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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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범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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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국제대학교 축구부 코치

이름
오승범
吳承範 / Oh Seung-Bum

출생
1981년 2월 26일 (43세)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조건
174cm, 68kg
직업
축구선수(중앙 미드필더 / 은퇴)
축구코치
학력
제주서초 - 제주중앙중 - 오현고
프로 입단
2000년 성남 일화 천마
소속
선수
성남 일화 천마 (2000~2004)
광주 상무 불사조 (2002~2003 / 군 복무)
포항 스틸러스 (2005~2007)
제주 유나이티드 FC (2008~2014)
충주 험멜 (2015)
강원 FC (2016~2017)
지도자
제주국제대학교 (2018~ / 코치)
국가대표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5경기 (대한민국 U-23 / 2003~2004)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헌역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이다.


2. 클럽 경력[편집]



2.1. 프로 입단 전[편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출신으로 제주중앙중학교를 졸업하고 오현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오현고등학교 축구부 진학 후 백호기 청소년 축구대회 등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활약과 인상적인 장면들을 자주 선보였고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축구부 진학이 아닌 성남 일화 천마로 연습생 신분으로 성남 일화 천마에 입단하게 된다.


2.2. 성남 일화 천마[편집]


오현고등학교을 졸업하고 오현고등학교 축구부 시절의 활약 및 가능성을 인정 받아 연습생 신분으로 성남 일화 천마 2군에 입단하였다. 입단 후 주로 2군리그에 출전하면서 1군 진입을 노렸지만 당시 성남 일화 천마은 차경복 감독 지휘 하에 K리그를 평정하다 못해 아주 씹어먹다시피 하던[1] 그런 팀이었고 고졸 풋내기였던 오승범의 출전 기회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오승범은 조기에 군 입대를 선택하였고 2002년부터 두 시즌 간 광주 상무 불사조에서 활약하였다.

전역 이후 성남 일화 천마에 복귀한 오승범에게 거는 성남 일화 천마 팬들의 기대는 컸으나 당시 프로 무대에 갓 데뷔한 김철호 선수가 급부상하는 바람에 또 다시 백업 멤버 신세를 져야만 했다. 결국 2005 시즌을 앞두고 오승범은 포항 스틸러스로의 이적을 결심하게 된다.


2.2.1. 광주 상무 불사조 (군 복무)[편집]


성남 일화 천마 입단 후 출전 기회를 받기가 힘들자 조기 군 입대를 선택하였고 2002년부터 두 시즌 간 광주 상무 불사조에서 활약하게 된다. 성남 일화 천마 시절보다는 출전 기회가 보장된[2] 소속팀의 특성상 오승범은 자신의 기량을 펼칠 기회를 충분히 얻게 되었다.


2.3. 포항 스틸러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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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스틸러스 시절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 후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의 지도 하에 주전급에 가까운 활약을 보였다. 특히 2006 시즌 광주 상무를 상대로 보여준 환상적인 시저스킥 골은 오승범의 개인 커리어 사상 최고의 골임과 동시에 2006 K리그 베스트골 후보로도 손색이 없는 골이었다.

그러나 보다 수준급의 미드필더를 원했던 포항 스틸러스와 연고지역 출신 선수를 영입하여 마케팅 효과를 노렸던 제주 유나이티드의 합의에 하여 오승범은 김재성 선수와 맞트레이드로 고향 팀인 제주 유나이티드로 보금자리를 옮기게 된다.


2.4. 제주 유나이티드 FC[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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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 선수였던 제주 유나이티드 시절

2008 시즌을 앞두고 김재성 선수와 맞트레이드로 제주 유나이티드에 입단하게 되면서 2008년부터 고향 연고 팀에서 뛰게 되었다. 입단 후 2008년 3월 15일 대전 시티즌과의 원정 경기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면서 제주 유나이티드의 시즌 첫 골이자 고향 팀으로 이적 후 첫 득점이라는 큰 의의를 두었다.

이후 오승범은 제주 유나이티드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활약하였고[3] 중원 사령관이 되어 특히 2010 시즌에는 구자철, 박현범 선수와 호흡을 맞추며 제주 유나이티드의 K리그 준우승의 큰 기여를 한다.

2012 시즌부터는 구단이 송진형 선수와 권순형 선수라는 수준급의 미드필더 듀오를 영입함에 따라 주전 자리에서는 밀려났지만 위 두 선수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살려 팀이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출신으로 연고지 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기 때문에 구단에서 방출되거나 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13 시즌에도 리그 31경기에 출전하여 변함없는 활약을 펼쳤다. 권순형이 부상으로 개점 휴업하고 윤빛가람이나 송진형은 많은 활동량을 가져가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중원에서 궂은 일은 홀로 도맡아 했다. 사실상 제주 유나이티드 미드필드진의 기둥이나 다름 없는 역할을 수행해 주었다.

2014 시즌에는 윤빛가람 선수가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되고 유스 출신인 장은규 선수가 주전급으로 급성장하면서 백업 요원으로 뛰고 있다.


2.5. 충주 험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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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전이었던 충주 험멜 시절

2015 시즌을 앞두고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계약이 만료되자 1년 단기 계약을 맺고 충주 험멜에 입단하였다. 입단 후 주전 미드필더로 뛰면서 팀의 중원을 지켰고 2015 시즌 리그 37경기 출전 3골 4도움을 기록하면서 자신의 커리어 사상 최대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2.6. 강원 FC[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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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마지막 강원 FC 시절

2016 시즌을 앞두고 충주 험멜과의 계약이 만료되자 과거 제주 유나이티드 시절 팀 동료였던 심영성, 허범산 선수와 함께 강원 FC에 입단하였다. 입단 당시 나이를 감안하면 강원 FC에서 은퇴할 확률도 높아보인다. 입단 첫 해인 2016 시즌에는 주전 미드필더로 뛰면서 강원 FCK리그 클래식 승격에 큰 기여를 했으며 시즌을 마치고 공로를 인정 받아 계약 기간이 1년 남았지만 파격적으로 인상된 연봉으로 재계약을 맺었다.

이후 2017 시즌을 앞두고 강원 FC가 왠만한 기업 구단 못지않는 폭풍 투자로 팀을 리빌딩하면서 주로 선발보다는 로테이션 선수로 활약하였으며 강원 FC의 창단 첫 상위 스플릿 진출 달성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년 동안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종료 후 연장 계약 없이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2.7. 현역 은퇴[편집]


강원을 떠난 뒤 현역 은퇴를 한 것으로 추정됐고, 2019년 기사를 통해 고향 제주도로 돌아가 제주국제대학교의 코치가 된 것이 알려졌다. #


3. 국가대표 경력[편집]


광주 상무 불사조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김호곤 감독이 이끌던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부름을 받게 된다. 하지만 김두현, 김정우 선수 등 쟁쟁한 경쟁자들의 존재로 인해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최종엔트리에는 탈락했지만 이 때의 경험은 오승범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부지런히 중원을 누비며 수비적으로 상당한 기여를 보이는 선수로 언성 히어로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유형으로 알려져 있다. 전성기 시절인 포항 스틸러스,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후방에서 이런 역할로 공격 성향이 돋보이는 미드필더로 선수들이 마음 놓고 공격에 전념하게 만들 정도. 이후 K리그 챌린지를 거치면서 하락세를 타는 것이 아니냐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으나, 노련한 플레이로 젊은 선수의 정신적 지주 역할까지 하고 있다. 여기에 자기 관리도 철저하여 3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도 풀타임 경기가 상당한 편에다가 활동량이나 기여도도 한결같다는 평이다.


5. 여담[편집]



  • K리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2010년 12월 1일 FC 서울과의 쏘나타 K리그 챔피언십 2010 챔피언 결정전 1차전 경기에서 전반전 종료 직전 시도한 슈팅이 김용대 골키퍼에게 막힌 순간이라고 한다. 선수 본인 밝힌 이유에 따르면 만약 그 슈팅이 득점으로 연결되었더라면 챔피언 결정전 1차전 경기 승리와 K리그 우승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자책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1] 2001~2003 시즌 3년 연속 K리그 제패[2] 프로 무대였던 K리그에 유일하게 아마추어팀으로서 참가하고 있던 광주 상무 불사조의 특성상 출전 기회가 골고루 주어졌다.[3] 맞트레이드 상대였던 김재성 선수도 포항 스틸러스에서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이끄는 등 대활약했기 때문에 이 트레이드는 양 팀에게 윈-윈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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