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서인/논란 및 사건 사고/2020~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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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2020년
2.1.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일반인 욕설 사건
2.2. 주호민 작가를 비난하는 이중잣대적인 행태
3. 2021년
3.2. 문재인 대통령 기자회견 합성 사진 게재 논란
3.3. BJ 감동란 성희롱 및 가로세로연구소 뒷담 논란
3.4. 백기완 사망 조롱 논란
3.5. 3.1 운동 비하 논란
3.5.1. 이완용의 3.1운동 경고문과의 유사성
3.8. 진종오 조롱 논란
3.9. 여성 선수들 연봉 발언 논란
3.10. 홍범도 장군 비하 망언
3.11. 안중근 의사 비하 망언
3.12. 이재명 부인 김혜경 관련 허위사실 유포 논란
4. 2022년


1. 개요[편집]


윤서인의 2020~2022 논란이다.


2. 2020년[편집]




2.1.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일반인 욕설 사건[편집]


2020년 4월 11일에는 민주당 고민정 후보를 지지하는 여성 시민의 이름에 빗대어 김치년이라는 악질적 욕설을 담은 게시글[1]을 해당 시민의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게재하였다. 공인도 아니고 일반인을 상대로 욕설을 날린 것뿐만 아니라, 마스크를 쓰고 있긴 했지만 해당 시민의 얼굴을 모자이크도 하지 않은 채 올리기까지 하였다. 지인이 본다면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 문제의 소지가 매우 크다. 거기에 해당 일반인에 대한 주소지, 이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얼굴 일부까지 공개되어 은정성이 성립된 상황임에도 페이스북으로 욕설 및 인신공격을 하는 댓글까지 달리며 2, 3차 피해까지 발생했다. # ##


2.2. 주호민 작가를 비난하는 이중잣대적인 행태[편집]


파일:baseball_new9-20200920-121056-000-resize.jpg

2020년 9월 18일, 주호민 작가는 예전에 그린 천안함 그림이 발굴되자 야갤을 비롯한 우익 성향 사이트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게 되었고 그 와중에 평소에 주호민 작가를 싫어했던 윤서인은 주호민 작가가 논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역시 천안함을 조롱했다며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예전에 친하게 지냈다가 자신을 배신했더니 꼴좋게 되었다고 조롱하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파일:풍동 천안함 사건 비하.jpg

하지만 정작 자신의 지인인 유머저장소는 과거 '풍동'이라는 닉네임으로 디시인사이드에서 천안함 사건을 조롱한 적이 있었지만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는 사이다.

따라서 주호민 작가의 천안함 그림으로 인하여 받은 비판과는 별개로 윤서인은 천안함 사건을 노골적으로 조롱한 윾머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이상 주호민 작가를 비난할 자격이 전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게다가 그는 세월호 참사와 위안부 피해자, 조두순 성범죄 피해자, 최진실 등 수많은 피해자들을 비하하는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도 이중잣대를 벌인 것이다.


3. 2021년[편집]



3.1. 윤서인 독립운동가 비하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윤서인 독립운동가 비하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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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발언


3.2. 문재인 대통령 기자회견 합성 사진 게재 논란[편집]


2020년 1월 14일 청와대에서 진행된 2020년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장에서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을 확인하는 용도로 자리 앞에 설치된 모니터에 표시된 자막의 내용을 다른 내용으로 바꾼 합성 조작사진을 SNS에 올려 논란이 되었다. 사진 원본 속 프롬프터에는 즉석에서 나온 기자의 질문 내용이 적혀 있지만, 조작 사진에는 "대통령님, 말문 막히시면 원론적인 답변부터 하시면서 시간을 끌어 보십시오"라는 내용으로 바뀌어 있다. 올린 조작사진과 함께 "아바타한테 지령 떨어지는 중 삐 삐이 삐.. 최순실 뭐라할 거 하나도 없네 삐이이 삐.." 라는 내용을 적기도 했다. 관련기사 윤서인 SNS에서 해당 글은 현재 삭제된 상태다.


3.3. BJ 감동란 성희롱 및 가로세로연구소 뒷담 논란[편집]


2021년 1월 27일 BJ 감동란이 자기 자신이 스폰서를 한다는 루머를 퍼뜨린 주범이 윤서인이라는 내용의 폭로를 했다. # @ 정확한 정황을 설명하자면, 감동란과 윤서인은 친분이 있는 관계로, 윤서인과의 성매매 관련 폭로전으로 유명한 신준경이 평소에 감동란 스폰서 루머를 퍼뜨리고 다녔고 감동란이 이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 때 윤서인이 많은 위로를 해 주었다고 하는데, 알고 보니 윤서인 본인이 뒤에서 신준경으로 하여금 감동란에게 스폰서 관련해서 공격하도록 주물러 놓고는 앞에선 감동란을 위로해 줬다유주얼 서스펙트급 반전이 존재했던 것.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이다.

윤서인 본인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누리꾼들의 반응은 매우 싸늘했다. 야갤러들 입장에선 신준경의 이전 폭로 때와 동일하게 그동안 윤서인의 행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감동란이 추가 대화본을 유출해 버리면서 윤서인이 루머를 퍼뜨린 게 거의 확실시되자 결국 꼬리를 내리고 사실이라 시인하며 사과문을 올렸다. @ 사실을 인정하며 사과문을 올린 것 자체는 좋았지만 이번엔 사과문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인간은 원래 더럽다. 그래서 나도 더럽다'는 구절인데 네티즌들은 당연히 어이없어하며 '모든 사람이 너같은 줄 아냐', '내가 왜 너랑 동급 취급받아야 하냐' 등등의 황당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 외에도 '난 내 자신에게만큼은 솔직해지고 싶다', '조선 땅에서 사과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 잘 알지만' 등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박힌 사람이라면 사과문을 쓸 때 넣지 않을 법한 구절만 골라서 적었기 때문에 네티즌들의 반응은 당연히 '그냥 국어시간에 졸았거나, 사과를 할 생각 자체가 없는 걸로 보인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참고로 위 폭로 영상을 계속 올리던 크로커다일 남자훈련소가 추가타로 윤서인이 가로세로연구소, 특히 평소 자신의 친한 동생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김세의 뒷담을 깐 카톡 내역을 깠다. #@ 그런데 이번엔 정말 칼같이 깔끔하게 사과를 해서#@ 위 사과문의 진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더 강해지고 있다.

모 사이버렉카유머저장소의 얼굴을 공개한 것도 윤서인이란 주장을 했지만@, 윤서인 옆에 찍힌 사람은 윤서인 사단의 다른 유튜버로 밝혀졌다. 그거랑 별개로 윤서인이 돈을 받고 나서 저게 가짜라고 밝히고 진짜 유머저장소의 얼굴을 공개했을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그 와중에 윤서인이 전날 쓴 페북이 공개되면서#@ 다음날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예견했다며 더 조롱당했다.

토순이로 알려진 유튜버 박세정도 추가적으로 폭로했는데 이에 따르면 윤서인의 이런 이간질 사례가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


3.4. 백기완 사망 조롱 논란[편집]


2021년 2월 15일,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에 대한 조롱 글로 인해 논란이 되었다.

윤서인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코카콜라 마시면 민족정기가 썩는다는 분”이라며 백기완의 사망 기사를 올렸다. 이와 함께 “이 분이 평생을 통일운동에 헌신한 건 맞지”라며 “그 통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통일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본인이 원하던 ‘그 통일’을 못 보고 죽은 게 한이겠네”라고 덧붙였다. 해당 글에서 ‘민주화 운동의 큰 별 지다’라며 고인의 별세 소식을 전한 언론 보도를 댓글로 올린 뒤 “무슨 대단한 인물 가셨네 으이구”라고도 적었다.

자신의 SNS 글이 언론에 보도되자 “윤서인 꽁무니 따라다니느라 바쁨”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

다만, 백기완 항목에서 보듯 고인이 반미, 친북 성향으로 인해 정치적 논란이 있던 인물이라 크게 이슈화되지는 않았다. 그렇다 하여 이런 식의 조롱이 정당화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무엇보다 평생 동안 사회 문제에 한 번도 저항하지 않고 사회 불평등의 피해자들을 조롱하며 살아온 윤서인 같은 인간이 함부로 비하할 수 있는 수준의 인생은 더더욱 아니다.

일부에서는 "대통령 선거에도 나가보지 못한 놈 따위가 말할 분이 아니다", "대통령 손톱도 따라가지 못하는 놈 주제에"라고 반발하기도 하였는데 백기완은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후보와 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의 단일화를 위해 사퇴했다가 이 두 사람이 경쟁자로 나섰던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때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였던 이력이 있다.

3.5. 3.1 운동 비하 논란[편집]


윤서인, 3·1절 비하 논란…"日순사보다 잔혹한 삼일운동 주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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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1일3.1 운동을 폄훼하는 글을 SNS에 올려 파문을 일으켰다. 이후 페이스북 계정은 30일 간 정지를 당했다.

사실 그가 올린 자료의 대부분은 친일 어용단체인 자성회, 자제회가 3.1 운동에 참여하지 말라고 선전하고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거나 일제에 밀고, 진압해 적극 방해[2]한 데에 '그런 단체에 가입하거나 찬동해 친일 행위를 하면 가만 안 둔다.'고 경고하는 의미였고, 나머지도 3.1운동이 꽤 진행된 동안 일제의 진압에 격분해[3] 쓰인 극히 일부의 격문이라 일반화할 수 없다.[4] # 윤서인은 만세운동 주최자들이 대부분 친일단체에 위협한 것을 일반 조선 민중에게 위협한 것으로 왜곡하여 가짜뉴스로 선동질을 한 것이다. 자신이 좌파 프레임을 제시하면서 비난한 선동과 세뇌를 자신이 해버리고 있다.

무엇보다 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방화·살인을 예고한 격문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방화·살인이 실제 자행됐다는 사실은 엄연히 다르다. 이 경우에는 만화가 윤씨가 주장한 것처럼 실제 방화·살인이 이뤄졌는지를 검증해야 하는데 이와 관련해 국사편찬위원회의 3·1운동데이터베이스에 등재된 기록에 따르면 위와 같은 격문이 배포된 지역에서 3·1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 시민을 상대로 한 방화나 살인 같은 과격행위가 자행됐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고 한다. [팩트체크] 3·1운동 참여 안 하면 주최측이 방화·살인했다?

이전에 일으킨 독립운동가 폄하 사건으로 인해 독립운동단체들에 고소를 당하게 되자 반성한다고 입장을 내놨으면서 실은 전혀 반성하지 않은 것을 스스로 드러낸 셈이다. 한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에 대항한 3.1 운동을 기념해야 할 때에 팩트랍시고 저 자료를 올리면서 히히덕거리는 것이 이상할 뿐이다.

이에 대해 윤서인은 3월 6일 또다시 자신의 주장을 변호하는 동영상을 올렸는데. 이러한 자료가 대한민국 정부 공식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사실들이며 자신은 3.1절이 100% 평화로운 시위가 아니였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뿐이고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반일주의에 눈이 가려져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분명히 자신이 '주최 세력이 다 죽였다.'라고 주장해서 전체를 일반화해 비하하는 날조 언동을 하고서 갑자기 자신은 일부만 지적했다고 물타기를 하고 있다. 게다가 자신에게 지적한 사람들에게 모두 반일에 집착한다고 비난함으로써 전혀 사과할 마음이 없음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했다.


3.5.1. 이완용의 3.1운동 경고문과의 유사성[편집]


윤서인의 3.1 운동 비하 논란을 보면 그 당시 3.1 운동을 폭동이라고 하고 참가자들을 폭도라고 폄하하며 경고문을 날렸던 친일 매국노 이완용이 발표한 일명 3.1 운동에 대한 경고문과 다를 바가 없다는 평들이 많았다.. 이완용은 3.1운동에 대해서 이런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3.1 운동은 불순한 세력에 선동한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던말던 너희의 처지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포기해라. 자꾸 폭동을 일으키면 사살(射殺)이라는 사랑의 매를 들 수 밖에 없다. 그러니 가만 있어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완용 (3.1 운동에 대한 1차 경고문)


1차 경고는 너희들이 다칠까봐 경고한 것이다. 내 경고에 불만이 있으면 편지 보내라. 내가 매국노이기는 하지만 다 너희들을 위해서다. 누가 뭐라하던 난 내 할 말을 하겠다.

이완용 (3.1 운동에 대한 2차 경고문)


일본 군대가 움직인다. 내 말이 맞지 않은가? 그러니 제발 가만히 있으라. 일본은 우리와 동조동근(同祖同近)이다. 우리는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힘이 없으니 일본의 덕을 보는게 맞다. 일본에게 구걸해야 살 수 있다. 너희들이 뭘 하고싶은지 다 안다. 그러니 제발 가만히 있으라. 3.1운동으로 뭔가 변할 것이라고 생각하나본데 우리 (일본 제국)천황폐하는 그 정도로 물러나실 위인이 아니다. 그러니 가만히 맡을바 일을 열심히 하고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노력하라. 그것이 조선을 위한 길이다.

이완용 (3.1 운동에 대한 3차 경고문)

특히 이완용이 말한 2차 경고문의 말미에서도 보듯이 윤서인은 이 사건이나 그 이후에도 국민들의 반발과 사과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뽕 행각을 계속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이완용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불만이 있으면 편지를 보내라. 그러나 나는 내 할 말을 계속하겠다"는 말을 보면 국민들의 반발과 사과 요구에도 여전히 일뽕 행각을 일삼는 모습이 저 시절의 이완용과 뭐가 다른가?

3.6. 윤서인 디시인사이드 만화가 고소 사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윤서인 디시인사이드 만화가 고소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7. 윤서인 도쿄 올림픽 현수막 관련 망언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윤서인 도쿄 올림픽 현수막 관련 망언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8. 진종오 조롱 논란[편집]


코로나 감염을 피하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하고 최선을 다해 연습한 진종오 선수를 비난해 논란이 되었다. 윤서인은 페이스북에 "호흡과 타이밍이 굉장히 중요한 사격 종목에서 정작 본인은 총 한번 들어 본 적 없지만왜 굳이 아무도 안 쓰는 마스크를 고집하셨을까"라는 글을 올렸다. 윤서인은 "모래주머니 주렁주렁 달고 마라톤에 나섰으니 당연히 남들보다 쳐질 수밖에"라면서 "세계인이 딱하게 여기는 혹독한 K-방역을 홍보하는 것보다 본인 메달이 본인 인생에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은데"라고 비판했다. #

사실 진종오가 탈락한 이유는 마스크를 써서 루틴에 지장이 생긴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일단 나이에 따른 기량 저하를 무시할 수 없으며, 주 종목인 50m 사격이 도쿄 올림픽부터 삭제되어 상대적으로 약한 10m 사격에서 더 좋은 성적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진종오에겐 사실상 도쿄올림픽이 본인의 마지막 올림픽 무대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대회를 잘 마무리하고자 개인 방역에 신경을 많이 쓴 것인데, 이를 두고 정치적인 방역 홍보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란 의견이 많았다.

거기다 윤서인이 K-방역을 홍보한다면서 진종오 선수를 비난했던 것과 달리 진종오 선수는 윤석열을 지지했다. 올림픽 영웅 진종오 "윤석열 지지"


3.9. 여성 선수들 연봉 발언 논란[편집]


만화가 윤서인, 김연경의 "여자 선수들 연봉.." 발언 꼬집자 시끌...선 넘었나?
남녀 선수 연봉 차이가 성차별? 김연경‧박세리 비꼰 윤서인

김연경, 박세리, 남현희 등 여자 운동선수들이 KBS1 다큐 인사이트-다큐멘터리 국가대표에 출연해 남녀 선수 연봉과 상금 차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을 두고 "웃긴 건 여자 관중들도 여자야구 보러 안 감. 남자야구 보러 감. 여자농구도 절대 안 봄. 다들 남자농구 봄"이라며 "여자 선수들이 남자 선수들이랑 붙으면 처참하게 발리는데 어째서 동일노동이지? 남자들만큼 돈을 받고 싶으면 남자를 이기면 됨. 매우 간단"이라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다.

우선 윤서인의 잘못을 짚어보기 전에 이와 같은 발언이 왜 논란이 되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남녀리그의 실력차이를 언급한 점이 네티즌들간의 언쟁거리로 작용한 것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스포츠와 스포츠 선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탄생한 ‘상품’이고 그 가치는 시장의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 이런 시장의 가치를 결정하는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개중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선수들의 기초적 에너지’, 천연 스테로이드라 할 수 있는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강한 영향을 미친다. 이 때 체력, 체격, 에너지, 지속성 등에서 우월한 선수들이 더욱 격렬하고 화려하며 멋진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기 보다 더 쉽고, 이러한 경기가 관중들의 관심을 훨씬 많이 끌기 때문이다. 더 높은 수준의 연출과 드라마를 보여줄 수 있는 리그가 더 많은 스폰서와 광고를 끌어들일 수 밖에 없고, 그만큼 선수들은 많은 상금과 연봉을 받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스포츠에서 남녀리그의 평균연봉이 차이가 나고 여자선수들이 더 적은 관심과 연봉을 받는 것은 철저하게 이러한 시장논리에 따라 리그의 평균 에너지에 따른 스포츠만이 보여줄 수 있는 드라마의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들의 경기보다 남성들의 경기가 더 선호되곤 하는 것이다. 이건 남녀리그 뿐만 아니라 남자리그나 격투 스포츠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같은 남자축구라도 K리그에서 뛰는 선수보다 EPL이나 라리가 같은 세계급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더 높은 연봉을 받기 마련이며, 평균적으로는 헤비급 선수들의 파이트 머니가 미들급이나 라이트급의 파이터들보다 더 비싼 편이다. 몇몇 종목에서는 경량급이 더 인기있는 경우가 많지만, 보통은 헤비급에 달하는 선수들 자체가 드문 편이기에 관심도 많이 받는 편이다.

예를 들어 해당 다큐에서 박세리는 미국 남자골프 투어 PGA의 상금이 여성골프 투어 LPGA보다 훨씬 높다며 “똑같이 경기하는데 왜 남자 쪽이 상금이 높아야 하지?”라는 의문을 제기했으나, PGA는 남자 대회라서 상금이 높은 게 아니다. PGA는 성별에 따른 참가 제한이 없다. PGA의 상금이 탐이 난다면 여성 선수들이 참가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여성 프로들이 도전하기엔 난이도가 높은 것이다. 도전 사례가 없진 않은데, 박세리를 3년 내내 콩라인으로 만든 아니카 소렌스탐이 2003년 투어에 참가했다가 예선에서 컷오프당한 적이 있다. 정확도는 굉장히 뛰어났으나, 비거리 면에서 남자 선수들에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5] 여성 프로 중 최정상이었던 선수조차 남성 프로들과 대결하면 예선 탈락이라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미셸 위는 한국에서 프로생활을 하던 당시 여성 대회 대신 남성 프로들과 대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 대회를 제외하고는 예선조차 통과한 적이 없다.

그러나 여성리그가 남성리그보다 더 흥행하고 여성선수들이 더 많은 관심과 상금을 받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2020년 뉴스를 참고하자면 한국의 경우 여자 선수 대회인 KLPGA가 남자 선수 대회인 KPGA보다 훨씬 인기가 좋아 후원에 대기업이 줄을 서있는 상황이고 남자 프로골퍼 대회는 거의 씨가 마른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런 현상은 기사에서도 언급되듯이 한국 골프에선 ‘여성대회가 훨씬 시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 시장의 가치는 시장성에 따라 결정되며, 이런 시장성에는 실력뿐만 아니라 내외부적으로 여러 요소가 영향을 끼친다. 그 시장성에서 KLPGA가 KPGA를 압도한 것이다. 이렇듯 선수들이 받는 상금은 선수의 성적 자체보다는 스포츠 종목의 관객동원력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배구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자배구가 남자배구보다 인기가 높다. 김연경이라는 스타 선수가 존재하고 세계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면서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시장가치로 연봉을 따진다면 올림픽 예선에서 떨어져 오랜 기간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남자배구 선수들보다는 올림픽에서 4강에 진출하며 좋은 성적을 내고 인기도가 더 높은 여자배구 선수들의 연봉이 더 높아야 한다. 그러나 정작 여자배구 선수들의 연봉이 남자 선수들보다 더 낮은 문제가 있었는데 이건 샐러리 캡 때문이다. 단순히 성차별의 문제는 아니고 그보다 복잡한 문제가 있는데, V-리그/문제점의 해당 항목 참조.

요약하자면 스포츠의 매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남성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기본적으로는 성과와 대회의 성격과 시장방향 등 복합적인 요소가 스포츠를 구성하므로 이러한 외적 요인들이 긍정적이든 혹은 부정적이든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렇게 형성된 시장 가치가 연봉 척도의 기준을 삼는 정확한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미 KLPGA와 같은 경우처럼 여성 대회 시장성이 더 높다는 게 증명이 되었다면 굳이 성별 문제로 삼을 일이 아니란 것이며, 반대로 시장의 가치와 다르게 연봉이 책정되고 있는 정황이 있다면 충분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서인은 신중하게 말해야 할 문제를 섣부르게 농구와 야구 예시를 들어버리면서 남녀의 성 문제로 비화시켜 버려 골프의 시장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비판을 했다. 골프의 시장 상황을 알면 나올 수가 없는 비유다.

시사만화가와 크리에이터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의 파급력을 고려하지 않고 되는 대로 비판을 남발하게 되면 그걸 논파해야 하는 타인에 부담을 떠안겨 주는 꼴이 되며, 굳이 받지 않아도 될 비판을 자처하는 꼴이다. 유튜버와 인기 아이돌을 같은 선상에 놓고 조롱하는 것만으로도 사태를 정확하게 분석할 마음 없이 비판의 본래 목적이 직업과 관련한 윤리 의식과는 거리가 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시사는 거의 대부분의 문제들이 예와 아니오로 나뉠 수 없는 일이며, 이러한 일을 항상 예와 아니오로 이분법적 분석만 하여 대중들의 반응이 긍정적이기만을 기다린 채 누군가의 긍정만을 부각하며 자신의 업적으로 삼는 것이 과연 자랑스러운 일인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3.10. 홍범도 장군 비하 망언[편집]


파일:윤서인 망언 .png

8월 15일 광복절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봉환되었는데 위와 같이 홍범도 장군을 "공산주의 투사가 왜 태극기를 덮고 있냐?", "홍범도가 대한민국을 위해 한 일이 뭐냐?", "공산주의랑 싸운 호국영령을 모욕한다." 식으로 비하하는 망언을 남겼다.[6]

그러나 홍범도 장군은 박정희 집권기인 1962년에 지금의 건국훈장 대통령장인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추서되었다. 상술한 논리라면 박정희 정권은 대한민국을 위해 한 일이 없는 공산주의자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여 공산주의랑 싸운 호국영령을 모욕한 것이다. 또한 홍범도 장군은 해방되기도 전인 1943년에 사망하였기에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촉발된 좌우 갈등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따라서 북한과는 일말의 연관성도 없는 인사이다.

이후 윤튜브에서 홍범도 관련 영상도 올렸는데, 하나같이 헛소리들뿐이다. 홍범도가 레닌에게 공산당 당직도 받고 권총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게 자유시 참변에서 독립군을 쓸어버린 보답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한 다가 참변 이후 그 피해가 너무 막심해 그 이후부터는 대대적인 독립 투쟁이 끊겨서 한 명씩 폭탄을 던지러 가는 행위 말고는 할 수 없었다고 하며 참변 당시 독립군 2,000~2,500 여명이 살해당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더욱 웃기고 기가 막힌 것은 통일교의 초대 교주인 문선명이 1991년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만난 적이 있었고 여기에 2022년 들어서 아베 신조 피살 사건 이후 통일교와 일본 자민당의 유착이 본격적으로 밝혀졌는데도 정작 친일파라는 윤서인이 일본 자민당과도 유착했으면서도 과거에는 북한에서 김일성과 만나서 대화했던 문선명과 통일교 게이트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이나 비판도 없었다. 만약 문선명에 대해서 비판한다면 한편으로는 일본 자민당 같은 우익과 유착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만나는 이중성을 보였다는 반응을 보였을 수도 있지만 본인도 친일 성향이라 애매할 듯하다.

3.11. 안중근 의사 비하 망언[편집]


파일:윤서인 안중근 망언.webp

윤서인, 이번엔 안중근 의사 비하 “누가보면 군인인줄” 슬슬 쿨타임 돌때 되기는 했다.

11월 17일 페이스북에서 “누가 보면 안중근=대한민국 군인인줄”이라며 “북한과 싸우신 그 수많은 순국선열 군인들 다 놔두고 뜬금없이 국군과 상관없는 안중근이나 들먹이는 반일에 미친 ‘북방부’ 꼬라지”라고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이날 페이스북에 “17일 오늘은 순국선열의 날”이라며 “우리 군은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강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국민을 위한 평화 구현에 언제나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유묵인 ‘위국헌신 군인본분’(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을 첨부했다.

대한민국 육군은 안중근 의사가 법정에서 한 주장을 바탕으로 군인 신분을 인정하고 안중근 의사를 장군으로 칭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 법정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대한의군 참모중장 독립특파대장으로 밝혔다.

무엇보다 순국선열의 날은 국권 회복을 위해 희생하신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날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을사늑약을 실질적은 망국으로 간주하고 체결일인 11월 17일을 순국선열의 날로 한 것이 기원이고, 1997년에 정부기념일로 지정된 것이다. 북한군과 싸운 군인들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날이고,[7] 오히려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것이 취지에 부합한다.

또한 안중근 의사는 이념적 문제도 없이 좌우 모두 추앙하는 독립운동가로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만든 게 박정희 정권기의 일이다.[8] 안중근을 기린 국방부가 북방부라는 윤서인의 논리라면 기념관까지 세운 박정희 역시 종북이라는 소리가 된다(....) 당연히 윤서인의 이 발언은 보수라는 관점으로 볼 수도 없는 망언에 불과하다.


3.12. 이재명 부인 김혜경 관련 허위사실 유포 논란[편집]


파일:윤서인김혜경허위사실유포.jpg
(서울신문)이재명 부인 낙상에 “팬 거 같은데”…윤서인 ‘선거법 위반’ 수사
(뉴스1)'이재명 부인 낙상'에 "팬 거 같다" 윤서인 경찰수사…선거법 위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부인이 자택에서 낙상 사고를 당하자 ‘이재명이 폭행한 것 같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11월 30일 경찰에 따르면 시민단체 적폐청산국민참여연대가 지난달 12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윤씨를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및 후보자 비방 혐의로 고발한 사건이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배당돼 12월 1일 고발인 조사가 진행되었다. 적폐청산국민참여연대 신승목의 유튜브 페이지에서는 윤서인이 12월 6일에 검찰에 송치되었다고 설명했다. 적폐청산국민참여연대 신승목의 유튜브 페이지


4. 2022년[편집]



4.1. 빠니보틀 저격 논란[편집]


  • 2022년 2월 25일, 빠니보틀에게 뜬금없는 저격을 해서 화제가 되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최근 인스타를 통해 팬들에게 여행 자체에 대해 약간 번아웃이 와서 남미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겠다고 밝혔는데, 윤서인이 그 내용을 보고 빠니보틀의 속마음을 대변한다면서 억지로 가난하게 여행하는게 지쳐서 중단했다고 왜곡했다. 해당 글을 본 빠니보틀이 인스타에 글을 올려 "코크니(윤서인)님[9] 저격 감사합니다^^ 가문의 영광이네요"라면서 유쾌하게 받아쳤다. # 이후 윤서인이 페북 글을 삭제하고, 빠니보틀도 여기저기 커뮤니티에 화제가 되어서 글을 내렸다.


4.2. 윤서인 시사기획 창 출연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윤서인 시사기획 창 출연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3. 윤서인 국민의힘 국민화합위원회 언론특보단장 임명 논란[편집]


파일:275064887_5581326988603798_785489105708708639_n.jp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윤서인 국민의힘 국민화합위원회 언론특보단장 임명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4. 어린이날 일제잔재 논란[편집]


파일:chin.jpg

5월 5일 페이스북에서 어린이날이 일제 잔재라는 주장을 펼쳤는데 많은 이들이 동조하며 댓글을 달았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전세계 어린이날의 뿌리는 1925년 제네바에서 열린 6월 1일 어린이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은 패전 후 1948년에 만들어졌다. & 윤서인이 주장하는 1921년 5월 5일이 아동애호의 날이라는 자료는 일본 웹에서 찾을 수 없고, 유아애호주간이라는 자료 역시 찾을 수 없다. 일본 웹을 검색해봐도 한국 사이트만 뜬다.& 대한민국의 공식 자료에는 아동애호의날이라는 말은 없고 유아애호주간(幼兒愛好週間)이라고 나오는데, 1921년 11월 오사카에서 시작해 1926년에 전국적으로 퍼졌다고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유아애호주간과 한국의 어린이날은 성격 자체가 달랐다고 한다.& 한국의 어린이날은 천도교소년운동에 기반하는데, 뿌리는 일본보다 빠른 21년 5월 1일에 설립되었고 어린이날 공식 지정일은 1주년을 기념하여 22년 5월 2일로 정했다. & 이것이 나중에 5월 5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윤서인이 주장하는 방정환의 호 "소파" 관련 이야기도 루머이며, 애초에 방정환은 천교도 신자이므로 천교도 사상을 담은 신자 소춘(小春) 김기전과 함께 ‘소춘’ ‘소파’라는 호를 지었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

[1] 해당 페이스북 원문은 김치ㄴ...까지이나 곧바로 닉값이라는 사족을 달아 무슨 욕설을 하려고 했는지 충분히 연상케 하는 글을 작성했다.[2] 3.1 운동 기타 문단에 그들의 악행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후 일제로부터 훈장까지 받았다.[3] 물론 3.1 운동도 점점 일제 관련자와 물리적 충돌로 비화되었으나 이는 일제의 학살, 진압에 분개해서 벌어진 것이라는 것이 사학계의 정설이고 상식선에서도 조선민중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즉 윤서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말로 무서워할 만한 의미가 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4] 일부 사학자는 3·1운동의 여러 역사적 전통 중에는 민란이나 이런 곳에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흔들어 일으키고 하는 전통들이 들어 있어 이런 내용을 상투어 같은 그런 문구들로 보고 진짜 위협으로 느꼈을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본다. # 다만 대부분의 격문에선 딱히 그런 내용이 발견되지 않은지라 반론의 여지가 있다.[5] 소렌스탐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박세리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래서 악마의 편집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되었다.[6] 하지만 대중들의 윤서인에 대한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당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 중 공산주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단지 소수민족 독립 지원과 파시즘에 대항하여 이쪽 진영을 택한 게 대부분이었다. 광복 후에도 살아남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남북분단소련과 선을 긋거나 아예 반공으로 전향한 사람들도 있었다.[7] 지금은 의미를 확장해 국군 참전용사를 기릴 수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기원 자체는 북한과는 아무 연관 없다.[8] 이 때문에 안중근 기념관의 현판이 박정희의 친필이라 논란이 있었다.[9] 코크니는 윤서인의 코를 비꼬는 단어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윤서인/별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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