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복/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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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유정복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공직 생활
2.3. 정계 입문
2.4. 제14대 인천광역시장 시절
2.5.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와 또 한 번의 낙선
2.7.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출마, 그리고 4년만에 복귀 성공
2.8.1. 지지율
2.8.1.1. 리얼미터


1. 개요[편집]


유정복 인천광역시장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1957년 6월 16일, 경기도 인천시 송림동[1]에서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송림국민학교, 선인중학교[2]를 졸업하고 제물포고등학교를 20회로 졸업했는데, 동기 중에 같은 당 김동완, 이원복 의원이 있다.

1976년 연세대학교 정법대학[3]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해 1980년에 졸업했다. 원래는 외교관이 될 생각이 있었으나 한국 외교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행정관료(행정고시 합격)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병역 의무는 학사장교로 이행했으며 학사 1기이다. 그리고 육군학사장교 총동문회장까지 역임하면서 학사장교의 상징이 된 인물이다. 학사장교 총동문회 회장 시절에는 매해마다 학사장교 후보생들이 화산 유격장에서 유격훈련을 받는 기간에 방문해서 위문해줬다.

역대 인천광역시장(인천직할시장 및 경기도 인천시장 포함) 중 인천 출신으로서 두 번째이며 1995년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 민선 시장으로는 최초의 인천 출신 시장이라고 한다. 인천 출신 첫 인천시장은 김정렬(19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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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석동 집에서 형제들과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유정복이다.


2.2. 공직 생활[편집]


연세대 4학년 재학 중이던 1979년 말에 제23회 행정고시에 합격했고, 합격 이후 1981년학사장교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한 것을 제외하면 관료로 살아왔다.

1984년 전역 이후 총무처에서 첫 공직 생활을 시작했고, 내무부 재정국, 행정국, 지방자치기획단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했고, 이 때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진학해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2년 말, 내무부의 핵심 보직인 총무과 인사계장을 맡다가 1993년 초, 서기관으로 승진하고 경기도청으로 전출해 요직 중의 요직인 기획관리실 기획담당관을 맡았다.

1994년 관선 김포군수에 취임, 당시 38세로 전국 최연소 군수가 되어 화제가 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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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단면 인천 편입에 관한 김포군수 의견서

참고로 1995년 3월 1일로 예정된 행정구역 대개편을 1년 앞둔 1994년에 작성된 검단면 인천 편입 관련 정부문서를 보면 유정복 당시 김포군수가 쓴 공문도 있다. 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면서도 정부의 방침에 따라야 하는 관선 단체장의 입장이 잘 드러난다.

그 후 1995년에는 잠시 관선 인천광역시 서구청장을 역임하다가 퇴직했다. 본래 민주자유당 당적으로 김포군수 선거에 나가려고 했으나 당에서 반대해 무산되었고, 아예 인천으로 좌천까지 당했다고 한다. #


2.3. 정계 입문[편집]


1995년 6월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여당도, 야당도 아닌 무소속으로[5] 김포군수에 당선되는 저력을 발휘했다. 즉, 민선 최초이자 마지막 김포군수를 지냈다.

당선 후, 잠시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가, 다시 탈당해 차기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다. 그의 초선 임기 막판이던 1998년 4월 김포군이 김포시로 승격하고,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김포시장 선거에 출마해[6] 재선에 성공하며 2002년 6월까지 김포시장으로 재직하였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시장 3선을[7] 노렸으나 한나라당 김동식 후보에게 패배하며 낙선했다.

낙선 후에는 잠시 정계와 거리를 두고 대학 교수로 잠시 활동하다가 그 해 대선 직전인 11월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한나라당 입당 후인 2004년 탄핵 정국에도 불구하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포시 지역구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국회에 입성, 화려하게 재기한다.[8]

이후 김포시 지역구에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로 재선했고 김포 도시철도 지하화를 위한 예산 확보와 김포한강로 조기개통을 업적으로 김포 도시철도의 조기 개통을 공약하여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다.

대표적인 친박 인사였으나, 친이계와도 스스럼없이 지냈는지 이명박 정부에서 농림수산식품부장관을 하기도 했다.[9][10] 이후 박근혜 정권에 들어서자 안전행정부 장관에 취임했다.

2.4. 제14대 인천광역시장 시절[편집]


장관과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며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출신지였던 인천광역시장으로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하지만 안그래도 새누리당을 구렁텅이에 빠뜨려버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데다 앞서 서술한 안전행정부의 경력의 직격탄을 맞으며 불안한 출발을 끊어야 했다. 하지만 경쟁상대인 송영길 전 시장이 새해 벽두부터 측근비리로 당시 유정복 후보는 반등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강한 여당 시장, 인천발 KTX를 강하게 밀고 나갈 것을 공약으로 내걸어 1%의 근소한 득표차로 당선에 성공한다. 원 지역구인 김포시 지역구는 측근이었던 홍철호 크레치코 대표에게 넘어간다.

시장에 재임하고 첫 관문이었던 인천 아시안 게임 행사를 지휘했으나, 사실상 실패작으로 끝나며 주민들의 평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시안 게임의 각종 논란은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사건 사고 문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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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는 중화권 여행객들 유치를 위해 대만에 방문, 주리룬 중국 국민당 주석(대표)(신베이 시장 겸직), 커원저 타이베이 시장, 마잉주 총통과 회담을 갖기도 했다.

메르스가 전국을 덮칠 당시 다른 지자체장과의 협연으로 성공적으로 방역을 마쳤고, 전국 지자체 중에서 낮은 발병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2016년 10월 19일, 재임기간 중 인천광역시 인구가 300만을 돌파했다. #

2016년 10월 광역자치단체장 직무수행 지지율 35.5%로 전국 꼴찌를 기록했다.#홍준표보다도 낮고 1위인 안희정충남지사의 절반에 불과하다. 일단 시정 홍보 자체가 안되어 시민들이 시에서 어떤 정책을 펼치는지 알지 못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

2017년 3월에도 17명 중 15위를 기록했다.http://m.urinews.org/41917 하지만 인천광역시 재정을 성공적으로 관리해 인천시 부채 3조 7,000억원을 탕감했다는 점에서 여론이 점점 좋아져 그 홍준표에게 조차도 경선없이 공천을 사실상 약속받을 정도까지 회복했다.

그러나 인천광역시 부채감축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박남춘 전 의원의 주장에 의하면 감축된 3조 7,000억 중 7,000억은 재난구호기금으로 시에서 매년 의무적으로 편성해야 할 예산인데 편성되질 못해서 줄어든 것이고, 3조원 중 2조 원은 인천시가 아니라 공기업에서 감축한 것으로 실질적인 감축 예산은 1조원이라는 것이다. 또한 채무 비율의 경우 1조 원 감축과 더불어 3조원의 예산을 늘렸기 때문에 비율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점을 자신의 재선 도전의 가장 큰 경쟁자인 더불어민주당박남춘 전 의원에게 국정감사에서 공개적으로 지적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초 송영길 전 시장이 선거 당시 민주당에서 과거 인천시 부채를 계산할 때 공기업 부채를 시 본청 부채에 합쳐 계산했고 유정복 시장 재임 시기 정부로부터의 거액의 보통 교부금 지원 증가는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시 공기업인 인천도시공사의 부채는 천문학적이었고 도시공사가 부채를 상환하지 못하면 결국 시에서 도시공사의 부채를 책임져야 한다. 이는 진보 계열 시민단체에서도 누누히 강조하던 것이다. 토지 매각으로 부채 감축을 했다는 것도 박 의원의 소속 정당이 인천시정을 이끌었을 때 역시 천문학적인 액수의 터미널 부지를 매각하고도 재정이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고 역으로 자유한국당으로부터 지적받기도 했다. 그 3조의 예산 증가도 결국 세입이 그만큼 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2018년 4월, 홍준표자유한국당 대표가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위장평화쇼라는 발언을 하자 되려 국민의 기대와 염원에 찬 물을 끼얹었다며 홍준표를 공개 비판했다. 사실 인천이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수혜를 입을 수 있는 지역 중 하나이기 때문.

소속 정당인 자유한국당의 낮은 지지율, 박근혜 전 대통령과 가까웠던 이유로 여론조사에 의하면 6.13 지방선거에서의 지지율은 경쟁자인 박남춘 후보에 비해 많이 낮게 나오나 시정 평가에서 긍정 여론이 48.5%, 부정 여론이 37.4%로 긍정 여론이 10% 이상 높은 것이 주목된다.

그러나 같은 당 정태옥 의원이 사전투표가 진행 중이던 6월 7일 이부망천이라는 희대의 망언을 내뱉었고, 유정복 본인도 발빠르게 정태옥 의원의 사퇴요구와 함께 화살을 박남춘 후보에게 돌리려 애썼으나 결국 2018년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35.4%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57.7%의 득표율을 기록한 더불어민주당 소속 박남춘 후보에 크게 밀려 재선에 실패했다. 이후에도 자신의 원래 정치 거점이었던 김포로 돌아가지 않고 인천에 남을 것을 밝혔는데, 2020년 총선에서 남동구 갑[11] 선거구와, 중구·동구·강화군·옹진군[12] 선거구 중 한 곳을 선택해 출마할 것이라는 설이 정계에 나돌았다. 만약 같은 당의 홍일표 의원이 최종적으로 당선무효형을 받게된다면 수도권 지역구[13]를 지키기 위해 중량급 인사를 내보낼 가능성이 높아 재보궐 출마 가능성도 열려있었으나, 의원 임기가 끝나고 형이 선고되어 불발되었다.

2.5.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와 또 한 번의 낙선[편집]


인천시장 낙선 이후 해외 유학을 떠났다가 2019년 6월경에 다시 입국하여 정치활동을 재개할 준비를 하였다. 당과 지역민들의 여론을 수렴해서 총선 출마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2020년 1월에 인천 미추홀 갑에 출마선언을 하였다. 현역인 홍일표 의원의 불출마가 유력한 상황인데다 시장 시절부터 추진하던 원도심 재생 정책을 이어가기 위한 결정이라고 한다. 출마 선언 이후 당 안팎으로 비판여론이 거센데 같은 당 예비후보인 신보라 의원[14]은 험지에 나가서 최전선에서 싸워야 될 분이 편하게 후방에만 있으려 하며 다른 예비후보들의 밥그릇만 빼앗으려 한다며 비판했고 더불어민주당은 원도심 파탄의 책임이 있는 사람이 뻔뻔스럽게 얼굴을 들이밀었다며 비판했다. 자유한국당 공관위도 인천시장을 지낸 분인 만큼 최전선에서 싸워주길 바란다며 재고를 요청했다.

결국 공관위와의 합의 끝에 출마지역을 인천 남동 갑으로 변경했다. 남동 갑 지역구가 인천시청이 위치해 인천의 종로로 불리는 지역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박남춘 현 인천시장의 국회의원 시절 지역구이기 때문에 인천시정에 대한 평가가 최악을 달리는 현 시점에서 문재인 정권과 박남춘 시정에 대한 심판여론에 불을 지피기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더불어 같은 당 출신 전직 인천시장인 안상수 의원과 함께 인천 지역 선거를 진두지휘할 것으로 보인다.[15][16]

총선 당일 출구조사 결과 맹성규 49.9%, 유정복 49.0%로 나왔으나, 막상 개표때는 이보다 더 벌어진 54.4% : 44.4%로 10%p 차로 패배해 낙선하였다. 2018년 지방선거에 인천시장 재선에 실패한 후 이번에도 2연속으로 패배했다.

낙선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2020년 8월 15일 열린 2020년 8.15 광복절 문재인 정부 규탄 집회에 참석해 모습을 드러냈다.#


2.6. 2021년[편집]


2020년 8월 집회 참석 이후로는 몸이 안 좋아서 한동안 정치 행보를 중단하고 본인의 몸 관리를 했다고 한다. 주로 등산이나 수영을 하면서 몸을 돌봤던 것으로 보인다.

2021년 5월 들어서부터는 다음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인천시장 선거 재도전을 위해 관련 정치인들을 만나고 인천시 현안을 돌아보는 등 물밑에서 정치 행보를 재개하였다. 현재 당내 경쟁 후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지난 총선에서 낙선한 이학재 전 의원 정도가 있다고 한다.#

2021년 6월 경인방송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현직 박남춘 전 시장을 상대로 오차범위 밖 우세를 보이며 인천광역시장 재도전에 청신호가 켜졌다.#

2021년 7월 국민의힘 인천시당 위원장직에 출마하였다. 지역언론에서는 차기 인천광역시장 출마를 위한 포석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차기 지방선거에 인천시장 출마가 예상되고 전직 시당위원장이었던 이학재 전 의원의 지원을 받는 배준영 의원과 시당위원장직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그러나 시당위원장 경선에서 패배하며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

6월 여론조사를 실시한 경인방송의 7월 인천광역시장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는 현직 박남춘 전 시장을 상대로 유정복 전 시장이 오차범위 내에서 열세를 보이고 8월부터는 오차범위 내에서 계속 승리하면서 박남춘 전 시장과 경합을 보이고 있다.#

2021년 10월 24일 심재철국회부의장, 김태호 의원, 박진 의원과 함께 윤석열 대선 캠프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합류하였다.


2.7.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출마, 그리고 4년만에 복귀 성공[편집]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여론조사/인천광역시

2022년 3월 9일,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인천시장에 재도전할 것이 전망되었고 3월 15일에는 인천광역시장 예비후보로 등록하면서 이를 공식화했다.# 컷오프 된 심재돈 예비 후보가 유정복 후보를 지원하고, 안상수 이학재 간 단일화가 무산되면서 국민의힘 인천시장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2022년 4월 22일 나온 경선 결과, 50.32%를 득표해 안상수 전 시장과 이학재 전 의원을 누르고 인천시장 재도전의 기회를 얻게 됐다.# 여론조사상 박남춘인천시장에 대항해 지지율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어 4년만의 시장직 귀환이 가시화되고 있다.

이후 2022년 6월 보궐선거에서 계양구 을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출마해 박남춘 전 인천시장의 유세를 돕기 시작했고, 이것이 유정복에게 악재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고문이 계양 출마의 변을 밝히며 "인천에 유 모 시장 때문에 살 수가 없다더라"라며 유정복을 대놓고 언급하는 등 인천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에 질세라 유 시장도 '대장동에서 소고기나 사드시라"며 강하게 맞불을 놓고 있어서 인천지역 선거가 점차 이재명 vs 유정복 간의 대리전 양상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그러나 이재명 출마 선언 후에도 여론조사상 대체로 굳건히 우세를 지키고 있다.[17]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인천에서 기록한 47%의 득표율에서 근소하게 상회한 득표율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 즉 유정복 후보가 인천의 구도심 및 부도심, 연안 권역, 여타 경합지, 보수 텃밭인 연수구에서는 두 달 전의 윤석열 후보에 비해서는 선전할 개연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개표 결과 7.21%p 차이로 더불어민주당 박남춘 후보를 누르면서[18] 2018년 인천시장 낙선, 2020년 국회의원 낙선의 2연패를 극복하고 4년만에 인천광역시청 복귀에 성공하였고 행정부시장 출신 전성수 전 부시장[19]은 서울 서초구청장에 비서실장 출신 박종효는 인천 남동구청장에 함께 이번 선거에서 당선되며 이전보다 정치적 입지가 커질 것으로 보인다.


2.8. 제16대 인천광역시장[편집]


6월 27일, 시장으로 첫 인사에서 정무부시장이행숙 전 서구 을 당협위원장을 비서실장에 박병일 전 국회의원 보좌관을 대변인에 고주룡 전 MBC 논설위원, 시정혁신단장에 류권홍 변호사를 기용하였다.#

7월 1일, 공식 임기를 시작한다. 임기에 앞서 전임인 박남춘 전 시장이 인천e음 캐시백을 현상유지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이를 비판하였는데 이로 인해 박남춘 시정에서 벌인 여러가지 사업들을 전면 재검토할 것이 예상된다는 의견이 있다.[20] 또한 이번 민선 8기 인천시의회 역시 국민의힘이 2/3을 장악한 상태에서 개원하는데다 구청장장들 역시 계양구와 부평구를 제외하면 전부 국민의힘 소속이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강력한 추진력을 갖춘 만큼 다시 한번 본인의 역량을 적극적으로 펼칠 기회를 얻었다.[21]

8월 31일, 인천광역시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 추진안을 발표하였다. 계획대로 개편이 된다면 기존의 2군 8구 체제에서 2군 9구 체제[22]로 27년만에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게 된다.#[23]

9월 6일에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유정복 시장의 긍정 평가가 43.3%로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

9월 15일 안영규 행정부시장이 국민의힘 수석전문위원으로 이동하면서 공석이 된 행정부시장에 충남 부여 출신의 박덕수 행정안전부 국장을 승진 임명하였다.

2023년 11월 6일 국민의힘이 당론으로 추진 중인 김포시 서울 편입에 대해서는 본인이 국민의힘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강하게 반발하는 기자회견을 해 화제가 되었다. 아예 대놓고 정치 포퓰리즘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데 이어 "실현 불가능한 허상이자, 국민 혼란만 일으키는 정치 쇼" 라는 다소 강한 어조로 편입을 대놓고 반대하는 등 김포시의 서울 편입 추진을 신랄하게 비판했다.[24] 이에 국민의힘 지도부가 유 시장에게 경고를 날리는 어처구니 없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2023년 11월 17일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을 만나 서울특별시-인천광역시 간 교통현안 해결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함과 동시에 서울 지하철 9호선인천국제공항철도직결 운행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운영비는 서울시가 부담하되, 시설비 50%는 인천시 측에서 부담하는 조건이다. 아울로 오세훈 시장이 추진하는 기후동행카드 사업에 대해서도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2.8.1. 지지율[편집]


유정복 인천시장에 대한 지지율이 40~50%를 오가면서, 여야 경합지역이라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는 수도권 광역단체장 지지율 치고는 크게 나쁘지는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2.8.1.1. 리얼미터[편집]

지선 이후 처음 실시한 7월 여론조사에선 16위로 42.9%의 지지율을 기록하였다.링크

8월 여론조사에선 한 단계 내려간 17위를 기록하였고, 지지율은 0.4%p 올라 43.3을 기록하였다.링크

9월 여론조사에선 순위가 확 올라 13위, 지지율은 4%p 올라 47.3%을 기록하였다.링크

10월 여론조사에선 한 단계 떨어진 14위, 지지율은 0.2%p 올라 47.5%를 기록하였다.링크

11월 여론조사에선 16위, 지지율은 3.6%p 떨어진 43.9%를 기록하였다.링크

2023년 1월 여론조사에서 0.6%p 포인트 떨어진 43.4%로 17위를 기록하며 최하위를 찍었다.

2023년 2월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상승이 3.8%p 포인트로 급격히 올라 47.2%를 기록했다.

2023년 3월 여론조사에서 2.8%p 포인트가 더 올라가서 50.0%를 기록했다.

2023년 4월 여론조사에서는 2.5%p 하락한 47.5%의 지지율로 11위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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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2 05:29:41에 나무위키 유정복/생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당시는 인천시가 기초자치단체였다. 현 인천광역시 동구 송림동.[2] 백선엽, 백인엽 형제가 세운 선인재단에서 운영하던 학교였으나 현재 공립이다.[3] 현 사회과학대학[4] 출생 당시 경기도 인천부 황등천면 칠리. 현재의 경기도 시흥시 무지내동.[5] 원래는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김포군수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상술했듯이 공천이 최종 불발되어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이다.[6] 여담으로 이때의 선거 벽보가 심히 비범하다.[7] 사실 지방자치제 부활 이전 관선 김포군수를 역임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3선이다.[8] 당시 열린우리당 후보가 43.9%, 유정복 후보가 47.7%로 표차는 3,497표였으며 이때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3,734표를 얻어 민주당계 표를 분산시킨게 당락을 갈랐다. 참고로 그 당시 열린우리당 후보는 훗날 2010년 김포시장에 오르는 유영록.[9] 비슷한 케이스로 최경환이 있는데, 그도 이명박 정부 시절 지식경제부장관을 맡았다.[10] 근데 사실 이러한 사례들은 유정복이나 최경환 개인이 이명박과 친밀한데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친박계에 대해 포용하는 자세를 취하고자 했던 집권 세력의 정치적 판단이 가미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11] 인천시청이 있는 지역구이다. 자신을 떨어트린 박남춘 전 시장의 선거구이기도 하였고, 박남춘의 후광으로 인해 자유한국당 측에서 내보낼만한 마땅한 후보군이 없는 상황이다. 2018년 재보궐선거 에서 윤형모 후보가 나섰으나 맹성규 의원에게 트리플스코어로 패배했다.[12] 강화군과 옹진군을 끼고 있어 보수정당이 매우 유리한 선거구이며, 동구가 유정복의 고향이기도 하다. 또한 현직인 안상수 의원이 나이가 많아 20년 총선에선 공천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13] 인천 남구 갑[14] 신보라 역시 공들이던 인천 대신 연고 없는 경기 파주시 갑으로 전략공천되어서 처참하게 지고 말았다.[15]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에 의하면 과거 한나라당, 새누리당 시절에는 지역별로 인지도가 있는 인사들과 그들의 지역구를 중심으로 인근 선거구의 선거를 이끌었다고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안상수 의원이 출마하는 계양 갑을 중심으로 계양, 부평 등 인천 동북부권의 선거를 이끌어가고 유정복 전 시장이 출마하는 남동 갑을 중심으로 한 인천 서남부권의 선거를 이끌어가는 전략이 미래통합당 공관위의 전략으로 보인다.[16] 그러나 안상수는 동구·미추홀구 을에 공천되어서 졌다.[17] 기본적으로 박남춘 시장의 평판이 공약 파기, 붉은 수돗물 사태, 수돗물 유충 사태 등으로 인해 인천 관내에서 매우 나쁜 편이였기 때문이다.[18] 재미있게도 이재명이 올인한 계양구를 제외한 인천 내 모든 자치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심지어 계양구와 같이 민주당의 텃밭으로 분류되던 부평구, 서구마저 유정복 후보가 승리했다.[19] 본래 서울시청 출신 공직자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 당선 이후 서울시에서 대통령실을 거쳐 행안부로 이동하였고 유 시장과는 안전행정부장관 시절 인연이 되어 인천광역시 행정부시장까지 역임하였다.[20] 박남춘 시장이 퇴임 직전에 캐시백 예산이 거의 소진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캐시백 비율을 하향조정하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후임 시장에게 사업을 떠넘겨서 이미지를 깎아내려는 속셈 아니냐는 지역사회의 비판여론이 있었다.[21] 민선 6기 시절에는 본인의 역점사업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었고 공약이행률도 낮았던 편이라 임기중에 안상수-송영길 전 시장이 떠넘기고 간 빚만 갚다가 퇴임했다는 평가가 많았다.[22] 동구와 중구 내륙 지역을 합쳐 제물포구, 중구에서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와 도서지역을 따로 떼어서 영종구로 분구, 서구에서 검단신도시 지역을 검단구로 분구하게 된다.[23] 다만 서구 관련 개편에 대해 민주당에선 무조건적인 반대를 외치고 있기 때문에, 2024년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승리하지 않는 이상 검단구가 생길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24] 애초에 유정복 본인이 관선 김포군수 시절을 포함해 김포시장 3선 출신이자, 또 김포에서만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등 김포에 대해 잘 아는 정치인인 만큼 이번 사안을 바라보는 속내가 복잡할 것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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