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아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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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반 아센 2세.jpg
이름
이반 아센 2세
(영어: Ivan Asen II, 불가리아어: Иван Асен II)
출생
미상
사망
1241년 5월 또는 6월
직위
불가리아 제2제국 차르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불가리아 제2제국 5대 차르. 불가리아 제2제국 역사상 최고의 차르로 손꼽히는 명군이다.


2. 생애[편집]


페터르 4세와 함께 동로마 제국에 맞서 싸워 불가리아 제국의 부활을 이끌어낸 이반 아센 1세의 아들이다. 1207년 10월 칼로얀이 테살로니키를 포위 공격하던 중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많은 보야르들은 그를 새 차르로 선출하려 했다. 그러나 보릴이 칼로얀의 미망인 데사슬라바와 결혼하고 차르로 선출되었다. 보릴은 잠재적인 정적인 어린 이반을 죽이려 했고, 이반은 삼촌의 마수를 피해 쿠만족의 영역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키에프나 할리치로 도피했다. 그 후 잠자코 세력을 기르던 그는 보릴이 무능한 통치로 일관하여 불가리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1218년 귀국한 뒤 군대를 일으켜 토벌군을 격파하고 보릴을 타르노보에 가두었다. 몇달간 이어진 공성전 끝에 타르노보를 공략하고, 보릴을 실명형에 처했다.

보야르들의 추대로 새 차르에 즉위한 그는 우선 적을 줄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1218년 말 헝가리 왕 언드라시 2세가 제5차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귀환길에 올랐다. 언드라시 2세는 보릴을 후원했기 때문에, 보릴을 축출한 그와 갈등을 빛을 소지가 있었다. 그는 우선 군대를 이끌고 언드라시 2세의 앞을 가로막고, 그의 딸 마리아를 자신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할 때까지 헝가리로 돌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언드라시 2세는 이를 받아들였고, 1221년 헝가리가 점령하고 있던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불가리아에게 돌려줬다.

1221년 새로 선출된 라틴 제국 황제 로베르가 프랑스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자, 그는 불가리아 영토를 지나가게 해줬고, 극진한 대우를 해줬다. 그 덕분에 불가리아와 라틴 제국의 관계는 로베르의 통치 기간 동안 화목했다. 이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고,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의 동생 마누일 두카스와 자신의 딸 마리아를 결혼시켰다. 1228년 로베르가 죽고 11살 된 동생 보두앵 2세가 즉위했다. 그는 라틴 제국의 섭정이 되고 싶었기에 딸 엘레나를 보두앵 2세와 결혼시키자고 제안했으며, 이피로스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라틴 제국의 귀족들은 그를 경계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피로스의 군주이자 테살로니키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두카스 콤니노스는 이 소식을 듣고 불가리아를 경계했다. 그는 자신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릴 때 불가리아가 뒤통수를 칠 수도 있겠다고 여겼다. 1228년 9월, 그는 라틴 제국과 1년간의 휴전을 합의하고 불가리아를 먼저 손봐주기로 했다. 1229년 말, 그는 테살로니키에 8만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한 뒤 1230년 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는 척 했다가, 갑작스럽게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에브로스 계곡을 따라 불가리아로 진격했다. 테오도로스는 승리를 확신하여 처자식까지 거느리고 진군로 주변의 마을들을 약탈하며 천천히 진군했다. 그러나 이반은 당황하지 않고 수천 명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반격에 착수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반 아센 2세는 창끝에 테오도로스의 배신으로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상호방위조약서를 달고 있었다고 한다.

1230년 4월, 이반은 클로코트니차 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테살로니키 제국군을 급습했다.(클로코트니차 전투) 기습을 예상치 못했던 테살로니키 제국군은 맥없이 무너졌고, 테오도로스는 포로로 붙잡혔다. 그는 평화 협약을 어기고 침략한 죄를 물어 테오도로스를 실명시키고 타르노보의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그의 군대는 이피로스로 쳐들어갔다.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 프릴리프, 세레스, 아드리아노폴리스, 데모티카, 플로브디프 등지가 불가리아에 넘어갔고, 테살리아의 대 블라키아도 함락했으며, 과거 보릴에게 반기를 든 뒤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알렉시오스 슬라브의 체피나 성도 공략했다. 테오도로스의 뒤를 이어 테살로니키 제국의 황제가 된 마누일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불가리아의 봉신이 되었다.

아센은 정복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수비대를 중요한 요새에 배치하고 부하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도록 했다. 하지만 과거 칼로얀이 정복지 주민들을 학살하다가 그리스인들의 분노를 샀던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지방 관료들이 계속 지위를 유지하도록 했고 백성들을 가급적 해치지 않았다. 그는 타르노보로 귀환한 뒤 승리를 기념하는 금화를 주조하였고, 성 순교자 성당을 세우고 성당의 기둥 중 하나에 자신을 "불가리아인, 그리스인, 및 다른 종족의 차르"라고 알리는 글귀를 새기게 하였다. 또한 동로마 황제를 모방하여 황제의 휘장을 갖추는 등 장차 발칸 반도 전역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망을 드러냈다.

1231년 라틴 제국의 귀족들이 예루살렘 왕이었던 장 드 브리엔을 보두앵 2세의 섭정으로 선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반은 니케아 제국과 손을 잡아 라틴 제국을 압박하기로 하고, 세계총대주교 게르마노스 2세에게 사절을 보냈다. 한편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231년 5월 9일 헝가리아의 언드라시 2세에게 라틴 제국의 적들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라고 촉구했다. 안 그래도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넘겨준 것에 불만이 가득했던 언드라시 2세는 이를 명분삼아 불가리아를 침공하기로 했다. 황태자 벨러는 부친의 지시에 따라 1231년 말 또는 1232년 베오그라드와 브라니체보를 탈환했다. 뒤이어 스레데츠를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벨러는 1233년 왈라키아 서부 지역을 장악하고 불가리아의 반격을 저지하고자 여러 요새를 세웠다.

1233년, 세르비아 귀족들이 불가리아의 지원에 힘입어 스테판 라도슬라프를 축출했다. 뒤이어 세르비아 왕위에 오른 스테판 블라디슬라프는 아센의 딸 벨로슬라바와 결혼했다. 그 후 아센은 불가리아 교회를 정교회에 복귀시키기 위한 협상을 지속했고, 1235년 니케아 제국 황제 요안니스 3세의 후계자 테오도로스 2세와 자신의 딸 엘레나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엘레나는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고 요안니스 4세, 이리니 라스카리나, 마리아 라스카리나, 테오도라 라스카리나, 에우도키아 라스카리나를 낳았다. 그 후 니케아 총대주교 게르마노스 2세가 불가리아 총대주교구를 부활시키기로 하면서, 불가리아 교회는 정교회에 복귀했다.

그렇게 니케아 제국과 손을 잡은 뒤, 아센은 라틴 제국에 대한 공세를 개시해 마리차 강 서쪽 지역을 정복했다. 이후 니케아 제국군과 연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지만, 1235년 말 베네치아 함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면서 포위망을 풀 수 밖에 없었다. 이듬해 초 다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지만 공략하지 못했다. 1237년 라틴 제국의 섭정을 맡던 장 드 브리엔이 죽자, 그는 난공불락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계속 공격하기보다는 라틴 제국과 손을 잡기로 마음 먹고, 니케아 제국과 동맹을 파기하고 엘레나를 불가리아로 데려와서 보두앵 2세와 결혼시키려 했다. 1237년 여름 라틴군과 연합하여 니케아 제국에 속한 카에노프루리온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그런데 타르노보에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아내 안나 마리아와 아들 한 명, 불가리아 총대주교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이를 신의 징벌로 생각해 철수하였고, 딸 엘레나도 니케아로 돌려보냈다.

1237년, 이반은 7년간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테오도로스의 딸 이리니와 재혼하였고,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테오도로스를 석방했다. 테오도로스는 테살로니키로 돌아간 뒤 쿠데타를 일으켜 동생 마누일을 몰아내고 테살로니키를 장악했다. 하지만 실명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들 요안니스 콤니노스 두카스를 신임 황제로 세우고, 자신은 후견인을 맡았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이반이 이단자들을 보호한다고 비난하고 1238년 초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에게 불가리아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라고 촉구했다. 벨러 4세는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지만, 내심 강성한 불가리아와 싸우고 싶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읽은 이반은 1239년 시몽 드 몽포르 등 귀족 십자군이 불가리아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행진하는 걸 허용했고, 1240년 5월 헝가리에 사절을 보내 키예프를 공략하고 쿠만족을 축출한 몽골의 예상되는 침략에 맞서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파일:이반 아센 2세 시기 불가리아 제국 영역.png

이반은 군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을 뿐만 아니라 내치에서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불가리아 차르로서는 최초로 동로마 제국의 것을 모방하지 않은 독자적인 화폐를 주조하였으며, 무역과 조세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립, 집행했다. 또한 각지에서 독자적인 통치를 하던 보야르들을 복종시켜서 왕권을 강화했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요안니스 아크로폴리티스는 그를 "야만인들 사이에서 자기 민족 뿐만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한 자"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1241년 5월 또는 6월에 사망했을 때, 후계자는 7살 밖에 안된 칼리만 아센 1세 뿐이었다. 게다가 1242년부터 몽골군이 불가리아를 본격적으로 침략하면서, 이반이 일궈낸 강대한 불가리아 제국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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