고 사돈이고 역모를 생각했던 이유로 끔찍하게 죽여 버리거나, 공신인 이숙번을 후계자에게 방해되지 않게 귀양을 보낸 반면 세조는 공신인 한명회를 외척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그래도 태종과 세조의 차이를 느끼지 못 한다면 태종의 후계자가 다름 아닌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대왕이라는 걸 생각해 보자.

이성계가 세웠던 세자 방석은 막내아들인지라 쟁쟁한 형들에 비해 정통성이 매우 미약했기 때문에 태종이 방석을 죽일 때 대다수의 대신들도 이에 대해 반발 할 수가 없었다. 그에 반해 세조는 정통성이 확고한 단종과 그 대신들을 몰아냈기에 이징옥의 난, 사육신 사건 등을 겪었으며 그 중에서도 중간파들이 일으킨 사육신 사건은 자칫 정권이 다시 전복될 수 있는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따라서 세조는 공신들을 견제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심에 기대야 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물론 그 결과는 문종까지 꽤 안정적으로 굴러가던 조선의 막장화를 여는 첫 단추가 되었다.

말년에 가서는 자신의 왕권이 안정되었다고 판단, 이시애의 난을 기점으로 신 공신 세력을 형성하며 구 공신들을 견제하고자 했다. 문제는 얼마 안 가서 사망했기에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 남이의 옥사를 기점으로 신 공신은 쉽게 소멸이 되고 구 공신을 필두로 "훈구파"로 명명되는 기득권 세력이 형성되는 근간이 된다. 또한 지방 유학자 출신의 학자들은 자신들을 사림이라 명명하며 공신그룹과 대립하게 되었다.[10] 덕분에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이라는 아쉬움이 생길 법하다.

주목할 것은 그나마 구 공신을 견제한답시고 한 짓거리가 새로운 공신세력을 만든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그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통성 부족을 자력으로 메울 수 없었다는(혹은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후대 왕들에게까지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예종은 그래도 나름 강한 군주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 공신 세력의 주의를 불러일으켰지만 요절해 버렸고, 사실상 그의 직접적인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성종은 그야말로 제대로 시달렸다. 성종이 세조와는 정반대로 유달리 유교적 도학 정치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세조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여기에 연산군의 폭정이 성종대 왕권 약화에 기인한다는 주장도 고려해 보자.

게다가 세조의 왕위 찬탈은 후대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언제 왕 자리가 내부의 배신으로 찬탈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조선의 역대 국왕들이 통치보다는 자신의 왕권 강화에 주력하는 정치적 경향을 만드는 데에 일조했다고 여겨진다. 게다가 훗날 조선왕조가 위기에 처하거나 부조리로 고통받는 상황을 만든 원인들의 상당수는 멀리 가면 세조가 귀찮다고 없애버린 시스템의 부재나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멋대로 바꿔버린 장기적 안목이 결여된 정책 등이 원인으로 나온다. 한 마디로 조선왕조 체제의 문제점 상당수를 본인이 만들어버린 셈.


1.6. 사후 간접 디스[편집]


세조의 통치 자체가 유학을 국시로하는 조선에선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 없는 방식이었고 비명에 죽은 어린왕에 대한 동정심이 더해져 당대부터 김종직같은 사람들이 나왔으며 중종대쯤되면 단종과 이른바 사육신들에 대한 동정여론에 사림은 물론 민간에까지 확산된다.

숙종집권기때 묘호가 없던 정종에게 묘호를 추존함과 더불어 단종까지 복위 시키면서 간접적으로 디스당했다. 이때까지 단종을 "노산군"이라 불렸는데 숙종이 "노산대군"으로 승격 하였다가 이후 다시 단종으로 복위시켰다. 이후 덤으로 세조가 처벌하였던 혜빈 양씨와 사육신도 모두 복권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숙종 혼자의 뜻이 아니였으며 조선 팔도 전국의 여론을 수렴하고 논쟁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더 의의가 큰것.

단종, 사육신, 혜빈 양씨관련 처벌은 세조가 직접 행한것이기 때문에 이를 복권, 복위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세조가 잘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단종이 정식으로 복위되어 버리면 세조는... 조선시대는 상복을 몇 년 입는가에 대해 예송논쟁이란 아주 긴 논쟁을 벌일 정도로 예법과 정통성에 대해선 굉장히 민감했었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숙종 또한 정통성의 화신이기에 대대로 이어지는 왕실의 정통성을 일부 부정할수도 있음에도 이를 거리낌없이 행한 것이기도 하였다. 세조 사후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조선시대에서 세조를 찬탈이며 단종이 억울하게 왕위를 뺏긴것이였다는 여론이 다수였음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단종이 복위되면서 이를 기념하여 조선에서는 과거시험까지 열렸을 정도였다.


[1] 사실 성문법 편찬은 자칫하면 왕권을 제약할 수도 있고, 실제로도 후대의 왕들은 종종 신하들한테 "대전에 나와 있으니 명을 거두어주소서"라는 태클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가 성문법 편찬을 주도했다는 것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세조 역시 유학에 기반한 시스템 구축이 국가에 꼭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는 의미다.[2] 이 과정에서 명나라 측의 화해 주선도 거의 묵살하다시피하는 패기를 보였다. 앞뒤 안따지는 세조의 강한 성격이 조선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드문 예시.[3] 웃긴건 강순이 그 이후 장계를 보냈는데 "이만주 이하 2백명을 죽이고 명나라를 기다렸는데 안와서 철군할게요." 였다.[4] 그것도 두번이나 보냈다![5]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내시만 죽이고 끝났다고 나와있는데, 세조실록에 보면 "덕중(德中)을 내치어 밖에서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최호와 김중호(편지를 배달한 환관들)를 때려죽이고 나인(소용 박씨)도 또한 율(律)로 처단하였다."라고 분명히 나온다.(세조 37권, 11년(1465 을유 / 명 성화(成化) 1년) 9월 5일(기유) 2번째기사)[6] 참고로 이 이인손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 중에 한명이 이극돈.[7] 왕자시절에는 겨울에 짧은 팔 옷을 입고 지냈다고 하니 ㅎㄷㄷ[8] 물론 세조 정권에도 브레인이 없던건 아니다. 신숙주같은 나름의 브레인이 있었다. 문제는 이 브레인을 잘 써먹긴 했는데 너무 키워준것.[9] 애초에 5공도 정통성이 없는 사실은 같다.[10] 다만 이른바 4대"사화"가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쟁 때문에 생겨났다는 인식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