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3세 소비에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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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
Jan III Sobieski


파일:800px-_John_III_Sobieski.jpg

이름
얀 소비에스키
(Jan Sobieski)
출생
1629년 8월 17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올레스코 올레스코 성
사망
1696년 6월 17일 (향년 66세)
폴란드-리투아니아 바르샤바 빌라누프 궁전
재위기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1674년 5월 19일 ~ 1696년 6월 17일
서명
파일:얀 3세 소비에스키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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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야쿠프 소비에스키
어머니 조피아 테오필라 다니워피조프나
배우자
마리 카지미에라 다르키앙 (1665년 결혼)
자녀
야쿠프 루드비크 소비에스키,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
형제자매
마렉 소비에스키, 카타지나 소비에스카 등
가문
소비에스키 가문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군사령관 시절
2.3. 즉위
2.4. 말년과 사망
3. 가족 관계
4. 창작물에서
4.1. 영화 및 드라마
4.1.1. 비엔나 전투
4.2. 만화 및 애니메이션
4.3. 소설
4.3.1. 폴란드
4.3.2. 바로크 사이클
4.4. 게임
5. 기타



1. 개요[편집]


Vēnī. Vīdī. Deus vīcit.

왔노라. 보았노라. 하느님이 승리하셨노라.[1]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승리한 뒤,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1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8대 국왕.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1629년 8월 17일, 르부프 근처 올레스코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인 소비에스키 가문은 현대 폴란드 소비에신(Sobieszyn)을 근거지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에 여러 영지를 가진 귀족 가문이었으며, 어머니 조피아는 스테판 바토리지그문트 3세를 섬기며 루스 차르국과의 리보니아 전쟁과 혼란 시대에 맹활약한 스타니스와프 주키에브스키(Stanisław Żółkiewski 1547~1620)의 손녀딸이었다. 아버지 야쿠프 소비에스키가 교육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형인 마레크 소비에스키와 유럽을 여행해 공부했다. 1648년 폴란드로 귀국한뒤, 흐멜니츠키 봉기 반란군에 맞서 싸우는 연방군에 참가해 싸웠고[2], 1656년 대홍수때 그가 속한 군대는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항복하고 충성을 맹세했으나, 그는 스웨덴을 따르지 않고 연방군에 가담했다.


2.2. 군사령관 시절[편집]


1656년 5월 26일, 얀 소비에스키는 초레지 직위를 받고, 2달 후에 벌어진 바르샤바 전투에서 2000명 규모의 크림 칸국 기병 부대를 지휘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 그 뒤로 1658년까지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1660년, 얀 소비에스키는 스트리의 스타로스트 직위를 받은 뒤, 인기가 많아졌으며, 추드노프 조약의 협상가 중 한명이 되었다.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의 왕비인 마리 루이즈 곤차가와 친분을 쌓은 뒤, 폴란드-리투아니아 친프랑스 파벌의 큰 후원자가 되었다. 그리고 1665년 프랑스인 궁녀 마리 카지미르 다르키앙과 결혼하고 대원수로 승진되었다.

1667년 얀 소비에스키는 대원수로 참가한 폴란드-카자크-타타르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며 1668년 2월 5일, 연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즈음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가 퇴위해 국왕 선출 선거가 열렸는데 얀 3세는 루이 2세 드 콩데 부르봉을 지지했으나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가 선출되었다.


2.3. 즉위[편집]


하지만 1673년 11월 10일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가 사망한지 하루뒤인 11월 11일에 오스만 제국과의 호틴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인기가 다시 높아졌고, 1674년 5월 19일에 국왕 선거에서 승리하며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아직 오스만 제국과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대관식은 1676년 2월 2일에 치러졌다.

연방 결성 당시만 해도 유럽의 선진국이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얀 3세가 왕위에 올랐을 무렵에 리보니아 전쟁, 대 스웨덴 전쟁, 스웨덴과 루스 차르국의 침공으로 인한 대홍수 등 수많은 전쟁으로 완전히 피폐해졌고, 얀 3세는 국가를 다시 번영시켜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이때 대홍수를 틈타 독립하여 브란덴부르크로 이탈한 프로이센 공국이나 스웨덴에게 상실한 리보니아를 되찾고자 하였으나, 프랑스가 브란덴부르크 및 스웨덴과 동맹을 맺는 바람에 좌절되었다. 1674년 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재개하였으나 1676년, 이전에 미하우가 맺은 부차치 조약의 불평등을 되돌리지 못하고 오스만 제국의 포돌리아 점유를 인정하는 주라프노 조약을 체결했다.

주라프노 조약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유례없는 평화가 찾아오자 얀 3세를 몰아내고 로렌 공작 샤를[3]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세우려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군대, 무기의 전력을 크게 강화시켰다.

1683년에는 제2차 빈 공방전이 일어나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가 폴란드에 도움을 요청했다.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기독교 연합군은 오스만 제국에 총공격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만 제국군을 격퇴하며 전 유럽에 명성을 떨쳤고[4] 이후 이어진 대튀르크 전쟁에서도 활약했다.


2.4. 말년과 사망[편집]



파일:Jan_III_Sobieski_in_the_Capuchin.png

얀 3세의 무덤.
얀 3세는 오랜 전쟁으로 비만, 통풍, 신장결석, 고혈압, 부비동염, 매독 등의 질병을 앓았다.[5] 말년에는 아들 야쿠프의 계승에 힘을 기울이나 뜻대로 되지 않자, 야쿠프를 몰다비아 공국호스포다르로 앉히려 했으나 이마저도 실패로 끝났다. 1691년부터는 심장발작으로 힘들어져 바르샤바 근교 빌라누프 궁전에 은거하기 시작했다. 심장발작은 해가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지며 결국 1696년 6월 17일 심장발작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바벨 대성당에 있는 성 레오나르드 지하실[6]에 안장되었다.[7]

아들 야쿠프는 아버지와 비교하기엔 너무나도 나약하고 무능력했으며, 결국 이후 벌어진 국왕 선거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해 귀족들의 지지를 얻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3. 가족 관계[편집]


  • 증조부: 얀 소비에스키(1518년 ~ 1564년)[A]
  • 할아버지: 마레크 소비에스키(1550년 ~ 1605년)
  • 할머니: 야드비가 스노브코브스카
  • 아버지: 야쿠프 소비에스키(1591년 5월 5일 ~ 1646년 6월 23일)
  • 어머니: 조피아 다닐로비츠조브나(1607년 ~ 1661년 11월 27일)
    • : 마레크 소비에스키(1628년 5월 24일 ~ 1652년 6월 3일)
    • 자기자신: 얀 3세 소비에스키: (1629년 8월 17일 ~ 1696년 6월 17일)
    • 여동생: 조피아 소비에스카(1630년 3월 19일 ~ 어렸을때 사망)
    • 여동생: 카타르치나 소비에스카(1634년 1월 7일 ~ 1694년 9월 29일)
    • 여동생: 안나 로잘리아 소비에스카(1636년 8월 5일 ~ 1655년)
    • 남동생: 스타니스와프 소비에스키(1638년 3월 29일 ~ 어렸을때 사망)
    • 남동생: 스타니스와프 소비에스키(1641년 9월 16일 ~ 어렸을때 사망)
    • 배우자: 마리 카지미르 다르키앙(1641년 6월 28일 ~ 1716년 1월 30일)
      • 장남: 야쿠프 루드비크 소비에스키(1667년 11월 2일 ~ 1737년 12월 19일)
      • 장녀, 차녀: ??, ??(1669년 5월 9일)[8]
      • 삼녀: 테레사 테오필라 소비에스카(1670년 10월)
      • 사녀: 아델라이다 루드비카 소비에스카(1672년 10월 15일 ~ 1677년 2월 10일)
      • 오녀: 마리아 테레사 소비에스카(1673년 10월 18일 ~ 1675년 12월 7일)
      • 육녀: ??(1674년)
      • 칠녀: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9](1676년 3월 4일 ~ 1730년 3월 10일)
      • 차남: 알렉산더 베네딕트 소비에스키(1677년 9월 9일 ~ 1714년)
      • 팔녀: ?? (1678년)
      • 삼남: 콘스탄티 브와디스와프 소비에스키(1680년 5월 1일 ~ 1726년 7월 22일)
      • 사남: 얀 소비에스키(1683년 6월 4일 ~ 1685년 4월 12일)[*A ]


4. 창작물에서[편집]



4.1. 영화 및 드라마[편집]



4.1.1. 비엔나 전투[편집]



4.2. 만화 및 애니메이션[편집]



4.3. 소설[편집]



4.3.1. 폴란드[편집]


  • 1983년 소설인 폴란드에서 등장했다.

4.3.2. 바로크 사이클[편집]


  • 2003년부터 연제된 바로크 사이클에서 잠깐 언급됐다.


4.3.3. 명군이 되어보세![편집]


3부에서 유럽에 견서사로 간 주인공 성친왕이 얀 3세의 서녀 올렝카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 얀 3세를 도와 제2차 빈 공방전에 선봉으로 참전하여 큰 전공을 올리고 올렝카를 아내로 맞는다. 그 후 성친왕은 형의 제위를 계승받아 대한 태황 건흥제가 되며 올렝카도 귀비의 작호를 받고, 건흥제와 올렝카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이 각각 러시아와 후금의 황후가 되어 얀3세의 핏줄을 이어가게 된다.

4.4. 게임[편집]



4.4.1.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편집]



파일:Jan_III_EU4.png


4.4.2. 도미네이션즈[편집]


  • 얀 소비에스키의 후사르 윙이 유물로 등장한다.

5. 기타[편집]


  • 폴란드 500즈워티 지폐의 인물이다.
  • 별자리 중에서 방패자리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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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인용한것이 맞다.[2] 여담으로 형 마레크는 대홍수 도중 바토흐 전투의 패배로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에게 붙잡혀 바토흐 학살때 목숨을 잃었다.[3] 전 왕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의 미망인 엘레오노레와 결혼했다.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프란츠 1세의 할아버지.[4] 이 때의 패배로 오스만 측에서는 얀 3세를 "레히스탄의 사자" 라고 불렀다. 레히스탄은 레흐에서 유래한 폴란드의 옛이름.[5] 이 시기에 주치의인 안제이 자우스키가 신장결석 치료를 위해 그의 몸에 다량의 수은을 투여해 건강이 더 나빠졌다.[6] 바벨 대성당 지하에 있는 무덤으로, 이곳에 묻힌 다른 사람들로는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 등이 있다.[7] 그의 배우자인 마리 카지미르 다르키앙은 1716년 1월 30일 프랑스 왕국 블루아에서 사망했는데, 그녀의 시신도 폴란드로 이장되어, 얀 3세가 있는 바벨 대성당 성 레오나르드 지하실에 묻혔다.[A] 얀 3세 소비에스키와 이름이 같다.[8] 쌍둥이였지만, 둘 다 출생 직후 사망했다.[9]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