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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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왕국
Magyar Királyság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svg
파일:헝가리 왕국 국장.svg
국기(1915-1918)[1]
국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Lands_of_the_Crown_of_Saint_Stephen_in_1914.png
1000년 ~ 1526년
1867년 ~ 1918년

1920년 ~ 1946년

표어
Regnum Mariae
Patrona Hungariae
(헝가리의 수호자
마리아의 왕국)
국가
Himnusz
("Isten, áldd meg a magyart")
위치
동유럽
면적
325,411㎢
수도
에스테르곰→페슈트→포조니→페슈트→부다페스트
정치체제
선거군주제입헌군주제
국가원수

주요 국왕
이슈트반 1세(1000~1038)
벨러 4세(1235~1270)
러요시 1세(1342~1382)
마차시 1세(1458~1490)
주요 섭정
후녀디 야노시
호르티 미클로시
공용어
헝가리어
라틴어
독일어
민족
헝가리인
루마니아인, 독일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체코인, 우크라이나인(루신인)
종교
가톨릭
통화
플로렌티누스 → 탈러플로린굴덴크로네코로나펭괴
1차 성립 이전
헝가리 대공국
1차 멸망 이후
오스만 헝가리, 합스부르크 제국, 에르데이 공국
2차 성립 이전
오스트리아 제국
2차 멸망 이후
3차 성립 이전

헝가리 제1공화국
3차 멸망 이후
헝가리 제2공화국

1. 개요
2. 역사
2.1. 건국 배경
2.2. 아르파드 왕조
2.2.1. 이슈트반 1세(1000년 ~ 1038년)
2.2.2. 혼란기(1038년 ~ 1077년)
2.2.2.1. 페테르어버 샤무엘(1038년 ~ 1046년)
2.2.2.2. 언드라시 1세벨러 1세(1046년 ~ 1063년)
2.2.2.3. 셜러몬게저 1세(1063년 ~ 1077년)
2.2.3. 라슬로 1세(1077년 ~ 1095년)
2.2.4. 칼만(1095년 ~ 1116년)
2.2.5. 이슈트반 2세(1116년 ~ 1131년)
2.2.6. 벨러 2세(1131년 ~ 1141년)
2.2.7. 게저 2세(1141년 ~ 1162년)
2.2.8. 동로마 제국의 간섭(1162년 ~ 1181년)
2.2.9. 벨러 3세(1173년 ~ 1196년)
2.2.10. 임레언드라시 2세(1196년 ~ 1235년)
2.2.11. 몽골 제국의 침략과 극복(1235년 ~ 1270년)
2.2.12. 아르파드 왕조의 몰락(1270년 ~ 1301년)
2.2.12.1. 이슈트반 5세(1270년 ~ 1272년)
2.2.12.2. 라슬로 4세(1272년 ~ 1290년)
2.2.12.3. 언드라시 3세(1290년 ~ 1301년)
2.3. 왕위 쟁탈전(1301년 ~ 1308년)
2.4. 앙주 왕조
2.4.1. 카로이 로베르트(1308년 ~ 1342년)
2.4.2. 러요시 1세(1342년 ~ 1382년)
2.4.3. 앙주 왕조의 몰락(1382년 ~ 1395년)
2.5. 지기스문트(1395년 ~ 1437년)
2.6. 내우외환(1437년 ~ 1458년)
2.7. 마차시 1세(1458년 ~ 1490년)
2.7.1. 집권 과정
2.7.2. 내치
2.7.3. 보헤미아 전쟁
2.7.4.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2.7.5.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2.7.6. 말년
2.8. 헝가리 왕국의 몰락
2.8.1. 마차시 1세의 계승자
2.8.2. 울라슬로 2세(1490년 ~ 1516년)
2.8.3. 러요시 2세모하치 전투(1516년 ~ 1526년)
2.9. 삼분할된 헝가리
2.11. 현대 헝가리 왕국: 합스부르크 왕조 이후 호르티의 섭정기
3. 관직
4. 관련문서

언어별 명칭
헝가리어
Magyar Királyság
라틴어
Regnum Hungariae
독일어
Königreich Ungarn
크로아티아어
Kraljevina Ugarska
기타 언어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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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헝가리어
Mogyër Királyság
슬로바키아어
Uhorské kráľovstvo
루마니아어
Regatul Ungariei[1]
세르비아어
Краљевина Угарска/Мађарска (Mȁđarskā)
슬로베니아어
Kraljevina Ogrska
체코어
Uherské království
폴란드어
Królestwo Węgier
튀르키예어
Macaristan Krallığı
프랑스어
Royaume de Hongrie
이탈리아어
Ungheria
고대 교회 슬라브어
Ѫгри (Ǫgri)
이디시어
אונגאַרן (Ungarn)




1. 개요[편집]


1000년부터 1946년까지 헝가리와 그 주변 지역[2]에 존재하였던 국가이다.

1526년부터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867년에 대타협을 통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성립과 함께 주권 상당부분을 되찾았으나,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없어졌다.

이후 잠시 동안 공화정공산 정권이 들어서지만 트리아농 조약으로 왕정이 부활하고 1920년부터 1944년까지 호르티 미클로시가 섭정을 맡아 집권하였다.[3] 1944년 말부터는 살러시 페렌츠가 집권하였으며, 1945년엔 소련에 점령당해 소련의 괴뢰국으로 전락한다.


2. 역사[편집]



2.1. 건국 배경[편집]


9세기경 아바르족의 지배를 받던 마자르족은 아바르족이 페체네그족과 수십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쇠락해진 틈을 타 830년경 드니프로 강드네스테르 강 사이의 땅(에텔쾨즈, 현 우크라이나 서남부)에서 독립 세력을 일궜다. 그러다가 896년 초 시메온 1세불가리아 제1제국페체네그의 협공으로 종족을 지키기 힘들어지자, 그들은 적의 공세를 피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판노니아 대평원으로 집단 이주했다. 이때 줄러(군사령관)를 맡았던 아르파드는 줄러와 함께 마자르족을 이끌었던 켄데(제사장)가 단절되자 단독으로 마자르인들을 이끌었다.

아르파드와 그의 후손들이 이끄는 마자르인들은 카르파티아 산맥을 페체네그 등 동쪽 유목 민족에 대한 방어선으로 삼고 900년경 도나우 강 동쪽의 영토를 접수한 뒤 북으로는 발트해, 서로는 도버 해협, 남으론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북부까지 군사 원정을 감행해 수많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그러나 933년 독일 왕 하인리히 1세에게 패퇴했고, 955년 오토 1세가 이끄는 독일군에게 아우크스푸르크 인근의 레히펠트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그 후 마자르인들은 대평원에서 헝가리 대공국을 결성하고 서유럽인들과 교류했으며, 지도부는 주변국들의 침략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가톨릭 개종을 추진했다.

997년 게저(Géza, 재위기간: 972년 ~ 997년) 대공이 사망한 뒤 장남 이슈트반이 뒤를 이어 대공에 올랐다. 그러나 트란스다누비아 남부 지역의 영주였던 코파니(Koppány)가 자신의 아버지 '대머리 제린드'와 게저가 체결한 협정에 따라 자신에게 헝가리 대공 직위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게저의 아내 셔롤트와 결혼하겠다고 선포했다. 코파니는 게저 시절에 억압받았던 마자르 귀족들을 끌어모았고, 이슈트반은 이에 맞서 아내가 이끌고 온 바이에른 호위대와 함께 헝가리 정규군과 독일 기사들을 소집했다. 코파니는 그의 군대와 함께 북부 트란스다누비아를 침공하여 각지를 약탈했다. 이에 이슈트반이 그를 향해 진격했고, 양측은 베스프렘 인근 셰드 계곡에서 맞붙었다.

반나절 동안 이어진 격전 끝에, 이슈트반이 코파니가 이끄는 경기병대를 격파했다. 코파니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이슈트반은 시신을 매장해야 한다는 헝가리의 불문법을 무시하고 계곡에서 그대로 썩게 내버려두라고 명했다. 이는 대공의 권위에 불복종하는 자의 말로를 모두에게 보여줌으로써 다시는 반란을 꿈에 꾸지 못하게 하려는 정치적 술수였다. 그는 뒤이어 코파니의 영지를 공략하고 부하들에게 토지를 분배했으며, 코파니의 옛 부하들에게 판노할름 수도원에 십일조를 바치라고 강요했다.

999년, 이슈트반은 판노할름 수도원장을 로마로 파견해 헝가리를 가톨릭 국가로 봉헌하겠으니 자신을 헝가리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청했다. 교황 실베스테르 2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의 동의를 얻어낸 그는 1000년 12월 25일 또는 1001년 1월 1일에 대관식을 거행하고 '이슈트반 1세'로서 헝가리 국왕이 되었다. 이리하여 헝가리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2.2. 아르파드 왕조[편집]



2.2.1. 이슈트반 1세(1000년 ~ 1038년)[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Hungary_11th_cent.png
11세기 헝가리의 모습

헝가리 왕국의 초대 왕이 된 이슈트반 1세는 권력을 공고히하기 위해 1002년 또는 1003년에 트란실바니아의 통치자이자 삼촌인 율라 3세와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승리를 거둔 그는 율라의 가족들을 투옥하고 소금 광산을 몰수했으며,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 왕국에 병합하고 그곳에서도 기독교 개종 사업을 단행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개종을 거부하는 자는 가차없이 처단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율라는 탈옥에 성공한 뒤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에게 망명했다. 이후 1014년부터 1018년까지 폴란드와 헝가리의 전쟁이 벌어졌다. 폴란드군은 한때 모라바 강까지 진출하여 헝가리를 압박했다. 그러다가 키예프 루스와의 전쟁이 터지자, 볼레스와프 1세는 이슈트반 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헝가리에게 빼앗았던 모든 영토를 이슈트반에게 돌려주는 대신 일부 헝가리 병력을 지원받았다.

그는 두 개의 부족 국가들을 상대로도 공세를 벌였다. 케파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불가리아인과 슬라브인의 지도자인 케안(Keán)과 전쟁을 벌였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케안이 트란실바니아 남부에서 할거하는 부족장이었다고 추정한다. 이슈트반은 1003년경 케안을 주살한 뒤 케안의 옛 영지에 자신을 따르는 관료를 선임했다. 그는 1008년경에 흑마자르와도 전쟁을 벌였다. 남동부 트란스다뉴비아에 거주하는 이들은 대다수 마자르족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상황에서도 고유의 신앙을 고집했다. 그는 이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그들의 영토에 페크스 주교구를 설립하고 1009년 8월 23일 교황 특사 아초에게 이곳을 맡겼다. 또한 이 시기에 컬로처 대교구가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무력을 통해 영역을 확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결혼 동맹을 통한 세력 확대를 도모했다. 그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누이를 "마트라의 숲에 있는 큰 땅"의 지배자인 쿠만 족장 어버 샤무엘과 결혼시켰다. 이를 통해 어버 샤무엘의 영역도 헝가리 왕국에 통합되었으며, 이슈트반은 그 대가로 어버 샤무엘에게 팔라토이스판(궁전 백작) 직책을 하사하고 중책을 맡겼다. 어버 일족은 이슈트반 왕을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또한 1009년에 또다른 누이인 그리말다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오토 오르세올로의 결혼을 이끌었다. 베네치아는 동로마 제국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헝가리는 이 결혼을 통해 동로마 제국과의 오랜 갈등을 정리하고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1026년, 독일 왕 콘라트 2세가 이슈트반의 처남이자 베네치아 도제인 오토 오르세올로를 공격해 베네치아에서 축출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과 헝가리의 사이는 급격히 악화되었고, 1029년 바이에른군이 신성 로마 황제 콘라트 2세의 지시에 따라 피슈차 강과 라이타 강 사이의 헝가리 영토를 여러번 급습했다. 이슈트반은 이에 대응하여 바이에른 영토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1030년 6월, 콘라트 2세가 라바 강을 건너 헝가리로 진군했다. 그러나 이슈트반이 청야전술을 사용해 적을 굶주리게 한 뒤 비엔나 근처에서 철수하던 독일군을 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양자는 1031년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했다.

1028년, 모로스 지역에서 강력한 부족 국가를 수립한 아즈토니와 이슈트반의 전쟁이 발발했다. 이슈트반은 아즈토니가 기독교로 개종했는데도 7명의 아내를 둔 점을 들어 여전히 이교를 따른다고 비난하면서, 차나드에게 군대를 맡겨 아즈토니를 무찌르게 했다. 차나드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모로스로 진격해 아즈토니를 주살했고, 이슈트반으로부터 그곳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차나드 교구가 이곳에 설치되었고, 1030년에 겔레르트가 첫 주교로 선임되었다. 아즈토니를 토벌하는 데 성공하면서, 헝가리 왕국은 판노니아 대평원과 카르파티아 분지를 포괄하는 지역강국이 되었다. 그는 이 드넓은 영토를 여러 카운티로 나누고, 왕실 관리인 이슈판(ispan)을 영주로 세웠다. 카운티의 중심에는 성이 세워졌다. 또한 각지의 카운티에 교회를 세우고 가톨릭 개종 사업을 강력히 실시해 헝가리를 진정한 가톨릭 국가로 거듭나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2권의 법전 이라스미벳(írásművet) 을 반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법전은 주로 신성 로마 제국의 법전을 차용했지만 헝가리 현지 사정을 고려해 조금씩 변형했다. 가령, 이 법전에서는 10개의 마을을 하나로 묶고 교회를 한 개 짓고 사제를 지원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일요일 미사와 공휴일 준수를 의무화했으며, 모든 죽어가는 사람은 죽기 전에 사제를 불러서 고백해야 하며 그러지 않을 경우 유족들은 사제가 지정한 기간 동안 금식해야 했다. 또한, 그는 은화를 독자적으로 주조해 현물거래가 일반적이던 헝가리 왕국이 화폐경제를 수용하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유목 생활에 전념핟던 헝가리인들이 한 곳에 정착하여 농경 생활을 하도록 권고했고, 추종자들에게 토지를 골고루 분배해 정착을 유도했다.

이슈트반은 아내 기젤라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오토와 임레를 낳았다. 하지만 오토가 유아기 때 죽었기 때문에, 임레가 사실상 외아들이었다. 그는 베네치아 출신의 베네딕토회 수도사 제라르에게 아들을 엄격히 교육시키게 해 차기 왕으로서 부족함이 없게 했다. 여기에 아들에게 헝가리 왕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을 열거한 훈계문을 작성했다. 그는 이 훈계문에서, "헝가리 왕은 반드시 가톨릭을 신봉해야 하며, 귀족과 성직자들의 조언을 귀담아듣고 백성을 온유하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임레는 불행히도 1031년 9월 2일 헤기쾨츠첸티엠레(현재 루마니아 산팀레우)에서 사냥하던 중 멧돼지의 뿔에 찔려 죽었다. 그는 이 사고에 큰 충격을 받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임레 사후 차기 후계자로는 이슈트반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니트라 공작이었던 바줄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그는 바줄이 경박하고 어리석으며 가톨릭 신앙도 두텁지 못하니 왕위를 이을 그릇이 안 된다고 판단하고, 전임 베네치아 도제 오토 오르세올로와 자신의 누이 그리말다의 아들인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일타이크 연대기에 따르면, 이에 반감을 품은 바줄은 네 명의 귀족을 꼬드겨 왕을 암살하게 했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했고, 이슈트반은 네 귀족들의 팔을 자르게 한 뒤 바줄의 두 눈을 멀게 했다. 여기에 바줄의 세 아들 레벤테, 언드라시, 벨러를 체포하려 했지만, 이들 모두 국외로 달아났다. 반면 바줄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들의 치하에서 쓰여진 후기 헝가리 연대기에 따르면, 이슈트반은 바줄을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지만 그의 아내 기젤라를 포함한 바줄의 적들이 왕의 사절이 도착하기 전에 바줄의 눈을 멀게 하고 귀구멍을 납으로 채워버렸다고 한다.


2.2.2. 혼란기(1038년 ~ 1077년)[편집]



2.2.2.1. 페테르어버 샤무엘(1038년 ~ 1046년)[편집]

1038년 8월 15일, 이슈트반 1세가 사망했다. 이후 왕위에 오른 오르세올로 페테르는 선왕이 추진한 가톨릭 진흥 정책을 지속했고, 화폐를 대량 주조해 화폐경제를 촉진하게 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대외 활동을 벌였다. 1039년과 1040년 겨울에 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오스트리아 변경백이자 자신의 처남인 아달베르트의 영토를 파괴했다. 또한 독일왕 하인리히 3세에 대적하는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를 지원해 보헤미아군이 브루테크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불가리아인의 독립을 꾀한 페테르 데얀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렇듯 왕으로서 정력적으로 활동했지만, 대다수 헝가리 귀족들은 외국인 왕을 받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페테르는 이를 경계해 각 주의 주요 성에 이탈리아와 독일 출신 병사를 배치하고 헝가리인 영주의 정치 참여를 일절 틀어막았다. 시몬 케자이의 헝가리 연대기에 따르면, 그가 데려온 외국인 병사들이 민가에서 추악한 행동을 일삼아서 원성을 사자, "나는 모든 판사, 존경할 만한 신사, 장교, 영주, 고위 인사들을 독일인이탈리아인으로 채우고, 헝가리 땅을 외국인으로 채움으로써, 독일인에게 왕국을 바칠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후대에 그를 비난하기 위해 지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그는 이슈트반 1세 앞에서 기젤라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을 무효로 처리하고 기젤라의 재산 대부분을 몰수하고 베스프렘의 별궁에 연금했다. 이에 분노한 기젤라는 유력한 헝가리 귀족인 어버 샤무엘과 손을 잡고 반란을 꾀했다. 1041년, 어버 샤무엘과 헝가리 귀족들은 수도 세케슈페헤르바르에 군대를 이끌고 와서 독일 출신으로 왕 옆에서 난정을 일삼는 부도(Budo)를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페테르가 거부하자, 그들은 곧바로 부도를 죽이고 부도의 두 아들을 실명시켰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페테르는 1041년 9월 헝가리에서 도주했고, 영주들은 어버 샤무엘을 새 국왕으로 추대했다.

어버 샤무엘은 왕위에 오른 뒤 신성 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페테르를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1042년 2월 15일 군대를 이끌고 트라이젠 강을 건너 신성 로마 제국의 산하의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을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그는 군대를 3개로 나누었다. 그 자신이 이끄는 남쪽 군단은 툴른 시까지 진격하면서 각지를 약탈했고 다른 부대도 승리했지만, 북쪽으로 보낸 한 개 부대는 오스트리아 변경백 아달베르트에게 패배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군이 헝가리로 철수하는 헝가리군을 향해 반격을 개시하자, 포로로 끌려가고 있던 오스트리아인들이 봉기했다. 헝가리군은 추격을 피해 달아났지만 다수가 모르바 강을 건너던 중 익사했다.

1042년 가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는 헝가리로 쳐들어가 도나우 강 북쪽 영토를 점거했다. 그러나 점령지를 지키기에 충분한 병력을 끌고 오지 못했기에 곧 철수했고, 샤무엘은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했다. 1043년, 하인리히 3세는 다시 공세를 개시해 라바 강까지 이르며 헝가리군을 여러 차례 격파했다. 그는 하인리히 3세에 사절을 다섯 번이나 보내 평화 협정을 맺어달라고 요청했지만, 하인리히 3세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듯 신성 로마 제국에 패하기만 하자, 그를 따라 페테르를 축출했던 귀족들이 그마저 제거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모조리 숙청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1044년 부활절에 공모자들을 회의에 소집한 뒤 단검을 품에 숨긴 시종들에게 그들 곁에 접근했댜가 모조리 찔러 죽이게 했다고 한다.

1044년, 하인리히 3세는 페테르와 함께 헝가리로 다시 진군했다. 어버 샤무엘은 군대를 끌어모아 멘포에서 적과 맞붙었다. 그러나 전투 도중에 부하들이 그를 배신하여 독일군에 가담해 버리면서 참패했고, 그곳에서 전사했다. 이리하여 복위에 성공한 오르세올로 페테르는 하인리히 3세의 지시에 따라 이슈트반 1세가 반포한 헝가리 법을 폐지하고 독일법을 따랐고, 1045년 오순절에 헝가리를 방문한 황제에게 금박을 입힌 창과 왕관을 바쳤다. 하인리히 3세는 페테르가 바친 창과 왕관을 로마로 가져와서 헝가리가 신성 로마 제국의 속국이 되었음을 널리 알렸다. 또한 페테르는 또다시 외국인들을 최상위 관직에 앉히고 헝가리 귀족들을 억압했다. 이에 헝가리 귀족들은 반감을 품고 그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한편, 1046년 여름 바타에서 이교도 반란이 발발하여 코로스 일대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1046년 9월, 반란군은 아바우이바르에서 헝가리에 비밀리에 잠입한 레벤테, 언드라시를 접견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배제하고 마자르 고유의 신앙으로 돌아간다면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제안했고, 세 사람은 동의했다. 이후 반란군이 수도를 향해 진격하자, 페테르는 헝가리를 탈출해 아우크스부르크에 집결하고 있는 독일군과 합세하려 했다. 그러나 국경 인근의 자몰리 마을에서 언드라시를 추종하는 이들에게 포위되었다. 페테르와 소수의 추종자들이 한 저택에서 사흘간 항전했지만 끝내 제압당했고, 그는 1046년 10월 세케슈페헤르바르로 끌려간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2.2.2.2. 언드라시 1세벨러 1세(1046년 ~ 1063년)[편집]

1046년 말 오르세올로 페테르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오른 언드라시 1세는 반란군과 맺었던 "기독교를 배제하고 마자르 고유의 신앙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무효화하고 기독교 진흥 정책을 실시했다. 1047년 귀족들을 규합하여 반란군을 진압한 뒤, 반군에 의해 살해된 사제들을 대체하기 위해 프랑스로부터 사제들을 초빙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자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사절을 보내 영토를 양도하고 공물을 바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평화 협상은 중단되었다.

하인리히 3세의 당시 관심사는 이탈리아 반도 북부였으나 언젠가 헝가리를 다시 속국으로 삼기 위해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았다. 언드라시는 이에 대비하고자 1048년 초 폴란드에서 동생 벨러를 불러 헝가리군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국토의 3분의 1을 벨러에게 주고 자신의 허락 없이도 독자적으로 통치할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자신이 죽으면 벨러가 뒤이어 왕위에 오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050년, 하인리히 3세가 예상대로 헝가리를 향해 진군했다. 그들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진격했다. 하인리히 3세가 이끄는 본대는 바그 강을 건너 니트라 강을 거슬러 내려가서 슈타이어마르크를 거쳐 트란스다뉴비아로 진격했다. 레겐스부르크의 게브하르트 주교가 이끄는 또다른 군대는 도나우 강을 확보하고 보급품을 군대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벨러는 이에 맞서 청야 전술을 구사했다. 독일군은 가는 곳마다 황폐화되어 있어서 식량과 물자를 제대로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진군을 강행한 끝에 헝가리의 수도 세케슈페헤르바르에 도착했다.

벨러는 적의 보급로를 차단한 후 소규모 기병대를 이끌어 적의 진지를 급습해 화살을 날린 뒤 적이 반격하기 전에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이로 인해 탈진한 데다 세케슈페하르바르의 방비가 강했기 때문에 공성전을 벌여봐야 공략할 가능성이 희박했기에, 독일군은 공성전을 포기하고 보급품을 운반하는 선박이 있는 베르테스를 향해 북쪽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러나 벨러는 적의 의도를 간파하고 사절 한 명을 독일인으로 가장하여 게브하르트 주교에게 보내 배를 거둬들여 본국으로 철수하게 했다. 이로 인해 베르테스에 도착했을 때 선박이 없자, 독일군은 완전히 낙심한 채 레겐스부르크로 퇴각했다. 그 과정에서 헝가리군이 끈질기게 추격하는 바람에 많은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했다.

하지만 하인리히 3세는 실패에 굴하지 않고 1051년 봄에 헝가리를 다시 침공했다. 독일군은 도나우 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포조니를 포위하여 8주 동안 공성전을 벌였다. 이때 조문트라는 이름의 수비대 전사가 밤에 강을 헤엄쳐서 적 선박 근처에 숨은 뒤 배 밑바닥에 구멍을 뚫었다. 이로 인해 배에 물이 차서 작전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독일군은 어쩔 수 없이 퇴각해야 했다.

그 후 하인리히 3세는 교황 레오 3세의 중재에 따라 헝가리와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는 상당한 돈과 영토를 요구했지만, 독일 내부에서 황제에 대항하는 반란이 터지는 바람에 협상이 중단되었다. 1056년 하인리히 3세가 죽고 6살 된 아들 하인리히 4세독일왕이 되었다. 왕의 어머니로서 섭정을 맡은 푸아투의 아녜스는 국내 사정이 불안한 상황에서 헝가리와 이 이상 전쟁을 이어가는 것은 무익하다고 여기고 1058년 헝가리에게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은 채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때 양자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언드라시 1세의 아들 셜러몬과 하인리히 3세의 딸인 슈바벤의 유디트와 약혼했다.

언드라시 1세는 전쟁을 종결한 후 아들 셜러몬을 공동 왕으로 내세웠다. 그러자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벨러가 반발했고, 헝가리 왕국은 또다시 내란의 조짐을 보였다. 얼마 후 둘째 아들 다비드가 태어났지만, 언드라시 1세는 기쁨을 채 누리기 전에 뇌졸중에 걸려서 신체 일부가 마비되었다. 그는 자신이 이대로 죽으면 동생 벨러가 두 아들을 해칠까 두려워했다. 왕실 고문들은 벨러를 죽이라고 권했지만, 언드라시는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었기에 벨러에게 셜러몬을 위해 은퇴하기를 권하기로 했다.

1059년, 언드라시 1세는 벨러를 티서바르코니의 별궁으로 초대한 뒤 그에게 왕관과 검을 내밀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지시했다. 왕관은 왕국을, 검은 두카트를 상징했다. 벨러가 왕관을 선택한다면 왕의 추종자들이 그 자리에서 그를 죽일 것이고, 그가 검을 가져가면 그는 자신이 맡은 영지에서 평화롭게 통치할 수 있었다. 벨러가 한동안 망설이고 있을 때 벨러의 추종자인 미클로스가 "오래 살고 싶으면 검을 선택하십시오."라고 속삭였다. 벨러는 그 말에 따라 검을 선택했고, 언드라시는 동생을 돌려보냈다.

그 후 벨러는 형이 언젠가는 자신을 해칠 거라 여기고 폴란드 국왕 볼레스와프 2세의 지원을 받아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언드라시는 이에 맞서 아녜스 황후의 지시에 따라 바이에른, 보헤미아, 작센에서 파견된 독일군의 지원을 받았다. 양자는 몬슨 인근에서 맞붙었고, 반나절 동안 이어진 격전 끝에 벨러가 승리했다. 언드라시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망명하려 했지만, 사전에 탈출로를 차단한 벨러의 기병에 의해 사로잡혔다. 이후 바코니 숲의 지르크 저택에 갇혀 지내다 1260년 12월 6일 이전에 사망했다.

형을 타도하고 왕위에 오른 벨러 1세는 형의 아내와 자식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재산을 지켜주겠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해 내란의 여지를 최소화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1061년에 각 마을에서 대표 2명을 선출해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열리는 공개 회의에 참석하게 했다. 그는 이들로부터 왕으로 인정받음으로써 정통성을 고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성벽 밖에 진을 치고 있던 일부 대표자들이 가톨릭 교회의 강요를 중단하고 마자르족 고유의 신앙을 회복해달라고 요구했다.

급기야 지난날 이교 회복을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던 바타 족장의 아들 야노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세케슈페헤르바르를 급습했고, 왕의 추종자들은 인근 요새로 도망쳤다. 벨러 1세는 일단 반란군에게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겠지만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으니 그들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사흘만 기다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 사이에 병력을 은밀히 끌어모은 뒤, 모든 게 자기 뜻 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여기던 반란군을 습격해 모조리 섬멸했다. 이후 헝가리에선 두 번 다시 이교도의 반란이 벌어지지 않았다.

1063년, 벨러 1세는 독일로 망명한 셜러몬에게 귀국을 권고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해 여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이 셜러몬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헝가리를 상대로 군사 원정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벨러 1세는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도모스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그런데 그해 9월 11일, 그는 뜻밖의 사고를 당했다. 케페스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왕좌에 앉은 채 고심하던 중 왕좌가 돌연 부러지는 바람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수하들은 급히 왕을 들것에 실어서 세케슈페헤르바르의 왕궁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왕은 키니저 강변에서 숨을 거두었다.


2.2.2.3. 셜러몬게저 1세(1063년 ~ 1077년)[편집]

벨러 1세가 허망하게 사망한 후, 두 아들 게저 1세언드라시 1세는 폴란드로 도피했고, 셜러몬이 신성 로마 제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입성한 뒤 헝가리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제국군이 철수한 직후인 1063년 가을, 벨러 1세의 자식들이 폴란드군의 협조에 힘입어 헝가리를 공격했다. 여기에 벨러 1세를 심정적으로 지지하던 영주들이 가세했고, 민중들은 그가 독일의 꼭두각시 노릇할 거라 여기고 토벌군 모집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적의 공세를 피해 신성 로마 제국의 국경과 가까운 모손 성으로 피신한 후 제국군의 지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리하여 대규모 내전이 발발하는 듯 했으나, 죄르의 데죄 주교가 양측을 오가며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호소했다.

1064년 1월 20일, 분쟁 당사자들은 죄르에서 데죄 주교의 중재 아래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벨러 1세의 세 아들 게저, 라슬로, 람페르트는 셜러몬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 대가로 헝가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공국을 맡았다. 셜러몬과 게저는 부활절을 함께 축하했고, 1064년 4월 11일 게저가 셜러몬의 머리에 왕관을 직접 씌워주었다. 그러나 당시 설러몬은 아직 11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어머니 아나스타시야와 비드 주교, 에르네 주교 등이 섭정을 맡았다.

1067년, 이스트리아변경백 울리히가 크로아티아 총독 드미타르 즈보니미르의 영지인 크바르네르 만 일대를 공략했다. 즈보니미르의 아내 헬레나는 벨러 1세의 딸로 게저의 여동생이었다. 그래서 셜러몬은 게저와 함께 즈보니미르를 도와서 이스트리아군을 물리치고 영지를 되찾게 해주었다. 1068년 보헤미아-폴란드 전쟁 때 게저 형제와 함께 폴란드 편에 섰고, 보헤미아 공국에서 군사 활동을 수행했다.

1068년, 오술이 지휘하는 페체네그 군대가 에르데이로 침입해 도보카(오늘날 루마니아의 더바카), 사요사르바르(오늘날 이리오아라)를 비롯한 여러 요새를 파괴하고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여기에 에르데이 서쪽에 있는 니르세르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페체네그인들은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본토로 귀환했지만, 셜로몬, 게저, 라슬로가 이끄는 헝가리군이 도보카 인근 케를레시 언덕에서 매복 공격해 이들을 섬멸했다.

1071년, 페체네그인들이 발코 주 일대를 약탈했다. 셜러몬은 동로마 제국이 페체네그인들을 부추겼다고 여기고, 이에 보복하고자 게저 1세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북방 요새인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포위 공격했다. 3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난도르페헤르바르 성주 니케타시가 백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는 셜러몬이 아니라 게저에게 항복하겠다고 밝혔고,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불화의 씨앗이 뿌려졌다. 게다가 전리품의 분배를 놓고 양측 추종자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고, 동로마 황제가 평화 협상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낼 때 셜러몬이 아닌 게저에게만 보낸 일로 인해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1072년, 셜러몬은 게저 1세와 함께 동로마 제국을 향한 공세를 재개했다. 헝가리군은 니시까지 침투해 많은 제물을 확보하고 귀환했다. 그러나 이무렵 그와 게저와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1073년 두 진영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다 주교들의 중재로 에스테르곰 성에서 협의 끝에 1073년 11월 11일부터 1074년 4월 24일까지 휴전하기로 했다. 이후 양자는 상대방을 꺾기 위해 동맹국을 찾았다. 셜러몬은 신성 로마 제국에 군대를 보내달라고 청했고, 게저는 키예프 루스, 보헤미아 공국, 폴란드 왕국으로 잇따라 사절을 보내 병력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먼저 증원군을 확보한 쪽은 셜러몬이었다. 1074년 2월 26일, 셜러몬은 독일 제후들이 보내준 병력과 함께 케메즈넬에서 게저를 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게저가 바츠로 도주하자, 그는 즉시 추격했다. 그러나 게저의 남동생 라슬로와 게저의 처남인 올뮈츠 공작 오토 1세가 군대를 이끌고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1074년 3월 14일, 모교로드 전투에서 예상치 못한 적군의 급습을 받아 참패한 그는 독일과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모손 성으로 달아났고, 게저와 라슬로는 헝가리의 요충지들을 모조리 장악하고 헝가리의 수도인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입성했다.

그 후 셜러몬은 독일과 인접한 서부 일대를 다스리면서 헝가리 왕을 자처했고, 게저 1세는 헝가리의 나머지 영토를 다스렸다. 1074년 여름, 하인리히 4세가 "저를 도와주신다면 왕국 전체를 제국의 봉토로 기증하겠습니다."라는 셜러몬의 제안을 받아들여 헝가리로 진격했다. 셜러몬은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독자적으로 움직여 니트러에서 게저 1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제국군은 바츠로 이동하는 동안 청야 전술로 인해 보급난에 시달리다가 퇴각했다.

게저 1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자신을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셜러몬과 화해하고 왕국을 양분하라는 답신을 받자, 이를 거부하고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기로 했다. 1075년, 그는 동로마 황제 미하일 7세에게 왕관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황제는 금과 에나멜로 된 왕관을 보냈는데, 이 왕관에는 "헝가리의 충실한 왕 게저"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그는 훗날 성 이슈트반 왕관으로 불리는 이 왕관을 쓰고 비로소 대관식을 치렀다. 미하일 7세가 그에게 왕관을 보내준 것은 셀주크 제국이 아나톨리아를 집어삼키고 있고 경제는 파탄 지경에 처한 상황에서 발칸 반도 전선이라도 평온을 유지하려면 헝가리와 친해야 할 필요성이 있기도 했고, 게저가 동로마 제국 사령관 테오도로스 쉬나데노스의 딸 쉬나데네와 결혼했던 점도 고려되었다.

1076년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에서, 게저는 헝가리 교회의 최고 고위 성직자들을 모아 평화를 이루기 위해 헝가리 영토의 2/3을 셜러몬에게 넘기고 나머지 1/3만 다스릴 의향이 있다고 밝했다. 그러나 평화 협상을 개시하기 전인 1077년 4월 25일에 사망했다. 게저 1세는 생전에 칼만과 알모스를 낳았지만, 그가 사망할 무렵엔 두 왕자 모두 너무 어렸기에 동생 라슬로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2.2.3. 라슬로 1세(1077년 ~ 1095년)[편집]


1077년 형 게저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라슬로 1세는 먼저 헝가리의 법률을 종합한 '라슬로 1세 법전(I. László I. törvénykönyve)'을 편찬했다. 그는 이 법전 서문에 "헝가리의 영주들은 도둑을 살려주거나 숨기지 않겠다고 맹세해야 한다"라고 기술했으며, 법규 중 절반 이상을 재산 보호에 할애했다. 모든 절도범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암탉의 가치보다 많은 것을 훔친 자는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실명형에 처해지며, 범인이 교회에 숨을 경우 처벌을 면하는 대신 10세가 넘는 자녀들이 노예로 팔렸다. 또한 손이나 코를 자르고 혀를 찢는 등 신체 절단형도 흔히 시행되었다.

만약 판사가 범인을 도망치게 한다면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예로 팔렸다. 반면 무고한 사람을 교수형에 처했을 경우 피해자의 피값만 내면 됐다. 또한 그는 왕가의 소금 독점을 정당화했으며, 귀족(nobilis)이라는 용어를 법전에 처음 드러내면서 이들에게 반역죄 등 중대한 범죄를 제외한 법적 책임에 대해 면책 특권을 부여했다. 이후 헝가리 귀족들은 라슬로 1세의 법전에 근거하여 특권적인 지위를 향유했다. 한편, 라슬로 1세 법전은 소와 말의 수출과 유통을 제한했으며, 살인자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이중 2/3을 피해자의 유족에게, 1/3을 살인자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주게 했다.

1079년 겨울, 라슬로 1세는 셜러몬의 군대를 격파하고 몬손 성을 공략했다. 셜러몬은 하인리히 4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심각한 갈등을 벌이고 있던 하인리히 4세는 소규모 병력만 보냈을 뿐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입지가 갈수록 위태로워진 셜러몬은 1081년 봄 자신의 신변을 보장해주고 재산을 보전해주는 대가로 왕위에서 물러나 라슬로 1세의 신하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1082년경 추종자들을 은밀히 끌어모아서 라슬로 1세를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가 발각되어 비셰그라드 성에 연금되었다.

1083년 8월 20일, 헝가리 초대 국왕 이슈트반 1세가 가톨릭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라슬로 1세는 이 날을 기리기 위해 셜러몬을 특별 사면하기로 했다. 하지만 셜러몬은 아직 헝가리 왕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레겐스부르크에 있던 하인리히 4세를 찾아가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청했다.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와의 갈등 때문에 도와줄 여력이 없었고 아내 유디트 마저 외면해버리자, 그는 다시 페체네그와 연합하기로 했다. 그는 페체네그 지도자 쿠테스크(Kutesk)에게 복위시켜준다면 트란스다뉴비아를 페체네그에게 넘겨주고 쿠테스크의 딸을 아내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1085년 셜러몬은 페체네그와 함께 헝가리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라슬로 1세가 반격을 개시해 문카치에서 페체네그인을 격파했다. 셜러몬은 이후에도 페체네그인과 함께 했고, 1087년 페체네그 지도자 첼구(Celgu)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불가리아 테마를 습격했다가 동로마 제국군의 반격으로 패한 뒤 어느 산채에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4]

1087년, 하인리히 4세의 통치에 반대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이 슈파이어에서 제국의회를 열었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 콘스탄츠의 베르놀트에 따르면, 라슬로 1세는 그들에게 사절을 보내 2만 마리의 말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고,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를 축출한 뒤 새 교황으로 내세운 클레멘스 3세를 인정하지 않고 빅토르 3세를 교황으로 추대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셜러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교황과 황제의 권력 투쟁에 개입할 이유가 사라졌다고 여기고 반 황제 동맹과 거리를 두었다.

1091년, 라슬로 1세는 크로아트 왕국의 국왕 데메트리우스 즈보니미르의 미망인이자 자신의 누이인 헬레나의 원조 요청을 받아들여 왕위 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크로아트 왕국으로 진군해 사바 강 북쪽에 위치한 슬라보니아를 점령하고 크로아트의 왕을 칭했다. 이때 많은 크로아티아인 귀족들이 그를 받들었지만, 일부 귀족들은 페터르 스바치치를 크로아트 왕으로 세워 그와 대립했다. 라슬로 1세는 게저 1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알모스 왕자에게 크로아트 영토의 관리를 맡겼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크로아트 왕국에 대한 라슬로의 개입을 비판했지만 그 이상의 조치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 후 라슬로 1세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침공하여 모르바 강과 드리나 강 사이의 지역을 공략했다. 하지만 얼마 후 쿠만인들이 카폴크(Kapolcs)의 지도하에 에르데이로 쳐들어가 도나우 강티서 강 사이의 일대를 파괴했다. 라슬로 1세는 급히 본국으로 돌아간 뒤 막대한 전리품과 포로를 데리고 헝가리를 떠나려던 쿠만인들을 테메슈 강 인근에서 습격해 격파했다. 이후 생포된 쿠만인에게 기독교 개종을 제안했고, 쿠만인 대부분이 이를 받아들였다. 라슬로 1세는 이들을 야시사그에 정착시켰다.

본토에 살고 있던 쿠만인은 원정갔던 동료들이 참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라슬로에게 당장 포로들을 풀어주지 않으면 보복하겠다고 경고했다. 라슬로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쿠만과 헝가리 사이의 국경 지대로 진군했다. 양측은 세베린 인근에서 격돌했고, 라슬로 1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이 승리했다. 라슬로는 쿠만 족장 아코스(Ákos)를 처단했다. 그러나 그가 쿠만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사이, 알렉시오스 1세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이 1092년 헝가리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했다.

성 블라시엔의 베르놀트에 따르면, 1092년 12월 하인리히 4세와 라슬로 1세가 회담을 가지려 했으나 바이에른 공작 벨프의 훼방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또한 우르바노 2세는 헝가리인들이 "구원의 목자들을 떠났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라슬로가 이 무렵에 편을 바꾸어 대립교황 클레멘스 3세를 받들기로 했음을 암시했다. 베네딕토회 소모지바르 수도원의 문서에 따르면, 라슬로는 수도원장에게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교회의 세속 권력에 대한 독립을 추구한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에 반대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1092년, 라슬로 1세는 서볼치에서 고위 성직자들을 소집해 공의회를 개최한 뒤 새 법전을 반포했다. 이 법전은 주로 교회 문제를 다뤘다. 사제의 결혼은 초혼까지는 인정하지만 재혼 이상은 금지되었고, 교회의 재산이 보호되었으며, 파괴된 교회의 재건을 국고로 지원했다. 또한 헝가리로 재정착하여 세례를 받은 '이스마일인'인 무슬림으로 돌아가는 것을 금지했으며, 유대인이 기독교인 아내나 하인을 두는 것은 금지되었다. 또한 교회 공휴일 준수, 금식 기간 준수, 교회 옆 매장, 간음자의 처벌 등을 규정했으며, 국외에서 헝가리로 이주한 자들을 교회 근처에 정착해 주교들의 감독을 받게 했다. 여기에 십일조 징수가 규제되었으며, 왕실의 사법부는 강간, 여성의 부도덕, 주술 행위 등을 헝가리 대주교의 입회하에 처벌했다.

1093년, 폴란드 공작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와 브와디스와프 1세의 사생아인 즈비그뉴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다. 그는 즈비그뉴 편에 서서 폴란드로 진군하여 브와디스와프 1세의 어린 아들 볼레스와프를 포로로 잡았다. 결국 브와디스와프 1세는 즈비그뉴를 정식 아들로 인정했다. 일루미나티드 연대기에 따르면, 1095년 부활절에 프랑스카스티야, 잉글랜드에서 온 사절들이 그를 찾아와서 십자군을 일으켜 예루살렘으로 진군해달라고 청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는 신빙성이 떨어지며, 실제로 예루살렘에 십자군 원정을 단행했던 벨러 3세의 치세 때 창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라슬로의 누이 에우페미아는 1073년 이전에 보헤미아 공작 브레티슬라프 1세의 둘째 아들인 올뮈츠 공작 오토 1세와 결혼하여 두 아들 스바토플루크, 오토 2세를 낳았다. 그런데 1087년, 브레티슬라프 1세가 사망한 후 새 왕이 된 브라티슬라프 2세는 올뮈츠 공국을 보르지보이 2세에게 넘기고 에우페미아와 그녀의 자녀들을 추방했다. 그녀는 이에 맞서 보헤미아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몇몇 귀족들과 함께 할거했다. 1095년, 라슬로 1세는 누이와 두 조카를 돕기 위해 보헤미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진군 도중에 중병에 걸렸고, 1095년 7월 29일 헝가리-보헤이마 국경 근처 마을인 니트러에서 사망했다.


2.2.4. 칼만(1095년 ~ 1116년)[편집]


1095년 죽음을 눈앞에 둔 라슬로 1세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형 게저 1세의 두 아들 칼만과 알모스 중 한 사람을 후계자로 지명해야 했다. 그는 알모스를 새 왕으로 지명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칼만은 숙청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폴란드 왕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1세로부터 병력을 빌려 헝가리로 진격했다. 알모스는 형과 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형에게 왕관을 바쳤다. 1096년 초, 칼만교황 우르바노 2세의 허락을 받아 성직자 서약에서 해방된 뒤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별다른 저항없이 왕위를 넘긴 동생에게 보답하고자 할아버지 벨러 1세가 과거에 통치했으며 헝가리 왕국의 1/3에 달하는 영지인 두카투스를 자율적으로 통치할 권한을 부여했다.

대관식 직후, 그는 민중 십자군이 헝가리 왕국을 통과하면서 야기한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헝가리인들은 그동안 서유럽에서 온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할 때 음식을 제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숫자가 수 만명에 달한 데다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가는 곳마다 약탈을 자행하고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월터가 지휘하는 첫번째 십자군은 1096년 5월 초 헝가리 국경에 도착했다. 칼만은 이들에게 시장에서 식량을 구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월터의 십자군은 별다른 충돌없이 헝가리를 통과했다. 다만 헝가리-동로마 국경 인근의 셈린 마을에서 '나쁜 의도를 가진' 헝가리인이 16명의 십자군들을 공격해 갑옷과 무기, 돈을 탈취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1096년 5월 말 또는 6월 초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 2만 명이 도착했을 때 사달이 났다. 이들은 헝가리를 통과하면서 제물을 약탈하다가 셈린 마을에서 폭동을 일으켜 4,000명에 달하는 헝가리인을 학살한 뒤 헝가리군의 보복을 피해 동로마 제국으로 이동해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동로마 제국군을 죽이고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파괴했다. 이후 3번째 십자군 부대가 니트러에 도착하여 그 일대를 약탈하다 현지인들에게 쫓겨났다.

4번째 십자군 부대는 6월 중순에 모손에 도착했다. 칼만은 다른 부대가 올 때까지 그곳에 머물게 했는데, 이들이 식량과 포도주를 얻기 위해 인근 정착촌을 자주 기습하여 백성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는 데다 유대인들을 무참하게 죽이기까지 하자 더이상 참지 못하고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부관을 십자군에 보내 식량을 공급하며 동로마 제국으로 보내줄 테니 무장을 해제하라고 권했다. 십자군이 이를 믿고 무기를 반납하자, 헝가리군이 이들을 호위하여 동로마 제국으로 이송하는 척했다가 7월 초 펀논헐머 인근에서 전원 학살했다.

1096년 7월 중순, 플론헤임의 에미코 백작이 이끄는 민중 십자군이 헝가리로 진입하려 했다. 칼만은 이들의 입국을 단호히 거부했지만, 에미코는 이를 무시하고 방어선을 뚫고 모손을 포위 공격했다. 십자군이 투석기를 활용해 공성전을 벌인 끝에, 8월 15일 성벽이 두 지점에서 허물어지면서 십자군이 요새 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그런데 그들은 알려지지 않은 사유로 공황 상태에 빠졌고, 모손 수비대가 그 틈에 출격하여 십자군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대다수 십자군이 죽거나 사로잡혔고, 에미코는 소수의 추종자만 거느린 채 신성 로마 제국으로 달아났다. 동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에미코의 패배는 수많은 유대인을 말살한 순레자들에게 신이 가한 징벌이라고 여겼다.

1096년 9월, 교황청이 조직한 최초의 십자군 부대가 헝가리 국경에 도착했다. 이들의 지휘관인 하(下) 로트링겐[5] 공작 고드프루아 드 부용은 칼만에게 기사를 보내 십자군을 통과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칼만은 고심 끝에 8일만에 인질을 내준다면 헝가리를 통과하게 해주겠다고 답했다. 십자군은 도나우 강 우안을 따라 평화롭게 행군했고, 칼만과 그의 군대는 왼쪽 둑을 따라 그들을 따라갔다. 그는 고드프루아의 군대가 헝가리 왕국의 남쪽 국경인 사바 강을 건넌 후에야 인질들을 풀어줬다.

이리하여 십자군 문제를 해결한 뒤, 칼만은 왕국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정복 전쟁에 착수했다. 1097년, 그는 지난날 선대 왕 라슬로 1세 대에 헝가리 왕국에 일부 병합되었지만 여전히 헝가리에 복종하지 않는 크로아트 왕국을 침공했다. 페터르 스바치치가 이끄는 크로아티아인은 카펠라 산맥에서 항전했지만 그보즈드 산 전투에서 참패했고, 스바치치는 전사했다. 헝가리군은 아드리아 해에 도달하여 중요한 항구 거점인 비오그라드나모루를 점령했다.

헝가리군의 위협을 받은 트로기르, 스플리트베네치아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할 테니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베네치아 도제 비탈 2세 미키엘이 이끄는 해군이 함대를 이끌고 달마티아에 접근하자, 함대가 따로 없었던 칼만은 도제에게 협상을 요청했다. 협상 결과, 베네치아는 크로아티아 해안 지역을 헝가리가 가지는 대신 달마티아는 베네치아가 갖기로 했다.

칼만이 크로아트 왕국을 병합하고 왕을 자처하던 사이, 알모스는 그가 부재한 틈을 타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접한 칼만은 본국으로 귀환한 뒤 1098년 동생이 다스리고 있던 두카투스를 향해 진격했다. 이리하여 내전이 벌어지는 듯 했지만, 양군 지휘관들이 동족끼리 싸우기를 원하지 않아 두 사람에게 화해할 것을 강권하면서, "그렇게 싸움이 좋다면 결투를 해라. 우리는 이기는 사람을 왕으로 모시겠다."라고 밝혔다. 이에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아무런 조건 없이 화해하기로 했다.

1099년, 키예프 루스의 대공 스뱌토폴크 2세가 아들 야로슬라프를 헝가리로 보내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공작 토벌에 힘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칼만은 군대를 이끌고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반란 지도자인 볼로다르 로스티슬라비치의 성인 페레미쉴을 포위했다. 이에 볼로다르의 동맹인 다비트 이고레비치는 쿠만인들을 설득해 헝가리인들을 공격하게 했다. 헝가리군은 쿠만인의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참패했고, 칼만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칼만은 보헤미아 공작 브레슬라프 2세의 맹공을 받고 있는 모라바 변경백이자 아르파드 왕조의 친척인[6] 스바토플루크와 오토 2세를 돕기 위해 달려가서 두 사람을 구원했다.

1100년, 칼만은 전임자들의 칙령을 재검토해 라슬로 1세의 법전을 현실에 맞게 개정한 새 법령을 반포했다. 이 법령은 스트릭스(strix: 아기의 배를 갈라 피를 먹고 살아간다고 알려진 전설의 새)에 대한 박해를 금지했는데, 이는 "존재하지 않는 새를 잡으려 했다가 애꿎은 짐승을 잡을 수 있다"라고 봤기 때문이다. 또한 헝가리 노예와 말의 수출을 금지했고, 경제 활동의 다양한 측면에 규제를 가했다.

1102년, 그는 알바 마리티마에서 크로아트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크로아트 왕국의 모든 영토를 헝가리 왕국에 병합했다. 1104년 또는 1105년,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보에몽 1세의 디라히온 침공에 대처하던 중, 보에몽이 칼만과 연합하여 동로마 제국을 협공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로 하고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요안니스 2세와 칼만의 사촌인 피로슈커의 결혼을 주선했다. 마침 칼만 역시 세력 확장에 공을 들이는 상황에서 동로마 제국과 공연히 마찰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동로마 제국과 결혼 동맹을 맺어서 남부 전선을 안정시킨 뒤, 칼만은 1105년 달마티아를 침공하여 트로기르를 포위 공격했다. 트로기르 시는 몇 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칼만에게 복종했다. 뒤이어 포위된 스플리트 시 역시 곧 항복했으며, 다른 달마티아 도시들은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1105년, 칼만은 4살된 아들 이슈트반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동생 알모스가 헝가리를 떠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자신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하인리히 4세는 아들 하인리히 5세의 반란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있던 상황이라 그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이에 알모스는 1106년 폴란드의 군주 볼레스와프 3세에게 지원을 호소했고, 볼레스와프 3세는 이에 응해 헝가리로 쳐들어가 아바우이바르(Abaújvár) 요새를 공략했다. 이에 칼만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폴란드군과 대치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헝가리군이 생각보다 강력한 걸 확인하고 전쟁보다는 협상을 택했다. 칼만과 볼레스와프 3세는 서로 만나서 담화를 나눈 끝에 영원한 우정을 맺고 다시는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결의했고, 알모스는 어쩔 수 없이 칼만에게 복종했다.

1106년 10월, 칼만은 교황 파스칼 2세가 소집한 과스탈라 공의회에 사절단을 보냈다. 사절단은 헝가리 왕이 자신의 영토에 고위 성직자를 임명할 특권을 사임했음을 알렸다. 교황청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칼만의 달마티아 정복을 승인했다. 이후 폴란드 왕 볼레스와프 3세와 즈비그뉴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자, 그는 볼레스와프 3세를 지원하여 즈비그뉴를 폴란드에서 축출하는 데 일조했다. 1107년 10월에는 보에몽과 싸우는 알렉시오스 1세에게 지원군을 보냈으며, 1108년 보에몽이 알렉시오스1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안티오키아의 통치권을 황제에게 넘기겠다는 내용의 데볼 조약을 체결했을 때 증인으로 참석했다.

1107년 또는 1108년, 알모스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다. 칼만은 동생이 부재한 틈을 타 두카투스를 몰수했다. 이리하여 헝가리 전역이 칼만의 통치하에 돌아갔다. 성지에서 귀환한 알모스는 도모스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칼만은 수도원 축성식에 참석했다가 한 고발자로부터 알모스가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는 고변을 받자 체포령을 내렸다. 이에 헝가리의 주교들과 여러 고위 인사들이 알모스를 변호했고, 칼만은 알모스와 손을 맞잡고 화해했다. 그러나 형이 언젠가 자신을 제거할 거라 확신한 알모스는 하인리히 5세를 찾아가 파사우에서 접견한 후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하인리히 5세는 그의 요청을 수락해 1108년 9월 헝가리를 침공해 포조니를 포위했다. 이에 칼만과 동맹을 맺은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3세가 보헤미아를 공격했고, 하인리히 5세는 어쩔 수 없이 철수하기로 했다. 다만 칼만에게 알모스를 용서해달라고 청했고, 신성 로마 제국을 적대하고 싶지 않았던 칼만은 알모스가 헝가리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다. 이후 칼만은 달마티아를 순방하며 스플리트, 트로기르, 자다르의 특권을 인정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1113년, 그동안 자신에게 사사건건 맞섰던 동생 즈비그뉴를 체포해 실명형에 처한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3세가 형제를 해친 것을 속죄하고자 헝가리의 소모기바르 수도원을 순례했다. 칼만은 소모기바르에서 폴란드 군주를 정성껏 영접했다. 얼마 후, 그는 알모스가 또다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여긴 칼만은 알모스와 알모스의 어린 아들 벨러를 실명시키고 그의 추종자들을 신체 절단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일루미네이티드 연대기의 한 사본에 따르면, 그는 심지어 벨러를 거세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집행인이 차마 아이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 없어서 개를 거세한 뒤 그 고환을 왕에게 가져왔다고 한다.

그 후 칼만은 뇌염으로 추정되는 질환에 시달리다가 1116년 2월 3일에 사망했다. 헝가리인은 이에 대해 형제와 조카를 잔혹하게 해친 일로 신의 징벌을 받았다고 여겼다고 한다.


2.2.5. 이슈트반 2세(1116년 ~ 1131년)[편집]


1116년 칼만이 사망한 뒤, 장남 이슈트반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국제 정세는 그에게 불리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자신들이 후원해준 알모스를 잔혹하게 숙청한 칼만에게 불만을 품었고, 교황청과의 주교 선임 분쟁에서 헝가리가 교황 편에 선 것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보헤미아 공작 역시 신성 로마 제국의 편에 서서 헝가리와 대결했고, 칼만에게 달마티아를 빼앗긴 베네치아 공화국 역시 헝가리를 적대했다.

그는 사방이 적국인 상황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와 헝가리-모라비아 국경 지대의 오슬라바 강에서 만나 평화 협상을 벌였다. 그러나 서로간의 입장차가 커서 협상은 결렬되었고, 1116년 5월 13일 양측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격돌했다. 동시대 연대기 작가 코즈마 프라가이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수많은 헝가리인의 시신이 레흐 강을 따라 흘러내려갔다고 한다. 그에게는 다행히 보헤미아 공국에서 공작의 자리를 놓고 내전이 벌어진 덕분에 보헤미아군이 헝가리 국내로 몰려오는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내전을 피해 헝가리로 이주해온 보헤미아인들을 받아들였다.

1116년 5월, 베네치아 도제 오르델라포 팔리에로가 신성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후원에 힘입어 달마티아를 향한 대대적인 원정에 착수했다. 1116년 6월 29일, 베네치아군은 자라 인근에서 클레딘이 이끄는 헝가리군을 격파하고 스플리트, 트로기르, 비오그라드 등 주요 도시를 확보했다. 이리하여 달마티아 전체가 베네치아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헝가리군은 순순히 달마티아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클레딘은 군대를 수습한 뒤 수 년간 베네치아를 향한 공세를 펼쳤다. 1118년, 오르델라포 팔리에로는 자다르 인근의 전투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리하여 헝가리는 비오그라드, 스플리트, 토르기르 등을 탈환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제 도메니코 미켈레가 반격에 착수해 헝가리군을 또다시 몰아내고 달마티아 전역을 확보했다.

1119년, 전쟁에 지친 양국은 5년간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1124년, 이슈트반 2세는 동로마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이 전쟁을 벌이는 틈을 타 달마티아를 공격해 스플리트와 트로기르 등 달마티아 중부 지역을 탈환했다. 그러나 1125년 봄 베네치아 함대가 돌아와서 빼앗긴 영토를 전부 탈환했다. 이때 비오그라드와 모루 시민들이 베네치아군에 저항했다가 철저하게 학살당하고 도시는 파괴되었다. 이슈트반 2세는 이후로 달마티아를 탈환하지 못했다.

한편, 이슈트반 2세는 분열된 키예프 루스를 통합하려는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를 막기 위해 블라디미르에게 추방당한 볼히니아 공작 야로슬라프를 지원했다. 헝가리군은 키예프로 진군해 포위전을 벌였지만, 도중에 야로슬라프가 사망해버렸다. 이슈트반 2세는 그래도 포위 공격을 계속하려 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이 통치자가 돌아오지 않으면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집에 돌아가서 새로운 왕을 선출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어쩔 수 없이 헝가리로 돌아와야 했다.

집권 이래로 실패를 연이어 겪은 그에게 반감을 품은 영주들은 칼만에게 실명당한 뒤 유폐생활을 하던 알모스를 지원했고, 교회를 강하게 통제하려는 아버지의 종교 정책을 받든 그에게 불만을 품은 교회 세력 역시 알모스를 후원했다. 이에 알모스는 1125년 또는 1126년에 반란을 꾀했지만, 사전에 발각당하자 아들 벨러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영역에 속한 페치바러드(Pécsvárad)로 도피했다.

1126년 가을, 이슈트반 2세는 보헤미아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공작에 오른 소베슬라프 1세와 만나 화해하기로 했다. 또한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중재를 통해 오스트리아 공작과도 화해했다. 반면 정적인 알모스를 받아준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이슈트반 2세는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에게 알모스를 돌려보내라고 요청했지만, 요안니스 2세는 오히려 알모스를 성대히 환대했다. 요안니스 2세의 황후이자 라슬로 1세의 딸이었던 헝가리의 이리니는 양국의 중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126년, 이슈트반 2세는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 제국으로 쳐들어가서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파괴한 뒤 소피아를 거쳐 플로브디프까지 진격했다. 이에 요안니스 2세는 군대를 보내 헝가리 국경 안까지 반격을 가했다. 이후의 진행과정은 기록이 부실해서 확실하지 않지만, 헝가리가 먼저 공격하고 동로마 제국이 반격하는 패턴이 수년간 반복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던 1127년 9월 1일 알모스 왕자가 사망했지만, 양국의 적대 행위는 종식되지 않았다. 그러던 1128년, 이슈트반 2세는 하람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군에게 참패하여 10,000 명에서 15,000명에 달하는 병력 대부분을 상실하고 본인만이 전장을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 후 동로마 제국은 도나우 강과 사바 강 사이에 위치한 곡창지대인 시르미움으로 쳐들어가 철저히 약탈한 후 귀환했다.

1128년 말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독립 투쟁을 시작한 세르비아 공작 우로슈 1세와 동맹을 맺고 1129년 공세를 개시해 브라니체보를 점령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 다시 쳐들어와서 헝가리군을 격멸하고 헝가리의 도시인 시르미움을 점령했다. 결국 이슈트반 2세는 1129년 말 평화 조약을 맺고 동로마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고 공물을 바치는 대신 빼앗긴 영토를 돌려받았다.

1128년, 보리스 칼라마노스와 이반 백작은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해 위상이 떨어진 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남은 추종자들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이에 가담한 이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다. 하지만 자신의 입지가 날로 약화되는 상황에 불안감을 느끼던 그는 1128년 또는 1129년에 알모스의 아들인 벨러와 화해하고 그를 토리나에 정착시킨 뒤 왕족에 적합한 대우를 받게 했다. 이에 벨러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접으면서, 헝가리의 혼란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그는 일련의 실패에 고통스러워한 끝에 건강을 해쳤고, 오랜 투병 끝에 1130년 3월 1일에 사망했다.


2.2.6. 벨러 2세(1131년 ~ 1141년)[편집]


1131년 3월 1일 이슈트반 2세가 사망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후계자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헝가리 국왕은 2달이 지나도록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다 1131년 4월 28일 에스테르곰 대주교 펠리키안의 주도로 지난날 칼만에 의해 아버지 알모스와 함께 실명되었던 벨러가 벨러 2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집권한 후, 헝가리 정계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졌다. 과거에 그를 추종했던 이들은 지위를 얻었지만, 칼만과 이슈트반 2세를 지지했던 영주들은 권력에서 쫓겨났다. 특히 그를 실명시키는 데 관여한 자들이 대거 처형되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엘레니 왕비가 모든 재판과 집행을 주관했고 68명에 달하는 귀족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한편, 칼만의 사생아 보리스는 이슈트반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뒤 해외에 망명했다. 그러다가 실명한 벨러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왕위를 빼앗을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폴란드로 가서 볼레슬라프 3세의 지원을 받았다. 벨러는 이에 맞서 오스트리아 변경백과 군사 동맹을 맺고, 전국의 백성들에게 보리스는 칼만의 아들이 아니니 다들 사칭범에게 속지 말라고 경고했다. 1132년 7월 22일, 사요 강 계곡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헝가리-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보리스와 볼레슬라프 3세의 폴란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보리스는 폴란드로 달아났고, 벨러 2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헝가리 왕위에 도전하지 못했다.

벨러는 여세를 몰아 폴란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보헤미아의 소조슬라프 1세, 페레미실의 볼로디미르코와 손을 잡고 폴란드 공격을 획책했다. 여기에 1136년 중앙 달마티아를 헝가리의 지배에 복속시켰고, 1137년경 네레트바 강의 지류인 라마 강 계곡을 공략하고 자신의 칭호에 '라마의 왕'을 추가했다. 또한 1139년 키예프 대공 야로폴크 2세가 브세볼로드를 상대로 벌인 전쟁에 지원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과 관계를 개전하기 위해 1139년 6월에 자신의 딸 소피아와 새로운 독일왕 콘라트 3세의 아들 하인리히의 약혼을 주선했지만 무산되었다.

벨러 2세는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대립교황 아나클레토 2세와 맞서고 있던 교황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해, 이에 대한 보답으로 헝가리의 교회들을 독자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용인받았다. 그는 국내 교회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교회에 많은 기부금을 냈다. 1137년 화재로 소실된 펀논헐머의 수도원은 그의 지원에 힘입어 재건되었다. 하지만 여러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장애로 인해 국왕으로서 통치하기 힘들어 했고, 엘레니 왕비가 왕을 대리해 통치를 행사했다.


2.2.7. 게저 2세(1141년 ~ 1162년)[편집]


1141년 2월 벨러 2세가 사망한 뒤 장남 게저 2세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그는 11살 소년이었기에 어머니 엘레니와 외삼촌인 벨로스가 국가를 통치했다. 벨로스는 15년간 왕국의 최고위직인 반(Ban)을 맡아 국정을 주도했다. 자신을 칼만의 아들이라 칭하며 벨러 2세 치세 때 폴란드의 힘을 빌려 헝가리 왕위를 찾으려 했다가 패배한 뒤 조용히 지냈던 보리스는 벨러 2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다시 음모를 꾸몄다. 1145년, 그는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2세로부터 헝가리 왕으로 옹립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보헤미아 공국은 헝가리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1140년 보헤미아 통치자 소조슬라프 1세가 사망한 뒤 블라디슬라프 2세가 소조슬라프 1세의 아들을 몰아내고 공작이 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게저의 친척이었던 즈노이모의 콘라트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블라디슬라프 2세는 헝가리가 반란군을 지원했다고 여기고 이를 보복하고자 보리스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후 독일왕 콘라트 3세를 찾아가서 자신을 헝가리 국왕으로 세워준다면 신성 로마 제국의 봉신이 되겠다고 제의했다. 당시 콘라트 3세는 자신의 아들 하인리히를 벨러 2세의 딸이자 게저의 누이인 소피아와 약혼시켰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꿔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소피아를 아드몽에 있는 베네딕토회 수녀원에 보냈다. 헝가리 궁정은 자국의 공주를 그런 식으로 대우한 것에 분노했다. 콘라트 3세 역시 헝가리가 자신을 안 좋게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참에 순종적인 사람을 헝가리 국왕으로 앉히기로 하고 보리스에게 지원을 약속했다.

1146년, 보리스는 신성 로마 제국 출신 용병들을 이끌고 헝가리로 쳐들어가서 포조니를 공략했다. 게저는 즉시 친정에 나서 보리스를 격파하고 포조니를 탈환했다. 여기에 콘라트 3세의 정적인 바이에른 공작 벨프 6세와 접촉해 그에게 재정을 지원하여 콘라트 3세에 대항해 봉기하도록 부추겼다. 1146년 9월 11일, 게저는 벨루스와 함께 라지타 인근에서 오스트리아 변경백 하인리히 야소미르고트를 격파했다. 콘라트 3세는 보복을 원했지만, 때마침 제2차 십자군 원정이 선포되자 일단 십자군에 가담하기로 했다.

1147년, 콘라트 3세가 이끄는 제국군이 십자군을 자처하며 동방으로 진군했다. 보리스는 콘라트와 함께 가고 싶었지만, 헝가리 측의 반발로 십자군이 위험에 처할 것을 우려한 콘라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헝가리를 행진하자, 게저는 그를 매우 따뜻하게 환영하며 갓 태어난 아들 이슈트반에게 행할 세례식에 참석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보리스는 프랑스군에 몰래 들어가 있었다. 게저는 이 사실을 파악하고 루이 7세에게 보리스를 넘기라고 요청했다. 루이 7세는 게저 2세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보리스가 헝가리인들과 접촉하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해 헝가리를 지나는 동안 별다른 말썽이 일어나지 않게 했다.

한편, 프셰미실의 볼로디미르코는 헝가리의 지원을 받으며 이웃 도시들을 차례로 공략하고 1141년 할리치나 공국을 세웠다. 키예프 루스 대공 프세볼로트 2세는 그를 조기에 꺾어놓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여기고 다른 루스 공작 및 폴란드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고 할리치나를 공략하기로 했다. 볼로디미르코는 헝가리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벨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할리치나로 가서 포위를 풀었다. 그러나 볼로디미르코는 키예프 루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프세볼로트 2세에게 복종했다.

1146년 가을, 그는 키예프 루스의 새 대공 이자슬라프 2세와 동맹을 맺고 전 대공 므스티슬라프 1세의 딸 에우프로시네와 결혼했다. 1147년 여름, 이자슬라프 2세는 자신의 측근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허가 없이 키예프 대주교로 선출했다. 이에 분개한 동로마 제국은 할리치나의 볼로디미르코를 후원해 키예프에 반기를 들게 했다. 볼로디미르코는 수즈달 공작 유리 돌고루키와 동맹을 맺고 이자슬라프 2세와 대적했다. 1149년 8월 23일, 이자슬라프 2세는 수즈달과 할리치나 연합군의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키예프를 탈출했고, 유리 돌고루키가 키예프 대공으로 즉위했다. 이자슬라프 2세의 구원 요청을 받은 게저 2세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얼마 후 동로마 제국세르비아 공국의 전쟁이 벌어지자 이에 개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키예프에 파견했던 병력을 철수시켰다.

1149년, 세르비아 공국이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로 출진할 준비를 하고 있다가 세르비아 반란 소식을 듣자 원정을 중단하고 세르비아로 진격했다. 게저는 동로마 제국에 맞서는 세르비아인에게 병력과 자금을 지원해줬다. 그러나 그해 9월에 타라 강에서 동로마 제국군에게 패배했고, 스테판 우로슈 2세는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1149년 가을, 게저는 할리치나의 볼로디미르코를 상대로 진군해 사노크를 함락시켰다. 이에 볼로디미르코는 헝가리 사령관들에게 뇌물을 줬고, 게저 2세는 그들의 설득에 따라 11월 이전에 할리치나 일대에서 철수했다.

게저 2세가 할리치나에 출전한 동안, 마누일은 헝가리에 대한 보복 작전을 개시하여 사바 강도나우 강 사이의 땅을 황폐화시켰으며, 보리스도 동로마 제국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에 침입해 테메슈 강 계곡을 황폐화시켰다. 할리흐에서 돌아온 게저 2세는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기를 원치 않아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1150년 말 또는 1151년 초에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 무렵, 이자슬라프 2세는 1150년 유목민들을 고용해 키예프를 탈환하고 대공에 복위했지만, 유리 돌고루키는 할리치나의 지원으로 그해 여름에 다시 키예프를 공략했다.

1151년 초,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종식한 게저 2세는 1만 명의 대규모 병력을 이자슬라프 2세에게 보냈다. 이자슬라프 2세는 이들과 함께 키예프로 진군했고, 유리 돌고루키는 도저히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고 항복했다. 그러나 헝가리군이 돌아가자마자 수즈달과 할리치나가 재차 도전해오자, 이자슬라프 2세는 아들 므스티슬라프를 게저에게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헝가리군이 키예프에 도착했을 때, 이자슬라프 2세는 이미 유리를 격파했다. 이에 그들은 곧 전쟁이 끝날 거라고 방심하고 경계를 소홀히 했다. 블라디미르코는 이 때를 틈타 어느 날 새벽에 숙면을 취하고 있던 헝가리 진영을 습격해 학살을 자행했다.

게저 2세는 패전 소식에 몹시 분노했다. 1152년, 그는 72개 주 및 왕실에서 소집한 대병력을 이끌고 할리흐를 향해 진격했다. 그의 군대는 이자슬라프 2세와 연합한 뒤 산 강 인근에서 블라디미르코를 상대로 완승을 거두고 블라디미르코가 달아난 프셰미실 요새를 포위했다. 블라디미르코는 사절을 보내 게저의 아버지 벨러 2세를 위해 폴란드에 맞서 싸웠던 일을 거론하면서 신변의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마음이 약해진 게저 2세는 블라디미르코가 이자슬라프 2세에게 빼앗았던 영토를 반환하고 키예프 대공과 동맹을 맺게 하는 선에서 종결시켰다. 이리하여 키에프 문제를 매듭지은 뒤, 게저 2세는 왕위 계승을 확실히 하기로 하고 1152년 당시 5살이던 큰 아들 이슈트반을 공동 통치자로 삼고 동생인 라슬로 2세이슈트반 4세에게 공작 직위를 수여했다.

이 무렵 독일왕으로 선출된 프리드리히 1세는 헝가리가 갈수록 강성해지는 것에 위협을 느끼고 더 커지기 전에 손을 봐야겠다고 여겼다. 1152년 6월, 프리드리히 1세는 제국 의회에서 제후들에게 헝가리와의 전쟁을 단행하려 하니 따라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제후들은 자기 일도 바쁜데 굳이 헝가리와의 전쟁에 참여할 이유는 없다고 보고 거부했고, 프리드리히 1세는 헝가리 침공 계획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1153년 봄, 게저 2세는 도나우 강 하류의 동로마 제국 속주인 파리스트리온을 침공해 지난날 마누일 1세가 자국을 황폐화시킨 것에 보복하려 했다. 그러나 사전에 이 계획을 눈치챈 마누일 1세가 도나우 강으로 진군하자, 게저 2세는 사절을 보내 사느디차[7]에서 새로운 평화 협약을 맺고 헝가리 전쟁 포로들을 돌려받는 선에서 문제를 매듭지었다.

1150년부터 1153년까지 헝가리를 여행했던 그라나다 출신 무슬림 여행자 아부 하미드 알 가르나티에 따르면, 게저 2세는 유라시아 스탭 지역에 거주하던 무슬림 병사들을 고용해 잘 대접했는데, 심지어 그들이 첩을 들이는 것을 허용했다고 한다. 또한 독일 기사들을 초빙해 헝가리에 정착시키기도 했다. 특히 작센인들이 이 시기에 헝가리로 이주하여 게저 2세에 의해 에르데이 남부에 정착했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게저 2세가 무슬림 장병들을 고용하고 첩을 맞이하는 것을 허용하게 했다는 소식을 듣고 헝가리 교회의 "신앙과 규율"을 강화하겠다는 명분으로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게저 2세는 교황 사절단의 입국을 금지했고, 이로 인해 헝가리와 교황청간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1154년 10월, 새 교황 아나스타시오 4세는 게저 2세가 달마티아를 통치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선언했지만 무시당했다. 이 무렵,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게저 2세에게 자신이 마누일 1세로부터 황위를 찬탈하는 것을 도와준다면 난도르페헤르바르, 니시, 브라니체보를 넘기겠다고 제의했다. 게저 2세는 이를 받아들이고 1154년 말 동로마 제국의 국경을 넘어 브라니체보를 포위했다.

얼마 후 내부에서 호응하기로 되어있던 안드로니코스가 체포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게저 2세는 헝가리로 귀환했다. 동로마 장군 바실리오스 틴트루체스(Basil Tzintziluces)가 헝가리군을 추격했지만 매복에 걸려 섬멸되었다. 1155년 초, 남이탈리아 원정을 막 단행한 마누일 1세는 헝가리와 쓸데없이 전쟁을 벌일 이유는 없다고 보고 헝가리에 사절을 보내 화해를 제안했고, 게저 2세 역시 받아들였다. 그 후 동로마군은 게저와 동맹을 맺었던 데사를 세르비아에서 몰아내고 스테판 우로슈 2세를 헝가리와 동맹을 맺지 않는 조건하에 세르비아 공작으로 복위시켰다.

1156년 7월, 마누일 1세가 보낸 사절단이 뉘른베르크에서 프리드리히 1세와 접촉하여 헝가리를 협공하자고 제안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지만, 그해 9월 16일에 제국에 속한 제후들은 황제가 치르는 모든 전쟁에 군대를 반드시 보내야 한다고 규정한 헌장을 발표하는 등 전쟁을 준비했다. 1157년 여름, 프라하의 대주교이자 프리드리히 1세의 측근인 다니엘이 헝가리를 방문했다. 신성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회피하고 싶었던 게저 2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북이탈리아로 침공한다면 보조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게저 2세에 의해 공작에 선임된 동생 이슈트반은 그동안 헝가리를 이끌었던 벨로스와 다른 영주들과 함께 게저 2세를 타도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게저 2세는 음모를 알게 되자 즉시 대응에 나서 이슈트반의 반역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체포해 처형했다. 벨로스가 1157년 3월 이후에 발행된 헝가리 왕실 헌장에 더 이상 언급되지 않은 것을 볼 때, 이때 처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슈트반은 가까스로 탈출한 뒤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도주했다. 1158년 1월, 게저 2세는 레겐스부르크에 사절을 보내 이슈트반을 돌려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는 중재를 해주겠다는 약속만 할 뿐 돌려보내지 않고 롬바르디아 동맹과의 전쟁을 위해 북이탈리아로 떠났다. 게저 2세는 일단 프리드리히 1세의 호의를 얻기 위해 사전에 맺은 약속에 따라 5~600명의 궁수대를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보냈다.

얼마 후, 이슈트반은 동로마 제국으로 가서 마누일 1세의 조카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했고, 1160년경 헝가리에서 게저 2세의 숙청을 피해 달아난 형제 라슬로와 합세했다. 1158년 9월, 프리드리히 1세는 롬바르디아 동맹을 일시적으로 굴복시켰지만, 곧 밀라노크레모나에서 반란에 직면했다. 게저 2세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사절을 보내 지원군을 좀더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1159년 9월 1일 교황 하드리아노 4세가 선종한 뒤, 차기 교황으로 알렉산데르 3세가 취임했다. 그러나 일부 추기경들은 옥타비아누스 추기경을 대립교황 빅토르 4세로 내세웠고, 프리드리히 1세는 빅토르 4세를 지지했다. 게저 2세는 1160년 2월 빅토르 4세를 선출한 파비아에 사절을 보내 지지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에스테르곰의 대주교 루카스는 알렉산데르 3세에게 충성을 바쳤고, 게저 2세에게 알렉산데르 3세를 인정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한동안 망설였지만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을 포함한 대다수 유럽 군주들이 알렉산데르 3세 지지를 표명하자 루카스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1161년 초, 게저 2세의 사절단은 로마에 방문해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이후 1161년 여름 교황청의 동의 없이 고위 성직자들을 폐위시키거나 이송하지 않는 대가로 달마티아 지배를 인정받는 내용의 협약을 교황청과 맺었다.


2.2.8. 동로마 제국의 간섭(1162년 ~ 1181년)[편집]


1162년 5월 31일 게저 2세가 사망한 뒤, 장남 이슈트반 3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일 1세는 자국으로 망명한 이슈트반 왕자에게 군대와 물자를 지원해 새 왕을 상대로 반기를 들게 했다. 이슈트반 왕자는 곧 자신이 마누일 1세의 조카딸 마리아 콤니니와 결혼한 것 때문에 헝가리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상대적으로 인기가 많은 형제 라슬로 2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헝가리 귀족들은 동로마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한 데다 황제로부터 뇌물을 듬뿍 받자 라슬로를 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라슬로는 순식간에 세케슈페헤르바르를 공략한 뒤 에스테르곰 대주교 루카스에게 대관식을 주관하라고 요구했다. 루카스가 이를 거부하며 저주를 퍼붓자, 라슬로는 루카스를 감옥에 가두고 1162년 7월 중순 컬로처 대주교 미코의 주관하에 라슬로 2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한편 이슈트반 3세는 지지자들과 함께 포조니로 도주했다.

라슬로 2세는 왕위에 오른 뒤 일찍이 게저 2세가 교황청과 맺었던 "교황청의 동의 없이 고위 성직자들을 폐위시키거나 이송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떠올리고 루카스를 석방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저주를 철회하지 않고 오히려 라슬로 2세가 곧 죽을 거라고 예언했다. 라슬로 2세는 이에 격분해 루카스를 다시 감옥에 집어넣었지만, 공교롭게도 1163년 1월 14일에 돌연 사망했다. 이후 라슬로의 추종자들은 그의 형제 이슈트반을 이슈트반 4세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슈트반 4세는 동로마 제국에 편향적인 정책을 추진했기에 헝가리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이슈트반 3세는 이 때를 틈타 영주들을 회유해 자신에게 가담시키고 신성 로마 제국 출신 용병들을 모집했다. 1163년 6월 19일, 이슈트반 3세는 세케스페헤르바르에서 숙부 이슈트반 4세를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이로써 왕위에 복귀한 이슈트반 3세는 감옥에서 풀려난 에스테르곰 대주교 루카스의 조언에 따라 이슈트반 4세를 석방했다. 이슈트반 4세는 처음에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도주했다가 다시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고, 마누일 1세는 그를 왕으로 복위시키기 위해 헝가리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슈트반 3세는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블라디슬라프 2세는 동로마 제국의 위세를 두려워했기에 거부했다.

결국 이슈트반 3세는 마누일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간청했다. 이후의 협상 끝에, 그는 황제로부터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받는 대가로 동생 벨러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보내기로 했고, 동생 벨러가 아버지 게저 2세로부터 부여받은 아파치 공국(달마티아, 크로아티아 등 헝가리 왕국의 일부 영역)을 동로마 제국이 장악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다.

마누일 1세는 이 정도면 헝가리를 약화시키고 제국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다고 여기고 이슈트반 4세에게 등을 돌렸다. 이에 이슈트반 4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접근했고, 헝가리의 여러 성직자와 귀족들이 신성 로마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종주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이슈트반 3세는 낌새를 읽고 프리드리히 1세에게 사절을 보내 공물을 바칠 테니 개입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일단 헝가리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고, 그의 신하들인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에게 헝가리를 예의주시하라고 지시했다.

1164년, 이슈트반 3세는 동로마 제국이 가져갔던 벨러 3세의 영지인 중앙 달마티아를 탈환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이슈트반 4세가 용병대를 규합해 시르미움을 공략하고 주민들의 환대를 받았다. 이슈트반 3세는 이에 맞서 보헤미아-오스트리아-할리치나의 지원군을 받고 이슈트반 4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마누일 1세가 곧 헝가리로 진군하여 바치까지 진군하면서, 보헤미아 공작 블라디슬라프 1세에게 이슈트반 3세에게 평화 협약을 맺을 것을 설득하라고 권고했다. 이슈트반 3세는 보헤미아가 전쟁에서 발을 빼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시르미움을 포기하기로 하고, 그 대신 황제가 이슈트반 4세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후 이슈트반 3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던 달마티아 해안지대를 침공해 자다르 시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그 일대를 순조롭게 공략한 뒤, 1165년 봄에 시르미움으로 쳐들어가 이슈트반 4세를 포위했다. 마누일 1세는 협약을 위반한 이슈트반 3세를 응징하려 했지만, 때마침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헝가리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 대신, 이전에 이슈트반 3세를 지지했던 군주들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 내전에서 중립을 지키도록 설득했다. 그 후 이슈트반 3세는 이슈트반 4세를 지모니 요새에 몰아넣고 포위 공격했고, 이슈트반 4세는 1165년 4월 11일 농성 도중 독살당했다.

이리하여 내전을 종식했지만, 곧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의 반란을 진압한 마누일 1세의 대대적인 공세에 직면했다. 마누일 황제가 친히 이끄는 동로마 제국군은 지모니를 순조롭게 탈환했고, 또다른 분견대는 보스니아와 달마티아로 쳐들어가 공략했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도 동로마 제국의 편에 서서 일전에 잃어버렸던 자다르를 탈환했다. 이슈트반 3세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시르미움과 달마티아를 완전히 포기하는 조건하에 마누일 1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166년 봄, 이슈트반 3세가 시르미움을 재차 침공해 현지 동로마군을 격파하고 지모니를 제외한 모든 시르미움 일대를 탈환했다. 마누일 1세는 즉각 3개의 분견대를 급파했다. 알렉시오스 악수흐는 이슈트반 3세의 동생 벨러 3세를 대동한 채 다뉴브 강으로 진격했고, 레온 바타체스와 요안니스 두카스가 이끄는 2개의 분견대들은 트란실바니아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다. 이에 이슈트반 3세는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의 중재 하에 마누일 1세와 평화 협약을 맺고, 1166년 연말에 하인리히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1167년, 이슈트반 3세는 달마티아를 침공해 동로마 총독 니키포로스 찰루페스를 사로잡고 그 일대를 장악했다. 이에 마누일 1세는 시르미움에 군대를 파견하고 함대를 지모니에 집결시켰다. 헝가리군은 이에 맞서 독일인들을 용병으로 모집해 동로마군의 침략을 근절하려 했다. 그러나 1167년 7월 8일에 벌어진 시르미온 전투에서, 바치 백작 데네시가 이끄는 헝가리 주력군 15,000명이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에게 궤멸되었다. 결국 이슈트반 3세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동로마 제국이 달마티아, 시르미온, 크로아티아를 가지는 것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비탈레 2세 미키엘와도 평화 협약을 맺고 1167년 12월 17일에 도제의 아들 니콜라오에게 조카딸 마리아를 아내로 주었다.

그 후 이슈트반 3세는 동로마 제국에게 더 이상 도전하지 않으면서도 독일인들에게 세제 해택을 부여해 헝가리로 이주하게 하는 등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하려 노력하다가 1172년 3월 4일에 사망했다. 이슈트반 3세에게는 남겨진 후계자가 없어기에, 동생 벨러가 유력한 후계자였다. 헝가리 귀족들은 마누일 1세에게 벨러 왕자를 귀국시켜달라고 청했다. 마누일은 제국을 다시는 적대하지 않고 봉신의 서약을 준수하겠다는 맹세를 받아낸 뒤 벨러를 돌려보냈다.

에스테르곰 대주교 루카스가 제국의 앞잡이를 왕으로 세울 수는 없다며 대관식 주관을 거부하자,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알렉산데르 3세는 에스테르곰 대주교가 부재한 경우에는 컬로처 대주교가 그를 대신해 왕좌에 오를 왕자에게 기름 부을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벨러는 1173년 1월 13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벨러 3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2.2.9. 벨러 3세(1173년 ~ 1196년)[편집]


1173년 왕위에 오른 벨러 3세는 어머니 에우프로시네와 남동생 게저가 자신을 몰아내고 왕위를 탈취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보고를 접했다. 벨러는 어머니를 예루살렘으로 추방했고, 게저를 지하감옥에 가두었다. 게저는 1174년 또는 1175년 감옥에서 탈출하여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도주했다. 오스트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가 게저를 인도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벨러는 보헤미아 공작 소베슬라프 2세와 연합하여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약탈을 자행했다. 1177년, 소베슬라프 2세는 게저를 체포한 뒤 헝가리에 보냈고, 벨러는 동생을 다시 한 번 지하감옥에 수감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헝가리와 협력해 자신의 봉신인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피해를 입힌 소베슬라프 2세에게 분노해 그를 폐위시키고 프르셰미슬 왕조의 또다른 구성원인 베드르지흐를 보헤미아 공작으로 세우겠다고 선포했다. 소베슬라프 2세가 쉽사리 물러나지 않자, 프리드리히 1세는 새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게 보헤미아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벨러가 오스트리아를 위협하자, 레오폴트는 보헤미아로 진격하던 군대를 돌려야 했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벨러는 동로마 제국에 협조했다. 1176년 마누일 1세가 룸 술탄국을 상대로 원정을 개시했을 때, 그는 보조군을 파견했다. 그러면서도 교황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고, 서유럽에 학생들을 유학보내서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그의 치세 동안 많은 이들이 외국 대학에서 공부해 학자로 거듭났는데, 그 중에는 훗날 헝가리의 역사를 다룬 연대기를 집필한 아노니무스도 있었다. 또한 벨러는 프랑스 왕국 출신 수도자들을 초빙하여 헝가리 수도원에 배속시켰고, 기존의 수도원들과 새로 설립된 수도원들에게 폭넓을 특권을 부여했다.

그러던 1180년, 마누일 1세가 사망하고 11살의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가 등극했다. 모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섭정을 맡았지만, 몬페라토의 레니에르마리아 콤니니 부부의 반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등 갈수록 혼란스러워지는 제국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한편, 지난날 마누일 1세에 맞서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뒤 흑해의 해안지대에서 요양 생활을 하던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수도에서 벌어진 상황을 전해듣고 오래도록 고대하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1181년 5월, 안드로니코스는 어린 황제를 위해 제국의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봉기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제국이 안드로니코스의 봉기로 인해 혼란스러워지자, 벨러는 마누일 1세와 맺었던 맹약을 깨뜨리고 공세를 개시해 1181년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를 탈환하고 자라 시를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시켜 보호시로 삼았다. 1182년 5월, 안드로니코스에 의해 수도원에 보내진 마리아 황후가 벨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벨러는 이에 따라 난도르페헤르바르와 브라니체보를 공격해 그 일대를 파괴했다. 그러자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반역죄로 고발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내리게 한 뒤 디오메데스 수도원 근처에 있는 좁은 지하감옥에 수감시켰다. 이후 1182년 말 마리아를 처형하고 시신을 바다에 내던졌으며, 그녀에 대한 동정여론이 생길 것을 우려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소재한 모든 마리아의 상을 훼손하거나 파괴했다.

1183년 초, 벨러 3세는 동로마 제국의 혼란이 갈수록 심해지는 틈을 타 공세를 개시해 니시와 세르디카를 공략하고 세르디카에서 릴라의 성 이반의 유품이 담긴 관을 탈취했다. 1183년 10월,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는 황제 알렉시오스 2세를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했다. 이에 반발한 이들이 제국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1185년에는 시칠리아 왕국이 쳐들어왔다. 벨러 3세는 이 때를 틈타 공세를 이어가 동로마 제국의 북방 영역을 약탈했다.

1185년 9월 안드로니코스 1세가 폐위되고 이사키오스 2세가 등극한 후 시칠리아 왕국을 격파하자, 벨러는 동로마 제국과 화해하기로 했다. 이사키오스는 왕이 되기 전인 1185년 1월에 벨러의 딸 머르기트와 결혼한 바 있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사위에게 딸의 지참금 형식으로 니시와 바랑크 일대를 돌려줬다. 이때 릴라의 성 이반 유품도 세르디카로 반환되었다.

1184년 아내 아그네스가 사망한 뒤 독신으로 지내던 벨러는 1186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딸 마르그레테와 재혼했다. 1187년 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이 자라를 탈환하고자 포위 공격을 가했지만 좀처럼 성벽을 뚫지 못하다가 헝가리군이 인근에 이르자 철수했다. 1188년 말 할리치나 공작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가 보야르들의 반란을 피해 헝가리로 망명했다. 볼히니아 공작 로만 므스티슬라비치가 할리치나를 차지했지만, 벨러가 할리치나로 쳐들어오자 볼히니아로 도피했다. 벨러는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를 할리흐 공작으로 되돌려놨지만 그를 계속 붙잡아두고 자신의 아들인 언드라시를 할리치나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삼았다.

1189년 여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하던 중 헝가리를 통과했다. 벨러는 십자군을 환대했고,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그때까지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게저 왕자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했고, 아내 마르그레테도 그렇게 하라고 종용했다. 이에 벨러는 십자군에 따라간다는 조건하에 게저를 석방시켰고, 게저는 프리드리히 1세와 함께 헝가리를 떠나 동방으로 향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와 이사키오스 2세간의 갈등이 불거지자, 벨러는 두 군주를 중재해 평화 협약을 맺게 했다.

1189년 또는 1190년, 헝가리에 억류되어 있던 블라디미르 야로슬라비치가 탈출하여 폴란드로 망명했다. 이후 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2세의 지원에 힘입어 할리치나를 탈환하고 공국의 통치권을 되찾았다. 벨러는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았다. 그 대신, 1193년 초 세르비아 공국으로 영역을 확장하고자 출진했지만, 세르비아를 제국의 영역으로 여겼던 이사키오스 2세가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자 도로 거두었다. 한편 베네치아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자라를 탈환하고자 함대를 이끌고 쳐들어왔지만 격퇴되었다.

1194년, 장남 임레를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공작으로 삼고 후계자로 지명했다. 1194년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에서 불가리아 제2제국에게 참패한 이사키오스 2세가 보복 원정을 단행하기로 마음먹고 지원을 요청하자, 벨러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전국에 군대소집령을 내렸다. 그러나 1195년 4월 원정을 준비하던 이사키오스 2세가 형 알렉시오스 3세에게 폐위되면서, 불가리아를 향한 협공 계획은 취소되었다. 이후 교황청에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에 뛰어들겠다고 서약하고 이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으나, 1196년 4월 23일에 병사했다.


2.2.10. 임레언드라시 2세(1196년 ~ 1235년)[편집]


1196년 죽음을 눈앞에 둔 벨러 3세는 장남 임레를 헝가리 왕으로 삼고, 차남 언드라시 2세에게 많은 영지와 재산을 물려주며 자신을 대신하여 십자군 원정을 떠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언드라시는 십자군에 가기를 거부하고 아버지가 생전에 맡긴 군대를 돌려 형에게 도전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내전은 수년간 이어지다가 1197년 언드라시가 슬라보니아의 마치키에서 임레를 격파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결국 임레는 동생을 달마티아-크로아티아 공작으로 삼는 것으로 문제를 매듭지었다.

1198년 초,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언드라시에게 십자군 서약을 준수하고 형제의 권리를 존중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언드라시는 교황의 충고를 무시하고 형을 아예 왕위에서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끌어모았다. 임레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선제 공격했고, 1199년 소모니의 라드 전투에서 언드라시를 격파했다. 언드라시는 영지에서 쫓겨난 뒤 오스트리아 공국의 레오폴트 6세에게 도주했다. 그러다가 교황이 개입해서 두 형제에게 화해하라고 촉구하자, 1200년 양자는 타협했다. 그들은 성지로 함께 진군하기로 했고, 그들이 없을 때 오스트리아 공작이 헝가리를 다스리며, 언드라시는 공국을 되돌려받기로 했다. 또한 두 사람 중 더 오래 사는 사람이 상대방의 영토를 물려받기로 했다.

1201년, 임레는 세르비아에서 스테판 네마니치와 부칸 사이의 내전이 벌어진 틈을 타 세르비아를 자신의 지배하에 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부칸과 연합하여 공세를 개시해 1202년 네마니치를 불가리아로 몰아내고 부칸을 세르비아 대공으로 세웠다. 부칸은 헝가리의 봉신을 자처하였고, 그는 모라바 동쪽 지역을 헝가리 영토로 삼고, 칭호에 "세르비아의 왕"을 추가했다.

한편, 베네치아 공화국도제 엔리코 단돌로제4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십자군이 자금난에 시달리는 바람에 배 항해료를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는 상황에 골머리를 앓다가, 이참에 이들을 이용해서 일전에 헝가리에게 빼앗긴 뒤 번번이 탈환에 실패했던 자다르 탈환에 써먹기로 했다. 십자군은 이에 따르기로 하고 1202년 여름 베네치아 함대와 함께 자다르를 공격해 함락시킨 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철저하게 약탈했다. 이 소식에 분노한 임레가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저들을 파문시켜달라고 요청하자, 인노첸시오 3세는 이에 따라 베네치아와 십자군을 파문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다르를 자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1203년, 불가리아 군주 칼로얀의 사주를 받은 쿠만족이 세르비아를 침략하였고, 이로 인해 세르비아는 혼란에 휩싸였다. 칼로얀은 이틈을 타 그해 여름 세르비아를 침공해 니시를 점령했다. 1204년 네마니치는 불가리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라쉬카에서 부칸을 축출하고 세르비아 공작으로 복위하였고, 부칸은 제타로 밀려났다. 인노첸시오 3세는 부칸을 세르비아 공작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칼로얀에게 화해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칼로얀은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을 차르로 추대할 수 있는 추기경들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면서 헝가리가 불가리아의 주교국 5곳을 점거했다며, 분쟁을 중재해주고 양국의 경계를 결정해달라고 요청했다.

1203년 이전, 언드라시는 이스트라와 크라이나 변경백인 베르톨트 4세와 작센의 베틴 가문 출신인 아그네스의 딸인 메리니아의 게르트루드와 결혼했다. 이리하여 든든한 외가를 등에 업은 언드라시는 많은 독일인 용병대를 모집한 뒤 형에게 다시 도전했다. 1203년 10월 임레와 언드라시는 바라주딘에서 격돌했다. 하지만 임레는 동생을 해치는 대신 감옥에 가두었고, 게르트루드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1204년 초, 교황은 레오 브란칼로니 추기경을 불가리아로 파견해 칼로얀을 불가리아 차르로 추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브란칼로니는 헝가리-불가리아 국경의 케베에서 헝가리군에게 붙들렸다. 헝가리 왕 임레는 칼로얀을 헝가리로 소환하여 분쟁을 중재할 것을 촉구했지만, 교황이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자 9월 말이나 10월 초에 풀어줬다. 11월 초 불가리아에 도착한 브란칼로니는 바실리오스를 불가리아 대주교로 선임했고, 다음날 칼로얀을 불가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임레는 1198년 아라곤 왕국의 국왕 알폰소 2세의 딸 콘스탄사와 결혼하여 1200년 외아들 라슬로 3세를 낳았다. 1204년 8월 26일에 4살된 아들을 공동 왕으로 세우고, 형제 언드라시를 석방시킨 뒤 그에게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해 그의 맹세를 받아냈다. 1204년 11월 30일 임레가 사망한 뒤, 라슬로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언드라시는 1205년 초 라슬로 3세와 모후 콘스탄사를 유폐시키고 콘스탄사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에 콘스탄사는 아들을 데리고 탈출한 뒤 추종자들과 함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에게 피신했다. 언드라시 2세는 즉각 헝가리 왕으로 등극한 뒤 레오폴트 6세에게 콘스탄사와 라슬로 3세를 넘겨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했다. 레오폴트 6세가 이를 거부하면서 양자간에 전쟁이 벌어지는 듯했지만, 1205년 5월 7일 라슬로 3세가 돌연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언드라시 2세는 조카를 몰아내고 고대하던 왕위에 오른 뒤 헝가리의 성, 장원 및 주들을 독일인 추종자들에게 기증한다는 내용의 헌장을 반포했다. 그 전까지는 국유지만이 기증되었지만, 이제는 나눠줄 영지가 없자 아예 사유지까지 분배하고, 세습이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언드라시의 외가 진척들을 위시한 독일인들의 위세가 강력해져, 기존의 헝가리 귀족들의 입지를 위협할 수준으로 성장했다.

1205년 또는 1206년, 언드라시 2세는 지난날 공작으로 지냈다가 쫓겨났던 할리치나를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는 할리치나와 로도메리아의 어린 공작 다닐 로마노비치를 위협하는 체르니코프 공작 브레볼로드 스뱌토슬라비치와 그의 동맹자들을 물리치겠다는 명분으로 개입했고, 스뱌토슬라비치는 헝가리의 공세에 밀려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언드라시 2세는 할리치나와 로도메리아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두 공국의 종주권을 주장했다. 언드라시가 헝가리로 돌아온 후, 브세볼로드 스뱌토슬라비치의 먼 사촌인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가 할리치나와 로도메리아를 점령하고 다니엘 로마노비치 일가를 추방했다. 다니엘 일가는 폴란드 고공 레셰크 1세에게 도주했고,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는 헝가리나 폴란드가 개입할 것을 우려해 레셰크 1세와 언드라시 2세에게 막대한 선물을 바쳤다. 그러던 중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의 형제인 로만 이고레비치가 헝가리로 찾아와서 자신을 할리치나의 공작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로만은 곧 언드라시가 보내준 헝가리군에 힘입어 블라디미르를 추방했다.

1207년, 언드라시 2세는 달마티아의 두 도시 스플리트와 오미시를 자유시로 인정하고 스플리트 대주교의 특권을 인정한다는 헌장을 반포했다. 이후 로만 이고레비치와 보야르들간에 갈등이 심화되자, 그는 헝가리 귀족 베네덱에게 군대를 맡겨 할리치나로 파견했다. 베네덱은 1208년 또는 1209년에 로만 이고레비치를 사로잡았고, 언드라시 2세로부터 할리치나의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갈리시아-볼히니아 연대기에 따르면, 베네덱은 보야르들을 심하게 고문하고 음탕한 행위를 일삼았고, 이를 견디다 못한 보야르들은 노브고로드 공작 므스티슬라프에게 베네덱을 타도해주면 왕으로 추대하겠다고 약속했다. 므스티슬라프는 이 제안에 혹해 베네덱을 공격했지만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1208년, 게르트루트의 두 형제인 밤베르크 주교 에크베르트와 이스트리아 변경백 하인리히 2세가 독일왕 슈바벤의 필리프 암살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자 헝가리로 달아났다. 언드라시 2세는 에크베르트에게 세페세그 일대의 대규모 영지를 부여했으며, 게르트루트의 막내 동생 베르톨트를 1206년부터 컬로처 대주교로 세웠다. 헝가리 영주들은 독일인들을 우대하는 그에게 불만을 품고 여러차례 문제제기했지만, 그는 오직 처가 친척들만을 믿을 수 있다고 여겼기에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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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0년 헝가리 왕국의 영역

1209년, 헝가리의 봉신인 시드가라의 도말트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자다르를 탈환했다. 그러나 1210년 베네치아 해군이 반격을 가해 자다르를 탈취했다. 한편, 로만 이고레비치와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는 1209년 또는 1210년 초에 동맹을 맺고 베네덱을 협공해 승리를 거두고 할리치나에서 헝가리인을 몰아냈다. 1211년과 1214년 사이, 불가리아 제2제국의 보야르들이 보릴을 상대로 비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보릴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진압할 수 없다고 보고 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언드라시 2세는 페체네그로 구성된 부대를 파견해 비딘을 공략하고 보릴에게 넘겼다. 그 대가로, 지난날 불가리아가 임레 왕으로부터 빼앗았던 난도르페헤르바르와 브라니체보를 돌려받았다.

1210년 또는 1211년, 블라디미르 이고레비치가 폭정을 자행했다. 이에 보야르들이 언드라시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에 망명해 있는 다니엘 로마노비치를 할리치나의 통치자로 복위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폴란드 고공 레셰크 1세와 손을 잡고 군대를 할리치나로 보내 블라디미르를 몰아내고 다니엘을 공작으로 복위시켰다. 그러나 보야르들은 1212년 다니엘의 어머니 안나가 폴란드, 헝가리, 리투아니아와의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부를 챙기는 것에 반감을 품고 그녀를 추방했다. 안나는 언드라시에게 피신한 뒤 자신이 할리치나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1213년 여름, 언드라시는 안나를 복위시키기 위한 원정을 떠났고, 게르트루트 왕비가 자신 대신 국정을 다스리게 했다. 원정은 성공했고, 안나는 복위 후 자신을 반대했던 보야르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런데 독일인을 일방적으로 후대하는 것에 반감을 품은 헝가리 영주들은 왕이 떠난 사이에 독일인 왕비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1213년 9월 23일, 언드라시 2세가 할리치나에 출진한 동안 국정을 도맡고 있던 게르트루트는 헝가리 영주들의 습격을 받고 사지가 절단되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때 그녀의 형제 베르톨트와 레오폴트 역시 심한 폭행을 당했지만 가까스로 빠져나와 독일로 달아났다. 언드라시 2세는 귀국 후 이 소식을 전해듣고 페터르 이슈트반을 체포해 기둥에 매달아 죽였다. 그러나 사건에 연루된 자들이 워낙 많아서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왕위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 외에는 사건의 전말을 더 이상 캐지 않았다.

게르트루트가 처참하게 살해된 후 독일인의 헝가리에 대한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영지를 손아귀에 틀어쥐고 있었고, 1211년 쿠만인으로부터 에르데이 방어를 위해 튜튼 기사단을 불러들인 이래 이들에게 지급할 급료를 마련해야 했던 언드라시 2세는 새로운 세금을 도입했다. 1214년, 그는 헝가리 왕국 역사상 최초로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재무관을 설치했다. 최초의 재무관 데네시(Ampod fia Dénes ?~1236)는 화폐로 징수하는 형태의 특별세를 부과하고, 조폐업과 소금 무역, 관세 전반을 국가가 독점하자고 건의해 관철시켰으며, 전국에 환전상들을 보내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화폐로 교환하면서 수수료를 챙기게 했다. 백성들은 품질이 떨어지고 가치가 별로 없는 헝가리 금속 화폐를 쓰는 것을 꺼렸고, 화폐 사용을 강요하는 정부에 불만을 품었다. 반면 귀족들은 왕의 묵인 아래 소농들이 소유하는 사유지를 화폐로 매입하여 대지주가 되었고, 거래를 거부하는 농민들에게 무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헝가리 귀족들의 위세는 날로 커켰고, 왕권은 점차 위축되었다.

한편, 할리치나에서는 안나의 숙청에 분노한 보야르들이 반란을 일으켜 안나를 처단하고 블라디슬라프 코르밀리치를 새 지도자로 선출했다. 다니엘은 보야르들을 피해 폴란드로 망명했고, 폴란드 고공 례셰크 1세가 다니엘의 복위를 위해 할리치나를 공격했지만 공략에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언드라시 2세는 아예 자기 아들 칼만을 할리치나의 통치자로 세우기로 마음먹고, 1214년 가을 레셰크 1세와 협상한 끝에 레셰크 1세의 딸 살로메아와 칼만을 결혼시키고 서부 갈리시아의 두 도시인 프셰미실과 루바초프를 폴란드에 양도하는 대가로 할리치나의 공작에 칼만을 선출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헝가리-폴란드 연합군은 공세를 개시해 1214년 말 블라디슬라프 코르밀리치를 축출하고 칼만을 할리치나의 공작으로 옹립했다.

1215년, 언드라시 2세는 쿠르트네 백작 피에르의 딸 욜란다와 결혼했다. 1216년, 라틴 제국의 황제 앙리가 사망했다. 앙리는 후사를 두지 못했기에, 여러 사람이 새 황제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 중의 한 명이 언드라시 2세의 장인인 피에르였고, 다른 한 명은 바로 언드라시 2세였다.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교황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그러려면 그동안 미뤄뒀던 십자군 원정을 시급히 추진해야 했다. 그는 에스테르곰 대주교 야노시에게 국가 통치를 위임하기로 한 뒤 십자군을 모집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라틴 귀족들은 피에르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래도 십자군을 감행해 교황에게 점수를 따서 후일을 도모하기로 한 언드라시 2세는 스플리트에서 함대를 집결시켰다. 그 과정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자다르 점유를 공인하는 대가로 선박들을 빌렸고,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왕실 소유의 공유지들을 모조리 팔고 막대한 자금을 대출받았다. 1217년 스플리트에서 출항한 언드라시 2세는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6세와 메란의 오토 1세와 함께 성지로 향했다. 그들은 그해 10월 아크레에 도착했고, 예루살렘 왕 장 1세성전 기사단, 구호기사단 등 현지 십자군 관계자들과 접촉했다.

1217년 11월 초, 십자군은 언드라시 2세를 총사령관으로 세우고 요르단 강 원정을 개시해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아딜 1세가 이끄는 무슬림과 맞붙어 승리했다. 이에 알 아딜 1세는 각지의 요새에 수비에 전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십자군은 요새 몇 곳을 포위 공격했지만 공성 병기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는 사이, 언드라시 2세는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아크레로 돌아간 후 군사 활동에 다시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수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을 행했을 때 사용되었다고 알려진 물병, 성 스테파노와 마르가레테의 머리카락, 사도 토마스바르톨로메오의 오른손,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 일부를 포함한 수많은 유물들을 수집했다.

1218년 초, 언드라시 2세는 헝가리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예루살렘 총대주교 메렌쿠르의 라울이 지금 돌아가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우선 트리폴리를 방문해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4세와 뤼지냥의 멜리센데의 결혼식에 참석한 뒤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공국으로 가서 아들 언드라시와 아르메니아 공작 레오 1세의 딸 이사벨라를 약혼시켰다. 이후 육상으로 행진하여 룸 술탄국을 통과한 뒤 니케아에 도착했다. 니케아에 한동한 체류하고 있을 때, 장남 벨러를 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1세의 딸 마리아 라스카리나와 결혼시켰다.

1218년 말 언드라시의 행렬이 불가리아에 이르렀을 때, 마침 보릴을 몰아내고 새 차르에 즉위한 이반 아센 2세는 보릴을 일전에 후원한 그의 앞을 군대로 가로막고, 언드라시 2세의 딸 마리아를 자신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헝가리로 돌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언드라시 2세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1221년 지참금 형식으로 난도르페헤르바르와 브라니체보를 불가리아에 돌려줬다. 이후 헝가리에 도착한 언드라시 2세는 귀족들이 자신을 대신하여 헝가리를 이끌던 야노시 대주교를 추방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즉시 야노시를 복귀시켰다.

1219년, 언드라시 2세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십자군 원정에 막대한 자금을 소모한 터라 재정은 바닥을 드러냈고, 할리치나 공작으로 세워뒀던 칼만은 노브고로드 공작 므스티슬라프에게 사로잡혔다. 도저히 군대를 일으킬 여력이 없었던 그는 므스티슬라프와 협상한 끝에 다시는 할리치나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조건하에 아들을 돌려받았다. 그 후 그는 국고를 충당하기 위해 유대인과 무슬림 인사들을 대거 고용해 왕실 수입을 관리하게 했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그는 언드라시 2세와 욜란다 왕비에게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고용하는 짓을 금지하라고 촉구했다. 언드라시 2세는 성직자들의 세금을 면제해주고 교회 법정의 독점적인 심판을 받을 권리를 포함한 특권을 확인하는 등 교황청을 달래려 노력했다.

1222년, 언드라시 2세는 일련의 국정 실패로 불만이 가득한 헝가리 영주들을 달래고자 금인칙서를 반포했다. 여기에는 영주들이 누릴 특권들이 광범위하게 적혀 있었는데, 마지막 조항에는 군주가 이 헌장의 조항들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주교들과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리하여 헝가리 귀족들은 왕의 권력을 제약하고 하층 계급을 철저하게 지배할 수 있었다. 1223년, 교황 호노리오 3세는 그에게 새로운 십자군을 일으키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일전에 십자군을 나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둔 적 없고 오히려 불이익만 받았기에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았다.

이 무렵, 언드라시 2세는 장남 벨러를 크로아티아-달마티아 공작에 임명했다. 그런데 언드라시 2세의 통치를 못마땅하게 보는 귀족들이 벨러 주변에 포진하는 바람에, 두 부자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었다. 벨러는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아내로 삼았던 마리아 라스카리스와 이혼했다. 그러다가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재결합하라고 권하자, 벨러는 1223년 가을에 마리아를 다시 거둬들였다. 언드라시 2세가 이에 분노를 터트리자, 벨러는 아내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도주했다. 1224년, 언드라시 2세는 교황의 중재에 따라 아들과 화해했고 다시 크로아티아-달마티아 통치를 맡겼다.

1224년, 에르데이 방위를 맡던 튜튼 기사단의 권세가 갈수록 강해진 끝에 아예 헝가리로부터 독립해 오직 교황만 따르는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들었다. 언드라시 2세는 이에 분노해 무력을 동원하여 기사단을 헝가리에서 추방했다.[8] 이로 인해 헝가리와 교황청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226년, 언드라시 2세는 벨러를 트란실바니아 공작으로 전출하고 둘째 아들 칼만을 크로아티아-달마티아 공작으로 선임했다.

1227년, 언드라시 2세는 할리치나에 대한 원정을 또다시 감행했다. 초기에는 할리치나의 여러 요새를 성공적으로 공략했지만, 크레메네츠와 즈베니고로드에서 므스티슬라프에게 패배했다. 결국 아들 언드라시를 할리치나 공작으로 인정하겠다는 므스티슬라프의 약속에 만족하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1228년, 언드라시 2세는 벨러에게 귀족들의 영지 소유를 조정할 권한을 부여했다. 벨러는 어머니 게르트루트 살해 사건에 가담한 혐의 가 있던 시몬 카치치스와 반크 바르칼란의 영지를 몰수했으며, 아버지가 귀족들에게 퍼주었던 토지 보조금을 대거 회수했다. 또한 1229년에는 자신에게 복종했던 쿠만 족장들의 특권을 확인했다. 또한 1229년에는 자신에게 복종했던 쿠만 족장들의 특권을 확인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벨러의 활동을 지지했지만, 언드라시 2세는 귀족들이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해 종종 벨러의 정책 수행을 저지했다.

1229년 봄, 동생 언드라시가 할리치나 공국에서 쫓겨났다. 이에 벨러는 동생을 복위시키기로 마음먹고, 1229년 또는 1230년 쿠만족과 함께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할리치나를 포위했다. 그러나 수비대의 저항을 뚫지 못하고 전염병 마저 창궐하자 철수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가 동사하거나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1231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이반 아센 2세라틴 제국을 심하게 압박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언드라시 2세에게 불가리아를 공격하라고 종용했다. 안 그래도 일전에 십자군 원정을 치른 후 귀환하다가 이반 아센 2세에게 억류되어 딸 마리아를 아센에게 시집보내고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넘겨줘야 했던 것에 불만이 가득했던 언드라시 2세는 이를 명분삼아 불가리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벨러는 부친의 지시에 따라 1231년 말 또는 1232년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탈환했다. 뒤이어 스레데츠를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벨러는 1233년 왈라키아 서부 지역을 장악하고 불가리아의 반격을 저지하고자 여러 요새를 세웠다.

한편, 에스테르곰 대주교 로베르트는 유대인무슬림이 아직도 궁정 관리로 일하면서 기독교인들을 부려먹는 것에 불만을 제기했다. 신임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역시 이에 호응하여 대주교에게 왕을 계속 압박하라고 권장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언드라시 2세는 1231년 무슬림이 왕실 관리로 일하는 것을 금지하며, 군주가 이를 준수하지 않을 경우 에스테르곰 주교가 파문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로베르트 대주교는 여전히 유대인과 무슬림이 궁전에서 계속 일하고 있고 급기야 교회 재산을 압류하려 한다면서, 1232년 2월 25일에 헝가리에 성무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언드라시 2세는 교회 재산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대주교는 곧 성무금지령을 철회했다.

1233년, 언드라시 2세는 할리치나로 다시 출진해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가 내세운 다니엘 로마노비치로의 공세에 맞서는 아들 언드라시를 도왔다. 그러면서도 교황 특사와 협상을 이어간 끝에 1233년 8월 20일 베레그 숲에서 왕실 수입을 관리하기 위해 유대인과 무슬림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강탈한 교회 수입에 대한 보상으로 10,000마르크를 지불하겠다고 선언했다. 1233년 후반에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고, 1234년 초 에스테 후작 알도브란디노 1세의 딸 베아트리스 데스테와 결혼했다.

1234년 가을, 다닐로 로마노비치가 이끄는 루스군이 할리치나를 포위 공격한 끝에 함락시켰고, 언드라시 2세의 아들 언드라시는 피살되었다. 그는 이에 대한 보복을 계획했으나, 1235년 여름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와 스티리아가 연합하여 헝가리를 침공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자 계획을 바꿔 빈으로 쳐들어가 포위 공격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손해를 배상하겠다고 약속했고, 언드라시 2세는 헝가리로 돌아갔다.


2.2.11. 몽골 제국의 침략과 극복(1235년 ~ 1270년)[편집]


1235년 9월 21일 언드라시 2세가 사망한 뒤 장남 벨러 4세가 왕위에 올랐다. 얼마 후 언드라시 2세가 말년에 왕비로 맞아들인 베아트리체 데스테 왕비가 임신 소식을 공개하자, 벨러 4세는 늙은 아버지가 임신시켰을 리 없다며, 그녀가 아버지의 치세 때 재무관으로서 권세를 누린 데네시와 간통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데네시를 실명형에 처하고 베아트리체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후 베아트리체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사절단의 도움으로 남장한 채 탈출한 뒤 튀링겐에서 아들 이슈트반을 낳은 뒤 이 아이가 아르파드 왕조의 일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벨러 4세를 비롯한 언드라시 2세의 다른 자식들은 이슈트반을 왕실의 일원으로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고, 왕족으로서 지원금을 받는 것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벨러 4세는 언드라시 2세 치세 때 발표된 금인칙서를 통해 특권을 공인받은 귀족들의 권세가 지나치게 강해졌다고 여기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1237년, 1196년 이후에 제정된 모든 왕실 토지 보조금 헌장을 개정하기 위한 특별 위원회를 설립하고, 언드라시 2세가 귀족들에게 지급한 보조금을 전부 회수하려 했다. 이에 귀족들이 대거 반발했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결국 1239년, 벨러 4세는 귀족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보조금 회수를 잠정 중단했다.

이 무렵, 몽골 제국군키예프 루스를 침공해 막대한 인명을 살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여기에 몽골 제국군에게 쫓기던 쿠만인 40,000명이 헝가리 왕국의 동쪽 국경에 접근해 자신들을 받아들여준다면 헝가리를 위해 싸우겠다고 제안했다. 벨러 4세는 이들과 손잡고 몽골 제국군의 예상되는 침략에 맞서기로 하고, 쿠만족 지도자 쾨텐에게 추종자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피난처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쾨텐은 흔쾌히 수락하고 티서 강변의 평원 지대에 정착했다. 쿠만인들은 그곳의 현지 주민들과 종종 마찰을 벌였고, 때때로 강도, 강간 등 여러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벨러 4세는 몽골군의 임박한 침략을 막으려면 쿠만인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여겼기에 눈감아줬고, 헝가리인들은 자연히 쿠만인들을 감싸돌고 자신들의 고충을 알아주지 않는 왕을 원망했다.

1240년 말, 바투 칸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 동쪽 국경에 도달했다. 벨러 4세는 전국에 소집령을 내리고, 독일 기사들을 대거 고용했다. 그런데 쿠만족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헝가리 귀족들과 독일 기사들이 쾨텐을 습격해 살해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쿠만족은 헝가리 남부로 이동하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벨러 4세는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프리드리히는 소규모 병력과 함께 오다가 소규모 몽골 제국군을 격퇴한 뒤 으로 돌아가 버렸다.

1241년 봄, 몽골 제국군은 헝가리를 본격적으로 침공했다. 벨러 4세는 가급적 많은 병력을 끌어모은 후 적과 교전하려 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왕의 허락 없이 몽골군과 독자적으로 싸웠고, 일부는 아예 영지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그는 이대로 지체하면 군대가 와해될 거라 여기고 모히 평원으로 진군해 마차를 이용하여 요새화된 야영지를 건설했다. 1241년 4월 10~11일, 몽골군 35,000~10만 명과 헝가리군 25,000~80,000명은 모히 전투에서 격돌했다. 초기에는 바투 칸의 무리한 사요 강 도하로 인해 몽골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헝가리군이 승기를 잡는 듯했지만, 수부타이가 다른 길을 통해 강을 건넌 후 역습을 가해온 데다 헝가리 귀족들이 왕의 통제에 불응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다가 각개격파당하는 바람에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벨러 4세는 동생 칼만과 함께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주했지만, 뒤에 남겨진 헝가리군은 궤멸되었다.

벨러 4세는 몇몇 추종자들을 데리고 포조니로 이동했다가 몽골 제국군이 추격해오자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그를 도와주긴 커녕 감옥에 가둔 뒤 오스트리아 국경 인근의 포조니, 쇼프론, 바스 주를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벨러 4세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뒤 겨우 풀려난 후 가족과 함께 크로아티아로 피신했다. 이후 교황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구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후 몽골 추격대가 접근해오자, 가족들을 클리스 요새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트로기르로 피신했다.1242년에 추격대 지휘관 카단 칸은 밸러 4세가 클리스 요새에 가족들과 함께 있을거라 판단, 클리스 요새를 공격했지만 클리스 요새를 함락 시키는데 실패한다. 이후 벨러 4세는 다른 곳에 피신한 걸 알게된 몽골군은 서둘러 트로기르와 스플리트를 공략해 여러 도시들을 약탈하고 학살 했으나 결국 크로아트군의 끈질긴 저항 끝에 패배해 격퇴당하고 만다.

벨러 4세는 수도로 귀환한 후 폐허가 되어버린 나라를 제건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부더천도한 그는 이전에 왕실 보조금을 강제로 회수하려 했다가 대귀족들의 반발을 사는 바람에 국론이 분열된 탓에 몽골 제국군의 침략에 합심하여 대항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이후로는 귀족들과 가능한 한 합의하여 국가를 운영하기로 했다. 우선 모든 사람이 정당한 재산을 갖는 것을 보장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또한 몽골 제국군이 또다시 쳐들어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상 헝가리 일대에 최신식 석조 성을 지으면서, 각지의 영주와 지주들에게 자신처럼 성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마리아 왕비 역시 1250년경 비셰그라드 성을 짓는 등 모범을 보였다. 이에 귀족들이 왕실을 본받아 성채를 대거 건설하면서, 총 100여 개의 성채가 새로 건조되었다. 헝가리는 이를 통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방어력을 갖췄지만, 그 과정에서 지방 영주들의 군사력이 강해져서 왕권이 장기적으로 저해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또한 벨러 4세는 고품질의 금화를 주조하고 무역을 활성화해 경제를 일으켜 세우고자 했으며, 소금 생산을 독점하고 관세를 착실히 거둬들임으로써 국고를 채우고자 했다. 이렇게 확보한 국고를 토대로 병력을 늘리고 장비를 개선했으며, 몽골 기병에 대응하기 위해 각 도시에 일정한 수의 중무장 기사를 배치하게 했다. 이 기사들은 대부분 독일 출신으로, 국가로부터 급료를 지급받는 대가로 방위를 수행했다. 한편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를 초토화하며 학살을 자행한 데다 뒤이은 기근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에 벨러 4세는 주변 국가들로부터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1247년 구호 기사단과 계약을 맺고 쇠레네세그(Szörénység)[9], 쿠노르자그(Kunország)[10], 바르카사그(Barcaság)[11]를 영지로 주되 그곳에 성을 세우고 자신이 부르는 즉시 소집하도록 했다. 그러나 구호 기사단이 통제에 잘 따르지 않자, 벨러 4세는 1260년 이전에 그들을 추방했다.

한편,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벨러 4세가 약속한 대로 포조니를 접수하고자 1242년 봄에 공세를 개시했다. 하지만 헝가리군이 이를 격퇴하고 이전에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했다. 1246년 초, 프리드리히 2세는 보헤미아 왕국을 무찌른 뒤 헝가리를 재차 공격했다. 이에 벨러 4세는 키예프 대공 로스티슬라프 4세와 손을 잡고 대항했다, 1246년 6월 15일 라이타 강둑에서 양측이 격돌했다. 헝가리는 이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전투 중에 전사했다. 이로 인해 수 세기 동안 오스트리아 공국을 통치했던 바벤베르크 가문이 단절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내에서 공작위를 둘러싸고 내전이 벌어진 끝에 1251년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1세의 아들인 모라비아 변경백 오타카르가 차지했다. 1253년, 벨러 4세는 오스트리아 공국을 침공해 모라비아를 약탈했다. 이후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중재로 평화 협약을 맺고, 제머링 계곡 남쪽 영토가 헝가리에 양도되었다. 그는 이 지역을 아들 이슈트반에게 맡겼지만, 1258년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슈트반을 축출한 뒤 오타카르에게 합류했다. 오타카르는 나중에 오타카르 2세로서 보헤미아 국왕이 되었다.

1260년 초 평화 협약이 만료되자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이 또다시 발발했다. 헝가리는 쿠만, 키예프 루스, 폴란드 왕국, 세르비아 공국, 불가리아 제2제국,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았고, 오스트리아는 보헤미아 왕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지원을 받았다. 양군은 7월 12~13일에 모라비아에서 맞붙었고 헝가리군이 패배했다. 결국 벨러 4세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영토 관할권을 포기해야 했다.

1261년, 벨러 4세는 이슈트반 왕자에게 군대를 맡겨 불가리아 제2제국을 공격하게 했다. 이슈트반 왕자는 불가리아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도나우 강 하류의 룸과 비딘을 공략했다. 당시 내전이 한창이던 불가리아로서는 이에 대항할 수 없었고, 콘스탄틴 아센 1세는 헝가리가 그 지역을 가지는 것을 용인해야 했다. 그러나 이 무렵 벨러 4세가 어린 아들 벨러를 슬라보니아 공작으로 임명하고 편애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슈트반 왕자는 아버지가 자신의 상속권을 박탈하고 막내 동생 벨러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이리하여 양측간에 관계가 악화되었고, 1261년 가을에 양측 군대간에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여러 대주교들이 중재하자, 양자는 도나우 강을 따라 국가를 분할하기로 했다. 강 서쪽의 땅은 벨러 4세가 직접 통치하기로 했고, 동부 영토는 이슈트반이 다스리기로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양자의 갈등은 깊어졌다. 급기야 1264년 이슈트반이 도나우 강 동쪽에 있는 모후 마리아와 누이 언너의 영지를 몰수하자, 언너는 아버지를 부추겨 그해 여름에 이슈트반을 공격하게 했다. 언너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어 샤로슈퍼터크를 점령하고 그곳에 있던 이슈트반의 아내 에르제베트와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왕실군은 여세를 몰아 이슈트반 왕자를 몰아쳐서 그가 에르데이의 동쪽 끝에 있는 페케테할롬(Feketehalom)[12]까지 도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슈트반이 지지자들을 끌어모아서 병력을 추스린 뒤 반격을 가했고, 1265년 3월 이사제그 전투에서 벨러 4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1266년 3월 23일 토끼 섬[13]에 있는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서 양자는 다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도나우 강을 따라 국가를 양분하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슈트반 왕자가 세금 징수권과 평민 통제 등 국왕의 권리 상당수를 공유하는 것 역시 허용되었다.

이 무렵, 헝가리의 봉신이었던 야코프 스베토슬라프가 불가리아로 귀순했다. 1265년, 불가리아 차르 콘스탄틴 아센 1세는 스베토슬라프와 함께 도나우 강을 건너 헝가리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아들과 화해한 벨러 4세는 자신의 영지인 에르데이에 피해를 입힌 불가리아에 역공을 가하기로 하고, 이슈트반에게 군대를 맡겼다. 1266년 6월 비딘이 함락되었고, 뒤이어 불가리아 수도 벨리코 터르노보까지 진격하여 그 주변을 파괴하였고, 플레벤을 함락한 뒤 돌아갔다. 이에 야코프 스베토슬라프는 다시 불가리아를 버리고 헝가리의 봉신이 되었다.

1267년, 에스테르곰에 귀족들을 소집한 뒤 언드라시 2세가 반포했던 금인칙서에 명시된 그들의 특권을 재확인했다. 얼마 후,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1세가 벨러 4세와 이슈트반 왕자의 내전으로 헝가리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헝가리에 속한 미흐바를 침공했다. 이에 벨러 로스티슬라비치가 이끄는 왕실군이 출격해 세르비아군을 격파하고 스테판 우로시 1세를 사로잡았다. 벨러 4세는 자기 손녀 카테리나와 결혼한 스테판 드라구틴이 세르비아에서 더 많은 권력을 얻고 국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한다는 조건 아래 그를 풀어줬다.

1269년 여름, 벨러 4세의 총애를 받던 막내아들 벨러가 사망했고, 1270년 1월 18일에 막내딸 머르기트도 사망했다. 이에 깊은 슬픔에 잠긴 그는 곧 중병에 걸렸다. 자기가 죽고 나면 이슈트반 왕자가 가족들을 해칠 것을 우려한 그는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아내 마리아와 딸 언너를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2.2.12. 아르파드 왕조의 몰락(1270년 ~ 1301년)[편집]



2.2.12.1. 이슈트반 5세(1270년 ~ 1272년)[편집]

1270년 5월, 벨러 4세가 사망하고 장남 이슈트반 5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동안 이슈트반 5세와 심한 갈등을 벌였던 언너는 아버지가 죽고 이슈트반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아버지의 심복들과 함께 보헤미아로 도주했다. 이때 그들은 헝가리 서쪽 국경 지대의 여러 요새를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넘겨줬다. 이슈트반 5세는 중신들이 떠난 자리에 심복들을 앉힌 뒤 잃어버린 영토를 탈환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270년 8월 말에 크라쿠프 공작 볼레스와프와 동맹을 맺었고, 포조니 인근의 도나우 강 유역의 한 섬에서 오타카르 2세를 만나 땅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오직 휴전 협정만 맺어졌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270년 12월 21일, 이슈트반 5세는 습격대를 오스트리아에 파견해 약탈을 자행하게 했다. 이에 오타카르 2세는 1271년 4월 도나우 강 북쪽 지역을 공격하여 데베니, 포조니, 너지솜버트를 포함한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5월 15일 모숀머저로바르 전투에서 이슈트반 5세의 헝가리군을 격파했다. 하지만 병력을 수습한 이슈트반 5세가 반격을 가했고, 5월 21일 라이카 강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격멸했다. 이후 그는 소수의 추종자만을 이끌고 달아나는 오타카르 2세를 맹추격해 까지 이르렀다. 이후 양자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슈트반 5세는 오타카르 2세의 적들을 돕지 않기로 했고, 오타카르 2세는 언너와 추종자들이 넘겨줬던 요새들을 헝가리에 돌려주기로 했다.

1272년 늦봄, 이슈트반 5세는 자신과 결혼동맹을 맺은 나폴리 왕국카를로 2세를 만나기 위해 달마티아로 떠났다. 그런데 그해 6월 말 독일계 크로아티아인 영주 요아킴 펙타르(Joakim Pektar ?~1277)가 태자 라슬로를 납치하여 코프리브니차 성에 연금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코프리브니차 성으로 달려갔지만, 도중에 중병에 걸렸다.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도나우 강변의 체펠 섬으로 간 뒤 1272년 8월 6일에 사망했다.


2.2.12.2. 라슬로 4세(1272년 ~ 1290년)[편집]

이슈트반 5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에르제베트 왕비는 라슬로를 세케슈페헤르바르로 데려온 요아킴과 서둘러 협상한 뒤, 함께 대관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슈트반 5세의 측근들은 엘리자베트 왕비가 어린 아들을 왕으로 올리기 위해 요아킴과 짜고 음모를 꾸몄다고 의심했다. 이슈트반 5세의 재무관 에기디우스 모노즐로는 여러 인사를 포섭한 뒤, 우선 라슬로를 빼돌린 후 왕비의 숙소를 공격했다. 하지만 요아킴의 지지자들이 이들의 공격을 격퇴했고, 모노즐로는 포조니로 후퇴한 뒤 그곳을 거점으로 삼은 후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에게 투항했다. 오타카르 2세는 모노즐로를 따뜻하게 맞이하고 막대한 선물을 제공했다.

1272년 9월 3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에스테르곰 대주교 피포가 주관하는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론상으로는 어머니 에르제베트가 10살 소년 라슬로를 대신해 나라를 이끌었지만, 실제로는 헝가리 귀족들이 왕국을 통치했다. 그해 11월, 귀족들이 퀼락 섬에서 향락을 즐기고 있을 때 유력 귀족 중 하나인 쾨세그 공작 헨리크가 마초 공작 로스티슬라프와 이슈트반 5세의 누이 언너의 아들인 벨러를 반역 혐의로 고발했다. 벨러가 이에 격하게 항변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헨리크가 검을 뽑아 벨러를 찔러 죽였다. 당시 퀼락 섬의 수녀원에 지내던 이슈트반 5세의 누이 머르기트와 다른 수녀들이 유해를 수습한 뒤 수도원 공동묘지에 묻었다. 이후 마초 공국은 헨리크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분할되었다.

이후 헝가리 귀족들은 최고 권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쾨세그 공작 헨리크와 요아킴 펙타르가 한 무리를 이끌었고, 다른 하나는 카사크 공작 마테가 이끌었다. 양측은 서부 헝가리에 토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서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구축하기를 원했다. 헝가리 정부는 수 년간 두 권력집단간의 경쟁과 대립으로 점철되었고, 라슬로 4세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의사표현조차 하지 못했다. 이중에서 그나마 라슬로를 지원하는 귀족인 페터르 카사크마저 정쟁에서 밀려 낙향해야 했고, 그의 입지는 더욱 약해졌다.

1273년 4월, 오스트리아 공국과 모라비아의 군대가 지난날 이슈트반 5세가 자국을 침공하여 약탈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헝가리를 침공했다. 그들은 죄르솜버트헤이를 공략하고 헝가리 서부 일대를 약탈했다. 요아킴이 두 달 후에 두 요새를 탈환했지만, 얼마 후엔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가 헝가리를 침공하여 죄르와 쇼프론을 포함한 많은 요새를 공략했다.

1274년, 헨리크 쾨세그는 라슬로 4세를 납치해 자기들 입맛대로 부려먹으려 했다. 카사크 가문이 왕을 구출하자, 쾨세그 가문은 라슬로 4세의 남동생 언드라시를 왕으로 추대했다. 1274년 9월 26일과 29일 사이에 페제르의 폴가르디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페터르 카사크가 헨리크와 요아킴의 군대를 격파했다. 헨리크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아들들은 언드라시를 계속 왕으로 내세웠다. 1274년 말, 합스부르크 가문독일왕 루돌프 1세는 보헤이마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헝가리와 동맹을 맺었다.

1276년 루돌프 1세와 오타카르 2세 사이의 전쟁이 발발하자, 헝가리 정부는 그해 가을에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쇼프론은 곧 라슬로 4세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오타카르 2세 역시 헝가리 서부의 모든 도시를 포기할 테니 군대를 물려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1277년 에르데이에 거주하는 작센인이 반란을 일으켜 줄러페헤르바르를 파괴하고 에르데이의 주교좌도 파괴했다. 귀족들은 이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내리지 않고, 그저 권력을 놓고 분쟁을 벌이기만 했다.

1276년 정식으로 나폴리의 엘리사베타와 결혼한 라슬로 5세는 이듬해인 1277년 5월 라코스 인근 들판에서 소집된 회의에 출석했다. 컬로처의 이슈트반 대주교, 바츠의 풀룹 주교, 바러드의 라도메르 주교, 자그레브의 티모트 주교 등 회의를 주도한 주교들은 왕이 법적 연령이 되었으니 모든 국정을 스스로 이끌어야 한다고 선포했다. 라슬로 4세는 이에 호응하면서, 국가의 불명예에 대해 단호히 맞서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이렇게 해서 라슬로 4세는 친정할 수 있게 되었으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귀족들은 여전히 강대한 권세를 누리며 국정에 간섭했고, 왕에게는 독자적으로 정책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대로 허수아비 왕으로 살다가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외가인 쿠만인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해 자기 편으로 삼고, 왕실의 통제에 따르지 않은 영주들은 하나둘씩 물리쳤다. 우선 세페세그의 반란군을 격파하고 그들의 영지를 몰수했다. 여기에 지난날 자신을 납치한 뒤 허수아비 군주로 부려먹었던 요아킴이 헝가리 남부에서 이슈트반 바보니치와 전투를 벌이던 중 전사하는 행운이 겹쳤다. 그는 여세를 몰아 1277년 가을에 트란스다뉴비아에 똬리를 틀고 있는 쾨세그 가문을 공격했지만, 그들의 군세가 강력해서 쉽사리 꺾지 못했다. 1278년 초 반란군 지휘관 니콜라스 제레기의 요새인 아도리안을 공략한 그는 그해 초여름에 티서 강변의 7개 주를 다스리는 영주들을 소집하여 2명의 반항적인 지역 귀족들을 처형했다.

이렇게 해서 입지를 어느정도 다진 뒤, 그는 독일왕 루돌프 1세와 힘을 합쳐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를 정벌하러 출진했다. 1278년 8월 26일, 양군은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보헤미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오타카르 2세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루돌프 1세는 전투가 끝난 뒤 라슬로 4세에게 "당신 덕분에 오스트리아슈타이어마르크신성 로마 제국의 품에 무사히 돌아왔다."며 감사를 표했다. 이리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등에 업게 된 그를 두려워한 쾨세그 가문은 그동안 왕으로 받들던 언드라시를 베네치아로 보내고 1279년 초 라슬로 4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그는 모든 영주, 귀족, 주교들이 참석한 회의를 소집하여 파편화된 왕실 영지를 회수하고 헝가리 내 소수 민족에 대한 지원 정책을 검토했다. 이때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이들은 상당량의 벌금을 지불해야 했다.

1279년 9월 22일, 교황 니콜라오 3세의 사절단이 헝가리를 방문했다. 교황은 헝가리 왕국이 내전에 시달리느라 교회 조직이 혼란에 빠진 상황에 우려를 표하며, 왕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페르모의 피포 주교를 헝가리의 교황 사절로 삼는다고 선포했다. 피포는 교회 문제 외에도 세속 문제 전반에 간섭할 권한도 부여받았다. 이제 막 통합 작업을 벌이던 라슬로 4세 입장에서는 왕권이 교권에 저해될 우려가 있었기에, 사절단이 도착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사절단은 예정대로 도착했고, 피포는 왕에게 교황권의 수위를 인정하고 모든 주와 왕에 관한 법령을 포함하는 상세한 제안서를 왕실 회의에 제출해 통과시켰다.

이중에는 쿠만인들에 관한 법령도 있었다. 당시 쿠만인들은 집단촌에 모여살면서 고유의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다. 피포는 쿠만인들이 기독교를 아직도 수용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자, 라슬로 4세에게 쿠만인들이 이교 관습을 버리고 진정한 기독교도가 되도록 권고하라고 촉구했다. 교황 사절의 압박에 굴복한 그는 모든 쿠만인들이 천막을 떠나 "땅에 붙어있는 집"에서 살아야 하며 기독교를 확실히 믿어야 한다고 규정한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쿠만인들은 법을 따르지 않았고, 라슬로 4세는 쿠만인들의 지지 덕분에 여기까지 온 만큼 그들을 차마 어찌하지 못했다.

라슬로 4세가 좀처럼 쿠만인들을 개종시키는 데 열의를 보이지 않자, 필리프는 1279년 10월 헝가리 전역에 성무금지령을 내리고 왕을 파문했다. 라슬로 4세는 교황청에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쿠만인들은 자신들을 고압적으로 대하는 교황 사절에게 짜증이 난 나머지 1280년 1월 초에 피포를 체포했다. 그 직후, 에르데이의 보이보드(voivode)인 핀타 어버가 라슬로 4세를 사로잡아 보르사 가문의 지도자인 롤랑에게 넘겼다. 2달 후 교황 사절과 국왕 모두 석방되었고, 라슬로 4세는 교황청의 뜻에 따라 쿠만인이 기독교로 개종하기 위한 새로운 법을 재정하기로 서약했다.

쿠만인들은 상황이 갈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교황 사절의 요구에 복종하는 대신 헝가리를 떠나기로 했다. 라슬로 4세는 이들을 저지하려고 살란케멘[14]까지 따라갔지만, 쿠만인이 국경을 넘어 가버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헝가리에 남기로 한 쿠만인 역시 기독교 강요에 불만이 가득했다. 1282년 여름, 그들은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라슬로 4세는 호드메죄바샤르헤이 인근 호드 호수에서 반란군을 격파했지만, 쿠만인들에게 가하는 징벌을 최소화함으로써 그들을 어떻게든 붙잡아두려 애썼다.

1285년 1월,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를 침공했다. 그들은 2달간 도나우 강 동쪽 일대를 파괴했지만, 현지 민병대와 귀족 사병대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자 철수했다. 이때 많은 귀족들은 강력한 권세를 누리는 자신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라슬로 4세가 몽골인을 선동해 헝가리를 침공하게 했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라슬로 4세는 1285년 9월 세페세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때 몽골군 포로를 대거 고용했다.

이렇듯 기독교 강요 정책에 대한 쿠만인의 반발과 귀족들의 거센 저항, 교황의 압력에 직면한 그는 심각한 심적 고통을 겪었기 때문인지 마지막 몇년 동안 기행을 벌였다. 그는 통치자로서의 의무를 점점 덜 수행했고, 쿠만인의 의상과 머리를 본따고 천막에서 사는 등 쿠만족의 삶의 방식을 선호했다. 또한 수많은 쿠만 여인들을 첩으로 들이고 나폴리 출신 왕비 엘리사베타를 학대하게 했다. 1286년 엘리사베타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헝가리를 탈출하려 하자, 그는 군대를 보내 그녀를 체포한 뒤 머르기트 섬에 3년간 유폐했다. 그러다가 1289년에 풀어주고 궁정에 머물게 했지만, 여전히 그녀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가장 좋아하는 첩 아이두아(Aydua)와 함께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성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 운영이 제대로 됐을 리 없다.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1세가 헝가리를 침공해 서쪽 변경지대의 30개 요새를 공략했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 대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교황 니콜라오 4세는 헝가리 국왕이 완전히 이교도가 되어버렸다고 여기고 헝가리를 향한 십자군을 선포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던 1290년 7월 10일, 라슬로 4세는 쾨뢰셰그 성에서 아르부즈, 토르텔, 케멘스라는 이름의 세 명의 쿠만인에게 암살당했다.


2.2.12.3. 언드라시 3세(1290년 ~ 1301년)[편집]

라슬로 4세가 암살당한 뒤, 언드라시 2세와 베아트리체의 유복자 이슈트반의 손자 언드라시 3세가 귀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영주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동안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자가 하루아침에 왕이 된 것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언드라시 3세가 평화를 회복하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자 충성을 맹세했다.

언드라시 3세는 집권 후 헝가리의 가장 강력한 귀족들을 최고위직에 앉혔다. 왕국의 북동부를 지배하던 어버 어머데는 궁정백으로 선임되었고, 트란스다뉴비아 서쪽 지역의 지배자인 이반 쾨세그는 재무관이 되었으며, 롤랑 보르사는 에르데이에서 군림했다. 또한 그는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모든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왕실의 허가없이 세워진 성들을 파괴하고 불법적으로 취득한 재산을 원주인들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그를 몰아내고 헝가리 왕위를 탈취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독일왕 루돌프 1세는 1241년 벨러 4세가 몽골 제국군의 공세를 피해 달아났을 때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원군을 요청하면서 충성을 맹세한 사실을 들며, 봉신인 라슬로 4세가 자식 없이 사망했으니 주군으로서 봉신의 영지를 거둬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아들이자 오스트리아 공작인 알브레히트 1세에게 헝가리를 맡기려 했다. 여기에 라슬로 4세의 형제 언드라시(1278년 사망)를 사칭하는 자가 폴란드 왕국에서 지지자를 규합하여 헝가리로 쳐들어왔다가 패퇴한 뒤 폴란드에서 피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댈 수 있는 것은 강력한 위세를 갖춘 처가를 구하는 것뿐이라고 여긴 언드라시 3세는 1290년 쿠야비아 공작 지에모미수(Ziemomysł inowrocławski 1245~1287)의 딸 페넨나와 결혼했다. 그리고 1291년 초 티서 강 동쪽에 있는 비하르(Bihar), 쾨레슈비데크(Körösvidék), 서볼치(Szabolcs), 서트마르(Szatmár), 솔노크(Szolnok) 등 5개 주 귀족들의 총회를 너지바러드에서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라슬로 4세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현재 언드라시 3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슈트반 발로센젠을 역적으로 간주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소집된 또다른 회의에서 지역 귀족들과 작센인, 루마니아인 등 소수민족들에게 왕에게 충성을 바치라는 내용의 칙령을 발표했으며, 어버 어머데를 궁정백에서 해임하고 자신을 옹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이반 쾨세그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1291년 4월,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의 왕비이자 라슬로 4세의 누이인 마리어가 헝가리 왕위를 주장했다. 바보니치, 프랑코판, 슈비치 등 크로아티아와 슬라보니아의 주요 귀족 가문들이 그녀를 합법적인 군주로 받들었다. 하지만 언드라시 3세는 일단 그녀 문제는 내버려두기로 하고,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 왕을 칭하는 알브레히트 1세부터 손보기로 했다. 그는 군대를 소집한 뒤 오스트리아를 공격해 알브레히트 1세가 라슬로 4세 치세 말기에 점거했던 프레스부르크쇼프론을 포함한 여러 요새를 탈환했다. 당시 알브레히트 1세는 아버지 루돌프 1세가 사망한 뒤 나사우 가문아돌프독일왕위를 놓고 경쟁하던 터라 그와 대적할 겨를이 없었다. 이에 양자는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알브레히트 1세가 쾨세그 가문에게서 탈취한 요새들을 파괴하고 철수하며, 양자는 서로를 적대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1292년 봄, 쾨세그 가문은 자기들 소유의 요새들을 파괴하게 한 그에게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키면서 마리어의 아들인 카로이 마르텔을 왕으로 옹립했다. 언드라시 3세는 즉각 반란 토벌에 나서 7월에 진압을 성공했지만, 그해 8월에 슬라보니아로 가던 중 쾨세그 가문을 따르던 병사들에게 습격당해 체포되었다. 언드라시는 4개월간 억류되었다가 지지자들이 그들의 친척을 쾨세그에 인절로 보낸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1293년 어머니 토마시나를 헝가리로 모셔온 뒤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슬라보니아의 관리자로 임명했다. 베네치아 귀족의 여식이었던 그녀가 이 지역을 담당하자, 베네치아의 영향력이 강력했던 해당 지역들은 언드라시 3세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언드라시 3세는 뒤이어 헝가리 북부 지역을 방문해 토지 보조금을 개정했으며, 부다로 돌아온 후 어버 어머데를 다시 궁정백에 선임했다.

1294년 5월, 롤랑 보르사가 너지바러드 주교 베네딕토를 사로잡고 정부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언드라시 3세는 그를 반역자로 규정한 뒤 공세를 개시해 아도르한에 있는 보르사의 요새를 포위했다. 3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공략에 성공한 그는 에르데이의 보이보드(voivode)로 라슬로 3세 칸을 선임했지만, 자신에게 복종을 맹세한 보르사의 영토를 보전해주었다. 1295년 초, 크로아티아의 귀족 파울 슈비치가 또다시 그에게 등을 돌리고 카로이 마르텔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그러나 카로이는 그해 8월에 사망해버리면서 반란은 흐지부지되었다.

1295년 아내 페넨나가 사망하자, 1296년 초 빈에 방문하여 알브레히트 1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그해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쾨세그 가문을 상대로 알브레히트 1세와 협공했지만, 여러 요새에서 농성하는 그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1296년 메테 3세 크사크를 궁정백으로 선임했지만, 1297년 말에 메테 3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언드라시 옹립에 기여하고 반란군을 상대로 파문을 선포하는 등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루도메르 대주교가 이 시기에 사망했다. 이렇듯 국내가 귀족들의 연이은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그는 알브레히트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왕위를 거머쥐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도왔다. 1298년 7월 2일, 그와 알브레히트 1세는 괼하임 전투에서 아돌프를 격파했다.

1298년 여름, 언드라시는 고위 성직자, 귀족, 작센인, 세케이인, 쿠만인을 소집하여 회의를 연 뒤, 자신의 허가 없이 건설된 요새를 파괴하고 불법적으로 취득한 재산을 원주인에게 돌려주라고 재차 명령했다. 또한 삼촌인 알베르티노 모로시니를 슬라보니아 공작으로 선임했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은 좀처럼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슈비치 가문, 쾨세그 가문, 차크 가문을 포함한 여러 귀족들이 나폴리 국왕 카를로 2세에게 당시 12살인 손자 카로이 로베르트를 헝가리로 보내서 왕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카를로 2세는 이에 따르기로 하고, 1300년 8월 손자를 스플리트에 파견했다. 대부분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달마티아 영주들은 카로이가 자그레브로 진군할 때까지 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쾨세그 가문과 메테 가문은 곧 마음을 바꿔 언드라시 3세와 화해한 뒤 카로이의 진군을 막았다. 이제 헝가리에서 또다시 내전이 벌어질 기미가 감돌던 1301년 1월 14일, 언드라시 3세는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리하여 수 세기 동안 헝가리를 지배했던 아르파드 왕조는 단절되었다.


2.3. 왕위 쟁탈전(1301년 ~ 1308년)[편집]


1301년 언드라시 3세가 사망한 후, 언드라시 3세 생전부터 헝가리 왕을 자처하던 나폴리 왕국카로이 로베르트 왕자가 에스테르곰으로 가서 에스테르곰 대주교의 추대를 받으면서 헝가리 국왕이 되는 듯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교황청이 지지하는 그를 왕으로 받아들이면 자신들이 교황청의 간섭에 시달릴 것을 우려했기에 추대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대관식이 거행되는 세케슈페헤르바르가 아닌 에스테르곰에서 대관식이 거행된 것은 무효라며 카로이 로베르트의 집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소집된 헝가리 의회에서는 바츨라프 3세와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가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다가 바츨라프 2세로부터 막대한 뇌물을 받아챙긴 귀족들은 바츨라프 3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1301년 8월 27일, 아버지가 보내준 수행원과 보헤미아군과 함께 세케슈페헤르바르에 도착한 뒤 컬로처 대주교로부터 왕관을 쓰고 '라슬로'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헝가리 영주들은 대부분 그의 집권을 받아들였지만, 크로아티아 영주들은 카로이 로베르트만을 왕으로 모셨다. 이에 1301년 8월 말, 이반 쾨체그가 이끄는 왕실군이 출진해 에스테르곰을 공략했고, 카로이는 헝가리 남부로 피신했다. 하지만 카로이를 따르는 주들을 본격적으로 정벌하려는 시도는 이뤄지지 않았고, 헝가리는 카로이를 지지하는 세력과 바츨라프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나마도 강력한 권세를 떨치는 귀족들이 국정을 주도했고, 바츨라프와 카로이 모두 별다른 실권이 없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2세에게 자신의 허락 없이 아들을 헝가리 왕으로 세운 것에 항의하는 서신을 보냈다. 1301년 9월 헝가리를 방문한 교황 사절 니콜로 보카시니는 헝가리 고위 성직자들에게 교황이 헝가리 왕으로 인정한 카로이를 지지하라고 설득했다. 이에 보헤미아 왕국은 헝가리 귀족들을 묶어두기 위해 그들에게 큰 영지와 높은 관직을 주었다. 그 결과, 바츨라프를 헝가리 왕으로 세우는 데 일조했던 컬로처 대주교 이슈트반을 포함한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1302년 상반기에 카로이 지지로 돌아섰지만, 귀족들은 바츨라프를 계속 왕으로 모셨다.

1302년 9월, 카로이가 바츨라프가 있던 부더를 포위했다. 그는 부더 시민들에게 바츨라프를 인도하라고 요구했지만, 수비대와 시민들은 끝까지 바츨라프를 지지했다. 그 사이, 이반 쾨체그가 이끄는 군대가 도착하여 포위를 풀었고, 카로이는 어쩔 수 없이 달마티아로 철수했다. 교황 사절 니콜로 보카시니가 부더에 성무를 집행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선언하자, 부더 신부들은 교황과 모든 헝가리 고위 성직자들을 파문했다. 1303년, 보니파시오 8세는 바츨라프 2세에게 로마로 출두해서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바츨라프 2세가 응하지 않자, 그해 5월 31일에 바츨라프 왕의 헝가리 왕 선출은 무효이며 카로이야말로 헝가리 왕이 되어야 한다는 교령을 반포했다. 여기에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도 바츨라프 2세에게 아들을 헝가리에서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많은 헝가리 귀족들이 카로이 편에 돌아섰고 바츨라프 왕의 세력은 부더와 그 주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바츨라프 2세는 아들을 구하고 카로이를 무찌르기 위해 1304년 5월 대군을 이끌고 헝가리로 진군했다. 그의 군대는 슬로바키아 서부 일대를 행진하며 무자비하게 약탈한 뒤 에스테르곰을 공략하고 에스테르곰 주교 에호르를 생포했다. 그러나 카로이를 지지하는 영주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은 데다, 아들을 왕으로 받든 영주들도 제대로 협조해주지 않고 자기들 권익을 챙기는 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자, 그는 아들이 헝가리에 계속 체류했다간 위험해지겠다고 판단했다. 이에 아들을 보헤미아로 데려가되 헝가리 왕위는 계속 유지하고 이반 쾨체그를 왕을 대신하여 헝가리를 이끌 통치자로 세웠다. 이때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 역시 보헤미아로 이송되면서, 헝가리 민심이 악화되었다.

1304년 9월, 카로이와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3세가 모라비아를 침공했지만 바츨라프 2세에게 격파되었다. 이후 알브레히트 1세와 바츨라프 2세간에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이 무렵 건강이 악화된 바츨라프 2세는 1305년 4월부터 병상에 누워서 사경을 헤매다가 1305년 6월 21일에 사망했다. 그리하여 바츨라프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위에 아버지가 지니고 있던 보헤미아와 폴란드 왕위까지 물려받았다. 그러나 당시 그가 처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왕실의 재정은 빚더미에 쌓였고, 폴란드의 상황은 귀족들의 연이은 반란으로 인해 혼란스러웠으며, 헝가리에서는 이름만 내걸었을 뿐 왕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었다.

그는 일단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와의 평화 협상을 이어갔다. 1305년 8월 18일, 알브레히트 1세는 보헤미아 국왕을 반역자로 비난했던 칙령을 취소하고 바츨라프의 전임자들이 소유한 권리와 특권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폴란드와 헝가리에 대한 권리를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 대가로, 그는 체브스코(Chebsko)를 알브레히트 1세에게 양도하고 베틴 가문에 모젤을 넘겨야 했다. 신성 로마 제국과의 분쟁을 종결한 뒤, 바츨라프는 헝가리 문제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무력으로 해결하기에는 전쟁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고 성공 가능성도 불확실하다고 보고 외교로 해결하기로 했다. 1305년 10월 9일, 그는 브르노에서 헝가리 왕위에서 물러나고 성 이슈트반 왕관과 보석을 포함한 헝가리 왕좌에 대한 권리를 니더바이에른 공작 오토 3세에게 넘겼다.

바츨라프 3세에게 헝가리 왕위를 넘겨받은 오토 3세는 헝가리로 이동해 1305년 12월 6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는 '벨러'라는 왕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는 헝가리 왕이 된 이후로 연이은 실패를 맛보았다. 언드라시 3세 치세 때부터 헝가리 왕을 자처하며 크로아티아-달마티아 등 헝가리 남부 일대에서 지지세력을 끌어모으던 카로이 로베르트가 1306년 말부터 북상해 헝가리의 수도 부더를 압박했다. 여기에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카로이를 지지하면서 오토가 헝가리 왕을 칭하는 것을 금지했다. 오토는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1307년 봄 에르데이를 순행하다가 그해 6월 오토와 카로이 둘 다 왕으로 인정하지 않던 에르데이의 보이보드(Voivode) 라슬로 칸에게 체포되었다.

1307년 10월 10일 라코스에서 열린 긴급 회의에서, 귀족들은 카로이를 헝가리 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헝가리의 가장 강력한 귀족들인 마테 3세 크사크, 어버 어머데, 라슬로 칸은 카로이의 권위를 무시했다. 1307년 말에 석방된 오토는 헝가리에 정나미가 떨어졌고, 1308년 헝가리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카로이를 왕으로 인정한 뒤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


2.4. 앙주 왕조[편집]



2.4.1. 카로이 로베르트(1308년 ~ 1342년)[편집]


1308년 카로이 로베르트가 오토에게 헝가리 왕권을 넘겨받았지만, 많은 헝가리 귀족들은 여전히 카로이를 왕으로 받들려 하지 않았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새로운 교황 사절인 젠틸레 포르틴노 다 몬테피오레를 헝가리에 파견했다. 1308년 여름에 헝가리에 도착한 몬테피오레는 헝가리의 가장 강력한 영주들을 차례로 설득해 카로이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했다. 그 결과 1308년 11월 27일, 부더의 도미니카 수도원에서 열린 의회에서 카로이가 만장일치로 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일전에 오토 3세를 억류할 때 성 이슈트반 왕관을 탈취했던 라슬로 칸은 왕관을 카로이에게 넘겨주라는 교황 사절의 요구를 무시했다. 결국 교황 사절은 카로이를 위해 새로운 왕관을 제작해야 했다.

1309년 6월 15일 또는 16일 부더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대관식이 치러졌다. 그러나 대다수 헝가리인들은 성 이슈트반 왕관이 아닌 다른 왕관으로 대관식을 치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교황 사절이 라슬로 칸에게 파문을 선고하자, 라슬로 칸은 할 수 없이 성 이슈트반 왕관을 카로이에게 넘겼다. 1310년 8월 27일, 에스테르곰 대주교 토마스가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성 이슈트반 왕관을 카로이에게 씌워줬다. 이로써 카로이가 헝가리 왕으로 인정받았지만, 헝가리의 대귀족들은 그의 권위를 우습게 여겼다.

한편, 세르비아 왕국에서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을 상대로 내전을 벌이고 있던 스테판 드라구틴은 아들 블라디슬라프가 헝가리 왕족인 콘스탄차 모로시니와 결혼한 터라서 헝가리에서 벌어지는 내전에도 개입해 상당수의 병력을 그 쪽으로 보냈다. 그러다가 카로이가 최종적으로 헝가리 왕이 되자, 드라구틴은 그에게 아들 블라디슬라프를 후계자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카로이가 이를 거부하자, 이번에는 그를 실각시킬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카로이는 이 음모를 간파하고 정적들을 모조리 숙청하였고, 이로 인해 드라구틴과의 관계가 매우 안 좋아졌다.

1311년 상반기, 카로이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점거하고 있던 자다르 공략에 착수해 베네치아 수비대를 축출하고 믈라덴 수비치를 자다르의 백작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해 6월, 차크 마테 3세가 부더를 습격해 포위 공격했다. 카로이는 라슬로 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는 마테를 성공적으로 격퇴한 뒤 그해 9월 군대를 파견해 차크 마테 3세의 영지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1312년 봄 의회를 소집해 지방 영주들에게 반역자 차크 마테 3세를 토벌하는 데 힘을 보태라고 촉구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 사이에 베네치아가 자다르를 도로 탈취하자, 그는 베네치아와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베네치아인이 자다르 백작에 선임되는 것을 용인하되 헝가리 왕이 명목상으로나마 자다르 백작의 주군이 되는 것을 인정받았다.

한편, 공식적으로 카로이를 지지했던 어버 어머데는 1311년 9월 왕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커셔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곳을 포위 공격했다. 그러다가 커셔 주민들의 습격을 받고 피살당했고, 그의 두 아들 야노시와 데메테르가 카사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에 카로이가 카사로 와서 양자를 중재했고, 어버 가문은 10월 3일에 야노시와 데메테르가 석방되는 대가로 아바우지와 젬플렌 주를 왕실에게 돌려주고 커셔 시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석방되자, 어버 가문은 합의를 어기고 차크 마테 3세에게 군대 지원을 받는 대가로 어바우지와 젬플렌을 넘기기로 했다.

1312년, 어버-차크 연합군은 카사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카로이가 왕실군을 이끌고 이들을 요격하여 1312년 6월 15일 로스고니(현재 슬로바키아의 로자노브체) 전투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그동안 어버 가문을 섬겼던 귀족 중 절반 가량이 전투가 끝난 뒤 카로이에게 귀순했다. 그해 7월, 카로이는 어버 가문의 여러 요새를 공략한 뒤 차크 마테 3세를 향한 원정을 개시해 1313년 너지솜바트, 1315년 비셰그라드를 공략했다. 1315년 초 부더에서 테메슈바르로 이동한 그는 1316년 상반기에 트란스다뉴비아와 슬라보니아에서 쾨세그 가문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때 그동안 쾨세그 가문의 압제에 시달렸던 소영주들이 대거 가담했고, 쾨세그 가문은 왕실군에게 연전연패해 헝가리 남부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빠르게 상실했다.

이렇듯 왕권이 갈수록 강해지자, 이에 불안감을 느낀 보르사 자캅(Borsa Jakab 1260~1332)은 1315년 라슬로 칸이 사망한 뒤 영지를 물려받은 두 아들 라슬로 4세 칸, 라슬로 5세 칸과 아코시 모이시(Ákos Mojs ?~1320) 등 여러 영주들과 연합해 카로이에 대적했다. 그들은 갈리치아의 왕 안드레이 유리에비치를 헝가리 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보르사 가문의 추종자였지만 이제는 카로이 편에 선 데브레첸의 도저(Debreceni Dózsa 1291~1322)가 이끄는 왕실군이 1316년 6월 말에 데브레첸에서 이들을 격파했다. 이후 2달 동안 보르사의 많은 요새들과 영지들이 비하르, 솔노크, 보르쇼드, 그리고 클루지 주에 속한 왕실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렇듯 헝가리 대귀족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군사 원정을 이끈 카로이는 1314년 2월 스렘스카미트로비차에서 스테판 드라구틴과 평화 협약을 맺고 전쟁을 종식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316년 3월 12일, 세르비아 왕국 북부 지역인 스렘의 왕을 칭하던 스테판 드라구틴이 사망하고 장남 스테판 블라디슬라프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숙부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은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군사를 일으켜 스렘으로 쳐들어갔다. 카로이는 스테판 블라디슬라프가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을 권리를 인정하고 병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은 블라디슬라프를 성공적으로 격파하고 스렘을 포위했다. 카로이는 사바 강을 건너 반격을 개시해 마초 요새를 공략했다.

1317년 5월, 어버 가문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곧바로 진압하고 운그바르, 네비츠케(Nevicke: 현재 우크라이나 네비츠키) 성을 공략했다. 1317년 11월 3일, 카로이는 차크 마테의 영지를 침공해 코마롬(Komárom, 현재 슬로바키아 코마르노)를 점령했다. 1318년 카로이가 차크 마테 3세가 강제로 탈취했던 교회 재산을 돌려주는 정책을 속행하지 않자, 고위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이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연합했다. 그들의 거센 요구에 직면한 카로이는 그해 여름에 의회를 열었지만, 언드라시 2세금인칙서를 재확인하라는 요구는 거부했다. 고위 성직자들은 교황에게 카로이가 교회 재산을 자기 것으로 가져가고 있다며 파문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그런 상황에서 카로이가 중병에 걸리자, 파문 여부를 심사하던 교황 요한 22세는 카로이가 죽음이 임박했으니 참회한다면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카로이는 곧 회복되었다.

1319년, 데브레첸의 도저는 라슬로 4세, 라슬로 5세 형제 및 그들의 동맹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공세를 이어갔고, 쾨치키 샨도르(Köcski Sándor ?~1328)는 쾨세그 가문의 6개 요새를 공략했다. 1319년 여름, 카로이는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로틴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해 난도르페헤르바르와 마츠바 등지를 공략했다. 2년 후인 1321년 3월 18일, 그동안 카로이를 상대로 항전하던 차크 마테 3세가 사망했다. 카로이는 이 때를 틈타 차크 가문의 영지를 공격해 별다른 저항 없이 순조롭게 공략했다. 이때 카로이는 차크 가문의 핵심 도시인 트렌첸을 포위하여 8월 8일에 함락시켰다. 3개월 후, 왕실군은 라슬로 칸 아들들의 마지막 요새인 키소(Csicsó, 오늘날 루마니아 키케우-코라비아)를 공략했다.

1322년, 달마티아의 두 도시인 시베니크트로기르가 카로이의 봉신인 믈라덴 슈비치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두 도시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믈라덴의 친형인 파바오 2세 슈비치를 포함한 많은 크로아티아 영주들도 믈라덴에게 등을 돌렸다. 카로이는 그해 9월 크로아티아로 진군해 크닌에서 믈라덴에 반대하던 영주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믈라덴은 자신을 도우러 온 왕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찾아뵈었지만, 카로이는 그가 영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이런 일이 생겼다는 이유로 체포했다.

이리하여 헝가리를 그동안 지배하던 대귀족들을 모조리 제압함으로써 왕권을 카르파티아 산맥도나우 강 하류 사이의 헝가리 전역에 떨칠 수 있게 된 카로이는 1323년 상반기에 수도를 왕국의 중앙에 있는 비셰그라드로 천도했다. 같은 해, 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 공작들은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카로이에게 병력 지원을 받는 대가로 지난 수십년간 지배했던 프레스부르크를 넘겼다. 1325년, 카로이는 그동안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던 슬라보니아를 왕실에 귀속시키고 심복 아코시 믹치(Ákos Mikcs ?~1343)를 슬라보니아 반(Ban, 특정 지역의 최고 행정관)으로 세웠다. 믹치는 헝가리 정부의 통제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크로아티아를 침공했지만, 1326년 크로아티아 영주들 중 한 사람인 이반 넬리피치에게 패배했다. 결국 크로아티아 지역 만은 카로이의 치세 동안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났다. 바보니치와 쾨세그 가문은 크로아티아의 패전으로 왕실군의 위세가 꺾인 틈을 타 1327년 반란을 일으켰지만 곧 진압되었고, 카로이는 반란에 대한 보복으로 슬라보니아와 트란스다뉴비아의 요새 8개를 몰수했다.

카로이는 대귀족들이 그동안 불법적으로 취득한 왕실 재산을 철저히 조사하고 이를 강제 환수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특정 기간 동안 해당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가질 권한"을 주면서도 그것을 영원히 소유하지 못하게 했다. 여기에 더해 교황만이 주교 선임권을 가질 수 있다는 교령을 무시하고 헝가리의 고위 성직자들을 마음대로 임명했다. 당시 교황청은 아비뇽 유수로 인해 프랑스 왕국에 예속된 터라 카로이의 이러한 행동에 어떠한 제지도 하지 못했다.

1326년, 카로이는 성 지외르지 훈장을 제정하고 자신만 따르는 세속적인 기사단을 창설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마상창시합을 개최하고 "왕의 수행원", "왕의 기사"라는 새로운 직책을 설립했다. 여기에 더해, 충직한 신하들에게 투구 문장을 수여하고 특별대우를 해줬다. 그의 치세 동안 동전 주조, 관세, 소금 독점으로 인한 왕실 수입을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행정 기관들이 각지에서 설립되었다. 또한 카로이는 1327년 새로 문을 연 광산에서 추출한 금의 3분의 1을 광산이 발견된 땅의 소유자에게 넘긴다고 선언했다. 이에 사람들이 금광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면서, 쾨르뫼츠바녀(현재 슬로바키아 크렘니차), 너지바녀(현재 루마니아 바이아마레), 어러뇨슈바녀(현재 루마니아 바이아 데 아리에슈) 등 여러 곳에서 금광이 새로 개발되었다. 그는 이를 토대로 금화를 대거 주조할 수 있었고, 자연히 헝가리의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서 국고가 풍부해지자, 카로이는 군대를 강화한 뒤 대외 원정에 착수했다. 1328년 여름, 보헤미아 왕 요한 1세와 연합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레이타 강둑에서 적군을 격파했다. 1328년 9월 21일, 오스트리아의 세 공작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오토는 헝가리와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프레스부르크와 무러쾨즈(현재 크로아티아 메지무레주)의 영유권을 헝가리에게 넘겼다. 1329년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가 파견한 세르비아군이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포위했지만, 카로이가 파견한 구원군에게 패퇴했다.

1329년 말, 카로이의 장인이자 폴란드 왕국 국왕 브와디스와프 1세보헤미아 왕국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튜튼 기사단 연합군에게 패배한 뒤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지미에시 왕자를 헝가리로 보냈다. 카지미에시는 카로이의 궁정에 머무는 동안 카로이의 아내인 폴란드의 엘즈비에타의 시녀 클라라 자(Clara Záh)에게 외설스러운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클라라 자의 아버지 펠리키안 자(Felician Záh)는 딸이 모욕당하는 와중에 왕족들이 만류하지 않는 것에 격분했고, 그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1330년 4월 17일, 펠리키안 자는 왕궁 식당에 칼을 들고 난입하여 카로이와 왕비의 오른손에 상처를 입힌 뒤 카로이의 두 아들 러요시와 언드라시를 죽이려 했다가 왕실 근위대에게 사살되었다. 클라라를 제외한 펠리키안 자의 아이들은 고문을 당해 죽었고, 클라라는 입술과 손가락 여덟 개가 잘린 뒤 말에 묶인 채 여러 마을에서 조리돌림 당했다.

1330년, 왈라키아 공국프린스 바사라브 1세가 헝가리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소식을 접한 카로이는 그해 9월 왈라키아로 쳐들어가 세베린(오늘날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 세베린) 요새를 점령한 뒤 바사라브 1세가 협상 요청을 거부하고 그가 숨은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Curtea de Argeș)로 진군했다. 그러나 적군이 청야 전술을 사용하는 바람에 식량을 구하기 어렵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바사라브 1세와 휴전 협약을 맺고 철수길에 올랐다. 1330년 11월 9일 카르파티아 산맥 남부를 가로지르는 좁은 통로를 행진하던 헝가리 왕실군은 포사다에서 왈라키아인의 습격을 받았다. 카로이는 데시데리우스 헤데르바리(Desiderius Hédervári)라는 이름의 기사와 옷을 바꿔 입은 후 전장에서 탈출했다. 데시데리우스는 카로이로 자처하며 적의 시선을 잡아끌면서 끝까지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카로이는 왈라키아 침공을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고, 왈라키아는 헝가리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폴란드 쪽으로 눈길을 돌린 카로이는 보헤미아-튜튼 기사단 연합군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는 폴란드에 증원군을 보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얀 루쳄부르스키가 중재를 요청하자, 그는 기꺼이 받아들여 폴란드와 보헤미아가 1332년에 평화 협약을 맺게 해줬다. 한편, 교황청이 사절을 보내 교황들의 곤궁한 처지를 호소하며 십일조를 거둬들이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카로이는 교황청이 징수한 돈의 3분의 1을 자신에게 주는 대가로 받아들였다.

이후 내치에 전념하고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데 힘을 기울이던 그는 말년에 중병에 걸려서 대외 활동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1340년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헝가리를 공격해 난도르페헤르바르를 함락했지만, 몸져누워 있던 그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1342년 7월 16일 비셰그라드에서 눈을 감았다.


2.4.2. 러요시 1세(1342년 ~ 1382년)[편집]


1342년 아버지 카로이 로베르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러요시 1세는 즉위 직후 새로운 토지 보조금 제도를 도입했다. 왕실로부터 토지를 수여받은 자의 형제자매와 다른 친적들은 토지를 물려받을 수 없으며, 아들이 없으면 딸이 아버지로부터 토지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또한 토지 소유자들은 그곳에서 일하는 농노들에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1342년 9월, 커로이 로베르트 왕의 최측근이었던 드루게트 빌모시(Druget Vilmos 1300~1342)가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영지를 형제인 미클로시에게 물려줬다. 그러나 러요시는 새 법을 적용해 토지를 몰수했다.

러요시는 라코비치 가문을 무척 총애했다. 이 가문에서 그의 치세 동안 고위직을 맡은 인물은 총 8명이었다. 이 중 라코비치 언드라시가 가장 큰 신임을 받아 헝가리 왕실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1342년 말 또는 1343년 초, 언드라시는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해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카로이 1세 치세 말기에 빼앗아갔던 모에시아의 바나트를 탈환했다.

그러던 1343년 1월 20일 나폴리 왕국 국왕 로베르토[15]가 사망했다. 로베르토는 유언장에서 손녀 조반나 1세를 유일한 후계자로 지명하고, 러요시의 남동생이자 조반나 1세의 남편인 언드라시의 상속권을 배제했다. 이에 러요시는 동생이 상속권을 되찾게 해주기로 마음먹고, 모라비아의 카를에게 사절을 보내 나폴리 왕국을 공동으로 압박하기로 했다. 또한 어머니 엘즈비에타는 1343년 여름에 막대한 금과 은을 가지고 나폴리로 가서 7개월 동안 조반나 1세와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언드라시가 나폴리의 공동 왕이 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러요시는 세금 납부를 거부한 에르데이의 작센인들을 상대로 원정을 개시해 1344년 여름에 이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일찍이 아버지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기고 헝가리로부터 독립한 왈라키아 공국의 지배자 바사라브 1세를 응징하려 하자, 바사라브 1세는 위협을 느끼고 아들 니콜라스 알렉산데르를 그에게 보내 봉신을 자처했고, 그는 이에 만족하여 수도로 귀환했다. 이리하여 왈라키아에 대한 헝가리의 종주권은 명목상이나마 복원되었다. 러요시는 여세를 몰아 1344년 12월 기독교를 믿지 않는 리투아니아인을 상대로 십자군 원정을 감행했다. 이 원정에 보헤미아 왕 얀 루쳄부르스키, 모라비아의 카를, 부르봉의 피에르 1세, 에노의 기욤 2세도 가담했다. 십자군은 빌뉴스를 포위 공격했지만, 리투아니아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극복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1345년 2월 말, 헝가리로 돌아온 러요시는 자기가 없는 틈을 타 에르데이와 세폐세크(Szepesség)[16] 일대를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한 킵차크 칸국을 응징하고자 라코비치 언드라시를 파견했다. 언드라시는 킵차크 칸국의 영역으로 쳐들어가서 적군을 상대로 뼈아픈 타격을 안긴 뒤 각지를 약탈한 후 귀환했다. 그해 4월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와 모라비아의 카를이 전쟁을 벌이자, 그는 일전에 맺은 합의에 따라 카지미에시 3세를 지원했다.

1345년 6월, 러요시는 크로아티아로 진군했다. 당시 크로아티아는 이반 넬리피치가 카로이 1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이래 헝가리의 직접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있었다. 러요시가 쳐들어왔을 때 이반 넬리피치는 이미 죽었고, 그의 미망인 블라디슬라바 쿠르자코비치(Vladislava Kurjaković)와 아들 이반 넬리피치(Iván Nelipčić)는 도저히 대적할 도리가 없다고 여기고 항복했다. 다른 크로아티아 귀족들도 러요시가 크로아티아에 있는 동안 앞다투어 귀순했다. 그동안 베네치아 공화국의 압제에 시달리던 자다르 역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베네치아 총독을 몰아냈다.

크로아티아 원정을 마치고 수도로 귀환한 러요시는 1345년 9월 18일, 남동생 언드라시가 아베르사(Aversa)에서 암살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그는 조반나 1세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언드라시를 죽였다고 확신하고,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남편을 살해한 여왕을 폐위시키고 언드라시의 아들(칼라브리아 공작 카를로 마르텔)을 나폴리 국왕으로 세우려 하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조카의 섭정을 맡겠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교황이 언드라시 암살 사건에 대해 조사하지 않자, 러요시는 나폴리 왕국의 본토인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남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에 사절을 보내 헝가리군에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이 자다르를 탈환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하자, 자다르 시민들은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나폴리 왕국과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베네치아와 갈등을 벌일 이유는 없다고 여기고 응하지 않았고, 자다르는 1346년 12월 21일 베네치아에 항복했다. 1347년 4월 24일, 헝가리군 선봉대가 바사리 미클로시(Vásári Miklós ?~1358)의 지휘하에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여러 분견대가 잇따라 이탈리아로 진군했는데, 대부분이 독일인 용병대였다. 이들은 우디네, 베로나, 모데나, 볼로냐, 우르비노, 페루자를 거쳐 라퀼라까지 진격했고, 조반나 1세는 1348년 1월 11일 마르세유로 도주했다.

조반나 1세의 친척인 타란토 공작 로베르트와 두라초 공작 카를로[17]는 러요시를 찾아가 항복 의사를 밝혔다. 러요시는 이들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들의 형제이며 여전히 헝가리에 맞서고 있는 타란토의 필리포와 두라초의 루도비코를 설득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이 시키는 대로 형제들을 설득한 뒤 함께 귀순하자, 러요시는 태도를 싹 바꿨다. 그는 남동생 언드라시가 살해된 일에 대해 그들의 책임을 추궁하며 온갖 비난을 퍼붓고 현장에서 체포했다. 다음날인 1348년 1월 23일, 두라초 공작 카를로는 러요시 1세의 명령에 따라 참수되었다. 다른 인사들은 러요시의 어린 조카 카를로 마르텔과 함께 헝가리로 이송되었다.

1348년 2월, 러요시는 나폴리로 진격했다. 나폴리 시민들이 공물을 바치겠으니 군대를 입성시키지 말고 그와 수행원들만 도시에 들어와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공물을 더 바치지 않는다면 자신의 병사들이 도시를 철저히 약탈할 것이라고 위협하며 거절했다. 그는 역대 나폴리 왕들의 칭호인 "시칠리아의 예루살렘의 왕, 풀리아 공작과 카푸아 공작"을 왕호에 덧붙였고, 여러 요충지에 용병들을 주둔시키는 등 남부 이탈리아를 자국의 영역으로 확고히 하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냈다. 여기에 동생의 죽음에 연루된 모든 공범을 잡기 위해 의심되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처음에 러요시에게 복종했던 이탈리아 귀족들은 그의 이같은 강압 정책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켰고, 교황 클레멘스 6세는 헝가리가 나폴리 왕국을 차지해버리면 너무 강해져서 교황령까지 위협할 것을 우려해 그가 나폴리를 통치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급기야 추기경 회의를 소집한 뒤 조반나 1세의 남편 살해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러요시 1세는 더 많은 병력을 이탈리아에 상륙시켜서 이탈리아 귀족들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때마침 중세 흑사병이 돌면서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가자 어쩔 수 없이 1348년 5월 헝가리로 철수했다. 그는 울리히 볼프하르트(Ulrich Wolfhardt)를 나폴리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울리히는 조반나 1세가 9월에 나폴리로 귀환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1348년 8월 5일 베네치아와 8년간 휴전을 맺기로 합의한 러요시는 1349년 말 에르데이의 보이보드 러크피치 이슈트반(Lackfi István 1305~1353)이 이끄는 새로운 헝가리군을 나폴리로 파견했다. 그들은 카푸아, 아베르사 등 여러 요새를 파괴했지만, 독일 용병들이 도중에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헝가리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흑사병이 헝가리에 도래하면서 많은 이들이 사망했고, 급기야 왕비 마르케타마저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러요시 역시 흑사병에 걸렸지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이어가는 건 무리라고 여긴 러요시는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조반나 1세를 폐위한다면 나폴리 왕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그만두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교황이 제안을 거부하자, 그는 1350년 4월 나폴리로 친정했다. 그는 바를레타(Barletta)에서 용병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각지를 진군하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해 누구도 감히 원정을 방해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민중은 이에 두려움을 품긴 커녕 격렬하게 저항했고, 원정은 갈수록 힘겨워졌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했고, 요새를 공략할 때 친히 사다리를 타고 기어올라갈 정도로 분투했다. 8월 3일 나폴리 왕국의 핵심 요새인 아베르사가 함락되자, 조반나 1세는 또다시 나폴리에서 마르세유로 망명했다.

그러나 아베르사를 공략하던 중 왼쪽 다리에 화살이 박혀 중상을 입은 데다, 주민들의 저항이 갈수록 심해지고 군자금이 바닥나서 더 이상 원정을 이어갈 수 없었던 러요시는 헝가리로 철수했다. 그 후 러요시와 조반나 1세의 남편인 루이지(루이지 1세)는 교황청의 중재에 따라 6개월간 휴전을 맺기로 했다. 교황청은 러요시에게 조반나 1세가 언드라시 암살 사건에 얼만큼 관여했는지를 다시 조사하겠다고 약속했고, 러요시는 헝가리로 끌고 갔던 공작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30만 플로린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살레르노의 공작이자 산탄젤로의 영주라고 칭하며, 조부인 카로이 마르텔 이래로 나폴리 왕국에 지분이 있음을 과시했다.

나폴리 왕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한 러요시는 1351년 6월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의 요청에 따라 헝가리군을 이끌고 크라쿠프로 진군했다. 그는 그곳에서 카지미에시 3세와 합세한 뒤 루테니아 왕국의 여러 도시들을 공략한 리투아니아인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카지미에시 3세가 병에 걸려 후방에 후송되면서, 그가 폴란드-헝가리 연합군의 유일한 사령관이 되었다. 그해 7월, 러요시는 리투아니아 대공 켕스투티스(Kęstutis)[18]를 공격했다. 이에 켕스투티스는 8월 15일 그에게 사절을 보내 헝가리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형제들과 함께 부더에서 세례를 받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켕스투티스는 폴란드-헝가리 연합군이 철수한 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러요시는 켕스투티스를 징벌하기 위해 재차 공세를 개시했지만, 그의 원정에 참여한 프워츠크 공작 볼레스와프 3세가 리투아니아군의 습격으로 전사하면서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부더로 철수했다. 이때 교황 사절들이 그를 찾아와서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을 정벌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351년 말 의회를 소집했지만, 귀족들은 거듭된 전쟁에 지친 데다 막대한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들의 재산을 갈취하는 그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러요시는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1222년 언드라시 2세가 귀족들의 특권을 공인한 금인칙서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단, 아들을 두지 못한 귀족들이 후계자를 임의로 결정하는 것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대신, 남자 후손이 없는 귀족의 재산을 친척에게 물려주고, 남자 친척이 없으면 왕실에 넘기게 했다.

1352년 3월, 러요시는 벨츠(Belz)를 포위 공격하던 카지미에시 3세와 합류해 성공적으로 함락시켰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대공 알기르다스(Algirdas)[19]가 타타르 용병들을 대규모로 고용해 포돌레로 쳐들어오자, 러요시는 본국이 침탈당할 것을 우려해 헝가리로 귀환했다. 교황 클레멘스 6세는 그해 5월에 리투아니아와 타타르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고, 러요시가 향후 4년간 헝가리 교회 수입에서 십일조를 징수할 권리를 승인했다. 그러면서 헝가리에 인접한 이교도들과 교회 분열주의자들의 땅을 점령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에 고무된 러요시는 1354년 4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킵차크 칸국을 향한 원정을 개시했다. 헝가리군이 킵차크 칸국에 밀려와서 각지를 약탈하고 파괴하자, 자니베크 칸은 두려움을 느끼고 다시는 리투아니아인들을 돕지 않고 헝가리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조건하에 러요시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후 킵차크 칸국은 헝가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러요시는 여세를 몰아 세르비아 왕국을 침공했다. 헝가리군의 강력한 전투력에 밀린 스테판 두샨은 교황의 우위를 인정하겠다고 밝혔고, 러요시는 이에 만족하며 수도로 귀환했다. 1355년, 러요시는 리투아니아에 맞서는 카지미에시 3세에게 원군을 보내는 한편 스위스 서약 동맹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20]에게도 보조군을 보냈다. 이 무렵 베네치아 대표단이 찾아와서 달마티아가 베네치아의 영토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6,000 내지 7,000 황금 두카트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러요시는 달마티아 탈환 계획을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베네치아를 협공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2세와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니콜라우스와 동맹을 맺고, 크로아티아 영주들을 부추겨 달마티아 요새인 킬리스(Klis)를 공략했다.

1356년 여름, 러요시는 베네치아를 급습해 7월 27일 트레비소를 포위했다. 그는 가을에 돌아갔지만, 헝가리군은 포위를 이어갔다. 얼마 후 교황 인노첸시오 6세가 베네치아와 헝가리의 평화 협약을 중재했다. 교황은 러요시를 "교회의 기수"로 임명하면서, 교황령에서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영주들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했다. 러요시는 러크피치 미클로시에게 분견대를 맡겨 교황을 돕게 한뒤, 자신은 1357년 7월 달마티아로 진군해 스플리트, 트로기르, 시베니크를 별다른 저항 없이 공략하고 여세를 몰아 자다르를 탈환했다. 1358년 2월 보스니아 통치자 트브르트코 1세(Tvrtko I)는 달마티아에 가지고 있는 모든 영토와 여러 섬들을 헝가리에게 넘기고 러요시를 주권자로 섬기겠다고 맹세했다. 뒤이어 라구사 공화국도 러요시의 종주권을 받아들였고, 달마티아의 여러 도시들은 매년 공물과 해군을 제공하며는 대가로 자치권과 무역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이렇듯 러요시가 주변 국가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공세를 개시하던 와중인 1355년 12월 20일, 1346년부터 세르비아 제국차르를 칭하고 발칸 반도에 위세를 떨쳤던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급사했다. 뒤이어 차르에 오른 그의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는 "강인한 왕"이라는 평판을 받으며 만인의 존경과 두려움을 샀던 부친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외모가 훤칠하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좋은 군인이 아니었고, 현명한 정치가도 아니었으며, 아버지가 애써 일궈낸 제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도 없었다. 일찍이 두샨에 의해 각지의 데스포티스로 세워졌던 신하들은 유약한 차르의 등극을 틈타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고, 세르비아는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러요시는 이 때를 틈타 세르비아를 몰아붙이기로 하고, 1359년 세르비아를 쳐들어갔다. 스테판 우로시 5세가 전투를 회피하자, 그는 세르비아 북부의 여러 마을을 약탈한 뒤 귀환했다.

1360년경, 러요시는 헝가리 왕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거부한 자들은 강제 추방되었고, 그들의 부동산은 몰수되었다. 다만 추방된 유대인들은 개인 자산을 가지고 갈 수 있었고 대출금을 회수할 수 있었다. 1361년 8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는 러요시의 동맹자인 아퀼레이아 총대주교를 상대로 동맹을 맺었다. 헝가리 서쪽 국경에 강력한 연합이 결성되는 것을 염려한 러요시는 지난날 자신과 맞섰던 조반나 1세의 남편인 루이지 1세에게 형제 중 한 명을 부더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뒤, 그 형제를 데리고 루돌프 4세와 총대주교간의 화해를 중재했다.

이후 카를 4세에게 사절을 보내 화해를 주선했지만, 황제는 러요시의 어머니를 창녀라고 모욕했다. 어머니가 모욕당한 것에 분노한 러요시는 군대를 총동원하여 트렌첸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동맹을 맺어뒀던 이들이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데다 신성 로마 제국과 정면 대결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카지미에시 3세의 중재에 따라 카를 4세와 평화 협상을 벌였다. 1363년 5월 8일, 양자는 우헤르스케흐라디슈테(Uherské Hradiště)에서 평화 협약을 맺고 화해했다.

1363년 3월 31일, 교황 우르바노 5세는 키프로스의 피에르 1세의 요청에 따라 지중해의 무슬림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했다. 이때 우르바노 5세는 러요시에게 십자군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면서, 3년간 헝가리 교회 수입에서 십일조를 거둬들이는 권리를 승인했다. 하지만 러요시는 주변국과의 마찰이 심했기에 군대를 섣불리 보내지 못했다. 1364년 9월 키프로스의 피에르 1세가 크라쿠프에 방문해 러요시를 비롯한 12명의 유럽 군주들에게 십자군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러요시는 원조를 약속했지만 이를 이행하지 못했다. 이후 유대인이 추방된 뒤 국가 경제가 악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러요시는 1364년 유대인이 헝가리로 돌아오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1365년 2월, 러요시는 테메슈바르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는 당초에 공물을 바치기를 거부하는 왈라키아 공국을 응징하려 했지만, 왈라키아 공작 블라디슬라브 블라이쿠(Vladislav Vlaicu 1325~1377)가 복종 의사를 밝히자 방향을 바꿔 불가리아 쪽을 공략하기로 했다. 당시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는 1355년 후계자로 정했던 미하일 아센 4세가 흑사병에 걸려 사망하자 막내 아들 이반 시슈만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에 내심 자신이 후계자가 되리라 여겼던 또다른 아들 이반 스라치미르가 반발하여 영지로 삼고 있던 비딘에서 외교권을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중앙 정부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등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러요시는 그런 그에게 비딘의 종주권을 자신에게 넘긴다면 불가리아의 왕으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스라치미르가 거절하자, 러요시는 1365년 5월 1일 비딘을 침공해 6월 2일 함락시키고 스라치미르를 사로잡았다. 그는 즉시 스라치미르를 포함한 포로들이 가톨릭세례를 받도록 강요했다.

1366년 초, 동로마 제국 황제 요안니스 5세가 부더에 있던 러요시를 찾아와서 발칸 반도에 진출하고 있는 오스만 베이국을 물리쳐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는 가톨릭과 정교회의 통합을 추진하겠다고 약속했고, 러요시는 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5세가 황제가 약속을 이행하기 전에 원군을 보내지 말라고 권고했고, 요안니스 5세가 정교회 성직자들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교회 통합을 이루지 못했기에 헝가리군이 투입되는 일은 없었다.

한편, 러요시는 왕국 내 이교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데 사력을 다했다. 그의 치세 동안 쿠만인들의 개종을 이뤄냈고, 비딘을 공략한 뒤 정교회 신자인 불가리아인을 개종시키기 위해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을 그곳에 대거 파견했다. 여기에 더해 1366년 왕국 내 모든 세르비아인 사제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고 세례를 다시 받게 하라는 칙령을 반포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수십 개의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는데, 특히 프란치스코회와 바오로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는 1367년 페치(Pécs) 신학 대학교를 설립해 헝가리 성직자들을 양성하려 했다. 그러나 대학은 재정난으로 인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다가 1390년 문을 닫았다.

1368년, 왈라키아 공국의 블라디슬라브 블라이쿠가 헝가리를 상대로 반기를 든 뒤 이반 시슈만과 동맹을 맺고 비딘을 포위했다. 러요시는 이에 맞서 그 해 가을에 도나우 강 하류로 진군하면서 에르데이 보이보드 러크피치 미클로시에게 왈라키아를 침공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알로미차 강 계곡을 행진하던 중 왈라키아인들의 습격을 받고 괴멸되었고, 미클로시는 가까스로 전장을 탈출했다. 이 소식을 접한 러요시는 본군을 이끌고 왈라키아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고, 블라디슬라브는 1369년 여름에 귀순했다. 이후 러요시는 이반 스트라치미르를 비딘의 통치자로 복위시켰고, 스트라치미르는 그 대가로 러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두 딸을 인질로 보냈다.

1360년대 후반부터 나병으로 의심되는 피부병을 앓기 시작한 러요시는 가톨릭에 더욱 깊이 빠졌다. 그는 매일 기도를 드리고 종교적 사색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370년 11월 5일 카지미에시 3세가 사망한 뒤 11월 17일 폴란드 국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헝가리에 전력을 쏟고 싶었던 그는 폴란드 공주였던 어머니 엘즈비에타를 폴란드의 섭정으로 세운 뒤 헝가리로 돌아갔다. 이때 폴란드 왕관과 보석들, 그리고 카지미에시의 두 딸 안나와 야드비가가 헝가리로 옮겨졌기에, 폴란드인은 자국이 헝가리의 속국이 되어버렸다며 불만을 품었다.

1371년 9월 26일, 오스만 베이군마리차 강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을 궤멸시켰다. 이에 세르비아 영주들 중 한 명인 라자르 흐레벨야노비치는 러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튀르크군에 맞설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역시 러요시에게 튀르크에 맞서 싸우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도 밀라노 공작 베르나보 비스콘티(Bernabò Visconti)가 교황령을 위협하고 있으니 이를 격퇴하기 위해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에 더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파도바 공국으로부터 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어느 쪽을 먼저 도울 지를 고심한 끝에 러크피치 미클로시에게 파도바를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베네치아군은 1373년 9월 23일 트레비소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하고 미클로시를 포로로 잡았고, 러요시는 어쩔 수 없이 베네치아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1373년 가을, 폴란드 귀족들이 엘즈비에타의 통치에 집단 반발해 독립할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크라쿠프로 가서 이들과 1년간 협상한 끝에 1374년 9월 17일 폴란드 귀족들이 왕에게 지불하는 세금을 대폭 줄이고 폴란드군을 외국에 보낼 시 보수를 약속했다. 그 대가로 귀족들로부터 자신의 딸들이 폴란드를 상속받는 것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피아스트 왕조의 일원이었던 그니에프코보 공작 브와디스와프가 폴란드 국왕을 자칭하면서 러요시에 맞섰다. 그는 브워츠와베크(Włocławek), 이노브로츠와프(Inowrocław), 즈워토리아(Złotoria) 등지를 빠르게 확보했다. 러요시는 즉각 군대를 이끌고 그를 공격했고, 브와디스와프는 지지자들에게 배신당하여 세력을 빠르게 상실하자 기사 울리히 폰 오스텐이 소유한 국경 도시 드레즈덴코로 피신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는 울리히와 용담공 필리프가 보낸 부르고뉴 공국 군대의 지원에 힘입어 러요시에 계속 저항했다.

1375년 5월, 왈라키아의 새로운 통치자 라두 1세가 불가리아 차르 이반 시슈만, 오스만 술탄국의 무라드 1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에 대항했다. 그는 왈라키아로 군대를 파견해 왈라키아-불가리아 연합군을 격파하고 세베린 바나트를 공략했다. 그러나 1375년 여름에 왈라키아군이 에르데이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고, 이들과 함께 하던 튀르크군은 바나트를 철저히 약탈했다. 설상가상으로, 리투아니아군이 루테니아 왕국을 석권한 뒤 폴란드로 쳐들어와서 1376년 11월 크라쿠프에 거의 도달했다. 이에 폴란드인들은 크라쿠프에서 엘즈비에타를 상대로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160여 명에 달하는 하인들이 살해당하자, 엘즈비에타는 헝가리로 도주했다. 브와디스와프 역시 공세를 이어가 여러 요새를 공략했다.

러요시는 일단 폴란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하고, 크라쿠프로 가서 폭도들을 처형하고 질서를 재정비한 뒤 브와디슬라프를 몰아붙인 끝에 1377년 3월 브제시치 쿠야프스키(Brześć Kujawski)에서 브와디스와프에게 1만 플로린을 주고 헝가리의 펀논헐머에서 수도원장 직을 맡게 해주는 대가로 폴란드 왕위를 포기하게 했다. 이후 1377년 여름 루테니아로 친정해 리투아니아군을 격파하고 헤움과 벨츠를 공략했다. 이후 옛 루테니아 왕국 대부분 지역을 헝가리 왕국에 합병시켰다. 결국 라트노 공작 페도르, 포돌레 공작 알렉산더르와 보리스 등 리투아니아 공작들은 러요시의 패권을 인정했다.

1377년, 그동안 러요시를 주군으로 섬기던 보스니아의 트브르트코 1세가 왕으로 등극했다. 그가 이를 승인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불분명하다. 1378년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전쟁을 벌이자, 러요시는 제노바를 지원했고 트로기르를 제노바 함대의 정규 기지로 내주었다. 1378년 9월 20일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반기를 든 추기경들이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세우면서 서방교회 대분열 시대가 개막했다. 그는 우르바노 6세를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하고 그를 위해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다.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가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자, 우르바노 6세는 1380년 6월 17일 그녀를 파문하고 러요시의 궁정에 머물고 있던 두라초의 카를로를 나폴리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 카를로는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러요시의 지원을 이끌어낸 뒤 남부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1년 안에 왕국 전역을 장악하고 1381년 8월 26일 조반나 1세의 항복을 받아낸 뒤 카를로 3세로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한편, 러요시는 아메데오 6세의 중재를 받아 베네치아와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1381년 8월 24일 사보이아 백국토리노에서 평화 협약을 맺었다. 베네치아는 달마티아를 포기하고 헝가리에 매년 7,000 플로린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러요시는 테베의 성 바오로의 유해를 부더센틀린치(Budaszentlőrinc)에 있는 바오로 수도원으로 옮기도록 했다.

1382년 건강이 악화된 러요시는 폴란드 고위 성직자들과 영주들을 조욤(Zólyom 현재 슬로바키아 즈볼렌)에 소집한 뒤 딸 마리어와 마리어의 약혼자 지기스문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1382년 9월 10일 너지솜버트에서 사망했고, 세케슈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2.4.3. 앙주 왕조의 몰락(1382년 ~ 1395년)[편집]


1382년 러요시 1세가 사망한 뒤, 그의 남은 딸 중 큰딸 마리어가 왕위에 올랐다. 모후 엘리자베타가 당시 11살이었던 그녀를 대신해 행정부를 관리했다. 엘리자베타는 결정을 내릴 때 궁정백을 맡고 있던 가라이 미클로시(Garai Miklós)에게 의존했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은 여왕의 등극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나폴리 왕국의 국왕이며 이슈트반 5세의 딸 마리어의 외증손인 카를로 3세가 헝가리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카를로 3세는 1380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1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러요시 1세에게 자신을 지원하는 대가로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기에 마리어의 등극에 섣불리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한편, 폴란드 귀족들은 1382년 11월 25일 라돔스코에서 열린 회의에서 러요시 1세의 딸을 왕으로 모시는 것에 다시 한 번 동의를 표했지만 여왕과 그녀의 남편이 폴란드에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여기에 그니에즈노(Gniezno) 대주교 보잔타(Bodzanta)와 날레치 가문은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분가 출신인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 4세를 폴란드 국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엘리자베타는 마리어가 헝가리를 떠나 폴란드로 갔다가는 헝가리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기에, 작은딸 야드비가를 폴란드의 여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1384년 10월 16일, 야드비가는 크라쿠프바벨 대성당에서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

1383년 봄, 브라나(Vrana)의 지도자 팔리스나의 야노시는 마리어와 엘리자베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크로아티아의 반(Ban)인 라코비치 이슈트반이 곧바로 진압군을 이끌고 브라나를 포위했고, 야노시는 보스니아로 도주했다. 브라나 수비대는 11월 4일 항복했다. 이후 엘리자베타는 딸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에 사절을 보내 샤를 6세의 동생이며 지난날 마리어의 언니 커털린과 약혼한 적이 있는 루이와 마리어의 결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협상은 러요시 1세가 생전에 정한 대로 지기스문트와 여왕을 결혼시켜야 한다고 여겼던 헝가리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또한 고위 성직자들은 프랑스인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는 이단적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이유로 프랑스 왕자와 자국 여왕의 결혼에 반대했다. 헝가리에 체류하고 있던 지기스문트는 엘리자베타에게 자신이 마리어의 약혼자임을 상기시키며 결혼을 진행하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하자 1385년 초에 헝가리를 떠났다.

1385년 5월 프랑스 대표단이 헝가리를 방문한 후, 마리어는 프랑스 왕자 루이와 약혼했다. 또한 엘리자베타는 루이 왕자와 마리어의 결혼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이슈트반 미클로시를 반역자로 몰아붙이며 해임했으며, 주민들에게 결혼을 반대하는 인사 및 그들의 친척을 지원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이에 팔 호르바티(Pál Horváti) 주교를 비롯한 반 엘리자베타 세력은 1385년 8월 카를로 3세에게 헝가리로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지기스문트는 사촌인 모라비아의 요프스트(Jobst)와 프로코프(Prokop)와 함께 헝가리 북부로 쳐들어가서 포조니를 점령하며 헝가리 정부를 압박했다.

1385년 9월, 카를로 3세는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들의 요청에 따라 달마티아의 센(Senj)에 상륙한 뒤 자그레브로 진군했다. 이에 당황한 엘리자베타는 지기스문트를 부더로 초청한 뒤 그해 10월 마리어와 지기스문트의 결혼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지기스문트는 공동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실권도 얻지 못했다. 이에 화가 난 지기스문트는 부더를 떠나버렸고, 카를로 3세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부더로 행진했다. 헝가리 귀족들이 대거 카를로에게 귀순하자, 엘리자베타는 별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1385년 12월 초 딸 마리어와 함께 그를 마중한 뒤 함께 부더에 들어갔다.

이후 마리어는 카를로가 자신을 죽일 것을 우려해 12월 중순에 퇴위했고, 카를로는 처음에는 총독이라는 칭호를 칭했지만 의회에서 왕으로 등극해줄 것을 요청하자 1385년 12월 31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카로이 2세로서 헝가리 왕으로 등극했다. 카로이 2세는 마리어와 엘리자베타를 감금하지 않고 두 사람이 부더의 왕궁에서 살 수 있게 해줬다. 그러나 엘리자베타는 어떻게든 딸이 왕위를 되찾아야 한다고 여기고 가라이 미클로시(Garai Miklós)와 함께 카로이 2세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왕이 마시는 음료수를 담은 컵을 가지고 다니는 시종 포르가치 벌라주(Forgách Balázs)에게 왕을 죽여주면 기메스(Gimes, 현재 슬로바키아 옐레넥)를 주겠다고 설득했다. 벌라주는 이에 눈이 돌아가서 엘리자베타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1386년 2월 7일, 카로이 2세는 엘리자베타의 요청에 따라 부더 궁정을 방문했다. 이후 엘리자베타와 카로이 2세가 대화를 나누던 중, 벌라주가 둔기로 왕의 머리를 가격해 중상을 입혔다. 카로이는 비셰그라드로 실려간 뒤 2월 24일에 사망했다. 마리어는 곧바로 복위했고, 엘리자베타는 전국에 "마리어 여왕께서 신성한 왕관을 되찾았다"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얼마 후, 팔 호르바티를 비롯한 반 엘리자베타 세력이 카로이 2세의 아들 라슬로[21]를 새 왕으로 받들겠다고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386년 4월, 지기스문트와 그의 이복형이자 독일왕 겸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4세가 헝가리를 침공했다. 엘리자베타와 마리어는 두 사람과 만나서 협상한 끝에 그해 5월 초 마리어가 지기스문트의 아내임을 공인하고 지기스문트는 바그 강 서쪽의 땅을 접수한 뒤 모라비아의 요프스트와 프로코프에게 넘기기로 했다. 지기스문트가 협상 결과에 만족하여 보헤미아로 돌아간 뒤, 엘리자베타는 라슬로를 지지하는 헝가리 남부 지역을 찾아가서 딸을 여왕으로 받들어달라고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1386년 7월 15일, 엘리자베타, 마리어 모녀는 가라이 미클로시와 소수의 수행원들과 함께 자코보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이 고르자니에 이르렀을 때, 호바트 야노시와 그의 가신들이 습격했다. 마리어 모녀의 수행원들과 가라이 미클로시는 항전했지만 모조리 제압되었다. 이후 포르가치 벌라주와 가라이 미클로시는 참수되었고, 그들의 머리는 여왕의 마차에 던져졌다. 마리어 모녀는 자그레브 주교령의 곰네크(Gomnec) 요새 지하감옥에 감금되었다가 다시 아드리아 해 연안의 노비그라드(Novigrad) 성으로 끌려갔다. 이후 반란자들은 라코비치 이슈트반을 라슬로 왕의 궁정백으로 선출하고 지기스문트를 섭정으로 삼기로 했다. 지기스문트는 이 소식을 접한 뒤 군대를 끌어모아 1387년 1월에 슬라보니아를 침공했지만 반란군을 물리치지 못했다. 얼마 후, 호바트 야노시는 엘리자베타를 끌어낸 뒤 마리어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목을 졸라 죽였다.

이렇듯 헝가리가 혼란에 빠져 있는 틈을 타, 폴란드군이 쳐들어와서 루테니아 왕국을 공략했다. 지기스문트는 1387년 3월 31일에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을 칭했고, 그의 지지자 중 한 사람인 크르크의 이반은 조반니 바르바리고(Giovanni Barbarigo)가 지휘하는 베네치아 공화국 함대의 도움으로 노비그라드 성을 포위했다. 1387년 6월 4일, 그들은 노비그라드 성을 함락시키고 마리어를 해방시켰다. 그 후 지기스문트와 마리어가 헝가리의 공동 군주가 되었지만, 마리아에게 주어진 권력은 미미했다.

카로이 2세의 아들이자 나폴리 왕국의 국왕 라디슬라오는 지기스문트의 집권을 받아들이지 않고 크로아티아-달마티아-헝가리 남부 영주들을 포섭해 지기스문트를 상대로 전쟁을 이어갔다. 지기스문트는 이에 맡서 브렌덴부르크를 모라비아의 변경백이자 자신의 사촌인 요프스트에게 저당잡히는 대가로 군자금을 지원받은 뒤 나폴리 왕국 및 반란자들을 상대로 투쟁했다. 그러나 보유한 군사력이 반란군을 압도할 수준이 되지 못하는 데다 보스니아 왕국트브르트코 1세가 반란군을 지원하는 바람에 좀처럼 승기를 잡지 못하자, 막강한 사병과 드넓은 영지를 보유한 치릴레이(Czillei)-가라이(Garai) 가문 연합의 지원을 받는 대가로 왕실 재산의 상당 부분을 양도해야 했다.

1390~1391년, 가라이 미클라시가 이끄는 왕실군이 트브르트코 1세 휘하의 보스니아군을 격파하면서 보스니아 왕국이 반란군을 더 이상 후원하지 못하게 했다. 이후 반란군의 위세는 점차 약화되다가 1394년 7월에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반란군 지도자 호바트 야노시가 사로잡혔다. 지기스문트는 그를 살려주려 했지만, 일전에 어머니를 잔혹하게 죽인 야노시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마리어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처형했다.

1395년 5월 17일, 지기스문트의 아이를 임신중이던 마리어는 부더 숲에서 사냥을 즐기던 중 말이 발을 헛디딛는 바람에 낙마했다. 그녀는 현장에서 아기를 유산한 뒤 곧 숨을 거두었고, 유해는 너지바러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폴란드 여왕이자 그녀의 여동생인 야드비가는 자신이 헝가리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이를 무시하고 지기스문트를 단독 군주로 받들었다. 이리하여 헝가리의 앙주 왕조는 단절되었다.


2.5. 지기스문트(1395년 ~ 1437년)[편집]


지기스문트는 헝가리의 단독 국왕이 된 직후인 1396년 9월 말 오스만 술탄국을 향한 십자군에 참여했으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는 잠시 붙잡혔다가 잠시 붙잡혔다가 첼레 백작 헤르만 2세의 활약으로 간신히 탈출한 다음, 어선을 타고 빠져나가 도나우 강에 있던 베네치아 군선에 올라 크로아티아로 피신했다. 크로아티아에 도착한 지기스문트는 크로아티아의 주요 도시인 크리제브치(Križevci)를 방문한 뒤 자신은 반대자들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시도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서면 보증서를 발표했다. 이에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를 지지하던 라코비치 이슈트반과 추종자들이 그와 만나서 협상하기 위해 크리제브치의 사보르 교회에 찾아왔다. 크로아티아의 법률에는 누구도 무기를 들고 사보르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라코비치와 추종자들은 교회 앞에 무기를 넘기고 예배당에 들어섰고, 라코비치의 사병대는 도시 밖에 주둔했다.

그러나 사보르 내부에서 완전 무장을 한 채 대기하고 있던 지기스문트의 지지자들은 라코비치와 추종자들이 들어오자마자 그들을 에워싼 뒤 니코폴리스 전투 때 왕을 위해 제대로 싸우지 않아 튀르크인들에게 패배했다며 책임을 물었다. 라코비치가 사보르 내에서 완전무장한 것에 따져물으며 맞대응하자, 그들은 검을 뽑아들어 라코비치와 조카 이슈트반, 그리고 추종자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라코비치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도시 밖에 주둔하고 있던 사병대가 도시로 진입하여 지기스문트 지지자들과 시가전을 벌였지만 격퇴되었다.

이후 프로다비치 이슈트반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귀족들이 지기스문트를 잡으려 하자, 지기스문트는 1397년 3월 2일 신하들과 함께 드라바 강을 건너 헝가리로 도주했다. 그 후 헝가리 귀족과 성직자들이 자기 지시에 제대로 따르지 않는 상황에 염증을 느끼고 독일과 보헤미아의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는 데 관심을 돌렸다. 그는 바츨라프 4세를 부추겨서 자신을 신성 로마 제국의 총대리자로 삼게 했다. 그러나 1400년 8월 20일 바츨라프 4세가 선제후들에 의해 독일 왕위에서 물러나고 팔츠 선제후 루프레히트 3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401년 봄, 지기스문트는 모라비아 변경백 요프스트와 상호 상속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자기들의 동의없이 상속 계약을 맺은 것에 분노한 브라나 공작 베베크 임레(Bebek Imre)와 에스테르곰 대주교 야노시가 그해 4월 28일 사병들을 이끌고 지기스문트를 납치한 뒤 부더 성에 수감했다. 이 소식을 접한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4세와 모라비아 변경백 요프스트는 지기스문트를 해방시키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바그 강과 도나우 강 사이로 진군하여 너지솜버트, 프라우엔마르크, 프레스부르크를 공략했다.

지기스문트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헝가리 귀족들은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을 비롯한 독일계 국가의 반발이 거센데다 귀족 내부에서도 폴란드 국왕을 섬기는 것에 반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서 무산되었다. 결국 지기스문트는 1401년 10월 27일 자신을 납치한 자들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헝가리 국왕으로 복위했다. 이후 보헤미아 귀족들이 바츨라프 4세를 상대로 일으킨 반란을 지원하다가 1402년 3월 6일 헤르만 2세와 함께 바츨라프 4세를 프라하의 흐라드친에서 체포한 뒤 에페르딩 근처의 샤운베르크 성으로 이송한 후 보헤미아를 18개월간 통치했다. 그러다가 1403년에 바츨라프 4세를 석방시켜서 보헤미아를 다스리게 했지만, 실권은 본인이 계속 쥐었다.

1403년,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가 재차 헝가리로 쳐들어왔다. 그는 자다르를 공략한 뒤 헝가리 귀족들에게 자신을 왕으로 받들라고 요구했다. 많은 귀족들이 이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지기스문트는 치릴레이-가라이 연합 가문의 지원과 독일인 용병들의 분투에 힘입어 라디슬라오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라디슬라오는 달마티아로 후퇴했다가 나중에는 그곳의 도시들을 베네치아 공화국에 100,000 두카트에 팔고 떠났다. 이후에도 헝가리 각지에서 발발한 반란에 시달리던 지기스문트는 부더에 소집된 의회에서 자신을 적대하는 자들을 사면하겠다고 선언해 내전을 어느정도 잠재웠다.

1404년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4세가 27세의 나이에 이질로 사망했다. 후계자인 알브레히트 5세는 겨우 7살이었기 때문에 삼촌 빌헬름이 후견인을 맡았다. 빌헬름 공작이 라디슬라오의 누이인 조반나와 결혼하고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4세와도 동맹을 맺으면서, 지기스문트는 또다시 압박을 받았다. 그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1405년 헤르만 2세의 막내딸 바르바라와 결혼함으로써 당시 상당한 군사력과 부를 갖추고 있던 첼레 백국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이탈리아 중부 도시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라디슬라오가 중부 이탈리아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게 했다. 1407년 보스니아 일대가 라디슬라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자신에게 반기를 들자, 지기스문트는 5만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여 보스니아로 진군해 1408년 도보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보스니아 귀족 200여 명을 학살했다.

도보로 전투에서 승리한 뒤, 지기스문트는 개인 기사단인 드라곤 기사단을 창설했다. 이 기사단의 구성원들은 가라이 미클라시, 첼레 백작 헤르만 2세, 스티보르츠의 스티보르, 피포 스파노 등 그의 정치적 동맹자들과 추종자들이었다. 이들은 서로 교역할 때 관세를 매기지 않았고, 외국 상품에 대해 공동으로 관세를 부과했으며, 국가 전체의 무계 단위와 척도를 표준화함으로써 교역을 장려했다. 또한 독일인이 자신의 영역에 이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이들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맡겼다.

한편, 지기스문트는 오스만 술탄국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세르비아 공작 스테판 라자레비치를 봉신으로 삼고 세르비아 북서부와 헝가리 남부 일대를 수호하는 임무를 맡겼다.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1427년 사망할 때까지 지기스문트의 충실한 봉신으로서 오스만 술탄국의 공세를 저지했고, 그의 뒤를 이은 게오르게 브란코비치도 지기스문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난도르페헤르바르를 지기스문트에게 돌려줬다. 그 덕분에, 지기스문트는 헝가리 남쪽 국경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그 후 헝가리는 지기스문트의 영지 중에서 유일하게 안정적으로 운영되었고, 지기스문트가 후스 전쟁을 치를 때 많은 헝가리 장병들이 보헤미아로 투입되어 전쟁을 치렀다.


2.6. 내우외환(1437년 ~ 1458년)[편집]


1437년 지기스문트가 아들을 얻지 못한 채 사망한 후, 독일왕이자 지기스문트의 사위인 알브레히트 2세가 헝가리 왕이 되었다. 그러나 지기스문트 사후 왈라키아 공국이 오스만 술탄국에 붙어버렸고, 튀르크군은 왈라키아군의 지원에 힘입어 1439년 헝가리 남부로 쳐들어가 그 일대를 초토화했다. 알브레히트 2세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남하하다가 1439년 10월 27일 네슈멜리에서 이질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임신한 아내가 아들을 낳으면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를 물려주겠으며, 아내와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5세에게 섭정을 맡기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1439년 10월 27일 알브레히트가 사망한 후, 오스만 술탄국의 헝가리 침공을 두려워한 헝가리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은 아기를 왕으로 받들라는 유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를 왕으로 받들고, 알브레히트 2세의 미망인 엘리자베트에게 브와디스와프 3세와 결혼하라고 제안했다. 엘리자베트는 처음에는 권고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의사로부터 아들을 낳을 거라는 예측을 접하자 남편의 유언대로 집행하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하녀 헬레네 코타너(Helene Kottanner)에게 비셰그라드 성에 있는 성 이슈트반 왕관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헬레네가 왕관을 성공적으로 빼돌려서 가져왔는데, 바로 그 날 엘리자베트는 진통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엘리자베트는 아들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를 낳았고, 에스테르곰 대주교 세치 데네시(Szécsi Dénes 1410~1465)는 아기에게 세례를 주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였던 오스트리아 공국은 갓난아기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알브레히트 2세의 유언에 따라 프리드리히 3세를 섭정으로 지명했다. 보헤미아에서는 첼레 백작 울리히 2세가 이끄는 가톨릭 귀족들이 유언을 집행하려 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권세를 누리던 후스파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엘리자베트는 폴란드에 사절을 보내 헝가리 귀족 가문 대표들이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와 협상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헝가리 귀족들은 단호히 거부하고 1440년 3월 8일 브와디스와프 3세를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울라슬로 1세로 선출했다.

브와디스와프 3세는 엘리자베트에게 자신과 결혼한다면 그녀의 아이가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에서 군림하도록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브와디스와프 3세의 제안을 거부하고 세케슈페헤르바르에 아들을 데려가서 1440년 5월 15일 세치 데네시의 주관하에 즉위식을 거행했다. 첼레 백작이자 엘리자베트의 사촌인 울리히 2세는 아기 대신에 대관식 선서를 낭독하고, 아기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웠다. 6일 후 브와디스와프 3세가 폴란드-헝가리 귀족 연합군을 이끌고 부더에 입성하자,. 엘리자베트는 아들과 함께 쇼프론으로 도주했다.

가라이 라슬로, 브란코비치 주라지, 프리드리히 5세, 첼레 백작 울리히 2세를 포함한 여러 도시와 독일계 군주들은 어린 왕을 지지했지만, 대다수 헝가리 귀족들은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에 맞서려면 아기보다는 성인이 훨씬 낫다고 여겼기에 브와디스와프 3세가 집권하는 편이 낫다고 확신했다. 1440년 6월 29일, 헝가리 의회는 라슬로 5세의 즉위를 무효로 선언했다. 7월 17일 세치 데네시는 압력에 못이겨 헝가리의 초대 국왕인 이슈트반 1세의 무덤에서 가져온 왕관을 브와디스와프 3세의 머리 위에 씌웠다.

엘리자베트는 브와디스와프 3세에 대항하고자 1440년 11월 22일 노이슈타트에서 프리드리히 3세와 협약을 맺었다. 쇼프론을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저당잡혔고, 성 이슈트반 왕관 역시 그에게 넘겼다. 이후 라디슬라우스는 프리드리히 3세의 궁정에서 살았다. 또한 그녀는 체코인 용병대장 얀 이스크라(Jan Jiskra z Brandýsa 1400~1469)에게 커셔를 비롯한 12개 마을을 장악하게 했다. 그러나 1441년 초 블라디미르 우즐라키와 후냐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군이 라슬로 5세 지지를 천명한 적군을 상대로 바트셰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브와디스와프 3세와 휘하 지휘관들은 헝가리 서부와 동부 영토를 장악했지만, 엘리자베트의 추종자들은 에스테르곰, 죄르, 프레스부르크 및 여러 도시들과 함께 헝가리 북부 일대를 계속 장악했다.

1442년 오스만 술탄국의 침략이 가시화되자, 더 이상 내전을 벌일 수는 없다고 판단한 브와디스와프 3세는 그해 12월 13일 기르에서 엘리자베트와 만나서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특사 줄리아노 체사리니의 중재 하에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엘리자베트는 브와디스와프 3세를 헝가리 왕으로 인정했지만, 아들의 왕위 계승권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나 3일 후 엘리자베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해버리면서, 라디슬라우스는 고아가 되어버렸다. 라디슬라우스의 헝가리와 보헤미아에서의 통치권은 로쥼베르크의 울리히 2세와 얀 이스크라에 의해 보호되었다. 그러나 헝가리의 대다수 영토는 브와디스와프 3세를 따랐고, 보헤미아 동부는 그를 인정하지 않는 후스파가 지배했다.

그러던 1444년 11월 10일, 브와디스와프 3세가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 술탄국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당시엔 브와디스와프의 생사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헝가리 귀족들은 긴급 회의를 소집한 뒤 그가 1445년 6월 1일 이전에 헝가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라디슬라우스를 국왕으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면서도 어린 왕의 후견인인 프리드리히 5세가 라디슬라우스와 성 이슈트반 왕관을 모두 헝가리로 보내지 않는다면 또다른 왕을 선출하기로 했다.

헝가리 의회는 후녀디 야노시, 우즐라키 미클라시(Újlaki Miklós), 로즈고니 죄르지(Rozgonyi György), 베베크 임레(Bebek Imre), 오르사그 미하이(Ország Mihály), 펀츠러체 센트미클로시(Pancrace Szentmiklósi), 그리고 얀 이스크라 등 7명의 최고 사령관을 선출해 왕국을 통치하게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5세가 헝가리로 쳐들어가 7월 말까지 쾨세그를 포함한 헝가리 서쪽 국경의 12개 요새를 공략했고, 첼레 백국은 슬라보니아를 침공해 1445년 말에 정복했다. 프리드리히 5세가 라디슬라우스를 보내기를 거부하자, 헝가리 의회는 1446년 6월 6일 후녀디 야노시를 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의 섭정으로 선출했다.

1450년 10월 22일,후녀디 야노시는 프리드리히 5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프리드리히 5세가 라디슬라우스가 18세 생일을 맞이할 때까지 후견인이 되는 것에 동의했고, 프리드리히 5세는 후녀디 야노시가 헝가리의 대부분을 통치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귀족들은 성년의 나이가 12세 또는 16세인데 18세는 너무 늦다며 불만을 품었다. 1451년 말 프리드리히 5세가 라디슬라우스를 데리고 로마로 가려 하자, 오스트리아 귀족들이 막으려 들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기어이 라디슬라우스를 데리고 로마로 가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프리드리히 3세는 오스트리아 귀족들로부터 "라디슬라우스의 후견인 노릇을 그만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이에 귀족들은 1452년 초 반란을 일으켰고, 보헤미아 가톨릭 귀족들도 이에 호응했다. 반란군은 노이슈타트를 포위했고, 프리드리히 3세는 그들의 압박에 못이겨 9월 4일 라디슬라우스를 첼레 백작 울리히에게 넘기기로 했다.

첼레 백작의 인솔하에 빈으로 이동한 라디슬라우스는 1453년 초 후녀디 야노시와 만난 뒤 그를 헝가리 왕국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왕실 수입을 관리하는 권한도 부여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매년 24,000 플로린의 금을 지불하게 했다. 1453년 1월 29일, 헝가리 의회는 라디슬라우스를 헝가리 왕으로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헝가리의 수도 부더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를 지지했던 이들에 대한 사면령을 반포했으며, 왕실의 보조금을 받는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헌장도 반포했다. 이후 빈으로 돌아간 그는 첼레 백작 울리히의 설득에 따라 이르지를 보헤미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울리히는 대주교 세치 데네시, 가라이 라슬로, 우즐라키 미클로시 등 헝가리 귀족들과 협약을 맺고 라디슬라우스의 반대자들에 맞서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는 잠재적인 정적으로 간주된 후녀디 야노시를 겨냥한 것이었다.

1453년 10월 28일, 라디슬라우스는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 후 12개월간 프라하에 머물던 그는 1454년 11월 말에 슐레지엔과 모라바를 방문하여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455년 2월 16일 빈으로 이동해 행정을 돌본 뒤 부더로 이동해 휴녀디 야노시에게 왕실 수입의 일부 관할권을 반환받고 부더, 디오슈죄르[22] 및 왕실에 귀속된 성들에게서 후녀디의 수비대를 철수하도록 설득했다. 그렇게 왕권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이던 1455년 가을,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메흐메트 2세가 헝가리를 침공할 준비에 착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라디슬라우스는 1456년 3월 헝가리 의회를 소집해 총동원령을 발동하고 국방비를 충당하기 위한 특별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헝가리로 몰려오는 오스만 제국군의 군세가 생각보다 엄청나자 두려움에 빠진 나머지 사냥을 핑계로 빈으로 피신했고, 후녀디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군을 막는 임무를 떠맡았다.

1456년 7월 초, 메흐메트 2세가 헝가리 왕국 남부의 국경도시 난도르페헤르바르(Nándorfehérvár)를 포위했다. 후녀디 야노시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베오그라드 공방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러나 후녀디 야노시는 이때 걸린 전염병으로 2주만에 사망했다. 라디슬라우스로부터 후녀디 야노시의 뒤를 이어 헝가리군 총사령관으로 선임된 첼레 백작 울리히 2세는 라디슬라우스를 데리고 헝가리로 귀환한 뒤 후녀디 야노시가 가지고 있던 모든 왕실의 성과 수입을 압수하려 했다.

후녀디 야노시의 장남 후녀디 라슬로(Hunyadi László 1431~1457)는 푸타크에서 열린 회의에서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자세를 취한 뒤, 라디슬라우스와 울리히 2세를 난도르페헤르바르로 초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후녀디 라슬로는 난도르페헤르바르에 온 왕실군을 해산시키고 울리히 2세를 참살한 뒤 라디슬라우스를 포로로 잡았다. 이후 후녀디 가문의 중심지였던 테메슈바르로 끌려간 왕은 라슬로에게 책임을 물지 않을 것이며 헝가리 왕실군 총사령관으로 선임하겠다고 약속한 후에야 풀려났다.

부더에 도착한 라디슬라우스는 헝가리 귀족 대다수가 후녀디 라슬로에게 적대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복수를 꾀했다. 왕은 후녀디 라슬로를 설득해 동생인 후녀디 마차시도 부더로 끌어들였다. 1457년 3월 14일 마차시가 도착하자마자, 라디슬라우스는 두 후녀디를 긴급 체포한 뒤 사형 선고를 내렸다. 후녀디 라슬로는 3월 16일에 참수되었지만, 후녀디 형제의 어머니 실라지 에르제베트와 그녀의 남동생 실라지 미하이가 반기를 들면서 왕에게 충성하는 귀족들과 후녀디 가문의 지지자들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라디슬라우스는 얀 이스크라를 왕실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후녀디 마차시와 함께 빈으로 향했다. 이후 프라하를 방문한 라디슬라우스는 1457년 11월 23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2.7. 마차시 1세(1458년 ~ 1490년)[편집]



2.7.1. 집권 과정[편집]


라디슬라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튀링겐의 빌헬름 변경백[23]의 딸이며 라디슬라우스의 친척인 안나, 헝가리의 전임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의 동생이자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라디슬라우스의 어머니 엘리자베트로부터 성 이슈트반 왕관을 비롯한 헝가리 서부의 여러 성과 도시의 권리를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던 프리드리히 3세가 헝가리의 왕좌를 노렸다. 헝가리 귀족들, 특히 실라지 미하이, 가라이 라슬로, 우자키 미클로시 등은 16살의 마차시를 왕으로 세운다면 통제하기 쉬울 거라고 판단했다. 또한 교황 갈리스토 3세는 후녀디 야노시의 대튀르크 전쟁에서의 활약상에 찬사를 보낸 바 있었고, 그의 아들이 이 투쟁을 지속할 거라고 믿었기에 마차시가 헝가리 왕이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가라이 라슬로는 세게드에 머물던 실라지 미하이를 찾아가 협상한 끝에 1458년 1월 12일 실라지 형제가 후녀디 라슬로 처형에 일정 역할을 한 반팔비 공작 바리우스 2세 미클라시를 용서하고, 마차시를 석방시킨 뒤 왕으로 선출하며, 실라지 미하이는 가라이 라슬로의 딸과 결혼하고, 가라이 라슬로는 궁정백으로 선임되고 부더의 왕실 재산을 감독하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페치 주교 미클라시의 바리우스 2세를 당시 보헤미아의 후스파 권력자인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에게 보내 프라하에 구금되어 있는 마차시를 석방해달라고 요청하기로 했다.

이렇게 합의를 맺은 실라지 미하이는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 의회로 행진한 뒤, 귀족들에게 마차시가 형제의 처형에 복수하지 않을 거라며 그를 왕으로 선출하자고 주장했다. 1458년 1월 24일, 의회는 만장일치로 마차시의 왕위 계승을 결의했으며, 실라지 미하이를 5년간 왕의 섭정으로 삼기로 했다. 실라지 미하이는 마차시가 돌아오기 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법을 통과시켰다. 그 내용은 모든 왕실 소속 성채들을 자신에게 넘겨야 하며, 자신의 권위는 왕 다음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궁정백으로 선임되었던 가라이 라슬로와의 결혼 약속을 파기하고 부더의 왕실 재산을 넘기겠다는 것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한편, 이르지는 헝가리에서 온 사절단을 접견한 뒤 마차시 1세가 자신의 딸 카테리나와 결혼한다는 조건하에 마차시의 석방을 동의했다. 마차시는 몸값을 지불한 후 풀려난 뒤 카테리나와의 결혼을 선포한 후 에스테르곰을 거쳐 1458년 2월 14일 부더에 도착했다. 관례에 따르면, 그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에스테르곰 대주교로부터 성 이슈트반 왕관을 전달받으면서 헝가리 왕으로 등극해야 했다. 그러나 그 왕관은 프리드리히 3세에게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일단 프리드리히 3세에게 왕관을 돌려달라고 요청하기로 하고, 대관식을 미루는 대신 다른 의식이 거행되었다. 마차시가 부더에 처음 이르렀을 때 성직자와 시민,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환영했다. 마차시는 그곳에서 모든 성직자와 귀족, 시민, 그리고 유대인의 권리를 인정한다고 선언하고 죄수들을 사면했다. 이후 궁전의 왕좌에 앉아서 임시로 만들어진 왕관을 쓰고 국정을 관리했다.

1458년 3월 9일, 마차시는 삼촌 실라지 미하이에게 후녀디 가문의 유산 중 하나인 베스테르체바녀를 하사하고 세습 백작 칭호를 내렸다. 그러면서도 외교 정책 및 재산 증여 문서를 독자적으로 발행하는 등, 섭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통치자의 권한을 행사했다. 그는 몇 년 전인 1453년 아버지 후녀디 야노시가 섭정직을 사임했을 때 라슬로 5세의 나이가 13세였다는 점을 근거로 삼으며 이제 16살인 자신은 충분히 통치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모두가 그의 집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라디슬라우스 왕으로부터 왕실군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던 얀 이스크라는 1458년 3월 말에 마차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마차시는 로즈고니 셰베슈첸(Rozgonyi Sebestyén)을 헝가리 북부 최고 사령관으로 삼고 얀 이스크라의 보헤미아 용병대를 토벌하게 했다. 로즈고니는 얀 이스크라를 상대로 성공적으로 몰아붙였지만, 그해 9월 오스만 제국군이 헝가리를 침공하자 이에 맞서고자 방향을 돌려야 했다. 그 후 얀 이스크라는 프리드리히 3세를 섬기다가 마차시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패하면서 위기에 봉착하자 1462년 리파 지역에서 많은 영지와 돈을 받는 대가로 마차시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의 용병 중 일부는 마차시를 섬겼는데, 이들은 마차시가 결성한 '검은 군대(Fekete sereg)'의 일원이 되었다. 여전히 그를 따르지 않은 보헤미아 용병들은 1467년까지 마차시의 공세로 인해 헝가리 북부에서 쫓겨났다.

1458년 여름, 실라지 미하이는 마차시가 자신을 섭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에 분노해 우즐라키 미클로시, 가라이 라슬로와 함께 왕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마차시는 이 음모를 적발해 가라이 라슬로를 궁정백에서 해임했다. 그렇지만 어머니 에르제베트의 오빠이기도 한 미하이를 차마 해치지는 못했고, 일시적으로 구금했다가 관직에 복위시키길 반복했다. 실라지 미하이는 그런 그를 상대로 여러 차례 음모를 꾸몄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460년 말 에르데이 총독을 지내던 중 오스만 제국군과의 교전에서 체포된 뒤 메흐메트 2세 앞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1459년 초, 가라이 라슬로와 우즐라키 미클로시는 네메투이바르(Németújvár)[24]에서 마차시에 대항해 프리드리히 3세를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가라이 라슬로는 그 직후 사망했고, 우즐라키 미클라시는 마차시와의 항전을 이어갔으나 끝내 압도당하자 그해 7월 1일 자신의 재산을 유지하는 대가로 마차시에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마차시는 프리드리히 3세와 협상한 끝에 1464년에 그가 명목상 헝가리 왕을 칭하는 것을 용인하는 대가로 자신이 헝가리에서 군림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성 이슈트반 왕관을 반환하게 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대로 헝가리 왕을 칭했고, 이는 훗날 그들이 헝가리를 병합하는 명분 중 하나가 되었다. 이리하여 성 이슈트반 왕관을 접수한 마차시는 1464년 3월 29일 헝가리의 관례에 따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귀족들의 자유를 확인했다. 그는 이로써 명실상부한 헝가리의 국왕이 되었다.


2.7.2. 내치[편집]


마차시의 국내 정책의 주요 목표는 왕권을 강화하여 귀족들이 도전할 엄두를 못내게 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해 전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재무 수입을 늘려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다지고 후녀디 가문의 왕위 계승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수석 재상인 에스테르곰 대주교 세치 데네시를 해임하고 컬로처 대주교 바르다이 이슈트반과 비테즈 야클로시를 재상으로 임명했다. 여기에 상급 법원인 왕실 특별 법원과 개인 법원을 하나의 최고 법원으로 통합했다. 이 최고 법원은 귀족들이 주재하는 전통적인 법원의 권위를 떨어드리고 사법 행정을 보다 전문화하는 데 기여했다. 1465년에는 에르데이의 2개 주를 지그몬드 백작, 센트죄르지 야노시 백작, 엘러바흐 베르톨트의 관할로 삼게 했다. 여기에 전통적으로 마초 반(Ban)의 지위를 누리던 우즐라키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소콜리 페테르(Peter Szokoli Peter)를 파견해 우즐라기 가문과 함께 마초 지역을 관리하게 했다.

그는 초기에는 오스만 제국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1464년 7월 메흐메트 2세가 야이체를 포위하자 사바 강을 따라 군대를 집결시켜서 메흐메트 2세가 8월 24일 포위를 풀고 물러나도록 강요했다. 이후 사바 강을 건너 스레브니차를 공략한 뒤 즈보르니크를 포위했지만 오스만 제국군이 인근에 이르자 헝가리로 철수했다. 1466년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공세를 개시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고 교황 바오로 2세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그러나 서방 열강들이 원조를 제대로 하지 않자, 암묵적으로 반 오스만 정책을 포기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침략하지 않았고, 메흐메트 2세 역시 헝가리에 대규모 침공을 가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포기한 뒤, 마차시는 1466년 슬라보니아를 방문해 우즐라키 미클라시와 자폴라 임레를 반에서 해임하고 비토베크 야노시와 투즈 야노시로 교체했다. 1467년 3월. 그는 의회를 소집한 뒤 2개의 전통적인 세금체계를 개편했다. '의회세'는 '왕실의 국고세'로 바뀌었고, '10 중 3세'는 '왕관의 관세'로 징수되었다. 여기에 더해, 귀족들에게 용인했던 모든 면세를 무효화했으며, 모든 세금을 왕가에 집중시켰다. 그는 왕실 수입의 관리를 개종한 유대인 상인인 에르누슈트 야노시(Ernuszt János)에게 맡겼다. 에르누슈트는 2년 안에 모든 일반 및 특별 세금 징수와 소금 광산 관리를 담당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들인 세입은 50만 플로린에 달했는데, 그 중 절반은 왕실의 국고세와 특별 세금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세제 개혁은 귀족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1467년 8월 18일, 헝가리 귀족, 작센인, 세케이족 등 에르데이의 세 대표자들은 콜로즈모노스토르[25]에서 왕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다. 마차시는 즉시 군대를 소집하여 이들을 토벌하러 출진했다. 반란군은 왕실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큰 저항 없이 항복했지만, 마차시는 반란군 지도자들을 가차없이 처벌했다. 많은 이가 그의 명령에 따라 무자비하게 고문당한 뒤 참수되거나 꼬챙이에 꽂혔다. 여기에 몰다비아 공국슈테판 3세가 반란을 지원했다고 의심해 몰다비아를 침공했지만, 1467년 12월 15일 바이아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심한 부상을 입은 채 헝가리로 퇴각했다. 1481년, 마차시는 반역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프랑코판, 즈린스키 등 크로아티아 및 슬라보니아계 대귀족들을 잡아들였다. 그들은 새로운 토지세 도입에 동의하자마자 사면받았다.

1485년, 헝가리 의회는 이전의 많은 모순된 법령들을 대체하는 체계적인 법전인 데크레툼 마이우스(Decretum maius)를 반포했다. 궁정백의 순회 재판과 임시 주 의회가 폐지되어 주 법원의 입지가 강화되었으며, 군주가 부재하거나 소수인 경우에는 궁정백이 섭정으로서 섭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마이우스는 이외에도 사법 행정 전반에 걸친 실질적인 개혁을 단행해, 헝가리의 정부 체계 및 법 질서를 확립했다.

이렇듯 왕권 강화와 세제 개혁을 단행하면서 내실을 다지는 한편, 그는 나폴리 왕국 출신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한 뒤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는 르네상스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부더의 왕성에 르네상스 풍의 정원이 지어졌고, 비셰그라드 궁전 역시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인 치멘티 카미키아(Chimenti Camicia)와 달마티아인 조반니 달마타(Giovanni Dalmata)를 이 프로젝트의 지휘자로 임명했다. 또한 조각가 베네데토 다 마자노(Benedetto da Majano), 화가 필리피노 리피(Filippino Lippi)와 안드레아 만테냐( Andrea Mantegna) 등 유수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을 궁정에 초빙하여 궁전을 장식하게 했으며, 군사 기술자 아리스토텔레 피오라반티(Aristotele Fioravanti)를 고용하여 남쪽 국경을 따라 요새를 재건하게 했다.

마차시는 콜로즈바르, 세게드, 버이더후녀드에 있는 프란치스코회와 페예레지하저(Fejéregyháza)에 있는 폴린회를 위해 후기 고딕 양식의 수도원을 짓게 했다. 그런 마차시의 궁정에는 고품질의 음악 시설이 있었다. 바르톨로메오 마라스키 교황청 예배당장은 마차시의 예배당 성가대를 그가 들어본 것 중 최고라고 묘사했다. 조스킨 도르와 요하네스 데 스토켐과 같은 작곡가들은 마차시의 궁정에서 시간을 보냈고, 수많은 이탈리아 음악가가 그 곳을 방문했다.

하지만 마차시가 르네상스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헝가리의 전통 예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헝가리의 서사시와 서정시가 종종 그의 궁정에서 지어졌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오스만 제국과 후스파에 대항하여 가톨릭을 수호한 헝가리 국왕들과 전사들을 찬미하는 것이었다. 가톨릭 신앙이 투철했던 그는 성모 마리아의 '깨끗한 잉태'에 대한 신학 논문을 저술하기도 했으며, 1460년대에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새겨진 동전을 발행함으로써 자신이 그녀를 숭배한다는 것을 거리낌없이 드러냈다.

어린 시절 독서를 즐겼던 마차시는 서적 수집에도 관심이 많았다. 1465년 페라라 출신의 갈레오토 마르치오(Galeotto Marzio)를 왕실 도서관의 첫번째 도서관장으로 임명한 뒤 유럽 각지에 흩어진 서적을 수집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여기에 더해 필사가, 삽화가, 제본가를 대거 고용해 왕실 도서관에서 일하게 했다. 그가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책을 모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존하는 저서만 216권에 달한다. 그의 도서관에는 크세노폰키루스 2세에 관한 저서,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알렉산드로스 3세 전기, 동시대에 활약한 로베르토 발투리오의 군사 논문, 제2차 포에니 전쟁에 대한 실리우스 이탈리쿠스의 저서 등이 보관되었다.

마차시는 시간이 남을 때마다 인본주의자들과 함께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했다. 안토니오 본피니(Antonio Bonfini), 피에트로 란차노(Pietro Ranzano), 바르톨로메오 폰치오(Bartolomeo Fonzio), 그리고 프란체스코 반디니(Francesco Bandini) 같은 철학자들이 이 시기 마차시의 궁정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신플라톤주의를 헝가리에 소개했다. 한편, 그는 별과 행성의 움직임과 조합이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확신하고 점성술천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대의 유명한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레기오몬타누스(Johannes Regiomontanus), 마르친 빌리카(Marcin Bylica)는 부더에 천문대를 세우고 천체를 관측했다. 레지오몬타누스는 항해에 관한 저서를 마차시에게 바치고 그 대가로 1468년 고문에 선임되었다. 이 저서는 훗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인도를 향한 여정에 착수했을 때 참고 저서로 활용되었다.


2.7.3. 보헤미아 전쟁[편집]


마차시는 재위 초기에 오스만 제국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서방의 도움이 제대로 오지 않는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과 단독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은 어리석인 짓이라고 판단하고 전쟁을 중단했다. 그 대신, 그는 교황 바오로 2세로부터 파문을 선고받은 후스파 지도자이자 보헤미아 국왕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를 노렸다. 1468년 초 이르지의 아들 빅토르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자, 프리드리히 3세는 마차시에게 독일왕으로 추대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주며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마차시는 3월 31일 보헤미아에 선전포고하고 오스트리아로 진군해 보헤미아군을 몰아낸 뒤 모라바와 슬레스코를 침공했다. 1468년 5월 테베비차 포위전을 치르다가 부상을 입었고, 1469년 2월 크루딤에서 변장한 채 적진을 정찰하던 중 체포되었지만, 자신이 보헤미아에 사는 평범한 말 사육자라고 속이고 겨우 빠져나갔다.

이후 전세가 악화되면서 헝가리군과 보헤미아 내 가톨릭 부대가 빌레모프에서 이르지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그는 이르지와 어느 오두막에서 만나 협상을 벌인 끝에, 온건한 후스파와 교황청의 화해를 중재하겠다고 약속하면서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1469년 4월에 올로모우츠에서 다시 회의를 열어 프라하 교구장에 가톨릭 대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포함한 교황 특사단의 요구를 전달했다. 5월 3일, 보헤미아 가톨릭 교회는 올로모우츠에서 마차시를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했다.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는 마차시를 받아들였지만, 보헤미아 본토는 이르지를 계속 지지했다. 일부 귀족들은 폴란드 왕국의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장남인 브와디스와프 야기엘론치크가 이르지의 뒤를 이을 권리를 인정했다.

1469년 중순, 마차시는 이르지가 이끄는 군대를 슬레스코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11월 2일 우에르슈브로드에서 급습을 받아 패주했다. 이후 헝가리로 철수한 그는 의회를 열지 않은 채 특별세 부과를 선포했고, 이로 인해 헝가리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1470년 2월 11일, 마차시는 빈으로 가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이르지와의 전쟁 비용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는 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를 공격하려는 오스만 제국군이 슬라보니아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한 것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한 달 이상의 협상에도 별다른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헝가리로 돌아갔다.

이후 귀족들의 불만이 갈수록 커져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1470년 11월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그에게 특별세를 부과할 권한을 인정하는 대신, 한 개의 포르타(porta) 당 납부해야 할 모든 세금의 합계가 1 플로린을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했으며, 보헤미아 전쟁을 지속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리하여 전쟁을 지속하기가 곤란해진 마차시는 보헤미아로의 공세를 중단했다. 1471년 3월 22일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가 사망하자, 보헤미아 의회는 5월 27일 브와디스와프 야기엘론치크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블라디슬라프로 추대했다. 교황 특사 로렌초 로베렐라는 이를 무효로 선언하고 마차시가 보헤미아 왕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 의회는 이를 묵살하고 블라디슬라프의 집권을 받아들였다.

1471년 마차시가 모라바로 가서 보헤미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때, 헝가리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차남 카지미에시를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급보를 접했다. 이 음모는 비테즈 야노시 대주교와 그의 조카 파노니우스 야노시가 가톨릭 신자인 블라디슬라프와의 전쟁을 막고자 벌인 것이었다. 마차시는 즉시 헝가리로 돌아온 뒤 의회를 소집하고 "앞으로는 귀족들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지 않겠으며 매년 의회를 소집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이에 귀족들은 만족했고, 9월 21일 50명 가량의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471년 10월 2일, 카지미에시 왕자가 헝가리를 침공했다. 그는 판노니우스 야노시의 지원에 힘입어 니트러를 공략했지만, 오직 로스고니 야노시와 페레니 미클라시만 가담했을 뿐, 다른 귀족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마차시가 즉각 반격을 가해오자, 카지미에시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판노니우스 야노시는 헝가리에서 도주하던 중 사망했고, 비테츠 야노시 대주교는 교구 밖으로 나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얼마 후 비테츠 야노시가 사망하자, 마차시는 베켄슬로르 야노시를 에스테르곰의 새 대주교로 선임했다.

1472년, 마차시는 프리드리히 3세에게 반기를 든 오스트리아 귀족들을 지원했다. 1473년 마차시, 카지미에시 4세, 블라디슬라프는 평화 협상에 들어갔지만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는 수 십개의 작은 공국들로 구성된 슬레스코 정부를 통합하고 총사령관을 세우려 했지만, 슬레스코 귀족들은 그가 내세운 리그니츠 공작 프리드리히 1세를 총사령관으로 받들기를 거부했다. 1474년 2월, 마차시와 블라디슬라프 사이에 3년간의 휴전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1474년 3월 블라디슬라프는 프리드리히 3세, 카지미에시 4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를 재차 적대했다. 카지미에시 4세와 블라디슬라프는 그해 10월에 슬레스코를 침공하여 브라티슬라프에 있던 마차시를 포위했으나, 마차시가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식량 공급에 차질을 겪은 끝에 퇴각했다. 그 후 슬레스코 귀족들은 마차시가 새로운 총사령관 후보로 내세운 자포여 이슈트반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모라바 귀족들도 치보르 토바초프스키를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토바초프스키는 블라디슬라프 국왕의 친척이었지만, 마차시는 이들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1476년, 글로가우 공국의 공작 하인리히 11세가 사망했고 아내인 브란덴부르크의 바르바라가 공국을 상속받았다. 블라디슬라프는 그 해에 바르바라와 결혼함으로써 글로가우를 자신의 영지로 삼았다. 그러나 마차시 1세의 지원을 받은 하인리히 11세의 조카 요한 2세가 글로가우로 쳐들어와서 바르바라를 몰아냈다. 블라디슬라프는 글로가우를 탈환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3세와 손잡기로 했다. 교황 특사 발다사레 데 피사로부터 마차시의 영토를 침범한다면 파문하겠다는 위협을 받았지만, 그는 이를 무릅쓰고 1476년 12월 5일 또다시 프리드리히 3세와 손잡고 마차시와 전쟁을 단행했다. 그 후 슬레스코와 모라바 연합과의 전쟁에서 고전하던 블라디슬라프는 헝가리에 평화 협정을 맺차고 요청했다. 양자간의 협상은 수 년간 진행되었으나 별 진전이 없다가 1478년 1월 15일, 발다사레 데 피사가 마차시와 전쟁을 벌였다는 이유로 블라디슬라프와 추종자들을 파문하자 재협상이 진전되어 1478년 3월 28일에 최종적으로 합의되었다. 이 협약에 따르면, 마차시와 블라디슬라프 모두 보헤미아 왕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보헤미아 본토는 블라디슬라프의 권위를 인정하고 모라바와 슬레스코, 루지체는 마차시의 권위를 인정했다. 그들은 7월 21일 올로모우츠에서 열린 회의에서 평화 협약을 비준했다.

1477년 6월 10일, 프리드리히 3세는 블라디슬라프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공인했다. 이틀 후, 마차시가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니더외스터라이히를 침공했다. 블라디슬라프는 프리드리히 3세에게 지원군을 보냈지만, 적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자 7월 말 이전에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프리드리히 3세는 빈에서 헝가리군에게 포위되자 12월 1일 마차시 역시 보헤미아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했다.


2.7.4.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편집]


1471년 오스만 제국이 네르트바 강을 따라 있는 헝가리 요새를 점령하자, 마차시는 우즐라키 미클로시를 보스니아 왕으로 지명하여 해당 지역의 방위를 맡겼다. 백양 왕조샤한샤 우준 하산이 반 오스만 동맹을 제안했지만, 그는 보헤미아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을 함부로 적대하지 않기로 하고 거절했다. 1474년 1월, 스메데레보의 베이인 알리 베이 미할로를루가 헝가리 동부 지역을 약탈하고 너지바러드를 파괴한 뒤 16,000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환했다.

1474년 말, 오스만 제국군이 본격적으로 왈라키아와 몰라비아를 침공했다. 마차시는 즉시 증원군을 몰다비아 공국슈테판 3세에게 파견했고, 헝가리-몰다비아 연합군은 1475년 1월 10일 바슬루이 전투에서 약탈을 자행한 뒤 막대한 전리품을 끌고 귀환하던 오스만 제국군을 섬멸했다. 이후 몰다비아 공국은 마차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봉신이 되었다. 마차시는 메호메트 2세의 화평 제안을 묵살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쳐들어가 1476년 2월 15일 사바 강의 중요한 요새인 샤바츠를 점령했다.

1476년 여름, 메흐메트 2세가 몰다비아를 상대로 원정을 개시했다. 그는 그해 7월 26일 발레아 알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식량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퇴각했다. 이때 마차시가 파견한 블라드 3세가 이끄는 왈라키아 보조군이 몰다비아에서 슈테판 3세와 합세했고, 왈라키아-몰다비아 연합군은 1476년 8월 시레트 강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습격해 큰 타격을 입혔다. 당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헝가리로 망명했던 블라드 3세는 시레트 강 전투에서 승리한 뒤 헝가리와 몰다비아의 지원에 힘입어 당시 왈라키아 공작 바사라브 3세를 물리치고, 다시 왈라키아 공작으로 복위했다.

1479년 말, 오스만 제국군이 바사라브 3세를 앞세워 사시즈바로스(현재 루마니아의 오레슈티)를 공략하고 파괴했다. 이에 몰다비아 공작 슈테판 3세와 헝가리 장군 팔(Pál Kinizsi)이 반격에 나서 10월 13일 브레드필드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궤멸시켰다. 마차시는 남부 국경의 방위를 개선하기 위해 도나우 강을 따라 난도르페헤르바르 서쪽에 있는 모든 요새의 지휘권을 팔 키니시에게 맡겼다. 1480년 초, 마차시는 블라드 3세를 처단하고 왈라키아를 장악한 뒤 오스만 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바사라브 3세를 응징하기 위해 왈라키아를 침공한 슈테판 3세에게 지원군을 보냈다. 또한 쇠레니바르[26], 난도르페헤르바르, 샤바츠, 스레브레니크, 야이체 요새를 중심으로 5개의 바나트 또는 '방어 주'를 세웠다.

1481년 5월 3일, 오스만 파디샤 메흐메트 2세가 사망했다. 그 후 바예지트 2세와 젬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젬은 내전에서 패한 뒤 로도스로 피신해 그곳을 관리하고 있던 구호 기사단의 보호를 받았다. 마차시는 바예지트 2세와의 협상에 써먹기 위해 자신이 젬을 보호하겠다고 주장했지만, 베네치아 공화국과 교황 인노첸시오 8세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1481년 말, 헝가리 보조군은 마차시의 장인인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를 지원해 나폴리 왕국이 오스만 제국군에게 빼앗겼던 오트란토를 탈환하는데 기여했다. 그 후 마차시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전념하기 위해 1482년 바예지트 2세와 5년 휴전 협약을 체결했다.


2.7.5. 오스트리아와의 전쟁[편집]


1476년 초, 에스테르곰 대주교 베켄슬로르 야노시가 알 수 없는 이유로 헝가리에서 빈으로 도망쳤다. 그는 에스테르곰 교구의 금고를 가지고 가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제공했다. 이에 마차시는 황제가 대주교를 선동해 이런 비열한 짓을 벌였다고 비난했다. 1477년 3월 튜튼 기사단, 바르미아 대주교단과 동맹을 맺은 마차시는 프리드리히 3세를 상대로 선전포고했다. 헝가리군이 니더외스터라이히를 침공하여 빈을 봉쇄하자, 프리드리히 3세는 블라디슬라프에게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후 교황 식스토 4세, 베네치아 공화국,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중재로, 마차시는 12월 1일 프리드리히 3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황제는 마차시를 보헤미아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인정하고, 그에게 100,000 플로린의 배상금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3세가 배상금의 절반만 지불하고 나머지를 내지 않으려하자, 마차시는 1479년 3월 26일 스위스 연방과 일련의 협약을 체결해 신성 로마 황제의 스위스 용병 모집을 방해했다. 여기에 잘츠부르크 대주교 베른하르트 2세와 동맹을 맺고 헝가리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공국에 있는 대주교령의 요새를 소유하는 것을 승인받았다. 1482년 1월, 검은 군대가 하인부르크 안 데어 도나우를 포위 공격했다. 그해 4월 프리드리히 3세에게 선전포고한 마차시는 6월 말부터 하인부르크 공방전을 지휘해 10월에 함락시켰다. 그 후 그가 통솔하는 검은 군대는 3개월 동안 장크트 바이트 안 데어 글란(Sankt Veit an der Glan), 엔체르스도르프 데어 피샤(Enzersdorf an der Fischa), 쾨세그(Kőszeg)를 공략했다. 교황 특시 바르톨로메오 마라스키는 마차시와 프리드리히 3세간의 평화 협약을 중재하려 했지만, 마차시는 이를 거부했다.

1485년 1월, 흑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빈을 포위했다. 5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6월 1일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빈이 넘어갔다. 마차시는 빈에 입성한 뒤 왕실을 이곳으로 옮기고, 니더외스터라이히의 귀족들을 빈으로 불러들인 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강요했다. 1486년 2월 16일, 헝가리를 피해 빈에서 탈출하여 린츠로 피신했던 프리드리히 3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7명 중 6명을 설득해 자신의 아들 막시밀리안독일왕으로 선포하게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왕으로서 선거 권한이 있던 블라디슬라프나 마차시는 동의하지 않았다. 마차시는 블라디슬라프를 초대해 그해 9월 이흘라바에서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에 공동 대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귀족들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고, 블라디슬라프는 곧 마음을 바꿔 막시밀리안의 독일왕 선출을 인정했다.[27]

마차시는 이후에도 프리드리히 3세를 상대로 공세를 이어갔다. 검은 군대는 라안데어타야와 슈타인을 포함한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여러 도시를 점령했고, 마차시는 니더외스터라이히를 다스리기 윈한 재판소를 세웠다. 1487년 에벤푸르트(Ebenfurth)에서 열린 니더외스터라이히 의회에서 오스트리아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는 빈 대교구의 관리자인 서포여이 이슈트반을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점령한 도시와 요새의 수비를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장군들에게 맡겼다. 그 외의 행정은 프리드리히 3세 밑에서 일하다가 자신에게 복종한 오스트리아 관리들에게 맡겼다. 비너노이슈타트는 니더외스터라이히의 도시들 중 유일하게 마차시에게 끝까지 항전했으나, 1487년 8월 17일에 끝내 함락되었다.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 3세[28]가 헝가리군을 격퇴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이르자, 마차시는 그와 협상을 벌인 끝에 1487년 12월 16일 쾰른에서 6개월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 마차시는 뒤이어 프리드리히 3세와 아들 막시밀리안에게 헝가리 왕을 자처하는 것을 그만두고 자신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후계자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답변을 수 년간 미루었고, 마차시는 이들을 압박하고자 린츠로의 공세를 준비했으나 도중에 통풍에 걸려 쓰러지자 계획을 취소했다.


2.7.6. 말년[편집]


마차시는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을 꾸몄다고 의심해 숙청을 여러 차례 단행했다. 1484년 대주교 바라디 페테르를 투옥했고, 1485년 보헤미아 재상으로서 모라바와 슬레스코를 관할하던 야로슬라프 보스코비치를 처형했다. 1487년, 마차시는 사생아인 코르빈 야노시에게 영지를 마련하기 위해 글로가우 공국을 공략하려 했다. 이때 그는 글로가우 공작 요한네스 1세의 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반피 미클로시를 투옥했다. 요한 1세는 이에 맞서 뮌스터베르크 공작 인드르지흐 포데브라트와 동맹을 맺었으나, 1487년 12월 검은 군대에게 패배하고 글로가우를 내줬다.

한편, 교황령에 속한 안코나 시민들은 마차시가 베네치아 공화국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기를 바라며 헝가리 국기를 게양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항의했지만, 마차시는 자신이 안코나를 지켜주면서 교황청을 도와주겠다며 안코나를 돌려주지 않았다. 여기에 교황청과 베네치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장인이자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에게 지원군을 보냈다. 또한 1482년에 맺었던 오스만 제국과의 휴전을 1488년에 2년 연장했으며, 에르데이의 2개 영지를 몰다비아의 슈테판 3세에게 수여했다.

1489년 3월 이후, 마차시는 통풍을 앓으면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3세에게 자신의 아들 코르빈 야노시를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왕으로 인정해준다면 오스트리아에서 철수하고 막시밀리안이 새 황제로 등극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했으나,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1490년 4월 6일, 32년간 왕국을 이끈 군주는 빈에서 눈을 감았다.


2.8. 헝가리 왕국의 몰락[편집]



2.8.1. 마차시 1세의 계승자[편집]


마차시는 1455년 12살의 나이로 첼레 백작 울리히 2세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1455년 말에 원인 불명의 질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보헤미아의 후스파 권력자이자 나중에 국왕으로까지 선출되는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의 딸 카테리나와 1461년에 결혼했으나, 카테리나마저 1464년 1월 또는 2월에 태아를 낳던 중 아기와 함께 사망했다. 그 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와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등 여러 군주들과 결혼 동맹을 제안했지만 좀처럼 성사되지 못했다.

1474년 10월 30일, 마차시는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딸 베아트리체와 약혼하고 1476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녀는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로, 남편을 구슬려서 신하들이 왕의 처소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고 오직 시종을 통해서만 국왕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했다. 마차시는 그녀를 맞이한 이래로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는 르네상스에 많은 관심을 가져 헝가리에 르네상스가 퍼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다.

마차시는 1473년 니더외스터라이히 슈타인 시의 유지의 딸인 바르바라 에델푀크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코르빈 야노시를 낳았다. 그는 본래 이 아이를 교회에 보낼 생각이었지만, 정실 왕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좀처럼 보지 못하자 마음을 바꿔 왕위 계승자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1470년대 중순에 코르빈 야노시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로스 성을 영지로 주는 것을 시작으로 글로가우 공작을 검은 군대로 몰아내고 그 땅을 영지로 줬으며, 슬레스코 일대의 여러 영지를 추가로 주고 헝가리 왕국의 모든 요새 사령관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여기에 더해 밀라노 공작의 딸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심지어 코르빈 야노시의 어머니 바르바라 에델푀크를 궁정에 초대해 왕실의 일원으로 삼았다.

베아트리체 왕비는 남편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해 바르바라와 코르빈 야노시 모자를 상대로 첨예한 갈등을 벌였다. 말년에 죽음을 눈앞에 둔 마차시는 베아트리체의 형제이자 칼라브리아 공작인 알폰소에게 "헝가리 사람들은 여자가 이끄는 정부에 복종하는 것보다 끝까지 싸우다 죽기를 택할 것이다"라며 베아트리체를 설득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끝내 코르빈 야노시를 양자로서 받아들이라는 남편의 권고를 듣지 않았고, 마차시는 후계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마차시 1세 사후 헝가리 귀족들이 국왕 선출을 위해 모였을 때, 4명의 경쟁자가 경합했다. 마차시 1세의 사생아 코르빈 야노시는 헝가리 남부의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막시밀리안 대공은 1463년 노이슈타트에서 마차시가 합법적인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할 경우 프리드리히 3세나 그의 후계자들이 헝가리를 상속하자고 했던 협약을 상시키기며 자신이 헝가리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블라디슬라프는 자신이 마차시 1세의 전임 국왕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의 누이의 장남이니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이자 폴란드 왕인 카지미에시 4세는 모든 아들들에게 독립된 왕국을 물려주고 싶어했기 때문에 셋째 아들인 얀 올브라흐트를 헝가리 국왕으로 세우려 했다.

대다수의 헝가리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블라디슬라프가 자신들의 권익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에 혹해 그를 왕으로 세우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블라디슬라프는 마차시 1세의 미망인인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몰다비아 공작이자 헝가리의 봉신 슈테판 3세와 팔 키니시가 그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7월 4일 코르빈 야노시를 격파해 헝가리에서 축출했다. 7월 15일, 헝가리 의회는 블라디슬라프를 헝가리 왕으로 추대했고 크로아티아에서도 이를 받아들였다, 블라디슬라프는 8월 9일 헝가리의 수도 부더에 도착한 뒤 특별세를 부과하거나 다른 "유해한 세금"을 도입하는 것을 자제하고 의회와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의 헌장을 발표했다.

1490년 9월 18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울라슬로 2세'로 대관식을 거행한 후 부더에 정착했고, 보헤미아 왕국은 보헤미아 의회에 의해 대리 통치되었다. 모라바, 슬레스코, 루지체 역시 그의 집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동생 얀 올브라흐트는 자신이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얀은 에게르를 점령한 뒤 9월에 커셔를 포위했다. 독일왕 막시밀리안 역시 헝가리를 침공해 11월 말에 솜바텔리, 베스프렘, 세케슈페헤르바르를 점령했다.

울라슬로는 에스테르곰에서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비밀 결혼을 했고, 그녀로부터 지원받은 막대한 자금을 활용해 대규모 병력을 편성했다. 이후 헝가리군이 반격을 가해온 데다 헝가리 귀족들을 포섭할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막시밀리리안은 12월 연말에 헝가리에서 철수했다. 울라슬로는 여세를 이어가 커셔를 구원했고, 얀 올브라흐트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1491년 2월 20일 글로가우 공국과 슬레스코 절반을 자신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헝가리 왕위 주장을 취소했다. 1491년 가을 얀 1세가 다시 헝가리를 공격했지만, 서포여이 이슈트반이 이끄는 헝가리군이 격파했다.

1491년 11월 7일, 울라슬로는 프레스부르크에서 막시밀리안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마차시 1세 생전에 헝가리가 빼앗았던 모든 오스트리아 영토를 막시밀리안에게 돌려주며, 울라슬로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상속받는 것을 인정했다. 그 대신, 막시밀리안은 헝가리에 대한 그의 주권을 인정하며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2.8.2. 울라슬로 2세(1490년 ~ 1516년)[편집]


울라슬로 2세는 온갖 고생 끝에 헝가리 왕위에 올랐지만, 마차시 1세의 중앙집권화 정책을 포기하고 거의 모든 정책이 의회에서 정해지게 내버려뒀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의회에서 정해진 결의안에 대한 서명을 요구받을 때마다 "도브르제(Dobrze, 아주 잘했다)"라고 말하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명했다. 마차시 1세 재위 32년 동안 5번밖에 소집되지 않았던 의회는 1492년 초 소집된 이래 그의 치세 내내 거의 매년 빠지지 않고 열리면서 헝가리의 중대소사를 결정했고, 자연히 의회를 운영하는 대귀족들의 권세가 대단히 강해졌다. 1492년 6월 7일, 아버지 카지미에시 4세가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을 각각 울라슬로의 동생인 얀 올브라흐트와 알렉산데르 야기엘론치크에게 넘기고 사망했다. 그는 폴란드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차시 1세는 생전에 2만 기병대와 8천 보병대로 구성된 최정예군인 '검은 군대(Fekete sereg)'를 양성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오스트리아 대공국과의 전쟁에서 탁월한 전투력을 발휘해 헝가리 왕국이 승승장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마차시 1세 치세 때 이들에게 억압당했던 귀족들은 울라슬로 집권 이래 검은 군대에게 줘야 할 급료를 일부러 대폭 삭감해버렸다. 급료가 오랫동안 지급되지 않자, 검은 군대는 반란을 일으켜 사바 강 유역의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그러나 팔 카니시가 이끄는 진압군이 9월에 이들을 무찔렀다. 대다수 부대원들은 처형되었고, 1493년 1월 3일에 잔당들도 강제 해산되었다. 이리하여 헝가리 최강의 정예군은 마차시 1세 사후 3년도 안 되어 사라졌다.

검은 군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서 헝가리의 국방력이 약화되자, 오스만 제국은 이때를 틈타 헝가리를 공격했다. 1493년 9월 11일, 오스만군은 크르바바 평원 전투에서 크로아티아 귀족 연합군을 격파한 뒤 네레트바 강 북쪽의 아드리아 해 연안을 병합했다. 오스만 습격대는 이후로도 헝가리 남부 지역을 거의 매년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울라스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1494년 봄 의회의 승인없이 특별세를 부과했다. 귀족들은 왕국 전역에서 세금에 항의했는데, 특히 헝가리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이었던 우일러키 뢰린츠(Újlaki Lőrinc)는 세금 징수원들을 살해하고 울라슬로를 황소라고 모욕했다. 이에 울라슬로는 1495년 초 우일러키 가문이 오스만 제국과 협력했다고 비난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우일러키 뢰린츠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항복하고 벌금을 납부하는 대가로 대부분의 영지를 보전받았다.

1495년 4월 울라슬로 2세와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바예지트 2세는 3년간 휴전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오스만 습격대는 이후로도 크로아티아와 헝가리 남부 일대를 주기적으로 습격했다. 1496년 5월, 헝가리 의회는 울라슬로의 재무관 에르누스트 지그몬드를 횡령 혐의로 고발했다. 울라슬로는 귀족들의 강권에 못 이겨 에르누스트를 체포했고, 에르누스트는 40만 골드 플로린의 몸값을 지불한 후에야 풀려났다.

1498년, 헝가리 의회는 지주들이 자신의 가신들에게 지불하기 위해 세금의 절반을 보유할 수 있게 하고, 가장 부유한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이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비하여 사병을 양성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령을 반포했다. 또한 귀족 배심원들이 회의에 참석해야만 왕실 평의회의 결정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법령도 반포되었으며, 도시와 시민들의 경제적 특권을 제한하는 법령도 통과되었다. 1500년 3월 11일에는 왕실이 귀족들의 토지 소유를 간섭할 수 없다는 내용의 법령도 반포되었다. 이로 인해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귀족들은 왕의 간섭을 걱정할 필요없이 평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울라슬로가 통치에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의회가 내정을 이끄는 것을 내버려두면서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나름의 조치를 내렸다. 1498년 7월 20일 크라쿠프에서 얀 1세와 군사 동맹을 맺어 오스만 제국이 쳐들어올 경우 서로 지원하기로 했다. 또한 코르빈 야노시와 화해하고 크로아티아의 방위를 그에게 맡겼다. 검은 군대가 해산되면서 국방력이 크게 약화된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다행히도 바예지트 2세가 페르시아와 지중해 연안 공략에 관심을 집중했기 때문에 생전에 오스만 제국의 대대적인 침략을 겪지 않았다. 1495년에 체결되었던 휴전 협약은 1498년, 1503년, 1511년에 갱신되었다.

울라슬로 2세는 어떻게든 왕위를 이어갈 아들을 낳으려 했으나 10여 년이 지나도록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1506년 7월 1일, 안 왕비가 아들 러요시를 낳았다. 그러나 안은 출산으로 인한 합병증에 시달리다가 아들을 낳은 지 3주가 조금 넘은 1506년 7월 26일 2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울라슬로는 아내의 죽음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이후로 죽을 때까지 기면증에 시달렸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약화되었던 왕의 권력은 유명무실해졌고,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 에스테르곰 대주교 바코치 타마시(Bakócz Tamás), 궁정백 페레니 임레(Perényi Imre), 그리고 재상 서트마리 죄르지(Szathmári György)가 왕을 대신하여 국정을 주도했다. 1516년 3월 13일 부더에서 사망했고, 3월 19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2.8.3. 러요시 2세모하치 전투(1516년 ~ 1526년)[편집]


울라슬로 2세가 사망한 뒤, 10살된 아들 러요시 2세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새 왕으로 등극했다. 어머니 안은 이미 죽었기에,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 에스테르곰 대주교 바코치 타마시(Bakócz Tamás), 궁정백 페레니 임레(Perényi Imre), 그리고 재상 서트마리 죄르지(Szathmári György)가 왕을 대신하여 헝가리의 국정을 주도했고, 보헤미아 쪽은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게오르크 변경백(Georg von Brandenburg-Ansbach 1484~1543)[29]가 담당했다.

러요시 2세는 재위 내내 별다른 실권이 없었고, 섭정들이 왕실의 수입을 낭비하는 바람에 가난에 찌들었다. 특히 에스테르곰 대주교 바코치 타마시가 사망한 후에는 바토리 추기경, 서포여이 추기경, 베르베츠 추기경이 에스테르곰 대주교 직위를 놓고 격렬하게 정쟁을 벌이면서, 국정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중앙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하자, 각지의 대귀족들은 정부를 대놓고 무시하고 백성들을 쥐어짜며 부귀영화를 누렸고, 민중은 자신들을 보살피지 않는 나라를 원망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도 군대에 제대로 된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국경지대의 요새들은 방치되었고 병사들의 기강은 문란해졌다.

1520년 오스만 제국파디샤로 즉위한 쉴레이만 1세는 러요시 2세에게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칠 것을 종용했으나 러요시 2세는 이를 무시했고, 오스만 제국의 사신을 처형해 쉴레이만 1세에게 보냈다. 쉴레이만 1세는 이 사건에 분노하여 헝가리 공격을 준비했다. 당시 헝가리의 재정 상태는 파탄 직전이었고 군대는 해체 직전까지 몰려있었다. 국경 수비대는 임금도 받지 못하고 있었고 국경 요새들은 제대로 된 보수 공사를 받지 못한채 폐허가 되가고 있었으나 러요시 2세는 돈이 없다는 이유[30]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교황과 손윗처남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빽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헝가리의 약점을 전부 파악한 쉴레이만 1세는 벨그라드 공략에 나서 10만 대군으로 당시 헝가리 왕국 최남단의 요충지이자 군사 요새였던 벨그라드를 손쉽게 함락시켰다. 로도스 섬 공방전이 마무리 되자 본격적으로 헝가리 침공을 개시한 쉴레이만 1세에 맞서기 위해 친정에 나섰으나 종조부 브와디스와프 3세처럼 오스만 기병대를 상대로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똑같은 실책을 저질러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궤멸당했고 본인은 패주 끝에 도망치다 강에 빠져 익사했다.


2.9. 삼분할된 헝가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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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3년 당시의 옛 헝가리 영토와 그 주변. 합스부르크 헝가리(A Magyar Királyság a kora újkorban)와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인 에르데이 공국과 고지 헝가리 공국, 오스만 직할령으로 나뉘었다.

러요시 2세는 생전에 아내 마리아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했다. 사생아로 버시 야노시를 두었으나, 그 누구도 왕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보헤미아와 크로아티아, 서부 헝가리는 울라슬로 2세와 막시밀리안 1세가 체결한 협약[31]에 따라 누나 언너와 결혼한 다른 매형인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를 국왕으로 옹립했지만, 동부 헝가리는 에르데이 지역을 중심으로 서포여이 야노시(Szapolyai János 1487?~1540)를 왕으로 옹립했다. 양측은 진정한 헝가리 왕이 되기 위해 전쟁을 벌였는데, 전세가 불리해진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며 신하국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쉴레이만 1세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그를 도와줬고, 헝가리 왕국은 양분되었다.

1541년 야노시가 죽고 갓난아이인 야노시 2세가 즉위하자, 어린 아이를 헝가리 왕에 앉힌다면 합스부르크 왕조에게 헝가리를 잃겠다고 판단한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 왕국을 분할하여 중부는 직할지로 삼고 비교적 안전한 동부만 야노시의 영토로 인정했다. 역사가들은 이 야노시의 헝가리를 동헝가리 왕국이라고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1570년에 야노시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2세에게 헝가리 왕위를 완전히 양도하면서, 그는 '에르데이 공작이자 헝가리 왕국 영토 일부의 지배자(여기까지가 공식 직함이다)' 가 되었다.

이리하여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헝가리, 오스만 헝가리, 에르데이 공국으로 삼분할되었다. 헝가리의 중심부는 오스만 제국의 최북단 영토로서 1699년까지 무려 170년이나 통치를 받아야 했으며, 서북부는 최후의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의 누나와 결혼한 페르디난트 1세가 서부를 기반으로 한 헝가리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선출되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이 시대는 헝가리인의 민족적 치부로 남았다. 한편. 헝가리는 문화적으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합스부르크령 헝가리를 제외하고 상당수 백성들이 칼뱅파로 개종하였다. 이로 인해 헝가리도 체코처럼 가톨릭 이외에 개신교 문화유산이 건재할 수 있었다.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에서 함락에 실패한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폴란드-리투아니아-베네치아 공화국-루스 차르국이 엮인 신성 동맹 군대의 역공을 받았다. 1686년 신성 동맹은 헝가리의 옛 수도였던 부더를 탈환해 1541년 부더 함락 이후 145년 동안 이어졌던 오스만의 지배를 끝냈으며, 이듬해인 1687년에는 161년 전 모하치 전투가 벌어졌던 그 모하치 평원에서 대승을 거두고 오스만 제국을 도나우 강 이남으로 몰아냈다. 오스만 제국군은 다시 도나우 강 이북으로 올라가 헝가리를 탈환하기 위해 10년 가까이 전쟁을 지속했으나 1697년 젠타 전투에서 사부아 공자 외젠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결국 오스만은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헝가리의 잔존 영토와 에르데이 공국을 오스트리아에 할양했다.[32] 이리하여 헝가리 왕국 전체가 중세에 그렇게 날을 세웠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한편, 임시수도 포조니에 있던 헝가리 의회는 합스부르크의 부다 수복과 2차 모하치 전투의 공로를 인정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왕위 사실상 세습을 인정하여 헝가리 왕위 후보자를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만 배출하도록 했다.

헝가리 전역을 손아귀에 넣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왕 레오폴트 1세는 제2차 빈 공방전의 원인[33]인 헝가리인들에 대한 보복으로 새로 탈환한 헝가리와 에르데이 공국을 새롭게 정복한 '적'의 영토로 취급하고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새로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된 헝가리 동부와 에르데이의 헝가리인 귀족들은 합스부르크의 탄압에 분개하였고 결국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지고 난 1703년 헝가리의 대귀족 라코치 페렌츠 2세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에르데이 공작으로 선출되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라코치의 독립전쟁은 수년을 끌었으나 제앞가림에 바빠진 루이 14세가 지원을 거부하였고 고립된 라코치의 독립군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지지하는 헝가리인 귀족들의 원군과 세르비아인·루마니아인 민병대에 의해 격파당했다. 독립전쟁을 진압한 후 레오폴트 1세는 1711년 반합스부르크파의 온상인 에르데이 공국의 주권을 폐지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서트마르 조약으로 헝가리 귀족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충성을 바치는 조건으로 합스부르크가 헝가리 귀족들의 권리를 존중해주는 타협을 맺었다. 이로서 헝가리 왕국은 완전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34]


2.10. 트란스라이타니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헝가리 왕국(1526년~1918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11. 현대 헝가리 왕국: 합스부르크 왕조 이후 호르티의 섭정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헝가리 왕국(1920년~1946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관직[편집]


헝가리 왕국의 귀족 작위와 직책들
헝가리 왕국 역시 중세 중기가 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왕국, 잉글랜드 왕국처럼 왕실을 중심으로 한 궁정 관직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헝가리 왕국은 몽골 제국의 침략 전까지는 봉건제가 제대로 잡지 않아 백작 이상의 대영주들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이스판이라는 왕이 임명한 지방관들이 지방의 귀족 세력들을 통제했다.다만 영문 위키백과에선 원어 그대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백작(count)으로 표기되기에 사실상 이스판=백작으로 보기도 하며 헝가리어 위키백과에서도 라틴어 표기로 comesrk 표기되어 있다.

  • 허르커
9~10세기 마자르 족들의 직책으로 사법 권한을 보유한 군사 지도자로 서부 트란스다뉴비아에서 그 역할을 수행했다.

  • 졸러
허르커와 동일한 직책으로 동부 에르데이에서 역할을 수행했다.

해당 직책들은 헝가리의 서구화와 함께 사라졌고, 중세 중기가 되면서 새로운 직책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1세기 초에 만들어진 직책으로 헝가리 국왕의 대리인이며 동시에 군사 보좌관으로서 전쟁시에 왕의 친정이 아닐 때는 총사령관을 맡기도 했으며, 궁정의 재정 관리 및 법률 업무등을 담당했다.

  • 왕실 법관(Országbíró)
1127년에 만들어진 직책으로 궁중백 다음으로 왕실 재판정의 2인자였다.

  • 에르데이 군공(Erdélyi vajda)
12세기에서 16세기까지 에르데이 전역을 총괄한 직책으로 에르데이 지역의 이스판들을 통제했으며, 나아가 행정, 사법, 군사권을 장악했다.

  • 크로아티아 영작(horvát bán)
10세기서부터 존재한 직책으로 본래는 10세기 말 크로아티아 국왕의 권력이 약해지면서 왕을 대리하는 직책이었 12세기경 크로아티아 왕국이 헝가리에 병합된 후 크로아티아의 총독을 가리키는 직책을 의미했다.

  • 슬라보니아 영작(macsói bán)
1224년 행정적으로 크로아티아에서 분리된 슬라보니아의 총독격인 직책이다.

  • 세베린 영작(szörényi bán)
1227년 지금의 올테니아 지역(Oltenia)[35]을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책이다.

  • 세케이 이스판(székelyispán)
1228년 세케이 지역을 담당하기 위해 신설된 이스판

  • 재무대신(tárnokmester)
1214년 왕실 재정을 감독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책으로 1376년 이전까지는 부다의 사법권을 보유했으나 이후 포조니, 너지솜버트, 쇼프론, 커셔, 에페례시, 바르트퍼에서도 사법권을 행사했다. 16세기 경 폐지되었다.

  • 거마 관리관(főlovászmester)
1225년 왕실 마굿간을 관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직책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콘스테이블과도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었다.

  • 헌잔 관리관(főpohárnok,)
성경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 변역되는 그 직책으로 1148년 기록상 언급되었으며, 또한 왕의 안전과 직결되어 있기에 왕의 최측근들이 맡은 자리였던 만큼 1220년대에 고위 직책으로 분류되었다.

  • 집사장(étekfogómester)
프랑스의 세네샬, 잉글랜드의 스튜어트에 대응되는 직책으로 1148년 이전에 만들어졌다.

  • 테메슈 주 이스판(temesi ispán)
12세기경 테메슈바르를 담당하기 위해 신설된 이스판

  • 포조니 주 이스판(pozsonyi ispán)
1000년경에 포조니를 담당하기 위핸 신설된 이스판

이밖에도 1760년대 합스부르크 가문의 국왕들을 호위하기 위한 헝가리 귀족들로 구성된 귀족 경비대를 지휘한 왕립 귀족 경비대장(királyi nemesi testőrség), 1439년 성 이슈트반 왕관의 수호를 위한 왕관 경비대장(Koronaőrök), 1181년 서유럽의 첸슬러와 어느 정도 대응되는 재상(Kancellár), 1464년 왕실 판사와 별개의 사법직이었던 대법원장, 헝가리 1260년 왕실 재산의 회수와 법률 사건에서 왕을 대표하는 왕립 성왕관의 검사(Királyi ügyigazgató) 등이 있습니다.


4. 관련문서[편집]



[1]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한 뒤, 1946년까지 사용된 헝가리 왕국 국기는 이렇다.
[2] 현재 오스트리아부르겐란트, 슬로베니아의 프레크무레(Prekmurje) 지방, 세르비아보이보디나 자치주, 루마니아트란실바니아, 우크라이나자카르파탸, 슬로바키아 전역.[3] 하지만 정작 카를 1세의 복위는 거부하고 호르티 혼자 섭정이라는 직함으로 독재를 했다.[4] 전설에 따르면, 셜러몬은 이때 죽지 않았고 페체네그인을 떠나 헝가리에 은밀히 들어간 뒤 수도자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구호품을 배포하던 라슬로 1세 앞에 변장한 채 나타났다가 왕이 자신을 알아보자 달아났다. 이후 이스트리아 반도풀라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5] 현재의 베네룩스 3국.[6] 두 사람은 라슬로 1세의 누이 에우페미아의 아들이었다.[7] 현재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8] 여기서 쫓겨난 튜튼 기사단이 간 곳이 바로 동프로이센 지역이다.[9] 바나트(Banat) 동부 산악 지대로 중심지는 커란셰베시. 카란세베스 전투가 이 일대에서 벌어졌다.[10] 쿠만족이 살던 곳으로 오늘날의 몰다비아 일대.[11] 에르데이 지역 남부 브란 일대.[12] 현재 루마니아 코들레아(Codlea).[13] 현재 부더페슈트의 머르기트 섬.[14] 현재 세르비아 시르미아주 스타리 슬랑카멘.[15] 헝가리어 발음은 '로베르트', 이탈리아어 발음은 '로베르토'로 둘 다 같은 이름이다.[16] 현재의 슬로바키아 스피슈주.[17] 조반나 1세의 여동생 마리의 남편이기도 했다.[18] 비타우타스의 아버지.[19] 딸 야드비가와 결혼하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아버지.[20]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의 4남.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독일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들은 모두 이 사람의 후손이다.[21] 헝가리어 발음은 '라슬로', 이탈리아어 발음은 '라디슬라오'로 둘 다 같은 이름이다.[22] 미슈콜츠 근교의 성.[23] 베틴 가문의 초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동생으로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공동 설립자.[24] 현재 오스트리아 귀싱(Güssing).[25] 현재 루마니아 클루지나포카의 마나슈투르 지구.[26] 현재 루마니아의 드로베타투르누세베린.[27] 어차피 황제(독일왕) 선거는 만장일치가 아니라 과반수였기 때문에 블라디슬라프가 승인하건 말건 막시밀리안의 독일왕 선출은 인정되었다.[28] 에른스트의 동생으로 베틴 가문 알브레히트계의 시조.[29] 호엔촐레른 가문의 안스바흐 방계 출신으로 초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의 둘째 형이다. 동생이 독일 기사단국을 세속화하여 최초의 루터파 국가로 만들었듯, 형도 독일 종교 개혁에 헌신한 인물이었다.[30] 부왕 울라슬로 2세가 헝가리를 이미 나락으로 보냈고, 본인도 향락에 빠져 살았다.[31] 울라슬로 2세가 자식을 두지 못하고 사망할 경우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점유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32] 단, 현재의 티미쇼아라를 중심으로 하는 바나트(Banat) 지방은 1718년에 체결된 파사로비츠 조약 전까지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남았다.[33] 1670년 반합스부르크파 헝가리 귀족들이 프랑스와 오스만의 지원을 얻어 합스부르크를 전복하려던 즈린스키 역모 사건이 발각되어 여기에 가담한 귀족들이 대거 처형당했는데 그중에는 훗날 반란을 일으키는 퇴쾨이 임레의 아버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를 죽인 합스부르크에 대한 복수를 꿈꾸던 퇴쾨이 임레는 1678년 반란을 일으켜 상부 헝가리 대부분을 장악하고 오스만에게 신종하는 조건으로 오스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 요청을 받아들인 메흐메트 4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을 정복하기 위해 15만 대군을 빈으로 보내면서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다.[3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가문과 헝가리 귀족들과의 사이는 마리아 테레지아 시절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좋지 않았다. 물론 합스부르크 왕가는 전임 왕조인 야기에우워 왕조와 가장 가까운 인척으로서 정당하게 헝가리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위치였지만, 헝가리 귀족들에게는 자력으로는 맞설 수 없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선택한 차악이었다보니 좋을 리가 없었다. 특히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독립전쟁이나 1848년 헝가리 혁명 등 헝가리 동부와 에르데이를 기반으로 하는 귀족들은 1526년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충성한 헝가리 서북부크로아티아에 비해 반항심이 거셌다.[35] 현재 루마니아 왈라키아 지역의 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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