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김좌진 친자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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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출생 의혹 및 반론
2.1. 출생관련 공식기록이 상당히 많은 김두한
2.1.1. 김좌진의 가문과 가족의 확고한 인정
2.1.2. 김두한의 출생기록이 모두 조작되었다는 무리한 음모론
2.2. 김두한 사후 20년이 지난 1990년대 와서야 출생의혹이 생긴 이유
2.2.1. 출생 의혹이 1990년대에 생긴 결정적 이유
2.3. 출생의 비밀과는 무관한 책인 김두한 회고록
2.3.1. 김두한 회고록의 여러 가지 오류
2.4. 김두한 회고록으로 출생의 비밀을 추적했던 여러 논의들
2.5. 김을동을 비롯한, 김두한의 후손이 친일파를 옹호했다?
3. 그 외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증거들
4. 김좌진의 또 다른 유족 문제
4.1. 유전자 검사 제의는 김을동이 김좌진 친손녀 맞다는 의미


1. 개요[편집]


김두한이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의 아들, 소위 '장군의 아들'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을 서술한 문서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김두한이 김좌진의 친아들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처음으로 공개 지면을 통해 친자 의혹을 제기했던 사람은 도올 김용옥으로 알려져 있다. 김을동에 따르면, 이 논란은 김용옥이 1990년 신동아에 기고한 글에서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불거졌다고 한다. 김용옥의 1990년 기고문 자체는 세월이 너무 지나 인터넷 상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국립중앙도서관국회도서관에 가면 정기간행물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또한 김용옥은 신동아에 실었던 자신의 칼럼들을 편집하여 <도올세설>이란 제목으로 1990년에 출간한 바가 있으니 이 책을 통해 김용옥의 주장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김을동 인터뷰에서도 김용옥의 발언을 언급하고 있다.

김용옥 본인이 작성한 글은, 그저 "개성출신 고아거짓말한 것이다"라는 정도의 수준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사실은, 같은 해인 1990년 발표된 영화 장군의 아들의 시나리오 원안을 쓴 사람이 바로 김용옥이다. 이에 김용옥 자신이 장군의 아들 시나리오의 김두한이라는 인물은 영화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가감한 영화적 픽션이라고 밝히기는 했다.

어쨌거나 이것이 불씨가 된 것은 사실이고, 이후 제법 논의가 되면서 이제 논란은 거의 수그러들었다.


2. 출생 의혹 및 반론[편집]



2.1. 출생관련 공식기록이 상당히 많은 김두한[편집]


김좌진의 배우자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3명이다
  1. 오숙근: 정실부인
  2. 나혜국: 자녀 김철한,김석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독립운동 동지로써 결혼하였다.
  1. 김계월: 김두한의 어머니.

김좌진김두한의 부자관계에 대한 근거는 일제 강점기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우 많다.

김두한은 21세기 기준으로 무려 100년 전에 출생했던 인물이다. 김두한과 비슷한 시기에 출생했던 인물 중에 어릴 적부터 신문지상이나 일제 공식문서에 오르내리거나 공식 기록이 보존되어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통 사람은 가족이 자식으로 인정하고, 양반은 문중의 족보에 오르며 혈통에 대한 공식적인 증거가 된다. 그런데 김두한은 김좌진의 남은 두 명의 부인인 오숙근, 나혜국의 인정을 받은데다가, 수많은 언론과 일제의 공문서, 안동 김씨 문중의 족보등에서도 공식적으로 김두한을 인정했다.

즉, 동시대의 대다수 사람들보다 훨씬 혈통의 근거가 확실한 사람이 김두한인 것이다.

김두한은 1918년생이고 대략 1930년 내외에 일제강점기 여러 언론에 의해서 김좌진의 아들로 보도된다. 김좌진과 함께 만주에 거주하던 김좌진 모친과 정실부인 오숙근이 귀국했고, 김좌진의 사망 이후,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나혜국 여사가 귀국하여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으면서 힘들게 생활했다. 이에 정실부인 오숙근은 자주 왕래를 했고, 김두한은 오숙근과 나혜국 여사와 왕래했다. 일제시절에 안동 김씨 가문이 김두한을 안동 김씨로 인정했으며, 이에 관한 기사도 남아있다.

김좌진의 두 명의 정실부인 즉, 오숙근과 나혜국에 의해서, 딸 김석철, 아들 김철한과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호적에 올림으로써 이 세 명의 자녀는 확실히 김좌진의 자녀로 인정받았다. 게다가 일본제국 경찰에서도 김좌진의 자식으로 기록되어 요주의 인물이 된다. 이게 모두 해방 전의 일이다. 또, 해방 이후에 김두한의 딸 김을동이 김좌진의 어머니와 본처인 오숙근 여사와 같이 찍은 사진도 현재 존재한다.

결정적으로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요주의 인물로, 감시대상이었다는 일제의 공식문서가 남아있으며, 그 문서에는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이라고 명시되었다.

정리하면
  1. 안동 김씨 문중의 족보에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로 올라감
  2. 호적에도 김좌진의 아들로 기록
  3. 김좌진의 정실부인과 다른 부인들이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하고 일제시대와 김두한 사망이후 1980년대까지도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임을 증언. 1990년대에는 김좌진의 여러 부인 가족들과 김두한 가족들이 한 가족으로 방송 다큐에 출연함.[1]
  4. 일제시대 김좌진 아들 김두한을 요주의 인물로 지정하고 감시했던 일제시대 공식문서
  5. 김두한이 어렸을 때 김좌진 아들이라며 행적을 보도한 당시의 각종 신문기사
  6. 해방이후 김구와 청산리 동지인 이범석 등의 독립운동 동지들이 김두한을 김좌진 아들로 발언. [2]

등 굉장히 많은 증거가 있다.

1990년 이후에 생긴 김두한 출생 음모론은 보통 <김두한 회고록 2종>에 근거하는데. 이 회고록은 애초에 출생의 증거로 쓰인적이 없다. 그 책은 1960년대 이후에 김두한이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해서 한 말 등을 기록해서 출간된 책일뿐이며, 김두한은 1930년대에 이미 김좌진의 아들로 확고하게 출생을 인정받았기에 회고록은 김두한 자신의 출생을 증명하려는 목적으로 씌여진 책이 아니다.


2.1.1. 김좌진의 가문과 가족의 확고한 인정[편집]


김용옥이 김두한 음모론을 주장할 당시 주장은 ''고아에 거지인 김두한이 모두를 속였다''라고 주장했다. 즉, 음모론의 주장대로면, 거지 꼬마인 김두한이 뜬금 나타나서 그럴듯한 말 솜씨로 안동 김씨 가문을 속여넘기고, 김좌진과 같이 살던 두 부인 오숙근 나혜국까지 속여넘겨서, 김좌진 아들의 지위를 획득했다는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안동 김씨의 족보와 호적에 올랐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게다가 이후 신문기자들과 조선총독부 공식문서까지도 모두 조작할 능력이 있을수가 없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보면 무엇인가 자식이라는 근거가 있었다고 보는게 더 현실적일 것이다. [3] 우리에겐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두한의 자식이라는 확실한 근거를 김두한의 모친과 부인들에게 제시했었을것으로 보는게 더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런 자세한 뒷이야기까지 알려져 있지는 않다. 이 문서 앞부분에서도 잘 나오지만, 김두한이 김좌진의 친자라는 객관적 증거는 20세기 초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많다. 하지만, 세세한 뒷 이야기까지 모두 남겨져있지는 않다. 그것이 당연한것이 김두한은 무려 100년전에 출생한 인물이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으며, 1990년대까지 김두한의 출생논란 자체가 없었으니 그런 시시콜콜한 내용이 자료로 남겨져있을 이유가 없다.

사실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받아들인 안동김씨 문중이나 김좌진 모친, 그리고 오숙근 나혜국 등의 김좌진의 부인등은 그 뒷이야기를 자세히 말해줄수있는 인물들이다. 만약 그들의 건재할때 이런 음모론이 나왔다면, 나혜국 여사가 "그 당시 김두한이란 아이가 이런 저런 이유로 남편 김좌진의 아이라는게 확실해서 받아들였다"같은 뒷이야기까지 포함한 자세한 대답이 나왔을텐데, 사실 김두한의 출생의 거짓이라는 음모론은 90년대 이후에 나왔고, 오숙근 나혜국등 가족이나, 김구 홍범도 등의 독립운동 동지들이 모두 노쇠하거나 사망한 이후에 나왔기때문에 뒷이야기를 자세히 말하면서 반박해줄 인물들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김좌진은 일본경찰에 쫓기는 과정에서 김계월과 3년간 동거하고 임신이후 중국 도피를 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중국에 있을때 김좌진의 모친과 본부인인 오숙근도 중국으로 출국했고, 이후 현지에서 결혼한 나혜국 여사도 있었다. 이들은 김두한 출생(1918년) 이후에도 중국에서 김좌진과 같이 10년 이상 생활하다가 김좌진 사망(1930년) 전후에 한양에 와서 정착한다. 이후 한양에서 김두한을 김좌진 자식으로 인정하고 교류하면서 이후 족보와 호적에 올리게 된다. 김두한의 사망 이후에도 김두한 후손들과 계속 교류하는 내용이 1989년 MBC방송다큐에도 나온다.

김두한의 모친과 부인 두명은 확고하게 김두한의 출생을 믿고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김두한의 출생을 믿는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추측해 볼수있는 하나는 김두한의 회고록에도 나오고, 신문기사에도 나오는 어린 김두한이 중국으로 김좌진을 찾아갔다.는 내용이다. 즉, 김두한이 중국에서 김좌진을 만났다면 현지에서 김좌진의 부인도 같이 만났거나 적어도 김두한이 찾아온 것 자체는 알 수 있으므로 합리적 설명이 된다.

김두한이 중국으로 김좌진을 찾아간것 자체가 사실아니라해도 여전히 중국에 있던 김좌진과 조선에 있던 김두한의 모친이 연락은 가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좌진의 한양에 있던 집안 사람들과 김좌진은 중국으로 가기전부터 편지 등 연락 자체는 어느정도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연락이 전해졌기에 김좌진의 본처와 모친이 한양을 떠나서 중국까지 김좌진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김좌진의 아이를 임신한 김계월이 남자아이를 낳았다."는 등의 소식을 전달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결과 자신의 가족에게 자신의 혼외자의 이야기를 했을 수 있다.

만약 김좌진이 10년이 넘는 중국 생활 동안 모친과 두 부인에게 김계월이 임신한 자신의 아이에 대한 정보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현실적으로 두 부인이 중국에서 귀국 이후 뜬금없이 김두한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김두한이 중국으로 가서 김좌진 만났다는 식의 주장은 논외로 하더래도[4] 적어도 김좌진 사망전 단 한번도 '김계월에게선 본 아들'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면, 귀국한 가족앞에, 뜬금 나타난 거지 아이 김두한이 아무리 언변이 좋아도, "고인이 중국생활 10년동안 단 한번도 조선에 남겨놓은 사생아가 있다는 말씀은 하신적이 없다"며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가능하다.

어쨌거나 2023년 현 시점에선 자세한 이유를 몰라도, 결과적으로 적어도 김좌진의 가족이 확고하게 김두한의 출생을 믿었다는 사실 하나는 확실하다.

나혜국 여사는 1986년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김좌진의 자식은 김두한 김철한 둘 뿐이다"라고 확고하게 말했고, 이후 1989년 MBC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에서 나혜국 여사 집에 김두한 아들이 김경민씨가 와서 김좌진을 추모했다는걸 고려하면, 적어도 김좌진의 가족들은 김두한의 출생을 확고하게 받아들인것이다.

1989년 방송됐던 1989년 MBC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에 이 모습이 잘 나온다.
1989년 MBC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 앞부분 여기서 김두한의 자녀인 배다른 남매인 김경민씨와 김을동이 나온다.
1989년 MBC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 중간부분 김두한 아들 김경민이, 나혜국 여사 집에 찾아가서, 김철한과 나혜국 여사를 만나 대화하는 장면

음모론자들은 나혜국 여사의 가족이 김두한의 출생 음모론에 방해가 되자, 나혜국 여사까지도 김좌진 부인이 아닌 가짜이며 일제의 밀정이라는 식으로 비난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나혜국 여사는 22세에 김좌진과 결혼할때 이미 오항선등과 같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고, 이후 오항선은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을 정도로 확실한 독립운동가 맞다. 오항선은 김좌진 장군의 부관인 유창덕과 혼인했고, 이후 2005년까지 생존하셨으므로, 오항선과 함께 독립운동한 나혜국 여사의 진위까지 의심하는건 무리한 음모론이 맞다. 김좌진이 중국에서 독립운동할 당시 동지들이 대한민국에 많이 귀국했고, 특히 초대 국방부 장관인 이범석도 있는데, 나혜국 여사가 김좌진의 중국에서의 부인이 아닌 가짜라면 당장 들통났을것이다.


2.1.2. 김두한의 출생기록이 모두 조작되었다는 무리한 음모론[편집]


보통의 경우 김두한의 출생관련 기록이 다른 사람에 비해서 굉장히 많기때문에 출생관련 음모론이 없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음모론이 생겼으므로, 음모론중에는 김두한의 출생의 자료가 엉터리라고 우기려는 목적의 무리한 주장이 많다. 그래서 음모론에서는 아애 김두한 출생자료 자체가 조작되었다고 무리한 주장을 하는것이다.

그렇지만, 김두한이 뭐가 대단해서 이렇게 광범위한 조작을 통해서 김두한의 출생을 조작한 것일까에 대한 합당한 대답은 없다. 음모론의 주장을 보자.

  • 고아에 거지인 김두한이 모두를 속인것이다
김용옥이 1990년대에 주장한 이야기다. 물론 굉장히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일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속였는지에 대한 주장이 하나도 없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안동김씨 문중과 오숙근 등 김좌진의 부인들을 속여서 안동김씨의 족보와 호적에 올랐다는 것까지도 굉장히 힘든 일이다.

김좌진의 부인인 오숙근, 나혜국 여사들은 김두한 출생(1918년) 이후에도 김좌진과 같이 생활하다가 김좌진 사망 이후에 한양에 와서 정착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숙근 여사는 1920년대에 한양에 왔고, 나혜국 여사는 1930년대에 한양으로 온다. 이후 한양에서 김두한과 교류하고 김두한을 김좌진의 자식으로 인정해서 족보와 호적에 올리게 된다. 음모론의 주장대로면, 안동 김씨와 가족의 인정을 받은 것에 더해서, 여러 신문사의 기자 그리고 일본 경찰과 조선총독부까지 모두 속여넘겼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사기능력이지만, 현실에서 김두한은 언변이 좋긴 했으나 한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등 일자무식으로 이며 치밀한 성격이 아닌 시원시원하며 다혈질인 남성이었다고 알려진다.

김용옥은 장군의 아들 시나리오를 썼는데 이 과정에서 <김두한 회고록>을 많이 참고했다고 알려졌다. 김두한 회고록은 김두한 관련한 각종 영화, 소설 등 2차창작에 많은 영향을 끼친 책이며, 이 책의 내용이 실제 역사와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는게 사실이나, 이 책은 김두한의 출생과는 무관한 책이다.[5]. 결국 <김두한 회고록>을 근거로 김두한의 출생음모론을 제기했다면 굉장히 어이없는 상황인것이다.

  • 일제가 김좌진의 명성을 더럽히려고 조작했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알린 김좌진의 명성을 더럽히기 위해서 1. 부인 외에 기생을 첩으로 만든 한량이다. 2. 아들이 조폭이 되었다. 등의 더러운 이미지를 씌운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엉터리인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다.

  1. 노력이 엄청나게 든다
현실적으로 꼬마거지 김두한의 입을 막아야하고, 여러 종류의 신문사의 기사를 완벽하게 컨트롤하려면, 안동 김씨와 김좌진 부인들과 독립운동동지들의 입도 틀어막아야한다. 그리고 일제시대 한 언론이 아닌 여러 언론과 지식인들의 책에도 언급될 정도여서 일제가 일일이 조작하기 힘들다. 특히 안동김씨 문중이나 김구선생, 이범석 처럼 독립운동 동지들까지 모두 일제에 협박당했거나 속아넘어갔다는건 너무 무리한 주장이다.

2. 당시 양반이 기생에게 낳은 아들이 오점일까??
그 당시에는 기생출신 첩을 가진것이 양반가의 흠이라고 할수없다. 이미 사망한 김좌진이 사생아가 있다는 크게 오점으로 볼수없는 내용조작을 위해 들이는 노력은 과도하다.

3. 노력에 비해 소득이 적고 부작용은 크다
이런 작전 자체가 일제에게도 굉장히 부담스런 작전이 아닐 수 없다. 이게 들통나면 일제도 엄청난 이미지 하락일 수밖에 없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하던 일제가 이런 무리한 작전을 굳이 하다가 들통나면 큰 부작용이 생긴다.

4. 김좌진에게만 굳이 이런 조작을
사실 독립운동가중에서 김좌진이 청산리 대첩으로 대중적으로 유명했던건 사실이지만, 안중근, 윤봉길, 김구, 김원봉 등 일제가 미워하던 거물 독립운동가들은 많다. 그 가운데 안중근 의사의 아들처럼 전향해서 일제의 선전에 이용된 사례도 있지만 가짜아들 사례는 없다. 독립운동가가 한두명도 아닌데, 왜 유독 김좌진에게 가짜 아들 만들기를 했을까?

5. 12살 김두한이 나중에 조폭두목이 될것을 예견?
어린 김두한이 나중에 커서 조폭이 될지 그걸 어떻게 미리 알고 일제가 조작했다는 것일까? 일제가 김두한을 조폭으로 밀어준 것도 아니다. 김두한의 무력과 주먹 조직관리능력자체는 해방이후에도 확인될 정도로 확실했 기때문에, 김두한이 자라서 그 정도의 무력과 조직관리 능력을 가질것을 예언이라도 했다는 것일까? 이용하고 싶다면 오히려 일본군에 입대시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을 건데.

6. 주연배우가 12살 꼬마 ?
물론 김좌진 장군의 가짜 아들이 되고 싶은 김두한을 일본당국이 발탁해서, 서로 협의하에 작전을 진행했다고 하면 조금이라도 가능성은 생긴다. 하지만 이 나이 거지 김두한이 열정적으로 연기해서, 안동 김씨와 김두한 가족과 신문기자들까지 속여넘기고 들통날 가능성도 없다고 일제가 믿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어리고 말이 안된다.

  • 조폭 김두한의 협박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김두한이 거물급 조폭이 된 후 안동 김씨 문중이나 김좌진의 처를 협박해서 족보에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 자체가 김두한이 12살이며, 김두한이 조폭이 된것은 성장하고 난 이후이다. 즉, 조폭 김두한의 무력과는 무관하게 어릴때 이미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받았으니 이미 이 대목에서 엉터리인 셈이다.

김을동이 오숙근 나혜술과 찍은 사진의 경우도 음모론자에 의하면 김두한의 무력에 굴복해서 어쩔 수 없이 찍은 사진이라고 소설을 사실처럼 말하는 인터넷 자료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김두한이 1990년대에 이후에 자기가 김좌진 아들이 아니라는 음모론이 생길 것을 미리 예언하고 그 증거를 남겼다는 말인 셈이다. 김두한은 그 당시 한국 사회에서 김좌진 아들로서 지위가 확고했기 때문에 힘으로 강제로 자기 딸을 데리고 사진을 찍어 증거로 남길 이유가 없었다. 김두한은 1930년대 이후로 생전에 단 한 번도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심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런 음모론이 생긴 건 1990년대 도올 김용옥이 거의 시초나 마찬가지인데, 자기 딸 김을동이 자기 사후에 김좌진 장군 자손 아니라는 의심받을까봐 증거를 남긴 거라는 식이면 너무 억지 주장이다.

또 나혜국 여사는 김두한 사후인 1987년에도 김좌진의 아들은 김두한, 김철한 둘 뿐이라고 언론에 인터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끔히 반박된다. 김두한의 협박설이 황당한 이유중의 하나가 나혜국 여사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다가 김좌진과 결혼한 대단한 여장부였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국내 귀국 후 일제에 감시당하며 살던 분이다. 안동 김씨 문중 또한 만만치 않다.이미 김두한 사후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도 나혜국 여사 자녀들과 김두한의 자손들이 다같이 다큐멘터리 등에도 나와서 김좌진을 추모했던 적이 있다. 이미 죽은 김두한이 무서워서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

게다가 청산리 대첩 당시 김좌진의 부하였던 이범석이나 김구 등의 거물들도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김두한이 김좌진 유족을 힘으로 윽박질러서 호적을 얻었다는 황당한 주장이 무색한 이유이다. 김두한이 만약 김좌진 장군의 유족을 협박하는 상황이었으면 이범석 등 당시 독립군계열 군부나 정치거물들이 가만히 두고볼 리 없다. 김두한이 우익폭력계에서 쓸만한 행동대장인건 사실이지만 특별히 정치적으로 키워줄만한 정치새싹도 아닌데, 굳이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세탁하는게 이범석 입장에서는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즉 김두한은 1930년 정도에 김좌진의 아들로 확실하게 인정받았고, 이후 김좌진의 호적에 오름으로써 아무리 늦춰 잡아도 해방 직후에는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받았다.

김두한을 김좌진 아들로 받아들인 인물중에 가장 최근까지 생존한 사람은 김좌진의 정실 자식인 김철한의 친모 나혜국이다.
나혜국의 공식 인터뷰중 가장 마지막이 1986년도 정도인데, 나혜국은 신문인터뷰에 김좌진의 자녀는 김두한과 김철한 뿐이라고 발언했다. 이는 김두한이 김좌진의 자식이냐 아니냐는 문제로 발언한건 아니다. 김좌진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제3의 아들이 나타났을 때 다른 아들이 없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에 김두한을 김좌진의 자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예 없었을 때니까.


2.2. 김두한 사후 20년이 지난 1990년대 와서야 출생의혹이 생긴 이유[편집]


  • 1930년대 이후
사실 실제로 출생의혹이 제대로 나오려면 이 시기였어야한다. 왜냐하면 김좌진 사후에 국내 언론에서 김좌진의 사망기사를 내면서 혼외자가 한국에 있다는 내용을 기사화했기때문이다.
즉, 거지 고아가 왜 김좌진의 아들이냐라는 것을 의문을 가지는것이 당연하고, 특히 안동김씨 내부에서 더 민감했을것이고, 기자들도 아무 생각없이 김두한을 김좌진 아들로 소개하지 않았을것이다.

즉, 1930년대에 김두한에 대한 기사나 나왔다면, 그 기사를 쓴 기자도 사실 확인을 했을것이고, 만약에 안동김씨 내부에서 의혹인 나온다거 의심스러운점이 많다면, 김두한을 굳이 김좌진의 아들로 소개하는 기사를 쓰지 않거나, 의혹기사를 썼을것이다.

김좌진을 제외한 모든 당사자가 멀쩡히 살아있던 그 시기에 김두한출생에 대한 어떠한 의혹이 나오지 않는다는것은 당시에 어떤 식으로든 김두한의 출생에 대한 확신을 가질만한 근거가 있었다는것으로 볼수있다.

사실 "수표교 밑 거지따위가 김좌진 장군님의 아들이라니 !!!"라는 주장은 1930년대에도 김두한이 조명될때에도 충분히 제기될 만한 주장임에도, 1930년대 이후 김두한의 생전에는 단 한번도 출생 의혹이 크게 제기되지 않은 것이다. 누가봐도 의문을 제기하고도 남을 상황이지만, 당시에 공개적으로 출생의혹이 크게 제기되지 않은 것은 합당할 정도로 출생에 대한 여러 근거가 확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물론 당시 신문기자들이나, 안동김씨 가문, 그리고 김좌진의 모친과 두 부인 모두 어떤 식으로든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인지 아닌지 자세히 조명해보고 이후에 확고하게 받아들였을 것으로 볼수있다. 왜냐하면 안동김씨 가문이 뜬금없이 거지아이가 와서 나 죽은 김좌진 아들이요 주장하다고 다 받아주는 그런 만만한 가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각종 신문 언론등에서 김좌진의 아들임을 조명했었고, 일제시대에도 경찰이 독립운동가 자녀라는 이유로 특별감시했던 자료가 있고, 해방이후도 김구 이범석등 독립운동 거물들이 공개적으로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이라며 비호했다. 안동김씨 문중에서도 족보와 호적에 이름이 올라있고, 김좌진의 모친과 김좌진의 생존한 두 부인이 모두 김두한과 그 딸 김을동 등과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결론적으로 공식적으로도 다들 인정하고, 가족간의 관계도 서로 잘 지내는데, 제 3자가 뜬금 나서서 "김두한이는 김좌진 아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려면 뭔가 확고한 증거가 있어야하는것이다. 하지만, 2023년 현재까지도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한 경우는 단한번도 없다. 1990년 이전에는 하다못해 '김두한의 진짜 친아버지가 나타났다'거나 하는 등의 애매한 증거라도 제시한 경우가 없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 김두한 출생 음모론의 거의 유일한 근거인 '김두한 회고록'은 1960년대와서야 만들어졌다. 사실 이 책은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로 인정받은 1930년에는 아애 존재하지도 않았던 책이므로 1930년대에 이 책을 근거로 음모론을 펼치기는 불가능했다.

  • 1960년대 김두한 회고록 이후
사실 출생의혹의 거의 단 하나의 근거가 김두한 회고록이므로 이 책 출간이후에 김두한 출생의 음모론이 많이 생겼을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근데 놀랍게도 이 책이 출간된 이후에도 김두한의 출생 음모론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사실 김두한 회고록을 근거로 1990년대 이후 2023년까지도 음모론이 퍼지고 있으므로 왜 막 출간되었을때는 음모론이 왜 안 생겼을까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수는 있다.

사실 90년대 이후로 나타난 출생의혹도 무슨 확고한 증거를 제시했다기보다 대부분 '김두한 회고록' 내부의 모순점을 지적한게 많고, "김두한 회고록이 엉터리인게 김두한 출생이 엉터리의 근거다"라는 억지 결론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 회고록의 대부분의 내용이 김두한이 일제시대 조폭으로 활동하고 독립운동 몰래 도와주고, 해방이후 우익 폭력을 휘두른 자화자찬인데, 이런 조폭 정치깡패 내용도 상당히 내용 오류가 많다는 점은 그 누구도 지적하지 않는다.

"회고록의 내용중 출생관련 오류가 많으니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주장대로라면, "회고록 중 조폭, 정치깡패 내용이 오류가 많으니 김두한은 조폭도 아니었고, 정치깡패도 아니었다"라고 주장해야하는데 그 누구도 그런 주장은 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김두한 회고록이 그렇게 김두한 출생의 핵심적인 근거라면, 왜 출판이후 20~30년이 되어서야 이 책을 근거로 음모론이 생겼을까를 생각할수있다.


2.2.1. 출생 의혹이 1990년대에 생긴 결정적 이유[편집]


원래 김두한은 1960년대 이후로 관심에서 밀려난 사람이었으며, 1972년에 사망했기때문에 이후로 김두한에 대한 관심자체가 사라졌다. 물론 간간히 김두한 관련 영화가 나오긴했지만 이후 출생 음모론이 1990년에 와서 널리 퍼질 이유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갑자기 1990년대에 김두한 출생 음모론이 생긴다.

그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인물들이 90년대를 기준으로 모두 사망했기 때문. 마지막까지 생존해있던 나혜국 여사마저 1992년 노환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김두한의 출생에 관련된 직접 당사자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반박할 이들이 사라진 음모론이 설 자리가 생긴 것이다.

김좌진과 직접적으로 많은 관련이 있으면서, 김두한의 출생과 관련해서 김두한을 지지하던, 이범석 등 김좌진 독립운동 동지와 안동김씨 가문에서 관련인사들, 그리고 김좌진의 두 부인중에서 마지막까지 생존한 분은 김좌진이 중국에서 결혼했던 나혜국 여사이다. 나혜국 여사는 1986년 신문 인터뷰[6] 이후 노쇠해서 결국 1992년 사망하셨는데. 1990년에 김용옥이 김두한의 출생의 의문 발언을 한다. 그러나 이미 병석에 누운 나혜국 여사가 공식 대응을 하지 못했고, 이후 나혜국 여사가 사망이후에는 대응할 사람이 없어지게 된다.

이렇게 제기된 의문을 초기 진압할 권위와 명분을 가진 인물들이 노쇠하거나 사망이후에는 이런 음모론이 계속 살아남은 것이다.

물론 김용옥의 음모론이 나온 이유도 김용옥이 장군의 아들 시나리오를 쓸때 '김두한의 회고록'을 읽고 그 내용이 엉터리가 많은 부분을 보고 김두한의 출생이 엉터리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김두한의 회고록은 출생인정과 무관한 글이기 때문에 이걸 근거로 음모론이 나왔다면 좀 어처구니 없는 상황일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실 김두한 회고록이 출간되고 이 회고록 자체가 꽤 많이 팔렸고, 게다가 이걸 기반으로 한 많은 김두한 영화등이 1970년대 이후 제작되고 꽤 히트했으므로, 김두한은 사실 대한민국 해방이후 항상 유명인사였다. 즉, 1990년대 장군의 아들 이후로 갑자기 유명인사가 된게 아니다. [* 해방이후로 서울 종로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될정도의 유명인사에 김구선생이나 이범석 초대 국무총리가 직접 거론할 정도의 유명인사였다. 게다가 박정희 시절에는 사카린 사건때 국회에 똥을 투척하면서 또 유명해졌기도 하고, 그 정도 유명세였기에 라디오 생방에 자기 자서전식으로 인터뷰할 기회를 얻고, 회고록인 책으로도 만들어진것이다. 김두한 외고록이후 변강쇠로 유명한 이대근이 김두한 역할을 자주 맡으려 1970~80년대까지 김두한 영화가 많이 제작되었고, 1990년대 이후로 장군의 아들이 빅히트하면서 계속 유명세를 이어갔고 21세기 이후로도 [[무풍지대] [[왕초]] [[야인시대]]등 김두한이 출연하는 유명한 드라마들이 제작되었다.]

이런 유명세에도 출생의 음모론이 아애 전무했던것은 당시는 김두한 출생관련 인물들이 다수가 생존해있던 이유가 크고, 1990년대 들어오면서 갑자기 김용옥에서 비롯된 김두한 출생 음모론이 크게 퍼진것이고, 그 시기가 나혜국 여사의 질병,사망시점과 일치하는것을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것이다.


2.3. 출생의 비밀과는 무관한 책인 김두한 회고록[편집]


김용옥이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식의 음모론이 시작에 기여했다면, 널리 퍼지게 만들고 인터넷 세상에 각종 사이트에 그런 음모론이 퍼지게 만든 주역은 첫번째는 김두한 회고록이며, 21세기에 널리 퍼진 이유는 김을동의 영향이 크다. 애초에 김용옥이 장군의 아들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것이 김두한의 회고록이었고, 그 회고록의 여러 오류를 지적하면서 출생 음모론이 나온거라서, 결국은 90년대에 시작한 김두한 출생 음모론의 출발전이 회고록이라고 보는게 맞다.

김두한이 뒷세계에서는 거물급이었고 비록 한국노총 위원장과 국회의원직을 역임했다고는 하지만, 정계 거물급 인사로 크지는 못 했던지라 역사적으로 족적이 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도 김두한의 관련 행적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거의 없고, 일종의 가십거리 취급을 받았다.

따라서 김두한에 대한 저작물이나 음모론은 판타지에 가까운 픽션이 대부분인데, 이런 픽션의 근거는 상당수가 김두한의 회고록에 근거한다. 김두한의 회고록은 1963년에 출간된 자서전 "피로 물들인 건국전야", 1969년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노변야화 - 김두한 편" 이 있다. 문제는 둘 다 그 내용의 진위여부가 의심스럽고 믿기 힘들다는 점이다. 사실상 픽션으로 보는 게 맞다.[7]

김두한의 라디오 생방송 녹음본이 여전히 보관되어있고, 유튜브에서 일부 올라와있다. 김두한 육성을 들어보면 "남자는 담벽이에요. 내가 담력이 강해 간때기가 강철같이 겁이 없어애지, 겁많으면 안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담력 있고, 용맹하고 날래고 그러니까 무적이죠. 그러니까 싸움을 잘하는 사람한테는 당수고 권투고 레슬링이고 상대가 안 돼요. 중국 영화 휙휙 나는것처럼 난 한번 날면 20~30명씩 때렸거든요." 또 다른 김두한 육성을 들어보면 "구마적이란 사람이 있었고, 신마적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힘이 쎈가 하면 말이지 (생략) 자동차가 빵구나면 왼손으로 자동차를 들고 빵꾸를 떼우고 내려놔요.(생략) 자기보다 훌륭하고 쎈 사람을 때려야지 아침밥도 못 먹는 아이를 때리고 말이야. 내가 너를 때려야겠다. (생략) 휙휙 뜨면서 안면을 내지르니."

사실 이 책이 믿을 만하지도 못한데 어떻게 이 책을 근거로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고 주장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한다면 충분히 제기할 만한 의문처럼 보일 여지는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이런 주장 자체가 무의미한것은 회고록은 김두한 출생의 근거와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 1930년대: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임을 인정받은 시기
  • 1940~50년대: 김두한이 조직폭력배와 정치깡패로 활동하던 시기
  • 1963,1969년: 2회의 김두한 회고록 출간시기
  • 1972년: 김두한이 중앙정보부 고문(1966년)이후 건강악화 이후 김두한 사망(1972년)
김두한의 출생은 1930년에 이미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받았고. 김두한의 출생의 근거는 신문, 족보, 호적 등이지, 저 회고록은 어떠한 출생의 근거도 된적 없기 때문에, 저 회고록이 엉터리여도 김두한의 출생이 부정되지않는다.

애초에 회고록의 주된 부분이 김두한의 조폭활동과 정치깡패활동을 다룬 것이고 이 내용은 대체적으로 엉터리와 과장이 많다. 하지만 그 이유 때문에 회고록에 김두한의 조폭활동 정치깡패 내용이 엉터리이므로 김두한의 조폭활동과 정치깡패 활동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없다. 김두한의 회고록에 근거한 낭만주먹으로 미화되는 당시의 조폭활동에 과장은 있을 수 있어도, 김두한이 조폭인거 자체는 회고록 이전부터 신문등 언론포함 여러 자료로 인정되었던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회고록에 김두한이 출생관련 내용이 틀린게 많아도, 그것으로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아니라고 부정하는 근거로 삼기는 어렵다.


2.3.1. 김두한 회고록의 여러 가지 오류[편집]


김두한 회고록의 핵심적인 내용은, 일제강점기 조폭활동과 해방 이후 정치관련 활동이다. 여기서 김두한은 자신을 굉장히 미화한다. 스스로를 일본에 대항하는 협객으로 미화하는데, 특히 조폭활동하면서 몰래 독립운동을 하고 일제 시설을 폭파하는 등 활동을 했다거나, 해방 이후에 일어난 우익폭력 사건을 빨갱이를 대항하는 영웅으로 미화한다거나 등의 과대포장이 많다. 또 김두한 출생관련해서도 구석구석 미화와 오류가 있다. 김좌진이 사망했을 당시 김두한은 불과 12살 전후밖에 되지 않았으며, 김두한 회고록에 따르면 아버지를 만나본 것은 단 한 번뿐이니 애매한 구석이 상당수 존재할 수밖에 없기도하다. 무엇보다도 당시 김두한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제대로 된 내용을 기억할 리가 만무하며, 친부 논란을 떠나서 김좌진을 만났다는 것이 김두한 특유의 허세, 허풍일 가능성도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

이로 인해 김두한의 회고는 세부적인 면에서 사실과 다른 점들이 상당 부분 존재한다. 심지어 김두한 본인조차도 이전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이야기한 경우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김두한은 청산리 대첩 때 자신이 7살이라고 했고 11살 되던 해에 아버지 김좌진이 죽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김두한은 1918년 생이고, 청산리 대첩은 1920년에 있었으며, 김좌진은 1930년에 죽었으므로 사실 관계가 엉망진창이다.

그렇다고 하여 회고록 자체가 사실 관계가 엉터리이고, 그럼에도 이 회고록을 근거로 김두한의 정치깡패활동은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는것이다. 마찬가지로 회고록을 근거로 김두한의 출생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는것도 코미디이다. 게다가 조직폭력배 활동에 관한 내용이 엉터리인것은, 자신을 과대포장하려는 김두한의 의도로 보여서 나쁜 의도라고 판단할수밖에 없지만, 출생관련해서는 어쩔수 없는 측면도 있다.

무슨 이야긴가하면, 회고록이라고 해서 많은 자료를 수집해서 정밀하게 말한것도 아니고, 라디오 생방송에 초대받은 김두한이 즉석에서 과거 자기 이야기를 자랑삼아 떠들어댄것에 불과하고, 그것을 책으로 출판한게 회고록이기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얼굴도 못 본 아버지가 죽은 이야기를 50살 내외에 하는데 이게 몇 살 때 일인지 제대로 기억한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라고 판단할 수있다.[8] 사실 21세기 기준으로 50세가 많은 나이 아니지만, 당시는 노인에 가까웠다. 게다가 김두한의 사망이 1972년이다. 회고록은 1963년, 1969년에 출간되었다. 게다가 사카린 밀수 사건 당시 정의감에 찬 김두한이 국회에 오물투척하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당하고 폐인이 되어서 풀려난것이 1966년이다.

김두한의 자서전 '피로물들인 건국전야'는 절판되었다가 2003년에 '김두한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새로운 자서전에서는 유족들에 의해 1958년 이후에 김두한의 행적과 사진자료들이 부록으로 추가되었는데, 이 부록중 김두한의 약력이 소개된 253페이지에 김두한과 김좌진이 상봉한 시기는 청산리 전투가 끝난지 4년후라고 정정하여 기록되어 있다. 기존의 논란을 의식하여 수정, 보강한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기억해야 할 것은 김두한이 자기 회고록을 정확히 써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 김두한 회고록은 역사논문이 아니었고, 김두한도 글을 잘 못읽던 사람이라 자료하나하나 검토해서 만들어지기 힘들 상황이었다. 특히 라디오는 즉석에서 거의 기억에 의존해 증언한 것이며, 핵심내용은 일제강점기 조폭생활, 해방 이후 우익폭력활동을 미화, 자기합리화한 내용이다.
  • 이 책이 사실 출생과 관련해서 연관짓는게 좀 어색한 이유가, 애당초 김두한은 자기 출생을 증명할 이유가 없었다.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로 인정된게 1930년으로 인생의 대부분을 김좌진의 아들로 잘 살았고 당대에 그 누구도 그걸 의심하는 사람도없었다.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이 아니라는 음모론은 1990년 이후에나 나왔다. 즉, 회고록에 자기 출생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늘 하던대로 허세를 부린 것이라는게 더 합리적인 설명이다.


2.4. 김두한 회고록으로 출생의 비밀을 추적했던 여러 논의들 [편집]


어쨌거나 김두한의 회고록은 그의 출생을 증명해주거나, 글의 출생을 반박하기에는 증거가 될수없는 자료임에도 김두한 회고록 자서전을 근거로 뭐가 그럴듯한 주장을 하는 논의가 많았다. 그 회고록이 출생의 비밀을 보여주는 양 음모론이 퍼지는데 일조를했다. 이런 여러가지 논의를 소개한다.

가장 문제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의 모친에 대한 기록이다. 일단 김두한의 회고록에 기록된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김좌진이 아직 서울에 있을 때, 일본제국 경찰에게 쫓기는 일이 벌어졌다. 도피 중에 어느 집 담을 뛰어넘어 들어갔는데, 그 집은 옛 상궁 출신인 박 씨와 그의 딸 박계숙의 집이었다. 이후 박씨 모녀는 김좌진을 보살펴 주었고, 박계숙은 김좌진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 아이가 바로 김두한이었다.
간단히 말해 이 이야기는 미화, 과장되었다. 문제는 각종 소설이나 드라마 등에서 이 일화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훗날 김두한의 출생 관련 의혹을 확대 재생산하는데 단단히 일조를 했다. 무엇보다도 김좌진의 사망 이후 보도된 내용과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당시 신문 보도 내용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성립된다.

1930년 1월, 김좌진이 암살당한 사건은 세간의 큰 화제가 되었다. 당연히 국내언론도 중요한 뉴스로 취급하였으며,[9] 자연스럽게 국내에 남아있는 유족의 동정에 대해서도 관심이 집중되었다.

"김좌진의 가족은 현재 길림성 모처에 있으며 칠십 노모와 아내, 그리고 아우인 김동진 씨이다. 다만, 서울 시외 모처에 김좌진의 서자[10] 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11]

곧이어 조선일보 개성특파원 최문우가 김두한의 거처가 서울 시외가 아닌 개성이라는 것을 알아냈으며, 취재를 했다. 이 결과가 1930년 3월 17일부터 2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했다. 이 기사에는 김두한의 어머니 김계월과 김두한의 어린 시절 사진이 실렸다.

“김좌진의 애첩이었던 김계월(26)의 몸에서 출생한 김두한(12)이란 아들에 대한 다른 소식들은 모두 잘못 전해진 것으로, 그들은 현재 개성에 있다. 김두한은 현재 개성 서본정(西本町) 254번지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머물고 있다.” (중략)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두한은 아침밥을 먹고 나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으며, 그의 외할머니만 병들어 누워있었다." 『조선일보』1930년 3월 17일자)

나머지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김계월의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김상회라는 사람으로 명문 집안이었으나 구한말에 몰락했다. 결국 집안이 파산하여 김계월은 15세 때(1916년) 서울의 다동권번(茶洞券番)이라는 기생집에 팔려 가게 되었다. 이 무렵 김좌진은 서울에 있었으므로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은 이후 3년 동안 동거했으나, 김좌진은 1918년에 김계월을 서울에 남기고 만주로 떠났다. 그리고 이 때 김계월은 태중에 김두한을 가진 상태였다.

한편, 김두한은 회고록에서 “어머니 말에 따르면, 아버지가 떠나면서 아들을 나으면 두한이, 딸을 낳으면 두옥이로 이름을 정하라 하셨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그렇다 치고, 김두한이 말한 자기 어머니 성씨가 실제와 다르다.

여기에 또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은, 김두한이 당시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해 증언한 내용. 김두한은 회고록에서는 이후 어머니와 할머니가 자신이 7살 되던 해에 “예비검속됐다”거나 “투옥됐다”고 증언할 뿐 그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고, 보다 나중의 육성증언인 '노변야화'에서 “8살 때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그런데 『조선일보』 기자 최문우가 개성으로 찾아갔을 때엔, 분명히 "12살 김두한이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라고 했으니 일차적인 모순이 발생.

위의 두 의문점은 결국 어떤 기회주의자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임을 사칭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생산해낸다. 사실 모든 의혹은 이 주장으로 모이긴 한다.

그런데 월간 말의 기사는 위의 모순점들이 다음과 같이 해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래 내용은 월간 말에 인용되어 실렸던 것을 약간 편집한 것이다.

남편을 홀로 떠나보낸 김계월은 살아갈 방도가 막막했다. 그래서 결국 노모와 아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 김좌진을 찾아갔다. 따라서 김두한이 자신이 6살 때 만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은 실제 있었던 일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너무 어렸을 때 일이라 잘못 기억하여 연도가 틀리게 되었고, 그 때문에 이후의 사실까지도 연도가 죄다 실제와 다르게 된 것이다.
어쨌든 김계월은 노모의 건강이 악화되고, 김좌진으로서도 김계월 일가를 보살피기에 벅찼기 때문에 다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가 대략 1926년 즈음. 고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서울의 인사동에 거처를 정하였으나 역시 살아갈 길이 막막. 김계월은 다시 기생으로 일하려고 했으나 어쨌든 안동 김씨 가문의 첩으로서 올바른 처신이 아니라는 주위의 만류로 실천에 옮길 수도 없어 그저 친지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연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결국 연고가 없어 알아볼 사람이 적은 개성으로 옮겨 기생 일을 다시 시작한 것. 그런데 개성에서의 기생생활도 만만치는 않았기에 결국 여기서도 버티지 못하고 다른 기생 2명과 함께 함흥으로 떠나버렸다. 이때 어린 김두한은 외조모 아래 개성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 김계월은 이후 다시 더 북쪽의 홍원으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결국 최문우 기자가 찾아갔을 때, 김계월은 행방이 묘연하고 김두한과 외조모 둘만이 남아있었다.

어린 시절 집을 나간 기생 첩 출신 어머니, 그리고 처자식을 내팽개치고 이국에서 독립운동 중인, 얼굴도 모르는 위대한 아버지. 이런 사실에 대해 김두한이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는... 당연히 어리고 배운 것도 없는 김두한이 기초적인 사실을 근거로 그럴싸한 이야기들을 잔뜩 집어넣어 스스로를 높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김두한의 관련 증언들이 애매하고 사실관계가 다소 어긋나 있는 사실들은 모두 해명이 가능하며, 그가 왜 그런 식으로 꾸며내었는지 또한 설명이 된다.

또한, 김두한의 자서전에 어머니 성씨가 엉뚱하게 기재된 것은 어머니가 일찌감치 집을 나가 버린 탓에 어린 김두한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또, 그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과정 중에 대필작가가 대충 기재한 내용일 가능성도 있다. 김두한 본인은 어느 정도 글자를 쓰고 읽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그의 구술에 의존해서 대필되었을 것이며, 사후 검토나 퇴고 또한 이뤄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사실 이런 논의가 필요없는것이 김두한의 회고록은 김두한이 라디오 생방송에서 기억에 의존해서 떠벌린 내용은 문자화 한것이다. 김두한은 글을 읽을줄 몰랐던 사람이기에 뭐 자세한 자료를 가지고 바탕으로 주장한것도 아니었다.

여기에 더하여 몇 가지 의혹들이 더 있다.

  • 우리 김좌진 장군님이 기생 따위와...
    •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다.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어느 정도 능력 있는 남자들 중에 본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를 두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 김두한이 김옥균김좌진의 양아버지라고 말한 것. 그러나 김좌진은 1889년 생인데, 김옥균은 188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귀국하지 못했으므로 사실이 아니다.
    • 김두한의 흔하디 흔한 허풍, 허세. 본인과 아버지인 김좌진을 더욱 돋보이게끔 같은 가문인 김옥균을 끌어들여 거들먹거린 듯하다.

  • 김두한은 형평운동 중에 김좌진과 인연을 맺은 원노인 밑에서 컸다고 주장하는데, 김좌진과 형평운동의 관계는 밝혀진 바가 없으며 시간적으로도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 김두한의 흔하디 흔한 허풍, 허세 x 2. 원노인이라는 사람이 존재하긴 존재하였는데, 억지로 김좌진과 연결시키기 위해 형평운동 이야기를 꾸며냈을 가능성은 있다.

  • 그 외 김계월의 나이가 잘못되었다거나, 연도가 살짝 맞지 않는다거나, 김계월의 아버지라는 '김상희'라는 인물이 조선말 참판을 지낸 기록이 없다는 지적
    •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신문 기사에서 연도나 나이에서 약간의 오류가 발생하는 것 정도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김계월의 어머니이자 김두한의 외조모로 배움이 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는 민간에서는 음력으로 생일을 따지고, 공식 기록이나 신문 등에서는 양력으로 따지던 시대이니 혼동이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사소한 오류점을 제외하면 정황 자체는 그럴싸하다. 참판 기록이 없다는 문제는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데, 조상 중 누구가 참판을 지냈다는 핑계로 참판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

  • 김두한이 해방 이후인 1945년에서야 김좌진과 이혼했던 옛 본처 오숙근[13]의 아들로되어 본처 호적에 오를 수 있었다는 주장.
    • 이미 1930년부터 김두한의 이름이 신문지상에 등장했다. 오히려 오숙근이 해방이 되고서 뒤늦게 자신과 김좌진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김두한의 존재를 이용했다는 것이 더 개연성 있는 이야기이다.[12]

  • 김좌진의 사망 보도 기사에는 양자인 김문한이 언급될 뿐이며, 김두한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 등장한다.
    • 김문한은 김좌진의 조카뻘 되는 사람으로 김좌진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후에 장례 문제로 급하게 양자가 되었을 뿐 이 문제와 관련이 없다. 이후 김문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했는데, 이 이야기는 아래에 적혀있다.

  • 총독부에서 고의적으로 김좌진의 명예를 폄훼하기 위해 김두한이라는 사생아를 만들어냈다는 주장. 거기에 더해서 독립운동가의 아들이 깡패라는 식으로 폄하한것이다.라는 주장
    • 애초에 그 시대를 고려하면 양반가문에서 기생첩을 두거나 그 사이에 아들을 두는것이 전혀 명예가 폄하되는 시대가 아니다. 게다가 일부러 김두한이란 김좌진 아들을 창조하고, 여러 언론을 매수해서 김두한 이야기를 기사를 쓰게하고, 안동김씨 족보에 올리고, 일제 말기에는 김좌진 아들이라고 일제순사가 감시대상에 올리고 하는 정도의 조작에 드는 노력에 비하면, 기생첩에 낳은 자식이 있다는것의 명예훼손 정도가 너무낮다. 게다가 어린 김두한이가 나중에 커서 깡패가 될지, 뭐가 될지는 미리 예측할수가 없으니 독립운동가에 깡패자식으로 명예훼손 드립은 애초에 말이 안된다.
    • 이런 행위를 한 것은 매일신보로, 최초 보도한 것 역시 매일신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1925년 그 어머니 김계월이 어린 김두한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가 김좌진을 만난 것을 기사화한 것이다.(매일신보 1925년 9월 15일 「金佐鎭과 金桂月 八年만에 異域에 邂逅 오래동안 서로 그리우든 정랑정부가 서로 맛낫다」) 김두한의 회고와 비교하면 이 기사가 조작이 아니라 도리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 상봉 이야기는 유학자 송상도가 쓴 기려수필에도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보듯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다른 신문에서도 보도되었는데, 이 당시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을 친일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리고 당시 김두한의 나이는 불과 12세로 총독부의 연극에 동참할 수 있을 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또한 김두한과 그의 외조모는 당시에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불우한 생활을 했는데, 총독부의 연극에 동참했다면 왜 아무런 대가를 얻지 못한 것인지?

  • 굳이 총독부가 아니더라도 김두한의 외조모 혹은 기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다.
    • 뭐하러? 이 시점에 김좌진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이국에서 사망한 불순한 독립운동가였다. 대체 그와 관계있다고 주장해서 얻을 게 무엇이겠는가?

  • 김좌진과 김두한은 전혀 닮지 않았다.
    • 닮았는지 안 닮았는지는 개인의 주관으로 닮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설령 닮지 않았다고 해도 친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되지는 못한다.


2.5. 김을동을 비롯한, 김두한의 후손이 친일파를 옹호했다?[편집]


사실 이런 논란이 객관적이거나 근거가 있다라기보다는 감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이것인데, 김을동이 정치계에 투신함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된 것이다. 김을동의 아들인 송일국이 연예인이 되고, 그의 아들들 또한 인기를 끌고 2019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14] 김두한이 심지어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였다고 하기도 한다. 기사

그러나 이것 역시 과대포장인 것이, 김두한의 후손이 한 두명이 아니다. 김두한이든 누구든 자손이 많으면, 후손 간에 정치 성향이 다를 수 있다. 김좌진 장군의 손자·손녀, 역사교과서 놓고 좌우로 갈려[15] 김을동씨가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등의 정치인으로 활약했다면, 김두한의 아들이며 김을동의 이복동생인 김경민씨는 새누리당 반대쪽에서 활약하고 있다. 자손이 많다보면 각기 정치적 색깔이 다를 수 있으므로 비판할 대목이 있다면 그 개인들에게 하면 된다.


3. 그 외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증거들[편집]


그 외에도 1942년에 경성 종로경찰서에서 작성해 경성지방법원에 보낸 문서(京鍾警高秘 제1721호)에도 김좌진을 김두한의 아버지로 쓰고 있고, 중외일보 1930년 5월 20일 기사에는 "수일전 계동(桂洞) 김병목(金炳穆)씨 집에서 고 김좌진(金佐鎭)씨 유고 두한(斗漢)소년의 장래교육을 위하야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모여 회의를 열었다더라" 운운하여 어린 시절부터 문중 차원에서도 김좌진아들이란 걸 인정하고 있다. 더욱이 일본제국 경찰의 내부문서에서도, 김두한을 김좌진의 아들로 기록해놓고 감시하는 상황이었다. 더 이상의 논란은 무의미하다.

해방 이후 김두한이 안동김씨 김좌진 장군의 호적에 정식으로 올라갔으며, 김좌진 장군 밑에서 같이 독립군 활동을 하던 지청천, 이범석 장군이 김두한을 김좌진 장군의 아들로 말하면서 구명운동을 했다. 김구 선생도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 군이라 지칭하면서 걱정해주었다. 김구 선생도 거물이지만, 이범석조선민족청년단을 이끌던 우익폭력계의 거물이고 이승만의 바로 아래급 거물이다. 일각에서는 김두한이 폭력으로 김좌진 문중을 위협해서 호적을 얻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실제로는 과거 김좌진의 측근들이 김두한보다 더 거물이었으므로 함부로 굴 수가 없었다.

그 외에 백범 김구 같은 독립운동가의 글에서도 보인다.(1948년 '조국 흥망의 관두(關頭)에 임하여 남하한 이북 동포에게 기(奇)함')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김두한이 사망한 1970년대 이후

  • 1986년 나혜국 여사[16]의 언론 인터뷰 : (제3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오자) "김좌진의 아들은 김두한과 김철한 뿐이다."
  • 1990년 MBC에서 방송한 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에서는 김두한의 아들 김경민이 나혜국과 김철한을 찾아가 인사하며 서로 반가워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만약 가짜라면 김두한 아들이 갑자기 집에 찾아왔는데 그렇게 오래된 가족처럼 맞을 수가 없다. 이 분들이 전문 연기자도 아니고. 나혜국 - 김철한 쪽에서는 확실히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임을 인정한다.


4. 김좌진의 또 다른 유족 문제[편집]


한편 1989년, 김좌진의 딸이라 주장하는 새로운 인물이 갑툭튀하면서, 위의 가짜설과 엮여 논란이 심화되었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 사실만을 간추리고 내용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 1988년,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김좌진의 유족으로 김강석 혹은 금(金)강석이라는 60세 중국 국적 여성이 김좌진의 딸임을 주장하여, 이 사실이 1989년 기사화되었다.[17]
- 1988년 당시는 냉전이 막 끝난 상황으로 중국, 러시아 등지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가의 유족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한 시점이므로 김좌진의 혈통임을 주장하는 사람이 새롭게 등장한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 그런데 저 위의 링크된 기사 내용으로만 보아도 의문스러운 점이 상당하다. 김좌진의 내연관계였다는 이 여인의 어머니는 일찌감치 사망한 상태이며, 김좌진의 부했다는 양아버지 역시 사망한 상태. 게다가 이 여인은 문화대혁명 당시 이름을 바꾼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본인 신분에 뭔가 애매한 점이 있다는 뜻이다.[18] 또한, 본인이 직접 국가보훈처에 먼저 연락을 취한 것도 따지고 보면 마뜩치 않은 부분. 하지만, 가장 큰 문제점이며 실제 이후로도 문제가 된 것은,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 또한, 기존에 알려진 김좌진 암살 내용과 다른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 이후 소식은 알 수 없고, 1999년 중국에서 열린 김좌진 자택 복원 기념회에 한국의 유족들과 함께 참석한 것이 기사화되었다.
- 위의 링크를 보면 알겠지만, 이 기사에서도 '장군의 딸로 알려진'이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넌지시 돌려 말하고 있다.

  • 이후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2005년, 김강석의 딸이자 김좌진의 외손녀라 주장하는 위연홍이라는 여성이 한국에 들어온 것이 기사로 간단하게 소개되었다.





참고로, 김좌진과의 관계를 주장한 사람은 김강석 이전에도 존재했다. 김좌진의 양자 김문한의 아들이라는 주장 기사에 따르면, 신뢰하기도 적고 사실이라 해도 김문한 자체는 일시적으로 장례 문제로 양자 취급한 조카이므로, 유족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김을동도 말했듯이 바로 유전자 검사뿐이다. 그런데 김강석 쪽과 김두한 쪽을 비교대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관련성이 없다고 나오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가짜라고 주장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 따라서 제3의 유족이자 호적상으로나 기록상으로나 명백한 김좌진의 유족인 김두한의 남동생 김철한 쪽 유전자와의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자신이 먼저 유전자 검사를 제의했고, 위연홍은 잠적해 버렸다는 김을동의 주장에 대해, 김철한 쪽에서는 아무런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즉, 사실상 김을동의 주장을 수긍한 셈.

그러나 사실 김철한의 어머니이자 만주에서 김좌진과 혼인 이후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나혜국 여사가 이미 1986년 신문 인터뷰에서 김좌진의 아들은 김두한과 김철한 뿐이라고 단정해서 말한 것을 고려할 때, 김철한이라고 생각이 달랐겠는가.

그리고 MBC에서 1990년에 방송한 다큐멘터리 <백야 김좌진>에서는 김두한의 아들 김경민이 나혜국과 김철한을 찾아가 인사하며 서로 반가워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만약 가짜라면 김두한 아들이 갑자기 집에 찾아왔는데 그렇게 오래 된 가족처럼 맞을 수가 없다. 이 분들이 전문 연기자도 아니고. 나혜국 - 김철한 쪽에서는 확실히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임을 인정한다.

김두한은 김좌진 가문을 매수 혹은 협박했다는 주장이 있다. 김두한이 1970년대 말년에 병고에 시달릴때 의지할데도없이 쓸쓸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하물려 김두한이 죽은뒤 10년도 훨씬 지난 80년대말이나 1990년대초까지도 김두한을 무서워한다는게 말이될까? 게다가 김두한 패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잔악했던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고 그 후손이다. 특히 나혜국 여사는 일제강점기 김좌진 장군과 함께 중국에서 독립운동했고, 김좌진 장군 사망 이후 일제치하 조선에 귀국한후 일제에 엄청나게 고초를 치렀다. 해방 이후 김두한이 김좌진 가문을 협박했다는 주장도 엉터리이다. 김좌진의 독립운동 동지가 해방 이후 거물인 이범석이며 나혜국 여사와도 독립운동 동지이다. 이범석은 해방 이후 김구와 함께 김두한 사형구형당시 구명운동을 한 인물이다. 김두한은 정치폭력배로 유명하지만, 김구는 말할 것도 없고 이범석은 해방 이전 한국광복군의 참모장이었으며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즉,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란 칭호를 얻으려고 협박을 할만한 상대들이 아니다. 게다가 백번양보해서 가령 김두한이 김좌진 유족들을 협박한게 맞다고 치더라도 자신들을 협박한 상대가 이미 죽었는데 이미 죽은 상대를 계속 두려워한다는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일이다.

여러 정황상 위연홍이 오히려 의문점이 더 많다.

  • 김좌진 장군의 후손에 김을동만 있는게 아니다. 김좌진 장군의 자식에는 김두한도 있으며, 첫째 정실 부인의 자녀 그리고 세째부인 나혜국 여사의 자녀인 김철한 쪽 후손도 있다. 즉, 위연홍이 만약 유전자 검사를 원했다면 왜 굳이 김을동만을 고집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결국 언론플레이를 위해서 유명인사인 김을동을 지목한게 아닐까 싶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 위연홍은 2005년 한국에 온 이후, 2006년세계일보 기자가 기사를 내면서 많은 후원을 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김좌진 후손으로 인정받지 못한 판결이 난 것이 2008년 3월인데, 김을동의 국회의원 초선 당선이 2008년 5월이다.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것처럼 김을동이 국회의원으로서 압력을 행사할 수 없는 시기다.
  • 세계일보가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기사를 내면서 도움을 주었고, 김좌진 장군의 고향인 충남 홍성군과 홍성군 의회 지역유지들도 후원회를 결성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안동김씨 문중과 연결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정 김좌진 장군의 후손이란 근거가 빈약했다면, 그 많은 자손 중에 한 명과 유전자 검사를 하면 된다. 근데 굳이 김을동이 안 만나줘서 유전자 검사를 못 한다며 김을동 탓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 그리고 위연홍이 실제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한국에 왔다면 굳이 김을동이 위연홍을 방해할 이유도 없다. 위연홍이 김좌진 장군의 외손녀라고 인정받는다고 한들 도대체 김을동이 손해보는게 무엇이란 말인가. 김을동이 아무리 권력이 있다 해도 그걸 이용해서 위연홍을 몰아낼 이유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서 언급한 MBC 다큐 <백야 김좌진>에서 김경민이 김을동에게 김강석 - 위연홍 이야기를 하고 김을동은 고모(김강석)가 살아계실 때 한 번 모셔서 서울구경도 시켜드리고 족보도 보여드렸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미 방송에 나와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회피하고 속인다면 오히려 김을동에게 독이 되면 됐지 득 될 것이 전혀 없다.


4.1. 유전자 검사 제의는 김을동이 김좌진 친손녀 맞다는 의미[편집]


위연홍이 "김을동이 유전자 검사를 회피한다" 주장을 한것이 사실인데.. 이걸 가지고 위연홍이 "김을동이 김좌진의 친손녀가 아니다"라고 확대해석한 것은 음모론자들의 거짓말이다.

위연홍이 유전자 검사 이야기를 내놓은 이유가 "내가 김좌진의 친손녀라고 인정받고 싶은데, 그럴려면 김두한 친손녀인 김을동과의 유전자 검사가 필요한데, 김을동이 유전자 검사를 안해줘서 내가 인정못받고 있다. 억울하다"는 주장을 했다.

즉, 애초에 김을동이 김좌진 친손녀라는건 기정사실로 생각하고 그런 발언한것이지, 김을동이 김좌진 친손녀가 아니라는 음모론이 퍼질 것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사실 중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온 위연홍이 김을동이 김좌진 친손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음모론자들의 교묘한 팩트 비틀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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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좌진의 두 부인과 김을동이 어렸을때 찍은 사진도 있다.[2] 특히 이범석의 경우 우익폭력 관련 거물이고 이승만 정부의 초대 국방부장관을 한 거물이며, 김두한의 우익폭력배 활동 당시 상관으로 볼수있다. 즉, 김두한이 무서워 거짓말을 할 위치가 아니다.[3] 고구려 2대왕 유리왕의 일화에도 동명성왕의 자식이라는 증표를 가지고 오자 자식으로 인정받는다.[4] 김두한의 회고록을 보면, 김두한이 어릴 때 모친과 함께 중국으로 가서 김좌진을 만났다고 하고 당시 중국에서 김좌진은 모친과 아내 오숙근 등과 함께 살았기에 김두한을 중국에서 만났다면 오숙근 등도 김두한이 김좌진 친자임을 아는것이 당연하다.[5] 김두한의 회고록 관련 내용은 아래에 자세히 다룬다[6] "김좌진의 아들은 김두한 김철한 둘밖에 없다"고 하신 인터뷰 [7] 라디오 진행자였던 권오기는 이런 소감을 남겼다. "머리로는 ‘저게 거짓말이다’ 싶은데도 믿게 되고. 적어도 ‘본인은 그걸 진실이라고 믿고 있구나’ 싶으니까요. 왜 여러 번 얘기하다 보면 본인 스스로도 과장됐거나 사실과 다르다는 걸 잊고 진짜라고 믿게 되잖아요. 그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어요.”[8] 아동심리학에 따르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부모의 죽음에 대해서 연도 정도는 정확히 기억한다고 하며, 더군다나 아버지가 그 유명한 김좌진 장군인데 50살이 되도록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게 더 문제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 주장은 정상적인 가정의 부자 관계에나 해당되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실제로 자기 나이 혹은 연도를 기억하는것 자체가 안정된 가정이 없으면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보통 어릴 때 학교에 진학하면 학년이 올라가기에 그나마 연도를 민감하게 알 수 있지만, 성장기에 거리에서 살면서 자란 경우 일단 스스로 얻어 먹고 사는 것 자체를 신경쓰느라 올해가 몇 년도인지 자기 나이가 몇인지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거리에서 자라다가 음악가가 된 최성봉의 경우나, 홈리스 인터뷰를 보면, 거리에서 살때는 올해가 몇년인지 나이가 몇인지 조차도 잘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심지어 성인이어도 마찬가지인데 하물며 어린나이에 거리에서 살았으면 당시의 연도를 상세하게 기억하는게 오히려 이상할것이다. 최성봉 인터뷰. 게다가 김두한은 서자이기까지했으니 더욱...[9] 단지, 일제에 대한 쉴드로 '흉적 김좌진 죽다'는 식의 타이틀을 붙이곤 했다. 물론 내용은 대체적으로 중립을 가장한 친 김좌진.[10] 이 서자가 김두한이지만 동아일보에서는 그 서자의 행적까지 추적하지는 못했다.[11] 이 기사 내용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기사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 일단 월간 말지에 해당 내용을 작성한 사람이 신문 이름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12] 다만 김두한이 김좌진의 친자라 할지라도 기생과 관계하여 낳은 서자임은 어쩔 수 없다. 지금이야 그런 유교적 종법질서가 거의 퇴색했지만, 당시로써는 제법 큰 문제였을 것이다. 본처의 호적에 오르는 것은 그런 정통성 문제를 해결해 준다. 실제로 서자 출신의 왕들 역시 명목상으로는 본처 호적에 오름으로 하여 정통성 문제를 땜방했으며, 원소(삼국지) 역시 의붓어머니의 삼년상을 했으니 이 역시 같은 맥락이다. 당연히 오숙근이 얻는 것 역시 명백히 있었는데, 김두한은 서자가 아닌 적자로써의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의붓어머니인 오숙근에게 이런저런 지원을 해줘야 했을 것이며, 국가유공자의 가족이라고 해서 지원 그런거 없었을 가난한 시대였으니 돈과 힘, 그리고 자신에게 잘해줄 이유를 가진 의붓아들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굳이 말할 것도 없으리라.[13] 오씨부인[14] 한 기자의 쉴드 이 기자 역시 김두한에게 불리할 수 밖에 없는 반도의용정신대 문제나 해방 직후의 행적들에 대해선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참고로, 위연홍의 주장을 그대로 기사화해서 김두한 가짜 아들설에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이 기자가 소속한 세계일보이다.[15] 김좌진 장군의 손자 김경민씨가 참여해 주목을 받았다. 김씨는 “지금 시대가 나라를 빼앗겼을 때와 같다”며 “일본이 역사왜곡을 하는 것만으로도 통탄한 일인데, 우리나라가 스스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정부를 비판했다. 이렇게 김경민씨가 역사교과서가 국정화되면 친일을 미화할 것이라는 야당의 주자에 동조하고 있지만, 김좌진 장군의 손녀 새누리당 김을동 최고위원은 당내 ‘역사교과서 개선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정화에 앞장서고 있다. 김 최고위원은 지난 22일 “아직 형체도 없는 교과서를 친일 교과서라고 낙인 찍는 것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 기형아가 될 것이라는 저주를 퍼붓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역사교과서 문제를 놓고 남매가 반대편으로 갈린 셈이다. 김경민씨는 김을동 최고위원의 이복동생이다.[16] 김좌진의 두번째 아들 김철한의 어머니이자 만주에서 김좌진과 혼인 이후 독립운동을 같이했던 부인.[17] 이 기사에 언급된 이문창이라는 역사가는 한국 최후의 아나키스트로 불리는 사람이다. 더 쉽게 말하면, 김두한과는 정치적 입장이 완전히 반대라는 것. 단, 김좌진은 무정부주의 성향이 있었으므로, 이 사람이 김좌진의 만주 행적을 연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18] 단, 문화대혁명 당시 민족주의자 성향의 조선족이 탄압받은 것은 사실이다.