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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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언론인, 관료.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동아일보사 사장을 지냈다.
2. 생애[편집]
1919년 8월 5일 황해도 옹진군에서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오택관과 어머니 한양 조씨 조관애(趙寬愛, 1896. 7. 15 ~ 1962. 8. 10)[3]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일본 릿쿄대학(立敎大學)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광복 이후 미군정청 후생부 시설국장으로서 관계에 진출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감찰위원회 비서과장에 임명되었다.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내무부 총무과장(서기관급)에 임명되었다. 1951년 7월 사회부 후생과장, 이어 11월 국무총리 비서관이 되었다.
1952년 11월 문교부 유엔한국재건단(UNKRA)의 연락관이 되었고 1955년 3월에는 국무원 사무국 이사관에 임명되었다. 1956년에는 36세 젊은 나이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제7대 공보실장(公報室長)으로 발탁됐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는 구황실재산사무총국[4] 사무국장으로 보임되었는데, 이승만 정권 시절의 전임 국장들과 달리 비리투성이 구황실재산사무총국을 개혁하려 애썼으나[5] , 관료들의 조직적인 증거 인멸 등에 부딪히던 중 1960년 6월 7일 일어난 화재로 구황실재산 사무총국의 서류가 거의 모두 불타버려 증거가 사라져 실패했다.
또한 6.25 이후 이승만에 의해 인수재[6] 에서 귀양살이 아닌 귀양살이를 하던 순정효황후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신경을 많이 썼다. 그래서 순정효황후도 무척 고마워하며 신임했다고 하며, 창덕궁 낙선재로 환궁할 수 있도록 힘쓴 것도 이 사람이다.
이후 대한여행사 이사장으로 취임했다가 5.16 직후인 1961년 7월부터 1962년 6월까지 제12대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어 1964년 1월부터 1965년 6월까지 제3대 국제관광공사 총재를 역임했다. 이 시기에 태평양지역관광협회 회장을 맡게 되어 싱가폴·태평양지구관광협회총회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기도 했으며, 미국, 영국, 독일 등 각국 정부 초청으로 행정제도 시찰하기도 하였다. 1970년부터 1974년까지는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고문으로 재임하였다.
1977년부터 동아일보 이사로 봉직했고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동아일보 16대 사장을 지냈으며 2012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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