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수(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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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2. 생애[편집]
1934년 10월 15일 충청남도 서산군 소원면(現 태안군 소원면) 영전리에서 아버지 한범석(韓範錫, 1906. 5. 21 ~ 1986. 4. 24)과 어머니 경주 이씨(1908 ~ ?)[7] 사이에서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태안중학교를 거쳐 1955년 인천고등학교(54회), 1966년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수료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10월 유신 이후 치러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면서 처음으로 원내에 입성하였다. 이후 신민당 공천을 받아 제10대 국회의원으로 재선되었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으로 신군부에 협력하였고, 민주한국당 후보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당선되었다. 1982년 간통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형 확정 전 의원직을 사퇴했다.[8]
1986년 제3세대당을 창당하였으나 피선거권이 없어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지 못했다. 이후 평화민주당에 입당했고, 1992년 4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충남 서산시·서산군·태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직 국회의원이던 박태권을 단 1% 차이로 꺾고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한국당에 합류하였다가 다시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신민당을 거쳐 자유민주연합 소속이 되어 원내총무, 부총재, 서울시지부장 등을 맡았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를 변웅전에게 넘겨주고 자민련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7년에는 자민련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기도 했다.[9]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다시 충남 서산·태안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10] 낙선한 뒤 자민련을 탈당하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몽준의 국민통합21 창당에 참여하여 당 고문을 맡았다. 이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산·태안 지역구에 다시 출마하였으나 단 2.56%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최하위로 낙선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여야와 진영을 가리지 않는 수 차례의 당적 변경으로 오늘날 정치 철새들의 시조새급으로 평가받는다. 이에 대해 한영수 본인은 "생각해보니 우리에겐 정치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며 자신의 정치역정에 회한이 많았다고 고백하였다.
3. 선거 이력[편집]
4. 소속 정당[편집]
5. 둘러보기[편집]
[1] 검교참판공파(檢校參判公派) 31세 수(洙) 항렬.[2] 1934 ~ 1985. 4. 16. 고창남(高暢南)의 딸이다.[3] 朴仁淑. 1946년 3월 18일생. 밀양 박씨 박창덕(朴昌德)의 딸이다.[4] 韓相翊. 1970년 8월 17일생. 변호사.[5] 韓愛羅. 1972년 2월 17일생.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6] 韓愛敬. 1977년 3월 1일생.[7] 이종만(李鍾萬)의 딸이다.[8] 안기부의 뒷조사에 의한 것이라는 후문이 있다.#[9] 결과는 당연히 김종필의 압승.[10] 거주지였던 서울 양천 갑 출마를 준비했으나 승산이 없자 변웅전을 다시 밀어낸 것.[11] 서산군 을[12] 서산군[13] 서산군[14] 서산군, 당진군[15] 신민당 류제연 후보와 동반 당선[16] 민주공화당 심현직 후보와 동반 당선[17] 서산군, 당진군[18] 민주정의당 김현욱 후보와 동반 당선[19] 민주당과 신설합당[20] 신한당과 신설합당[21] 민주당과 신설합당[22] 자유민주연합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