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토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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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우크라이나 리우네주의 도시이다.
2. 역사[편집]
1648년, 브와디스와브 자스와우스키 왕자의 땅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원래는 철광산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었다. 이후, 1792년,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로부터 레오나르드 보르첼이 땅의 권리를 얻은 다음 지금의 이름으로 마을명을 변경하였다. 폴란드 분할 당시에는 독일인들이 이 곳으로 많이 이주해왔다. 리우네와 빌뉴스를 잇는 철도가 1890년대 후반에 건설된 이후로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제분소, 제재소, 성냥공장 등이 지어지면서 여러 산업들이 발전했다.
폴란드 제2공화국 당시, 유대인들이 이 곳을 중심으로 정착했고, 1925년에는 도시 인구의 약 40%[2] 가 유대인이었다. 코스토필은 코스토필군의 군청소재지가 된다.
제2차 세계 대전때, 독일 국방군이 1941년 7월 1일부터 점령하게 되고 곧바로 포그롬이 시행되었다. 1941년 8월 16일, 코스토필 내 가장 영향력 있는 470명의 유대인들을 추방해 다른 지역에서 처형하였다. 10월 1일에는 처형당한 인물들과 관련있는 유대인 1,400명을 같은 방식으로 처형했다. 10월 5일, 게토가 형성되었다. 1942년 7월에는 리우네에서 보내진 약 7,000명의 유대인들이 이 지역 숲 주변에 있던 채석장에서 학살당했다. 8월 24일, 코스토필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700명의 유대인이 혁명을 일으키면서 도망을 갔으나, 대부분 잡히거나 사살당했다. 8월 25일에는 게토 부지가 팔리면서 이 곳에 지내던 유대인들은 독일 경찰에 의해 강제 이주를 당했다.
1944년 1월 31일, 소련군이 이 곳을 탈환하면서 해방되었다. 해방 당시, 약 270명의 유대인만 생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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