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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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역사
2.2. 특징
2.3. 폐간 이후
3. 기타
3.1. 조선 10대 위인 선정
4. 참고문헌


1. 개요[편집]


開闢

1920년 6월 창간되어 1926년 8월 폐간될 때까지 천도교에서 발행한 월간 잡지.


2. 상세[편집]



2.1. 역사[편집]


3.1 운동 이후 일제가 이른바 문화 통치로 정책 기조를 바꾸며 조선인에 의한 신문잡지 발행이 가능해지면서 개벽사에 의해 창간되었다. 개벽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은 박달성(朴達成)이었다고 한다.
파일:개벽 창간호.jpg
개벽 창간호. 포효하는 호랑이 그림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정작 이 창간호는 검열에 걸려서 제대로 발간도 되지 못했다. 이에 개벽사는 임시호를 찍었지만 그것도 발매 금지를 얻어맞았고 결국 김기전의 시를 비롯해 총독부가 문제삼은 부분을 삭제한 후에야 호외로 겨우 간행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짤린 호랑이 표지는 1주년 기념호(13호)에 다시 사용되어 비로소 독자들에게 공개된다.[1] 발행인들도 그림이 아까웠나 보다

이렇게 창간된 뒤 초반에는 매월 25일에 발행하다가 1920년 11월(제5호)부터 매월 1일에 발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만, 민중 지향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한 잡지였기 때문에 일제에게는 늘 눈엣가시였다. 그야말로 민족정론지 그래서 총 72호를 발행하며 발매금지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라는 화려한 기록을 세웠고 1926년에는 결국 폐간되었다.

2.2. 특징[편집]


개벽사는 천도교 인사들의 재정적 후원을 기초로 설립하였기 때문에 동인지들과는 달리 원고료 지불이 가능했다. 때문에 개벽에는 수준 높은 외부 필진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또한 종교 계열 잡지임에도 천도교 홍보보다는 개방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근대 문물 소개와 민족의식 고취에도 주력하였다. 1922년에는 시사기사 게재도 허가받아 정치, 경제, 역사, 지리, 종교, 문학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을 다루며 종합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지면의 3분지 1가량에 문학 작품을 수록했던 만큼 현진건, 염상섭, 방정환, 김동인, 김명순, 김기진, 박종화, 김소월, 이상화, 이광수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다. 원래는 국민문학파 계열 작품들이 많았지만 1925년쯤 되면 신경향파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문예지가 아니었음에도 문학사 연구에서 중요한 잡지로 평가받는다.

인기도 확실히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조선일보가 개벽을 조선 잡지계의 패왕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 개벽사 자체 평가로는 창간 이후 4개월이 경과한 시점에 이미 독자가 1만 명에 육박해 다른 잡지들을 압도했다고 한다.

2.3. 폐간 이후[편집]


개벽이 폐간된 뒤에도 개벽사는 잡지사 경영 규모와 내용에 있어서 1920년대를 대표하는 회사였다. 개벽사는 1926년 11월 1일부터 개벽을 계승한 월간 잡지 별건곤(別乾坤)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별건곤은 일단 취미 잡지를 표방하기는 했으나 1920년대까지는 시사 기사도 자주 실었다. 그러다 1932년부터는 갑자기 가격을 10분의 1[2]로 내리며 본격적인 통속 잡지로 탈바꿈했으나 1934년 8월 통권 74호를 끝으로 종간했다.[3]

이후 개벽과 별건곤 발행 당시 참여했던 차상찬 등이 1934년 11월부터 다시 개벽이라는 이름으로 잡지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예전 개벽을 계승한 잡지는 아니었고, 그마저도 얼마 못 가 1935년 3월 1일에 4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되었다.

이 뒤로는 다시 부활하지 못하다가 광복 후인 1946년 1월 김기전이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개벽을 복간했다. 1926년에 폐간된 개벽을 계승하여 제73호부터 시작했으며 1949년 3월 25일까지 총 9호를 더 발행하고 제81호를 끝으로 자진 휴간하였다. 그리고 김기전은 납북 크리


3. 기타[편집]



3.1. 조선 10대 위인 선정[편집]


흥미롭게도 개벽지에서 1921년 5월 1일부터 6월 10일까지 조선인을 대상으로 위인 투표를 진행한 적이 있다. 개벽 제11호 85쪽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참고로 여기서 조선은 딱 이씨 조선 왕조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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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투표(偉大投票)

조선민족의 발전에 대한 최대 공헌자는 누구?

우리의 사는 곳이라 하여 재어보니 그 면적 겨우 1만 4천여 방리(方里),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라 하여 세어보니 그 숫자 불과 2천여만, 반드시 커야 하고 많아야 된다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이 이에 이르면 뉘 능히 외로운듯한 느낌을 금할 자이냐.

속이지 말고 말하자.

만일 지금의 우리에게 한없는 권능과 솟아나는듯한 감격으로써 영원에 도움을 줄 혹 응원자가 있다하면 그 경행(慶幸)이 과연 하(何)타 하리오.

그러나 시(試)하야 금일의 환구(寰球)를 돌아보면 어떠한가.

우리의 실제를 뒤져보고 뜨거운 느낌을 가질 자 누구며 비록 일시로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의 큰 생(生)을 위하여 자기의 소유를 희생키까지 그 느낌을 사실로써 나타내여 줄 자가- 다시 말하면 사실(事實)로써 응원을 줄 자가 누구인가.

오인(吾人)은 써하되 누구라도 다 아니라 하노라.

그러면 우리는 영원에 외로움을 면치 못할 것인가?.

참 의미의 응원자를 얻지 못할 것인가?

오호라 한 마리의 적은새[鳥]에도 오히려 그 짝이 있거니 2천만의 우리에게 어찌 그 벗이 없을까보냐.

있도다 있도다 확실히 있도다.

그 누구이냐?

4천년의 역사가 그이며 그 역사의 심혈을 지은 기다(幾多)의 위대걸사(偉大傑士)가 곧 그이다.

모르거니와 그들의 영(靈)은 지금 넘치는 듯한 애린(愛憐)과 결연(决然)의 의력(意力)을 가지고서 우리의 땅 위를 휘돌을지니라.

자못 섭섭한 것은 우리 각자가 목석연(木石然)하야 그의 영감(靈感)에 접치 못함이며 그의 품속에 들지 못함 뿐이다.

오인(吾人)은 이에 느낌이 있어 이제 『위인투표(偉人投要)』라는 형식을 빌어서 과거 사천년간에 조선의 발전을 위하여 최대공헌을 행한 각방면의 위인을 탐구 소개하여서 감히 이천만 형제의 참 의미로의 응원자를 짓게코저 하나니, 동무여 당신도 오인(吾人)과 동감이거든, 아니 조선형제이거든 다투어 본사(本社)의 차거(此擧)에 관성(貫成)함이 있을지어다.

□ 투표하실 이에게

一, 사상, 정치, 군사, 문학, 미술, 종교, 과학, 산업, 교육, 사회개선의 열 가지 방면에 대하여 최대공헌을 행하였다 인하는 위인 각 일인식(즉 사상에는 누구, 정치에는 누구 기타 무엇에는 누구누구라 기입할 것)을 선기하여 엽서로써 본사에 보내시오

一, 투표할 위인은 조선 상하 4천년 간의 역사에 나타난 이로 하되 현재 생존한 이는 기입치마시오

一, 이 투표는 본지의 독자임과 독자 아님을 묻지 아니합니다

一, 투표엽서에는 기 표면에 필히 『개벽사 편집부 위인투표계』라 주서함

一, 투표기간은 오월 일일로 육월 십일까지로 하며 투표의 결과는 본지 칠월호 지상에 발표함

一, 투표의 결과로 최대점을 얻은 각방면의 위인 즉 십인 본지 팔월호로 위시하야 축호로 기 일인식(式)의 최상세히 소개함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1]


개벽의 독자 여부와 상관없이 진행한 대중 투표였기 때문에 개벽사의 잡지 외에 다른 언론 매체에도 관련 광고가 실렸고,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길거리에도 광고가 붙었다고 한다. # 10개 부문에서 최고의 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한 명씩 택해 직접 적어서 엽서로 부쳐야 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투표 참여자들은 당대의 식자층이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투표 결과는 다음과 같이 나왔다.
개벽사 조선 10대 위인 투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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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 수: 2,305명 이상
부문
위인명
득표수
부문
위인명
득표수
사상
이황
1,492
종교
최제우
1,239
-
-
원효
563
정치
이이
989
과학
서경덕
892
을파소
920
정약용
883
군사
이순신
1,100
산업
문익점
697
을지문덕
1,002
흘간(屹干)
534
문학
최치원
978
교육
최충
1,321
박지원
651
-
-
미술
솔거
1,320
사회개선
유길준
360
담징
985
-
-
※ 응답수 100명 미만의 차점자는 공개되지 않음.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체로 현대에도 유명한 위인으로 생각되는 인물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100년 정도 시간차가 나는 만큼 현재의 인식과는 다른 면도 존재한다.
  • 최제우원효를 제치고 종교 부문 최고 위인으로 선정되었다.[4]
  • 미술 부문에서 김홍도를 위시한 조선 화가들이 보이지 않는다.
  • 서경덕이 사상가가 아닌 과학자로 인식되었다.[5]
  • 현재는 인지도가 약한 유길준이 사회개선 부문 1위로 선정되었다. 투표수가 확연히 적은 건 넘어가자
  • 산업 부문에서 흘간(屹干)이라는 생소한 인물이 2위를 차지했다.

특히 흘간(屹干)은 사실 현대에 와서도 대체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인물인데, 한국의 어떤 역사서에도 저런 인물은 나오지 않는다. 일단 간 자가 들어간 걸 봐선 가야신라 쪽 인물인가 싶지만 한자가 일치하는 인물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로 싹 뒤져봐도 없다. 그런데도 1921년에는 534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위인이라고 투표를 했으니 일제강점기에 유실된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흘간(屹干)의 간()이 우()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를 백제의 개국공신 흘우(屹于)를 오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흘우라는 인물이 딱히 산업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록이 없어서 확실하지는 않다. 참고

4. 참고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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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벽' 하면 생각나는 컬러 프린팅된 호랑이 그림이 바로 13호의 표지이다. #[2] 50전에서 5전으로 인하했다. 참고로 개벽은 40전이었다.[3] 개벽처럼 강제 폐간된 것은 아니다.[4] 개벽 독자들 상당수가 천도교 교인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5] 북한에서는 지금도 이걸 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