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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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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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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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진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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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우승반지

1985


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1.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2.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3.svg파일:현대 유니콘스 우승 엠블럼 V4.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1998
2000
2003
2004


파일: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로고.svg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야구 종목
금메달(코치)
2010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5,1987 KBO 리그 다승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5,1987 KBO 리그 승률왕




김시진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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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9번
김한근
(1982)

김시진
(1983~1988)


홍성연
(1989~1990)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28번
오명록
(1987~1988)

김시진
(1989~1992)


김종석
(1993)
{{{#fab93d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79번}}}
결번

김시진
(1993~1995)


결번
결번

김시진
(1998~2007)


팀 해체
{{{#fff [[키움 히어로즈|서울 /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79번}}}
윤학길
(2008)

김시진
(2009~2012)


최만호
(2013~2015)
{{{#ffffff [[롯데 자이언츠|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9번}}}
윤학길
(2011~2012)

김시진
(2013~2014)


손상대
(2015~2018)




파일:Kim Si-Jin.jpg

KBO 경기운영위원
김시진
金始眞 | Kim Si-Jin

출생
1958년 3월 20일 (66세)
경상북도 포항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83cm
학력
포항중앙초 - 포항중 - 대구상고[1] - 한양대
가족
부인 이선희[2]
아들 김재현, 딸 김정아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3년 1차 지명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83~1988)
롯데 자이언츠 (1989~1992)
지도자
태평양 돌핀스 1군 투수코치 (1993~1995)
현대 피닉스 투수 인스트럭터 (1996~1997)
현대 유니콘스 1군 투수코치 (1998~2006)
현대 유니콘스 감독 (2007)
서울-넥센 히어로즈 감독 (2009~2012)
롯데 자이언츠 감독 (2013~2014)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투수코치 (2010)
프런트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전력분석팀장 (2015~2017)
경력
KBO 경기운영위원 (2008, 2017~)
KBO 기술위원 (2008)
KBO 규칙위원 (2008)
KBO 상벌위원 (2008)
KBO 규칙위원 (2017~2018)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기술위원장 (2019~2021)
병역
육군 경리단 (1981~1982)
1. 개요
3. 피칭 스타일
5. 롯데 감독 사퇴 이후
6. 별명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브이를 하는 김시진.jpg

대한민국야구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투수.

선수 시절 삼성 라이온즈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삼성 라이온즈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1980년대 라이온즈를 대표하는 에이스이자, 선동열, 최동원과 함께 1980년대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던 투수였다.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통산 100승 투수[3]의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은퇴 후에는 은사 정동진의 부름을 받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태평양 돌핀스와 그 후신인 현대 유니콘스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으며, 2006년 현대 감독으로 선임되어 현대의 후신인 넥센 히어로즈, 그리고 과거 몸담은 적 있는 롯데 자이언츠에서 감독을 역임했다. 다만 감독 시절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해서 현재는 사실상 감독 일선에서 물러나고 행정가로 전향한 상태다.[4]


2. 선수 경력[편집]


김시진의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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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피칭 스타일[편집]


80년대 140초반대의 직구와 공의 가감속 조절 능력, 흔히들 완급조절이라 부르는 것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슬라이더나 커브 등 다양한 구종을 구사했으며, 이중 체인지업은 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도 수준급이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더불어 원하는 곳에 공을 던질 수 있는 컨트롤을 바탕으로 본인은 신중한 승부를 즐겼는데, 코너웍과 유인구로 삼진을 잡아내거나 세밀한 컨트롤로 뜬공을 유도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80년대에 활약했던 올드 선수들, 해설자들이 김시진을 두고 구속은 빨랐지만 구위는 압도적이진 못해서 정면 승부보단 유인구를 많이 던지는 투수로 평하곤 한다. 이로 인해 소위 두뇌파 투수로 통하며 볼넷이 많은 편이었다. 다만, 김시진의 성적과 실력은 이견이 없는 80년대 NO.3 이기에 볼넷이 많았다는 걸 문제시 하진 않는다.

정면 승부를 즐겨하지 않았기에 볼넷 관련해서도 많은 기록이 있는데, 피볼넷이 통산 4위고 1985년 세운 121볼넷은 무려 단일시즌 2위 기록이다. 다만 정상급 투수들과 비교해서 볼넷이 많은 편인건 맞지만 1985시즌의 단일시즌 기록은 270이닝 가까이 되는 많은 이닝에 수반된 기록이고 9이닝당 볼넷은 4.04개로 아주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5]

내구성이 매우 대단했던 투수로, 1985년 기록한 269.2이닝은 정규시즌 이닝기록 역대 3위이며, 포스트시즌 기록 포함 시 5시즌 연속 200이닝(1983년~1987년)을 기록했다.[6] 이외에도 1985년 총 투구수인 4,231구는 KBO 리그 단일시즌 3위이며, 1989년에는 한 경기 최다 투구수 승리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219구)

요약하자면 정상급 컨트롤 능력과 빠른 구속, 좋은 변화구에 강력한 내구성 등 에이스의 덕목은 다 갖춘 투수로 타자와의 신중한 승부를 즐겼던 두뇌파. 볼넷이 많아 제구력이 좋지 않다는 이미지가 있으나 이와는 별개로 탈삼진 능력은 매우 우수했던 투수였다. 정작 본인은 탈삼진에 크게 연연하진 않았고[7], 경우에 따라서는 피해가는 등 유연한 플레이를 지향했다는 것이 독특한 점이다.

몸이 늦게 풀리는 기질이 있어서 등판 직후 꽤 고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김시진이 털린다면 1~3회 내로 집중공략당하거나 몸이 안 풀려서 자멸하는 등 빠른 시간에 털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아마 수많은 피볼넷의 몇몇은 몸이 안 풀렸을 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계투로는 적절하지 않은 스타일.[8]

큰 경기에서 새가슴 기질이 있어서 포스트시즌에서 단 1승도 기록하지 못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는 달리 호투를 펼쳤는데도 타선이 안 도와줘서 패배한 포스트시즌 경기도 몇 있다.[10] 이와는 가장 대조적인 케이스가 바로 김시진의 수제자 장원삼.


4.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시진/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롯데 감독 사퇴 이후[편집]


롯데를 떠난 후에는 행정가로 활동 중이다. 사실상 한대화처럼 행정가로 전향했다고 보아도 무관하다.

태평양-현대-넥센 시절[11] 그와 한솥밥을 먹었던 염경엽 감독이 김시진 본인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미국과 일본을 돌면서 야구 공부를 한다고 한다.

2015 WBSC 프리미어 12를 앞두고 안치용, 이종열과 함께 국가대표팀 전력분석관으로 합류해 전력분석 팀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때를 기점으로 사실상 행정가로만 활동 중이다. 대한민국 경기가 있을 시간에는 관전하지 않고, 그 시간에 타국 국가대표팀의 경기를 분석했다고 한다. 삿포로 돔에서 열린 개막전 때 그는 일본이 아닌 대만에 머무르며 분석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예 한일전을 앞두고서는 오타니 쇼헤이 이후를 공략하자는 생각으로 분석했다고 한다. 다만 대회를 앞두고 베네수엘라 국가대표팀이 갑작스럽게 엔트리를 무려 13명이나 교체하는 바람에, 베네수엘라 대표팀에 대한 전력분석은 애를 좀 먹었다고 한다.

투수코치 시절 준수한 업적을 감안하면 김시진의 감독으로서의 무능은 야구에 대한 내공 부족보다 감독 자리에 맞지 않는 여린 심성에서 나온다는 분석이 설득을 얻고 있기에, 감독 이외에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활약하는 것이 좋은 선택인 듯하다.

그리고 그 실력을 인정받았는지, 2017 WBC에서도 국가대표팀 전력분석 팀장을 맡았다.

삼성을 3승 라이온즈로 만들 뻔한 초보 감독의 삽질을 보다못한 일부 삼성 팬들이 이만수와 함께 차기 삼성 감독 후보로 꼽고 있다. 물론 여기서 이전의 계투 혹사는 하지 말아야겠지만...

2018년에는 김재박이 잘리면서 공석이 된 경기감독관을 맡게 된다.

2018년 12월 30일 KBO 기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2022년, KBO 40주년 레전드 40인 중 한명에 뽑혔다.


6. 별명[편집]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 꼴뚜기는 친구 별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야구를 그만두면서 얼떨결에 꼴뚜기란 별명이 김시진에게 넘어온 것. 본인은 야통이나 야왕같은 별명을 부러워하는 것 같지만 현실은 꼴뚜기…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레알 뚜기가 되었다.

2011 시즌 시범경기 중계에서 이순철 위원과 한명재 캐스터을 통해 선수시절 투쓰리로 불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명재 캐스터 말로는 신중한 승부를 즐겨했다고…(저 아름다운 사사구 기록을 보자) 그러나 볼넷이 많아 볼넷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2012 시즌 들어서 넥센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으며 돌시진으로 불리고 있다.

2013년에도 새 별명이 생겼는데 바로 2013년 중국의 지도자 이름을 따서 언어유희로 만들어낸 시진. 팀의 지도자라는 감독의 직책과 맞물려서 어울리는 별명으로 한 때 쓰였다. 결국 성적이 내려가자 빙시진, 시진빙으로 바뀌었다.

2014년에는 닥치고 좌우놀이와 병맛의 투수교체를 보여주며 좌우성애자, 뚜발놈, 빙시진, 시진빙이란 별명들이 쓰인다. 롯갤에선 아예 빙시진이라고 부르고만 있다. 여기에 갓동님과 합쳐서 빙동님이라는 별명까지 탄생한 것은 덤.[12]


7. 여담[편집]


파일:/image/410/2013/04/02/20130402_1364887651.jpg_59_20130402162930.jpg


  • 1982년부터 2019년 현재까지 30년이 넘는 프로야구 역사에서 유일한 삼성 출신 미스터 올스타이자, 정명원과 유이한 투수 미스터 올스타.[13] 삼성 출신 중에서 레전드 타자인 이승엽, 양준혁 등등 수 많은 삼성의 강타자들을 제치고 그가 유일한 미스터 올스타로 남아있다.

  • 현역 시절 삼성 라이온즈에서 프로야구 최초 100승을 세우기도 했으나 삼성과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하다. 그야 롯데의 심장과 삼성의 두뇌를 바꾸었다는 말을 들었던 충격적인 최동원-김시진 트레이드로 좋지 못한 말년을 보낸 김시진이 삼성에 좋은 감정을 가지는 게 이상할 터. 현역 시절에 배터리를 이뤘던 이만수도 비슷한 상황이나, 이만수는 삼성에서 감독직을 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과는 별개로 김시진은 감독 시절 때 삼성만 만나면 호구 잡혀서 소속팀 팬들에게 피는 못속인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 팀 승리 후 감독과 인터뷰를 진행할 때, 매 대답의 시작이 대부분 "글쎄요"이다. 넥센 히어로즈 갤러리에서는 주로 "꼴뚜기 ㄱㅆㅇ" 등의 글로 자축포를 날렸다.

  • 'MBC 히스토리 후'에서 장효조 선수 특집을 했을 때, "형, 뭐가 급해서 그렇게 빨리 갔어?"라는 멘트로 수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은근히 많이 우는 편. 정이 많은 성격임을 알 수 있다. 현대 유니콘스가 없어질 때도 울고, 절친이었던 최동원 사후의 모 다큐에서도 울고,[14] 넥센에서 경질 되었을 때도 울고.

  •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최동원을 매우 각별히 생각한다. 함께 선수협을 만드려다 실패하고 상호간 트레이드로 팀에서 쫓겨나 쓸쓸히 은퇴한 동병상련 관계이기에[15] 늘 최동원을 떠올릴때마다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한다. 또한 최동원이 작고할 당시 김시진은 감독직을 수행하는 와중에도 최동원의 마지막을 함께했고 사후 최동원 관련 인터뷰를 할 때마다 최동원을 떠오르면 눈물이 난다고 할 정도로 그를 애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 한겨레에서 개고기를 주제로 '오피니언 리더' 몇 명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했는데, 프로 스포츠인의 대표 격으로 선정되어 인터뷰를 했었다. 여기 이 기사를 통해 그가 푸들을 키우는 애견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안타깝게도 그 푸들은 2012년 8월 말에 김시진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한때 야구 기자들 사이에서는 경질 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것이 곁을 떠난 푸들 때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참고기사

  • 프로야구매니저가 원년부터 1987년도 시즌까지의 선수카드 업데이트가 되었는데, 김시진의 커리어 하이 시즌인 1985년도 시즌은 당연히 EX카드이며 엄청난 능력치와 구질을 자랑한다. 덕분에 게임 내의 삼성팬들은 환호했으며, 타 팀팬들은 운영진 전체가 사실은 삼빠가 아니냐는 원성을 듣게 만들었는데 이건 마스터 이하 리그에서나 하는 소리고 실제로는 레일융의 하위호환에 가까웠다. 분명 스탯도 좋고 구질은 나쁘지 않지만 갤럭시 이상 리그에서도 안정적으로 1~2점대 평자를 찍는 레일융과 달리 레시진이나 익시진은 3~4점대 롤코를 타는 시즌이 꽤 많았다. 거기에 하필 활동년도까지 겹친탓에 레전드 사용제한이 풀리기 전까지는 레일융이 압도적으로 좋았다. 다만 레시진이 출시 시기가 빨라서 레시진을 가진 사람이 더 많았기에 저런 착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 1958년생 동갑내기인 이만수 前 SK 감독과는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구상고와 한양대를 거쳐 삼성 라이온즈에 이르기까지[16] 무려 15년 가까이 한 팀에서 배터리로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이따금씩 방송에서 김시진이 이만수에 대한 일화를 말하는데 이게 꽤 웃기다. # 선생님 빠따 사건이라던지[17], 손바닥 성냥사건이라던지, 1980년 일본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김시진이 차출됐다가 어깨 부상으로 출국 전날 엔트리에서 빼고 이만수가 대타로 갔다가 병역특례를 받았고 김시진은 그 해 현역으로 입대했다는 에피소드 등이 많다.[18] 그런데 이 배터리는 2014 시즌이 끝나자 무능한 삼성 출신 감독들로 남고 말았다.

  • 이만수의 아내 이신화 여사와는 초등학교 동창인데, 김시진 덕분에 이만수가 연애와 결혼에 성공했다고 봐도 될 정도다.

  • 한대화와 무척 친하다. 출신 지역도 다르고 학교나 프로팀을 거치면서 단 한 번도 같은 팀에서 선수 생활과 코치 시절을 한 적이 없고 심지어 한국시리즈에서 수차례 맞대결한 적군 관계임에도 서로 사이가 좋다. 한대화가 한화 이글스 감독 재직 시 넥센 전에는 꼭 넥센 덕아웃에 찾아와 천연덕스럽게 '꼴뚜기 형'을 찾곤 했다. 서로 아이스크림도 떠먹여 주거나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프로야구판이 학연 등으로 많이 연관되어 있는 것에 비추어 보면 독특한 관계이다.

  • 염경엽 감독에게는 은인일 수 있는 인물. 파벌설 때문에 LG 트윈스를 나와야 했던 그를 불러준 인물이고[19], 그가 감독이 될 때 격려까지 해줬다.[20]

  • 지도자가 된 이후 친정팀 삼성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선동열 감독의 임기완료까지 2군 감독으로 있다가 1군 감독으로 승격되는 조건이었고 계약조건도 좋았지만, 자신이 삼성으로 갈 경우 김시진 사단으로 불리는 코치들의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기에 거절했다고 한다.[21] 또한 기아 타이거즈에서도 투수 코치로 영입 제안을 했으나 이루어지진 않았다.


  • 야구판에서 김용희, 이만수와 더불어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는 야구인 중 한 명이다. 오죽하면 독하지 못해서 감독으로서 자질이 꽝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 그대로 감독으로서는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 2016년 12월 5일 KBS 뉴스 9에서 강정호의 음주운전 사고로 인해 참고인으로 인터뷰하였는데 방송으로는 음성변조되었고 심지어 자막도 '김시진'이 아닌 前 넥센 1군 감독이라고 소개되는 굴욕을 당했다.#[22]

  • 엄청난 불운의 인물로 유명하다.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차출되었으나 어깨부상으로 하차, 병역특례를 받지 못한 것을 시작으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음에도 당시 군인 신분이라 병역특례를 받지 못하고, 한국시리즈에서의 졸전으로 인한 패전에 버금가는 불운으로 인한 패전[23] 횟수에 이로 인한 새가슴 이미지 그리고 선수협 활동으로 강제 트레이드되는데 트레이드로 간 팀은 마침 리빌딩 시기라 기회도 못 받고 은퇴... 게임에서는 이름값에 걸맞지 않게 능력치가 짠 편이기도 하다. 감독으로의 커리어를 보자면 감독이 된 것도 불운이 아닐까 싶다.

  • 1980년에 당한 어깨 부상의 여파로 당초 입단할 예정이었던 포항제철 행이 무산된 후 육군(경리단) 야구팀에 들어갔는데 이 과정에서 신병 훈련 면제라는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전역을 앞두고 프로 입단에 대비한다는 말이 육군 고위층에게 안 좋게 들리면서 혜택을 받은 사실이 들통나 말년병장 때 훈련소에서 굴렀다고.

  • 아들 김재현도 야구를 했었다.[24] 인천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홍익대학교에 진학했지만, 1년만에 야구를 접었다.

  • 농담성 드립이지만 김시진이 2011시즌 꼴찌를 한 덕분에 히어로즈가 1차지명으로 얻은 이득이 쏠쏠했다. 한현희-조상우-임병욱-최원태-주효상-이정후-안우진-박주성-박주홍-장재영 순으로, 이들 모두가 1군 무대를 밟아봤고 한현희 조상우 최원태 이정후 안우진은 팀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25]팬들은 농담성으로 이를 김시진의 유산이라고 부른다.

  •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봉연이 출연해 밝히길, 김시진에게 홈런을 많이 쳐서 미안한 감정이 있다고 하였다. 올스타전에서 MVP급 피칭을 선보이고 있었는데 3점홈런을 때리는 바람에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은 게 미안하다고 했다.

  • 감독으로서 7년이라는 기간 동안 가을야구에 단 한 번도 진출하지 못한 아쉬운 모습을 보였음에도 꾸준히 기회를 부여받음과 동시에 야구인으로서 생활을 지금도 이어간다는 점에서 KBO 계의 진정한 운장, 복장으로 보는 사람들도 꽤나 있다. 사실 KBO 리그에서 감독으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었을 시 타 팀 지도자로 부임받기 힘들고[26], 팀을 이끌어 나가면서 여러 사건사고 및 논란이 커지면 야구인으로서 향후 진로도 상당히 암울한 게 현실인데[27] 현대 유니콘스 최후의 감독, 투자가 적은 넥센 히어로즈의 감독, 프론트 문제가 극심했던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맡았다는 이유로 성적이 아쉬움에도 나름의 정상참작이 되고 있고, 현대 코치 시절의 명성 및 넥센 감독 시절 팀 시스템 재정립 및 박병호 트레이드 성공으로 인하여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나름대로 인정을 받고 있는 셈.[28] 실제로 김시진은 감독으로서 사건사고는 전혀 없었고, 투수코치 시절 준수한 업적을 감안하면 감독으로서의 아쉬운 행보는 감독의 자리에 맞지 않는 여린 심성에서 나온다는 분석이 설득을 얻고 있기에 감독 이외에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활약하는 것이 좋은 선택이라는 평이 많았으며, 롯데 감독 사임 이후 전력분석관 및 경기감독관, KBO 경기운영위원회 위원 등 행정가로써는 호평을 받고 있다.

  • 선수 시절에도 지도자 시절에도 하나같이 팬 서비스가 좋다.[29] 히어로즈 감독 시절에는 "칭찬은 선수들에게, 질책은 저에게 해 주세요."라며 선수들을 감싸는 모습을 보였으나, 팬 서비스에 있어서는 엄격했던 감독. 황재균과 식사를 하는 도중에 팬들이 황재균을 알아보고 싸인을 요청했으나 황재균이 머뭇거리자 그 자리에서 "싸인 안해드리고 뭐하냐? 정신 차려라!"라며 일갈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덕분인지 히어로즈는 김시진 감독이 있을 때부터 2023년 지금까지 선수들의 팬 서비스가 좋은 구단이다.

  • 김시진과 김성갑을 혼동하는 사람도 있었는지 네이버에 김시진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유이 아빠'가 나온 적도 있었다. 네이버는 인물 관련 연관검색어가 폐지되었으므로 이제 옛말이 되었다.

  • 유튜브에 1988년 방송에 출연해서 노래를 불렀던 동영상이 올라와 있다. # 이후 이주일과의 인터뷰에서는 현역 시절 라이벌은 신인 선수들이라고 말했다. [30]

8. 관련 문서[편집]



[1] 49회 졸업생이다.[2] 2023년 3월 17일 타계.[3] 역대 최단기 기록[4] 전 소속 팀 넥센은 김시진을 해고한 다음 해에야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지었고, 2014년에는 코시 진출에 성공하였으나, 우승을 위해 김시진을 모셔왔다는 롯데는 부임 첫해부터 5년간 이어온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기록을 깨버렸다.[5] 한편 볼넷에 관련해서 김시진은 (지금 시점에서도 그렇지만) 매우 관대한 시각을 갖고 있었다. 볼넷은 내주는 것이고, 안타는 당하는 것이라고.. 맞으면 2루타, 3루타, 홈런이 될 수도 있는데 볼넷을 내주면 1루만 내주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이쪽이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지론은 고의사구가 있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적당히 피할 타자는 볼넷으로 피해가는 유연한 플레이를 선보이곤 했으며, 이 점이 두뇌파 투수로서 김시진의 장점이라면 장점이기도 했다.[6] 83년 229.1이닝(PS 기록 없음) - 84년 233.2이닝 - 85년 269.2이닝(PS 기록 없음) - 86년 217.1이닝 - 87년 205이닝[7] 지금도 그렇지만 탈삼진을 잘 잡는 투수가 에이스라는 인식이 당시로서는 매우 만연했다. 가뜩이나 에이스 대접 받는 투수들은 삼진 잡기에 특화된 투수들밖에 없었다는 게... 다만 상술하듯 김시진의 탈삼진 능력이 이들에게 뒤쳐진 건 아니다.[8] 실제 김시진은 당대 에이스 치고는 불펜 등판 빈도가 적은 편이나, 불펜 등판 빈도가 줄어드는 건 커리어하이 바로 다음 해인 1986년 시즌부터 심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커리어 후반기에는 아예 현대 야구의 선발투수 수준으로 불펜 등판 빈도가 적다.[9] 특히, 장효조의 만세 사건이 이 시리즈에서 터진거다.[10] 대표적인 경기가 1984년 한국시리즈 3차전의 부상 투혼 등판. 1986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의 초반 난타 허용, 1987년 한국시리즈 1차전[9]에서의 야수실책 퍼레이드 등 억울하거나 운이 없었던 적도 존재한다.[11] 염경엽과 김시진은 2000년 이전 태평양-현대 시절에는 코치와 선수로, 2001년 은퇴식을 치른 후부터 2006년까지는 코치와 팀 운영진(프런트)으로, 2007년과 2012년에는 감독과 코치 지간이었다. 코치, 감독은 김시진, 선수, 운영진, 코치는 염경엽.[12] 다만 네이버 스포츠 댓글에 빙시진이란 표현을 쓸 경우 10분 이내로 자동 삭제된다.[13] 출루가 이어지면 계속 타석에 들어설 수 있는 타자들과 달리 투수는 아웃세개를 잡으면 이닝이 끝나기 때문에 올스타전 같이 여러명이 등판하는 경기에서는 투수들이 특출난 활약을 보여주기가 어랴운데 그래서 타자 미스터올스타보다 더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다.[14] 절친했던 고교 선배 장효조와 동갑내기 친구 최동원이 일주일 간격으로 모두 세상을 떠났기에 당시 김시진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15] 그나마 김시진은 은퇴 후 바로 지도자가 되었지만 최동원은 2003년 한화코치 부임 전까지 야인생활을 해야했다.[16] 다만 학번으로는 약간 복잡한데 이만수가 대구중학교 시절 1년을 유급하는 바람에 김시진이 학번상으로 한 해 선배다. 김시진이 77학번, 이만수는 78학번이다. 그러나 프로 데뷔는 이만수가 1982년, 김시진이 1983년으로 김시진이 더 늦는데 이는 김시진이 군대에 있었기 때문이다.[17] 정동진이 대구상고 감독으로 취임한 날 선수들이 훈련도중 도망나와 놀다 걸렸고, 정동진 감독은 학생들 앞에 엎드리면서 내 불찰이니 나를 때려라라고 했다. 김시진을 비롯한 다른 선수들은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난처해하고 있었는데, 이만수가 총대를 매고 진짜로 감독을 배트로 때렸다. 그러고 다들 울먹이면서 잘못했다고 감독에게 사과하는 훈훈한 일로 끝났지만, 그 후 이 일화가 이만수가 하극상을 했다는 식으로 잘못 퍼지는 바람에 전국의 대구상고 동문들이 들고 일어나서 이만수, 정동진 감독 등 여러 사람이 일을 수습하느라 애먹었다고 한다.[18] 여기에 더해서 김시진은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육군 경리단 신분으로 참가하고 대회 우승을 하나 군인 신분이기에 다른 멤버들과 달리 병역특례를 받지 못한다.[19] LG에서는 절친인 김기태 감독이 수석코치로 불렀으나 파벌설 때문에 거절했고, 두산에서도 적극적으로 불렀으나 김시진이 부르자 은혜를 갚으려고 돌아갔다고 한다. 기사 참조.[20] 스포츠투나잇의 염경엽 감독 인터뷰 참조.[21] 결국 선동열 이후 실제 1군 감독 자리를 받은건 대구중-경북고 출신으로 삼성을 한결같이 지켜온 프랜차이즈 스타 류중일 수비코치였다. 현재의 삼팬들에게는 김시진 영입이 현실화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보는 중.[22] 강정호가 2009년, 2011년 당시 넥센 소속일때 음주운전 전과가 있었는데 그 때 감독이 김시진이였다.[23] 주로 야수진의 실책 퍼레이드, 부상투혼 등.[24] 야구인 김재현과 동명이인이다.[25] 안우진 빼고는 모두 국가대표까지 해봤고, 안우진도 학폭전력만 아니면 국대 1선발일 것이라는 것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다.[26] 대표적으로 한대화, 이순철은 각각 코치로서의 명성을 인정받아 감독직을 맡은 뒤로 팀의 암흑기에 버금가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여 타 팀 감독으로 부임받지 못해서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는 끝나버렸다. 이후 두 명 모두 코치로서 재부임하였지만, 코치로도 이렇다 할 성과를 딱히 내진 못하고 코치 생활 마무리 후 경기기록관, 해설위원으로 야구인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27] 대표적으로 KBO 역대 최악의 감독에 거론되는 백인천LG 트윈스 감독이었을 당시에는 우승도 했고,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었을 때는 이승엽을 발굴하고 삼성을 성공적으로 리빌딩한 대업적을 기록했음에도 롯데 감독이었을 때는 태업을 일삼는 행동 및 팀 시스템을 박살내어 암흑기 비밀번호의 주범으로 낙인찍혔으며, 롯데 감독 경질 이후 잠깐의 해설 활동을 제외하고는 야구인으로서의 커리어가 다 끝나버렸다.[28] 특히 넥센 감독 시절 선발투수를 어떻게든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특히 잠재력 있는 서건창, 박병호를 1군에 적극 기용하여 2012년부터 2015년까지 홈런왕 장기집권을 달성 및 시대를 대표하는 거포로 자리잡게 한 점을 감안한다면 분명 높게 평가받을 부분이다.[29] 잘생긴 외모 덕분에 그때나 지금이나 인기가 좋았다.[30] 그 당시에는 데이터가 없었기에 치고 올라오니 두려울만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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