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툴리우 바르가스

덤프버전 :





제툴리우 바르가스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브라질 연방 공화국 제14·17대 대통령
제툴리우 도르넬리스 바르가스
Getúlio Dornelles Vargas


파일:제툴리우바르가스.jpg

출생
1882년 4월 19일
브라질 제국 히우그란지두술주 상보르자
사망
1954년 8월 24일 (향년 72세)
브라질 합중국 리우데자네이루 대통령 관저
재임기간
제14대 대통령
1930년 11월 3일 ~ 1945년 10월 29일
제17대 대통령
1951년 1월 31일 ~ 1954년 8월 24일
경력
재무부 장관 ,(1926~1927),
히우그란지두술주 주지사 ,(1927~1930),
브라질 제14대 대통령 ,(1930~1945),
히우그란지두술주 연방 상원의원 ,(1946~1951),
브라질 제17대 대통령 ,(1951~1954),


파일:바르가스 2기.jpg

제17대 대통령(집권 2기) 공식 사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바르가스 정부 1기
2.3. 바르가스 정부 2기
3. 평가
4. 매체에서



1. 개요[편집]


브라질의 14대, 17대 대통령. 브라질 정치사에서 좋든 싫든 빼놓을 순 없는 인물로, 독재자 출신이지만 후술되듯 집권 2기 때 민주적으로 선출되었다는 점과 최후가 반대파에 떠밀린 자살이란 점, 그리고 브라질의 사회적 후진성을 청산하고 경제와 사회인식을 끌어올린 업적도 어느 정도 있기에 명암이 갈리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1882년, 브라질 남부 빰빠[1] 지역인 히우그란지두술 주에서 목장주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법대를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됐고, 1908년 주의회 의원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연방 하원의원, 재무장관을 지낸 후, 1928년 히우그란지두술 주지사가 됐다.

당시 브라질에서는 커피 지주들이 주축이 된 상파울루 공화당과 미나스제라이스 공화당이 협약을 맺고 번갈아가면서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2], 1930년 대선에서 상파울루 출신의 워싱턴 루이스 대통령이 같은 주 출신의 줄리우 프레스치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면서 양자의 동맹이 깨지게 된다. 히우그란지두술 주지사였던 바르가스는 미나스제라이스의 지지를 받아 1930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패배했다.

그러나 그 해 7월 바르가스의 러닝메이트였던 부통령 후보 주앙 페소아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히우그란지두술과 미나스제라이스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어서 군부에 의한 10월 쿠데타가 일어났고 바르가스는 임시 대통령이 된다.


2.2. 바르가스 정부 1기[편집]


당시 브라질은 대공황의 여파로 브라질의 주요 수출품으로, 브라질의 경제 윈동력이었던 커피 산업이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 바르가스는 커피 가격을 상승시키기 위해 과도하게 많이 생산된 커피를 사들여 폐기하는 정책을 취했다. 1932년 상파울루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이는 진압되었다.

1934년 신헌법이 제정되고 바르가스는 1934년 4년 임기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30년대 브라질에서는 통합주의행동당(AIB)을 비롯한 파시즘 조직들과 민족해방동맹(ALN)을 결성한 공산주의자들이 세력을 불려 갔는데, 그 전부터 국가보안법 등을 제정해 이들의 충돌을 통제하려고 하던 바르가스 정부는 1935년 공산당의 봉기가 진압된 후 좌익 세력에 강경한 탄압을 가했다. 1937년 선거를 앞두고 바르가스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후, 포르투갈 제2공화국을 모방하여 이스타두 노부(Estado Novo)[3]를 선포하고 전체주의 독재 정치를 하였다. 파시스트 통합주의자들은 쿠데타를 지지하였으나, 바르가스는 통합주의자들을 기용하지 않았고, 이에 통합주의자들은 대통령궁을 습격하여 바르가스를 쫓아내려 하였으나 진압당했다.

이후 바르가스는 더욱 강하게 중앙집권화를 추구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수입대체산업화를 추진하고, 산업화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 교육에도 투자를 하였다.[4] 바르가스는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 세력을 탄압하고, 노동조합을 통제하면서도 공산당과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정책 자체는 받아들여서 노동 관련 법을 제정하고 최저임금제를 도입하는 등의 친노동자적인 행보를 보였다. 또한 대중을 향한 선전을 통해 노동자들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하였다. 이전까지 백인들에 의해 저급한 문화로 여겨졌던 삼바와 반대로 백인 일색의 스포츠였던 축구가 브라질 대다수 사람이 향유하는 문화 아이콘이 된 것도 바르가스 시대의 일이었다.

브라질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다. 나치 독일은 처음에는 브라질의 쿠데타에 우호적이었으나, 바르가스가 통합주의자들을 제거하는 등 국내 파시스트들과 거리를 두면서 양국 간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다. 브라질은 1942년 1월 추축국과 관계를 끊고, 이후 독일 잠수함이 브라질 상선을 격침시키자 1942년 8월 추축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연합국으로 2차대전에 참전하였고, 브라질군이 1944년 이탈리아 전선에 파병되었다. 그러나 이와 함께 브라질 내에서는 독재 국가가 연합국으로 참전하는 모순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5],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결국 바르가스는 1945년 선거 실시를 약속하였고, 자신도 노동계가 주도한 브라질 노동당(PTB)의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10월, 그를 지지하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그는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다. 군부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 브라질 제4공화국을 선포한다.


2.3. 바르가스 정부 2기[편집]


하지만 바르가스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기에 퇴임 직후 히우그란지두술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서 1950년 대선에 출마해 브라질의 제17대 대통령이 된다. 바르가스는 차관을 들여와 농업 국가이던 브라질의 공업화를 추진하였으나, 2차 대전 이후 심각해진 브라질의 인플레이션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953년 바르가스는 노동부 장관으로 노동계 인물인 주앙 굴라르를 임명했는데, 보수파들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또한 바르가스는 커피에 대해 복수환율제를 도입해 이로 얻은 수익을 공업에 투자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미국과의 마찰을 빚게 된다.

1954년 바르가스 정부가 최저임금 100% 인상을 발표하자 보수파는 크게 반발했고, 이 와중에 바르가스의 측근이 반정부 정치인인 카를루스 라세르다[6]에 대한 암살 시도를 벌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다행히 라세르다는 살았지만, 브라질 공군 소령 루벤스 바즈(Rubens Vaz)가 이 과정에서 사망했고, 경찰 수사에 의하면 바르가스가 직접 관여한 증거는 찾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운동이 전국적 규모로 발전했다. 이에 바르가스는 자신이 합법적인 대통령임을 주장하며 저항했으나 1954년 8월 23일, 27명의 군 장성들이 서명한 대통령 사임 요구서가 국민들 앞에 발표되었고, 절망한 바르가스는 1954년 8월 24일 권총으로 자살하면서 생을 마감했다. 유언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몇 년간의 국제적인 경제금융단체들의 지배와 약탈이 있은 후에, 나는 자신을 꺾일 수 없는 혁명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나는 자유화 작업을 시작하였고 사회적 자유체제를 세웠다. 그러나 나는 사임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국민 편에서 통치하기 위해 돌아왔다. 나는 브라질 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를 통해 우리의 부를 증진시켜 국민의 자유를 이룩하려고 했으나, 난동의 소용돌이는 시작부터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고, 브라질 전기 일레트로브라스는 방해를 받아 거의 절망 상태에 이르렀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고, 민중이 독립되기를 원치도 않았다. 나는 브라질에 대한 약탈에 대항해 투쟁했고, 민중에 대한 약탈에 대해 투쟁했다. 나는 맨몸으로 투쟁했다. 증오나 불명예, 중상도 나의 정신을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나는 국민들에게 나의 일생을 바쳤다. 이제 나의 죽음을 바치노라.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조용히 영원의 길로 나의 첫걸음을 내디디며 삶을 떠나 역사에 묻히고자 한다.


이렇게 바르가스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이번엔 반대로 분노한 대중들이 거리로 나서면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결국 여론이 반전되어 카페 필류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1955년 대선에서는 사회민주당의 주셀리누 쿠비체크가 대통령으로, 노동당의 주앙 굴라르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7]


3. 평가[편집]


오늘날 바르가스에 대한 평가는 브라질에서 엇갈리는 편으로, 브라질의 공업화를 선도하면서도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의무교육을 대대적으로 도입했으며 인종차별과 여성차별 등의 악습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브라질 사회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는 긍정적인 평과 함께, 임기 전반기에 파시즘의 영향을 받은 독재정치를 펼친데다가 2기 집권시에는 그래도 좀 정신 차리고 민주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인플레이션을 제대로 잡지 못한 점 때문에 비난을 동시에 받는다.

바르가스는 분배 정책 등 좌클릭 정책을 펴고 노동자와 여성, 흑인들의 권리를 향상시켜서 브라질의 발전을 도모했지만, 한편으론 목장주 출신이라는 출신 성분 덕택인지 대지주들을 제압해서 집권했음에도 막상 토지개혁에는 미적거렸고, 덕택에 현재까지도 소수의 지주들이 브라질 농토의 대부분을 독식하는 구조가 유지되어서 브라질 사회의 문제점인 극심한 빈부격차가 유지되었다는 한계점을 지적하는 평도 있다.[8]

전반적으로 1930년 군부의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장기 집권을 한 독재자이면서도, 동시에 소수 엘리트에 의한 과두 지배 체제를 무너뜨린 중남미 포퓰리즘의 선구자격이 되는 인물 중 하나기 때문에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것도 있다. 이웃나라 아르헨티나후안 페론과 비교되기도 하는 인물로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는 점은 미묘하다. 바르가스의 이름을 따서 설립된 제툴리우 바르가스 재단(Fundação Getulio Vargas, 이하 FGV)은 오늘날에도 중남미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싱크탱크다.

브라질의 저명한 교육학자인 파울루 프레이리는 그의 저서인 페다고지에서 제툴리우 바르기스에 대해 짤막하게 언급하며 반동적 엘리트들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맞았다고 언급하였다. 일견 보기에는 아이러니해 보이지만 제툴리우 바르가스의 정책 방향과 그 수혜 계층이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해보면 나올 수 있는 언급이다.

비정상회담에 나왔던 브라질인 방송인인 카를로스 고리토는 바르가스가 독재자였던건 맞고 그래서 브라질에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현대 브라질에 큰 영향력을 끼친 정치인인건 분명하다고 이야기했다.


4. 매체에서[편집]


파일:제툴리우 바르가스(Hearts of Iron IV).jpg
Hearts of Iron IV에서는 브라질의 비동맹 지도자로 등장한다. 포르투갈로 왕정을 복고한 뒤 브라질에 군주주의를 주입할 수 있는데, 이 때 브라질의 왕정 지지율이 70% 이하인 상태에서 안정도가 낮으면 브라질 통합주의 행동파들이 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하고 브라질 제국과 포르투갈에 선전포고한다. 군주주의 주입 이후 바르가스는 비동맹주의 정당을 떠나 파시스트의 지도자가 된다. 유명 모드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브라질의 사회보수주의 지도자로 등장하며 집권 후 여러 이벤트로 후견전제주의 지도자가 될 수도 있다.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1차 실각 이후 대통령직에 다시 도전하지 않고 자신의 정당인 노동당의 원로 정치인으로서 강한 영향력을 투사하고 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6 23:39:54에 나무위키 제툴리우 바르가스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빰빠는 이 지역부터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동부까지 이어지는 지역인데, 쌀 농사로 유명하다. 다른 농사도 짓지만 벼농사에 유리한 기후라 쌀 생산량이 가장 많다.[2] 상파울루, 미나스제라이스 두 주가 맺은 협약으로 Cafe com Leite라고 부른다.[3]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국가 또는 체제라는 뜻[4] 이러한 문맹퇴치는 어느정도 효과가 있어 문맹률을 크게 줄일수는 있었지만 시골 곳곳에 까지 학교가 세워지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바르가스 시대 말기에도 문맹률은 40%에 달했다.[5]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유럽 전선에 파병된 브라질 군인들 입장에선, 그럼 '내 나라는...?'이라는 생각이 당연히 들었을 것이다.[6] 당시 브라질 중도우파 정당인 민족민주연합(National Democratic Union)의 대표였다.[7] 1956년 1월까지가 바르가스의 정상적인 임기였다.[8] 사실 1960년대 초반 주앙 굴라르 시절 브라질 내에서도 토지개혁을 통해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군부독재정권이 수립되면서 무산되었으며, 1980년대 민주화 이후로 시도해봤지만 여러가지 난관 때문에 실질적으로 실행되지 않아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