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드라시 2세

덤프버전 :



헝가리 왕국 아르파드 왕조 제21대 국왕
언드라시 2세
II. András

파일:1280px-Andrew_II_(Chronica_Hungarorum).jpg

출생
1177년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사망
1235년 9월 21일
헝가리 왕국 세케슈페헤르바르
재위
헝가리 왕국크로아트 왕국의 왕
1205년 ~ 1235년 9월 21일
갈리치아 공작
1188년 ~ 1190년 / 1208년 ~ 1210년
배우자
메란의 게르트루트
(1203년 이전 결혼/1213년 피살)
쿠르트네의 욜란다
(1215년 결혼/1233년 사망)
베아트리체 데스테
(1234년 결혼)
아버지
벨러 3세
어머니
안티오키아의 아그네스
형제
임레, 헝가리의 머르기트, 콘슈탄치어
자녀
벨러 4세, 칼만, 언드라시, 이슈트반, 마리어, 에르제베트, 욜란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편집]


헝가리 왕국 제21대 국왕. 조카 라슬로 3세를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뒤 헝가리 귀족들의 특권을 용인하는 내용의 금인칙서를 반포해 그들의 지지를 받고자 했다. 이후 할리치나로도메리아를 공략하고자 루스인을 상대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으며, 1217년부터 1218년까지 제5차 십자군 원정을 단행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 생애[편집]


1177년경 헝가리 국왕 벨러 3세르노 드 샤티용의 딸인 안티오키아의 아그네스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임레, 헝가리의 머르기트, 보헤미아 공국오타카르 1세와 결혼하는 콘슈탄치어가 있었다. 1188년 말 할리치나 공작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가 보야르의 반란을 피해 헝가리로 망명했다. 이에 벨러 3세는 할리치나로 출진해 볼히니아 공작 로만 므스티슬라비치를 물리치고 할리치나를 장악했다. 이후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를 할리치나 공작으로 되돌려놨지만 그를 계속 붙잡아두고 언드라시를 할리치나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삼았다. 1189년 또는 1190년, 헝가리에 억류되어 있던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가 탈출하여 폴란드 왕국로 망명했다. 이후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2세의 지원을 받아 할리치나를 탈환하여 공국의 통치권을 되찾았고, 언드라시는 헝가리로 돌아갔다.

1196년 4월 23일, 교황의 지시를 받들어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던 벨러 3세가 사망했다. 언드라시는 아버지로부터 많은 돈과 상당한 영지를 물려받았으며, 아버지를 대신해 십자군을 이끄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그는 십자군에 가기를 거부하고 그 군대를 그대로 돌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형 임레에게 도전했다. 이렇게 벌어진 내전은 수년간 이어지다가 1197년 언드라시가 슬라보니아의 마치키에서 임레를 격파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결국 임레는 동생을 달마티아-크로아티아 공작으로 삼는 것으로 문제를 매듭지었다.

1198년 초,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언드라시에게 십자군 서약을 준수하고 형제의 권리를 존중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언드라시는 교황의 충고를 무시하고 형을 아예 왕위에서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끌어모았다. 임레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선제 공격했고, 1199년 소모니의 라드 전투에서 언드라시를 격파했다. 언드라시는 영지에서 쫓겨난 뒤 오스트리아 공국의 레오폴트 6세에게 도주했다. 그러다가 교황이 개입해서 두 형제에게 화해하라고 촉구하자, 1200년 양자는 타협했다. 그들은 성지로 함께 진군하기로 했고, 그들이 없을 때 오스트리아 공작이 헝가리를 다스리며, 언드라시는 공국을 되돌려받기로 했다. 또한 두 사람 중 더 오래 사는 사람이 상대방의 영토를 물려받기로 했다.

1203년 이전, 언드라시는 이스트리아크라인 변경백인 베르톨트 4세와 마이센의 베틴 가문 출신인 아그네스의 딸인 메란의 게르트루트와 결혼헀다. 그는 이 결혼에서 두 아들 벨러와 칼만, 그리고 두 딸 마리어와 에르제베트를 낳았다. 이렇게 해서 처가를 등에 업은 그는 장인과 아내의 이름으로 많은 독일인 용병을 모집한 뒤 임레에게 대항했다. 1203년 10월 임레와 언드라시는 바라주딘에서 격돌했다. 그 결과 임레가 승리를 거두었고, 언드라시는 포로로 붙잡혔다. 하지만 임레는 동생을 해치는 대신 감옥에 가두었고, 게르트루트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1204년 11월 30일, 임종을 눈앞에 둔 임레는 언드라시를 석방시킨 뒤 그에게 이제 갓 4살된 아들 라슬로가 성년이 될 때까지 후견인으로서 나라를 대신 이끌어달라고 부탁했다. 언드라시는 조카를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다. 1204년 11월 30일 임레가 사망한 뒤, 라슬로가 라슬로 3세로 왕위에 올랐다. 인노첸시오 3세는 임레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언드라시에게 서신을 보내 형이 살아있을 때 했던 맹세를 지키라고 권고했고, 헝가리 백성들에게 라슬로 3세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언드라시는 1205년 초 라슬로 3세와 모후 콘스탄사를 유폐시키고 콘스탄사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에 콘스탄사는 아들을 데리고 탈출한 뒤 추종자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에게 피신했다. 언드라시 2세는 즉각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한 뒤 레오폴트 6세에게 콘스탄사와 라슬로 3세를 넘겨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했다. 레오폴트 6세가 이를 거부하면서 양자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듯했지만, 1205년 5월 7일 라슬로 3세가 돌연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이리하여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낸 언드라시는 1205년 5월 29일 컬로처 대주교 야노시의 주관하에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즉위 직후 헝가리의 성, 장원 및 주들을 독일인 추종자들에게 기증한다는 내용의 헌장을 반포했다. 그 전까지는 국유지만이 기증되었지만, 이제는 나눠줄 영지가 없자 아예 사유지까지 분배하고, 세습이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언드라시의 외가 진척들을 위시한 독일인들의 위세가 강력해져, 기존의 헝가리 귀족들의 입지를 위협할 수준으로 성장했다.

1205년 또는 1206년, 언드라시 2세는 지난날 공작으로 지냈다가 쫓겨났던 할리치나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할리치나와 로도메리아의 어린 공작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위협하는 체르니코프 공작 브레볼로드 스뱌토슬라비치와 그의 동맹자들을 물리치겠다는 명분으로 개입했고, 스뱌토슬라비치는 헝가리의 공세에 밀려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언드라시 2세는 할리치나와 로도메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두 공국의 종주권을 주장했다. 언드라시가 헝가리로 돌아온 후, 브세볼로드 스뱌토슬라비치의 먼 사촌인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가 할리치나와 로도메리아를 점령하고 다니엘 로마노비치 일가를 추방했다. 다니엘 일가는 폴란드 고공 레첵 1세에게 도주했고,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는 헝가리나 폴란드가 개입할 것을 우려해 레첵 1세와 언드라시 2세에게 막대한 선물을 바쳤다. 그러던 중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의 형제인 로만 이고레비치가 헝가리로 찾아와서 자신을 할리치나의 공작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로만은 곧 언드라시가 보내준 헝가리군에 힘입어 블라디미르를 추방했다.

1207년, 언드라시 2세는 달마티아의 두 도시 스플리트와 오미시를 자유시로 인정하고 스플리트 대주교의 특권을 인정한다는 헌장을 반포했다. 이후 로만 이고레비치와 보야르들간에 갈등이 심화되자, 그는 헝가리 귀족 베네덱에게 군대를 맡겨 할리치나로 파견했다. 베네덱은 1208년 또는 1209년에 로만 이고레비치를 사로잡았고, 언드라시 2세로부터 할리치나의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갈리시아-볼히니아 연대기에 따르면, 베네덱은 보야르들을 심하게 고문하고 음탕한 행위를 일삼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보야르들은 노브고로드 공작 므스티슬라프에게 베네덱을 타도해주면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다. 므스티슬라프는 이 제안에 혹해 베네덱을 공격했지만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1208년, 게르트루트의 두 형제인 밤베르크 주교 에크베르트와 이스트리아 변경백 하인리히 2세가 독일왕 슈바벤의 필리프 암살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자 헝가리로 달아났다. 언드라시 2세는 에크베르트에게 세페세그 일대의 대규모 영지를 부여했으며, 게르트루트의 막내 동생 베르톨트를 1206년부터 컬로처 대주교로 세웠다. 헝가리 영주들은 독일인들을 우대하는 그에게 불만을 품고 여러차례 문제제기했지만, 그는 오직 처가 친척들만을 믿을 수 있다고 여겼기에 듣지 않았다.

1209년, 헝가리의 봉신인 시드가라의 도말트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자다르를 탈환했다. 그러나 1210년 베네치아 해군이 반격을 가해 자다르를 탈취했다. 한편, 로만 이고레비치와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는 1209년 또는 1210년 초에 동맹을 맺고 베네덱을 협공해 승리를 거두고 할리치나에서 헝가리인을 몰아냈다. 1211년과 1214년 사이, 불가리아 제2제국의 보야르들이 보릴을 상대로 비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보릴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진압할 수 없다고 보고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언드라시 2세는 페체네그로 구성된 부대를 파견해 비딘을 공략하고 보릴에게 넘겼다. 그 대가로, 지난날 불가리아가 임레 왕으로부터 빼앗았던 난도르페헤르바르와 브라니체보를 돌려받았다.

1210년 또는 1211년,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가 폭정을 자행했다. 이에 보야르들이 언드라시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에 망명해 있는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할리치나의 통치자로 복위시켜달라고 요청헀다. 그는 폴란드 고공 레첵 1세와 손을 잡고 군대를 할리치나로 보내 블라디미르를 몰아내고 다니엘을 공작으로 복위시켰다. 그러나 보야르들은 1212년 다니엘의 어머니 안나가 폴란드, 헝가리, 리투아니아와의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챙기는 것에 반감을 품고 그녀를 추방했다. 안나는 언드라시에게 피신한 뒤 자신이 할리치나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1213년 여름, 언드라시는 안나를 복위시키기 위한 원정을 떠났고, 게르트루트 왕비가 자신 대신 국정을 다스리게 했다. 원정은 성공했고, 안나는 복위 후 자신을 반대했던 보야르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런데 독일인을 일방적으로 후대하는 것에 반감을 품은 헝가리 영주들은 왕이 떠난 사이에 독일인 왕비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1213년 9월 23일, 언드라시 2세가 할리치나에 출진한 동안 국정을 도맡고 있던 게르트루트는 헝가리 영주들의 습격을 받고 사지가 절단되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때 그녀의 형제 베르톨트와 레오폴트 역시 심한 폭행을 당했지만 가까스로 빠져나와 독일로 달아났다. 언드라시 2세는 귀국 후 이 소식을 전해듣고 페터르 이슈트반을 체포해 기둥에 매달아 죽였다. 그러나 사건에 연루된 자들이 워낙 많아서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왕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 외에는 사건의 전말을 더 이상 캐지 않았다.

게르트루트가 처참하게 살해된 후 독일인의 헝가리에 대한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영지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었고, 1211년 쿠만인으로부터 에르데이 방어를 위해 튜튼 기사단을 불러들인 이래 이들에게 지급할 급료를 마련해야 했던 언드라시 2세는 새로운 세금을 도입했다. 1214년, 그는 헝가리 왕국 역사상 최초로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재무관을 설치했다. 최초의 재무관 데네시(Ampod fia Dénes ?~1236)는 화폐로 징수하는 형태의 특별세를 부과하고, 조폐업과 소금 무역, 관세 전반을 국가가 독점하자고 건의해 관철시켰으며, 전국에 환전상들을 보내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화폐로 교환하면서 수수료를 챙기게 했다. 백성들은 품질이 떨어지고 가치가 별로 없는 헝가리 금속 화폐를 쓰는 것을 꺼렸고, 화폐 사용을 강요하는 정부에 불만을 품었다. 반면 귀족들은 왕의 묵인 아래 소농들이 소유하는 사유지를 화폐로 매입하여 대지주가 되었고, 거래를 거부하는 농민들에게 무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헝가리 귀족들의 위세는 날로 커켰고, 왕권은 점차 위축되었다.

한편, 할리치나에서는 안나의 숙청에 분노한 보야르들이 반란을 일으켜 안나를 처단하고 블라디슬라프 코르밀리치를 새 지도자로 선출했다. 다니엘은 보야르들을 피해 폴란드로 망명했고, 폴란드 고공 레첵 1세가 다니엘의 복위를 위해 할리치나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언드라시 2세는 아예 자기 아들 칼만을 할리치나의 통치자로 세우기로 마음먹고, 1214년 가을 레첵 1세와 협상한 끝에 레첵 1세의 딸 살로메아와 칼만을 결혼시키고 서부 갈리시아의 두 도시인 프셰미실과 루바초프를 폴란드에 양도하는 대가로 할리치나의 공작에 칼만을 선출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헝가리-폴란드 연합군은 공세를 개시해 1214년 말 블라디슬라프 코르밀리치를 축출하고 칼만을 할리치나의 공작으로 옹립했다.

1215년, 언드라시 2세는 쿠르트네 백작 피에르의 딸 욜란다와 결혼했다. 1216년, 라틴 제국의 황제 앙리가 사망했다. 앙리는 후사를 두지 못했기에, 여러 사람이 새 황제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 중의 한 명이 언드라시 2세의 장인인 피에르였고, 다른 한 명은 바로 언드라시 2세였다.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그러려면 그동안 미뤄뒀던 십자군 원정을 시급히 추진해야 했다. 그는 에스테르곰 대주교 야노시에게 국가 통치를 위임하기로 한 뒤 십자군을 모집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라틴 귀족들은 피에르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래도 십자군을 감행해 교황에게 점수를 따서 후일을 도모하기로 한 언드라시 2세는 스플리트에서 함대를 집결시켰다. 그 과정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자다르 점유를 공인하는 대가로 선박들을 빌렸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왕실 소유의 공유지들을 모조리 팔고 막대한 자금을 대출받았다. 1217년 스플리트에서 출항한 언드라시 2세는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와 메란의 오토 1세와 함께 성지로 향했다. 그들은 그해 10월 아크레에 도착했고, 예루살렘 왕 장 1세성전 기사단, 구호기사단 등 현지 십자군 관계자들과 접촉했다.

1217년 11월 초, 십자군은 언드라시 2세를 총사령관으로 세우고 요르단 강 원정을 개시해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아딜 1세가 이끄는 무슬림과 맞붙어 승리했다. 이에 알 아딜 1세는 각지의 요새에 수비에 전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십자군은 요새 몇 곳을 포위 공격했지만 공성 병기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는 사이, 언드라시 2세는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아크레로 돌아간 후 군사 활동에 다시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수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을 행했을 때 사용되었다고 알려진 물병, 성 스테파노와 성녀 마르가리타의 머리카락, 사도 토마스바르톨로메오의 오른손,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 일부를 포함한 수많은 성해들을 수집했다.

1218년 초, 언드라시 2세는 헝가리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 메렌쿠르의 라울이 지금 돌아가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우선 트리폴리를 방문해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4세와 뤼지냥의 멜리센데의 결혼식에 참석한 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공국으로 가서 아들 언드라시와 아르메니아 공작 레오 1세의 딸 이사벨라를 약혼시켰다. 이후 육상으로 행진하여 룸 술탄국을 통과한 뒤 니케아에 도착했다. 니케아에 한동한 체류하고 있을 때, 장남 벨러를 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1세의 딸 마리아 라스카리나와 결혼시켰다.

1218년 말 언드라시의 행렬이 불가리아에 이르렀을 때, 마침 보릴을 몰아내고 새 차르에 즉위한 이반 아센 2세는 보릴을 일전에 후원한 그의 앞을 군대로 가로막고, 언드라시 2세의 딸 마리아를 자신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헝가리로 돌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언드라시 2세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1221년 지참금 형식으로 난도르페헤르바르와 브라니체보를 불가리아에 돌려줬다. 이후 헝가리에 도착한 언드라시 2세는 귀족들이 자신을 대신하여 헝가리를 이끌던 야노시 대주교를 추방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즉시 야노시를 복귀시켰다.

1219년, 언드라시 2세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십자군 원정에 막대한 자금을 소모한 터라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고, 할리치나 공작으로 세워뒀던 칼만은 노브고로드 공작 므스티슬라프에게 사로잡혔다. 도저히 군대를 일으킬 여력이 없었던 그는 므스티슬라프와 협상한 끝에 다시는 할리치나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조건하에 아들을 돌려받았다. 그 후 그는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유대인과 무슬림 인사들을 대거 고용해 왕실 수입을 관리하게 했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그는 언드라시 2세와 욜란다 왕비에게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고용하는 짓을 금지하라고 촉구했다. 언드라시 2세는 성직자들의 세금을 면제해주고 교회 법정의 독점적인 심판을 받을 권리를 포함한 특권을 확인하는 등 교황을 달래려 노력했다.

1222년, 언드라시 2세는 일련의 국정 실패로 불만이 가득한 헝가리 영주들을 달래고자 금인칙서를 반포했다. 여기에는 영주들이 누릴 특권들이 광범위하게 적혀 있었는데, 마지막 조항에는 군주가 이 헌장의 조항들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주교들과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리하여 헝가리 귀족들은 왕의 권력을 제약하고 하층 계급을 철저하게 지배할 수 있었다. 1223년, 교황 호노리오 3세는 그에게 새로운 십자군을 일으키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일전에 십자군을 나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둔 적 없고 오히려 불이익만 받았기에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았다.

이 무렵, 언드라시 2세는 장남 벨러를 크로아티아-달마티아 공작에 임명했다. 그런데 언드라시 2세의 통치를 못마땅하게 보는 귀족들이 벨러 주변에 포진하는 바람에, 두 부자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벨러는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아내로 삼았던 마리아 라스카리스와 이혼했다. 그러다가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재결합하라고 권하자, 벨러는 1223년 가을에 마리아를 다시 맞아들였다. 언드라시 2세가 이에 분노를 터트리자, 벨러는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도주했다. 1224년, 언드라시 2세는 교황의 중재에 따라 아들과 화해했고 다시 크로아티아-달마티아 통치를 맡겼다.

1224년, 에르데이 방위를 맡던 튜튼 기사단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진 끝에 아예 헝가리로부터 독립해 오직 교황만 따르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들었다. 언드라시 2세는 이에 분노해 무력을 동원하여 기사단을 헝가리에서 추방했다.[1] 이로 인해 헝가리와 교황령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226년, 언드라시 2세는 벨러를 트란실바니아 공작으로 전출하고 둘째 아들 칼만을 크로아티아-달마티아 공작으로 선임했다.

1227년, 언드라시 2세는 할리치나에 대한 원정을 또다시 감행했다. 초기에는 할리치나의 여러 요새를 성공적으로 공략했지만, 크레메네츠와 즈베니고로드에서 므스티슬라프에게 패배했다. 결국 아들 언드라시를 할리치나 공작으로 인정하겠다는 므스티슬라프의 약속에 만족하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1228년, 언드라시 2세는 벨러에게 귀족들의 영지 소유를 조정할 권한을 부여했다. 벨러는 어머니 게르트루트 살해 사건에 가담한 혐의 가 있던 시몬 카치치스와 반크 바르칼란의 영지를 몰수했으며, 아버지가 귀족들에게 퍼주었던 토지 보조금을 대거 회수했다. 또한 1229년에는 자신에게 복종했던 쿠만 족장들의 특권을 확인했다. 또한 1229년에는 자신에게 복종했던 쿠만 족장들의 특권을 확인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벨러의 활동을 지지했지만, 언드라시 2세는 귀족들이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해 종종 벨러의 정책 수행을 저지했다.

1229년 봄, 동생 언드라시가 할리치나 공국에서 쫓겨났다. 이에 벨러는 동생을 복위시키기로 마음먹고, 1229년 또는 1230년 쿠만족과 함께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할리치나를 포위했다. 그러나 수비대의 저항을 뚫지 못하고 전염병 마저 창궐하자 철수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가 동사하거나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231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이반 아센 2세라틴 제국을 심하게 압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언드라시 2세에게 불가리아를 공격하라고 종용했다. 안 그래도 일전에 십자군 원정을 치른 후 귀환하다가 이반 아센 2세에게 억류되어 딸 마리아를 아센에게 시집보내고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넘겨줘야 했던 것에 불만이 가득했던 언드라시 2세는 이를 명분삼아 불가리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벨러는 부친의 지시에 따라 1231년 말 또는 1232년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탈환했다. 뒤이어 스레데츠를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벨러는 1233년 왈라키아 서부 지역을 장악하고 불가리아의 반격을 저지하고자 여러 요새를 세웠다.

한편, 에스테르곰 대주교 로베르트는 유대인무슬림이 아직도 궁정 관리로 일하면서 기독교인들을 부려먹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 새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역시 이에 호응하여 대주교에게 왕을 계속 압박하라고 권장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언드라시 2세는 1231년 무슬림이 왕실 관리로 일하는 것을 금지하며, 군주가 이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에스테르곰 주교가 파문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로베르트 대주교는 여전히 유대인과 무슬림이 궁전에서 계속 일하고 있고 급기야 교회 재산을 압류하려 한다면서, 1232년 2월 25일에 헝가리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언드라시 2세는 교회 재산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대주교는 곧 성무금지령을 철회했다.

1233년, 언드라시 2세는 할리치나로 다시 출진해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가 내세운 다니엘 로마노비치로의 공세에 맞서는 아들 언드라시를 도왔다. 그러면서도 교황 특사와 협상을 이어간 끝에 1233년 8월 20일 베레그 숲에서 왕실 수입을 관리하기 위해 유대인과 무슬림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강탈한 교회 수입에 대한 보상으로 10,000마르크를 지불하겠다고 선언했다. 1233년 후반에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고, 1234년 초 에스테 후작 알도브란디노 1세의 딸 베아트리스 데스테와 결혼했다.

1234년 가을, 다니엘 로마노비치가 이끄는 루스군이 할리치나를 포위 공격한 끝에 함락시켰고, 언드라시 2세의 아들 언드라시는 피살되었다. 그는 이에 대한 보복을 계획했으나, 1235년 여름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와 스티리아가 연합하여 헝가리를 침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자 계획을 바꿔 빈으로 쳐들어가 포위 공격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손해를 배상하겠다고 약속했고, 언드라시 2세는 헝가리로 돌아갔다. 1235년 9월 21일에 사망했다.

언드라시 2세는 생전에 세 명의 여인과 결혼했다. 첫 번째 왕비 메란의 게르트루트와의 사이에서 벨러 4세, 칼만, 언드라시, 마리어, 에르제베트를 낳았다. 두 번째 왕비 쿠르트네의 욜란다와의 사이에서 딸 욜란을 낳았다. 그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장남 벨러 4세는 언드라시 2세의 세 번째 왕비인 베아트리체 왕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발표하자, 그 아이는 언드라시 2세가 아닌 재무관 데네시의 자식이라며 그녀를 간통 혐의로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감옥에 갇힌 베아트리체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사절단의 도움으로 남장한 채 탈출한 후 튀링겐에서 이슈트반을 낳은 후 이 아이가 아르파드 왕조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벨러 4세를 비롯한 언드라시의 다른 자식들은 이슈트반을 왕실의 일원으로 절대로 인정하지 않고 왕족으로서 지원금을 받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슈트반은 토마시나 모로시니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는 언드라시 2세의 증손자 라슬로 4세가 죽은 후 아르파드 왕조의 마지막 국왕인 언드라시 3세가 되었다.


3. 기타[편집]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Hősök tere) 14인의 동상 위인 중 1명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9 01:31:43에 나무위키 언드라시 2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여기서 쫓겨난 튜튼 기사단이 간 곳이 바로 동프로이센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