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대성/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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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1. 개요[편집]


구대성에 대한 여러가지 에피소드, 이야기거리를 별도의 문서로 분리하였다.


2. 내용[편집]


  • 구대성의 친형도 프로야구 선수였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우완투수 구대진 선수가 구대성의 형. 대전 신흥초등학교 3학년 때 형을 따라 야구부에 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구대진은 경남대학교[1]를 졸업하고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해 1991년 7경기 12⅔이닝 1패 4자책점 평균자책점 2.84의 성적을 낸 뒤 재계약 불발로 1년만에 방출되어 은퇴했다. 현재는 2016년에 창단된 대전 지역 두번째 야구부인 대전제일고등학교 야구부의 감독을 맡고 있다. 그러나 엠스플의 취재로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2018년 2월 학생을 구타하여 사회봉사 40시간의 징계 처분을 받았던 전력이 드러났고, 이후 야구부 선배 학생이 후배를 폭행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구대진 감독이 은폐하려고 한 정황이 포착되었다.# 이래저래 동생 얼굴에 먹칠을 한 셈.[2]

  • 박찬호대한민국 최고의 좌완투수로 구대성을 꼽았다. 한화 이글스가 지역연고권을 가졌던 박찬호가 메이저리그로 진출하여 구대성과 박찬호가 함께 한화 선수로 뛰는 프로야구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대성불패와 코리안특급이 한 팀에서 뛴 적은 있었다. 1992년 대학야구 한양대팀에 4학년 구대성 1학년 박찬호. 당시 한양대의 투수진은 원투펀치로 1학년 좌완 차명주 우완 박찬호, 중무리로 4학년 구대성으로 운용한 경기가 많았다. 또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 구대성과 박찬호가 함께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 승선하며 국가대표로 한 팀이 되어 뛰기도 했다.

  • 1년 유급해서 1970년생 선수들과 친구다. 김기태와는 생일이 한달 남짓 차이지만 학번은 무려 2년이나 차이가 난다. 양상문-이순철과 비슷한 예. 나이상 형이 아닌 정민태도 대학 선후배의 인연때문에 30년이 지나서도 그냥 형이라고 부르는게 편해서 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근데 사실 유급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국 운동계에서 나이를 인정해주는데, 이쪽은 다른 케이스. 비슷한 케이스이자 훨씬 선배인 이만수-김시진의 경우는 고등학교 졸업 후 친구[3]를 했다는 걸 보면 구대성 쪽이 특이한 셈. 지금도 유급한 사람은 바뀐게 없이 동급생들이 형 대우, 선배들이 친구 대우를 해주는데, 과거에도 대부분 그랬다.

  • 젊었을 적엔 그 김병현과 비교될 정도로 독특한 일화가 많고 성격도 역시 사나이답게 쿨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풍운아로 유명한 최향남과 비교해도 꽤나 비범한 에피소드들을 가지고 있다.
    • 대전고 동창의 증언으로는, 대전고등학교 야구부가 1953년에 한 번 우승한 이후 팀 성적이 좋지 않아 폐부 위기에 처하자 당시 1,000만원(!)을 스카웃 비용으로 지불하면서 구대성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입학하자마자 휘문고와의 첫 친선 경기 때 팀이 스코어 2:1로 앞선 상황 9회에 마무리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서서 1, 2, 3번 타자를 전부 볼넷으로 내보내 만루를 채우고 다음 3명의 타자를 전부 삼진으로 막았다고 한다. 경기가 끝나고 이유를 물어보니 "왜? 재밌잖아?"라고 대답했다고.[4]
    • 정민철이 발언한 바에 따르면[5] 굉장한 상남자라고 한다. 정민철이 '형, 저 타자가 몸쪽 높은 공을 잘 쳐!'하고 정보를 기껏 전달해 주면 대답이 '됐다 그랴~'[6] 또한 이어서 정민철이 기인설을 말했는데, 운동할 때 여름철엔 파카를 입고 몸을 풀었으며, 겨울철엔 반팔을 입고 몸을 풀었다고.[7]
    • 박찬호의 증언에 따르면 100원짜리 동전을 쌓아놓고 오락실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 실제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마운드 위에서 위기 상황엔 "저녁식사를 뭘로 먹을까"를 생각한다고 한다.
    • 파일:KDS_3.jpg
한화 이글스 홈피에서의 '좋아하는 연예인은?'에 대한 답.

  • 선수로서의 자존심과 승부욕도 남달랐다.
    • 1995년 7월 25일, 대구 삼성전 9회말 2아웃에서 이동수에게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맞은 적이 있다. 참고로 2016년 KBS N SPORTS에서 방영된 더 레전드 구대성 편에서 강병철 당시 한화 감독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 장면을 기억하면서[8], 구대성의 정면승부 기질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9]
    • 다만 그 승부욕과 화끈한 성격이 겹치면서 빈볼 지시를 자주 내렸다. 예를 들어서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펼쳐진 본선 1라운드 A조 6경기에서 누구든 이치로를 맞히면 10만엔[10]을 주겠다고 선언한 일이나,[11] 안영명에게 김동수를 맞히라고 시키는 등[12][13].

  • 양준혁은 본인과 비슷한 연배(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생)의 투수 중 직접 상대했을 때 어려웠던 투수를 꼽는다면 단 한 명, 구대성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오히려 그 중 최고 커리어인 정민태는 양준혁에게 쉬웠다[14]고 한다. 동년배 우완투수들은 구속이나 제구가 뛰어나도 상대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고. 구대성의 경우는 좌완이고 투구동작이 남달라서 어디서 릴리스가 되는지 잘 추정도 안 되고 던질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데다가 무브먼트도 현란해서 진짜 힘들었다고 한다.

  • 칰갤에서 한화투수가 볼질로 주자를 모은 뒤 해결하고 내려가면 이를 '쿠옹놀이'라고 한다. 참고로, 한화 투수들은 주자를 쌓는 것까지는 똑같은데, 막지 못하고 실점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 송진우, 정민철과 함께 엄청난 짬밥으로 인해 한화 이글스의 무적 벤클 치트키라고 불리기도 한다.
    • 대표적으로 2006년 한국시리즈 당시 소위 꼰대질과 지나친 다혈질, 흥분을 일삼는 걸로 비판받는 진갑용이 구대성의 공에 몸을 맞자 성질을 내며 방망이를 그대로 들고 마운드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구대성이 실투였는데 어쩔 거냐고 대응하자[15] 군소리 못하고 얌전히 1루로 걸어나갔고, 진갑용이 1루에 도착한 뒤에도 진갑용을 꾸짖었다. 보통 힛바이피치가 나오면 투수가 욕을 먹는데 진갑용이 워낙 해놓은게 있어서 오히려 맞은 타자가 욕먹는 케이스.
    • 붕어빵 셔틀 짤방 동주야 포장마차 새로 생긴데가 맛있다더라. 2007년 두산과의 플레이오프 때 일어난 벤치 클리어링 때도 한화 선수들이 전전긍긍하자 느긋하게 등장해 김동주를 상대로 손 한 번 펴보이자 그 천하의 김동주가 조용히 벤치로 돌아가던 장면은 꼭 보자. 2018년 10월 13일에 방영된 엠스플 인터뷰에서 밝히길, 본인도 이 짤방과 붕어빵 드립을 알고 있다고. 제스처의 본래 의미는 '싸울거면 싸우고 아님 들어가라'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 전성기 시절에도 휴대폰이 없었다고 한다. 뒤늦게 핸드폰을 가졌지만 그나마도 휴대폰 번호를 절대 남에게 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참고.???: 응? 정민철은 남이 아니다! 어차피 자주 만날테고 동료들과 지인들끼리 전화를 거는 것을 싫어해서 그런다고 한다. 가정적인 면도 있는데 가족을 정말 아낀다고 한다.[16]

  •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돈에 대한 감각이 좀 떨어진다는 평이 있지만 밑의 일화들을 보면 남을 위해 잘 쓰고 본인에게 안 쓰는 대인배이기도 하다.
    • 대학 진학 당시에 빙그레에서 3,0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계약을 하고자 했으나 한양대에서 신장이 안 좋았던 아버지를 한양대학교에서 무료로 치료해준다는 조건과 친구들도 함께 진학한다는 조건에 승낙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 무료 치료가 아니라 구대성의 대학 진학을 바라는 아버지 뜻에 따라 친구들과 함께 진학한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당시 강팀이었던 빙그레는 한국시리즈에 가기만 하면 물을 먹었는데, 만약 구대성이 고교졸업 후 프로에 바로 입단했으면, 빙그레의 전성기(1989~92년) 시절과 맞물려서 한국프로야구 역사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17]
    • IMF 구제 금융기간이면서 선수협 창단 시절인 일본진출 초창기에 당시 선수협결성 초대회장이었던 송진우의 "후배들을 위해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에 선뜻 1천만 원의 기탁금을 내놓았다.[18] 아무 연고도 없던 임수혁을 돕기위해 당시(2002년 12월) 일본에 있었으나 "외부에 알리지 말고 무조건 내 말대로 해달라"라며 한화 구단에게 2천만원을 송금해서 임수혁에게 전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기 저기에 기탁금, 후원금을 알게 모르게 지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릭스로 진출하기 전까지 대전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의 아내 또한 검소한 모습으로 다닌다고 한다. 왜 좋은 곳으로 이사를 안 가냐는 말에 쿠옹曰 "나는 여기가 편하다"라고.
    • IMF 시절 연봉 고과 1위인 구대성이 1억 원을 요구했으나 구단에서는 모기업사정을 고려하여 조정을 요구했다. 그것을 시원하게 응낙하여 동결하기로 했으나 이 이야기가 구단 수뇌부에 올라가면서 수뇌부에서 구단의 상징인 구대성의 연봉을 맞춰주라는 의견이 나왔고 우리 화끈한 회장의 지시겠지? 구단이 1억 원을 제시하자 역으로 모기업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다고 거절한 사례가 있다.

  • 꽤나 유명한 내기광으로 큰 돈을 걸진 않지만 여러 돈을 걸고 하는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특히 내기에 승리할 때의 액션이 크기로 유명한데, 메츠 때 동료들이 표현하기를 미친 것 같았다고 한다. 거기다 당시 MLB 한국선수 담당 기자였던 Spotv 손건영 MLB 해설위원이 메츠시절 구대성에 대해 락커룸에서 메츠 선수들 돈을 많이 땄다고 증언하였다. 이 때문에 프로야구선수 인터넷 도박 파문이 터졌을 때 내기를 즐겨한다는 점 때문에 구대성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한화 팬들은 컴맹인 쿠옹이 그럴 리 없다고 반박하였다. 어느 수준이냐면 이메일도 제대로 못 쓴다고 한다.

  • 1995년 11월, 제2회 한일 슈퍼게임 6경기에 모두 등판했다.[19] 특히 고시엔 구장에서 펼쳐진 3차전에서는 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다.

  • 1999년 11월, 제3회 한일 슈퍼게임 1차전[20]에 선발등판했지만 4.2이닝 5실점의 부진한 투구를 선보였다.[21] 이 때 일본팀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투구 버릇이 읽힌다고 귀띔해줬다고 한다.[22]

  • 1999년 한국시리즈 5경기에 모두 등판했다. 1차전 세이브, 2차전 세이브, 3차전 블론세이브, 4차전 세이브, 그리고 대망의 5차전에서 세이브로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견인했다. 5차전 마지막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자 한화 이글스 선수들이 우승을 예감하고 뛰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고, 이를 본 구대성은 '볼을 던져야 하나?'라고 생각했다고.

  • 2000년, 제주도 오라구장에서 펼쳐진 올스타전에서 9회말 2사만루 4-3 상황에 홍성흔에게 폭투 2개를 던져 순식간에 4-5로 역전패를 만들고 웃음을 짓는 게 방송에 탄 바 있다. 이를 두고 비행기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일찍 끝낸 거라느니, 팀 동료 송지만의 올스타전 MVP 수상을 밀어주기 위해 끝내기 안타 기회를 봉쇄한 거라느니 하는 추측이 난무했다.
    • 시간이 흘러 2015년, 올스타전 종료 후 정민철 해설위원과 이 에피소드 해명을 위한 전화통화 장면이 방송되었으나 오래돼서 기억을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최근 근황이 함께 알려졌는데 팔 부상으로 잠시 쉰다고 한다. 문제는 부상당한 팔이 오른손(...) 쿠옹 : 아 왼팔은 너무 싱싱해서 탈이고 이러다 50세가 넘어서도 뛰겠다[23]

  • 구대성의 뉴욕 메츠 시절, 당시의 내셔널 리그지명타자 제도가 없었던 관계로 구원 투수임에도 통산 2회 타석에 들어섰는데, 첫 타석에서는 KBO에서 투수가 타격을 하듯이 멀찍이 떨어져 루킹 삼진을 당했다. 게다가 팀은 9:2로 넉넉하게 앞서고 있으니 무리할 필요도 전혀 없었다. 투수가 멀뚱멀뚱 루킹삼진을 당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벤치에서 팀 동료들이 장난 삼아 구대성에게 한마디씩 했고, 그중 한 명인 마이크 피아자는 구대성의 다음 타석에서 안타를 친다면 100만달러(약 10억원)을 기부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구대성이 타석에 들어선 2번째 경기의 상대 투수가 MLB 최정상급 강속구 투수인 랜디 존슨이었다는 것. 심지어 구대성은 좌타였기 때문에 투구폼 특성상 좌타 상대로 저승사자인 랜디 존슨이 공을 아무리 힘을 빼고 던졌다고 해도 치기 정말 까다로운 공이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구대성은 무려 랜디 존슨을 상대로 2루타를 쳐냈다! 거기에 더불어 후속 타자의 보내기 번트에 3루까지 진루했는데, 이 과정에서 상대팀의 수비의 허점을 파고들어 3루를 통과해 과감한 주루 플레이로 홈까지 파고들며 득점까지 하게 된다. 사실 방송 영상의 슬로우 모션을 보면 아웃 타이밍이긴 했는데, MLB에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를 하는 선수에게 유리하게 판단한다는 불문율이 있다보니 세이프 판정이 나왔다. 포수는 어필을 했지만, 상대팀 벤치에서 별다른 어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상대팀도 이를 인정한 셈이다. 좋게 끝났으면 다행이지만, 안타깝게도 이때 홈슬라이딩으로 인해서 부상을 당했고, 이듬해 메이저리그에서 국내로 복귀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여담으로 내기를 걸었던 마이크 피아자는 구대성이 안타를 치자, 실제로 100만달러를 기부했다고 한다. 관련영상


구대성이 평가하는 한/미/일 야구
  • 다만 처음에만 쉬웠고, 타자들이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똑같이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파일:external/image3.inews24.com/1459853051867_1_194510.jpg

  • 2018년 기나긴 비밀번호를 끊고 한화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자 2차전에서 시구를 하였다.(2018년 10월 20일) 시구 영상

  • 2021년 1월에 자신의 야구 인생을 담은 에세이를 발간하였다. #


[1] 구대성은 고등학생때 연세대와 고려대 야구부를 제외하고는 경남대 야구부 정도만 알았다고 한다. 친형이 경남대 야구부였기 때문.[2] 게다가 구대성은 폭력을 극도로 혐오하는 성격으로, 학번만 선배지 본인보다 늦게 태어난 정민태가 한양대학교 야구부의 폭력을 근절했다는 이유로 '형'이라고 부를 정도다.[3] 그들의 고등학교 때는 다른 야구부와 달리 나이 군기를 잡는 야구부라 유급해도 동갑에게 존대말을 강요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만수가 부상으로 1년 유급한 케이스.[4] 스톡킹에 나온 이야기로는 신일고와의 연습 경기에서도 유사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는 감독이 직접 올라와서 물어봤다고.[5] 발언지는 엠스플에서 자체제작한 엠스플 텔레비전.[6] 스톡킹에 나와서 해명한 영상을 보면 기본적인 데이터는 투수들도 다 보고 들어가는데 어제 직구가 좋았다고 오늘도 좋으라는 법도 없고, 본인의 컨디션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면이 더 큰 듯 하다.(상대방이 직구에 강하다고 해도 오늘 내가 직구가 더 공이 좋다면 직구 위주로 간다는 소리)[7] 마찬가지로 스톡킹에서 해명한 영상을 보면, 여름에 파카를 입고 몸을 푼 이유는 구대성이 중무리라서(...) 급하면 6회부터 애니콜로 실전투구를 해야 했기 때문에 몸을 빨리 풀기 위해서였고, 겨울에 반팔을 입은 건 원래 더위를 잘 타서.[8] 당시 인터뷰에서 한방이 있었던 선수였다고 기억했고, 바로 승부붙었다가 홈런을 얻어맞았다고 술회하였다.[9] 이후 2002년 사직구장에서 롯데 김응국이 삼성 김진웅을 상대로 9회말 2아웃에서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을 기록한 적이 있다. 이후 KBO에서 202*년 현재까지도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역전 끝내기 만루홈런은 이 사례들이 유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10] 오랫동안 1만엔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21년 스톡킹에 출연한 봉중근의 후일담에 따르면 10배 높은 10만엔으로 밝혀졌다. 봉중근이 자신이 하겠다고 했는데 구대성이 125km는 맞아도 아프지도 않다고 안된다고 했다고 한다. 당시 봉중근은 구위가 떨어져서 그날 경기에 불펜 투수로 나와서 니시오카 츠요시한테 큰 타구를 맞았으나 이진영의 다이빙캐치로 기사회생하였다. 그런데 똑같이 스톡킹에 출연한 구대성 본인은 1만엔이라고 밝히고 있다.[11] 이치로의 ‘30년 망언’ 사건(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 그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이 몸에 맞는 공을 세 번이나 맞은 것(조인성, 이종범*2)과 관련된 일인데, 결국 배영수가 이치로에게 빈볼을 꽂아버렸다. 배영수가 '선배님,(승부도 박빙인데) 맞히면 어찌합니까'라고 하니 구대성은 '뒷처리는 내가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영상을 보면 맞추고 내려오는 배영수, 투수 교체를 위해 올라오는 선동열 투수코치, 교체되어 올라오는 구대성도 웃고 있다. 한일전에서 지고 있는데도 빈볼을 맞추고 웃고 있는 세 사람의 비범한 멘탈을 느낄 수 있다.[12] 이는 후에 본인이 빈볼지시를 내렸었다고 고백했다. 왜 빈볼 지시를 내렸냐면 전 타석에서 사인 훔치기가 의심된데다 김동수가 한양대 시절 꼬장꼬장한 선배라 얄미워서 그랬다고 한다. 정작 구대성은 안영명이 초구에 맞힐 줄 알았는데 그 공이 뒤로 빠지고, 또 다시 공이 빠지자 안 맞히겠지 하고 라커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난리가 나자 후배를 보내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시키고, 그후로 늦게 그라운드에 나왔다.[13] 이때 안영명은 김동수로부터 바로 그 전설의 싸다구를 맞았다. 이게 어느 정도로 임팩트가 컸냐면 해외 용병들도 한화 입단하기 전부터 안영명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이 영상을 봤었다고.[14] 양준혁은 진행자가 정민태를 묻자 "마 정민태는 내한테 밥이었지"라고 자신있게 웃으며 말했다.[15] 한국시리즈 연장전인데 고의로 힛바이피치를 던졌다고 보긴 어렵고, 포수의 위치를 봐서는 몸쪽 공이 미스가 난 걸로 보인다.[16] 스톡킹에서 나온 이야기에 의하면 저장된 번호가 10개 남짓이라고 한다.[17] 좋은 멤버를 갖추고도 번번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던 한양대가 구대성이 입학하자마자 대학야구 최강팀이 되었다. 실제로 유튜브에 업로드된 구대성의 한양대 1학년(1989년) 시절 투구영상을 보면, 이 말이 결코 허황된 상상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18] 당시 선수협에 기부한 선수는 회장인 송진우, 부회장인 양준혁과 일본에 진출한 구대성, 정민철, 미국에 있던 이상훈 뿐이었다.[19] 6경기 모두 선발등판 없이 구원으로만 등판.[20] 나고야돔.[21] 1차전 당시 일본타선은 이종범니시 토시히사에토 아키라마쓰이 히데키오가타 고이치나카무라 노리히로이시이 타쿠로마쓰이 가즈오 등으로 구성된 정예타선이었다.[22] 풀버전으로 들으면 조금 후덜덜한 일화인데, 구대성이 통역을 대동해 일본 덕아웃을 직접 찾아가 호시노 감독에게 어떤 투구버릇이 읽히는 거냐고 알려주시면 감사하겠다며 직접적으로 물어봤다고 한다. 호시노 감독은 아는 코치를 불러서 그를 통해 그 버릇에 대해 설명해 주고 돌려보냈다. 구대성을 돌려 보낸 후 일본 선수들에게 "저 선수를 봐라. 조금이라도 부족한 것이 있으니 배우려는 게 아니냐. 우리들은 이 모습을 필히 배워야 한다."라며 구대성의 자세를 극찬했다. 그리고 구대성은 호시노의 가르침을 다음 경기에서 써먹으며 호투했다.[23] 그리고 2019년 1월 19일, 질롱 코리아의 경기 중 3회에 등판해서 진짜 50세 넘어서도 현역에서 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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