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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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및 근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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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어마허
Schleiermacher

파일:Friedrich_Daniel_Ernst_Schleiermacher.jpg
이름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
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출생
1768년 11월 21일,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 브레슬라우
사망
1834년 2월 12일 (향년 65세)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 베를린
국적
[[프로이센 왕국|

프로이센 왕국
display: none; display: 프로이센 왕국"
행정구
]]

경력
할레 대학 교수
베를린 대학 교수
직업
철학자, 신학자

1. 개요
2. 생애
3. 사상
3.1. 절대 의존 감정으로서의 종교
3.2. 해석학
4. 둘러보기
5. 여담



1. 개요[편집]


프로이센 왕국근대 낭만주의신학자, 철학자. 신학적 측면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의 길을 연 인물로 평가받으며, 철학적 입장에서는 해석학의 길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생애[편집]


1768년, 슐레지엔브레슬라우[1]에서 프로이센 군목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통 루터파가 우세한 독일 상황과는 달리 슐라이어마허의 아버지는 칼뱅파 개혁교회의 목사로 슐라이어마허도 개혁교회의 전통에서 성장해나갔다. 한편으로 슐라이어마허의 아버지는 모라비아 교회의 경건주의에도 큰 영향을 받았고 아들을 모라비아의 경건주의적 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했다. 하지만 슐라이어마허는 경건주의로서는 납득할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면서 갈등이 생겼고 아버지에게 할레 대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결국 아버지는 슐라이어마허의 간청에 못이겨서 할레 대학교로 아들을 보내게 된다.

한때 경건주의가 풍미했던 할레 대학교는 그 시점에 이르러서는 경건주의를 포기하고 합리주의에 물결에 휩싸여 있던 시점으로 슐라이어마허는 이 곳 신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하게 된다. 에버하르트의 영향으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신약성경의 성서비평을 공부하면서 해석학의 기초를 놓게 된다. 슐라이어마허의 첫 학문적 성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연구와 번역으로 시작되었고 스승인 에버하르트의 영향을 받아 칸트 철학에는 부정적이었다.

1796년, 목사 안수를 받고 베를린으로 옮겨가 낭만주의 철학자 슐레겔 등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 나가던 중, 소위 피히테의 무신론 논쟁이 터지자 여기에 대한 응답으로 1799년 『종교론』을 출간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편으로 베를린 대학교의 설립에 관여하면서 신학부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2] 교수로 있으면서 수편의 설교집과 플라톤의 대화편에 주석을 달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25년에 걸쳐 하는 등의 작업을 하다가 1834년 2월 12일, 65세의 나이에 폐렴으로 숨을 거뒀다.

3. 사상[편집]



3.1. 절대 의존 감정으로서의 종교[편집]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론』에서 당시 종교에 대한 여러 관점들을 우선 살펴본다. 당대 지식인들은 종교를 인간의 합리적 이해에 따른 형이상학적 논리의 결과로 파악하였다. 칸트는 '자유의지로 발현된 도덕이 전개하여 이성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는 것'을 종교라고 보았고, 헤겔은 종교를 '지식이나 형이상학적 절대 정신의 궁극적 종합'으로 바라보았다.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이성'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이런 칸트와 헤겔의 합리적 전략을 모두 비판한다.

그는 종교가 바로 절대자에 대한 절대 의존적 감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론』에 의하면 종교란, 우주에 대한 직관적 감정이다. 여기서 우주는 '부단한 과 작용 속의 우주'를 일컫는 말로서, 한계도 없고 멈추지도 않는 절대적인 힘의 흐름이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은 절대자가 창조한 무한한 우주의 힘과 작용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으며 이에 압도되고 경외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절대 의존적 감정'이 바로 종교의 본질이다. 즉 이전까지는 '이성'으로써 종교를 바라봤다면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이성이 아니라 '감정'으로써 봐야된다고 역설한 것. 그렇기에 칸트나 헤겔과 같이, 종교에서 자유의지나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논리적으로 전제하려는 작업은 결코 신에 대한 믿음을 증진시켜주지 못하며, 실제 현실의 믿음에 있어서는 감정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슐라이어마허는 주장한다.

3.2. 해석학[편집]


슐라이어마허는 통상 해석의 기본 원칙으로서 해석학적 순환을 최초로 정립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하나의 텍스트와 같은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은 그 전체를 이루는 개별 부분들에 흔적을 남긴다. 따라서 부분들은 전체를 바탕으로 해서 이해되어야 하며, 전체는 부분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적 해석이 텍스트의 배후에 있는 저자와 저자의 필생의 업적 전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우리는 텍스트의 특정 부분을 저자의 저작 전체에 비추어서만이 아니라 저자의 개인적 삶과 지적 삶 그리고 경력에 비추어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텍스트의 이해는 텍스트 전체를 바탕으로 텍스트의 부분들을 해석하고 부분들을 토대로 전체를 해석하는 작업을 번갈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저자의 삶도, 가급적이면 재구성된 전체로서의 저자의 저작까지도 끌어들여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딜타이의 해석학이 주장하듯, 저자의 사고방식과 역사적 맥락에 대해 해석자의 감정이입이 요구되는 것으로 나아간다. 저자와 텍스트의 지적 상황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이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우리에게 그 시대의 근본 문제들에 대한 보다 나은 통찰을 제공한다.

4. 둘러보기[편집]





5. 여담[편집]


  • 헤겔은 자신의 제자 힌리히스가 쓴 종교철학 책의 서문을 작성하면서, 슐라이어마허의 '절대 의존적 감정'을 비판했다. 헤겔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종교가 오직 감정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라면, 그 감정은 인간의 의존하는 감정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犬)가 가장 진실한 신자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개는 이러한 감정을 가장 강렬하게 수행하고 있고, 원리적으로 이러한 감정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심지어 개는 뼈다귀로 배고픔을 채웠을 때 구원의 감정도 가진다." [3] 헤겔은 '이성'과 종교의 변증법적 화해를 강조했기 때문에, (이성을 배제한 채) '감정'에만 기반한 슐라이어마허의 종교관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 슐라이어마허는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1]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전하면서 현재는 폴란드로 넘어간 상태이다. 폴란드어 이름은 브로츠와프.[2] 여담으로 당시 베를린 대학교의 철학부 교수가 바로 헤겔이었다.[3]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p.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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