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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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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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의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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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이지용
李址鎔 | Lee Ji-yo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9D%B4%EC%A7%80%EC%9A%A9.jpg

이름
이지용 (李址鎔)
초명
용구 (龍驅)
→ 은용 (垠鎔)
본관
전주 이씨 (全州)

경천 (景天)
용구 (龍駒)

향운 (響雲)
출생
1870년 10월 23일
경기도 광주부 궁촌[1]
사망
1928년 6월 30일 (향년 57세)
사인
병사
직업
정치가, 관료
작위
조선귀족 백작
약력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내부대신, 학부대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비고
을사오적, 《한일의정서》 체결
친일인명사전 등재

파일:e2b9c4c1-cef1-4b6b-a406-3d6b004c4328.jpg}}}
[[1909년|{{{#eccd7a 1909년}}}]] [[순종(대한제국)|{{{#eccd7a 순종}}}]]이 순행에서 돌아와 [[창덕궁 인정전|{{{#eccd7a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촬영한 사진.
중앙은 순종. 오른쪽으로 [[의양군|{{{#eccd7a
의양군 이재각}}}]], 민병석, 조중응, 김윤식, 이지용, 조민희, 고희성. 순종의 뒤는 이병무, 윤덕영. 순종의 왼쪽으로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


1. 개요
2. 생애
3. 후손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 말기의 왕족이자 관료. 을사오적 중 1명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구한말의 국권상실 당시 대표적인 매국노의 일원이었지만, 원흉격인 이완용은 물론 을사오적도 아닌 송병준보다는 덜 알려진 인물이다.


2. 생애[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e_Ji-yong_Portrait.jpg

파일:李址鎔.jpg
《조선귀족열전》
(朝鮮貴族列傳)

《이미지로 보는 한일병합사》
(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

전주 이씨 왕족으로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의 손자이다. 원래는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17대손이다.[2] 광흥령 이희하의 친아들이었으나 1881년 사망한 흥인군의 아들 이재긍의 양자로 들어갔다.[3] 이로 인해 고종과는 사실상[4] 5촌 당숙부와 당질의 관계가 된다. 본래 이름은 '이용구(李龍驅)'였다가 이재긍의 양자가 되면서 '이은용(李垠鎔)'으로 바꿨고 1900년 8월에 고종이 4살 난 3황자 이름을 '이은(李垠)'으로 짓자 피휘를 위해 '이지용(李址鎔)'으로 재개명하였다.

1887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895년 칙명을 받아 일본을 유람하고 돌아왔으며 경상도감찰사, 황해도감찰사를 거쳐 궁내부 협판을 역임하다가 궁내부(宮內部), 법부(法部), 경부(警部)대신 서리를 맡고 1901년 주일 공사를 지냈다. 1903년 10월 무렵부터 일본 측과 협상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을 돕도록 하는데 힘썼으며 1904년 2월 외부대신(현 외교부장관)으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1만엔을 받고 한일의정서에 서명했다.

1905년 내부대신(현 행정안전부장관)으로 을사조약에 동조하는 5대 매국노의 일원이 되었고, 백작 작위를 얻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병자호란청나라에 항복한 지천 최명길에 비유하며 정당화하려 했다.[5]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 이지용은 나라를 판 으로 도박에 올인했다고 한다.

사망하기 직전에 유언으로 "일본에게 속았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는데 이 후회가 '동아공영론'에 낚였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자신의 단순한 신세 한탄인지는 논란이 있다.


3. 후손[편집]


  • 슬하에 이해충과 이해문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 이해충은 세 아들(이경주, 이문주, 이홍주)을 두고도 그들의 본가인 광평대군파에서 항렬이 맞는 아이를 데려다 입양해 후계자로 삼았는데 그가 이영주이다. 이해충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이영주는 이지용 사후 흥인군계의 종손으로 이지용이 가지고 있던 조선귀족 백작 작위를 물려받았고 열심히 친일 행위를 했다. 8.15 광복반민특위에게서 소환장을 받았고 1955년 4월에 사망한 것 빼곤 알려져 있지 않다. 이지용의 둘째 아들 이해문은 형처럼 세 아들(이해주, 이석주, 이철주)을 두었다. 이 외에는 정보가 없다.


4. 기타[편집]


  • 구한말 '산홍'이라는 기생에게 이 되어달라고 구애했지만,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라며 거절당하는 굴욕을 당했다.[6] 기사


5. 대중매체에서[편집]




6. 관련 문서[편집]



[1] 한성부 혹은 전주에서 출생했다는 주장도 있다.[2] 원래는 '範'자 항렬이다. 독립운동가이범진이범석의 형제뻘이다.[3] 실제 혈통상으로는 무려 35촌. 숙질 간이다.[4] 사실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고종 역시 문조의 양자가 되어 출계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종의 생가 친형제들 및 사촌 형제들은 이지용과 법적으로 정확히 5촌.[5] 그야말로 구차한 변명이다. 지천 최명길이 주장했던 항복은 사대의 대상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꾸는 조건에 따른 것이었지, 조선이 일체의 주권을 포기하고 청의 일개 지역으로 전락하는 조건은 아니었기 때문이다.[6] 다른 버전으로는 어떤 친일파의 경우 집에 일하던 하녀가 "친일파에게 을 지어줄 수 없다!"며 요리하던 칼을 던졌다는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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