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FIFA 월드컵/2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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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선 진출 이전
2.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1]
4.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2]
5.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3]
6. 1994 FIFA 월드컵 미국[4]
7.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5]
8. 둘러보기
8.1. 나라별 국가대표팀 경기
8.2. 감독별 국가대표팀



1. 본선 진출 이전[편집]


대한민국은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약 35년 동안 일제 강점기를 겪었다. 때문에 첫 번째 대회인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부터 3회 대회인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까지는 그 때문에 진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1945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광복을 맞이했으나, 1946년엔 전후 피해가 너무 심각했기에 월드컵이 중단되었다.

대신 1948 런던 올림픽/축구[6]에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나라 사정이 어려웠기에 영국까지 3주 가까운 시간을 허비하며 어렵게 도착했지만, 놀랍게도 16강전에서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를 맞아 5:3 승리를 거두며 첫 1승과 첫 8강 준준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진출국 중 최약체로 꼽혔던 한국에게 일격을 당하며 탈락한 멕시코는 귀국하자마자 공항에서 자국 축구팬들에게 썩은 토마토와 날계란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8강에서는 이 대회 금메달 우승팀 스웨덴을 만나 무기력한 경기를 펼친 끝에 0 : 12로 대패하며 올림픽 8강 8위로 마쳤다. 이 경기는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의 역대 A매치 최다 점수 차 패배 경기로 남아있다.

하지만 올림픽 축구 8강 진출은 대한민국 축구에 큰 자신감을 안겨주었고, 1950 브라질 월드컵에 지역예선 부터 참가하고자 했지만 개최국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이라 너무 멀어 거기까지 갈 돈도 없었을 뿐더러 결정적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의 발발로 인해 참여하지 못했다.[7] 그렇게 대한민국은 1회~4회 대회까지 단 한 번도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다.

2.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8][편집]


1회~4회 대회까지 내리 불참한 이후 대한민국은 5회 대회인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에 처음으로 출전 신청을 했다. 당시 대회는 16개국 본선 진출이었는데[9], 이 중 1장은 개최국 스위스의 몫으로 돌아갔고 또 나머지 1장은 전 대회 우승국인 우루과이의 몫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국가들은 남은 14장을 놓고 예선을 치렀는데, 당시 피파는 아시아 국가들의 수준을 고려하지 못했고 아시아에게는 타 대륙과의 경쟁도 없이 1장의 16개국 본선 진출권이 부여되었다.

당시 아시아는 지역예선 13조에 편성되었는데, 이때 출전 신청을 한 나라는 대한민국, 일본, 대만이었다. 그런데 대만은 예선 경기를 치르기 직전에 돌연 기권을 선언했고, 결국 예선전은 한일전으로 압축되었다. 본래 예선전은 홈 앤드 어웨이로 치러야 했으나 반일주의자였던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왜놈들이 이 땅을 밟게 할 수는 없다!라고 강경하게 맞서 결국 2경기 모두 일본에서 치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10] 그리하여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을 놓고 한국과 일본의 승부가 펼쳐졌다. 당시 예선 경기가 열린 때는 1954년 3월이었는데, 광복을 맞은 지 불과 8년 7개월밖에 되지 않은 터라 식민지 시절의 한을 풀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을 정도로 열기는 엄청 뜨거웠다.

그렇게 1954년 3월 7일, 도쿄에서 열린 예선 1차전 경기에서 한국은 정남식과 최정민이 각각 멀티골을 터뜨리는 맹활약을 한 끝에 일본을 무려 5:1로 대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2차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16개국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11] 한국은 전반 16분에 이와타니 토시오에게 실점하며 어려운 출발을 했지만, 전반 24분에 터뜨린 정남식의 동점골과 43분에 터진 최정민의 역전골로 승부를 뒤집었다. 후반 15분에 다시 이와타니에게 실점했지만 남은 시간 동안 일본의 공세를 잘 막아내며 2:2 무승부를 거두어 1승 1무의 성적으로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 때 인도네시아(당시 국명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15개국(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 본선에 진출한 이후 아시아 국가로서는 16년 만에 2번째로, 독립국을 기준으로는 최초로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처음으로 월드컵 16개국 본선 무대에 데뷔한 한국에 월드컵이라는 곳의 난이도는 냉혹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한국은 헝가리, 튀르키예, 서독과 함께 2조에 속했는데, 한국 대표팀 사령관 김용식 전 감독은 이 조 편성을 보고 상당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3팀 모두 유럽 팀이고 한국이 속된 말로 비벼볼 만한 팀이 하나도 없었으니 한국은 승점자판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용식과 선수들은 1골만이라도 넣어서 전쟁에 헐벗고 굶주린 국민들에게 희망을 전하자는 각오를 다지고 스위스로 향했고, 심지어 대회 엔트리 22인을 다 채우지도 못한 채 20명의 선수만으로 출국에 나서야 했다. 이렇게 한국의 시련 어린 첫 번째 월드컵 도전이 시작되었다.
  • 대표팀 최종 엔트리
    • GK : 홍덕영, 함흥철
    • DF : 박규정, 박재승, 민병대, 이종갑, 한창화
    • MF : 강창기, 이상이, 정남식, 김지성, 주영광
    • FW : 이수남, 최정민, 우상권, 성낙운, 박일갑, 최영근, 이기주, 정국진
감독 : 김용식

2.1. 16강 조별리그 헝가리전 - 0 : 9 패[편집]


파일: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로고.svg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2조 1차전
1954년 6월 17일 목요일 18:00 (UTC+1)

하르트투름 슈타디온 ([[스위스|{{{#ffffff 스위스}}}]], [[취리히|{{{#ffffff 취리히)}}}]]
주심: 파일:UEFA FRA.png 레이몽 빈센티
관중: 18,000명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장(1957-1990).svg
9 : 0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파일:UEFA HUN.png 헝가리
파일:UEFA KOR.png 대한민국
12', 89' [[페렌츠 푸스카스|{{{#000000 페렌츠 푸스카스}}}]][* 영어식 표기인 페렌츠 푸스카스로 잘 알려진 선수이며, FIFA 푸스카스상이 바로 이 선수의 이름을 땄다.]
18' 런토시 미하이
24', 36', 50' [[산도르 코츠시스|{{{#000000
산도르 코츠시스}}}]]
59' [[졸탄 치보르|{{{#000000
졸탄 치보르}}}]]
75', 83' 팔로타시 페테르

파일:득점 아이콘.svg
-
[[https://m.youtube.com/watch?v=fTm0CwomRro|{{{#000000 경기 하이라이트}}}]] | [[https://www.fifa.com/tournaments/mens/worldcup/1954switzerland/match-center/1294|{{{#000000 매치 리포트}}}]]
경기 최우수 선수: 파일:UEFA HUN.pn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조별리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25 전쟁이 끝나고 불과 11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1954년 6월, 한국의 첫 번째 월드컵 도전은 그때 이루어졌다. 안 그래도 정부가 수립된 지 겨우 6년밖에 안 된 신생국인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전쟁까지 치렀던 탓에 대표팀에 대한 지원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먹고 살기도 바쁜 와중에 축구 같은 스포츠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심지어 선수단 단복을 맞출 돈조차 없어서 대한축구협회 임원 중 양복점을 운영하는 지인이 있어서 그 사람한테 사정사정해서 외상으로 겨우 맞춰 입었을 정도라고 한다.[12] 비행기 표도 못 구해서 1진, 2진으로 나눠서 스위스로 향했고, 그나마 1진 선수들 표도 2장이 모자랐는데 사정을 들은 영국인 신혼 부부가 자신들의 표를 양보해준 덕분에 간신히 스위스에 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표팀이 스위스에 도착한 때는 킥오프를 하기까지 불과 10시간 전이었다. 여독을 풀 새도 없이 시차 적응도 못하고 그냥 그대로 옷과 신발만 유니폼과 축구화로 환복하고 경기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월드컵 첫 상대는 당시 매직 마자르로 불리던 세계 최강 헝가리였다. 김용식은 헝가리의 수준이 수준인지라 어려운 경기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선수들에게 "다 져도 좋으니까 1골만 넣자. 그래야 전쟁에 지친 국민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하며 8강 진출도 1승도, 무승부 승점 1점도 아닌 1골을 목표로 대회에 나섰다.

하지만 헝가리의 전력은 한국의 그 소박한 목표조차도 철저하게 무산시킬 만큼 강력했다. 전반 10분까지는 그럭저럭 잘 버텼고, 의외로 경기가 쉽게 풀리지 않자 헝가리 선수들은 서로 남탓을 하며 분란을 일으키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러나 전반 12분에 페렌츠 푸스카스가 첫 골을 성공시키면서 헝가리의 일방적인 골 폭격이 이어졌다. 헝가리 선수들은 90분 동안 쉴 새 없이 슈팅을 퍼부으며 한국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골밖에 안 내준 건 순전히 골키퍼 홍덕영의 맹활약 덕분이었다. 시차 적응도 못한 상태에서 옷만 갈아입고 바로 경기에 나섰으니 한국 선수들은 쥐가 나서 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당시에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기에 부상으로 경기를 못 뛰게 되면 그 인원이 빠진 채로 경기해야 했는데[13] 그 때문에 경기가 끝날 때 한국 선수들은 7명만이 그라운드에 남아있었다.

결국 한국은 월드컵 데뷔전에서 헝가리에게 0 : 9로 대패하며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최소 20 : 0 이상의 스코어가 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그 예측을 깨고 한 자리 수 점수 차이로 선방했기에 모든 이들이 한국의 선전을 칭찬했고 오히려 헝가리를 향해 9골밖에 못 넣었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헝가리 대표팀의 구스타프 세베슈 감독은 "한국 선수들은 사자처럼 용맹했다. 쥐가 나서 쓰러지는 데도 끝까지 투혼을 발휘했다."라며 한국 선수들을 칭찬했다. 특히 유럽 축구팬들은 중계나 뉴스 등을 통해 헝가리를 상대로 눈물겨운 투혼을 선보인 한국 대표팀의 열악한 사정을 알고는 숙소를 찾아가 각종 의류나 식품, 현찰 등의 물자를 잔뜩 선물해 선수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특히 화려한 선방쇼를 선보인 홍덕영에게는 사인까지 받아갔을 정도였니 이 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이 유럽 축구 팬들에게 적지 않은 임팩트를 선사했음을 엿볼 수 있다.

2.2. 16강 조별리그 터키전 - 0 : 7 패[편집]


파일: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로고.svg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2조 2차전
1954년 6월 20일 일요일 17:00 (UTC+1)

스타드 드 샤르밀 ([[스위스|{{{#ffffff 스위스]], [[제네바|{{{#ffffff 제네바)]]
주심: 파일:UEFA URU.png 에스테반 마리노
관중: 17,150명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7 : 0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파일:UEFA TUR.png 터키
파일:UEFA KOR.png 대한민국
10', 30' 수앗 마마트
24' 레프테르 퀴취칸도니아디스
37', 64', 70' 브루한 샤르힌
76' 에롤 케스킨

파일:득점 아이콘.svg
-
[[https://m.youtube.com/watch?v=tnTGUsCSVrE|{{{#000000 경기 하이라이트}}}]] | [[https://www.fifa.com/tournaments/mens/worldcup/1954switzerland/match-center/1304|{{{#000000 매치 리포트}}}]]
경기 최우수 선수: 파일:UEFA TUR.pn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조별리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국의 월드컵 2차전 상대는 바로 터키(튀르키예)였다. 이 조에 속한 팀들 모두가 한국보다 몇 수 위의 팀들이라 상당히 빡센 조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터키는 어느 정도 해볼 만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으나 당시 터키는 스페인을 이기고 1954년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한 팀이었다. 실제로 이 대회 이후 7년 뒤 1961년에 치른 평가전에서는 상당히 선전해서 0:1 석패를 할 정도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헝가리전에서 워낙 진을 뺀 탓이었는지, 그나마 좀 해볼 만한 상대라는 터키를 맞아서도 한국은 무기력한 플레이를 보이고 말았다. 전반 10분에 수앗 마마트에게 선제골을 내준 것을 시작으로 레프테르 퀴취칸도니아디스에게 추가골을 내주었고, 30분에는 마마트에게 골을 내주었다. 그리고 7분 뒤에 브루한 샤르힌에게 추가골을 허용하며 전반전을 0:4로 뒤진 채로 마쳤다. 그리고 후반전에도 샤르힌에게 2골을 더 내주어 해트트릭을 허용했고, 후반 31분에 에롤 케스킨에게 마지막 골을 허용해 0:7로 대패해 결국 2전 2패, 무득점 16실점이라는 성적으로 첫 번째 월드컵 도전을 마무리했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1골이라는 목표를 이루기에도 세계와의 격차는 너무 컸고, 또 전쟁 직후라 돈이 없어서 대회 준비도 제대로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이 대회 16강 조별리그는 특이하게 '듀얼 리그'라는 제도를 도입했는데, 상위 시드를 받은 2팀과 하위 시드를 받은 2팀으로 나누어 같은 시드에 속한 팀과는 서로 대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조 추첨 당시 1번과 3번 시드가 상위 시드였고 2번과 4번 시드가 하위 시드였는데, 이 조에서는 헝가리와 터키가 각각 상위 시드였고[14] 대한민국과 서독이 하위 시드였다. 대회 규정상 같은 시드에 속한 팀들 간의 대결은 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한국과 서독은 서로 같은 조가 되었지만 대결은 없었으며, 두 팀의 맞대결은 40년 뒤인 1994년에 독일이 통일된 지 4년 만에 1994년 월드컵 24강 본선 조별리그 3차전에서 이루어진다.

3.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본선 진출 실패)[편집]


피파는 1938 월드컵 인도네시아의 무혈입성 참패 탈락과 1954 월드컵 한국의 참패 탈락으로 아시아의 축구 수준이 너무 낮은 것도 고려하여 1958 월드컵부터 아시아를 타 대륙과 경쟁을 치뤄야 1958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할 수 있게 바꿨다. 그렇게 첫 번째 월드컵 도전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렀던 한국은 1956 AFC 아시안컵 홍콩에서 우승을 차지해 아시안컵 초대 챔피언이라는 영예를 얻었고, 이에 자신감도 상승하여 다시 한 번 월드컵 무대에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어이없는 사건으로 인해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지역 예선에는 참가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 어이없는 사건은 대한축구협회 직원의 신청서 분실 사건이었다. 이 직원이 신청서를 서랍에 넣고 까맣게 잊어버리는 바람에 어이없게 월드컵에 못 나서게 된 것이다. 그만큼 1950년대의 한국은 모든 것이 후진적이었다.[15]

1962 FIFA 월드컵 칠레 당시 대회도 16개국만 본선에 진출하는 대회였는데, 유럽은 이 중 절반인 8장을 가져간 것도 모자라 플레이오프 0.5장을 2개나 얻어갔고 그 플레이오프 상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였고 나머지 티켓 중 5.5장을 남미가 가져갔다. 그리고 북중미, 아시아, 아프리카 3개 대륙을 통틀어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권은 달랑 1.5장이 부여되었다. 즉 유럽과 남미 단 둘이서만 즐기겠다는 심산이었던 것. 노골적인 대륙 차별이 극에 달했던 월드컵이었다. 아시아 지역예선에서는 한국이 예선 10조 B조에서 일본과 같이 있었는데, 홈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2:1 역전승[16]을 거두었고 이후 일본 원정에서도 2:0 완승을 거둔다. 이후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맞대결로 압축되었는데 인도네시아가 돌연 기권하면서 한국은 부전승으로 대륙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대륙 플레이오프 상대는 유고슬라비아였다. 플레이오프는 경기 특성상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야 했는데, 반공을 국시로 걸고 나온 군사 정권에서는 유고슬라비아가 공산권 국가라는 이유로 공산권 국가와 시합하는 것을 거부하고 월드컵 불참을 종용했으나, 대한축구협회는 박정희 정부를 설득시켰고[17] 결국 경기는 정상적으로 치러지게 된다. 그렇게 베오그라드에서 치러진 1차전 원정에서 한국은 1:5로 대패했고[18], 2차전은 서울효창운동장에서 치러졌는데 이 경기에서도 1:3으로 패배해 결국 지역예선에서 탈락하여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 실패했다.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역시 피파의 노골적인 대륙 차별이 이어진 대회였는데, 전체 16개국의 본선 티켓 중 무려 10장을 유럽이 독식했고, 나머지 6장 중 4장을 남미가 가져갔고 북중미에게 1장이 돌아갔고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이 3개 대륙을 묶어서 1장을 준 것이다. 이에 분노한 아프리카 팀들은 대대적으로 보이콧을 선언했다. 그런데 당시 아시아 축구에서는 북한이 신흥 강호로 급부상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정부는 북한과의 맞대결을 부담스럽게 여겨 결국 월드컵 불참을 선언하게 했고 대한축구협회는 그 대가로 피파에게 5000달러의 벌금을 납부해야 했다. 결국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지역예선은 북한과 호주의 맞대결로 압축되었고, 북한은 합산 점수 9:2로 호주를 격파하고 16개국 본선에 올랐다. 그리고 다들 잘 알다시피 그 대회에서 북한은 16강 조별리그 1차전에서 소련에게 0:3으로 패배하고 2차전에서 칠레와 1:1 무승부를 거두며 탈락 위기에 몰렸으나, 3차전에서 박두익의 결승골로 이탈리아를 1:0으로 격파하고 조 2위로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8강에서 포르투갈을 맞아 전반 22분까지 3골을 넣으며 3:0으로 리드했으나, 에우제비우에게 4골을 연달아 헌납하며 결국 3:5 역전패를 당하여 8강전 8위로 마쳤다. 이런 북한의 호성적에 한동안 박정희 정권은 배가 아팠는지 시덥잖은 사창가 루머나 퍼뜨렸다.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에서도 아시아+오세아니아로 오직 단 1장의 16개국 본선 진출권을 부여받았다. 한국의 1차 예선 상대는 호주와 일본이었다. 한국은 1차전에서 일본과 2:2로 비긴 뒤 호주에게 1:2로 패배하며 가시밭길을 걸었다. 다시 3차전에서 일본을 2:0으로 이기며 불씨를 살린 한국은 마지막 경기에서 반드시 호주를 이겨야만 2차 예선에 올라갈 수 있었으나, 호주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결국 지역예선에서 또 탈락하고 말았다. 이때 경기 막판에 호주 수비수의 반칙으로 페널티 킥을 얻었고, 이 킥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는데 키커 임국찬이 실축하며 결국 2차 예선 진출권을 호주에게 넘겨주고 말았다.[19][20] 이로 인해 임국찬은 만고의 역적으로 전락했고, 결국 그는 쫓겨나듯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21]

1974 FIFA 월드컵 서독에서도 아시아+오세아니아로 오직 단 1장의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권을 부여받았다. 이때 지역예선은 A지역과 B지역 2개로 나누어서 진행했으며, 각 지역의 우승자끼리 결선 라운드에서 승부를 가리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은 A지역에 속해 이스라엘, 말레이시아, 태국과 함께 2조에 속했다. 1차전에서 태국을 4:0으로 격파한 한국은 이후 말레이시아, 이스라엘과 각각 0:0으로 비기며 조 2위로 4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4강에서 홍콩을 3:1로 꺾고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결승전 상대는 이스라엘이었는데, 이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하며 결선 라운드 진출에 성공했다. B지역 우승자는 호주였고, 시드니에서 열린 1차전에서 양 팀은 0:0으로 비겼고 서울에서 열린 2차전에서도 2:2로 비겼다.[22] 그래서 중립 지역인 홍콩에서 다시 한 번 플레이오프를 치렀으나, 이 경기에서 한국은 호주에게 기습적인 선제골을 허용하며 0:1로 끌려갔고 결국 또 호주의 벽을 넘지 못하며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 실패했다.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도 아시아+오세아니아로 오직 단 1장의 월드컵 16개국 본선 진출권을 부여받았다. 이 대회에서의 예선 방식은 1차 예선에서 1위를 한 팀이 최종예선에 진출하여 1장의 출전권을 놓고 겨루는 방식이었다.[23] 대한민국은 이스라엘, 일본, 북한과 함께 2조에 속했다. 그런데 북한이 대회 직전에 돌연 기권을 선언하면서 이스라엘과 일본과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한국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각각 0:0 무승부, 3:1 승리를 거두었고 일본을 상대로도 각각 0:0 무승부, 1:0 승리를 거두어 2승 2무로 조 1위를 차지해 가볍게 최종예선에 올랐다. 최종예선에서는 이란, 호주, 쿠웨이트, 홍콩과 한 조에 속해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치렀다. 그러나 한국은 3승 4무 1패[24]의 전적으로 조 2위를 하는 데에 그쳐 6승 2무로 조 1위를 차지한 이란에게 출전권을 헌납해야 했다.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편파판정 때문에 억울하게 탈락한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는 본선 24강으로 확대되어서 아시아+오세아니아 두 대륙을 묶어서 2장의 진출권을 부여받았다. 1차 예선에서 한국은 쿠웨이트, 말레이시아, 태국과 함께 3조에 속했다. 대회는 전 경기 모두 쿠웨이트에서 열렸다. 한국은 1차전에서 말레이시아를 2:1로 꺾었고 2차전에서 태국을 5:1로 이겼고, 쿠웨이트 역시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잘 살려 태국을 6:0으로 이겼고 뒤이어 말레이시아를 4:0으로 이겼다. 각 조 1위 팀만이 최종예선에 진출할 수 있었으므로 3차전 쿠웨이트와의 경기는 운명의 경기였다. 그런데 심판은 초반부터 석연찮은 판정을 남발하며 한국의 기세를 꺾었고, 결국 후반 6분 대한민국은 선제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쿠웨이트를 상대로 공격을 퍼부었고, 마침내 이태엽이 세트피스 찬스에서 완벽한 헤딩골로 동점골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 심판은 수비수를 방해했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득점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영상을 확인해 본 결과 이태엽과 쿠웨이트 수비수는 몇 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다. 이에 이태호가 나서서 항의했지만 주심은 도리어 이태호를 퇴장시켜 버렸고, 멘탈이 흔들린 한국은 끝내 종료 직전에 한 골을 더 허용했고 쿠웨이트가 2:0으로 승리해 최종예선에 올랐다.

정리하자면 1958년부터 1982년까지 한국이 아예 지역 예선 참가를 하지 않은 1958년과 1966년을 제외하고 한국이 월드컵 최종 예선도 밟지 못한 경우는 1970년과 1982년 단 2차례 뿐으로, 1962년과 1974년, 1978년은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이 눈앞에 있었지만 아쉽게 올라가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4.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25][편집]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30년이 넘도록 월드컵을 남의 나라 잔치로 보냈던 대한민국은 1983년 K리그를 출범시키면서 본격적인 초석을 다지기 시작했고[26]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야 다시 월드컵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자그마치 32년 만의 일이었다. 물론 이때도 결코 쉽게 진출한 것은 아니었다. 1982 스페인 월드컵부터 24강 본선으로 확대되면서 이 대회에서 아시아는 단독으로 2장의 진출권을 부여받았는데, 이때 아시아 축구 연맹은 내부 결정으로 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 각각 한 팀씩을 본선에 보내기로 했고 따라서 한국은 서아시아 팀들과 같은 조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1차예선에서 한국은 말레이시아, 네팔과 함께 3A조에 속했다. 그런데 1차전에서 조 최약체 네팔을 상대로 2:0 진땀승을 거둔 데다가[27] 2차전 말레이시아와의 경기에서는 0:1로 패배해 가시밭길을 걸었다. 이에 대한축구협회는 칼을 뽑아 문정식 감독을 경질하고 김정남을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다행히도 김정남 감독은 팀을 잘 추슬러 한국은 남은 2경기를 모두 이기고 조 1위를 차지해 2차예선 진출에 성공했다.

2차예선(3조 결승)에서는 3B조 1위 인도네시아와 홈 앤드 어웨이로 승부를 겨루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2:0 승리를 거두었고 2차전 자카르타 원정 경기에서도 4:1 대승을 거두어 합산 점수 6:1로 가볍게 승리를 거두고 최종예선에 올랐다. 최종예선에 오른 4팀은 동아시아(3조, 4조)는 한국과 일본, 서아시아(1조, 2조)는 이라크시리아였다.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역 결승전을 치르고 승자 두 팀이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한국은 도쿄 원정 경기에서 2:1로 이겼고, 서울 홈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해 합산 점수 3:1로 일본을 꺾고 드디어 32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복귀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월드컵 무대에 복귀한 한국에는 참혹한 시련만이 마주했다. 조 추첨 결과가 지지리도 불운했기 때문이었는데,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프랑스를 2:0으로 격파하며 본선에 진출한 불가리아, 그리고 디펜딩 챔피언인 이탈리아와 함께 A조에 편성된 것이다. 사실상 톱시드 팀이 2개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셈. 어쨌든 태극전사들의 두 번째 월드컵 도전은 그대로 시작되었다.
감독 : 김정남

4.1. 24강 조별리그 아르헨티나전 - 1 : 3 패[편집]


파일: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로고.svg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A조 2경기
1986년 6월 2일 월요일 12:00 (UTC-6)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우니베르시타리오|{{{#ffffff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우니베르시타리오]] ([[멕시코|{{{#ffffff 멕시코]], [[멕시코 시티|{{{#ffffff 멕시코 시티)]]
주심: 파일:스페인 국기.svg 빅토리아노 산체스 아르미니오
관중: 60,000명

파일:Argentina AFA 1986-before WC.png

3 : 1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대한민국
6', 46' [[호르헤 발다노|{{{#000000,#ffffff 호르헤 발다노]]
18' [[오스카 루게리|{{{#000000,#ffffff
오스카 루게리]]
파일:득점 아이콘.svg
73' [[박창선|{{{#000000,#ffffff 박창선]][28]
[[https://m.youtube.com/watch?v=DfpdhFKSte4&pp=ygUc64yA7ZWc66-86rWtIOyVhOultO2XqO2LsOuCmA%3D%3D|{{{#008c44 경기 하이라이트}}}]] | [[https://www.fifa.com/tournaments/mens/worldcup/1986mexico/match-center/395|{{{#008c44 매치 리포트}}}]]
경기 최우수 선수: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A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1차전 상대는 슈퍼스타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는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나섰고, 한국은 사력을 다해 수비로 버티며 역습을 노렸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매우 강력한 팀이었다. 전반 6분 만에 호르헤 발다노에게 선제골을 허용했고, 전반 18분에 오스카 루게리에게 추가골을 허용해 전반전에만 0:2로 끌려갔다. 김정남 전 감독은 진돗개라는 별명을 가진 미드필더 허정무에게 디에고 마라도나를 전담 마크하도록 지시했고, 익히 알려진 대로 허정무는 이른바 태권 축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면서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마라도나를 막았다. 덕분에 디에고 마라도나한테는 골을 먹히지는 않았지만 아르헨티나에는 마라도나 말고도 뛰어난 선수가 많았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또 발다노에게 한 골을 더 내주며 한국은 0:3으로 뒤지게 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후반 28분 박창선이 골문 밖 20m 지점에서 강력한 중거리 슛을 날렸고 이게 골로 연결되어 한국은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월드컵 첫 골을 성공시켰다. 결국 경기는 아르헨티나의 3:1 승리로 끝났지만, 32년 동안 염원해 왔던 월드컵 첫 골을 성공시킨 태극전사들은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신감은 다음 경기에서의 선전으로 이어졌다.

여담으로, 이 경기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FIFA 월드컵에서 해당 대회 우승국을 상대한 유일한 경기이다.

4.2. 24강 조별리그 불가리아전 - 1 : 1 무[편집]


파일: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로고.svg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A조 4경기
1986년 6월 5일 목요일 16:00 (UTC-6)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우니베르시타리오|{{{#ffffff 에스타디오 올림피코 우니베르시타리오]] ([[멕시코|{{{#ffffff 멕시코]], [[멕시코 시티|{{{#ffffff 멕시코 시티)]]
주심: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파라지 알샤나르
관중: 45,000명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1 : 1

파일: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국장(1971-1990).svg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대한민국

70' [[김종부|{{{#000000,#ffffff 김종부]]
파일:득점 아이콘.svg
11' [[플라멘 게토프|{{{#000000,#ffffff 플라멘 게토프]]
[[https://m.youtube.com/watch?v=23ZcB0YKpaI&pp=ygUT7ZWc6rWtIOuzvOqwgOumrOyVhA%3D%3D|{{{#008c44 경기 하이라이트}}}]] | [[https://www.fifa.com/tournaments/mens/worldcup/1986mexico/match-center/460|{{{#008c44 매치 리포트}}}]]
경기 최우수 선수: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A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9]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2차전 상대는 불가리아였다. 당시 불가리아는 한국보다 한 수 위의 전력이었지만, 그래도 아르헨티나나 이탈리아에 비하면 해볼 만한 상대였고 그래서 내심 첫 승을 기대하기도 했다. 당시 경기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장대비가 퍼붓던 수중전이었다. 한국은 불가리아를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대등하게 싸웠지만 의외의 변수 하나 때문에 불리한 경기를 하게 되었다. 전반 11분, 상대 슈팅을 골키퍼 오연교가 힘없이 펀칭하는 바람에 그 볼이 멀리 가지 않고 플라멘 게토프의 발 앞에 떨어졌고 게토프가 지체없이 리바운드 볼을 낼름 줏어먹으며 선제골을 터뜨린 것이다. 이 어이없는 실수 때문에 한국은 0:1로 뒤진 채로 전반전을 마쳐야 했다.

이후 한국은 객관적 전력으로 열세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를 사정없이 몰아붙이며 공격했으나 좀처럼 불가리아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후반 25분, 컴퓨터 링커[30]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조광래의 킬패스를 대표팀 막내 김종부가 받았고, 김종부는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슈팅을 했으나 그것이 골로 연결되며 천금같은 동점골을 터뜨렸다. 이후 한국은 시종일관 불가리아를 몰아붙였으나 골 결정력 부족으로 더 이상의 추가골은 터뜨리지 못했다. 결국 경기는 1:1 무승부, 대한민국의 첫 승점 1점 획득으로 종료되었다. 아쉽게 첫 승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이 대회 16강 15위팀 불가리아를 상대로 첫 승점 1점을 따낸 것에는 만족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한국은 월드컵 도전 4번째 경기 만에 첫 승점을 따냈다.

순위
국가
경기수



득점
실점
득실차
승점
비고
1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아르헨티나
2
1
1
0
4
2
+2
3

2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
2
0
2
0
2
2
0
2

3
파일:불가리아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불가리아
2
0
2
0
2
2
0
2

4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대한민국
2
0
1
1
2
4
-2
1

16강 진출 | 순위 경합 | 탈락

2차전까지 중간 순위로만 보면 대한민국은 비록 최하위였지만, 이탈리아와의 최종전 경기 결과에 따라 2위 또는 3위로 토너먼트 진출도 노려볼 수 있었다.

4.3. 24강 조별리그 이탈리아전 - 2 : 3 패[편집]


파일: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로고.svg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A조 5-1경기
1986년 6월 10일 화요일 12:00 (UTC-6)
[[에스타디오 쿠아우테목|{{{#ffffff 에스타디오 쿠아우테목]] ([[멕시코|{{{#ffffff 멕시코]], [[푸에블라(도시)|{{{#ffffff 푸에블라)]]
주심: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데이비드 소차|{{{#ffffff 데이비드 소차]]
관중: 20,000명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 : 3

파일:Italy FIGC 1986 1990.png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대한민국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
62' [[최순호|{{{#000000,#ffffff 최순호}}}]]
83' [[허정무|{{{#000000,#ffffff
허정무}}}]]
파일:득점 아이콘.svg
17′, 73' [[알레산드로 알토벨리|{{{#000000,#ffffff 알레산드로 알토벨리}}}]]
82' [[자책골|{{{#000000,#ffffff
(OG)}}}]] [[조광래|{{{#000000,#ffffff 조광래}}}]]
[[https://m.youtube.com/watch?v=n80jRxPnY5U&pp=ygUY7ZWc6rWtIOydtO2DiOumrOyVhCAxOTg2|{{{#008c44 경기 하이라이트}}}]] | [[https://www.fifa.com/tournaments/mens/worldcup/1986mexico/match-center/643|{{{#008c44 매치 리포트}}}]]
경기 최우수 선수: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A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1]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3차전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였다. 경기 전 모든 이들은 이탈리아의 압승을 예상했고, 그래서인지 이 경기를 찾은 관중의 숫자는 고작 2만 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탈리아는 지난 대회에서 서독을 상대로 완벽한 경기력을 보이며 3:1 압승을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지만 한국은 32년 만에 본선에 올라온 아시아의 듣보잡 약체 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이탈리아는 전 대회 득점왕이자 MVP였던 파올로 로시가 한국전에 대비한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을 입는 악재가 생기는 등, 2차전까지 2무에 그치며 위태위태한 경기력을 보였고, 또 아시아 팀을 상대로는 묘하게 약세를 보이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었다. 20년 전인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에서는 북한과 맞붙어 박두익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0:1로 패배해 사상 최초로 아시아 팀에게 패배한 팀이란 불명예를 안은 데다가 4년 뒤인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16개국 본선에서도 이스라엘과 졸전 끝에 0:0 무승부로 승점 1점을 허용할 정도이다.

과연 뚜껑을 열어보니 경기는 예상과 달랐다. 일단 전반전에는 이탈리아는 경기를 아주 수월하게 풀어갔다. 전반 17분, 한국의 골키퍼 오연교가 또 치명적인 펀칭 미스를 범했고 그 세컨드 볼을 알레산드로 알토벨리가 낼름 줏어먹으며 가볍게 선제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1골을 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기력은 더욱 올라갔고, 오히려 이탈리아는 라인을 끄집어 내리고 수비만 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 경기의 주심 데이비드 소차는 노골적으로 이탈리아를 위한 편파판정을 남발하며 한국의 플레이를 위축시켰다. 전반 33분, 살바토레 바그니가 주심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손으로 허정무의 얼굴을 쳐서 쓰러뜨리는 파울을 범했는데, 주심은 허정무가 뭔 할리우드 액션이라도 하고 있는 양 빨리 일어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관중들은 주심을 향해 야유를 퍼부었고, 주심은 그제서야 분위기가 안 좋다는 걸 느꼈는지 허겁지겁 바그니에게 경고를 주었다. 그리고 2분 후, 주심은 한국의 페널티 에어리어로 쇄도하던 알토벨리가 자기 혼자 스텝이 꼬여서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반칙을 선언하며 이탈리아에게 페널티킥을 주었다. 당연히 한국 선수들은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데이비드 소차는 항의하던 수비수 박경훈에게 경고를 주었다. 다행히도 이 페널티킥은 골대를 맞고 안 들어갔다.

전반전을 0:1로 뒤진 대한민국은 후반전에 심기일전하여 다시 공격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후반 17분, 이탈리아의 페널티 박스 좌측 외곽 지역에서 최순호가 벼락같은 오른발 중거리 슛을 날렸고 이 슛은 그대로 빨랫줄처럼 이탈리아의 골문으로 날아가며 천금같은 동점골을 터뜨렸다. 하지만 최순호의 동점골이 터지자 주심의 편파판정은 더욱 심해졌는데, 한국 선수들의 파울은 엄격하게 잡아내면서 이탈리아 선수들의 파울은 관대하게 넘어갔고, 한국 선수들이 볼을 잡을 때마다 호각을 불어서 리듬을 딱딱 끊었다. 결국 후반 28분, 이탈리아의 역습 찬스에서 알토벨리에게 또 한 골을 허용하며 1:2로 다시 끌려 갔다.

같은 시각 아르헨티나와 불가리아의 경기는 아르헨티나가 2:0으로 리드하고 있었고, 한국은 동점골을 넣어 비기기만 하면 승점과 득실차 모두 불가리아와 동률이지만 다득점에서 앞서서 3위를 차지할 수 있었고 조 3위 간 경쟁을 통해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32] 그러나 주심은 죽어도 한국이 16강 가는 꼴을 못 보겠다는 듯 계속해서 편파판정을 일삼았고 한국 선수들의 멘탈은 점점 흔들렸다. 그리고 후반 37분, 알토벨리의 슛이 수비를 하던 조광래의 손에 맞고 들어가 자책골이 되면서 스코어는 1:3으로 벌어졌다.

하지만 한국은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근성으로 맞서 싸웠고, 모두가 절망하던 후반 43분 허정무가 극적으로 만회골을 터뜨리며 스코어를 다시 2:3으로 좁혔다. 16강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1골이 더 필요했고, 한국은 마지막까지 골을 넣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카테나치오로 악명 높은 이탈리아는 노골적으로 라인을 끄집어 내리고 잠그기에 들어갔고 결국 이대로 경기가 종료되며 한국의 두 번째 월드컵 도전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5.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33][편집]


이회택 전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은 지역 예선에서 엄청나게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 대회는 아시아 전체 풀리그로 아시아에게는 우승팀(1위)과 준우승(2위)팀의 2장의 24강 본선 진출권이 부여되었다. 한국은 1차예선에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네팔, 인도와 함께 4조에 속했다. 그런데 대회 직전에 인도가 기권을 선언하면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네팔과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이때 대한민국은 6전 전승, 25득점 무실점이라는 후덜덜한 성적을 거두며 최종예선에 진출했다. 최종예선 상대는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북한이었다. 경기는 모두 싱가포르에서 풀리그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한국은 1차전에서 카타르와 0:0으로 비긴 뒤 2차전에서 북한을 1:0으로 이겼고, 3차전에서 중국을 1:0으로 이기며 단숨에 조 1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4차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도 2:0 승리를 거두며 일찌감치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에서 아랍에미리트와 1:1 무승부를 거두며 총 전적 9승 2무, 30득점 1실점 아시아 예선 우승 진출[34]이라는 성적으로 24강 본선에 진출하여 2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이런 아시아 예선전의 좋은 성적으로 인해 한국은 꿈에 부풀었고, 외신들의 평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외신들 역시 한국의 지역예선 성적과 또 지난 대회에서 유럽팀 불가리아에게 첫 승점 1점 획득과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라는 세계 최강 팀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대등하게 맞선 대회 20위의 모습을 참고하여 조용히 한국의 '황색 돌풍'을 예상했다. 24강 조 편성도 지난 대회와는 다르게 수월했다. 실력 자체는 뛰어나지만 이상하게 좋은 성적을 못 거두고 있는 스페인,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 그다지 강호라고 불러줄 수 없었던 벨기에, 그리고 초대 월드컵 챔피언이지만 이젠 쇠락할 대로 쇠락한 우루과이와 함께 24강 본선 E조에 편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때 한국인들과 외신들은 이 조 편성이 달콤한 함정이었을 줄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감독 : 이회택

5.1. 24강 조별리그 벨기에전 - 0 : 2 패[편집]


파일: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로고.svg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E조 1경기
1990년 6월 12일 화요일 17:00 (UTC+1)

[[스타디오 마르칸토니오 벤테고디|{{{#ffffff 스타디오 마르칸토니오 벤테고디]] ([[이탈리아|{{{#ffffff 이탈리아]], [[베로나|{{{#ffffff 베로나)]]
주심: 파일:UEFA USA.png [[빈센트 마우로|{{{#ffffff 빈센트 마우로]]
관중: 32,790명

파일:Belgium KBVB 1986.png

2 : 0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파일:UEFA KOR.png 대한민국
53' [[마르크 데흐리서|{{{#000000 마르크 데흐리서]]
64' [[미셸 더 볼프|{{{#000000 미셸 더 볼프]]
파일:득점 아이콘.svg
-
[[https://m.youtube.com/watch?v=xH-3MtsVgGU&pp=ygUb64yA7ZWc66-86rWtIOuyqOq4sOyXkCAxOTkw|{{{#000000 경기 하이라이트}}}]] | [[https://www.fifa.com/tournaments/mens/worldcup/1990italy/match-center/57|{{{#000000 매치 리포트}}}]]
경기 최우수 선수: 파일:UEFA BEL.pn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E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1차전 상대는 벨기에였다. 벨기에는 지난 1986 멕시코 월드컵에서 반짝 4강 진출에 성공했지만, 그 대회를 제외하면 별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팀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경기를 치르자 한국의 플레이는 심히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경기 초반부터 벨기에에게 완전히 압도당해서 뭐 이렇다 할 플레이를 보이지도 못하고 아예 쌈싸먹혔다. 한국 선수들은 정말 경기를 준비하긴 한 건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골키퍼 최인영의 선방이 아니었으면 점수 차가 크게 벌어졌을 정도로 정말 형편없었다.

전반전은 어찌저찌 0:0으로 버텨냈으나, 최인영도 인간이었고 그도 후반전까지 버티긴 무리였다. 결국 후반 8분에 마르크 데흐리서에게 선제골을 내주고 말았고, 후반 19분에 미셸 더 볼프에게 추가골을 내주며 0 : 2로 패배하고 말았다. 점수 차야 겨우 2점밖에 안 났지만 내용이 원체 형편없었기에 한국 대표팀을 향한 세계구급 혹평이 쏟아졌다. 가장 심한 혹평은 "한국, 돌아가서 패스 연습부터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는 심히 형편없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부터 한국과 벨기에의 악연이 시작되었는데, 이 경기 이후로도 다른 유럽이나 남미의 강팀을 만나면 매번 펄펄 난다고는 못해도 그래도 어느 정도 대등하게 맞서 싸우는데 이상하게 벨기에만 만나면 뭔가 잘 안 풀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35]

5.2. 24강 조별리그 스페인전 - 1 : 3 패[편집]


파일: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로고.svg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E조 4경기
1990년 6월 17일 일요일 21:00 (UTC+1)

[[스타디오 프리울리|{{{#ffffff 스타디오 프리울리]] ([[이탈리아|{{{#ffffff 이탈리아]], [[우디네|{{{#ffffff 우디네)]]
주심: 파일:UEFA ECU.png [[엘리아스 하코메|{{{#ffffff 엘리아스 하코메]]
관중: 32,733명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1 : 3
파일:Spain RFEF 1982.png
파일:UEFA KOR.png 대한민국
파일:UEFA ESP.png 스페인
43' [[황보관|{{{#000000 황보관}}}]] (A. [[최순호|{{{#000000 최순호}}}]])
파일:득점 아이콘.svg
23', 61', 81' [[미첼(1963)|{{{#000000 미첼}}}]]
[[https://m.youtube.com/watch?v=FYPrO7RlHjs&pp=ygUV7ZWc6rWtIOyKpO2OmOyduCAxOTkw|{{{#000000 경기 하이라이트}}}]] | [[https://www.fifa.com/tournaments/mens/worldcup/1990italy/match-center/175|{{{#000000 매치 리포트}}}]]
경기 최우수 선수: 파일:UEFA ESP.pn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E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2차전 상대는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당시에도 축구 강호로 이름을 날렸으나 이상하게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1950년 브라질 월드컵 4위에 성공한 걸 빼면 늘 실력에 비해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벨기에보다 더 강한 상대였기에 쉽지 않은 경기가 전망되었고, 한국의 경기력은 벨기에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스페인을 상대로는 전혀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전반 23분에 미첼에게 선제골을 헌납하며 어려운 경기를 풀어갔다.

시종일관 끌려다니던 한국은 전반 43분에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었고, 최순호가 옆의 황보관에게 짧게 패스했는데 황보관이 무려 시속 114km/h의 대포알 슈팅을 날렸고 이것이 그대로 스페인의 골문으로 빨랫줄처럼 날아가 천금같은 동점골을 터뜨렸다. 스페인은 월드컵에서 아시아팀에게 처음으로 실점했다. 그렇게 전반전은 1 : 1로 마쳤고, 후반전은 어느 정도 대등하게 맞서긴 했지만 후반 16분과 36분에 미첼에게 잇달아 실점하며 결국 1:3으로 패배해 2패로 주저앉고 말았다.

2패를 기록하긴 했지만 아직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대회는 24개국이 출전했기 때문에 조 3위 팀 간 순위에서 4위 이내에 들면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 이제 한국으로선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마지막 상대인 우루과이를 반드시 3골 차 이상으로 이겨야만 조 3위 팀 간 순위에서 4위 이내에 들어 16강에 진출할 수 있다.

5.3. 24강 조별리그 우루과이전 - 0 : 1 패[편집]


파일: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로고.svg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E조 5-2경기
1990년 6월 21일 목요일 17:00 (UTC+1)

[[스타디오 프리울리|{{{#ffffff 스타디오 프리울리]] ([[이탈리아|{{{#ffffff 이탈리아]], [[우디네|{{{#ffffff 우디네)]]
주심: 파일:UEFA ITA.png [[툴리오 라네세|{{{#ffffff 툴리오 라네세]]
관중: 29,039명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0 : 1

파일:Uruguay AUF 1970.png

파일:UEFA KOR.png 대한민국

-
파일:득점 아이콘.svg
90' [[다니엘 폰세카|{{{#000000 다니엘 폰세카]]
70′ [[윤덕여|{{{#000000 윤덕여}}}]] 파일:경고 퇴장 아이콘.svg
파일:퇴장 카드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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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youtube.com/watch?v=kfHUGfECapU&pp=ygUY7ZWc6rWtIOyasOujqOqzvOydtCAxOTkw|{{{#000000 경기 하이라이트}}}]] | [[https://www.fifa.com/tournaments/mens/worldcup/1990italy/match-center/290|{{{#000000 매치 리포트}}}]]
경기 최우수 선수: 파일:UEFA URU.pn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E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반드시 3골 차 이상의 대승이 필요했던 대한민국은 초반부터 우루과이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열세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경기는 한국이 주도했고, 우루과이는 노골적으로 라인을 끌어내리며 버티는 데에 급급했다. 하지만 한국은 좀처럼 우루과이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이번 경기에서도 한국은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었고, 황보관이 지난 스페인전과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대포알 슈팅을 날렸지만 이번엔 우루과이의 골키퍼 페르난도 알베스의 선방에 막히고 말았다. 그래도 한국은 경기를 완벽하게 지배하며 우루과이를 몰아붙였고 조금씩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의 실낱같은 희망을 꺾어버린 건 바로 이 경기의 주심 툴리오 라네세였다. 툴리오 라네세는 초반부터 석연찮은 판정을 남발하며 한국에 무더기로 파울을 선언했는데, 때문에 이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기록한 파울은 무려 40개였다. 그리고 0:0의 스코어가 이어지던 후반전에 최순호가 페널티 박스에서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지만 우루과이 수비수의 거친 태클에 쓰러졌고, 명백히 페널티킥이 주어져야 할 상황이었지만 주심은 모른 척했다. 후반 4분에는 윤덕여가 우루과이의 엔조 프란체스콜리에게 턱을 받히는 파울을 당했는데, 주심은 오히려 윤덕여에게 옐로카드를 들이미는 어이없는 짓거리를 했다.[36] 그리고 후반 25분에 윤덕여가 최인영 골키퍼와 백패스를 주고받았는데, 라네세는 윤덕여가 시간 지연을 했다는 이유로 또 경고를 먹여 윤덕여를 퇴장시켰다.

그 때문에 안 그래도 계속 불리한 판정 때문에 플레이가 위축되었던 한국 선수들은 이제 10명이 뛰어야 하는 더욱더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그래도 0 : 0으로 잘 버티고 있었기에 최소한 지난 대회처럼 승점 1점은 챙기고 대회를 마무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후반 45분, 우루과이가 프리킥 찬스를 얻었고 이때 다니엘 폰세카가 헤딩으로 결승골을 넣었다. 하지만 폰세카의 위치는 명백히 오프사이드였다. 링크된 영상의 1:09에서 멈추고 확인하면 알 수 있다.

우루과이 선수가 프리킥을 찬 시점에서 폰세카는 분명히 한국의 최종 수비 라인보다 앞쪽에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골킥이나 스로인, 코너킥 상황에서 볼을 직접적으로 받아 득점한 경우는 오프사이드에서 제외되지만 프리킥은 그렇지 않다. 상대 진영에서[37] 프리킥을 찬 시점에서 상대편 골키퍼 포함 2번째 수비수보다 앞에 있으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오프사이드다. 그런데도 당시 선심이었던 가봉 국적의 장 피델레 디람바(Jean-Fidèle Diramba)와 튀니지 국적의 네지 주이니(Neji Jouini)는 모두 고개를 돌리며 못 본 척했고, 라네세도 페널티 박스에서 다 보고 있었는데도 그냥 우루과이의 득점으로 인정했다. 그 과정에 무슨 짓을 하던 어떻게든 한국의 골문에 공이 들어가기만 기다렸던 것.[38][39][40]

이렇게 우루과이의 1 : 0 승리로 경기가 끝나면서 우루과이가 16강에 오르게 되었고, 한국은 3전 전패로 대회를 마감하게 되었다.[41] 비록 벨기에전과 스페인전은 졸전이었지만 우루과이전은 그야말로 10 : 14의 불리한 수적 열세 속에서 고군분투하다 패배한 것이다. 이 경기에서 툴리오 라네세는 한국 선수 1명과 한국의 승점 1점을 날린 그야말로 자질 미달, 함량 미달의 쓰레기였다. 오라시오 엘리손도마크 가이거[42], 루쥔, 호엘 아길라르, 밀로라드 마지치 등 편파 판정으로 한국 축구팬들에게 온갖 어그로를 끈 쓰레기 심판들이 있지만 이 중 악질이 바로 툴리오 라네세다.[43] 단지 28년이나 지난 과거의 인물이라 너무 오래되어 잊혀졌을 뿐이다. 그리고 이 양반이 자질 미달의 쓰레기 심판이었다는 건 칼초폴리 스캔들로 더욱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여담으로 이때 우루과이 대표팀 감독이 바로 최근까지 우루과이 대표팀 감독을 맡은 오스카르 타바레스 전 감독이다. 위에 링크된 영상을 보면 짤막하게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타바레스 전 감독의 젊은 시절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6. 1994 FIFA 월드컵 미국[44][편집]


김호 전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대표팀은 이 대회에서부터 대표팀 전임 감독제를 시행했다.[45] 이번 대회의 지역예선도 1차 예선 6개 조에서 1위를 차지한 팀이 최종예선에서 풀리그 형식으로 경기를 치러 우승팀(1위)과 준우승팀(2위)만이 24강 본선에 진출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최종예선은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열리도록 결정되었다. 1차예선에서 대한민국은 바레인, 레바논, 홍콩, 인도와 함께 4조에 속했고, 한국은 7승 1무, 23득점 1실점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어 조 1위로 가볍게 최종 예선에 진출했다.

최종예선에 올라온 팀은 한국을 포함해 북한,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일본이었다. 카타르 도하에서 이 5팀과 풀리그 형식으로 겨루어 2위 안에 들어야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한국은 1차전에서 이란을 3:0으로 격파하며 순조롭게 출발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계속 가시밭길을 걸었다. 2차전 이라크와의 경기에서는 막판에 집중력 부족으로 실점하며 2:2 무승부를 거두었고, 3차전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경기에서도 또 막판 집중력 부족으로 실점하며 1:1 무승부에 그쳤다. 4차전 상대는 숙적 일본이었다. 한국은 본선에 가기 위해선 반드시 이 운명의 한일전에서 승리해야 했다. 그러나 후반 15분, 미우라 카즈요시에게 일격을 당하며 결국 0:1로 패배하고 말았다.[46]

마지막 경기를 앞둔 시점에서 최종예선에 진출한 팀들 간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1위는 2승 1무 1패(승점 5점)를 기록한 일본, 2위는 1승 3무(승점 5점)를 기록한 사우디아라비아, 3위는 1승 2무 1패(승점 4점)를 기록한 대한민국, 4위는 한국과 승점은 같으나 골득실에서 2골이 뒤진 이라크, 5위는 2승 2패(승점 4점)로 역시 승점은 같으나 골득실에서 밀린 이란, 6위는 1승 3패(승점 2점)인 북한이었다. 북한은 마지막 경기에서 대승을 거둬도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승점을 넘을 수 없기에 탈락이 확정되었고 나머지 모든 팀들은 본선 진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마지막 경기 대진은 한국 VS 북한, 일본 VS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VS 이란으로 정해졌다.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 모두가 본선 진출의 가능성이 있기에 사전 담합 및 승부 조작 방지를 위해 3경기 모두 다른 경기장에서 동시에 치르기로 결정되었다. 한국으로선 반드시 북한을 2점 차 이상의 점수로 꺾고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 둘 중 한 팀이 무승부 이하의 성적을 거두어야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즉 진인사대천명을 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인 것이다.

전반전을 0:0으로 마치며 북한의 골문을 여는 데에 실패한 한국은 후반전에 심기일전하여 고정운황선홍, 하석주가 나란히 골을 터뜨리며 3:0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같은 시각 다른 구장에서 열린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경기는 사우디아라비아의 4:3 승리로 끝나면서 결국 사우디아라비아가 우승으로 24강 본선에 진출하여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었다. 이제 남은 건 일본과 이라크의 경기 결과 뿐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일본이 2:1로 리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대로 경기가 끝난다면 일본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고 한국은 탈락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절망하고 있던 순간, 90분이 다 지났고 추가시간이 적용될 때 이라크의 세트피스 찬스에서 움란 자파르가 극적으로 헤더 동점골을 터뜨렸다. 그리고 30초 후 경기가 그대로 종료되면서 일본과 이라크의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다.

이로서 대한민국과 일본은 2승 2무 1패로 동률을 이루었으나 골득실에서 한국이 +5, 일본이 +3이어서 골득실에서 2골이 더 앞선 한국이 준우승 진출로 극적으로 24강 본선에 진출하여 3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이 사건을 한국에서는 도하의 기적이라 부르고, 반대로 일본에서는 도하의 비극이라고 부른다. 천신만고 끝에 3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한 대표팀은 스페인, 볼리비아, 독일과 함께 C조에 속했다. 1986 멕시코 월드컵에 이어 8년 만에 또 다시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과 한 조에 속했고, 지난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 이어 또 스페인과 24강 한 조에 속했다. 그러나 독일과 스페인이라는 막강한 상대와는 달리 누구보다도 확실한 1승 제물인 볼리비아가 한 조에 끼어있었기에 16강 진출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장밋빛 희망이 있었다.
감독 : 김호

6.1. 24강 조별리그 스페인전 - 2 : 2 무[편집]


파일:1994 FIFA 월드컵 미국 로고.svg
1994 FIFA 월드컵 미국 C조 2경기
1994년 6월 17일 금요일 18:30 (UTC-6)

[[코튼 볼|{{{#000000 코튼 볼]] ([[미국|{{{#000000 미국]], [[댈러스|{{{#000000 댈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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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 56,247명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 : 2

파일:스페인 국장.svg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대한민국
파일:스페인 국기.svg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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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퇴장 카드 아이콘.svg
25′ [[미겔 앙헬 나달|{{{#000000 미겔 앙헬 나달}}}]] 파일:퇴장 카드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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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최우수 선수: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호호/1994 FIFA 월드컵 미국/스페인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경기 시작 전부터 양 팀은 날카로운 설전을 주고받았다. 스페인의 하비에르 클레멘테 감독은 "한국을 5 : 0으로 이기겠다."며 큰소리를 뻥뻥 쳤고, 김호 감독은 "그럼 우리는 딱 1 : 0으로 이기겠다."라며 응수했다. 그렇게 양 팀의 경기가 시작되었고, 경기 당일 텍사스댈러스코튼 볼 스타디움은 기온이 무려 43℃까지 오르는 미친 듯한 폭염이 이어졌다.[47] 그 때문인지 스페인 선수들의 몸놀림은 상당히 무거웠다. 반면 더위에 익숙한 한국 선수들은 상당히 활발하게 경기장을 누볐고 이에 당황한 스페인 선수들은 거친 파울로 한국의 공격을 차단하기에 급급했다. 결국 이런 스페인의 거친 플레이는 화를 자초했고, 전반 25분, 스페인의 주장 미구엘 앙헬 나달[48]고정운에게 거친 파울을 범하며 즉시 퇴장당했다. 수적 우세를 등에 업은 한국은 계속해서 스페인을 몰아붙였지만 고질적인 골 결정력 부족으로 인해 전반전을 0:0으로 마쳤다.

전반전에 수세에 몰렸던 스페인은 하프타임 이후 심기일전하여 대반격에 나섰다. 그리하여 10명이 뛰는 악조건 속에서도 후반 6분에 훌리오 살리나스가 선제골을 터뜨리며 활기를 불어넣었고, 불과 4분 후에 고이코에체아가 추가골을 터뜨리며 2:0으로 앞서갔다. 하지만 그러한 활약도 잠시, 40℃를 넘는 댈러스의 폭염에 스페인 선수들은 다시 퍼지기 시작했고 후반 막판에 들어선 아예 노골적으로 라인을 끌어내리고 2골 차 승리에 만족하겠다는 듯 잠그기에 돌입했다. 그러자 다시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가 살아났다. 후반 40분, 스페인 수비수의 파울로 한국이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이 프리킥 찬스에서 이영진홍명보에게 짧게 공을 건넸고, 그 공을 받은 홍명보는 대포알 슛을 날려 만회골을 뽑아냈다. 그리고 점점 경기 종료가 임박해 오던 후반 45분, 홍명보의 킬 패스를 받은 서정원이 극적으로 동점골을 터뜨려 승부를 다시 2:2 원점으로 되돌렸다. 당시 서정원은 군인 신분이었기에 한국의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득점한 군인 선수가 되었다.

그렇게 한국은 4년 만에 다시 만난 FIFA 랭킹 5위 스페인에게 2 : 2 무승부를 거두며 승점 1점을 획득했고, 세계는 한국의 놀라운 뒷심을 극찬했다. 반면 막판 5분을 못 버텨서 승리를 놓친 스페인 선수들은 망연자실하여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난적 스페인과의 무승부는 대표팀의 자신감을 크게 상승시켰고, 이제 16강 진출이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선수들 뿐만 아니라 국민들 모두가 이제는 정말 16강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그런데......

6.2. 24강 조별리그 볼리비아전 - 0 : 0 무[편집]


파일:1994 FIFA 월드컵 미국 로고.svg
1994 FIFA 월드컵 미국 C조 4경기
1994년 6월 23일 목요일 19:30 (UTC-5)

[[폭스버러 스타디움|{{{#000000 폭스버러 스타디움]] ([[미국|{{{#000000 미국]], [[폭스버러|{{{#000000 폭스버러]])
주심: [[레슬리 모트램|{{{#000000 레슬리 모트램]] [[스코틀랜드|{{{#000000 (스코틀랜드)]]
관중: 54,453명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0 : 0
파일:볼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대한민국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볼리비아
-
파일:득점 아이콘.svg
-
-
파일:퇴장 카드 아이콘.svg
82′ [[루이스 크리스탈도|{{{#000000 루이스 크리스탈도}}}]] 파일:경고 퇴장 아이콘.svg
[[https://m.youtube.com/watch?v=n2HwmcCqkqM&pp=ygUT7ZWc6rWtIOuzvOumrOu5hOyVhA%3D%3D|{{{#000000 경기 하이라이트}}}]] | [[https://www.fifa.com/tournaments/mens/worldcup/1994usa/match-center/3065|{{{#000000 매치 리포트}}}]]
경기 최우수 선수: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호호/1994 FIFA 월드컵 미국/볼리비아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2차전 상대는 남미의 볼리비아였다. 볼리비아는 1950년 브라질 월드컵 이후 무려 44년 만에 월드컵 본선 무대에 복귀한 팀이었다. 월드컵 남미예선에서 악명 높은 홈 구장인 해발 3,600m에 위치한 라파스에스타디오 에르난도 실레스 홈빨이라도 다른 팀도 아닌 94우승팀 브라질을 2:0으로 격파하며 브라질에게 최초의 지역예선 패배를 기록했고, 우루과이를 3:1로 격파하였고 아르헨티나를 제치고 남미예선 3위로 월드컵 24강에 진출한 볼리비아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눈이 높아져서 어느 누구도 볼리비아를 다크호스로 여겨주지 않았다. 16강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볼리비아를 이겨야만 했다. 앞선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2:2 무승부 승점 1점을 거둔 덕분에 선수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이번에야말로 월드컵에서 첫 승을 거두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경기는 잘 풀리지 않았다.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각오가 부담을 낳은 것인지, 한국 선수들은 경기를 시종일관 지배했으면서도 문전 앞에서 허둥지둥하며 골 찬스를 수시로 날려버렸다. 특히 원톱 스트라이커 황선홍은 수시로 문전 앞에서 헛발질을 작렬하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49] 후반 37분에 볼리비아의 수비수 루이스 크리스탈도가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하며 수적 우세를 등에 업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좀처럼 볼리비아의 골문을 열지 못했다.

경기 막판에는 하석주가 단독 골 찬스를 맞았으나, 그 역시도 허무하게 찬스를 날려버리고 말았다.[50] 그리하여 경기는 0:0 무승부 승점 1점 획득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난적 스페인을 상대로는 2골이나 넣었으면서 정작 반드시 잡아야 할 남미예선 3위 볼리비아를 상대로는 1골도 못 넣은 것이다. 그나마 10경기 만에 월드컵 최초로 남미 팀에게 첫 승점 획득과 클린시트를 기록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고[51], 이제 한국은 16강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최종전 상대인 독일을 반드시 잡아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6.3. 24강 조별리그 독일전 - 2 : 3 패[편집]


파일:1994 FIFA 월드컵 미국 로고.svg
1994 FIFA 월드컵 미국 C조 5-2경기
1994년 6월 27일 월요일 15:00 (UTC-6)

[[코튼 볼|{{{#000000 코튼 볼]] ([[미국|{{{#000000 미국]], [[댈러스|{{{#000000 댈러스]])
주심: [[조엘 퀴니우|{{{#000000 조엘 퀴니우]] [[프랑스|{{{#000000 (프랑스)]]
관중: 63,998명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 : 3

파일:Deutscher-fussball-bund-logo.png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대한민국
파일:독일 국기.svg 독일
52′ [[황선홍|{{{#000000,#dddddd 황선홍}}}]]
63′ [[홍명보|{{{#000000,#dddddd 홍명보}}}]]
파일:득점 아이콘.svg
12′, 37' [[위르겐 클린스만|{{{#000000,#dddddd 위르겐 클린스만}}}]]
20′ [[카를하인츠 리들레|{{{#000000,#dddddd 카를하인츠 리들레}}}]]
[[https://m.youtube.com/watch?v=vkhMXruAYXg&pp=ygUN7ZWc6rWtIOuPheydvA%3D%3D|{{{#000000 경기 하이라이트}}}]] | [[https://www.fifa.com/tournaments/mens/worldcup/1994usa/match-center/3076|{{{#000000 매치 리포트}}}]]
경기 최우수 선수: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호호/1994 FIFA 월드컵 미국/독일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3차전 상대는 전차군단 독일이었다. 당시 독일은 디펜딩 챔피언이었으나 통일 후유증인지는 몰라도 이번 대회에서는 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개막전에서 조 최약체 볼리비아를 상대로 위르겐 클린스만의 결승골로 겨우 1:0 신승을 하는 데에 그쳤고, 2차전에서는 스페인을 상대로 시종일관 끌려다니다 겨우 1:1 무승부를 거두어 디펜딩 챔피언으로서의 자존심이 크게 구겨져 있었다. 한국은 16강에 오르려면 반드시 독일을 잡아야 했으며, 무승부를 거두면 경우의 수가 복잡해졌고 패배하면 즉시 탈락이었다. 그렇게 운명의 경기가 열렸다.

독일 선수들은 전차군단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정말 육중한 전차처럼 한국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전반 12분, 클린스만이 순수하게 자신의 개인기로 오른발로 가볍게 볼을 튀긴 다음 왼발 발리슛을 날려 선제골을 뽑아냈다. 그리고 전반 20분에 칼 하인츠 리들레가 추가골을 뽑아내 점수를 더욱 벌렸고, 전반 37분에 한국의 골키퍼 최인영의 펀칭 미스를 클린스만이 낼름 받아 추가골을 터뜨리며 스코어를 3:0으로 크게 벌렸다. 전반전은 그렇게 독일이 3골 차로 앞선 채로 끝이 났다. 이제 많은 이들은 독일의 승리를 기정사실화했고, 관건은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독일이 몇 골 차로 이기느냐가 되었다. 그렇게 독일이 간만에 대승을 거두며 디펜딩 챔피언으로서의 자존심을 살리는 듯했다.

하지만 후반전에 한국은 경천동지하게 만들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호 감독은 부진했던 골키퍼 최인영을 불러들이고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운재를 투입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댈러스의 코튼 볼 스타디움은 다시 40℃를 넘는 폭염이 이어졌고, 후반전이 시작되자 댈러스의 폭염에 당시 팀 평균 연령이 만 31세에 달했던 독일 선수들은 점점 둔해지기 시작했다. 한국 선수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대반격을 감행했다. 후반 7분, 박정배의 킬 패스를 받은 황선홍이 아크 왼쪽에서 칩슛으로 가볍게 찍어차며 독일 수문장 보도 일그너의 키를 넘기며 만회골을 터뜨렸다.[52] 그렇게 한국은 점수를 1:3으로 좁혔다.

그리고 후반 18분, 공격에 가담한 센터백 홍명보가 독일 진영 페널티 박스 외곽 지역까지 전진했고 이때 홍명보의 앞을 로타어 마테우스가 막아섰다. 홍명보는 자신의 개인기로 마테우스를 가볍게 제치고 중거리 슛을 날렸고, 이 슛은 그대로 독일의 골문으로 빨려들어가며 점수가 2:3, 단 한 골 차이로 좁혀졌다. 한국 선수들은 다시 희망을 되찾았고 더욱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노장 선수들이 즐비했던 독일 선수들은 폭염에 지쳐 점점 체력이 떨어지며 극단적으로 수비에만 급급하는 모습을 보였고, 오히려 한국 선수들은 펄펄 날면서 독일 진영에 아예 상주하다시피 하며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독일의 이런 무기력한 플레이에 실망한 관중들은 야유를 퍼부었고, 이때 독일의 수비형 미드필더 슈테판 에펜베르크관중들을 향해 Fuck You를 날리는 대형사고를 쳐버렸다. 안 그래도 한국에게 쩔쩔 매고 있어서 빡쳐있던 베르티 포그츠 감독은 더욱 열불이 터져서 즉시 에펜베르크를 불러들였고 경기 후 에펜베르크를 아예 대표팀에서 퇴출시켜 버렸다.

이후로도 한국은 독일 진영에 상주하다시피 하며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고, 독일은 스트라이커인 클린스만까지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하는 극단적인 전원 수비로 한국의 공세를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골 찬스가 계속해서 독일의 보도 일그너 골키퍼의 선방에 막히며 좀처럼 동점골을 넣지 못했고, 그렇게 경기는 한국의 2:3 석패로 끝나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최종 성적은 승점 2점 2무 1패, 4득점 5실점, 월드컵 20위로 마치고 대한민국 월드컵 최다 승점을 기록하였다. 2002년 이전까지 최고의 성적이었고 최초로 조 3위를 차지했으나, 조 3위 팀 간 순위에서 6위로 대회 20위에 그쳐 16강 진출이 무산되었다. 남미예선 3위 볼리비아를 1:0으로만 잡았어도 16강에 올라갈 수 있었는데 두고두고 아쉽기만 하다.[53]

하지만 독일과의 경기에서 명승부를 펼쳤던 한국의 플레이는 전 세계의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독일 방송국의 아나운서는 "비록 독일이 경기를 이겼지만 정신력과 내용 면에서는 한국에 진 경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고, 독일의 베르티 포그츠 감독 또한 "스피드와 체력을 무기로 한 한국의 공격에 크게 고전했다."라며 한국을 칭찬했다. 멀티골을 넣었던 클린스만 또한 "만약 한국이 처음부터 후반전과 같은 경기력을 보였거나 후반전에 시간이 5분만 더 있었더라면 정말 우리가 졌을 것이다."라고 하며 제대로 혼쭐이 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24년 뒤에 클린스만이 했던 그 말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위르겐 클린스만은...

7.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54][편집]


1994 FIFA 월드컵 미국에서 스페인과 독일이라는 두 유럽의 강호들을 상대로 엄청난 선전을 했던 것과 달리 그 이후 대한민국 대표팀은 심각한 부침을 겪었다. 다시 대표팀 감독으로 복귀한 박종환 전 감독과 선수들의 불화가 원인이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대표팀 내부에 파벌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까지 했다. 그 절정이 바로 1996 AFC 아시안컵에서 있었던 이른바 '식스 투 참사'였다. 이란을 상대로 알리 다에이 한 사람에게만 무려 4골이나 허용하며 2 : 6으로 대참패를 당했는데 이 때 한국 선수들이 거의 태업에 가까운 졸전을 펼쳤기에 이런 의혹이 더욱 크게 불거진 것이다. 결국 대한축구협회는 박종환 감독을 전격 경질하였고 후임 대표팀 감독으로 분데스리가 슈퍼스타 출신이었던 '차붐' 차범근을 선임했다.

이 대회는 최초로 32개국이 본선 진출하는 대회였고 아시아의 진출권은 3.5장으로 확대되었다. 1차 예선을 치르는 36개 팀을 10개 조로 나누어 각 조 1위를 차지한 팀이 최종예선에 오른다. 그리고 최종예선은 5개 팀이 한 조를 이루어 홈 & 어웨이 방식으로 진행한다. 그리하여 최종예선에서 각 조 1위를 차지한 팀이 본선에 직행한다. 그리고 2위를 한 팀끼리 대결하여 승자는 본선에 직행하고 패자는 오세아니아 1위와 대결하여 승리해야만 본선에 오를 수 있었다. 1차 예선에서 한국은 태국, 홍콩과 함께 6조에 속했다. 한국은 3승 1무, 9득점 1실점의 성적으로 조 1위를 확정해 가볍게 최종예선에 진출했다.

최종예선에선 일본, 아랍에미리트,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과 함께 B조에 속했다. 1차전에서 한국은 카자흐스탄을 3 : 0으로 가볍게 제압했고 2차전에서도 우즈베키스탄을 2 : 1로 제압해 일찌감치 2승으로 조 1위로 치고 나섰다. 그리고 3차전 상대가 바로 숙적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은 1승 1무를 기록하여 2승 1무를 기록한 아랍에미리트, 2승을 기록한 한국에 이어 조 3위에 처져 있었다. 즉, 이 경기 결과에 따라 일본이 조 1위로 치고 나갈 수도 있고 반대로 한국이 조 3위까지 떨어질 수도 있는 분수령이나 다름 없었다. 홈 관중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업은 일본은 후반 22분, 야마구치 모토히로의 선제골로 앞서 나갔다. 가모 슈 감독은 후반 35분을 넘어서자 승기를 굳히기 위해 수비를 강화하며 지키기에 돌입했는데 이것이 도리어 독이 되었다. 일본이 라인을 내리자 한국의 공격력이 살아났고 결국 후반 38분, 서정원이 천금 같은 동점골을 터뜨리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리고 후반 41분에 공격에 가담한 수비수 이민성의 왼발 중거리슛으로 역전골을 터뜨려 극적인 2 : 1 역전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도쿄 대첩이다.

도쿄 대첩으로 한국은 3승을 기록해 조 1위 자리를 굳히는데 성공했다. 4차전에서 2점 차이로 순위 경쟁을 하던 아랍에미리트를 3 : 0으로 대파하며 4연승으로 파죽지세를 달렸다. 그러나 5차전 카자흐스탄 원정 경기에서 1 : 1 무승부에 그치며 살짝 기세가 주춤했다. 하지만 일주일 후 6차전 우즈베키스탄 원정 경기에서 무려 5 : 1 대승을 거두어 5승 1무(승점 16점)의 성적으로 2경기 남은 상태에서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시원시원하게 치른 예선전이었다. 그런데 7차전 일본과의 홈 경기에서 0 : 2로 패해 '져주기 논란'이 일어 차범근 전 감독을 향해 일시적인 혹평이 있었다.[55] 하지만 8차전 아랍에미리트 원정 경기에서 3 : 1 승리를 거두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고 6승 1무 1패(승점 19점)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예선을 마무리 했다.

4회 연속 본선 진출에 성공한 대한민국은 본선에서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 원조 붉은 악마 벨기에와 함께 E조에 속했다. 이번 대회는 한국이 '처음으로 역대 월드컵 우승국과 한 조에 속하지 않은 월드컵\'이었다. 이전까지는 꼭 1~2팀 씩 월드컵 우승국과 한 조에 편성되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국이 아닌 팀들과만 한 조에 속한 것이다. 그 때문인지 다시 16강 진출에 관한 장밋빛 희망이 이어졌다. 언론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장밋빛 보도를 뿌려대며 당시 세계 축구 정보에 대해 어두웠던 한국 축구팬들의 눈과 귀를 가리며 현혹시켰다. 이러한 장밋빛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줄은 이 때까지 그 누가 알았으리오?
감독 : 차범근

7.1. 32강 조별리그 멕시코전 - 1 : 3 패[편집]



파일: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로고.svg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E조 1경기
1998년 6월 13일 토요일 17:30 (UTC+1)

스타드 드 제를랑 (프랑스, 리옹)
주심: 귄터 벤쾨 (오스트리아)
관중: 39,100명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1 : 3

파일: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파일:UEFA KOR.png 대한민국
파일:UEFA MEX.png 멕시코
27′ [[프리킥|{{{#000000 (FK)}}}]] [[하석주|{{{#000000 하석주}}}]]
파일:득점 아이콘.svg
50′ [[리카르도 펠라에스|{{{#000000 리카르도 펠라에스}}}]]
75′, 84' [[루이스 에르난데스|{{{#000000 루이스 에르난데스}}}]] (A. [[콰우테모크 블랑코|{{{#000000 콰우테모크 블랑코}}}]])
30′ [[하석주|{{{#000000 하석주}}}]] 파일:퇴장 카드 아이콘.svg
파일:퇴장 카드 아이콘.svg
-
[[https://m.youtube.com/watch?v=8WRm67ioxkw|{{{#0d2b88 경기 하이라이트}}}]] | [[https://www.fifa.com/en/tournaments/mens/worldcup/1998france/match-center/8732|{{{#0d2b88 매치 리포트}}}]]
경기 최우수 선수: 파일:UEFA MEX.pn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호/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멕시코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의 조별리그 1차전 상대는 북중미의 강호 멕시코였다. 조 추첨 직후 한국은 멕시코를 강력한 1승 제물로 지목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습기 그지없지만, 당시 한국 언론들이 보도한 멕시코는 누가 보면 듣보잡 약체 팀인 줄 알 정도로 철저하게 저평가되고 있었다. 그에 현혹된 한국 축구팬들 역시 멕시코를 정말 듣보잡 약체 팀으로 생각하고 드디어 월드컵 도전 44년 만에 첫 승을 거둘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상함이 감지된 것은 선발 명단에서부터였다. 아시아 지역예선 득점왕 최용수가 선발 명단에서 빠진 것이 아닌가? 황선홍이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부상당한 이상 공격을 책임질 선수는 최용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서부터 뭔가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경기가 시작되자 멕시코는 초반부터 거칠게 한국을 밀어붙였다. 한국은 골키퍼 김병지의 선방으로 점수를 내주지 않고 버틸 뿐이었다. 이렇게 수비로 버틴 후 역습을 통해 조금씩 득점 기회를 만들어 가던 한국은 전반 27분,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었다. 멕시코의 주장 가르시아 아스페가 노정윤을 향해 거친 파울을 범한 것이다. 주심은 곧바로 가르시아 아스페에게 경고를 주고 한국에게 프리킥 찬스를 주었다. 킥커는 왼발의 달인 하석주였다. 하석주가 감아찬 볼은 멕시코 수비수 두일리노 다비오의 머리에 맞고 굴절되었고, 그대로 방향이 반대로 바뀌며 공이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키 168cm의 단신이지만 뛰어난 반사신경으로 최고 골키퍼 반열에 오른 멕시코의 명물 호르헤 캄포스도 굴절된 볼에 반응을 못하며 속절없이 골을 내주고 말았다.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선제골이 터졌다. 지금까지 동점골과 만회골만 많이 넣어봤지 선제골을 단 한 번도 못 넣어봤던 대한민국이었다. 드디어 월드컵 12번째 경기 만에 선제골을 기록한 것이다. 사상 처음으로 한국이 상대 팀을 리드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첫 승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건 불과 2분 후의 일이었다. 멕시코의 역습 상황에서 하석주가 백태클로 저지했는데, 당시 FIFA는 이 대회부터 백태클 제재를 강화하라는 지침을 내렸고 재수없게 하석주가 시범타로 걸려들고 말았다. 주심은 곧바로 하석주에게 레드 카드를 주었고, 이렇게 하석주가 허무하게 퇴장당하면서 그때부터 한국은 10명이 뛰어야 하는 수적 열세를 짊어지게 되었다. 전반전은 어찌저찌 1:0으로 리드한 채 마무리 지었고, 이제 한국이 이기려면 남은 45분을 작정하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후반전이 되자 멕시코의 기세가 맹렬하게 타올랐다. 멕시코 선수들의 현란한 개인기에 한국 수비진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고, 특히 콰우테모크 블랑코는 이른바 '개구리 점프'로 불리는 그의 전매특허 기술 콰우테미나(Cuahtemina)로 한국 수비수들을 농락했다. 이렇게 점점 균열이 가던 한국 수비진은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후반 6분에 리카르도 펠라에스에게 동점골을 허용했고, 뒤이어 후반 29분과 39분에 연달아 루이스 에르난데스에게 실점하며 결국 1:3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하석주의 선제골이 터질 때까지만 해도 환호성이 달나라까지 들릴 정도로 분위기가 끓어올랐으나 역전패로 끝나버리자 욕설이 전국을 뒤덮었다.

선제골을 넣었지만 퇴장당하며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하석주는 순식간에 영웅에서 역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차범근에 대한 성토 여론이 줄을 이었는데,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던 최용수를 왜 선발 라인업에 포함시키지 않았는지에 대한 경위를 따져묻는 여론이 주를 이루었고 그 밖에도 고종수를 갑자기 교체 아웃시킨 이유와 부진했던 이상윤을 끝까지 빼지 않은 이유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특히 이상윤은 경기 시작 전 워밍업에서 관자놀이를 공에 맞아 속된 말로 정신이 나간 상황이었는데도 끝까지 교체를 하지 않았기에 더욱 비판 여론이 일었다. 대회 전에 시작된 장밋빛 희망에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서막에 불과했고 진짜 비극은 그로부터 1주일 뒤에 터지게 된다.

7.2. 32강 조별리그 네덜란드전 - 0 : 5 패[편집]



파일: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로고.svg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E조 4경기
1998년 6월 20일 토요일 21:00 (UTC+1)

오렌지 벨로드롬 (프랑스, 마르세유)
주심: 리샤르트 부이치크 (폴란드)
관중: 55,000명

파일:KNVB black.png

5 : 0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파일:UEFA NED.png 네덜란드
파일:UEFA KOR.png 대한민국
37′ [[필립 코쿠|{{{#000000,#e5e5e5 필립 코쿠}}}]] (A. [[데니스 베르캄프|{{{#373a3c,#dddddd 데니스 베르캄프}}}]])
41′ [[마르크 오버르마르스|{{{#000000,#e5e5e5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A. [[빔 용크|{{{#373a3c,#dddddd 빔 용크}}}]])
71′ [[데니스 베르캄프|{{{#000000,#e5e5e5 데니스 베르캄프}}}]] (A. [[아론 빈터르|{{{#373a3c,#dddddd 아론 빈터르}}}]])
80′ [[피에르 판호이동크|{{{#000000,#e5e5e5 피에르 판호이동크}}}]] (A. [[마르크 오버르마르스|{{{#373a3c,#dddddd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83′ [[로날트 더부르|{{{#000000,#e5e5e5 로날트 더부르}}}]] (A. [[빔 용크|{{{#373a3c,#dddddd 빔 용크}}}]])
파일:득점 아이콘.svg
-
[[https://m.youtube.com/watch?v=2IRGnaXPc6s|{{{#0d2b88 경기 하이라이트}}}]] | [[https://www.fifa.com/en/tournaments/mens/worldcup/1998france/match-center/8749|{{{#0d2b88 매치 리포트}}}]]
경기 최우수 선수: 파일:UEFA NED.pn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호/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네덜란드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경기를 앞두고 차범근은 바둑에서 흔히 쓰는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를 인용해 선 수비 후 역습 작전을 쓸 것임을 암시했다. 한편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이끄는 네덜란드 역시 1차전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해 상황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56] 조 1위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2차전에서 대한민국을 큰 점수 차로 꺾어야 했다. 만약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도 비기거나, 혹은 만에 하나 진다면 네덜란드는 탈락 위기에 몰리게 된다. 때문에 네덜란드는 한국과의 경기에서 대승을 다짐하고 경기에 임했다. 과연 한국이 아생연후살타에 성공할 것인지, 아니면 예상대로 네덜란드가 대승을 거두게 될지 운명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역시 아생연후살타 어쩌고 한 건 어디까지나 작전이 그렇다는 것일 뿐 전혀 현실로 구현하지 못했다. 김도훈의 슛이 골문 옆 그물을 때려 일시적으로 골이 들어간 걸로 착각했던 장면을 제외하면 한국은 네덜란드에게 전혀 유효타를 날리지 못했고, 오히려 네덜란드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골키퍼 김병지의 선방으로 간신히 실점만 하지 않으며 버티던 중이었다. 그렇게 위태롭게 0:0 스코어를 지키던 대한민국은 결국 전반 38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필립 코쿠에게 선제골을 허용했다.[57] 그리고 불과 5분 만에 마르크 오버르마르스에게 추가골을 허용하며 전반전을 0:2로 마쳤다. 4년 전 독일전에 이어 또 다시 2점 차 이상의 리드를 허용하며 전반을 마치게 된 것이다.

4년 전 한국은 독일에게 전반전에만 0:3으로 끌려갔지만. 후반전에 대반격을 감행해 2골을 따라붙어 매운 맛을 보여준 바 있었다. 과연 네덜란드를 상대로 또 같은 경기력을 보일 수 있을지 아니면 더 큰 악몽을 경험하게 될지가 주목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후자였다. 한국은 네덜란드를 상대로 좀처럼 반격을 펴지 못했고 시종일관 기세에 압도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위태위태하게 버티던 한국은 결국 후반 26분, 데니스 베르캄프의 개인기에 속절없이 당하며 또 1골을 내주어 0:3으로 점수 차가 벌어졌다. 그리고 9분 후 피에르 판호이동크에게도 추가골을 헌납해 점수는 0:4로 벌어졌다. 이때 차범근은 19세의 신예 이동국을 교체 투입했는데, 이동국은 비록 골을 넣지 못했지만 강력한 중거리 슛을 선보여 답답했던 경기력에 한 가닥 청량제를 선사했다. 그리고 3분 후에 로날트 더부르에게 또 한 골을 헌납하며 점수는 0:5로 벌어졌고 그대로 경기가 끝났다. 이날 경기의 패배로 인해 한국은 2패로 조기 탈락이 확정되었다.[58][59]

한국이 월드컵에서 5골이나 실점한 것은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44년 만의 일이었고, 5점 차 대패를 한 것 또한 1954 스위스 월드컵 이후 44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44년 전보다 더 참혹했다. 그때는 실력 차이도 실력 차이였지만 나라 사정이 어려워 스위스까지 가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해 여독도 안 풀린 상태에서 경기를 치러 그렇게 대패를 당한 것이고, 되려 헝가리에게 9점 차 패배를 한 건 전력에 비해 매우 선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전 대회에서 스페인과 독일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를 치러 유럽의 강팀과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쌓여있던 상태에서 이런 처참한 패배를 당한 것이었다. 44년 전과 비교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도 김병지의 선방 덕에 5골만 내준 것이지, 김병지의 맹활약이 아니었다면 10골 이상 내줬을 뻔했다. 실제로 경기가 끝난 후 히딩크는 "한국 골키퍼 김병지가 뛰어난 활약을 펼쳐서 우린 더 많은 골을 넣을 수 있음에도 5골밖에 못 넣었다."라고 김병지를 칭찬했다. 결국 대회 전 장밋빛 보도는 모두 말쟁이들의 사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한국 축구의 현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모두가 절망의 나락으로 빠진 상황이었다. 결국 이 경기가 끝난 후 차범근은 전격 경질되었고, 남은 벨기에전은 김평석 전 수석코치가 감독대행 자격으로 치르게 되었다. 한국 축구의 영웅이었던 차범근은 이렇게 쓸쓸하게 퇴장하게 되었다.

7.3. 32강 조별리그 벨기에전 - 1 : 1 무[편집]



파일: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로고.svg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E조 5-2경기
1998년 6월 25일 목요일 16:00 (UTC+1)

파르크 데 프랭스 (프랑스, 파리)
주심: 마르시우 헤젠지 지 프레이타스 (브라질)
관중: 45,500명

파일: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1994~2019).svg

1 : 1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파일:UEFA BEL.png 벨기에
파일:UEFA KOR.png 대한민국
7′ [[뤼크 닐리스|{{{#000000 뤼크 닐리스}}}]] (A. [[고르단 비도비치|{{{#373a3c,#dddddd 고르단 비도비치}}}]])
파일:득점 아이콘.svg
72′ [[유상철|{{{#000000 유상철}}}]] (A. [[하석주|{{{#373a3c,#dddddd 하석주}}}]])
[[https://m.youtube.com/watch?v=q2sebiCWTiM|{{{#0d2b88 경기 하이라이트}}}]] | [[https://www.fifa.com/en/tournaments/mens/worldcup/1998france/match-center/8765|{{{#0d2b88 매치 리포트}}}]]
경기 최우수 선수: 파일:UEFA KOR.png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호/1998 FIFA 월드컵 프랑스/벨기에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6강은 이미 물 건너가 버렸고 차범근은 대회 도중에 경질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직 1승의 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태극전사들은 벨기에전은 반드시 승리해서 다음 대회의 희망을 살리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한편 벨기에는 1차전에서 난적 네덜란드와 무승부를 기록하며 선전했으나, 2차전에서 멕시코와 비기는 바람에 계산이 복잡해졌다. 자력 16강 진출을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을 3점 차 이상으로 꺾어야만 했고, 비기거나 지면 탈락이었고 2점 차 이하로 이겼을 경우에는 네덜란드나 멕시코 둘 중 한 팀이 반드시 이겨야 했다. 한 마디로 한국은 '난 죽었고 너도 죽자.'는 식이었고 벨기에는 '너만 죽고 나는 살자.'는 입장이었다.

갈 길이 급했던 벨기에는 초반부터 강하게 공격했고, 결국 경기 시작 7분 만에 루크 닐리스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한국은 불리한 경기를 펼쳤다. 그러나 이 경기마저 지면 끝장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한국 선수들은 더 이상 무기력하게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쉽게 무너질 줄 알았던 한국이 강하게 저항하자 벨기에 선수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경기 중 수비수 이임생이 공중볼 경합 도중 이마가 깨져 출혈이 나는 부상을 당했는데, 이미 교체 카드를 다 썼기에[60] 이임생은 붕대를 감고 끝까지 뛰는 투혼을 발휘하여 축구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렇게 0:1의 스코어가 이어지던 후반 26분, 한국의 프리킥 찬스에서 하석주가 전방으로 볼을 띄웠고 그걸 유상철이 페널티 에어리어로 쇄도해 슬라이딩하며 천금같은 동점골을 성공시켜 다시 스코어를 1:1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탈락하는 벨기에는 다시 반격을 시도했으나 한국의 골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벨기에가 한국의 맹공에 우왕좌왕하며 역전패를 당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아시아 지역예선 득점왕으로 기대를 모았던 최용수는 잇달아 득점 찬스를 놓쳤고 그 역시 아시아용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90분이 다 가고 추가시간이 적용될 때, 벨기에가 마지막 세트피스 찬스를 얻었다. 비기면 끝장인 벨기에는 어떻게든 골을 넣겠다고 골키퍼까지 골문을 비우고 공격에 가담하게 했다. 월드컵에서 한국을 상대로 골키퍼가 골문을 비우는 극단적인 전술을 쓴 건 벨기에가 최초였다. 그만큼 벨기에 역시 절박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보람도 없이 벨기에는 득점 기회를 날렸고, 볼을 잡은 서정원이 벨기에의 빈 골문을 향해 질주했으나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며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비록 탈락했고 또 다시 1승에 실패했지만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상대팀을 탈락시킨 경기였다.

8. 둘러보기[편집]



8.1. 나라별 국가대표팀 경기[편집]




A대표팀 [ 펼치기 · 접기 ]
1996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
파일:아랍에미리트 국기.svg
(1996)
對 아랍에미리트 1:1 무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1996)
對 인도네시아 4:2 승
파일:쿠웨이트 국기.svg
(1996)
對 쿠웨이트 0:2 패
파일:이란 국기.svg
(1996)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이란 2:6 패

2015 AFC 아시안컵 호주
파일:오만 국기.svg
(2015)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오만 1:0 승
파일:쿠웨이트 국기.svg
(2015)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쿠웨이트 1:0 승
파일:호주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5)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호주 1:0 승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2015)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우즈베키스탄 2:0 (연장) 승
파일:이라크 국기.svg
(2015)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이라크 2:0 승
파일:호주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5)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호주 1:2 (연장) 패




2019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
파일:필리핀 국기.svg
(2019)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필리핀 1:0 승
파일:키르기스스탄 국기.svg
(2019)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키르기스스탄 1:0 승
파일:중국 국기.svg
(2019)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중국 2:0 승
파일:바레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9)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바레인 2:1 (연장) 승
파일:카타르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9)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카타르 0:1 패
2023 AFC 아시안컵 카타르
파일:바레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2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바레인 0:0
파일:요르단 국기.svg
(202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요르단 0:0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202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말레이시아 0:0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파일:헝가리 국기.svg
(1954)
對 헝가리 0:9 패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1954)
對 터키 0:7 패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1986)
對 아르헨티나 1:3 패
파일:불가리아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1986)
對 불가리아 1:1 무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986)
對 이탈리아 2:3 패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파일:벨기에 국기.svg
(1990)
對 벨기에 0:2 패
파일:스페인 국기.svg
(1990)
對 스페인 1:3 패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1990)
對 우루과이 0:1 패


1994 FIFA 월드컵 미국
파일:스페인 국기.svg
(199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스페인 2:2 무
파일:볼리비아 국기.svg
(199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볼리비아 0:0 무
파일:독일 국기.svg
(199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독일 2:3 패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파일:멕시코 국기.svg
(199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멕시코 1:3 패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199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네덜란드 0:5 패
파일:벨기에 국기.svg
(199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벨기에 1:1 무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파일:폴란드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02)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폴란드 2:0 승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02)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미국 1:1 무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2002)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포르투갈 1:0 승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2002)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이탈리아 2:1 (연장) 승
파일:스페인 국기.svg
(2002)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스페인 0:0 무
(PSO 5:3 승)
파일:독일 국기.svg
(2002)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독일 0:1 패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2002)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터키 2:3 패



2006 FIFA 월드컵 독일
파일:토고 국기.svg
(2006)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토고 2:1 승
파일:프랑스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06)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프랑스 1:1 무
파일:스위스 국기.svg
(2006)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스위스 0:2 패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파일:그리스 국기.svg
(2010)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그리스 2:0 승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2010)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아르헨티나 1:4 패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2010)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나이지리아 2:2 무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2010)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우루과이 1:2 패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파일:러시아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러시아 1:1 무
파일:알제리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알제리 2:4 패
파일:벨기에 국기.svg
(201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벨기에 0:1 패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파일:스웨덴 국기.svg
(201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스웨덴 0:1 패
파일:멕시코 국기.svg
(201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멕시코 1:2 패
파일:독일 국기.svg
(201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독일 2:0 승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파일:우루과이 국기.svg
(2022)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우루과이 0:0 무
파일:가나 국기.svg
(2022)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가나 2:3 패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2022)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포르투갈 2:1 승
파일:브라질 국기.svg
(2022)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브라질 1:4 패

기타 경기
파일:일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1997)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일본 2:1 승
파일:태국 국기.svg
(199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태국 1:2 (연장) 패
파일:브라질 국기.svg
(1999)
對 브라질 1:0 승
파일:브라질 국기.svg
(2002)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브라질 2:3 패
파일:오만 국기.svg
(200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오만 1:3 패
파일:몰디브 국기.svg
(200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몰디브 0:0 무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2004)
對 튀르키예 2:1 승
파일:독일 국기.svg
(2004)
對 독일 3:1 승
파일:바레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07)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바레인 1:2 패
파일:중국 국기.svg
(2010)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중국 0:3 패
파일:일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1)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일본 0:3 패
파일:중국 국기.svg
(2017)
對 중국 0:1 패
파일:카타르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7)
對 카타르 2:3 패
파일:일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7)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일본 4:1 승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독립 문서로 등재된 경기


청소년 대표팀 [ 펼치기 · 접기 ]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남자 축구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201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말레이시아 3:0 승
파일:사우디아라비아 국기.svg
(201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사우디아라비아 1:0 승
파일:라오스 국기.svg
(201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라오스 2:0 승
파일:홍콩 특별행정구기.svg
(201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홍콩 3:0 승
파일:일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일본 1:0 승
파일:태국 국기.svg
(201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태국 2:0 승
파일:북한 국기.svg
(2014)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북한 1:0 (연장) 승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남자 축구
파일:바레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바레인 6:0 승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201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말레이시아 1:2 패
파일:키르기스스탄 국기.svg
(201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키르기스스탄 1:0 승
파일:이란 국기.svg
(201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이란 2:0 승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201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우즈베키스탄 4:3 (연장) 승
파일:베트남 국기.svg
(201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베트남 3:1 승
파일:일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8)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일본 2:1 (연장) 승



2022 항저우 아시안 게임 남자 축구
파일:쿠웨이트 국기.svg
(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쿠웨이트 9:0 승
파일:태국 국기.svg
(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태국 4:0 승
파일:바레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바레인 3:0 승
파일:키르기스스탄 국기.svg
(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키르기스스탄 5:1 승
파일:중국 국기.svg
(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중국 2:0 승
파일:우즈베키스탄 국기.svg
(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우즈베키스탄 2:1 승
파일:일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일본 2:1 승



2017 FIFA U-20 월드컵 코리아
파일:기니 국기.svg
(2017)
對 기니 3:0 승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2017)
對 아르헨티나 2:1 승
파일:잉글랜드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7)
對 잉글랜드 0:1 패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2017)
對 포르투갈 1:3 패

2019 FIFA U-20 월드컵 폴란드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2019)
對 포르투갈 0:1 패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2019)
對 남아프리카 공화국 1:0 승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2019)
對 아르헨티나 2:1 승
파일:일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9)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일본 1:0 승
파일:세네갈 국기.svg
(2019)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세네갈 3:3 무
(PSO 3:2 승)
파일:에콰도르 국기.svg
(2019)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에콰도르 1:0 승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2019)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우크라이나 1:3 패



2023 FIFA U-20 월드컵 아르헨티나
파일:프랑스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프랑스 2:1 승
파일:온두라스 국기.svg
(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온두라스 2:2 무
파일:감비아 국기.svg
(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감비아 0:0 무
파일:에콰도르 국기.svg
(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에콰도르 3:2 승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나이지리아 1:0 (연장) 승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이탈리아 1:2 패
파일:이스라엘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23)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이스라엘 1:3 패



U-17 대표팀
파일:브라질 국기.svg
(2015)
對 브라질 1:0 승




기타 경기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2003)
對 네덜란드 1:0 승
파일:일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2)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일본 2:0 승
(카디프 대첩)

파일:일본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2016)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對 일본 2:3 패
파일:뉴질랜드 국기.svg (2021)
對 뉴질랜드 0:1 패
파일:멕시코 국기.svg (2021)
對 멕시코 3:6 패
파일:나무위키:로고2.svg: 독립 문서로 등재된 경기







[ 펼치기 · 접기 ]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gcolor=#f7f7f7,#191919><colbgcolor=#d7dee9,#161d28> FIFA 월드컵 결승전 ||
||<bgcolor=#cfc,#003300><width=20%>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2010)
對 네덜란드 1:0 (연장) 승 ||<width=20%> ||<width=20%> ||<width=20%> ||<width=20%> ||
||<-5>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결승전 ||
||<bgcolor=#cfc,#003300><width=20%> 파일:독일 국기.svg (2008)
對 독일 1:0 승 ||<bgcolor=#cfc,#003300><width=20%>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2012)
對 이탈리아 4:0 승 ||<width=20%> ||<width=20%> ||<width=20%> ||
||<-5> 기타 경기 ||
||<bgcolor=#fec,#332200>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4)
對 대한민국 2:2 무 ||<bgcolor=#fec,#332200>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2)
對 대한민국 0:0 무
(PSO 3:5 패) ||<bgcolor=#fcc,#330000>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2014)
對 네덜란드 1:5 패 ||<bgcolor=#fcc,#330000> 파일:일본 국기.svg (2022)
對 일본 1:2 패 || ||






파일: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svg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경기

[ 펼치기 · 접기 ]

||<-5><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 bgcolor=#cfc,#003300><bgcolor=#333399,#222266> FIFA 월드컵 결승전 ||
||<width=20%><#cfc,#003300>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49-1956).svg (1954)
對 헝가리 2:3 승 ||<width=20%><bgcolor=#fcc,#330000> 파일:브라질 국기.svg (2002)
對 브라질 0:2 패 ||<width=20%><#cfc,#003300>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2014)
對 아르헨티나 1:0 (연장) 승 ||<width=20%><rowbgcolor=#ffffff,#191919> || ||
||<-5><bgcolor=#333399,#222266>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결승전 ||
||<bgcolor=#fcc,#330000> 파일:스페인 국기.svg (2008)
對 스페인 0:1 패 ||<rowbgcolor=#ffffff,#191919> || || || ||
||<-5><bgcolor=#333399,#222266> 기타 경기 ||
||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1982)
對 오스트리아 1:0 승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4)
對 대한민국 3:2 승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2)
對 대한민국 1:0 승 || 파일:브라질 국기.svg (2014)
對 브라질 7:1 승 ||<bgcolor=#fcc,#330000>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8)
對 대한민국 0:2 패 ||
||<rowbgcolor=#ffffff,#191919><bgcolor=#fcc,#330000> 파일:일본 국기.svg (2022)
對 일본 1:2 패 || || || || ||
||<-5><bgcolor=#fff,#191919> '''※동독 대표팀 기록 제외 ||










8.2. 감독별 국가대표팀[편집]





[1] 16위(2패).[2] 20위(승점 1점 1무 2패).[3] 22위(3패).[4] 20위(승점 2점 2무 1패).[5] 30위(승점 1점 1무 2패).[6] 사실상 마지막 A매치 세계 메이저대회 올림픽 축구 대회였다. 이 시절 올림픽 출전 세계 선수들은 준프로선수로 대우받던 표면상 아마추어 선수들이었으며, 대표적인 선수가 금메달팀 스웨덴의 군나르 노르달 선수였다. 이후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뤄졌던 1950 월드컵이 다시 시작되면서 월드컵과 올림픽의 격차가 커지면서 올림픽 축구는 유럽과 남미팀들에게 메이저대회로 평가 받지 못한다.[7] 우연의 일치인지 1950 브라질 월드컵 개막전 킥오프가 시작된 그 시점에 지구 반대편 한반도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8] 16위(2패).[9] 객관상으로 대한민국의 첫 16강 기록은 이 대회이나, 당시는 월드컵 16개국 본선 1라운드 16강 조별리그였으며, 당시 피파는 1938 월드컵에서 인도네시아(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무혈 입성 참패 탈락과 더불어 아시아 축구의 수준을 고려하지 못하고(1938년 인도네시아의 15개국 본선(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 무혈입성 출전이 유일했고, 1950년 인도가 자격을 얻었으나 불참했던 만큼 실력의 가늠이 어려웠을 것이다.)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와 경쟁 없이 아시아끼리만 지역예선을 치루게 했다. 그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대만은 기권하고 한국은 일본하고만 1차전, 2차전까지만해서 이기고 54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였고,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와 별다른 경쟁 없이 16개국 본선에 진출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 54월드컵에서 한국이 헝가리에게 0:9, 튀르키예에게 0:7 참패를 당하며 탈락하자 피파는 아시아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인지했는지 그 후 1958 월드컵 지역예선부터 아시아는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 유럽, 오세아니아, 아프리카와 경쟁을 치뤄야 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할 수 있도록 바뀌었고, 그 후 한국도 16개국 본선에 진출 실패했으며,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부터 24개국 본선으로 확대되었고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24개국 본선부터 16강이 2라운드로 바뀌었다.[10] 현대에 이렇게 했다가 피파는 정치가 축구에 개입하는 것을 엄금하기 때문에 제재를 받아 출전권이 박탈된다. 이러한 이유로 자국 땅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연주하기 싫었던 북한은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3차 예선과 최종 예선에서 자신의 홈 경기를 포기하고 제3국에서 남북전을 치뤘으며,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2차 예선에서는 철저하게 무관중 경기로 치룬 바 있다. 대신 이 때는 국가 연주와 국기 게양은 허용했다.[11] 당시에는 합산 점수제가 도입되지 않아서 스코어에 관계없이 오로지 전적만 따졌다. 그래서 스코어와 상관없이 1승 1패 동률이 되면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고, 거기서도 무승부가 나면 추첨으로 결정했다. 후술한 대로 스페인이 튀르키예에게 유럽예선에서 탈락하여 16개국 본선 진출에 실패한 것도 이 때문이다.[12] 그나마도 천의 질이 좋지 못해 금방 닳아서 7부 바지처럼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외신 기자들이 "당신네 나라는 짧은 바지가 유행인가?"라고 묻자 홍덕영 골키퍼가 "우리는 전쟁을 치른 나라라 가난해서 물자를 절약하는 게 애국이라 바지를 짧게 입었다."라고 재치있게 받아쳤다는 웃픈 이야기도 있다.[13] 선수 교체 제도는 1970 멕시코 월드컵 때부터 시행되었다. 그 전까지는 출전한 선수는 무조건 90분 풀타임을 뛰어야 했다.[14] 터키의 전력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외인 결과인데, 당시 터키는 스페인을 격파하고 54월드컵 16개국 본선에 진출하였으며, 사실 터키의 자리는 오늘날이었으면 스페인의 자리였다. 예선 1차전에서 스페인이 4:1 승리를 거두었고 2차전에서는 터키가 1:0 승리를 거두었는데 당시에는 합산 점수제가 없었다. 순수하게 전적만 따졌기에 1승 1패 동률이 되었고, 플레이오프 재경기를 치렀으나 2:2 무승부가 되어 동전 추첨으로 승자를 가렸는데 이때 터키가 당첨되어 올라온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이 탈락하고 터키가 제치고 차지하게 된 것이다.[15] 원래는 벌금도 물어야 했으나, 선수단이 먼저 떠나버려서 주지 못하고 4년째 묵혀있던 이전 대회인 1954년 대회의 2경기 출전금을 여기다 쓴 셈 치고 넘어갔다.[16] 이때 전반전에 일본의 기습에 선취골을 허용한 데다가 한국 선수 한 명이 부상으로 이탈해서 10명으로 싸워야 했다. 이때는 선수 교체 규정도 없어서 고전했지만, 다행히 전반 말미에 연속골이 터지며 역전에 성공했다. 이때 한국과 일본은 아직 외교 관계를 수립하지 않았고, 정부나 국민들 사이에서도 반일 감정이 강해서 일장기를 계양해야 하는 문제로 시끄러웠지만 결국 허가되었다.[17]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었던 장기영(당시 한국일보 사장)은 군사 정권의 일원이던 김동하 전 해병대 사령관을 찾아가 설득했고, 김동하는 이들의 뜻을 박정희에게 전달하여 사흘 후에 면담을 가졌다. 이때 장기영은 "정치적인 이유로 중요한 국제 경기에 대표팀을 출전시키지 않는다면 국제적으로 한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라고 박정희를 설득했고, 이에 박정희도 스포츠에는 이념과 사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대표팀의 유고슬라비아 원정과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한국 입국을 허락했다. 별외로 박정희는 이때 대표팀 골키퍼였던 함흥철의 팬이었고, 장기영과 함께 온 함흥철과 같이 사진도 찍었다.[18] 당시 선수들은 37시간의 비행을 거쳐 유고슬라비아에 도착했고 3시간 차이의 시차도 힘들어했다. 거기다가 전반전에 간판 스트라이커인 최정민이 발목 부상으로 이탈했고, 그나마 전반 42분까지는 버텼지만 결국 선제골을 허용했고 후반전에는 수적 열세와 피지컬, 개인기에 밀리며 4골을 더 내주었다. 한국은 후반 정순천이 한 골을 만회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19] 만일 이 골이 들어가서 역전에 성공해 2:1 한국의 승리로 끝났다면 한국은 호주와 승점과 골득실 및 다득점에서 모두 같아지는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당시의 룰을 적용할 시 한국은 호주와 플레이오프를 치러 한 번 더 2차 예선 진출권을 노려볼 수 있었다.[20] 결과적으로 호주는 2차 예선에서 지금의 짐바브웨의 전신인 로디지아를 격파하고 최종예선까지 올라갔지만, 최종예선에서 이스라엘에게 패하며 결국 이 대회의 유일한 월드컵 본선행 티켓은 이스라엘에게 넘어갔다.[21] 위키백과에는 1974 월드컵 지역예선에서의 일로 적혀있지만 1970 멕시코 월드컵 지역예선에서의 일이 맞다.[22] 만약 현재처럼 원정 다득점 원칙을 적용한다고 해도, 한국은 이미 원정 다득점 원칙에서 호주에게 밀렸기 때문에 월드컵 본선에 갈 수 없었다.[23] 다만 1조는 6팀이 한 조에 속했기 때문에 예외로 2위까지 최종예선에 올라갈 수 있었다.[24] 그 와중에 호주를 상대로는 또 1무 1패로 열세를 보였다. 나머지 국가들 상대로는 홍콩 상대로 2승, 이란 상대로 2무, 쿠웨이트 상대로 1승 1무를 기록했다. 1970년대에 한국의 가장 큰 천적은 확실하게 호주였던 것.[25] 20위(승점 1점 1무 2패).[26] 물론 K리그의 탄생은 대학야구에서 출발한 KBO 리그와 다르게 당시 정치권 인사들의 정치적인 목적으로 출범한진지라 연고지 의식이 미약하다는 고질병을 낳기도 했다.[27] 물론 경기가 열린 곳이 해발 1400m의 고지대인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였다는 것도 부진의 원인이었다. 볼리비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고지대가 홈 구장인 팀을 이기는 건 쉽지 않다. 이후 네팔은 홈에서 말레이시아와 0:0 무승부를 거두었고, 이것은 한국이 말레이시아를 누르고 1차예선을 통과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28] 대한민국 월드컵 역사상 첫 본선 득점.[29] 조별리그이지만, 조별 예선으로 잘못 적혀 있다. 예선은 지역별로 월드컵 진출국을 가리는 경기이며, 조별리그부터 본선이다. 아시아 최종 예선이라고 하고 10회 연속 본선(조별리그) 진출이라고 하는 이유이다.[30] 1980년대까지 국내 축구계에서 중앙 미드필더를 부르던 용어. 중앙에서 공을 이어주는 선수라고 해서 링커라는 정체불명의 콩글리시로 불렸으나 조광래의 은퇴 이후 사라졌다.[31] 조별리그이지만, 조별 예선으로 잘못 적혀 있다. 예선은 지역별로 월드컵 진출국을 가리는 경기이며, 조별리그부터 본선이다. 아시아 최종 예선이라고 하고 10회 연속 본선(조별리그) 진출이라고 하는 이유이다.[32] 만약 이때 16강 진출에 성공했다면 우루과이가 탈락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루과이는 2무 1패, 골득실 -5였는데 조 3위 팀 간 순위에서 간신히 4위를 차지해 16강에 올랐기 때문이다.[33] 22위(3패).[34] 준우승 진출은 UAE.[35] 그나마 선전한 것이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벨기에를 상대로 1:1 무승부를 거두면서 상대를 탈락시킨 것이다.[36] 정확히 말하자면 윤덕여 역시 그때 프란체스콜리와 몸싸움을 주고받기는 했다. 적어도 쌍방 경고로 끝나야 하는 상황인데 라네세는 오직 윤덕여에게만 경고를 주어서 편파판정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37] 오프사이드 룰은 무조건 하프 라인 너머 상대 진영에 있을 때만 적용된다.[38] 다만 아쉬운 것은 이렇게 억울하게 패배했는데도 당시 대표팀 감독이었던 이회택이나 한국 선수들이나 모두 망연자실해서 적극적으로 항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심판들이 장난질을 하는데도 적극적으로 항의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판정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런데도 이 문제는 2006 FIFA 월드컵 독일 스위스전에서 알렉산더 프라이의 석연치 않은 추가골 상황이 생길 정도로 아직까지 개선이 거의 안 되고 있다.[39] 올림픽에서도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당시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 예선에서 민룡이 미국의 러스티 스미스에게 밀려 넘어졌는데, 심판진은 오히려 대한민국 팀만을 실격시키고 남은 3팀만으로 재경기를 치렀다. 대한민국 선수단은 불이익이 두려워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았고, 그 대가는 남자 1000m 준결승과 결승에서의 연이은 편파판정 피해와 1500m 결승에서 1위로 골인한 김동성의 어이없는 실격, 나아가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의 실격과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김연아 은메달, 안방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500m 결승에서 2위로 골인한 최민정의 실격이었다.[40] 이제는 VAR이 도입되어 이러한 오프사이드 판정은 어지간하면 다 잡아낸다. 득점과 관련된 상황의 경우 비디오실에서 의무적으로 판독을 실시하기 때문이다.[41]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이탈리아가 16강 상대로 만만한 우루과이랑 만나려고 억지로 우루과이의 승리를 안겨주었다는 설이 있는데, 하필 라네세가 이탈리아인이었기에 더욱 그런 음모론이 잘 먹혔다. 만약 이때 우루과이가 한국을 이기지 못했으면 오스트리아가 16강에 가게 되고 이탈리아의 대진 상대는 콜롬비아가 되었을 것인데, 이 당시 콜롬비아의 전력은 우루과이보다 훨씬 더 막강하다는 평을 받았었다. 실제로 이때 콜롬비아는 약체 한국을 상대로도 비실거리다 심판의 편파판정 덕에 겨우 1:0으로 이긴 우루과이와 달리 이 대회 우승팀인 서독과 무승부를 기록할 정도로 선전하기도 했다.[42] 그나마 VAR이 있어서 망정이지, VAR이 없었다면 이 인간 때문에 독일을 격침시킨 카잔의 기적에서 넣은 선취골이 취소될 뻔 했다. 게다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계 미국인이다.[43] 문서가 개설된 심판이라면 웬만하면 악질이라는 의미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고 피에를루이지 콜리나레오단 곤살레스처럼 문서가 개설된 유능한 심판도 있다.[44] 20위(승점 2점 2무 1패).[45] 그 전까지는 프로축구 팀 감독이 겸임하는 시스템이었다.[46] 당시 일본 킬러로 정평이 난 황선홍은 경고 누적으로 경기에 나설 수 없었고, 대신 선발 출장한 노정윤이 전반전에 일본 골키퍼와 충돌해서 부상을 입고 나가면서 공격력이 약화되었다.[47] 다만 텍사스라는 지역 자체가 건조한 곳이기 때문에 한국과 같은 고온다습한 찜통 더위는 아니고 중동 지역 같이 고온건조의 뜨거운 더위에 가깝다.[48] 그 유명한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숙부이다.[49] 이때 황선홍의 별명은 '이완용 다음으로 최고의 역적\'이었고, 그에게는 수시로 '똥볼\', '홈런볼\' 등의 수식어가 따라다녔다.[50] 이때 하석주는 볼 찬스를 날린 것이 한이 되었는지, 그 이후로 그는 피나는 노력으로 왼발을 단련하여 '왼발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51] 볼리비아에게 현재 기준 처음이자 유일한 월드컵 본선에서 승점 기록을 했으며, 볼리비아의 1994 월드컵 21위가 가장 선전한 대회였다. 볼리비아는 이 대회 이후 열악한 경제상황도 발생되어 남미예선을 통과 못하고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고 있다.[52] 하지만 이 골을 터뜨리고도 황선홍은 웃을 수가 없었다. 이때 황선홍은 가볍게 주먹을 쥐며 한 번 포효하는 것으로 골 셀레브레이션을 마쳤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심정은 기뻤다기보다는 '왜 이제야 들어가는 거야?'에 가까웠다고 한다.[53] 만약 당시 한국이 볼리비아를 1:0으로 이겼다면 한국이 16강에 진출하고 이탈리아가 24강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것이었다.[54] 30위(승점 1점 1무 2패).[55] 져주기 논란이 있었던 것은 차기 대회 공동 개최국인 일본의 본선 진출을 위해 일부러 져준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당시 태극전사들의 플레이가 눈에 띄게 무기력했기에 더더욱 그런 논란이 있었다. 이에 대해 차 감독은 당시 한국은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지만 일본은 이 경기마저 지면 탈락이었기에 사생결단으로 나왔고 그 때문에 진 것이라고 해명했다.[56] 게다가 1차전에서 주전 공격수인 파트릭 클라위버르트가 퇴장당하는 악재까지 겹쳤다. 파트릭 클라위버르트는 8강전인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 이르러서야 다시 나오게 된다.[57] 이때 경기를 중계하던 KBS 해설위원 이용수는 "에이, 37분까지는 잘 개겼는데...."라고 말하며 조곤조곤한 말투로 해설하던 평소 그의 모습답지 않게 비속어를 써가면서 아쉬움을 표했다.[58] 참가국이 24개국이었던 1994 미국 월드컵까지는 2패를 당해도 조 3위 간 경쟁을 통해 16강 진출 여부에 실낱같은 희망을 기대할 수도 있었지만, 1998 프랑스 월드컵부터는 참가국이 32개국으로 늘어나면서 최종 3위도 무조건 탈락이 확정되게 되었다.[59] 참가국이 32개로 늘어난 이후의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무승부로 마친 경기가 1경기라도 있는 상태에서 한 팀이 2패를 당하면 이후 남은 1경기에서 아무리 큰 점수차로 이겨도 조 2위조차 확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조기 탈락이 확정된다. 당시 한국이 속했던 E조의 경우 이미 네덜란드 vs 벨기에 경기가 0:0 무승부로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멕시코와의 1차전에서 1:3, 네덜란드와의 2차전에서 0:5로 지면서 한국의 조기 탈락이 확정된 것이다.[60] 후반전에 고종수와 함께 김도근, 최성용과 교체되어 투입했고, 선발 출장한 수비수 이상헌이 부상으로 장형석과 교체되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