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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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承萬
1912년 11월 17일[1] ~ 1986년 10월 27일 (향년 73세)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토홍계)[2] , 자는 천여(千汝), 호는 의곡(義谷).
2. 생애[편집]
1912년 11월 17일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아버지 홍진선(洪瑨善, 1895. 4. 1 ~ 1965. 3. 1)[3] 과 어머니 평산 신씨 신현균(申賢均, 1894. 5. 11 ~ 1984. 8. 3)[4] 사이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안동군으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1932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7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와세다대학 재학 중이던 1936년 9월 7일 배정현·유진영 등과 함께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고, 1939년 6월 23일 변호사명부에 이름을 등록했다. 이후 금성(金星)방직주식회사 및 삼릉(三菱)방직주식회사 등에서 감사역을 맡기도 했다.
8.15 광복 후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판사 생활을 잠시 했으나 1946년 면직하고 서울특별시에서 다시 변호사를 개업했다. 그러다가 1960년 2월 15일 자유당의 추천으로 중앙선거관리위원에 위촉되었으나 4.19 혁명 이후 사임을 했다. 이후 다시 변호사로 활동했다.
1965년에 제59대 서울제1변호사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67년에는 한국무역협회 무역윤리위원을 지냈다. 연이어 1970년 5월부터 1971년 5월까지 제19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도 지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후보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후 민주공화당 법률고문을 지냈으며 중앙일보사 감사, 국제라이온스협회 한국지구총재 등도 지냈다.
1986년 10월 21일 국정자문위원회 해외시찰단의 일원으로 말레이시아를 여행하던 중 고혈압으로 쓰러져 쿠알라룸푸르의 타와칼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1986년 10월 27일 새벽 2시 40분에 끝내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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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조신문 - 법조약전, 남양홍씨(토홍계)세보 3권 442쪽 참조. 1956년 간행된 대한민국건국십년지에는 1913년 1월 25일생, 1967년 간행된 대한민국인물연감(제2편)에는 1915년생 등으로 달리 등재되어 있다.[2] 문희공파(文僖公派) 28세 승(承) 항렬.[3] 남양 홍씨(토홍계) 중앙화수회 초대·제3대 회장을 역임했다.[4] 신태성(申泰聖)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