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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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제14대 광복회 회장을 역임했다. 1990년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1919년 1월 14일 평안남도 중화군 해압면 죽산리 210번지(現 평양시 강남군 이산리)에서 태어났다. 평양제2중학교 재학 중이던 1940년 1월 20일 조선학생 빙상연맹주최 전문, 중등빙상대회에 500m 선수로 출전해 50초를 기록, 3위에 올랐으며, 1월 28일 오사카 아사히신문 평양지국 주최 제6회 서조선남녀중등교 빙상경기대회에 500m 및 5000m, 2000m 계주 선수로 출전해 500m 51초 1, 5000m 10분 22초 5, 2000m 계주 3분 36을 기록해, 세 부문에서 모두 1위에 올라 평양제2중학교가 본 대회에서 16점을 획득해 우승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 졸업 후 학병으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복무하던 중 탈출하여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1944년 5월 장준하, 김우전, 김국주, 전이호, 차약도 등과 함께 안휘성 제3행정독사구(督査區) 임천현(臨泉縣)[2] 에 주둔한 국민당 중앙육군군고나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반 산하 한광반에 1기생으로 입학해 군사교육훈련을 받고 졸업한 뒤 한국광복군 장교로 임관했다. 이어 1945년 1월 말 50여 명의 한광반 졸업생들과 함께 충칭시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았고, 그 뒤 부위(副尉)로서 임시정부 판공실 부관, 경위대장 등으로 근무하였다.
광복 후 김우전, 선우진과 함께 김구의 비서로 근무하였고, 백범 김구 암살 사건 이후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1960,70년대 흥화공작소(현 HHI)[3] 부사장으로 근무하며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참여하였다. 1963년 정국수습대책협의회에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해 군정연장 반대 및 과도정부의 즉각수립을 주장했다. 그해 열린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동대문구 을 선거구에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유성권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이사 등 독립유공자 관련 단체 간부를 역임하였고, 1999년 1월 16일 광복회 전국대의원 임시총회에서 제14대 광복회장에 선출되었다. 광복회장 선출 당시 이사철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의 사돈이 광복회장을 맡으려 한다고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0년 4월 흥화공작소 사장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4] 2001년 광복회 회장 사임 후 독립기념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2018년 3월 8일 서울특별시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18년 3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에 안장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사돈지간이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인 윤혜라씨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맏아들 김홍일 전 의원의 아내이다. 장남인 윤흥렬(尹興烈, 1941. 3. 25 ~ )씨는 김홍업 전 의원의 친구이며 둘이 동생 윤혜라씨와 김홍일 전 의원의 중매를 섰다고 한다. 윤흥렬씨는 LG애드, 동방기획 등에서 카피라이터로 활동하다가 김홍업 전 의원과 광고회사를 설립하였고,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홍보를 전담해 당선에 기여하였다.[5] 이후 서울신문 전무, 부사장, 스포츠서울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국민의 정부 당시 실세로 꼽히기도 하였다.
딸 윤혜라씨와 김홍일 전 의원의 결혼을 승낙하면서 흥화공업 부사장직을 사임하였다. 당시 대구 출신이자 박정희 정권을 따르던 회사 사장을 배려하고, 회사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형 윤광빈도 광복군 정보원으로 상하이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후 연합통신, 동양통신 상무이사, 잠사회 이사를 역임했다.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제14대 광복회 회장을 역임했다. 1990년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편집]
1919년 1월 14일 평안남도 중화군 해압면 죽산리 210번지(現 평양시 강남군 이산리)에서 태어났다. 평양제2중학교 재학 중이던 1940년 1월 20일 조선학생 빙상연맹주최 전문, 중등빙상대회에 500m 선수로 출전해 50초를 기록, 3위에 올랐으며, 1월 28일 오사카 아사히신문 평양지국 주최 제6회 서조선남녀중등교 빙상경기대회에 500m 및 5000m, 2000m 계주 선수로 출전해 500m 51초 1, 5000m 10분 22초 5, 2000m 계주 3분 36을 기록해, 세 부문에서 모두 1위에 올라 평양제2중학교가 본 대회에서 16점을 획득해 우승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 졸업 후 학병으로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복무하던 중 탈출하여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1944년 5월 장준하, 김우전, 김국주, 전이호, 차약도 등과 함께 안휘성 제3행정독사구(督査區) 임천현(臨泉縣)[2] 에 주둔한 국민당 중앙육군군고나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반 산하 한광반에 1기생으로 입학해 군사교육훈련을 받고 졸업한 뒤 한국광복군 장교로 임관했다. 이어 1945년 1월 말 50여 명의 한광반 졸업생들과 함께 충칭시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았고, 그 뒤 부위(副尉)로서 임시정부 판공실 부관, 경위대장 등으로 근무하였다.
광복 후 김우전, 선우진과 함께 김구의 비서로 근무하였고, 백범 김구 암살 사건 이후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1960,70년대 흥화공작소(현 HHI)[3] 부사장으로 근무하며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참여하였다. 1963년 정국수습대책협의회에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참여해 군정연장 반대 및 과도정부의 즉각수립을 주장했다. 그해 열린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동대문구 을 선거구에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유성권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이사 등 독립유공자 관련 단체 간부를 역임하였고, 1999년 1월 16일 광복회 전국대의원 임시총회에서 제14대 광복회장에 선출되었다. 광복회장 선출 당시 이사철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의 사돈이 광복회장을 맡으려 한다고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0년 4월 흥화공작소 사장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4] 2001년 광복회 회장 사임 후 독립기념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2018년 3월 8일 서울특별시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18년 3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편집]
김대중 전 대통령과 사돈지간이다. 2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인 윤혜라씨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맏아들 김홍일 전 의원의 아내이다. 장남인 윤흥렬(尹興烈, 1941. 3. 25 ~ )씨는 김홍업 전 의원의 친구이며 둘이 동생 윤혜라씨와 김홍일 전 의원의 중매를 섰다고 한다. 윤흥렬씨는 LG애드, 동방기획 등에서 카피라이터로 활동하다가 김홍업 전 의원과 광고회사를 설립하였고,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홍보를 전담해 당선에 기여하였다.[5] 이후 서울신문 전무, 부사장, 스포츠서울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국민의 정부 당시 실세로 꼽히기도 하였다.
딸 윤혜라씨와 김홍일 전 의원의 결혼을 승낙하면서 흥화공업 부사장직을 사임하였다. 당시 대구 출신이자 박정희 정권을 따르던 회사 사장을 배려하고, 회사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형 윤광빈도 광복군 정보원으로 상하이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후 연합통신, 동양통신 상무이사, 잠사회 이사를 역임했다.
4. 참고자료[편집]
- 독립유공자 공훈록
- 독립운동사 제6권 308쪽, 4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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