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해식 (r2019031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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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에서의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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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최고루'라는 중국집을 차려서 프랜차이즈도 만들 만큼 사업가로 성공했다.
이름
최해식(崔海植 / Hae-sik Choi)
생년월일
1968년 9월 30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전라북도 이리시 [1]
학력
이리초-군산남중-군산상고-건국대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0년 쌍방울 레이더스 1차 지명
소속팀
쌍방울 레이더스(1990~1994)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1994~2001)
해설위원
CMB광주방송 프로야구 해설 (2010~2011(?))
kbc MyFM 프로야구 해설 (2012~2013)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6
1997
해태 타이거즈/KIA 타이거즈 등번호 22번
장채근 (1987~1994)

최해식 (1994~2001)

김상훈 (2002~2014)
1. 개요
2. 선수 경력
3. 은퇴 후
4. 이모저모


1. 개요


전직 KBO 리그 야구 선수.
1990년대 중/후반 해태 타이거즈의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선수 시절 등번호는 22번. 동글동글 한 외모 때문에 풀빵이란 별명으로 통했다.

2. 선수 경력


군산상고와 건국대를 졸업한후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 멤버로 프로에 입문했지만, 전종화, 김충민, 박경완에 밀려 별 다른 활약은 없었다. 1994년 장채근과 맞트레이드 되어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고, 원래부터 해태에서 뛰고 있던 팀내 경쟁자인 정회열을 제치고 해태의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트레이드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지만, 최해식은 본래 해태 입단을 희망했기에 트레이드 소식을 듣고 굉장히 기뻐했다고 한다.
이후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김상진 등의 화려한 투수진과 호흡을 맞추었고, 타선에서는 이종범, 홍현우, 박재용 등과 함께 힘을 합쳐 1996년1997년 해태의 한국시리즈 2연패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타격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못했지만 투수리드와 블로킹, 프레이밍 등 수비가 일품이었는데, 송구능력이 뛰어나 도루저지율이 50%에 달할 정도였다. 특히 2루 송구 시간이 1.60초로 역대 포수 중 1위를 기록할 정도로, 공을 받자마자 미트에서 빼내 송구로 잇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투구 포구 후 2루 송구 시간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기준으로 1.92초 이내가 수준급 평가를 받고, 1.98초 정도가 마지노선이다. 2.0초대를 넘기면 도루 저지가 힘들어진다. 현존하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포수로 손꼽히는 야디어 몰리나의 2루 송구 시간은 1.8초를 넘기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조인성의 트레이드 마크라고도 할 수 있는 앉아쏴의 원조가 바로 이 분. 하지만 선배들에게는 건방지게 보였던 듯. 이 때문인지 고2 때 세계청소년선수권 대회 엔트리에도 뽑히지 못했다. 이후 더이상 앉아쏴를 하지 않았다고.
정회열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면서 사실상 경쟁자가 없는 주전 포수로 자리 잡았는데, 문제는 그나마 그를 받쳐줘야 할 백업 포수인 김지영, 권오성의 실력은 그닥 좋은 편이 아니었고, 2000년 1차지명 신인 김성호와 1996년 2차 2순위인 황성기는 성장하지 못하고 쓸쓸히 잊혀졌다. 거기에 김상훈(고려대학교)과 차일목(홍익대학교)은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1998~2000 시즌 동안 주전포수로 혹사를 당해야 했다. 이 시기 최해식의 출장경기수는 1998년 114경기, 1999년 130경기 2000년 101경기로 3년간 무려 88.2%나 경기에 출장했으니 얼마나 혹사당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최해식은 3시즌 간의 혹사로 인한 부상과 피로누적으로 최고의 강점이던 수비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고, 2001 시즌에 플레잉코치로 1시즌을 더 뛰고 은퇴한다.[2] 그리고 해태-KIA는 2000년에 입단한 김상훈이 2001 시즌부터 김상훈이 주전포수를 맡게 된다.
11시즌간(1990~2000) 통산 성적은 375안타, 17홈런, 165타점, 타율 0.217.로 타격이 매우 부진했던, 전형적인 수비형 포수의 성적을 보였다. 500경기 이상 출전선수 중 최저 타율 10위를 기록했을 정도.[3]

3. 은퇴 후


2003년까지 KIA 타이거즈 2군 배터리 코치로 재직하다[4] 야구계를 떠나 사업가로 변신하여 광주광역시에 배달전문 중국집 최고루를 차렸고, 직접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배달가방을 들고 뛰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이 개발한 볶음짬뽕이 빅히트를 치며 순식간에 사업 규모를 확장시켰다.
현재는 가맹점 15개[5]에 연순이익 약 10억원을 기록할 정도로 야구계에선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한편으로 매달 한번 씩 광주시내 보육원 등을 순회하며 아이들에게 짜장면 200~300그릇을 대접하는 등 봉사활동도 하고 있다. 이 덕분에 광주시에서 표창을 받기도.
덧붙이자면 학창 시절부터 야구만 하며 살아온 선수 출신으로 사회에서 성공하기는 상당히 드문 일인데, 최해식은 대표적인 성공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1990년 프로 입문 동기이자 야구선수로서는 자신보다 훨씬 스타였지만 은퇴 후 사업에 실패하고 안좋은 일에 휘말린, 해태 시절 팀메이트였던 어떤 양반과는 극과 극의 비교대상으로 오르기도 한다. 최해식의 경우 남의 말에 꾀여 사업을 확장 한다든가 하는 욕심 없이, 기존에 경영하고 있던 중국집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이런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어떤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현역 시절 시즌 15승을 했던, 30홈런을 쳤던 사회 생활과는 무관하다." 는 직설적인 말로 프로선수의 은퇴 후 삶이 녹록치 않음을 거듭 강조했었다. 실제로 최해식 역시 사업을 하던 당시에 사기를 당해 몇 번이나 가세가 기울기를 반복한 끝에 지금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사회경험이 없기 때문에 배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
2014년까지 광주과학기술원에서 야구를 가르치고 있었다. 2018년 현재는 바쁜 관계로 야구 강의 강사가 바뀌었다고 한다.
2010년대 초반 식당 경영을 하는 틈틈히 KIA 타이거즈의 홈경기를 중계했던 광주 지역 케이블 SO인 CMB에서 해설을 맡았다. 이후 2012~2013년도에 광주방송 MyFM에서도 KIA 타이거즈 편파중계 방송 '말로 홈런' 해설을 맡았다. 한때 우승 후보로 거론되던 기아가 7위로 추락하자 냉정하게 문제점을 분석하면서 여러가지 조언을 하였다. 기아 타이거즈 `우승 조급증’에 멍들다

4. 이모저모


  • 그의 아들인 최상인 군도 야구선수다. 186cm, 85kg의 건장한 체구를 자랑하는 우완 정통파 투수다. 광주수창초, 진흥중, 진흥고를 다녔다. 고졸로서 2016년 신인드래프트 대상에 포함되는데 KIA에 지명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고. 다만 기록이 좋지 않아서 상위권 지명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결국 2015년 8월 24일 실시된 신인 2차지명에서 NC 다이노스에 2차 5라운드로 지명되었다.

  • 한편 아들인 최상인 군이 프로로 진출하면서 광주광역시야구협회에 1,000만원을 기부했는데, 본인이 아들에게 권유했다고 한다. 지명 순위가 높은 편이 아니어서 계약금을 많이 받은것도 아닌데 기부를 했다는 점에서 팬들의 칭찬을 받았다. 이 공로로 특별상을 받았다.최상인 ‘광주 야구인의 밤’ 특별상
  •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故 김상진(1977) 이야기를 할 때마다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97년 해태의 마지막 우승 당시, 주전 포수로서 그와 함께 하기도 했으니, 누구보다도 그의 안타까운 이른 죽음에 슬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 현재는 익산시로, 이리역 폭발사고이후 익산에 병합되었다.[2] 2001년은 부상으로 인해 1군기록 없다. 참고로 같은 해에 이호성도 플레잉코치로 뛰다가 은퇴했다.[3] 여기서 최저타율을 기록한 주인공이 염경엽, 그 다음으로 조범현,김경문 등이 있다.[4] 이 때 2군 투수코치로 온 주동식과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술만 마시면 종종 주동식에게 전화를 할 정도라고...[5] 본점은 광산구 운남동에 있다. 먹어 본 팬들의 증언에 의하면 가맹점마다 맛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