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로이스터/감독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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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2. 상세
2.1. 멘탈 개선
2.2. 닥치고 공격
2.3. 선발 투수 위주
2.4. 선수 개개인을 배려하는 운영
2.5. 선수 기용 및 코칭
2.5.1. 빛
2.5.2. 그림자
2.5.3. 고려해야 할 사항
2.6. 단기전에만 오면 약해진다?
2.7. 기타



1. 개관[편집]


KBO 리그 감독 역사상 가장 장점과 단점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감독이라고 볼 수 있다. 로이스터 감독의 팀 운영방식

사실 말을 바로 하자면 어쩔 수 없이 눈에 띌 수 밖에 없는 감독이란 게 더 옳겠다. 외국인 감독이라는 점만으로도 행동 하나하나가 튀는데다가 애초에 과거 국내 감독들이 보여주던 그 나물에 그 밥식 운영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 그 결과 역시 극단적으로 평가가 갈리게 되는데, 누구도 보여줄 수 없는 고차원, 고수준의 능력을 펼쳤다는 평가도 있는 반면 본 항목에 서술된 대로 다른 단점들과 더불어 작전능력, 관리능력 등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로이스터 매직로이스터 매직/논란 항목도 같이 참조할 것.

헌데 흔히 생각하는 노피어와 다르게 미국에서는 빡빡한 데이터 야구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롯데 선수들이 작전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해서 매니저 스타일을 바꿨다는 이야기.


2. 상세[편집]



2.1. 멘탈 개선[편집]


"No Fear"라는 한마디로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을 말할 수 있다. 감독이 스스로 나서서 선수들의 를 살려주고 범타를 치거나 실수를 하더라도 두려움에 주눅들지 말라는 주문을 끊임없이 했다. 로이스터가 이렇게 나섰던 것은 7년간의 바닥 생활로 켜켜이 쌓인 롯데 선수단의 패배의식 때문이었다. 선수단 내부에 뿌리깊게 박힌 패배의식을 떨쳐내야 상위권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로이스터의 판단 때문이었는데 결국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타자가 폭풍삼진을 당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든, 안타 후 오버런을 해서 주루사를 당하든, 결과에 개의치 않고 과감히 도전했다는 거에 의의를 두고 기를 살려준다. 반대로 뭔가 소심한 플레이를 보여주면 결과는 뒤로 제껴두고 "이봐 이건 아니지"라는 반응을 보인다. 물론 이건 좀 극단적인 비유지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렇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로이스터는 일본과 그 영향을 받은 한국 야구에서는 실패를 두려워하는 야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초구를 타격하여 아웃당하는 경우 아웃카운트도 하나 늘고 투수의 투구수까지 아껴주어 타자 입장에서는 큰 실패이기 때문에 초구는 웬만하면 그냥 흘려보내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또한 삼진을 두려워하여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는 갖다맞추기 급급한 타격을 하는 경우가 많으며, 병살을 피하기 위한 의도로 상황에 따른 밀어치기 당겨치기를 강조한다. 투수의 경우 데드볼을 우려하여 안쪽 승부를 잘 하려 하지 않는 현상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들이 큰 실패는 줄일 지 모르나 성공의 가능성 또한 같이 줄인다는 것이다. 초구를 그냥 흘려보낼 경우 투수에게 귀중한 원 스트라이크를 거저 주게 된다. 0-1 이후의 타율이 0-0에서보다 떨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라고 해서 컨택에만 신경을 쓰면 장타가 나오지 않게 되며 이는 큰 손실이다. 병살위험이 있다고 해서 스윙을 바꾸는 것은 타자에게 자기 스윙을 하게 하는 것보다 안타 및 장타가 나올 확률을 떨어뜨린다. 안쪽 승부를 기피하는 것은 단조로운 바깥쪽 승부로 이어져 피안타율을 증가시킨다.

따라서 로이스터는 과감한 초구 스윙,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서의 풀스윙, 승부처에서의 몸쪽 공 승부 등을 주문하였는데, 이 것이 바로 노 피어 정신이다.

다만 이러한 노 피어를 실천하다가 실패하는 경우엔 타 팀 팬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주루를 잘못하거나 멀지도 않은 플라이에 태그업을 한다거나 하면 노피어 주루[1]라는 우스개가 생겼다. 가장 자주 우스개가 되는 선수는 바로 김주찬. 또한 이대호, 가르시아, 강민호는 파괴적인 중심타선임에 틀림없지만 많은 삼진과 병살로 롯데 팬들의 뒷목을 잡게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노피어 정신으로 롯데 선수들의 멘탈을 개선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 된 셈.


2.2. 닥치고 공격[편집]


뻥야구를 넘어서 상당한 닥공마인드의 소유자이다.

수비력이 나쁘다고 평가받아도 타격이 좋은 강민호, 김주찬, 손아섭, 정보명등의 선수들을 중용하는 편이고, 공격력 강화를 위해 이대호3루수 고정도 불사하는 편. 단 이대호 3루수는 로이스터의 의견이라기보다는 타격코치 김무관의 주장이라는 말도 있고, 이대호의 그 3루 수비가 당시 롯데 내야수 중에서는 가장 좋은 축에 속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대호 3루 기용은 당장의 필요와 효율성을 떠나 이대호의 무릎과 허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높다. 결국 황재균을 사와서 구멍을 메꿨다. 그 황재균이 2012, 2013시즌 망가진 타격에도 불구하고 백업이 없어 살인적인 혹사를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롯데 자이언츠의 선수층이 얼마나 얇은지 알 수 있다. 박기혁같은 예외도 있지만 이건 박기혁 빼고 쓸만한 유격수가 별로 없는 탓도 있다.

여기에도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게 나뉜다. 한국 야구 역사에 김응룡,김인식 감독같이 이른바 뻥야구 스타일의 타선을 잘 만드는 감독은 있어도, 거의 닥공에 가까울 정도로 로스터 운용에서 타선에 무게를 두고 갔던 감독이 없었던 것.

장점으로는 롯데의 팀컬러를 확연하게 하면서 최강의 공격력을 갖추게 된 것. 조성환, 홍성흔, 이대호, 가르시아, 강민호가 이끄는 타선은 언제라도 점수를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상대팀에게는 위협적인 일.

단점으로는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팀의 수비가 불안정해진 것과 이로 인해 피를 보는 선수들이 꽤 있다는 것. 특히 라이언 사도스키는 상대적으로 불안해진 수비로 피를 많이 봤다. 사도스키는 주로 땅볼과 파울볼을 유도하는 하드싱커를 위주로 플레이하는 스타일이었는데, 3루수가 이대호가 되며 엄청나게 피를 봤다. 본인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벌크를 키우고 구속을 늘이며(!) 극복법을 모색했지만, 결국 투수들이 빠른공 못던져서 안던지는게 아니란것만 증명해버렸다. 사실 한국에 와서 인생은 풀렸어도 선수 커리어는 꼬인 경우.


2.3. 선발 투수 위주[편집]


위의 닥공과 연결되어 투수진 운영도 선이 굵었다.

투수 라인업은 철저하게 선발 투수 위주의 라인업을 짠다. 선발 투수로서는 아주 크게 말아 먹지 않는 한 6이닝 이상은 책임지게 한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중간계투의 혹사는 다른 팀에 비해서는 덜한 편. 혹사가 덜할 수밖에 없는 게 불펜 중에 제대로 된 승리조라고 부를 수 있는 불펜 투수가 거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이건 로이스터의 매니징에 대한 편견도 크다. 2009년의 경우 불펜 굴려서 성적낸 시즌이다. 선발 위주로 전략을 짠 건 맞지만, 당시의 송승준, 장원준, 조정훈, 손민한이 있는데 선발 야구를 하는 게 정상이다.


2.4. 선수 개개인을 배려하는 운영[편집]


  • 선수의 공적을 가로채려고 하지 않는다. 선수들의 기량이 발전한 걸 감독들이나 코치들이 자신이 키워주었기에 가능한 거라며 자랑하고 거들먹거리는 행위 자체를 지양하는 편이며, 선수의 기량 발전을 순전히 그 선수의 노력과 재능때문에 가능했다는 식으로 말을 자주 한다.

  • 그외에도 국내 감독이라면 꺼릴 직접적인 감정 표현 선수에 대한 애정을 거리낌없이 보여준다. 정말 국내 야구 역사상 선수들과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감독이 로이스터 감독을 제외하면 트레이 힐만밖에 없으며, 힐만 역시 외국인 감독임을 생각하면 국내 감독 기준으로는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2] 그렇다고 해도 화날때는 엄청난 포스를 보여주며 욕을 남발하는데, 2010시즌 막판 카림 가르시아가 심판과 마찰이 생기자 로이스터가 튀어나와서는 가르시아보다 더 흥분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이 겹쳐 롯데 선수들은 진정으로 로이스터 감독을 존경하고 좋아한다고 한다. 이런 경우가 국내 현직 감독중엔 별로 없다는 걸 생각하면 선수단 장악력이 엄청난 것을 알 수 있다.

  • 로이스터의 인품을 요약하는 일화가 있는데 10시즌 김주찬이대형이 한창 도루왕경쟁을 하던 때 이대호가 발목염좌로 팀의 주전에서 빠지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날 로이스터 감독이 김주찬은 다치면 안된다고 목동경기 가지말라고 부산으로 가라고 했는데 김주찬은 도루왕 경쟁 때문에 목동경기를 뛰어야 하는 상황, 그러나 로감독 스타일상 개인기록 때문에 경기 뛰겠다고 하면 씨알도 안먹힌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주찬은 머리를 짜내로감독의 약점을 공략했는데, "감독님 저 서울에서 선보기로 해서..."(물론 거짓말) 그리고 감독님의 대답은 예상대로 "오 그래? 그런 일이라면 인생에 중요한 일이니 서울에 가야지"라고 말하면서 부산으로 보내려던 계획을 바꿔서 김주찬은 목동으로 고고싱. 그런데 폭우가 쏟아져서 목동경기 취소. 김주찬은 도루왕을 놓쳤다는 훈훈한 이야기.

  • 한국프로야구에서 선수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고[3] 선수들의 기록보다는 선수들의 상태 내지는 인생을 주의깊게 돌보는 감독은 한국야구에 거의 없었다. 조범현 같은 경우는 송은범이 부모님이 이혼하고 자기를 혼자 키우다시피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발인날 마침 비가 와서 게임 취소되었으니 참석하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딱 잘라 거절했을 정도. 이 일로 인해 둘의 사이는 뭐... 이것이 그가 팬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2009년 두산과 롯데의 준플레이오프 4차전 패색이 짙은 가운데 조정훈이 감독에게 몸을 풀고 싶다고 하자 "이번 시즌만 야구할 거냐?" 며 거절했다. 이미 경기 시작전에 조정훈의 4차전 등판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에게도 선수 보호를 이유로 들며, 등판 가능성 0%라고 일축했었다. 이 장면은 2015년 손아섭의 부친상과 관련된 이종운 롯데감독의 비판점이기도 하다. 박동희의 칼럼에 따르면, 로이스터와 함께 생활했던 한 롯데 선수는 “제리 감독 시절엔 부모가 위독하거나 아이가 출산할 때 구단에 이야기하지 않으면 더 크게 혼이 났다”며 “제리 감독은 '야구보다 중요한 게 가족이다. 가족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팀원과 팬을 돌보려 하느냐’며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고 속으로 끙끙 앓던 선수를 향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회상했다.


2.5. 선수 기용 및 코칭[편집]



2.5.1. 빛[편집]


2010시즌 들어 로이스터 감독의 야구에 익숙해진 선수들이 저마다 기량이 급상승하면서 상당한 칭송을 받고 있다.

스프링 캠프 및 시즌 내내 일단 기본적으로 무리한 강훈보단 선수들에게 자율적으로 훈련양을 조절하는 방식을 추구하며 그 방식이 2010년에 와서 선수들 몸과 마음으로 정착하고 있다. 이는 본인의 임기 내에서만이 아니라 이후 한국 야구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넥센의 염경엽 감독의 야구 스타일에 도움을 준 것이다. 김성근과 로이스터 두 사람의 야구 스타일을 접목한 야구를 추구한다는 인터뷰로 잘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삼성의 류중일 감독의 경우에는 일화로만 알려져 있는데, 두 사람의 운영의 유사점이 많기 때문에 벤치마킹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 결과로 국내감독이었으면 변화없이 우월한 똑딱이 타자로 남았을 홍성흔이 장타력마저 겸비한 완벽한 타자로 변신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고, 수비에서도 내야수 출신이던 전준우를 꾸준히 중견수로 기용해 주전으로 성장시켰다.

수비력 향상에도 어느 정도 기여했다. 사실 수비력의 향상에 가장 중요한 책임자는 수비코치지만, 오랜 기간동안 수비코치로 재임하면서 제대로된 결과물을 내본 적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공필성이 해놓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로이스터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수비코치가 바뀌지 않은걸 생각하면 로이스터는 할만큼 했다는 평도 있다. 당시 롯데는 타구처리 및 중계 포메이션조차 제대로 짜여있지 않았기에 로이스터가 전부 처음부터 재조직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당시 롯데 외야는 거의 무주공산의 상태였으나 손아섭과 전준우의 수비 포텐셜에 주목하고 이들의 포지션 변경을 이끌었다. 전준우는 빠른 시간 내에 중견수 자리를 꿰차며 롯데의 센터 라인을 완성해줬지만 손아섭의 경우에는 눈물나는 수비를 보여준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기에 로이스터 임기 내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로이스터가 물러난 바로 다음 시즌 부임한 조원우가 손아섭의 수비력을 놀라울 정도로 향상시키며 로이스터의 눈이 정확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공필성이 월급도둑이었음을 새삼스럽게 재확인시켜주었는데, 외야수 글러브를 내야수 글러브처럼 사용하게 했는데, 갓 부임한 조원우깜짝 놀랄 정도. 수비가 너무 형편없어서 1루수와 외야수를 오가야했던 김주찬도 조원우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사람같은 수비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투수코치 양상문이 무능력한 가운데 이재곤김수완이라는 괜찮은 투수를 발견한 것은 명백한 로이스터의 공. 일부에서는 지나치게 베스트 멤버에 집착했다고 까는데 들여다보면 그런 의견은 사실과 다르다.

로이스터가 부임 이후 롯데 자이언츠 2군에서 올린 선수는 손아섭, 전준우, 문규현, 김민성, 박종윤, 이재곤, 김수완, 정훈[4]이다. 이 중에서 손아섭, 전준우, 문규현, 정훈 4명이 로이스터가 떠난 2011시즌 롯데 주전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타팀에 비해 작게 올린 건 아니고 롯데 백업의 부실함은 상동 이전 부실한 신인관리로 인해 29~32살 정도의 중견급 선수를 전혀 배출하지 못했다는 점과 애당초 2군 육성에 큰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가령 2011년 양모 감독이 비주전에게 기회를 많이 주겠다고 공언했지만 로이스터 3년간 2군에서 절차부심한 선수 중 자기 몫을 해 주는 선수는 이인구 하나 뿐일 정도이고 이른바 '소통이 안되어 1군 기회를 얻지 못했다'라고 언플한 박진환 같은 경우는 전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다시 쫒겨갔다.

2018년 기준으로 봐도, 롯데 라인업에서 제리 로이스터 감독 시기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후에 주전 혹은 그에 근접한 자리를 차지한 롯데 야수는 딱 2명 밖에 없다. 사실상 중복자원인 민병헌을 영입하지 않았으면 주전 좌익수였을 김문호와 유격수 후보로 꼽히는 신본기. 이중 신본기는 2017년까지 자의든 타의든 문규현의 백업을 보다 그 다음해 3할에 가까운 성적을 내고 2019년 문규현을 고려장 시키는데 성공했지만 2012년 데뷔이고, 김문호는 2006년 데뷔이지만 09/10을 군대에서 보냈고 당시 롯데 외야라인이 김주찬-전준우-손아섭이라서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던 것에 가깝다. 김문호는 젊은 야수 좋아했던 강병철 감독 시절부터 기회를 받았지만 콧대 높아서 감독, 코치들 말 제대로 안듣는다고 팬들에게 욕 얻어먹던 시절이었다. 08년에 공수 뭐 하나 내세월 게 없던 김문호를 김주찬 대신 썼다면 로이스터는 돌 맞았어도 할 말 없다. 그 외의 포지션은 직전해 주전 선수가 떠나서 무주공산으로 꼽히는 포수[5]와 3루수[6]이고, 또한 외국인 선수[7], 그것도 아니면 외부 FA[8]이다. 롯데가 얼마나 선수 키우는 능력이 없는지 아주 잘 보여준다.

롯데의 형편없는 육성 실력은 로이스터가 끌어올려 키웠던 선수들의 말로만 봐도 알 수 있다. 로이스터 재임기에 규정타석 3할 타자 대열에 합류한 손아섭을 제외하면 만개한 선수가 없다. 문규현, 박종윤이야 원래 가진 자질이 그 정도였으니 넘어간다지만 전준우는 컨택과 파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끝내 툴을 개화하지 못한채 20대를 다 보내다 겨우 30대에 와서야 공격력을 확보했고 이재곤, 김수완은 10시즌 원 히트 원더로 끝났으며 정훈은 2014년에 3할을 치며 안착하나 싶었지만 결국 2루수 포지션에서 쫓겨났고 2020년에 와서야 중견수와 1루에서 실력이 만개했다.


2.5.2. 그림자[편집]


하지만 이런 로이스터에게도 기용상의 문제가 있다.

  • 임경완: 도저히 마무리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을 2009시즌 빼고 마무리에 배치함. 임경완 말고는 이렇다 할 만한 마무리가 없다는 이유로 이해할 수 있지만 몇 번의 대사건으로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선수를 주구장창 기용했던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 No fear!항목에서처럼 "괜찮아 언젠가는 잘 마무리하겠지"라며 언론과 팬들의 질타에도 불구하고 "우리팀의 마무리는 임경완이다"라며 끝까지 믿고 기용하였으나 결국 임경완은 잘 던지지 못했다. 2011년 마무리 부담을 벗고 임천사 모드를 발동해 필승계투진의 한 축이 된 임경완을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
  • 박기혁: 2008시즌 내내 이대호 3루를 커버하고 WBC까지 뛰느라 체력이 현격하게 떨어진 상태에서 전혀 휴식을 주지 않고 굴리다가 성적은 성적대로 까먹고 부상으로 쓰러지게 만들었다. 결국 사상 최초의 미필 FA가 되었고 구단에서도 사실상 포기했다. 이로 인해 피를 본 다른 선수는 다름아닌 김민성.

사실 김민성은 넥센에서도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박기혁은 아시안게임 병역특례를 노리는 탓에 자신이 '모아니면 도'식의 출장을 감행하기도 했다. 더불어 장성우도 이후 강민호의 부상 공백이 있을 때 나오지만 이승화에 버금가는 방망이 수준을 보여주었다. 2012~13시즌 장성우가 경찰청 입대 후 2군 본즈가 된것 보면 그냥 당시 롯데 2군 육성 시스템이 문제라고 보면 될 것 같다...근데 2014시즌 노답 빠따를 보여주며 그냥 벽제 야구장 빨이라는 의견도 나왔다.


2.5.3. 고려해야 할 사항[편집]


롯데의 불안한 수비도 그렇고 로이스터의 코칭 능력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은 편이지만, 여기서 롯데의 코치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수비 : 화약고[9] 공필성[10]
수석 : 불사조 박영태
주루 : 관중 이철성
투수 : 상치 양상문[11]

2군도 만만치 않아서 검증된 무능력자 이강돈에 포수 수비 못해서 외야 알바 뛰었던 양용모, 부산고 프리미엄으로 특채된 주형광과 염종석이다. 이런 코치진들을 끼고 제대로 된 선수 코칭이 이루어진다면 그건 감독이 엄청나게 쩌는 거다.

더군다나 로이스터는 제대로 된 자기 코치진을 가져본 적이 없다. 페르난도 아로요 투수코치만이 로이스터가 선임할 수 있었고[12] 재계약 때에도 코칭스탭 선임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롯데 구단이 주는 걸 운용해야 할 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인구, 이원석, 이승화, 정보명 등이 제대로 성장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2.6. 단기전에만 오면 약해진다?[편집]


준플레이오프에서 한 번도 올라간 적이 없어 단기전에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메이저리그에서 포스트 시즌에 매년 나가는 팀인데도 단기전 운영 능력 때문에 까이는 감독은 메이저리그에 의외로 많은 편이다. 대표적 사례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바비 콕스. 14년 연속 지구 우승할 동안 월드시리즈 딱 한 번 우승할 정도면, 한국 야구에선 5년을 못 버텼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3년 연속을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 2010 시즌 2연승을 거두는 호조에도 불구하고 리버스 스윕을 당했다는 점에서 In Game 운영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확정.

실제로 2010 시즌의 포스트 시즌에서 보여준 모습을 보면 2연승 후 2연패를 당하고 난 뒤에도 계속 라인업이라든가 타순 조정 같은 것을 전혀 하지 않는 점이 2연패 후 타순 조정과 대타 및 라인업 조정을 통해 리버스 스윕에 성공한 김경문 감독에 비춰 극대화 된다. 쉽게 말하면 아직도 정규 시즌 하는 중인거다. 단적인 예로, 박종윤, 정보명, 이승화는 5차전 막판에서나 겨우 대타로 나왔으며, 문규현은 아예 나오지도 못했다. 이 정도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지?

특히 아직 감을 못 찾고 병살을 치며 기회를 날려먹은 홍성흔을 꾸준히 쓰고 부상이 있는 이대호를 3루수로 기용하는 이해 못할 기용은 확실한 문제. 홍성흔과 이대호 두명이 합쳐서 삼진 8개 병살 2개를 기록했다. 타점은... 2명이 합쳐서 겨우 7타점. 그나마 이대호는 끝내기성 쓰리런 홈런이라도 쳤지 홍성흔은...

혹자는 이에 대해 '장기전의 마술사'라고 평한다. 장기전인 정규 시즌에는 강하지만, 단기전인 포스트 시즌에는 약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SK의 조직력에 막혀 3년간 그 벽을 끝까지 넘지 못했고[13] 공수에서의 엇박자로 한화, LG, 넥센 등의 하위권 팀을 때려눕혀 5할 승률을 간신히(2009년에는 5할 미만) 맞춰 4강 턱걸이한게 롯데의 정규리그였다. SK전 7승 12패. 하지만 삼성에게 9승 1무 9패로 대등 그리고 두산을 상대로는 12승 7패로 의외로 준수한 성적.] 하지만 약팀을 확실히 잡아내는 것이 안정화된 팀의 전력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 이후 롯데는 잦은 전력 누수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4강 진출, 심지어 탈락한 2013 시즌에도 하위 팀들을 확실하게 잡아내며 희망 고문을 했는데 이것을 4강DNA라고 볼수도...

상기한 극명한 그림자에 페넌트레이스 4위팀 감독에게 장기전의 마술사라는 호칭은 과분하다. 그나마 이게 좀 개선된게 롯데의 타력이 극대화되고 두산과 삼성의 투수력이 불펜 야구 후유증으로 약화된 2010 시즌. 단기전 가선 얄짤없이 털렸지만. 그런데 불펜 야구로 색채가 바뀐 2012, 2013 시즌 모두 시즌 막판 불펜 혹사의 누적과 함께 뚜렷하게 힘이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선발진과 타선 위주의 로이스터 야구를 단기전보다 장기전에 적합한 야구라고 부르는 것이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애초에 감독 생활 10년 하면서 단 한번도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해 본 일이 없는 김경문 감독도 비슷한 별명으로 불리는걸 생각하면 장기전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그저 정규시즌 우승자에게만 붙을 칭호가 아니란걸 알 수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재임기간 가장 비교되던 감독인 김성근을 가져다 놓으면, 김성근은 총경기수가 100경기 혹은 그 이하로 줄어들면 그 성적이 가장 빛날 사람이고, 144경기 체제가 되자 그 부작용이 크게 나오면서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60경기를 뛰던 메이저리그 감독 출신 로이스터라면 144경기 체제에서 오히려 성적이 더 좋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이런거 저런거 다 집어치우고 로이스터 감독은 그 병맛같은 꼴무원들과 함께 하며 8888577 팀을 데리고 344를 찍어낸 인물이다.


2.7. 기타[편집]


  • 한국 야구에 대해서도 상당히 겸손한 태도를 갖추며 선수 개개인의 능력에 대해서 비하성 발언이나 비꼬는 말을 안한다. 이 10대1 인터뷰를 보면 질문을 한 선수들 한명 한명에게 전부 칭찬을 빼놓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팀 이야기를 할때도 칭찬만 하지 나쁜 말은 안하는 타입. 바꿔 말하면 립서비스가 많다는 얘기도 되지만. 팬들에게도 큰 사랑받고 선수에게도 존경받는 등 국내 감독들 중에서 인화(人和)에 뛰어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 2010년 9월 8일 삼성과의 시합이 끝나고 삼성의 덕아웃 쪽으로 가서 양준혁을 불러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는 양준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통역관인 커티스 정을 통해 양준혁에게 로이스터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레전드라 불리는 고참선수들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다. 수십 년 간 땀흘리며 한국야구를 풍성하게 만든 선수들은 그에 맞는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줄곧 이야기해왔다. 로이스터 감독은 고참 선수들이 마지막 경기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곤 했다.

  • 팀 훈련시간이 굉장히 적었다고 한다. 처음 롯데에 부임하고 나서 전지훈련 당시 훈련량이 너무 적어서 선수들도 의아해했을 정도. 그동안 한국식 많은 훈련량에 익숙해져있던 선수들이기에, 이런 적은 훈련량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훈련량이 적어지자 놀기 좋아하는 선수들도 처음에는 놀다가도 스스로가 불안해져 알아서 개인 훈련을 했다고 한다. 선수들이 스스로 동기부여가 돼서 훈련하는 것을 제리 로이스터 감독도 노렸다고 한다.

  • 3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는 진출했지만 3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면서 롯데와의 재계약은 물 건너가버리고 말았다. 결국 재계약은 결렬되었고, 그 와중에 롯데 프론트가 로이스터 감독에게 엄청난 망나니짓을 한 게 들켰다. 참고로 역대 감독 중 플레이오프를 3회 이상 연속 진출시킨 감독은 총 9명. 그 중 재계약을 하지 않은 감독은 로이스터 감독이 유일. 다른 감독들은 다음 해 성적 부진을 이유로 경질되거나 계약기간이 남았음에도 잘린 경우, 시즌 종료 후 다른 팀으로 이적한 경우 등이 존재하지 재계약을 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팬들이 감독 연임 지지를 선언한 신기한 일의 주역이다. 다만 이것은 팬들이 이렇게라도 안하면 팀 최초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감독이 짤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 또한 사실. 팬들이 느낀 위기감 그대로 팬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로이스터는 잘렸다. 로이스터보다 뛰어난 감독을 찾아낼 능력이나 코치진의 대안도 없으면서 한국시리즈 진출한 감독을 짜른 의 케이스도 있고, 로이스터가 잘린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더 심한 사태도 일으키는 것이 롯데 프런트이다.

  • 이와 같이 로이스터 감독은 한국 야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야구를 추구하며 이는 야구 발전에 보기 좋은 현상이다. 승리와 패배를 떠나서 야구의 다양성 확립은 한국 야구에겐 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으며, 야구 팬에게는 색다른 야구를 봄으로써 즐거운 경험이 될 수도 있기에 말이다.

  • 역대 롯데 자이언츠 감독 중 통산승률 52.4%로 해임 당시에는 1위였으나 양승호 전 감독이 롯데 역사상 첫 패넌트레이스 2위를 기록하는 등 53.8%[14]의 승률을 기록해 현재는 2위. 3위 성기영 감독과 동률이지만, 성기영 감독은 1987년뿐이다. 강병철, 김용희, 양상문 등 다른 감독들은 모두 50%이하이며 특히 백인천 감독은 2시즌 동안 25%이다.

  • 2018 시즌이 종료된 시점에서 KBO 리그에서 3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에 성공한 13명의 감독 중 한 사람이다. 로이스터가 퇴임하던 시점에선 9명이었는데 이후 삼성 류중일 감독과 넥센 염경엽 감독, 두산 김태형 감독과 KIA 김기태 감독이 추가되었다. 현재까지 롯데 감독, 그리고 외국인 감독으로는 유일하다.

김응용
9시즌
해태
1986~1994[15]
4시즌
삼성
2001~2004
김영덕
5시즌
빙그레
1988~1992
이광환
3시즌
LG
1993~1995
김인식
4시즌
두산(OB 시절 포함)
1998~2001
3시즌
한화
2005~2007
김재박
5시즌
현대
2000~2004
선동렬
4시즌
삼성
2005~2008
김경문
4시즌
두산
2007~2010
NC
2014~2017
김성근
4시즌
SK
2007~2010
로이스터
3시즌
롯데
2008~2010
류중일
5시즌
삼성
2011~2015
염경엽
4시즌
넥센
2013~2016[16]
김태형
7시즌
두산
2015~2021[17]
김기태
3시즌
KIA
2016~2018

  • 로이스터 감독의 후임자인 양승호 감독은 롯데 팬들의 미움을 한몸에 받아서 인터뷰 하나, 훈련 내용 하나까지 까였다. 성적이 올라가니 까임도 줄어들었지만.
[1] 보통 이런 경우 뇌가 없는 플레이를 한다는 뜻에서 뇌피어라고 하기도 한다.[2] 그나마 찾자면 한대화 정도. 선수 와이프가 한대화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부부싸움 고민상담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3] 당장 김주찬이 다른 한국감독들한테 저런 이야기를 하면 대번에 처맞는다. 아니 김재박 감독이라면...[4] 김수완은 스트라이크 존에 꽂아 넣는 다는 이유로, 정훈은 스윙이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콜업했다.[5] 강민호가 FA로 떠나면서 무주공산이 되었다. 김사훈은 롯데팬들도 사람 취급 안하고, 나종덕나원탁의 소위 나나랜드는 실질적으로 프로 1년차 선수들이다.[6] 황재균이 메이저리그 노크한 이후로 롯데의 주전 3루수는 증발했다.[7] 앤디 번즈, 사실 로이스터 감독 시기에는 타자 외국인 선수 한명을 강제하고 전체 외국인선수 3명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외국인 타자는 점점 사라지는 추세였다. 카림 가르시아를 기용했던 로이스터가 특이한 사례이다. 만일 로이스터 감독이 있던 시기와 이후 추세처럼 외국인 타자를 쓰지 않았다면, 롯데 2루수는 정훈이거나, 혹은 여전히 무주공산이었을 것이다.[8] 민병헌과 지명타자 후보인 채태인.[9] 혹은 안타제조기. 절대 공격과 관련된 별명이 아니다. 오히려 수비로 인해 얻은 별명인데 이게 무슨 뜻인지는 다 알거다.[10] 2011 시즌 조원우 외야 수비코치 부임 이후로 재앙급 수비로 이름 높던 김주찬, 손아섭이 수비에서 일취월장한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이건 빼도박도 못하는 무능이다.[11] 논란이 있는 코치로는 김무관이 있다. 팀 타격이 첫번째 최악일때도, 최고일때도, 두번째 최악일때도 타코였던 사람이라[12] 그 아로요도 삽을 좀 푸긴 했지만, 표본이 부족해서 로이스터에게 코치진 선임권을 준다고 안 줬을 때와 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확신할 수 없다.[13] 그러나 선수들의 힘이 빠지는 여름에는 탈탈 털었다.[14] 반올림한 수치. 반올림을 하지 않는다면 .5375[15] 95시즌에 4위였으나 당시 규정상 준플레이오프를 치르지 않았다. 규정이 아니었다면 1997년까지 무려 12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도 가능했다.[16] 현재 진행형...이었으나 준플레이오프 탈락 이후 자진 사퇴했다.[17] 역대 최초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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