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선(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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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구한말의 개화파 정치인, 계몽사상가였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윤치호의 장남이고, 윤보선의 6촌 형이다.
2. 생애[편집]
1896년 한성부 중서 견평방 전동계 전동[4] 에서 태어났다. 당시로서는 드문 한중혼혈이다. 한영서원(송도중학교, 송도고등학교의 전신) 농과, 미국 마운트 헐문 중학교, 밴더빌트 대학교 농업과,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농축산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농업, 목축업 등에 종사하였다.
2.1. 광복 이후[편집]
8.15 광복 후에는 고려제약을 설립하는 데 일조했고, 계속 돼지를 기르는 등 목축업을 계속했으며 개성 유지들의 공의로 약학대학을 유치하려 하자 송도면에 있는 자신의 토지를 기부하기도 했다.
2.2. 농림부 장관 재임[편집]
1950년 1월에 이승만 정부로부터 농림부 장관으로 지명되었으며 1월 22일 경질된 전임 장관이었던 이종현의 뒤를 이어 농림부 장관에 취임하였다.
취임할 당시 때마침 국회에서 농지개혁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지주로부터 수매한 토지를 농민과 소작인들에게 분배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정부에서 비축하는 양곡의 수를 늘려 쌀값 조정과 식량 수급을 원할하게 하고 이 외에도 미국 잉여농수산물의 국내 유치를 위하여 농수산물 증산과 품종 개량 정책을 펴기도 했다.
1950년 3월 24일에는 농지개혁위원장을 겸직하기도 했으며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윤치호 일기 중 일부를 미국에 있는 동생들에게 우송하였고, 동란 중에 동생 윤광선이 납북되기도 했다.
농림부 장관 재직 중 농수산물 증산을 성공시키고 미국의 잉여농수산물 유치 통해 빈민과 아사자를 구제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11월 22일에 농림부 장관 직을 사임하였다.
2.3. 말년[편집]
농림부장관에서 내려온 후 다시 무임소 장관에 임명되었으며 1952년에 무임소 장관에서 내려온 후[5] 농협과 4H클럽 중앙위원을 거쳐 중앙위원회 회장·고문을 역임하는 등 4H클럽 활동에 전념하였고 퇴임 직후에는 사장에 취임했다가 사장직에서 퇴임한 이후에는 사회봉사 활동에 전념하였다.
1952년부터 30년간 송도학원 이사장을 지냈으며 이사장 재임 동안 각계의 도움으로 전시에 폐교됐던 송도중학교와 송도고등학교를 다시 재개교시켰고 1982년에 송도학원이 재정난에 시달리자 이회림에게 재단을 넘기고 은퇴하였다.
1988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사후 아산군 둔포면 석곡 선산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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